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독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교회 목사님이었고, 모두들 어린 프리츠도 커서 목사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성경 구절을 어찌나 진지하게 잘 외웠는지, 친구들은 그를 ‘꼬마 목사님’이라고 불렀대요.
니체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같은 옛날 언어를 아주 잘했어요. 겨우 스물네 살 때 스위스 바젤에 있는 대학교가 그를 교수로 모셔 갔어요. 아직 학생 티도 안 벗었는데 선생님들의 선생님이 된 셈이에요!
그런데 니체는 자주 아팠어요. 머리가 지독하게 아팠고, 책을 읽으면 눈이 아팠고, 배도 약했어요. 결국 10년 만에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어야 했지요. 그 뒤 10년 동안 맑은 공기와 햇볕을 찾아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를 떠돌면서 책을 한 권 또 한 권 썼어요.
니체의 책은 크고 불편한 질문을 던져요. 왜 우리는 어떤 것은 착하고 어떤 것은 나쁘다고 생각할까? 그런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누가 정했을까? 니체는 자기가 망치를 들고 오래된 생각들을 톡톡 두드려 보면서 속이 텅 빈 소리가 나는 것을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1889년, 마흔네 살 때 니체의 정신이 갑자기 무너져서 더는 글을 쓰지도, 혼자 생활하지도 못하게 되었어요. 그 뒤로 11년을 더 살며 어머니와 여동생의 보살핌을 받았어요. 그의 책이 온 세상에 유명해진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답니다.
한눈에 보기
- 생몰
- 1844년 10월 15일(프로이센 작센주 뢰켄) ~ 1900년 8월 25일(바이마르)
- 국적
- 프로이센 출생. 1869년 바젤로 옮기며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해 평생 법적으로 무국적자였음
- 경력
- 1869~1879년 바젤 대학교 고전문헌학 교수. 이후 주로 스위스·이탈리아·남프랑스에 머문 독립 저술가
- 저술 활동
- 1872년 『비극의 탄생』부터 1889년 1월 토리노에서 정신이 무너질 때까지
- 주요 저작
- 『비극의 탄생』,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즐거운 학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
- 핵심 개념
- 신의 죽음, 허무주의, 모든 가치의 재평가,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권력의지, 영원회귀, 위버멘슈(초인), 관점주의
- 언어
- 독일어. 짧고 날카로운 잠언(아포리즘)을 즐겨 쓴 문학적 문체
쉬움
니체는 누구인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는 독일어로 글을 쓴 철학자이자 고대 그리스·라틴 문학을 전공한 고전문헌학자로, 근대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또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온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도덕, 종교, 예술, 과학, 심리, 그리고 인간 삶의 의미에 관해 썼습니다.
그의 핵심 고민은 간단히 말할 수 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유럽 사람들 대부분은 선과 악에 대한 생각, 그리고 삶에 목적이 있다는 감각을 기독교 신앙 위에 세워 왔습니다. 니체는 교육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심지어 여전히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신앙이 힘을 잃어 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지은 것들은 어떻게 될까? 그는 아무것도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되는 위기, 곧 허무주의를 두려워했습니다.
니체는 옛 믿음으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이 위기에 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가치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해하고, 고통까지 포함한 삶 전체에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평가 방식을 상상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책에는 격렬한 비판과 대담한 희망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니체는 활동하던 동안에는 널리 읽히지 않았습니다. 후기 저작 대부분은 몇백 부밖에 팔리지 않았고, 몇몇은 자기 돈을 들여 찍었습니다. 그가 병들어 더는 글을 쓸 수 없게 된 1890년대에 들어서야 명성이 폭발했고, 그 뒤로 그는 끊임없이 읽히고, 칭송받고, 오용되고,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쉬움
어린 시절: 목사의 아들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프로이센 작센주의 라이프치히 근처 마을 뢰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는 루터교 목사였고, 할아버지 두 분도 모두 성직자였습니다. 프리드리히가 네 살 때 아버지가 뇌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곧이어 남동생도 죽었습니다. 어머니 프란치스카, 여동생 엘리자베트, 할머니, 두 고모로 이루어진 가족은 나움부르크로 이사했습니다.
1858년 그는 독일에서 가장 엄격하고 이름난 기숙학교 가운데 하나인 슐포르타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철저히 훈련받았고, 시를 쓰고 작곡도 했습니다. 훗날 그는 이 규율이 자신의 작업 방식 전체를 만들었다고 느꼈습니다.
