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모나리자

La Gioconda / La Joconde

1503–1519년 · 피렌체 (피렌체 공화국)

한 문장으로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1503년 무렵 피렌체의 여인 리자 게라르디니를 그리기 시작해 여러 해 동안 손본 작은 초상화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 되었어요.

모나리자
이미지: Leonardo da Vinci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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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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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500년도 더 전, 이탈리아 피렌체에 살던 비단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가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아내 리자의 초상화를 부탁했어요. 레오나르도는 그림을 시작했지만 끝내 그 가족에게 건네지 않았어요. 평생 그림을 가지고 다니며 조금씩 붓을 더했지요.

그림은 생각보다 작아요. 큰 교실 포스터를 반으로 접은 정도예요. 캔버스가 아니라 포플러 나무로 만든 얇은 판자 위에 유화 물감으로 그렸어요.

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세요. 입과 눈 둘레에 딱딱한 선이 없어요. 레오나르도는 연기가 퍼지듯 색을 아주 부드럽게 섞었어요. 그래서 그림의 어느 곳을 보느냐에 따라 미소가 달라 보여요. 이런 부드러운 표현을 이탈리아어로 연기를 뜻하는 말에서 따와 '스푸마토'라고 불러요.

리자 뒤에는 꿈속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어요. 구불구불한 길, 다리, 바위산, 그리고 푸른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물이 보여요. 레오나르도는 멀리 있는 것일수록 흐리고 파랗게 보인다는 걸 알아차리고 그렇게 그려서 풍경이 깊어 보이게 했어요.

지금 모나리자는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두꺼운 보호 유리 뒤에 걸려 있어요. 1911년에는 한 남자가 이 그림을 훔쳐 가서 2년 넘게 사라졌다가 피렌체에서 되찾았어요. 해마다 수백만 명이 이 그림을 보러 오고, 세상의 온갖 물건에 모나리자가 그려지고 흉내 내어졌어요.

한눈에 보기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제작 시기
1503년 무렵 피렌체에서 시작, 여러 해에 걸쳐 작업(1517년 무렵 또는 그 뒤까지 손보았을 가능성). 완성 연도는 확실하지 않음
모델
피렌체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리자 게라르디니(1479~1542)로 보는 것이 일반적
재료
포플러 나무판에 유화
크기
약 77 × 53cm(루브르 소장품 목록은 79.4 × 53.4cm)
소장
파리 루브르 박물관(INV 779). 16세기부터 프랑스 왕실 소장
다른 이름
라 조콘다(이탈리아어), 라 조콩드(프랑스어). '모나'는 '마돈나(부인)'의 줄임말
특징
스푸마토 기법, 알 듯 모를 듯한 미소, 대기 원근법으로 그린 풍경, 근대 이후의 압도적 명성

쉬움

모나리자는 어떤 그림인가

모나리자는 이탈리아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나무판에 유화로 그린, 앉아 있는 여인의 반신 초상화다. 허리 위쪽을 보여 주며, 몸을 살짝 비스듬히 돌린 채 한 손을 다른 손 위에 포개고 있다. 어두운 옷을 입고 머리에는 비칠 만큼 얇은 베일을 썼으며, 옅은 미소를 띤 채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모나리자'라는 이름은 16세기 화가이자 미술가 전기 작가인 조르조 바사리에게서 나왔다. 그는 이 그림을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모나 리자'의 초상이라고 적었다. '모나'는 '나의 부인'을 뜻하는 '마돈나'를 줄인 말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라 조콘다, 프랑스에서는 라 조콩드라고 부르는데, 둘 다 '즐거운'이라는 뜻도 지닌 가문 이름 조콘도를 살린 이름이다.

