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Volta della Cappella Sistina

1508–1512년 · 바티칸 (로마)

한 문장으로

미켈란젤로는 1508년부터 1512년까지 바티칸 교황 예배당의 둥근 천장을 300명이 넘는 인물로 채워, 세상의 창조에서 노아에 이르는 성경 이야기와 그것을 둘러싼 예언자·무녀·그리스도의 조상들을 그렸어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이미지: Michelangelo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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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바닥에서 약 20미터, 6층 건물 높이의 나무 발판 위에서 4년 동안 머리 위 천장에 그림을 그린다고 상상해 보세요. 화가 미켈란젤로가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에서 한 일이 바로 그거예요. 사실 누워서 그린 게 아니라 주로 서서 몸을 뒤로 젖히고 그렸는데, 목과 허리가 끔찍하게 아팠다고 해요.

미켈란젤로는 스스로를 화가가 아니라 조각가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교황 율리오 2세는 그에게 꼭 천장을 그리라고 했어요. 처음에 교황은 열두 사도만 그리기를 원했지만, 미켈란젤로는 그 계획이 '초라하다'고 말하고 훨씬 큰 그림을 설계했어요.

천장 한가운데에는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의 장면 아홉 개가 줄지어 있어요. 하느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고, 해와 달을 만들고,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고, 노아와 대홍수 이야기가 이어져요. 가장 유명한 장면은 하느님이 손을 뻗어 아담의 손가락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모습이에요.

그 둘레에는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미리 알았다고 여겨진 지혜로운 예언자와 무녀들이 커다랗게 앉아 있어요. 옷을 입지 않은 젊은이들, 돌처럼 보이게 그린 장식, 창문 위 반달 모양 공간 속 가족들도 있어요.

미켈란젤로는 프레스코로 그렸어요. 젖은 회반죽 위에 그림을 그려서, 반죽이 마르면 색이 벽의 일부가 되는 방법이에요. 반죽이 마르기 전에 한 부분을 끝내야 해서 빠르고도 꼼꼼하게 일해야 했어요.

한눈에 보기

화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 준비 작업과 일부 채색에 조수들이 참여
제작 시기
1508년 5월 계약, 1508/09~1512년 작업, 1512년 10월 31일 공개
주문자
교황 율리오 2세(재위 1503~1513). 성당을 지은 식스토 4세의 조카
장소
바티칸 시국 사도 궁전의 시스티나 성당(로마)
기법
부온 프레스코(젖은 석회 회반죽 위에 그리기). 일부 마무리는 마른 회반죽 위에
규모
바닥에서 약 20m 높이, 500㎡가 넘는 궁륭 천장
내용
창세기 9장면, 예언자 7명과 무녀 5명, 이뉴디 20명, 모서리 삼각 궁륭 4개, 스팬드럴과 루네트의 그리스도 조상들. 인물 300명 이상
이후
1536~1541년 제단 벽에 「최후의 심판」 추가. 1980~1989년 천장 세척(논쟁적 복원)

쉬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란

시스티나 성당은 바티칸에 있는 교황의 거처, 사도 궁전의 중심 예배당이다. 1477년부터 1480년까지 교황 식스토 4세(식스투스 4세)를 위해 지어져 그 이름을 땄다. 얕은 원통형 궁륭 천장을 얹은, 높고 소박한 직사각형 건물이다. 교황의 예식이 열리고, 추기경들이 비밀회의인 콘클라베를 열어 새 교황을 뽑는 곳이기도 하다.

처음 지어졌을 때 천장은 화가 피에르 마테오 다멜리아가 파란 바탕에 금빛 별을 그린, 당시 흔한 모습이었다. 옆벽은 1480년대 초 페루지노,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코시모 로셀리 같은 이름난 화가들이 모세와 그리스도의 생애 장면으로 꾸몄다.

1508년 식스토 4세의 조카인 교황 율리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천장을 새로 그리게 했다. 바티칸 박물관은 궁륭의 균열 같은 구조 문제가 장식을 새로 하기로 한 결정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후 4년 동안 미켈란젤로는 사상 가장 야심 찬 그림 가운데 하나를 만들었다. 천장 전체를 하나의 건축적·서사적 구성으로 덮고 300명이 넘는 인물을 그린 것이다.