1864년 본 대학교에 들어가 신학과 고전문헌학(고대 그리스·라틴 텍스트를 연구하는 학문)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곧 신학을 그만두었고, 그와 함께 기독교 신앙도 점차 떠났습니다. 스승 프리드리히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옮겨 리츨이 가장 아끼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라이프치히에서의 두 만남이 그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1865년 헌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견하고, 모든 것 뒤에 눈먼 채 몸부림치는 의지가 있다는 어두운 세계관에 압도되었습니다. 1868년에는 쇼펜하우어를 똑같이 사랑하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를 만났습니다. 몇 년 동안 바그너는 그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쉬움
바젤의 젊은 교수
1869년 초, 리츨의 열렬한 추천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교는 니체를 고전문헌학 교수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스물네 살이었고 아직 박사 학위도 마치지 않은 상태였는데, 라이프치히 대학교가 그동안 발표한 논문을 근거로 서둘러 학위를 주었습니다. 바젤로 옮기기 전에 그는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했고, 평생 법적으로 무국적자로 남았습니다.
바젤에서 그는 대학과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학을 가르쳤습니다. 동료 가운데에는 르네상스 연구로 유명한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있었고, 신학자 프란츠 오버베크와는 평생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또 루체른 근처 트립셴에 있던 바그너와 그의 동반자(뒤에 아내가 된) 코지마의 집을 자주 찾아갔습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그는 의무병으로 자원했습니다. 부상병을 돌보다가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렸고, 원래 약하던 건강은 그 뒤로 더욱 나빠졌습니다.
첫 책 『음악 정신에서 비롯된 비극의 탄생』은 1872년 초에 나왔습니다. 이 책은 평범한 학술서가 아니었고, 다음 절에서 보듯 열렬한 지지자와 격렬한 비판자를 함께 불러왔습니다.
중급
『비극의 탄생』과 바그너와의 결별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 비극이 두 예술적 힘의 긴장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했습니다. 니체는 이 두 힘에 신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아폴론적인 것은 뚜렷한 형식, 꿈같은 형상, 절도, 개체성을 뜻합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포도주와 도취의 신 디오니소스에서 온 말)은 도취, 음악, 그리고 개인이 더 큰 삶의 흐름 속으로 녹아드는 경험을 뜻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비극은 존재의 끔찍한 진실을 예술로 견딜 만하게 만들어, 그리스인들이 절망하지 않고 그것을 마주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이성에 대한 확신이 이 비극적 문화를 죽였으며, 바그너의 악극이 근대 독일에서 그것을 되살릴 수 있으리라고 보았습니다.
전문 고전학자들은 감명받지 않았습니다. 젊은 학자 울리히 폰 빌라모비츠-묄렌도르프는 이 책에 증거가 없다고 조롱하는 신랄한 소책자를 냈습니다. 문헌학자로서 니체의 명성은 다시 회복되지 못했고, 학생들은 그의 강의를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1873~1876년 그는 네 편의 긴 논고 『반시대적 고찰』을 발표해 새로 세워진 독일 제국의 자기만족적인 문화를 공격하고,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교육자로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1876년 제1회 바이로이트 축제에 참석한 그는 바그너의 민족주의, 과시적인 연출, 기독교적 주제로의 선회에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그 뒤 2년 사이에 무너졌습니다.
냉정하고 과학적인 어조로 쓴 잠언 모음이자 볼테르를 기리며 바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은 이 결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제 니체는 도덕, 종교, 예술을 심리학과 역사로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의 산물로 살펴보았습니다. 1879년 병 때문에 바젤 교수직을 사임해야 했고, 대학은 그에게 적은 연금을 주었습니다.
중급
방랑의 시절(1879~1888)
그 뒤 10년 동안 니체는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소박한 방을 빌려 지내며 편두통과 눈의 통증, 위장병을 덜어 줄 기후를 찾아 계절마다 옮겨 다녔습니다. 여름은 스위스 엥가딘 지방의 알프스 마을 실스마리아에서, 겨울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해안 도시 제노바, 라팔로, 니스에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토리노에서 보냈습니다. 때로는 거의 앞을 보지 못해 친구들, 특히 그가 ‘페터 가스트’라는 별명으로 부른 작곡가 하인리히 쾨젤리츠에게 원고 정서를 맡겼습니다.
