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디에고 리베라는 1886년 멕시코의 과나후아토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어요. 세 살 때부터 집 벽에 그림을 그렸대요. 부모님은 꾸짖는 대신 벽에 칠판과 캔버스를 붙여서 마음껏 그리게 해 주었어요!
열 살쯤 멕시코시티의 미술 학교에 들어갔고, 젊은 시절에는 스페인과 프랑스로 건너가 유명한 화가들을 만났어요. 그곳에서 물건을 조각조각 나누었다가 다시 맞춘 것처럼 그리는 ‘입체파’라는 새로운 그림 방식도 해 보았지요.
멕시코에서 큰 혁명이 끝난 뒤, 새 정부는 부자들의 집 안에만 걸리는 그림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미술을 원했어요. 그래서 리베라는 고향으로 돌아와 학교와 궁전, 관청의 벽에 커다란 그림을 직접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의 벽화에는 사람이 가득해요. 옥수수를 심는 농부, 광산과 공장의 노동자, 학교의 아이들, 혁명의 영웅들, 그리고 스페인 사람들이 오기 전 아스테카 도시의 모습도 있어요. 그는 멕시코 사람들이 원주민의 역사와 손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를 바랐어요.
리베라는 미국에서도 그림을 그렸어요. 디트로이트에서는 미술관 안뜰 전체를 자동차 공장 그림으로 채웠어요. 뉴욕에서 그린 그림은 공산주의 지도자를 그려 넣었다는 이유로 큰 다툼이 벌어졌고, 건물 주인들이 그 그림을 없애 버렸어요. 리베라는 멕시코시티에서 그 그림을 다시 그렸답니다.
그는 화가 프리다 칼로와 결혼했고, 지금 두 사람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들에 속해요. 멕시코는 그의 벽화를 나라의 보물로 여기고, 해마다 수많은 사람이 그 벽화를 보러 간답니다.
한눈에 보기
- 생애
- 1886년 12월 8일(멕시코 과나후아토) – 1957년 11월 24일(멕시코시티)
- 국적
- 멕시코
- 분야
- 회화, 특히 프레스코 벽화. 이젤 회화, 드로잉, 미술관 건축(아나우아카이)
- 사조
-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와 함께 ‘3대 거장(Los Tres Grandes)’으로 꼽히는 멕시코 벽화 운동. 파리의 입체파 시기(1913–1917)
- 주요 벽화
- 공공교육부 청사(1922–1928), 차핑고 예배당(1923–1927), 멕시코시티 국립궁전(1929–1935 및 이후), 〈디트로이트 산업〉(1932–1933), 〈교차로에 선 인간〉(1933, 파괴), 〈알라메다 공원의 일요일 오후의 꿈〉(1946–1947)
- 벽화 활동
- 약 1922–1953년. 멕시코시티·차핑고·쿠에르나바카, 샌프란시스코·디트로이트·뉴욕
- 정치
- 1922년 멕시코 공산당 입당, 1929년 제명. 레온 트로츠키를 맞아들였고 1950년대 재입당을 시도
- 지위
- 멕시코 정부가 그의 작품을 역사 기념물(monumentos históricos)로 지정
쉬움
디에고 리베라는 누구인가
디에고 리베라는 거대한 프레스코—갓 바른 젖은 회반죽 위에 그려 색이 벽의 일부가 되게 하는 그림—로 가장 잘 알려진 멕시코 화가다. 1922년부터 1953년까지 그는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차핑고·쿠에르나바카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디트로이트·뉴욕에서 벽을 채웠다.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와 함께 멕시코 벽화 운동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리베라는 미술이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몇몇 수집가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대신, 노동자·농민·학생이 무료로 볼 수 있는 공공장소에 그리고자 했다. 그의 벽화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대 아스테카 세계에서 20세기에 이르는 멕시코의 역사, 멕시코 혁명의 투쟁, 들판과 광산과 공장에서 일하는 보통 사람들의 노동이다.