그림은 지금 프랑스 국가 소유로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다. 워낙 유명하고 약하기 때문에 방탄유리를 두른 항온·항습 진열장 안에 전시되며, 관람객은 인파 속에서 잠깐 동안만 그림을 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3][1][2]

쉬움

그림을 보는 법

먼저 얼굴을 보자. 레오나르도는 입술이나 눈꼬리에 뚜렷한 윤곽선을 긋지 않았다. 대신 거의 투명한 아주 얇은 물감 층을 여러 번 겹쳐 그림자를 쌓아 올려, 빛이 그늘로 부드럽게 넘어가게 했다. 입꼬리와 눈꼬리가 흐릿하게 남아 있어서 표정이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입을 똑바로 보면 미소가 사라지는 듯하고, 눈을 보면 다시 미소가 떠오르는 듯하다.

다음은 자세다. 여인은 왼쪽 아래에 팔걸이가 보이는 의자에 앉아 몸은 비스듬히, 머리는 좀 더 우리 쪽으로 돌리고 있다. 두 손까지 온전히 보여 주는 이 편안하고 비틀린 자세는 피렌체 초상화에서 새로운 것이었고, 젊은 라파엘로를 비롯한 화가들이 곧 따라 했다. 인물은 아래의 손에서 위의 머리까지 안정된 삼각형(피라미드) 구도를 이룬다.

그다음은 배경이다. 여인은 기둥이 받치는 지붕 달린 발코니, 곧 로지아에 앉아 있으며, 좌우 가장자리에 기둥 밑동이 살짝 보인다. 난간 너머로는 거친 풍경이 펼쳐진다. 구불구불한 길, 오른쪽의 여러 아치를 가진 다리, 바위 봉우리와 호수가 있다. 왼쪽 지평선이 오른쪽보다 낮아 보여 어딘가 불안하고 꿈같은 느낌을 더한다. 먼 산은 푸르스름한 안개 속으로 흐려지는데, 이를 대기 원근법이라 하며 레오나르도는 노트에서 이것을 꼼꼼히 연구했다.

마지막으로 없는 것을 살펴보자. 여인은 보석을 하나도 하지 않았고, 누구인지 알려 주는 문장(紋章)이나 글씨도 없다. 눈썹과 속눈썹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자주 지적된다. 아주 섬세하게 그렸던 것이 세척 과정에서 지워졌다는 기술 조사 결과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3][6]

쉬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누구인가

레오나르도는 1452년 4월 15일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 빈치 또는 그 근처에서 태어났다. 10대에 피렌체의 조각가이자 화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수업을 받았다. 이후 밀라노 공작 밑에서 일하며(대략 1482~1499년) 「최후의 만찬」을 그렸고, 피렌체로 돌아와 모나리자를 시작했다.

레오나르도는 거의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졌다. 수천 쪽에 이르는 그의 노트에는 해부학, 물, 비행, 식물, 기계, 빛과 그림자에 관한 연구가 가득하다. 그는 근육과 뼈를 이해하려고 인체를 해부했고, 둥근 물체에 빛이 어떻게 떨어지는지 연구했다. 이런 관찰이 모나리자의 부드러운 얼굴 표현, 손의 구조, 풍경 속 지질과 물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작품을 끝내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완성한 그림이 많지 않았고, 그마저 여러 해 동안 곁에 두는 일이 잦았다. 모나리자가 좋은 예다. 그는 이 그림을 조콘도 가족에게 넘기지 않고 밀라노와 로마를 거쳐 프랑스까지 가져갔으며, 1519년 5월 2일 앙부아즈 근처 클로 뤼세에서 프랑수아 1세의 손님으로 세상을 떠났다.

[5][3]

중급

모델 리자 게라르디니와 그 가족

리자 게라르디니는 1479년 6월 15일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오래된 가문이었지만 예전의 재산과 영향력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1495년 열다섯 살 무렵, 그녀는 비단과 직물을 다루는 성공한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와 결혼했다. 프란체스코는 나이가 꽤 많았고 재혼이었다. 부부는 여러 자녀를 두었고 리자는 의붓아들도 함께 키웠다. 이탈리아 연구자 주세페 팔란티 등의 문서고 조사로 세금 기록, 계약서, 교회 문서를 통해 그녀의 삶이 상당히 복원되었다.