이때가 가장 왕성하게 쓴 시기였습니다. 『아침놀』(1881)과 『즐거운 학문』(1882)에 이어, 예언자 같은 인물이 산에서 내려와 인류를 가르치는 시적인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가 나왔습니다. 이어 『선악의 저편』(1886)과 『도덕의 계보』(1887)가 나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일한 해인 1888년에는 놀라운 속도로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니체 대 바그너』, 그리고 기이한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를 썼습니다.
사생활은 외로웠습니다. 1882년 그는 친구 파울 레를 통해 만난 러시아 출신의 총명한 젊은 여성 루 살로메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세 사람은 함께 살며 공부할 계획을 세웠지만, 질투와 여동생 엘리자베트의 간섭 속에 계획은 무너졌고 니체는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1885년 엘리자베트가 유명한 반유대주의 선동가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결혼하자 니체는 여동생과 크게 다투었습니다. 푀르스터는 뒤에 파라과이에 ‘누에바 헤르마니아’라는 독일인 정착촌을 세웠습니다. 니체는 편지와 책에서 반유대주의와 독일 민족주의에 대한 경멸을 거듭 드러냈는데, 이 사실은 그가 죽은 뒤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중급
“신은 죽었다”: 허무주의와 가치의 재평가
니체의 가장 유명한 문장은 『즐거운 학문』(1882)에 나옵니다. 125절에서 한 광인이 대낮에 등불을 들고 시장으로 뛰어들어 신을 찾는다고 외칩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를 비웃습니다. 광인은 “신은 죽었다 …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말하며, 사람들이 아직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지 못했다고 답합니다. 핵심은 신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과학적 주장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에 대한 믿음이 더는 유럽 문화의 살아 있는 중심이 아니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아직 그 결과를 마주하지 않았다는 문화적 진단입니다.
니체는 그 결과가 엄청나리라고 보았습니다. 근대 유럽인들은 연민, 평등, 자기 부정 같은 기독교의 도덕적 가치를 여전히 지니고 있지만, 그 가치들은 토대를 잃었습니다. 머지않아 사람들이 이를 알아차리면 모든 가치와 목적의 감각이 무너지는 허무주의가 올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 전통 자체에도 숨은 허무주의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삶의 참된 가치를 이 세상이 아니라 저세상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대답은 ‘모든 가치의 재평가(가치 전도)’라는 과제였습니다. 그는 선과 악을 단순히 뒤집으려 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가치에 대해 이렇게 묻고자 했습니다. 이 가치는 어떤 삶을 표현하는가? 이 가치는 인간을 더 강하고 풍요롭고 창조적으로 만드는가, 아니면 더 약하고 원한에 차게 만드는가? 그에게 가치는 우주 어딘가에 미리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드는 것이며, 삶에 무엇을 해 주는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중급
도덕은 어디서 왔는가: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도덕 관념에도 역사, 곧 족보 같은 ‘계보’가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 기본적인 가치 평가 방식을 대비했습니다. 고대 귀족 전사 사회와 연결한 ‘주인 도덕’에서 ‘좋음’은 고귀하고 강하고 당당하고 건강한 것을, ‘나쁨’은 그저 천하고 평범하고 약한 것을 뜻했습니다. 이 평가는 귀족들이 스스로를 긍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에 따르면 ‘노예 도덕’은 주인에게 맞서 싸울 수 없던 억눌린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났습니다. 니체가 곪아 가는 무력한 원한을 가리켜 쓴 프랑스어 ‘르상티망(ressentiment)’에서 그들은 옛 가치를 뒤집었습니다. 이제 강한 자는 ‘악하다’고 불리고, 약함과 겸손과 고통이 ‘선하다’고 찬양받았습니다. 니체는 이를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이라 부르며 특히 고대 유대교와 기독교에 연결했는데, 이 주장은 지금도 논쟁적이며 독자들에게 통찰로도, 모욕으로도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도덕의 계보』의 둘째, 셋째 논문은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의 기원을 추적합니다. 니체는 이를 고대의 채권자와 채무자 관계, 그리고 안으로 향한 공격 본능과 연결했습니다. 또 자기 부정을 가장 높은 삶의 형태로 여기는 끈질긴 생각, 곧 ‘금욕주의적 이상’을 다룹니다. 여기서 니체는 고상한 도덕적 이상 뒤에 어떤 숨은 욕구와 충동이 있는지 묻는 심리학자처럼 작업합니다.
