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루쉰은 1881년 중국의 운하가 많은 도시 사오싱에서 태어났어요. 집안은 원래 부유하고 이름난 집이었지만, 루쉰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감옥에 가고 아버지가 큰 병에 걸렸어요. 어린 루쉰은 약값을 마련하려고 날마다 전당포에 물건을 맡기러 다녔지만, 아버지는 끝내 세상을 떠났어요.
루쉰은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멀리 일본까지 가서 의학을 공부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수업 시간에, 한 중국인이 처형당하려는 장면을 다른 중국인들이 그저 구경만 하는 사진을 보았어요. 루쉰은 나중에 이때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어요. 몸이 아픈 것보다 사람들의 마음이 잠들어 있는 게 더 큰 문제이고, 이야기가 그 마음을 깨울 수 있다고 믿게 된 거예요.
그래서 루쉰은 작가가 되었어요. 1918년에 쓴 「광인일기」는 옛날식 어려운 글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평소에 쓰는 말로 쓴 소설이어서 무척 새로웠어요. 이야기 속 남자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잡아먹으려 한다고 두려워해요. 무서운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낡은 관습이 사람을 얼마나 해칠 수 있는지를 말하는 이야기예요.
루쉰이 만든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Q예요. 아Q는 늘 지면서도 속으로는 자기가 이겼다고 우기는 가난한 사람이에요. 독자들은 아Q를 보고 웃다가, 자기도 가끔 아Q처럼 군다는 걸 깨달았어요.
루쉰은 사회의 잘못을 꼬집는 짧고 매서운 글도 수백 편 썼어요. 마지막 몇 년은 상하이에서 살다가 1936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지금도 그의 소설은 중국의 학교에서 읽히고, 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어요.
한눈에 보기
- 출생
- 1881년 9월 25일, 청나라 저장성 사오싱. 본명 저우장서우(周樟壽), 뒤에 저우수런(周樹人)으로 개명
- 사망
- 1936년 10월 19일, 상하이
- 필명
- 루쉰(魯迅). 1918년 「광인일기」에서 처음 썼고, 그 밖에도 많은 필명을 썼다
- 학력
- 난징 강남수사학당·광무철로학당, 일본 센다이 의학전문학교(1904~06)
- 주요 소설
- 『외침』(吶喊, 1923), 『방황』(彷徨, 1926), 『고사신편』. 「광인일기」와 「아Q정전」 포함
- 그 밖의 저작
- 산문시집 『들풀』, 회고 산문집 『아침 꽃 저녁에 줍다』, 여러 권의 잡문집, 『중국소설사략』, 다수의 번역
- 사조
- 신문화 운동과 5·4 시기의 대표 작가. 뒤에 좌익작가연맹(1930)의 중심 인물
- 활동지
- 사오싱, 난징, 도쿄·센다이, 베이징(1912~26), 샤먼, 광저우, 상하이(1927~36)
쉬움
루쉰은 누구인가?
루쉰은 저우수런의 필명이다. 그는 1881년부터 1936년까지 산 중국의 작가이자 비평가, 학자, 번역가다. 20세기 전반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이자 근대 중국 문학의 창시자로 널리 평가된다.
그는 거대한 변화 속을 살았다. 남자들이 변발을 하고 유교 경전 시험으로 관리를 뽑던 청나라 때 태어나, 1911년 신해혁명으로 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새로 세워진 중화민국이 군벌과 외세의 압력 속에서 흔들리는 것, 국민당과 공산당이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루쉰이 쓴 소설은 많지 않다. 소설집 세 권에 서른세 편 정도다. 그러나 「광인일기」, 「쿵이지」, 「약」, 「고향」, 「아Q정전」 같은 작품은 중국 소설이 무엇일 수 있는지를 바꾸어 놓았다. 이 작품들은 근대 구어체인 백화(白話)로 쓰였고, 유럽·러시아·일본 문학에서 빌려 와 다듬은 새로운 형식을 썼으며, 가난과 잔인함과 무관심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글에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잡문(雜文)’이라 불리는 짧은 비평문이다. 그는 이 글들에서 위선과 폭력, 검열, 전통에 대한 맹목적 존중을 신랄한 유머로 공격했다. 그 밖에 산문시와 회고 산문, 한시를 썼고, 중국 소설사를 연구했으며, 러시아·일본·유럽 문학을 번역하고, 목판화를 민중을 위한 근대 예술로 널리 알렸다.