프란체스코는 왜 1503년 무렵 초상화를 주문했을까. 역사가들은 1502년 12월 아들 안드레아의 탄생과 비슷한 시기의 새집 구입을 계기로 꼽는다. 아내의 초상은 넉넉한 상인 가문이 체면과 행운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얇은 베일과 어두운 옷은 점잖은 피렌체 기혼 여성의 차림에 들어맞는다. 이를 상복이나 임신의 표시로 읽으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리자는 1538년 또는 1539년에 세상을 떠난 남편보다 오래 살았고, 두 딸이 수녀가 된 피렌체의 산토르솔라 수녀원과 가까이 지내며 말년을 보냈다. 1542년 7월 15일(7월 14일로 적는 자료도 있다) 세상을 떠났다. 가족은 끝내 초상화를 받지 못했고, 조콘도 집안 사람이 완성된 그림을 보았다는 기록도 없다.

[4][7]

중급

언제, 어떻게 그렸나

시작 시점은 르네상스 그림으로서는 드물게 잘 기록되어 있다. 2005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도서관의 사서 아르민 슐레히터가 키케로 인쇄본의 여백에 적힌 손글씨 메모를 찾아냈다. 1503년 10월 피렌체 정부 서기국의 보좌관 아고스티노 베스푸치가 쓴 이 메모는 레오나르도를 고대 화가 아펠레스에 견주며, 그가 리자 델 조콘도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고 적었다. 이로써 1503년에 초상화가 이미 진행 중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때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정부의 거대한 벽화 「앙기아리 전투」도 맡고 있었다.

완성 시점은 훨씬 불확실하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4년 동안 그리다 미완성으로 남겼다고 썼다. 1517년 프랑스로 레오나르도를 찾아간 비서 안토니오 데 베아티스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요청으로 '실물을 보고 그린 어느 피렌체 부인'의 초상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많은 학자는 이것이 모나리자이며, 레오나르도가 로마와 프랑스에서도 계속 손을 댔다고 본다. 그래서 루브르는 제작 시기를 1503~1519년으로 넓게 잡는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에서 흔히 쓰던 포플러 판자 한 장에 흰 바탕칠을 하고 그렸다. 유화 물감을 두께가 몇 마이크로미터에 불과한 극히 얇은 글레이즈로 여러 겹 덧칠해 깊이와 부드러운 이행을 만들었다. 적외선·X선 조사에서는 손가락 위치나 베일 등에서 생각을 바꾼 흔적(펜티멘토)이 드러났다. 세월이 흐르며 옛 바니시가 누렇게 변해 지금은 레오나르도가 의도한 것보다 따뜻하고 어둡게 보인다. 루브르는 위험 때문에 지금까지 세척하지 않기로 했다.

판자 양옆이 잘려 나가 기둥이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돌았다. 그러나 가장자리를 자세히 조사한 결과 판자는 크게 잘리지 않았고, 가장자리의 기둥 밑동은 처음부터 일부만 보이게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문제는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3][4][1][7]

중급

피렌체와 전성기 르네상스

1500년 무렵 피렌체는 공화국이었다. 15세기 대부분 도시를 좌우한 메디치 가문은 1494년에 쫓겨났고, 설교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1498년에 처형되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이 시기 정부 서기국에서 일했고, 미켈란젤로는 「다비드」(1501~1504)를 조각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같은 회의장 벽에 서로 경쟁하듯 전투 장면을 그리라는 주문까지 받았다.