그는 논란 많은 공인이기도 했다. 자본가 후원자를 위해 일한 마르크스주의자, 엄청난 에너지와 매력을 지녔지만 불같은 성미와 숱한 연애로도 유명했던 사람, 자기 삶을 곧잘 부풀려 이야기한 이야기꾼이었다. 화가 프리다 칼로와의 결혼으로 두 사람은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부부가 되었다.
쉬움
어린 시절과 수업
리베라는 1886년 12월 8일 멕시코 중부의 은광 도시 과나후아토의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쌍둥이 형제 카를로스는 두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디에고는 세 살 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벽에 그림을 그리자 부모는 칠판과 캔버스를 붙여 주며 격려했다.
그는 열 살 무렵부터 멕시코시티의 산카를로스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며 유럽 아카데미 전통의 소묘와 회화를 익혔다. 베라크루스 주지사 테오도로 데에사의 장학금을 받아 1907년 유럽으로 떠났고, 먼저 마드리드에서 공부했다.
당시 멕시코는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긴 독재 아래 있었다. 그의 정부는 유럽 문화를 동경했고 원주민 전통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리베라가 유럽에 있던 1910년 멕시코 혁명이 일어났다. 오랜 내전과, 가난한 이들에게 땅과 정의를 주겠다는 혁명의 약속은 훗날 그의 가장 큰 주제가 된다.
쉬움
파리, 입체파, 그리고 이탈리아
마드리드에서 리베라는 당시 현대 미술의 중심지 파리로 옮겼다. 몽파르나스 지구의 예술가·작가들 사이에서 살았고, 1914년 그의 초상을 그린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섕 수틴, 모이즈 키슬링 같은 화가와 작가 일리야 예렌부르크가 친구였다. 1911년 러시아 출신 화가 앙겔리나 벨로프와 결혼했는데, 1916년에 태어난 아들은 1918년 어린 나이에 죽었다.
1913년부터 1917년까지 리베라는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가 발전시킨 입체파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며 사물과 사람을 겹쳐진 평면으로 쪼갰다. 친구들의 초상 같은 그의 입체파 작품은 지금 주요 미술관에 전시된다. 1917년 무렵 폴 세잔의 영향을 받아 더 단순한 형태와 넓고 밝은 색면으로 옮겨 갔다.
1920년 멕시코 대사 알베르토 파니의 권유로 리베라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조토와 미켈란젤로 같은 르네상스 화가들의 프레스코를 연구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종교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 거대한 벽화들은, 벽 위의 미술이 한 사회 전체를 가르칠 수 있음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중급
멕시코 벽화 운동: 새 나라를 위한 미술
1920년 무렵 혁명의 전투가 끝나자 알바로 오브레곤 대통령은 철학자 호세 바스콘셀로스를 공공교육부 장관에 임명했다. 바스콘셀로스는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정부 사업을 시작했다. 대부분 글을 모르던 국민을 교육하고, 혁명을 기리며, 멕시코의 원주민·메스티소(혼혈) 유산을 자랑으로 삼는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세우려는 목적이었다. 리베라는 1921년 이 사업에 참여하려고 귀국했다.
그의 첫 주요 벽화 〈창조〉(1922)는 국립예비학교의 볼리바르 강당에 납화(뜨거운 밀랍에 안료를 섞어 그리는 기법)로 그려졌다. 아직 유럽의 본보기에 가까운 알레고리 구성이다. 그가 전한 이야기에 따르면 적대적인 우파 학생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권총을 차고 그렸다고 한다. 같은 해 그는 민중을 위한 공공 미술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낸 ‘혁명적 기술노동자·화가·조각가 조합’ 창립에 참여했고, 멕시코 공산당에 들어갔다.
벽화가들은 정부와도, 서로와도 늘 뜻이 맞지는 않았다. 바스콘셀로스는 고전적인 유럽 형식을 선호했지만, 화가들은 점점 대담한 양식과 노골적인 혁명적 내용을 썼다. 오로스코의 작품은 어둡고 비극적이었고, 시케이로스는 더 실험적이고 투쟁적이었다. 리베라의 벽화는 가장 서사적이고 질서 정연했으며, 윤곽이 뚜렷한 인물들과 일상의 세부로 가득했다.