쉬움
몰락하는 집안에서 보낸 어린 시절
루쉰은 저장성의 운하 도시 사오싱에서 사대부이자 지주인 집안에 태어났다. 어려서 유교 경전을 배웠지만, 그보다는 그림책과 민간 설화, 지방 연극, 집안 하인이 들려주던 귀신 이야기를 좋아했다. 이런 기억은 뒷날 그의 산문과 소설 곳곳에 나타난다.
1893년, 열두 살 때 할아버지 저우푸칭이 과거 시험관에게 뇌물을 주려다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형 집행은 해마다 미루어지다가 결국 석방되었지만, 그를 살리느라 집안 재산의 상당 부분이 들어갔다. 아버지 저우보이는 병에 걸려 1896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앓는 동안 소년 루쉰은 날마다 전당포와 약방을 오가며 효과도 없는 비싼 전통 약재를 사 왔다.
루쉰은 뒷날 이 경험으로 몰락한 집안을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는지를 배웠다고 썼다. 또 이 일로 전통 의술을 깊이 불신하게 되었고, 그것을 낡은 관습이 사람을 해치는 한 예로 보게 되었다.
집안 형편으로는 관리가 되는 보통의 길을 갈 수 없었기에, 그는 1898년 난징으로 가서 학비가 들지 않는 관립 수사학당에 들어갔고, 이어 광무철로학당에서 공부했다. 이곳에서 번역으로 서양 과학과 사상을 접했는데, 옌푸가 번역한 헉슬리의 『천연론(天演論)』은 많은 중국 독자에게 진화와 생존 경쟁이라는 생각을 처음 알려 준 책이었다.
쉬움
의학에서 문학으로
1902년 루쉰은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갔다. 당시 일본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근대화했는지 배우려던 수천 명의 중국 청년 가운데 하나였다. 도쿄에서 일본어를 공부한 뒤 1904년 센다이의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뒷날 그는 아버지 같은 환자를 고치고 의사로서 나라에 봉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첫 소설집 『외침』(1923)의 서문에서 그는 유명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센다이의 어느 강의 시간에 교수가 러일 전쟁의 환등 슬라이드를 보여 주었다. 그중 한 장에는 러시아의 첩자라는 중국인이 일본군에게 목이 베이려 하고, 그 둘레에 중국인들이 서서 구경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일본 학생들은 환호했다. 루쉰은 그때, 정신이 마비된 사람들이라면 몸이 아무리 튼튼해도 소용이 없으며 먼저 그들의 정신을 바꾸어야 하고, 그러기에는 문예가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썼다.
그는 1906년 의학교를 그만두고 도쿄로 돌아가 문학에 뛰어들었다. 그해 잠시 귀국해 어머니가 정한 여성 주안과 혼인했지만, 이 결혼은 끝내 진정한 부부 관계가 되지 못했다. 도쿄에서 그는 바이런 같은 유럽 낭만주의 반항아들을 중국에 소개한 「마라시력설(摩羅詩力說)」(1908) 같은 평론을 쓰고, 동생 저우쭤런과 함께 동유럽 문학의 단편을 번역했다. 문예지를 만들려던 계획은 무산되었고, 초기 글을 읽은 사람도 드물었다.
센다이에서 그의 강의 노트를 정성껏 고쳐 주던 해부학 교수 후지노 겐쿠로는 루쉰이 1926년에 쓴 따뜻한 회고 산문 「후지노 선생」의 주인공이 되었다. 센다이 시절은 그에게 일본에 대한 굴욕감과 고마움을 함께 남겼다.