초상화도 변하고 있었다. 이전 피렌체의 여성 초상은 동전의 인물처럼 엄격한 옆모습이 많았고, 보석과 좋은 옷으로 신분을 드러냈다. 플랑드르 화가들이 4분의 3 측면과 풍경 배경을 선보였고 이탈리아 화가들은 이를 높이 샀다. 레오나르도는 이런 요소에 자신의 빛과 해부학 연구를 결합해, 살아서 생각하며 우리를 마주 보는 사람 같은 초상을 만들었다.

모나리자는 곧 다른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504~1508년 무렵 피렌체에 있던 라파엘로는 이 그림을 바탕으로 소묘를 남겼고, 「마달레나 도니의 초상」 같은 작품에 그 자세를 썼다. 레오나르도 주변에서 모사본도 만들어졌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의 모사본은 2012년 세척 뒤, 원작과 같은 시기에 레오나르도 공방에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그렸을 것으로 여겨지며, 바니시가 변색되기 전 색채를 짐작하게 해 준다.

[3][5]

중급

레오나르도의 작업실에서 루브르까지

레오나르도가 죽은 뒤 그림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소장품이 되었다. 정확한 경위는 논쟁거리다. 레오나르도의 오랜 조수 살라이가 어느 시점에 이 그림, 또는 그 한 판본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525년 작성된 그의 유산 목록에 '라 조콘다'라는 그림이 올라 있다. 일부 역사가는 프랑수아 1세가 레오나르도 생전에 살라이에게서 원작을 샀다고 보며, 루브르 소장품 목록은 왕이 1518년에 입수했다고 적는다.

그림은 거의 300년 동안 프랑스 왕실 소유로 퐁텐블로 궁전, 뒤이어 베르사유 궁전에 있었다. 프랑스 혁명 뒤 왕실 소장품이 국가 재산이 되면서 루브르의 새 공공 박물관에 배정되었다. 1800년 무렵 몇 해 동안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튀일리 궁전 침실에 걸어 두었다가 다시 박물관으로 돌려보냈다.

전쟁 때에는 안전을 위해 옮겨졌다. 1870~1871년과 두 차례 세계대전 때 파리 밖으로 보내졌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폭격과 약탈을 피해 샹보르를 비롯한 프랑스 시골의 여러 성에 숨겨졌다.

[3][1]

중급

1911년 도난 사건과 아이콘의 탄생

19세기까지 모나리자는 화가와 감식가들의 찬탄을 받았지만 다른 많은 르네상스 그림보다 특별히 더 유명하지는 않았다. 낭만주의 작가들이 이 여인을 신비롭고 매혹적인 존재로 묘사하기 시작했고, 1869년 영국 비평가 월터 페이터의 유명한 글은 그 미소를 수수께끼의 상징으로 만드는 데 한몫했다.

1911년 8월 21일 그림이 루브르에서 사라졌다. 범인은 박물관에서 보호 유리 설치 작업을 한 적이 있는 이탈리아인 노동자 빈첸초 페루자였다. 그는 박물관이 문을 닫은 날 그림을 벽에서 떼어 액자를 벗기고 작업복 속에 숨겨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림은 2년 넘게 행방이 묘연했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잠시 체포되었고 파블로 피카소도 조사를 받았다. 1913년 12월 페루자가 피렌체의 미술상 알프레도 제리에게 그림을 팔려다 신고로 붙잡혔다. 그는 그림을 이탈리아에 돌려주고 싶었다고 주장했다. 그림은 피렌체·로마·밀라노에서 전시된 뒤 1914년 1월 파리로 돌아왔다.

전 세계 신문이 도난과 회수를 보도하면서 모나리자는 누구나 아는 이름이 되었다. 20세기 예술가들은 이 그림을 의심하거나 조롱할 '고급 예술'의 상징으로 썼다. 1919년 마르셀 뒤샹은 복제 엽서에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려 넣었고(「L.H.O.O.Q.」), 1963년 앤디 워홀은 이 그림을 되풀이한 실크스크린 「서른 개가 하나보다 낫다」를 만들었다. 그림은 1962~1963년 미국을 순회해 100만 명을 훌쩍 넘는 관람객을 모았고, 1974년에는 도쿄와 모스크바에서 전시되었다.