[1][3][2]

쉬움

천장을 읽는 법

미켈란젤로는 휘어진 천장을 그림으로 그린 건축으로 나누었다. 돌로 조각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물감으로 그린 갈빗대, 코니스(돌림띠), 옥좌들이다. 이 가상의 틀이 커다란 책의 쪽과 여백처럼 여러 부분을 정리해 준다.

가운데에는 창세기의 직사각형 장면 아홉 개가 셋씩 세 묶음으로 이어진다. 제단 위에서 입구 쪽으로 가면서 빛과 어둠의 분리, 해와 달과 식물의 창조, 물과 땅의 분리, 아담의 창조, 하와의 창조, 유혹과 낙원 추방, 노아의 제사, 대홍수, 노아의 만취가 차례로 나온다. 작은 장면 다섯 개와 큰 장면 네 개가 번갈아 놓였다.

작은 장면의 네 귀퉁이에는 '이뉴디'라 부르는 근육질의 벌거벗은 청년 스무 명이 앉아, 열왕기 이야기를 새긴 청동색 메달에 연결된 띠를 붙들고 있다. 가장자리의 커다란 옥좌에는 열두 명의 선견자가 앉아 있다. 히브리 예언자 일곱(즈카르야, 요엘, 이사야, 에제키엘, 다니엘, 예레미야, 요나)과 그리스·로마 세계의 무녀 다섯(델포이, 에리트레아, 쿠마이, 페르시아, 리비아)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무녀들도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다고 믿었으므로, 이들은 유대 바깥 세계의 증인으로 이 자리에 있다.

삼각형의 스팬드럴과 창문 위 반달 모양 루네트에는 마태오 복음서 첫머리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조상들이 기다리고 쉬고 아이를 돌보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네 모서리의 큰 삼각 궁륭(펜던티브)에는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극적인 이야기가 있다. 다윗과 골리앗,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구리 뱀, 하만의 처벌이다.

[1][3]

쉬움

「아담의 창조」와 유명한 장면들

「아담의 창조」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된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 왼쪽에는 아담이 헐벗은 초록 언덕에 누워 있다. 몸은 완벽하지만 아직 힘이 없다. 오른쪽에서는 수염을 휘날리는 힘찬 노인으로 그려진 하느님이 부풀어 오른 망토 속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앞으로 달려든다. 두 사람의 뻗은 손가락이 거의 닿을 듯하다. 그 작은 틈은 첫 인간에게 생명이 건너가기 바로 직전의 순간이다.

다른 인물들도 그만큼 찬탄을 받는다. 리비아 무녀는 몸을 비틀어 커다란 책을 덮는데, 미켈란젤로는 이 복잡한 자세를 남성 모델을 보고 붉은 분필로 그린 유명한 소묘로 연구했다. 제단 위의 예언자 요나는 몸을 뒤로 크게 젖히고 있어서, 보는 사람 쪽으로 휘어 나온 면에 그려졌는데도 뒤로 물러나 보인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보낸 사흘은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 부활의 표징으로 이해되었으니, 제단 위라는 자리와 잘 맞는다.

초기에 그린 「대홍수」에는 높은 곳으로 오르려 몸부림치는 작은 인물들이 가득하다. 반면 「아담의 창조」나 「빛과 어둠의 분리」처럼 나중에 그린 장면은 인물이 적고 훨씬 크다. 바닥에서 보면 이 변화가 뚜렷하다. 미켈란젤로는 아래에서 천장이 어떻게 보이는지 경험을 쌓으면서 인물을 더 크고 대담하고 단순하게 그렸다.

[3][5]

중급

제작 방법: 비계, 카툰, 프레스코

미켈란젤로는 1508년 5월 8일 계약서에 서명했다. 먼저 비계(작업 발판)를 세워야 했다. 전기 작가 아스카니오 콘디비에 따르면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가 천장에 구멍을 뚫어 밧줄로 매다는 비계를 제안했지만, 미켈란젤로는 구멍이 남는다며 거절했다. 실제로는 창문 위 높은 곳의 벽에 박은 들보로 받친, 다리 같은 나무 발판을 썼다. 덕분에 아래 바닥은 예식에 쓸 수 있었다. 발판은 성당의 일부만 덮었고, 천장 절반을 마치면 옮겼다.

미켈란젤로는 많은 소묘와 실물 크기 밑그림인 카툰을 만들었다. 카툰의 윤곽선은 회반죽에 눌러 선을 새기거나, 바늘구멍을 뚫고 숯가루를 두드려 찍는 방식으로 옮겼다. 가까이서 보면 두 방법의 흔적이 모두 남아 있다.