중급
베이징, ‘쇠로 된 방’, 그리고 「광인일기」
1909년 귀국한 루쉰은 항저우와 사오싱에서 교사로 일했다. 신해혁명 뒤인 1912년 새 공화국의 교육부에 들어가 부처와 함께 베이징으로 옮겼고, 1926년까지 그곳에 살았다. 공화국은 곧 그를 실망시켰다. 그는 몇 해 동안 저녁마다 옛 비문을 베끼고 고서를 모으고 불경을 읽으며 일부러 세상일을 피했다.
1917년 친구 첸쉬안퉁이 그에게 『신청년(新靑年)』에 글을 써 달라고 청했다. 천두슈가 펴낸 이 급진 잡지는 유교 전통에 맞서고 백화문을 주창하는 신문화 운동의 중심이었다. 루쉰은 『외침』 서문에서 자신의 대답을 유명한 비유로 회고했다. 창문 하나 없고 부수기도 어려운 쇠로 된 방 안에 많은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고, 곧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몇 사람을 깨운다면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친구는 몇 사람이라도 깨어난다면 그 방을 부술 희망이 있다고 답했고, 루쉰은 쓰기로 했다.
「광인일기」는 1918년 5월 『신청년』에 실렸다. 제목과 일기 형식은 고골의 같은 이름의 단편에서 빌려 왔다. 앞에 붙은 짧은 문언문 서문은 이 일기가 지금은 병이 나은 사람의 것이라고 설명하고, 일기 본문은 백화로 쓰였다. 일기의 주인은 주변 사람들이, 심지어 자기 형까지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믿게 된다. 옛 역사책을 펼쳐 보니 페이지마다 ‘인의도덕(仁義道德)’이 쓰여 있고, 행간에는 ‘식인(吃人)’, 곧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두 글자가 보인다. 소설은 “아이들을 구하라……”라는 외침으로 끝난다.
이 소설은 충격적인 우의로 읽혔다. 유교의 덕목을 내세운 낡은 도덕 질서가 실은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체제라는 것이다. 흔히 중국 최초의 근대 백화 단편소설로 불리지만, 문학사가들은 그보다 앞선 백화 실험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후 몇 해 동안 루쉰은 『외침』에 묶일 작품들을 발표했다. 주점에서 조롱받는 몰락한 선비를 그린 「쿵이지」, 처형당한 혁명가의 피를 묻힌 만두를 병든 아들에게 먹이는 가족 이야기 「약」, 그리고 희망이란 원래 없던 길과 같아서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된다는 성찰로 끝나는 「고향」이 그것이다.
중급
아Q와 ‘정신 승리법’
루쉰의 가장 긴 소설인 「아Q정전」은 1921년 12월부터 1922년 2월까지 베이징 『신보(晨報)』 부간에 ‘바런(巴人)’이라는 필명으로 연재되었다. 주인공 아Q는 웨이좡 마을의 가난한 날품팔이로, 땅도 집도 없다. 그는 얻어맞고 모욕당하고 속지만, 언제나 속으로는 자기가 이겼다고 여길 방법을 찾아낸다. 누가 그를 때리면 ‘아들놈이 아비를 때린 셈’이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루쉰은 이것을 아Q의 ‘정신 승리법’이라 불렀다.
아Q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못되게 굴고, 유행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따르려 한다. 신해혁명 소식이 마을에 닿자 지주들이 겁을 먹는 것을 보고 그는 ‘혁명당’이 되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결국 혁명은 지주들 차지가 되고, 아Q는 저지르지도 않은 강도죄로 붙잡힌다. 이름을 쓸 줄 몰라 동그라미로 서명하라는 말을 듣자, 그는 동그라미가 둥글게 그려지지 않은 것만 걱정한다. 그는 본보기로 총살되고, 구경꾼들은 처형이 재미없었다고 불평한다.