중급
멕시코의 대연작: 공공교육부와 차핑고
1922년 9월 리베라는 옛 수도원을 고친 멕시코시티의 새 공공교육부 청사 안뜰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928년까지 그와 조수들은 안뜰 주위에 100면이 넘는 프레스코를 그렸다. 멕시코의 축제, 시장, 춤, 광부, 직조공, 농부가 등장하고, 위층에는 혁명 민요를 그린 장면들이 있다. 그중 〈무기고에서〉에는 프리다 칼로가 무기를 나누어 주는 모습으로 나온다. 여기서 리베라는 크고 단순하며 둥근 인물, 굵은 윤곽선, 일부는 콜럼버스 이전 미술에서 영감을 받은 따뜻한 흙빛 색채라는 원숙한 양식을 완성했다.
텍스코코 근처 차핑고의 국립농업학교(지금의 차핑고 자치대학)에서는 학교의 본관 홀과 복도를, 그리고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옛 예배당을 그렸다. 예배당 벽화는 흔히 그의 1920년대 걸작으로 불린다. 교회라면 성인이 있을 자리에 리베라는 땅과 사회의 변화를 그렸다. 살해된 혁명 지도자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동지 오틸리오 몬타뇨가 밭 아래 묻혀 그 몸으로 옥수수를 키운다. 두 번째 아내 과달루페 마린을 모델로 한 끝 벽의 누운 나체는 해방된 비옥한 대지를 상징한다.
이 연작들은 리베라가 행렬·희생·부활 같은 기독교 미술의 언어를 노동·혁명·재생이라는 세속의 이야기로 바꾸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탈리아 프레스코 기법, 입체파 구성, 멕시코 민속 미술, 고대 메소아메리카 도상을 섞는 그의 방식도 드러난다.
중급
국립궁전: 멕시코 민중의 서사시
리베라의 가장 야심 찬 작품은 멕시코시티 중앙 광장 소칼로에 있는 정부 청사, 국립궁전의 중앙 계단에 있다.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약 450제곱미터에 그린 계단 벽화는 흔히 〈멕시코의 역사〉 또는 〈멕시코 민중의 서사시〉라 불리며, 거대한 세폭화처럼 먼 과거에서 리베라 당대까지의 나라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른쪽 벽은 신이자 영웅인 케찰코아틀을 중심으로 콜럼버스 이전 세계를 보여 준다. 가장 큰 가운데 벽은 고문과 노예화 같은 폭력을 포함한 스페인 정복과 원주민을 옹호하는 수도사들을 그리고, 그 위로 독립 전쟁, 미국과 프랑스의 침공, 개혁 시대, 혁명이 이어진다. 왼쪽 벽은 1930년대 리베라가 본 현대 멕시코다. 한쪽에는 부패한 정치인과 외국 자본가들이, 다른 쪽에는 노동자들의 미래 사회를 가리키는 카를 마르크스가 있다. 프리다 칼로도 이곳에 등장한다.
2층 회랑에는 훗날 콜럼버스 이전 문화를 다룬 연작 패널을 그렸다. 틀라텔롤코의 대시장, 그리고 미초아칸·오아하카·우아스테카의 민족들—타라스코, 사포테카, 미스테카, 우아스테카—을 거쳐 에르난 코르테스의 베라크루스 상륙으로 이어지는 연작이지만 끝내 완성되지 않았다. 국립궁전 벽화는 멕시코인과 외국인이 이 나라의 역사를 상상하는 방식을 누구보다 크게 형성했다.
중급
미국에서: 샌프란시스코, 디트로이트, 뉴욕
리베라는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주로 미국에서 살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증권거래소 시티클럽과 캘리포니아 미술학교에 벽화를 그렸다. 1931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그의 회고전을 열었고, 그는 이를 위해 옮길 수 있는 프레스코 패널을 그렸다.