니체는 사람들이 그저 주인 도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고, 인간을 더 깊고 성찰적인 존재로 만든 노예 도덕의 성취를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계보학이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까지가 심리학이며, 어디까지가 물려받은 가치의 구속을 느슨하게 하려는 도발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지금도 이견이 있습니다.
중급
권력의지, 영원회귀, 위버멘슈
권력의지. 니체는 살아 있는 것들을 움직이는 것은 주로 살아남으려는 욕구나 행복하려는 욕구가 아니라, 자라나고 저항을 이겨 내고 자기 힘을 발휘하려는 충동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권력의지’는 지배에서 예술 창작, 자기 극복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를 띨 수 있습니다. 그가 이것을 모든 실재에 관한 이론으로 의도했는지, 아니면 인간에 관한 심리학적 가설로 의도했는지는 니체 해석의 큰 논쟁거리입니다.
영원회귀.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독자에게 한 악마를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악마는 당신이 지금의 삶을 모든 고통과 기쁨까지 똑같이, 영원히 되풀이해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악마를 저주하겠는가, 아니면 이보다 더 신성한 소식은 없다고 하겠는가? 니체는 훗날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 생각이 1881년 8월 실스마리아 근처 호숫가를 걷다가 떠올랐다고 썼습니다. 이 생각은 하나의 시험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당신은 자기 삶을 다시 원할 만큼 완전히 긍정할 수 있는가? 그는 이런 태도를 ‘아모르 파티(운명애)’라고 불렀습니다.
위버멘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예언자 차라투스트라는 오늘날의 인간을 넘어서는 목표로 ‘위버멘슈’(흔히 ‘초인’으로 옮김)를 선포합니다. 옛 위안 없이도 스스로 가치를 만들고 삶을 긍정하는 존재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이상을 안전과 쾌락만 바라는 편안하고 옹졸한 ‘마지막 인간’과 대비합니다. 위버멘슈는 생물학적인 우월 인종이 아닙니다. 그런 읽기는 뒤에 생겨났으며 텍스트를 왜곡합니다.
관점주의. 니체는 또 ‘어디에도 서 있지 않은 시선’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앎은 어떤 관점에서 이루어지며 우리의 욕구와 충동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렇다고 그가 아무래도 좋다고 결론 내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 대상에 더 많은 관점을 동원할수록 이해가 더 온전해진다고 보았습니다.
중급
붕괴, 병, 그리고 여동생의 문서고
1889년 1월 3일 토리노에서 니체는 정신적으로 무너졌습니다. 거리에서 매 맞는 말을 끌어안고 쓰러졌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만, 이 일화는 나중에 기록된 것이라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 뒤 며칠 동안 그는 친구들에게 ‘디오니소스’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고 서명한 기이한 쪽지를 보냈습니다. 프란츠 오버베크가 토리노로 가서 그를 바젤로 데려왔습니다. 그는 예나의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1890년부터는 어머니가 나움부르크 집에서 그를 돌보았습니다.
그는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1897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남편의 자살 뒤 파라과이에서 돌아와 있던 여동생 엘리자베트가 그를 바이마르의 저택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1900년 8월 25일 그곳에서 쉰다섯 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의사들은 매독으로 인한 진행성 마비라고 진단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은 이 진단을 의심하며, 천천히 자라는 뇌종양, 뇌의 작은 혈관에 생기는 유전 질환, 치매의 한 형태 같은 다른 설명을 내놓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느 것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사이 엘리자베트는 오빠의 원고를 장악했습니다. 1894년 그녀는 니체 문서고(니체 아르히프)를 세웠고, 이 문서고는 바이마르로 옮겨졌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오빠 사상의 수호자로 내세웠습니다. 전기를 쓰고, 원고 열람을 통제했으며, 쾨젤리츠와 함께 미발표 노트를 모아 마치 니체가 계획한 대작인 것처럼 『권력에의 의지』(1901, 1906년 대폭 증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엘리자베트는 문서고를 독일 민족주의 쪽으로 이끌었고 뒤에는 나치 정권을 환영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문서고를 방문했고 1935년 그녀의 장례식에도 참석했습니다. 나치 선전가들은 니체의 반유대주의·독일 민족주의 비판은 무시한 채 입맛에 맞는 구절만 골라 인용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발터 카우프만 같은 학자들은 니체의 사상을 이런 유산에서 떼어 내려 애썼고, 카를 슐레히타는 엘리자베트가 오빠의 편지 일부를 고치고 심지어 위조했음을 밝혀냈습니다.