프레스코에서는 하루에 그릴 수 있는 만큼만 새 석회 회반죽을 바르는데, 이를 조르나타('하루치 일')라고 한다. 물에 갠 안료는 회반죽이 마르면서 화학적으로 결합한다. 실수는 회반죽을 긁어내고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고치기 어렵다. 작업 초기에 「대홍수」에 곰팡이가 피었는데, 전기 작가들은 미켈란젤로가 일이 실패했다고 걱정하다가 회반죽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고 전한다.

전설처럼 미켈란젤로가 완전히 혼자 일한 것은 아니다. 그는 프란체스코 그라나치, 줄리아노 부자르디니 등 피렌체 화가 몇 사람을 불렀고, 여러 조수가 안료를 갈고 회반죽을 준비하고 밑그림을 옮겼다. 그는 초기에 피렌체 화가 일부를 돌려보낸 것으로 보이며, 주요 인물은 직접 그렸다. 조수들이 얼마나 그렸는지는 미술사가들 사이에 여전히 논쟁거리다.

[3][1][7]

중급

전쟁과 돈 문제 속의 4년

미켈란젤로는 아마 1508년 말이나 1509년 초에 입구 쪽 노아 장면부터 그리기 시작해 제단 쪽으로 나아갔다. 곧 성경 이야기를 거꾸로 그린 셈이다. 1510년 무렵 앞쪽 절반을 마쳤고 1511년 8월에 공개했다. 「아담의 창조」와 세상 창조 장면을 포함한 나머지 절반은 더 빠르고 자신 있게 완성했다. 천장 전체는 1512년 10월 31일 공개되었고,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에 성당에서 미사가 열렸다.

이 시기는 혼란스러웠다. 율리오 2세는 볼로냐 같은 도시에 교황의 지배를 되찾으려 몸소 군대를 이끈 '전사 교황'이어서 로마를 자주 비웠다. 미켈란젤로에게 줄 돈이 늦어지기도 했고, 그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로와 돈 걱정, 형제와 아버지에 대한 근심을 털어놓았다. 친구 조반니 다 피스토이아에게 보낸 익살스러운 소네트에서는 수염은 하늘을 향하고 배는 턱밑까지 밀려 올라가며 붓에서 물감이 얼굴로 뚝뚝 떨어진다고 묘사하고, 그림 그리는 자기 모습을 작게 스케치해 곁들였다.

두 절반 사이의 휴지기는 예술적으로도 영향을 남겼다. 1511년 비계를 걷었을 때 미켈란젤로는 처음으로 바닥에서 자기 작업 전체를 볼 수 있었다. 뒤쪽 절반의 인물은 대체로 더 크고 구성은 단순하며 붓질은 자유롭다. 「빛과 어둠의 분리」 같은 후반 장면은 회반죽에 밑그림 흔적이 거의 없이 하루 만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많은 미술사가는 여기서 한 예술가가 거대한 규모로 새 매체를 익혀 간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율리오 2세는 천장이 완성되고 몇 달 뒤인 1513년 2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델라 로베레 가문을 상징하는 참나무 잎과 도토리는 천장 곳곳, 특히 이뉴디가 든 화환에 등장해 주문자를 떠올리게 한다.

[3][1][4][7]

중급

로마, 율리오 2세, 전성기 르네상스

율리오 2세는 로마를 그리스도교 세계의 새 제국 수도로 만들려 했다. 같은 시기에 그는 브라만테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을 맡겼고, 젊은 라파엘로에게 성당에서 몇 걸음 떨어진 교황 거처의 방들, 곧 「아테네 학당」이 있는 방들을 그리게 했다. 그는 1505년 처음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 자신의 거대한 무덤을 조각하게 했는데, 이 사업은 천장화 주문을 비롯해 여러 차례 중단되어 미켈란젤로를 수십 년 동안 괴롭혔다.

1475년 토스카나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나 피렌체에서 수업한 미켈란젤로는 이미 성 베드로 대성당의 대리석 「피에타」와 피렌체의 「다비드」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큰 프레스코를 그려 본 적은 없었다. 조각과 해부학에 대한 그의 지식이 천장화를 빚었다. 많은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조각상처럼 보이며, 이뉴디는 미켈란젤로가 교황 소장품에서 감탄하던 「벨베데레 토르소」 같은 고대 조각을 떠올리게 한다.