독자들은 곧바로 아Q에게서 주변 사람들과 자기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체면 차리기, 자기기만, 강자에 대한 굴종과 약자에 대한 잔인함이다. ‘아Q주의’는 중국어의 흔한 표현이 되었다. 이 소설은 또한 깃발만 바꾸었을 뿐 사회를 바꾸지 못했다고 루쉰이 본 신해혁명에 대한 신랄한 논평이기도 하다.
두 번째 소설집 『방황』(1926)은 더 어둡고 내면적이다. 「축복」은 남편을 잃은 하녀 샹린댁이 거듭된 불행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불길하고 부정한 존재로 취급받다가 눈 속에서 죽는 이야기다. 다른 작품들은 고향에 패배하고 돌아오거나 이상을 버리는 지식인들을 그린다.
중급
잡문, 산문시, 학문, 번역
루쉰의 잡문은 여러 권을 채운다. 대개 짧고, 학생 학살이나 새 검열법, 유행하는 의견 같은 그때그때의 사건에 대한 응답으로 쓰였다. 문체는 압축적이고 인유가 많으며 반어적이다. 그는 유교 도덕을 지키려는 보수파뿐 아니라 동료 급진파와 문단의 경쟁자들도 공격했고, 량스추나 다른 좌파 문인들과 벌인 논쟁은 유명하다. 당대의 사건과 인물에 기대는 글이 많아 번역하기 어렵다.
『들풀』(1927)은 꿈과 그림자와 역설로 가득한 산문시집으로, 흔히 그의 가장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아침 꽃 저녁에 줍다(朝花夕拾)』는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돌아본 회고 산문집으로, 「후지노 선생」도 여기에 실려 있다. 마지막 소설집 『고사신편(故事新編)』은 옛 전설과 공자·노자·묵자 같은 사상가 이야기를 현대적 세부와 반어로 다시 쓴 작품들이다.
루쉰은 진지한 학자이기도 했다. 1920년대 초 베이징 대학 등에서 한 강의는 『중국소설사략』으로 묶였다. 중국 소설의 역사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 책은 『홍루몽』과 『서유기』 같은 소설을 학문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는 특히 러시아어와 일본어에서 많은 작품을 옮겼고, 고골의 『죽은 혼』도 번역했다. 그는 외국어 문장 구조를 살리는 의도적인 직역, 이른바 ‘경역(硬譯)’을 주장했다.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중국어 자체를 풍부하게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는 목판화 운동의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해 유럽 판화를 수집하고 강습회를 열었다.
중급
정치, 상하이, 마지막 몇 해
1925~26년 루쉰은 자신이 가르치던 베이징 여자사범대학의 분규에 휘말렸고, 제자 쉬광핑과 사랑에 빠졌다. 1926년 3월 18일 정부군이 베이징의 학생 시위대에 발포해 그의 제자 두 명이 숨지자, 그는 「류허전 군을 기념하며」를 썼다. 그해 그는 베이징을 떠나 샤먼에서 잠시 가르친 뒤 광저우의 중산대학으로 옮겼다.
1927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이 공산당 동맹자들을 무력으로 숙청했다. 젊은이들이 죽어 가는 것에 충격을 받은 루쉰은 광저우를 떠나 쉬광핑과 함께 상하이에 자리 잡았다. 아들 저우하이잉이 1929년에 태어났다. 상하이에서 그는 글과 편집으로 생계를 꾸렸고, 위험을 피해 여러 번 거처를 옮겼다.
이 무렵 그는 마르크스주의 문예 이론을 읽으며 좌경화했다. 1930년에는 공산당과 가까운 좌익작가연맹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31년에는 그가 알던 젊은 작가 여러 명이 국민당 당국에 처형되었고, 그는 분노를 담아 그들에 관해 썼다. 그러나 그는 끝내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고, 연맹 안의 당 계열 지도자들과 격렬하게 다투며 그들을 관료적 횡포라고 비난했다.