1932년 디트로이트 미술관은 에드셀 포드의 후원으로 중앙 안뜰 벽화를 의뢰했다. 몇 달 동안 포드 리버 루지 공장을 연구한 뒤, 리베라와 조수들은 약 8개월 만에 27개 패널을 완성했다. 〈디트로이트 산업〉은 용광로와 조립 라인 사이에서 1932년형 V8 엔진을 만드는 노동자들을 의학·화학·항공 장면과 함께 보여 준다. 리베라 자신은 이것을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여겼다. 공개되자 일부 성직자는 성탄 장면처럼 구성한 예방접종 패널을 신성모독이라 했고 한 신문은 ‘비미국적’이라고 비난했지만, 미술관과 포드는 벽화를 지켰다. 2014년 미국 국가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33년 뉴욕에서 리베라는 록펠러 센터 RCA 빌딩 로비에 〈교차로에 선 인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블라디미르 레닌의 초상을 넣자 넬슨 록펠러가 빼 달라고 요청했다. 리베라는 거절하고 대신 에이브러햄 링컨을 더하겠다고 제안했다. 작업은 중단되었고, 그는 대금을 전부 받았으며, 미완성 프레스코는 가려졌다가 1934년 파괴되었다. 시카고의 제너럴 모터스 의뢰도 취소되었다. 1934년 리베라는 사진을 바탕으로 멕시코시티 예술궁전(팔라시오 데 베야스 아르테스)에 이 구성을 〈우주를 다스리는 인간〉으로 다시 그렸다.
중급
만년, 프리다 칼로, 마지막 작품들
리베라는 1929년 마흔두 살에 스물두 살의 미술학도 프리다 칼로와 결혼했다. 결혼 생활은 격렬했다. 둘 다 외도를 했고, 1939년 이혼했다가 194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재혼했다. 두 사람은 멕시코시티에서 서로 이어진 집과 작업실에 살며 멕시코 민중 문화와 급진 정치에 대한 열정을 나누었다. 1937년부터 몇 달 동안 망명한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를 맞아들이기도 했다. 칼로는 1954년에 세상을 떠났고, 리베라는 1955년 자신의 미술 중개인 에마 우르타도와 결혼했다.
1940년 리베라는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국제박람회에서 관람객 앞에서 남북 아메리카의 예술과 기술의 만남을 다룬 10폭 벽화 〈범아메리카의 통합〉을 그렸다. 1946–1947년에는 멕시코시티의 한 호텔을 위해 〈알라메다 공원의 일요일 오후의 꿈〉을 그렸다. 멕시코 역사 속 인물들이 공원을 거니는 장면으로, 어린 리베라가 판화가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에게서 빌려 온 해골 여인 ‘라 카트리나’의 손을 잡고 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글귀가 추문을 일으켜 벽화는 9년 동안 공개되지 않다가 리베라가 글귀를 지운 뒤에야 공개되었다. 1985년 지진 뒤 벽화는 전용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만년에 리베라는 코요아칸에 화산석으로 피라미드 같은 건물 아나우아카이를 설계해 방대한 콜럼버스 이전 유물 수집품을 보관하게 했다. 이곳은 1964년 약 2,000점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그는 1957년 11월 24일 멕시코시티에서 세상을 떠나 돌로레스 묘지(판테온 데 돌로레스)에 묻혔다.
심화
미술과 정치: 자본가 후원자를 둔 공산주의 화가
리베라의 경력은 마르크스주의 신념과 후원자 사이의 긴장 속에서 형성되었다. 멕시코에서는 국민 통합을 내세우면서도 점점 급진 개혁에서 멀어지던 혁명 이후 국가를 위해 일했고, 미국에서는 록펠러 가문과 포드 가문에게 돈을 받았다. 1929년 멕시코 공산당은 공식적으로는 트로츠키주의 동조 의혹을 이유로 그를 제명했다. 좌파 비판자들은 그가 정부와 부유한 개인의 의뢰를 받아들이는 것에도 반발했다. 더 투쟁적인 공산주의자였던 시케이로스는 1934년 글에서 그를 국가와 외국 자본에 봉사하는 기회주의자라고 공격했다.