천장화는 성당 전체의 일부이기도 하다. 15세기 벽화는 모세의 율법 시대와 그리스도의 은총 시대를 보여 준다. 천장은 여기에 창조에서 노아까지 율법 이전의 시대, 그리고 그리스도를 가리킨 예언자와 무녀를 더해, 성당 전체가 그리스도교의 구원사를 펼쳐 보이게 한다.

[4][3][1]

중급

영향, 그리고 「최후의 심판」

천장이 공개되자마자 화가들이 몰려와 연구했다. 근육질로 몸을 비트는 인물, 대담한 단축법, 영웅적인 규모는 인체 표현의 새 기준이 되었다. 라파엘로의 후기 양식에 그 영향이 보이며, 폰토르모와 로소 피오렌티노 같은 매너리즘 화가들은 길게 늘이고 비튼 자세를 더 밀고 나갔다. 조르조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1550, 1568년 개정)에서 천장화를 미켈란젤로가 고대인과 자연을 모두 뛰어넘은 증거로 내세웠다.

20여 년 뒤 미켈란젤로는 이 성당으로 돌아왔다. 교황 클레멘스 7세 때 주문되어 바오로 3세 때 완성된 「최후의 심판」을 1536년부터 1541년까지 제단 벽에 그렸다. 자리를 마련하려고 이전 벽화와 자신이 그린 루네트 두 개를 없앴다. 「최후의 심판」의 나체 표현은 반종교개혁 시기에 비판을 받았고, 미켈란젤로가 죽은 뒤 일부 인물에 천을 덧그렸다.

수백 년에 걸쳐 판화, 모사본, 뒤이어 사진이 천장화를 세계에 퍼뜨렸다. 오늘날 해마다 수백만 명이 바티칸 박물관 관람 동선을 따라 이 성당을 찾으며, 성당은 여전히 새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에 쓰인다. 특히 하느님과 아담의 맞닿을 듯한 손가락은 창조와 생명의 불꽃을 뜻하는 세계 공통의 시각 기호가 되어 광고·영화·만화에 끝없이 쓰인다.

[3][4]

중급

1980~1989년 복원과 그 비판

수백 년 동안 천장은 촛불과 등잔 그을음, 먼지, 누수로 생긴 소금기, 그리고 18세기 초 안니발레 마추올리를 비롯한 이전 복원가들이 색을 살리려 바른 동물성 아교와 바니시 층으로 어두워졌다. 20세기에는 많은 사람이 미켈란젤로를 어둡고 그늘진 색의 화가로 여겼다.

바티칸은 복원가 잔루이지 콜랄루치의 지휘 아래 대규모 복원을 벌였고, 일본의 닛폰 텔레비전이 독점 촬영권을 받는 대가로 비용을 댔다. 1980년부터 1984년까지 루네트를, 1989년까지 천장을 세척했고 이어 「최후의 심판」 작업이 뒤따랐다. 세척하자 분홍, 연두, 주황, 맑은 파랑 같은 놀랍도록 밝은 색이 드러났다.

결과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미국 미술사가 제임스 벡 등 비판자들은 미켈란젤로가 마지막 그림자와 글레이즈를 아교를 섞은 물감으로 마른 회반죽 위에(아 세코) 덧칠했는데, 복원가들이 때와 함께 그것까지 벗겨 내 인물을 납작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복원팀은 미켈란젤로가 거의 전적으로 참된 프레스코로 그렸고, 벗겨 낸 것은 후대의 때와 아교이며, 밝은 색은 당시 피렌체 회화와 뒤이은 매너리즘의 색채와도 맞는다고 답했다. 오늘날 대다수 전문가는 세척된 천장이 미켈란젤로의 의도에 더 가깝다고 받아들이지만, 미묘한 세부가 사라졌는지는 여전히 논의된다.