공격을 받은 적도 있다. 1956년 한 관람객이 던진 돌에 왼쪽 팔꿈치 근처 물감이 조금 떨어져 나갔고, 이후 보호 유리 뒤에 전시되고 있다. 2022년 유리에 케이크를 문지른 일, 2024년 수프를 끼얹은 일 같은 최근 사건은 그림 자체에 해를 입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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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학술 논쟁: 모델, 주문, 완성

모델의 신원. 모델이 리자 델 조콘도라는 바사리의 기록은 사건 수십 년 뒤인 1550년에, 그림을 직접 보지 못한 저자가 출판한 것이어서 오랫동안 조심스럽게 다뤄졌다. 이사벨라 데스테, 코스탄차 다발로스,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연인, 이상화된 여성, 심지어 레오나르도의 변장한 자화상이라는 설까지 나왔다. 오늘날에는 1503년 베스푸치 메모가 그해 레오나르도가 리자 델 조콘도를 그리고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여전히 논쟁이 되는 것은 루브르의 그림이 바로 그 초상인지, 그리고 뒤에 얼마나 바뀌었는지다.

데 베아티스 문제. 1517년 데 베아티스의 기록은 피렌체 부인의 초상을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가 아니라 줄리아노 데 메디치와 연결한다. 학자들은 이를 여러 방식으로 설명한다. 레오나르도가 로마에서 그의 후원을 받던 시기에 줄리아노가 초상을 계속 그리도록 권했을 수 있고, 데 베아티스나 그에게 설명한 사람이 착각했을 수도 있으며, 프랑스에서 본 그림이 다른 작품이었을 수도 있다. 조콘도 가족용과 나중 판본, 두 점의 초상이 있었다는 설도 나왔지만, 대다수 전문가는 루브르의 그림을 1503년에 시작한 단 하나의 원작으로 본다.

아일워스 모나리자와 다른 판본. 좌우에 기둥이 있고 더 젊어 보이는 여인을 그린 이른바 '아일워스 모나리자'는 20세기 초부터 레오나르도의 초기 판본으로 홍보되어 왔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전문가 대부분은 이 귀속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면 프라도 모사본은 원작과 나란히 만든 공방 복제본으로 널리 인정되며, 바니시가 늙기 전 루브르 그림의 모습을 보여 주는 귀중한 증거다.

의미. 그림에 상징을 얼마나 읽어 넣을지에 대해서도 미술사가들의 의견이 갈린다. 풍경을 살아 있는 대지와 시간의 흐름의 이미지로 읽는 이들은 땅의 몸을 사람의 몸에 견준 레오나르도의 노트를 근거로 든다. 다른 이들은 피렌체 결혼·가족 초상의 관례적 요소를 강조한다. 유명한 미소는 광학과 신경과학의 설명도 끌어들였다. 주변 시야가 대비가 낮은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방식 때문에 효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착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말해 주지만 레오나르도가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말해 주지 않는다.

[3][4][7]

심화

증거, 과학, 보존

문헌. 주요 문헌은 1503년 베스푸치의 여백 메모, 1517년 데 베아티스의 여행 일기,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1550, 1568년 개정), 1525년 살라이 유산 목록, 그리고 뒤이은 프랑스 왕실 재산 목록이다. 팔란티 등이 조사한 조콘도 집안 관련 피렌체 문서는 맥락을 알려 주지만 그림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는다.