루쉰은 오래전부터 폐결핵을 앓았고 담배를 많이 피웠다. 1936년 10월 19일 상하이에서 쉰다섯 살로 세상을 떠났다. 수많은 사람이 장례식에 모였고, 관은 ‘민족혼(民族魂)’이라 쓴 깃발로 덮였다. 그는 상하이의 루쉰 공원(옛 훙커우 공원)에 묻혔고, 그 곁에 기념관이 있다.
중급
중국과 동아시아에 남긴 영향
루쉰이 죽은 뒤 중국 공산당은 그를 자기편으로 내세웠다. 마오쩌둥은 1940년 루쉰이 위대한 문학가일 뿐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이자 위대한 혁명가”라고 썼고, 이 평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 견해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널리 교육되었고, 문화대혁명 때도 허용된 몇 안 되는 근대 문학의 목소리였다. 이런 공식 숭배는 회의하고 독립적이던 작가를 하나의 기념비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반면 계엄령 아래의 타이완에서는 좌파와 관련 있다는 이유로 수십 년 동안 그의 작품이 제한되었다가, 정치적 자유화 이후 자유롭게 읽히게 되었다. 오늘날 중국 본토에서 그의 소설은 여전히 교과서의 중심에 있지만, 어떤 작품을 몇 편 실을지를 두고 논란이 있어 왔다.
루쉰은 일본과 한국에서도 특히 중요하다. 일본에서는 평론가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1944)이 그를 아시아 사회가 서구 근대에 저항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사유하는 본보기로 만들었다. 루쉰은 일본에서 지금도 널리 읽히며, 「후지노 선생」은 일본 교과서에도 실렸다. 한국에서도 식민지 시기부터 그의 소설이 번역·논의되었고, 많은 지식인이 전통과 제국주의에 동시에 맞선 그의 싸움에서 자신들과 닮은 처지를 보았다.
양셴이·글래디스 양 부부, 윌리엄 라이얼, 줄리아 러벌 등의 영어 번역으로 루쉰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중국 작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여러 나라의 작가들이 그를 예술적 혁신과 도덕적 진지함을 함께 갖춘 문학의 본보기로 꼽는다.
심화
해석의 쟁점
혁명가인가, 회의주의자인가. 마오쩌둥식 해석은 루쉰의 생애를 진화론에서 마르크스주의로, 개인주의에서 집단주의로 나아간 과정으로 그렸다. 공식 틀 밖의 연구자들은 오히려 그의 회의와 절망, 반어를 강조했다. 리어우판(李歐梵)의 『쇠로 된 방의 목소리(Voices from the Iron House)』(1987)는 그를 『들풀』에 드러나는 내적 갈등을 정치 강령으로 환원할 수 없는 모더니스트로 읽는다. 1980년대에는 중국 본토 학자들도 그의 개인주의와 니체 같은 사상가에게 진 빚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국민성 비판. 중국인의 ‘국민성’에 대한 비판은 루쉰 작품의 중심 주제였다. 리디아 류(劉禾)는 『언어횡단적 실천(Translingual Practice)』(1995)에서 이 담론이 부분적으로 서양 선교사의 저술, 특히 루쉰이 일본어 번역으로 읽은 아서 스미스의 『중국인의 기질(Chinese Characteristics)』에서 왔다고 보고, 그의 비판이 외국의 고정관념을 얼마나 되풀이했는지 물었다. 다른 연구자들은 루쉰이 그런 생각을 사회 변화를 위한 자기비판의 도구로 바꾸었다고 반박한다.
문학적 평가. 비평가 샤즈칭(C. T. Hsia)은 『중국 현대소설사(A History of Modern Chinese Fiction)』(1961)에서 루쉰의 뛰어난 단편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후기의 논쟁적 글쓰기가 그의 예술을 좁혔다고 보았다. 옹호하는 쪽은 잡문을 위기의 시대에 맞는 진정한 새 문학 형식으로 본다. 「광인일기」가 최초의 근대 백화 소설이라는 주장도 천헝저(陳衡哲) 같은 여성 작가를 포함한 앞선 실험을 지적하는 연구로 조정되었다.