중급
세계로 퍼진 영향
1900년 무렵 니체는 유럽 전역에서 문화적 열풍이 되었습니다. 덴마크 비평가 게오르그 브란데스는 이미 1888년 코펜하겐에서 니체에 관해 강연했고, 곧 온갖 성향의 작가, 예술가, 정치 급진주의자들이 그를 자기편으로 내세웠습니다. 토마스 만과 헤르만 헤세 같은 소설가, 릴케 같은 시인, 사회학자 막스 베버, 정신분석가 지그문트 프로이트 모두 문화, 충동, 도덕의 숨은 동기에 관한 그의 생각과 씨름했습니다.
20세기에 그는 여러 철학 흐름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카를 야스퍼스와 알베르 카뮈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신의 죽음 이후의 의미라는 그의 주제를 이어받았습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여러 해 동안 니체를 강의했습니다. 1960~70년대 프랑스 철학자들, 곧 질 들뢰즈와 미셸 푸코 등은 그의 계보학적 방법으로 진리, 권력, 자아에 관한 통념을 문제 삼았습니다. 영미 철학에서도 오랜 무관심 끝에, 지금은 도덕 심리학자이자 도덕 비판가로서 널리 연구됩니다.
그의 영향은 동아시아에도 일찍 닿았습니다. 1900년 무렵 일본 지식인들이 그의 사상을 두고 논쟁했고, 중국에서는 작가 루쉰이 니체를 높이 평가하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문을 번역했습니다. “신은 죽었다”나 『우상의 황혼』에 나오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같은 구절은 원래 뜻과는 동떨어진 채 일상 언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심화
텍스트 문제: 출간 저작, 유고, 판본
니체를 진지하게 연구하려면 먼저 어떤 텍스트를 기준으로 삼을지 물어야 합니다. 그는 자기가 출간했거나 출간을 준비한 책들 말고도 수천 쪽에 이르는 노트, 초고, 편지, 곧 유고(Nachlass)를 남겼습니다.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와 쾨젤리츠가 엮은 『권력에의 의지』는 니체가 한때 구상했다가 버린 계획에 따라 골라낸 메모들을 배열한 것이며, 때로는 손질하거나 합치기도 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주요 철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독자가 이 책을 그의 주저로 다루었습니다.
전환점은 1960년대 이탈리아 학자 조르조 콜리와 마치노 몬티나리가 시작한 비판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원고로 돌아가 노트를 시간 순서대로 펴냈습니다. 그들의 작업은 『권력에의 의지』가 니체가 쓴 책이 아님을 보여 주었고, 이들의 『비판적 전집(KGW)』과 더 널리 쓰이는 『비판적 학습판(KSA)』은 오늘날 연구의 표준 텍스트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출간 저작과 1888년에 완성한 텍스트를 우선하며, 노트는 그가 시험하던 생각의 증거로서 신중하게 사용합니다. 하이데거를 따르는 다른 학자들은 오히려 미발표 노트에 가장 중요한 사유가 있다고 봅니다. 이 선택은 실제로 큰 차이를 만듭니다. 특히 권력의지와 영원회귀는 책보다 노트에서 훨씬 형이상학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전기 자료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습니다. 엘리자베트가 쓴 전기와 그녀가 펴낸 편지집은 초기의 니체상을 만들었지만 왜곡과 위조를 담고 있습니다. 그가 직접 쓴 『이 사람을 보라』는 정신이 무너지기 몇 주 전에 쓴, 의도적으로 자신을 신화화하는 작품입니다. 쿠르트 파울 얀츠나 줄리언 영의 전기 같은 현대 전기들은 비판적으로 편집된 편지와 당대 기록에 기대고 있습니다.
심화
니체 해석: 서로 다른 읽기
형이상학자인가, 반형이상학자인가? 하이데거는 1930~40년대에 한 강의(1961년 출간)에서 니체를 서양의 마지막 위대한 형이상학자로 읽었습니다. 그에게 니체는 존재를 권력의지로, 그 존재 방식을 영원회귀로 사유한 사람입니다. 많은 후대 해석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니체를 형이상학 비판자로, 권력의지에 관한 주장을 심리학적이거나 수사적인 것으로 봅니다.