학자들은 이 이중적 위치를 여러 방식으로 해석한다. 버트럼 울프 같은 초기의 우호적 전기 작가들은 국립궁전이나 록펠러 센터처럼 공식 공간에 급진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리베라의 능력을 강조했다. 다른 이들은 그의 벽화가 일당 국가의 통합적 국가 신화를 세우는 데 기여해 지속되는 불평등을 가렸다고 본다. 리베라의 샌프란시스코 벽화에 관한 앤서니 리의 연구와, MoMA·록펠러 센터의 후원자들을 다룬 카사 파케트의 연구는 벽화의 의미가 비용을 댄 기관들과 어떻게 협상되었는지를 살핀다.
특히 록펠러 센터 사건은 예술의 자유와 소유권을 둘러싼 논쟁의 고전적 사례가 되었다. 리베라는 예술 작품이 인류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건물 관리자들은 벽을 산 것은 자신들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아치볼드 매클리시와 E. B. 화이트의 시에 영감을 주었고, 지금도 공공 미술 검열을 논할 때 기준점이 된다.
심화
인디헤니스모와 콜럼버스 이전 과거의 이미지
리베라의 벽화는 원주민 문화를 멕시코 정체성의 뿌리로 기린 혁명 이후의 운동, 인디헤니스모의 중심에 있었다. 이상화된 틀라텔롤코의 아스테카 시장과 국립궁전의 케찰코아틀 연작은 정복으로 파괴된 황금시대를 제시했고, 그가 그린 원주민 농민과 노동자는 국가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는 콜럼버스 이전 미술을 대규모로 수집했고 이를 전시하려고 아나우아카이를 지었다.
역사가와 인류학자들은 이 전망을 비판하기도 했다. 레나토 곤살레스 메요 같은 학자는 리베라의 도상과 당시 국가가 후원한 인류학 사이의 연관을 검토했다. 비판자들은 인디헤니스모가 원주민을 과거의 상징이나 그림 같은 전형으로 기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정작 살아 있는 원주민 공동체는 자신들이 어떻게 재현되는지에 거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빈곤과 동화 압력에 시달렸다고 지적한다. 고귀한 아스테카인과 잔인한 스페인인이라는 벽화의 대비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정복사 연구자들의 비판도 있다.
라 카트리나의 변신은 리베라의 신화 만들기를 보여 주는 작은 예다. 포사다의 원래 판화는 유럽 유행을 흉내 내는 멕시코인을 풍자한 것이었다. 알라메다 벽화에서 리베라는 그녀에게 온전한 몸과 원주민의 특징을 주고 멕시코 역사의 한가운데에 세워, 오늘날 ‘죽은 자들의 날’과 이어진 국가적 아이콘으로 만드는 데 한몫했다.
심화
기법, 원천, 그리고 유산
리베라는 주로 진짜 프레스코(부온 프레스코)로 작업했다. 날마다 한 구역에 젖은 석회 회반죽을 바르고, 실물 크기 밑그림에서 도안을 옮긴 뒤,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안료를 칠했다. 이는 치밀한 계획과 미장공·조수들의 팀을 필요로 했고, 조수 가운데에는 벤 샨, 루시엔 블로크, 리나 라소처럼 훗날 이름을 얻은 화가들도 있었다. 그의 구성은 르네상스 원근법과 입체파의 맞물리는 평면을 콜럼버스 이전 코덱스의 평평하고 빽빽한 서사와 결합한다.