번역과 언어. 루쉰의 ‘경역’과 문언·백화를 뒤섞는 문체는 번역학 연구자들에게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이들은 그것을 새로운 사상을 매끄럽게 동화시키는 대신 그 낯섦을 독자가 느끼게 하려는 의도적 전략으로 본다.
심화
전기 자료와 그 신뢰성
루쉰의 젊은 시절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의 상당 부분은 그 자신의 글에서 나온다. 『외침』 서문, 『아침 꽃 저녁에 줍다』의 회고 산문, 자전적 약술 등이다. 이것들은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해 뒤에 공들여 다듬은 문학 텍스트다. 예컨대 환등 슬라이드 이야기는 글마다 조금씩 다르게 서술되고, 센다이의 연구자들도 그의 묘사와 정확히 일치하는 슬라이드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학자는 이 일화를 정확한 기록이라기보다 문학으로 돌아선 전환점을 압축하거나 상징화한 이야기로 본다.
그 밖의 중요한 자료로는 1912년부터 1936년까지 쓴 일기, 쉬광핑과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양지서(兩地書)』(1933)를 비롯한 방대한 서간, 그리고 가족·친구·제자들의 회고가 있다. 동생 저우쭤런은 함께 보낸 어린 시절과 도쿄 시절을 자세히 회고했지만, 두 형제는 1923년 누구도 공개적으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절연했고, 저우쭤런이 뒷날 일본 점령 당국에 협력한 일도 그의 증언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1949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나온 전기들은 혁명가 루쉰이라는 공식 이미지에 맞추어졌고, 이에 따라 어떤 일화는 강조되고 어떤 일화는 축소되었다. 표준이 되는 『루쉰전집』은 1938년 초판 이후 여러 차례 주석본으로 나왔는데, 주석 자체에도 바뀌어 온 정치적 판단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연구는 루쉰의 생애를 여러 층으로 읽는다. 그 자신의 자기 서술, 주변 사람들의 입장이 담긴 기억, 그리고 뒷날의 정전화 작업이다. 이 층들을 가려내는 일은 작가 루쉰과 근대 중국의 역사를 함께 이해하는 일이다.
핵심 개념
- 문학이라는 처방
- 루쉰은 민족의 정신이 먼저 바뀌어야 하고 소설이 그것을 일깨울 수 있다고 믿어 의학을 버렸다.
- 쇠로 된 방
- 밀폐된 방에서 잠든 사람들의 비유. 깨우면 고통스럽지만 방을 부술 희망이 생길 수도 있다.
- ‘식인(吃人)’
- 「광인일기」는 낡은 도덕 질서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체제임을 폭로한다.
- 정신 승리법
- 모든 패배를 상상의 승리로 바꾸는 아Q의 습관. 자기기만에 대한 풍자다.
- 국민성 비판
- 무관심, 체면치레, 잔인함에 대한 꾸준한 비판. 사회를 경멸하기보다 바꾸려는 것이었다.
- 잡문
- 그가 중요한 문학 형식으로 끌어올린 짧고 논쟁적인 비평문.
- 경역(硬譯)
- 외국어의 구조를 살리는 직역.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중국어를 풍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기록
- 1881년 — 9월 25일 저장성 사오싱에서 저우장서우로 태어난다.
- 1893년 — 할아버지가 과거 뇌물 사건으로 체포되고 집안이 기운다.
- 1898년 — 난징의 강남수사학당에 들어가고 저우수런이라는 이름을 쓴다.
- 1902년 —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간다.
- 1904년 —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고, 1906년 문학을 하려고 그만둔다.
- 1912년 — 중화민국 교육부에 들어가 베이징으로 옮긴다.
- 1918년 — 「광인일기」를 루쉰이라는 필명으로 『신청년』에 발표한다.