[6][3]

심화

학술 논쟁: 도상 계획은 누가 짰고 무엇을 뜻하는가

도상 계획. 천장의 신학적 구성은 창세기, 예언, 족보, 예형론(구약의 사건을 그리스도의 예고로 읽는 방식)을 엮은 복잡한 체계다. 미켈란젤로는 뒷날 편지에서 교황이 자신에게 마음대로 하도록 맡겼다고 썼고, 콘디비의 전기도 이를 되풀이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는 조각가가 신학 자문 없이 이런 학식 있는 구성을 짰을지 의심하며, 아우구스티노회 설교가 에지디오 다 비테르보 같은 교황청 인물을 후보로 제시해 왔다. 다른 학자들은 미켈란젤로가 성경과 단테를 깊이 알았다는 점을 들어 그의 주장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자문가를 밝힌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해석. 20세기 미술사가들은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샤를 드 톨네는 여러 권짜리 미켈란젤로 연구에서 천장을 신플라톤주의적으로, 곧 입구(노아)에서 제단(홀로 있는 하느님)으로 나아가는 영혼의 상승으로 읽었다. 에스더 고든 도슨은 『신국론』의 신학에 근거한 아우구스티누스적 해석을 제안했다. 교황과 델라 로베레 가문의 정치, 또는 성당 예식과 관련된 전례적 의미를 강조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접근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으며, 천장의 여러 겹 구조는 여러 방식의 읽기를 허용한다.

이뉴디. 스무 명의 벌거벗은 청년은 뚜렷한 문헌 근거가 없다. 천사, 고대 조각 전통의 이상적 인간미, 델라 로베레 가문의 참나무 화환을 든 이, 인간과 신의 영역 사이에 있는 존재 등으로 설명되어 왔다. 이들의 나체도 「최후의 심판」처럼 16세기에 비판을 받았다.

현대의 주장. 숨은 해부학 이미지를 찾아내는 현대의 주장도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의사 프랭크 메시버거가 1990년에 「아담의 창조」의 하느님과 천사들이 사람 뇌의 윤곽을 이룬다고 주장한 것이다. 흥미롭지만 추측에 머물며, 미켈란젤로의 해부학 연구가 잘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의도된 상징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므로 대부분의 미술사가는 조심스럽게 다룬다.

[3][5][7]

심화

사료와 연구 방법

문헌 사료. 계약서와 지불 기록, 미켈란젤로 자신의 편지와 시, 그리고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1550, 1568)과 콘디비의 『미켈란젤로의 생애』(1553)라는 두 초기 전기가 주요 문헌이다. 두 전기는 미켈란젤로 생전에 쓰였고 부분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귀중하면서도 자기 선전의 성격이 있다. 브라만테가 미켈란젤로를 실패하게 하려고 그림을 떠맡겼다는 식의 이야기는 오늘날 회의적으로 다뤄진다.

소묘. 대영박물관, 우피치, 카사 부오나로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에 천장화와 관련된 소묘 수백 장이 남아 있으며, 리비아 무녀·아담·이뉴디의 습작도 있다. 이를 통해 미켈란젤로가 여성 인물조차 대개 남성 모델을 보고 자세를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물리적 증거. 1980년대 복원 덕분에 회반죽 표면을 가까이서 연구할 수 있었다. 각 조르나타의 경계, 새기거나 찍어 옮긴 선, 미켈란젤로의 작업 속도가 빨라진 과정이 드러났다. 조르나타 수를 세면 작업 속도를 가늠할 수 있고, 뒤쪽 절반을 앞쪽보다 훨씬 빨리 그렸다는 견해를 뒷받침한다. 복원 보고서와 사진은 이제 그 자체로 무엇이 바뀌었는지 알려 주는 1차 사료다.

대중 역사서. 로스 킹의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천장』(2003) 같은 교양서가 이런 자료를 널리 알렸고, 전문 연구는 분업 방식, 부분별 제작 순서, 신학 자문가의 역할을 두고 계속 논쟁하고 있다.

[3][4][6][7]

핵심 개념

프레스코
젖은 석회 회반죽에 그려 색이 벽의 일부가 되게 하는 기법. 속도와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그림으로 그린 건축
착시로 그린 갈빗대·돌림띠·옥좌가 천장을 또렷이 읽히는 체계로 나눈다.
구원사
천장화는 벽화와 함께 창조에서 율법을 거쳐 그리스도에 이르는 그리스도교 역사를 펼쳐 보인다.
예형론
요나나 구리 뱀처럼 구약의 인물과 사건을 그리스도의 예고로 읽는 방식.
영웅적인 인체
조각 같은 근육질 인물로 인체 표현의 새 기준을 세웠다.
예언자와 무녀
히브리 예언자와 이교의 선견자를 나란히 두어 온 인류가 그리스도를 기다렸다는 생각을 나타낸다.
복원 논쟁
1980년대 세척은 밝은 색을 되살렸지만 무엇을 잃었는지 묻게 했다. 보존 윤리의 대표적 사례다.