리베라의 생애에 관해 우리가 아는 많은 것은 그가 마음껏 꾸며 낸 자신의 이야기에서 나온다. 글래디스 마치가 여러 해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엮어 그가 죽은 뒤인 1960년에 나온 자서전에는 학생 시절 식인을 했다는 주장처럼 역사가들이 지어낸 것으로 보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래서 전기 작가들은 그의 이야기를 편지·계약서·사진·다른 사람의 증언과 대조한다.
리베라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미국에서의 성공은 1930년대 뉴딜 벽화 사업을 북돋운 요인으로 흔히 거론되며, 멕시코 벽화 운동은 뒤에 치카노 벽화 운동과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공공 미술에 영감을 주었다. 그의 그림 〈경쟁자들〉(1931)은 2021년 프리다 칼로의 작품에 기록을 넘겨줄 때까지 라틴아메리카 화가 작품의 경매 최고가 기록을 지녔다. 멕시코에서 그의 벽화는 역사 기념물로 보호받고, 디트로이트의 안뜰은 미국 국가역사기념물이다.
핵심 개념
- 공공 미술
- 글을 모르는 사람을 포함해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도록 학교·궁전·관청의 벽에 그렸다.
- 서사시로서의 역사
- 그의 벽화는 멕시코의 역사 전체를 정복·저항·혁명의 한 이야기로 제시한다.
- 노동의 존엄
- 농부·광부·공장 노동자가 그의 그림의 영웅이며, 이는 그의 마르크스주의 신념을 반영한다.
- 인디헤니스모
- 콜럼버스 이전 문명을 국가 정체성의 토대로 기렸다. 강력하면서도 논쟁적인 전망이다.
- 프레스코
- 젖은 회반죽 위에 그리는 르네상스 기법. 그는 이를 되살려 건물의 일부가 되는 오래가는 미술을 만들었다.
- 미술과 권력
- 그의 경력은 급진적 정치 메시지와 비용을 댄 정부·백만장자 사이의 긴장을 보여 준다.
- 모더니즘과 전통의 만남
- 입체파와 유럽 현대 미술을 멕시코 민속 미술, 고대 메소아메리카 도상과 결합했다.
기록
- 1886년 — 12월 8일 멕시코 과나후아토에서 디에고 리베라가 태어난다.
- 약 1896년 — 멕시코시티의 산카를로스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 1907년 — 주 정부 장학금으로 유럽에 건너가 마드리드에서 공부한 뒤 파리에 자리 잡는다.
- 1913년 — 파리에서 입체파 시기(–1917)를 시작한다.
- 1921년 — 이탈리아에서 프레스코를 연구한 뒤 바스콘셀로스의 벽화 사업에 참여하려고 귀국한다.
- 1922년 — 국립예비학교에 〈창조〉를 그리고, 공공교육부 벽화를 시작하며, 공산당에 입당한다.
- 1923년 — 차핑고 예배당 벽화를 시작한다(1927년 완성).
- 1929년 — 프리다 칼로와 결혼하고, 공산당에서 제명되며, 국립궁전 계단 벽화를 시작한다.
- 1931년 —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린다.
- 1932년 —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디트로이트 산업〉을 시작한다(1933년 완성).
- 1933년 — 록펠러 센터의 〈교차로에 선 인간〉이 레닌 초상 문제로 중단되고 뒤에 파괴된다.
- 1947년 — 〈알라메다 공원의 일요일 오후의 꿈〉을 완성한다.
- 1957년 — 11월 24일 멕시코시티에서 세상을 떠난다.
용어 풀이
- 벽화
- 벽이나 천장에 직접 그린 큰 그림.
- 프레스코
- 갓 바른 젖은 석회 회반죽에 안료로 그려 색이 벽의 일부가 되게 하는 기법.
- 납화(엔코스틱)
- 뜨거운 밀랍에 안료를 섞어 그리는 기법.
- 입체파
- 사물을 평평하고 겹쳐진 기하학적 면으로 쪼개어 보여 주는 20세기 초 미술 양식.
- 멕시코 혁명
- 디아스 독재를 무너뜨리고 멕시코의 정치와 사회를 바꾼 1910–1920년의 무장 투쟁.