- 1921년 — 「아Q정전」 연재가 시작된다(1921년 12월~1922년 2월).
- 1923년 — 첫 소설집 『외침』이 나온다. 동생 저우쭤런과 절연한다.
- 1926년 — 『방황』이 나온다. 3·18 참사 뒤 베이징을 떠나 샤먼으로 간다.
- 1927년 — 광저우를 거쳐 쉬광핑과 함께 상하이에 정착한다.
- 1930년 — 좌익작가연맹의 중심 인물이 된다.
- 1936년 — 10월 19일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난다.
용어 풀이
- 백화(白話)
- 일상 구어에 가까운 중국어 글말. 신문화 운동이 문언 대신 쓰자고 주장했다.
- 문언(文言)
- 2천 년 동안 공문서와 문학에 쓰인 고전 중국어 글말.
- 신문화 운동
- 1910~20년대 유교 전통을 비판하고 과학·민주·백화 문학을 주창한 운동.
- 5·4 운동
- 1919년 5월 4일 시작된 학생 주도 시위, 넓게는 그와 연결된 문화 개혁의 시대.
- 『신청년』
- 천두슈가 펴낸 잡지로 「광인일기」가 처음 실렸다.
- 잡문(雜文)
- 시사를 다루는 짧은 풍자적·비평적 산문.
- 변발
- 청나라 때 한족 남성에게 강요된 뒷머리를 길게 땋은 머리 모양.
- 좌익작가연맹
- 1930년 상하이에서 결성된 좌파 작가 단체.
- 필명
- 작가가 본명 대신 쓰는 이름.
묻고 답하기
루쉰은 왜 의학 공부를 그만두었나요?
처형 장면을 구경하는 중국인들을 찍은 슬라이드를 보고, 사람들의 몸을 고치는 것보다 정신을 바꾸는 일이 더 중요하며 문학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고 그는 썼어요.
「광인일기」는 무서운 이야기인가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무서운 생각을 쓰지만, 사실은 우의예요. ‘식인’은 전통 도덕 속에 숨어 있는 잔인함을 뜻해요.
아Q는 누구인가요?
배우지 못한 가난한 시골 사람으로, 얻어맞아도 늘 자기가 이겼다고 믿어요. 자기기만의 상징이 되었어요.
루쉰은 공산주의자였나?
그는 좌경화해 좌익작가연맹을 이끌었지만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고 당 계열 지도자들과 다투었다. 공산당은 그가 죽은 뒤 그를 높이 기렸다.
환등 슬라이드 이야기는 사실인가?
루쉰 자신이 쓴 이야기이지만 해당 슬라이드는 발견되지 않았고 글마다 세부가 다르다. 그래서 많은 학자가 실제 전환점을 다듬어 다시 들려준 이야기로 본다.
루쉰이 지금도 중요한 이유는?
백화로 새로운 중국 소설을 만들었고, 사회를 독립적으로 비판하는 작가의 모범을 세웠다. 그의 소설은 중국에서 여전히 중심에 있고 세계에서 읽힌다.
소설 말고 무엇을 썼나?
잡문, 산문시, 회고 산문, 한시, 중국 소설사 연구서, 그리고 많은 번역이 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Lu Xun. Wikipedia(영어)
- 루쉰. 위키백과
- Diary of a Madman (Lu Xun). Wikipedia(영어)
- 아Q정전. 위키백과
- New Culture Movement. Wikipedia(영어)
- League of Left-Wing Writers. Wikipedia(영어)
- Leo Ou-fan Lee(리어우판), Voices from the Iron House: A Study of Lu Xu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7
- 루쉰, 줄리아 러벌 옮김, The Real Story of Ah-Q and Other Tales of China: The Complete Fiction of Lu Xun. Penguin Classics, 2009
- Lydia H. Liu(리디아 류), Translingual Practice: Literature, National Culture, and Translated Modernity—China, 1900–1937.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5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