과학 조사. 20세기부터 X선 촬영, 적외선 반사 촬영, 다중 분광 촬영 등으로 그림을 조사해 왔다. 스푸마토의 얇은 글레이즈 두께를 측정하고 밑그림과 수정 흔적을 밝혀냈다. 2004~2005년 루브르는 프랑스 국립박물관 연구소(C2RMF)와 함께 대규모 기술 조사를 벌였다. 공학자 파스칼 코트가 보이는 초상 아래에 다른 초상이 숨어 있다고 주장한 것처럼, 새로운 영상 기법에 근거한 주장은 언론의 큰 관심을 끌었지만 많은 전문가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러 겹의 물감을 찍은 다중 분광 영상은 과잉 해석하기 쉽다는 경고다.

보존. 포플러 판자 위쪽에는 오래전에 안정 처리한 균열이 있고, 나무는 습도에 반응한다. 그림은 습도와 온도를 조절하는 밀폐 진열장에 보관되며 대개 해외에 대여하지 않는다. 변색된 바니시를 세척하는 문제는 매우 논쟁적이다. 찬성하는 쪽은 레오나르도의 색이 드러날 것이라 하고, 반대하는 쪽은 몇 마이크로미터에 불과한 글레이즈가 손상될까 걱정한다.

전시. 그림은 2005년부터 루브르의 '국가의 방(살 데 제타)'에 걸려 있는데, 해마다 1,000만 명 가까운 관람객이 몰려 관람 환경이 나쁘기로 악명 높다. 2025년 프랑스 정부는 루브르 대규모 개보수의 일환으로 모나리자 전용 공간을 새로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런 사업의 세부 내용과 일정은 바뀔 수 있다.

[3][1][8]

핵심 개념

스푸마토
선이나 경계 없이 색조를 아주 부드럽게 섞어, 형태가 연기처럼 그늘에서 떠오르게 하는 레오나르도의 기법.
대기 원근법
먼 곳의 사물을 더 흐리고 푸르고 희미하게 그려 거리감을 나타내는 방법. 리자 뒤의 풍경에 쓰였다.
알 듯 모를 듯한 미소
입꼬리와 눈꼬리를 흐릿하게 처리해,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표정이 달라 보이게 한다.
새로운 초상화
두 손까지 보이는 4분의 3 측면 반신상과 풍경 배경은 르네상스 초상화의 본보기가 되었다.
미완의 걸작
레오나르도는 그림을 넘기지 않고 여러 해 동안 다시 손봐, 주문 작품과 개인 작업의 경계를 흐렸다.
역사로서의 명성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라는 지위는 19세기의 글, 1911년 도난, 현대 대중매체에 크게 힘입었다.
보존의 딜레마
약한 나무판과 누렇게 변한 바니시 때문에, 지금 모습을 지킬지 원래 모습을 되찾으려 할지가 문제가 된다.

기록

  1. 1452년 —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토스카나의 빈치 또는 그 근처에서 태어나다(4월 15일).
  2. 1479년 — 리자 게라르디니가 피렌체에서 태어나다(6월 15일).
  3. 1495년 — 리자가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와 결혼하다.
  4. 1503년 — 10월, 아고스티노 베스푸치가 레오나르도가 리자 델 조콘도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고 메모하다.
  5. 1517년 — 안토니오 데 베아티스가 프랑스의 레오나르도 작업실에서 피렌체 부인의 초상을 보다.
  6. 1519년 — 레오나르도가 앙부아즈 근처 클로 뤼세에서 세상을 떠나다(5월 2일). 그림은 프랑스 왕실 소장품이 되다.
  7. 1550년 — 조르조 바사리가 『미술가 열전』에서 모델을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모나 리자라고 적다.
  8. 약 1797년 — 혁명 뒤 그림이 루브르의 새 공공 박물관에 놓이다.
  9. 1911년 — 빈첸초 페루자가 루브르에서 그림을 훔치다(8월 21일).
  10. 1913년 — 12월 피렌체에서 그림을 되찾고, 1914년 1월 파리로 돌아오다.
  11. 1963년 — 미국 순회 전시(1962~1963) 중 워싱턴과 뉴욕에서 공개되다.
  12. 2005년 — 하이델베르크에서 베스푸치 메모가 확인되다. 그림이 새로 단장한 '국가의 방'으로 옮겨지다.