- 3대 거장(Los Tres Grandes)
- 멕시코 벽화 운동을 이끈 리베라,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 인디헤니스모
- 원주민 문화를 국가 정체성의 중심으로 기린 운동. 혁명 이후 멕시코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 메스티소
- 원주민과 유럽인의 혼혈. 멕시코가 스스로를 혼혈 국가로 보는 관념을 가리키기도 한다.
- 세폭화
- 보통 큰 가운데 부분과 양옆 부분으로 이루어진 세 부분짜리 작품.
- 라 카트리나
- 판화가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가 만든 우아한 여성 해골. 지금은 ‘죽은 자들의 날’의 상징이다.
묻고 답하기
리베라는 왜 캔버스가 아니라 벽에 그렸나요?
미술이 모두의 것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에요. 학교나 궁전의 벽화는 수천 명이 무료로 볼 수 있지만, 캔버스 그림은 개인 집에 걸리기 쉬워요.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 칼로와 결혼했나요?
네. 1929년에 결혼했다가 1939년에 이혼하고 1940년에 다시 결혼했어요. 1954년 칼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했어요.
록펠러 센터의 벽화는 어떻게 되었나요?
리베라가 레닌의 초상을 넣고 빼기를 거부하자 작업이 중단되었고, 벽화는 가려졌다가 1934년 파괴되었어요. 그는 멕시코시티 예술궁전에 새 판을 그렸어요.
그의 중요한 벽화는 어디서 볼 수 있나요?
멕시코시티의 국립궁전, 공공교육부, 예술궁전, 디에고 리베라 벽화 미술관, 그리고 차핑고에서 볼 수 있어요. 미국에서는 디트로이트 미술관과 샌프란시스코에 있어요.
리베라는 공산주의자였나요?
네. 1922년 멕시코 공산당에 들어갔다가 1929년 제명되었고, 트로츠키에 동조했으며, 나중에 재입당을 시도했어요. 그의 정치관은 많은 벽화에 드러나요.
그의 자서전은 믿을 만한가요?
일부만 그래요. 리베라는 허풍 섞인 이야기를 좋아했고, 역사가들은 식인 주장 같은 몇몇 이야기를 지어낸 것으로 봐요.
학자들은 그가 그린 원주민 멕시코의 이미지를 어떻게 비판하나요?
그의 벽화가 아스테카 과거를 이상화하고 원주민을 국가의 상징으로 만들었지만, 정작 살아 있는 공동체는 자신들의 재현에 거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Diego Rivera. Wikipedia
- Mexican muralism. Wikipedia
- National Palace (Mexico). Wikipedia
- Detroit Industry Murals. Wikipedia
- Man at the Crossroads. Wikipedia
- Sueño de una Tarde Dominical en la Alameda Central. Wikipedia
- Pan American Unity. Wikipedia
- Anahuacalli Museum. Wikipedia
- Bertram D. Wolfe, The Fabulous Life of Diego Rivera. Stein and Day, 1963
- Desmond Rochfort, Mexican Muralists: Orozco, Rivera, Siqueiros. Laurence King, 1993
함께 보기
- 프리다 칼로몸과 정체성, 관계, 개인적 경험을 탐구한 자화상으로 알려진 멕시코 화가.
- 테노치티틀란텍스코코호의 섬에 세워진 멕시카의 수도로, 1521년에 정복되었다.
- 피렌체 코덱스나우아틀어와 에스파냐어를 나란히 쓰고 2,500점 가까운 그림을 그려 넣어 1575~1577년 틀라텔롤코에서 완성한 12권짜리 나우아(아스테카) 생활 백과사전.
- 게르니카파블로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 중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폭격에 반응해 1937년에 그린 대형 회화.
-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미켈란젤로가 1508~1512년에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프레스코화다.
- 10월 혁명1917년 10월 볼셰비키 세력이 페트로그라드의 임시정부를 무너뜨리며 혁명과 내전의 새 국면이 열렸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