인문주의자인가, 포스트모더니스트인가, 자연주의자인가? 발터 카우프만의 『니체: 철학자, 심리학자, 반그리스도』(1950)는 니체를 계몽주의와 괴테의 인간적인 계승자로 그려 나치의 이미지에서 구해 냈습니다. 들뢰즈(『니체와 철학』, 1962), 푸코, 데리다 같은 프랑스 독자들은 고정된 의미, 진리, 통일된 자아에 대한 그의 공격을 강조했습니다. 최근 영어권 연구에서는 모드마리 클라크가 진리에 관한 그의 견해를 세밀하게 읽어 내자고 주장했고, 브라이언 라이터는 도덕을 인간의 심리와 생리로 설명하는 ‘자연주의자’ 니체를 내세웠습니다. 버나드 레긴스터 같은 학자들은 삶의 긍정과 저항의 극복을 중심에 둡니다.
정치. 니체는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경멸했지만, 동시에 민주주의, 평등, 사회주의를 깔보며 귀족적 사회와 위계를 찬양했습니다. 그에게 정치철학이라 할 만한 것이 있는지, 그의 귀족주의가 문자 그대로인지 문화적 이상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의 저작이 극우뿐 아니라 좌파와 페미니즘 사상가들에게까지 수용될 수 있었는지를 두고 학자들의 견해는 엇갈립니다.
문체와 방법. 그는 잠언, 우화, 시, 가면 같은 화자를 통해 글을 썼고 일부러 자기 말을 뒤집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그의 문체 자체가 철학의 일부, 곧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도록 몰아붙이고 모든 주장이 하나의 관점임을 보여 주는 방식이라고 봅니다. 다른 독자들은 그의 텍스트에서 일관된 논증을 재구성하려 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는 두 측면을 모두 살리려 합니다.
핵심 개념
- 신의 죽음
- 기독교의 신에 대한 믿음이 더는 유럽 문화의 살아 있는 토대가 아니게 되었지만 사람들이 아직 그 결과를 마주하지 않았다는 니체의 진단.
- 허무주의
- 무엇에도 가치나 의미가 없다는 느낌. 니체는 이것을 근대 문화에 닥쳐오는 위험으로 보았다.
- 모든 가치의 재평가
- 물려받은 가치가 삶을 고양하는지 위축시키는지 물어 평가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는 그의 과제.
-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 강자의 자기 긍정에서 출발하는 평가(‘좋음-나쁨’)와 약자의 원한에서 출발하는 평가(‘선-악’)라는 대립되는 두 가치 평가 방식.
- 권력의지
- 자라나고 저항을 이겨 내고 힘을 발휘하려는 충동. 니체는 이것이 삶의 많은 부분, 혹은 전부의 바탕에 있다고 보았다.
- 영원회귀
- 자기 삶을 똑같이 영원히 되풀이해 산다는 생각. 삶을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지 묻는 시험.
- 위버멘슈(초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이상.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고 삶에 ‘예’라고 말하는 인간.
- 관점주의
- 모든 앎은 욕구와 충동이 빚어낸 특정한 관점에서 나오며, 관점이 많아질수록 이해가 깊어진다는 견해.
기록
- 1844년 — 10월 15일 프로이센 작센주 뢰켄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 1858년 — 기숙학교 슐포르타에 입학해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함(1864년까지).
- 1865년 — 라이프치히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견함.
- 1869년 — 스물네 살에 바젤 대학교 고전문헌학 교수로 임명되고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함.
- 1872년 — 『비극의 탄생』 출간.
- 1876년 — 제1회 바이로이트 축제에 참석. 바그너와의 우정이 금 가기 시작함.
- 1879년 — 병으로 바젤 교수직을 사임하고 10년에 걸친 방랑을 시작함.
- 1882년 — 신의 죽음을 알리는 광인의 우화가 담긴 『즐거운 학문』 출간.
- 1883년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출간(1885년 완성).
- 1887년 — 『도덕의 계보』 출간.
- 1889년 — 1월 3일 토리노에서 정신이 무너져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함.
- 1900년 —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세상을 떠남.
용어 풀이
- 문헌학
- 언어와 텍스트, 특히 고대 그리스·로마 문학을 연구하는 학문.
- 잠언(아포리즘)
- 생각을 짧고 날카롭게 표현한 글. 니체의 여러 책이 잠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 『비극의 탄생』에 나오는 두 예술적 힘. 뚜렷한 형식과 절도, 그리고 도취와 음악.