용어 풀이

패널화
캔버스나 벽이 아니라 평평한 나무판 위에 그린 그림.
글레이즈
아래층의 색이나 깊이를 바꾸려고 덧칠하는 아주 얇고 투명한 유화 물감 층.
스푸마토
이탈리아어 fumo(연기)에서 온 말로, 빛과 그림자 사이를 부드럽게 넘어가게 그리는 방법.
로지아
기둥이 받치고 한쪽 이상이 트인, 지붕 있는 회랑이나 발코니.
펜티멘토
최종 물감층 아래 남아 있는, 화가가 생각을 바꾼 흔적(복수형 펜티멘티).
바니시
그림 표면을 보호하는 투명한 칠. 오래되면 누렇거나 갈색으로 변하기 쉽다.
적외선 반사 촬영
물감층 아래 숨은 밑그림과 수정 흔적을 보여 줄 수 있는 촬영 기법.
공방 모사본
화가의 작업실에서, 흔히 조수가 원작과 나란히 만든 그림의 다른 판본.
전성기 르네상스
레오나르도·미켈란젤로·라파엘로로 대표되는 1490~1520년 무렵의 시기.

묻고 답하기

모나리자는 왜 웃고 있나요?

리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악사와 광대를 불러 그녀를 즐겁게 했다고 썼지만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미소의 효과는 주로 입과 눈 둘레를 부드럽게 칠한 레오나르도의 기법에서 나와요.

그림은 왜 그렇게 작아요?

교회나 궁전 벽이 아니라 가정집에 걸 개인 초상화로 그렸기 때문이에요. 약 77 × 53cm는 그런 초상화로서는 보통 크기였어요.

모나리자는 정말 리자 게라르디니인가요?

대부분의 학자는 그렇다고 봐요. 바사리가 1550년에 그렇게 썼고, 2005년에 발견된 1503년 10월의 베스푸치 메모가 그때 레오나르도가 리자 델 조콘도를 그리고 있었음을 확인해 줘요.

레오나르도는 왜 그림을 리자의 남편에게 주지 않았나요?

확실히는 몰라요. 레오나르도는 작품을 다듬으려고 곁에 두는 일이 많았고, 1506년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갔으며, 이 그림을 주문품이라기보다 자기 예술의 결정체로 여기게 되었을 수 있어요.

왜 이렇게 누렇고 어두워 보여요?

500년 동안 옛 바니시 층이 누렇게 변했기 때문이에요. 레오나르도의 글레이즈는 너무 얇아서 손상될 수 있으니 루브르는 바니시를 벗기지 않기로 했어요.

1911년 도난 사건은 어떻게 그림을 더 유명하게 만들었나요?

2년 넘게 전 세계 신문이 이 이야기를 실었고, 루브르의 빈 벽을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들 정도였어요. 그림을 되찾았을 때 모나리자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있었어요.

학자들은 왜 제작 연대를 1503~1519년으로 넓게 잡나요?

1503년 시작은 기록으로 확인되지만, 1517년에도 방문객이 레오나르도의 작업실에서 이 그림을 보았고 기술 조사에서 뒤늦은 덧칠이 보이기 때문에 완성 연도 하나를 증명할 수 없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Portrait de Lisa Gherardini, épouse de Francesco del Giocondo, dite La Joconde ou Monna Lisa (INV 779).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 데이터베이스
  2. 모나리자. 위키백과
  3. Mona Lisa. Wikipedia
  4. Lisa del Giocondo. Wikipedia
  5. Leonardo da Vinci. Wikipedia
  6. Sfumato. Wikipedia
  7. Martin Kemp, Giuseppe Pallanti, Mona Lisa: The People and the Painting.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8. Donald Sassoon, Mona Lisa: The History of the World’s Most Famous Painting. HarperCollins, 2001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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