기록

  1. 1477년 — 교황 식스토 4세 때 시스티나 성당 건축이 시작되다(1480년까지).
  2. 약 1482년 — 페루지노,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등이 모세와 그리스도 벽화를 완성하다.
  3. 1503년 —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가 교황 율리오 2세로 선출되다.
  4. 1508년 — 미켈란젤로가 천장화 계약서에 서명하다(5월 8일).
  5. 1511년 — 천장의 앞쪽 절반이 공개되다(8월).
  6. 1512년 — 완성된 천장화가 공개되다(10월 31일).
  7. 1513년 — 율리오 2세가 세상을 떠나다(2월).
  8. 1536년 — 미켈란젤로가 제단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 시작하다(1541년 완성).
  9. 1553년 — 아스카니오 콘디비가 『미켈란젤로의 생애』를 펴내다.
  10. 1564년 —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세상을 떠나다(2월 18일).
  11. 1980년 — 루네트부터 현대 복원이 시작되다.
  12. 1989년 — 천장 세척이 끝나다.

용어 풀이

부온 프레스코
'참된 프레스코'. 갓 바른 젖은 석회 회반죽에 물에 갠 안료로 그리는 방법.
아 세코
마른 회반죽 위에 아교 같은 접착제를 섞은 안료로 그리는 방법. 참된 프레스코보다 덜 견고하다.
조르나타
하루에 바르고 그린 회반죽 구역. 구역 사이 이음매를 추적할 수 있다.
카툰
벽에 도안을 옮기기 위해 쓰는 실물 크기 밑그림.
원통형 궁륭
반원통이나 얕은 곡면이 방의 길이 방향으로 이어지는 천장.
스팬드럴
아치나 궁륭 곡면 사이의 대략 삼각형인 면.
루네트
반달 모양의 벽면. 여기서는 각 창문 위의 공간.
펜던티브
궁륭 모서리의 휘어진 삼각형 부분.
이뉴디
이탈리아어로 '나체들'. 작은 창세기 장면을 둘러싼 스무 명의 앉은 남성상.
무녀(시빌라)
고대 그리스·로마의 여성 예언자.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예언했다고 믿었다.
콘클라베
추기경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새 교황을 뽑는 회의. 시스티나 성당에서 열린다.

묻고 답하기

미켈란젤로는 누워서 그렸나요?

아마 아니에요. 서서 머리 위를 그릴 수 있는 발판을 설계해 몸을 뒤로 젖히고 그렸어요. 그가 쓴 우스운 시에는 목과 허리가 얼마나 아팠는지 적혀 있어요.

혼자서 다 그렸나요?

전체를 설계하고 주요 인물은 직접 그렸지만, 조수들이 회반죽을 준비하고 밑그림을 옮기고 일부를 칠하는 걸 도왔어요. 조수들이 얼마나 그렸는지는 아직 논쟁 중이에요.

얼마나 걸렸나요?

약 4년이에요. 1508년 5월에 계약하고 1512년 10월 31일에 공개했어요.

그리스도교 성당에 왜 이교의 무녀가 있나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몇몇 무녀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다고 믿었어요. 히브리 예언자 곁에 두어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이 그리스도를 기다렸다는 뜻을 담았어요.

복원 뒤에 색이 왜 그렇게 밝아졌나요?

복원가들이 수백 년 묵은 그을음과 옛 아교를 걷어 냈기 때문이에요. 미켈란젤로가 직접 한 마무리 음영까지 지워졌다는 비판도 있지만, 복원팀과 대다수 전문가는 밝은 색이 원래 색이라고 봐요.

천장에 무엇을 그릴지는 누가 정했나요?

미켈란젤로는 교황이 마음대로 하게 맡겼다고 했어요. 많은 학자는 신학자가 조언했으리라 짐작하지만, 그 이름을 적은 문서는 없어요.

「최후의 심판」도 천장화에 들어가나요?

아니요. 제단 벽에 있는 그림으로, 미켈란젤로가 20여 년 뒤인 1536~1541년에 그렸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Sistine Chapel: The Ceiling. 바티칸 박물관
  2.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위키백과
  3. Sistine Chapel ceiling. Wikipedia
  4. Michelangelo. Wikipedia
  5. The Creation of Adam. Wikipedia
  6. Restoration of the Sistine Chapel frescoes. Wikipedia
  7. Ross King, Michelangelo and the Pope’s Ceiling. Walker & Company, 2003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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