- 르상티망
- 곪아 가는 무력한 원한을 뜻하는 프랑스어. 니체는 이것이 노예 도덕을 낳았다고 보았다.
- 계보학
- 가치의 역사적·심리적 기원을 추적해 그 가치를 문제 삼는 니체의 방법.
- 금욕주의적 이상
- 자기 부정과 감각의 포기를 가장 높은 삶의 형태로 여기는 생각.
- 아모르 파티(운명애)
- 라틴어로 ‘운명에 대한 사랑’.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태도.
- 마지막 인간
- 『차라투스트라』에서 위버멘슈의 반대. 안전과 작은 쾌락만 바라는 편안하고 야심 없는 인간.
- 유고(Nachlass)
- ‘남겨진 것’이라는 뜻의 독일어. 작가가 생전에 발표하지 않은 메모, 초고, 문서.
- 무국적자
- 어느 나라의 국적도 갖지 않은 사람. 니체는 1869년 이후 무국적자였다.
묻고 답하기
니체가 정말 “신은 죽었다”고 말했나요?
네. 이 말은 『즐거운 학문』(1882)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옵니다. 신이 없다는 증명이 아니라, 유럽 문화에서 기독교 신앙이 힘을 잃었다는 진단입니다.
니체는 나치였나요?
아닙니다. 그는 나치즘이 생기기 훨씬 전인 1900년에 죽었고, 반유대주의와 독일 민족주의를 거듭 비난했습니다. 그의 여동생과 뒷날의 나치 선전가들이 고르고, 때로는 손질한 구절을 이용해 그를 선구자처럼 꾸몄습니다.
니체는 왜 글쓰기를 멈췄나요?
1889년 1월 토리노에서 정신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11년을 더 살았지만 다시 일할 수 없었습니다. 병의 정확한 원인은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위버멘슈(초인)는 무엇인가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오늘날의 인간을 넘어서는 이상으로, 스스로 가치를 만들고 삶을 온전히 긍정하는 사람입니다. 생물학적인 우월 인종이 아닙니다.
『권력에의 의지』는 니체가 쓴 책인가요?
그가 계획한 형태로는 아닙니다. 그가 쓰러진 뒤 여동생과 하인리히 쾨젤리츠가 미발표 노트를 모아 엮은 것입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콜리와 몬티나리가 펴낸 비판본 유고를 대신 사용합니다.
니체는 도덕 자체를 반대했나요?
그는 특정한 도덕 체계, 특히 기독교 도덕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타당한 도덕이 있다는 생각을 공격했습니다. 많은 학자는 그가 정직, 용기, 삶의 긍정 같은 강한 가치를 여전히 지녔다고 봅니다.
니체는 왜 이렇게 해석하기 어려운가요?
잠언, 우화, 가면 같은 화자로 글을 썼고, 방대한 미발표 노트를 남겼으며, 시간이 지나며 생각을 바꾸었고, 도발적으로 쓴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같은 텍스트에서 전혀 다른 니체를 만들어 왔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프리드리히 니체. 위키백과
- R. Lanier Anderson, Friedrich Nietzsc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Brian Lightbody, Nietzsche: Philosophical Psychology.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 Friedrich Nietzsche. Wikipedia(영어)
- The Birth of Tragedy. Wikipedia(영어)
- Thus Spoke Zarathustra. Wikipedia(영어)
- Elisabeth Förster-Nietzsche. Wikipedia(영어)
- Will to power. Wikipedia(영어)
- Walter Kaufmann, Nietzsche: Philosopher, Psychologist, Antichrist.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0
- Julian Young, Friedrich Nietzsche: A Philosophical Biogra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함께 보기
- 소크라테스스스로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아테네의 철학자. 플라톤과 크세노폰을 통해 알려졌으며, 기원전 399년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 이마누엘 칸트지식, 도덕적 의무, 판단에 관한 논의로 근대 철학의 방향을 바꾼 프로이센 철학자.
-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역사, 사유, 사회 제도를 연결해 설명하며 후대 철학에 큰 영향을 준 독일 철학자.
- 요한 볼프강 폰 괴테시, 희곡, 소설로 독일 문학과 유럽 문화에 깊은 영향을 준 작가.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도덕적 책임, 빈곤, 신앙, 근대 도시의 압박을 탐구한 러시아 소설가.
- 루쉰사회적 위계와 관습, 근대 변화의 압박을 소설과 수필로 비판한 중국 작가.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