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1861년 농노 해방

Крестьянская реформа 1861 года(1861년 농민 개혁), 1861년 2월 19일 선언

1861년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국)

한 문장으로

1861년 농노 해방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선포한 개혁으로, 사유지의 농노 2천만여 명에게 법적 자유를 주었지만 땅값을 수십 년에 걸쳐 무겁게 치르게 하여, 근대 러시아로 가는 길을 열면서 동시에 농촌에 깊은 불만을 남겼다.

1861년 농노 해방
이미지: Boris Kustodiev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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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으로부터 약 165년 전, 거대한 러시아 제국에는 농사짓는 가족 수백만 명이 ‘농노’로 살고 있었어요. 농노는 노예와 똑같지는 않았지만 자유롭지도 않았어요. 지주의 땅을 떠날 수 없었고, 지주의 밭에서 일하거나 돈을 바쳐야 했으며, 허락 없이는 결혼도 이사도 할 수 없었어요.

일주일에 며칠씩 남의 밭에서 일해야 하고, 평생 이사도 못 가고, 그 사람이 마음대로 가족과 떨어뜨려 놓을 수도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많은 농노의 삶이 그랬어요.

1861년 러시아의 황제, 곧 ‘차르’였던 알렉산드르 2세는 ‘선언문’이라는 문서에 서명했어요. 이제 농노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내용이었어요.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집과 가축을 갖고, 재판을 받고,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 큰 문제가 있었어요. 땅은 여전히 지주의 것이었어요. 자기 밭을 가지려면 거의 50년 동안 조금씩 땅값을 갚아야 했어요. 그나마 전에 농사짓던 땅보다 적게 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많은 농민이 실망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차르가 ‘진짜 자유’를 주었는데 관리들이 숨기고 있다고 믿었어요. 몇몇 마을에서는 항의가 일어났고 군대가 출동했어요.

그래도 농노제를 없앤 것은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였어요. 사람들은 지금도 이것이 위대한 해방이었는지, 아니면 반쪽짜리 자유라서 훗날 러시아 혁명의 분노를 쌓아 두었는지를 두고 토론해요.

한눈에 보기

날짜
선언 서명 1861년 2월 19일(율리우스력) = 1861년 3월 3일(그레고리력). 1861년 3월 5일(17일)부터 공포
장소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서명, 제국의 농노 보유 지방 전역에서 시행
군주
황제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1881). 훗날 ‘해방자’로 불림
대상
남녀 약 2,300만 명의 사유지 농노. 1850년대 말 제국 인구의 약 3분의 1
법률 문서
농노 해방 선언과 「농노 신분에서 벗어나는 농민에 관한 법령」(17개 법률)
핵심 내용
즉시 인신의 자유, 마을 공동체에 분여지 지급, ‘일시 의무 농민’ 신분, 49년에 걸친 국가 상환금
후속 조치
황실령 농민 1863년, 국유지 농민 1866년, 1883년 상환 의무화, 1907년부터 상환금 폐지
관련 개혁
1860~1870년대 ‘대개혁’의 하나. 젬스트보 지방자치(1864), 사법 개혁 등

쉬움

농노 해방이란 무엇인가

1861년 농노 해방은 러시아 제국에서 사유지의 농노제를 폐지한 법이다. 그 법적 근거는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옛 러시아 달력(율리우스력)으로 1861년 2월 19일, 서유럽 달력으로는 3월 3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서명한 선언문이었다. 방대한 세부 법령과 함께 이 선언은 약 2,300만 명의 사유지 농노를 법적으로 자유로운 농촌 주민으로 바꾸었다.

러시아에서는 보통 ‘1861년 농민 개혁’이라 부른다. 알렉산드르 2세 치세의 이른바 ‘대개혁’ 가운데 처음이자 가장 중요한 개혁이었고, 이어 새로운 지방 의회가 생기고 법원과 군대가 바뀌었다. 이 개혁 덕분에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 역사에서 ‘해방자 차르’로 불린다.

이 개혁은 타협의 산물이었다. 농노는 즉시 인신의 자유를 얻었다. 더는 사고팔 수 없게 되었고, 지주의 허락 없이 결혼하고, 재산을 갖고, 장사하고, 재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땅은 농민이 분여지를 사들일 때까지 지주의 소유로 남았고, 국가가 돈을 빌려주면 농민이 49년에 걸쳐 갚아야 했다. 진짜 자유와 무거운 부담이 함께 있었기에, 이 개혁이 무엇을 이루었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은 지금도 논쟁한다.

[1][2]

쉬움

러시아의 농노제란 무엇이었나

러시아의 농노제는 16세기 말~17세기 초, 농민이 경작하던 땅을 떠나지 못하게 하면서 생겨났다. 1649년 법전(소보르노예 울로제니예)은 이를 영구적인 규칙으로 못 박았다. 이후 두 세기 동안 지주는 농노에 대해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얻었다. 농노를 다른 영지로 옮기고, 팔고, 벌하고, 지주 직영지에서의 노동(바르시치나)이나 돈·현물 공납(오브로크)을 요구할 수 있었다.

모든 농민이 이런 의미의 농노였던 것은 아니다. 개혁 직전 농민은 크게 국유지 농민, 황실령 농민, 사유지 농민으로 나뉘었다. 약 10만 명의 귀족 지주가 소유한 마지막 집단만이 온전한 의미의 농노였다. 대부분은 ‘미르’라 불린 마을 공동체에 속해 살았는데, 미르는 가구마다 땅을 띠 모양으로 나누어 주고 세금을 책임졌다.

농노제는 유럽 러시아 중부,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서부 변경 일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시베리아, 극북 지방, 핀란드, 캅카스와 중앙아시아 대부분에는 농노가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 흔한 오해와 달리 농노는 제국 인구의 다수가 아니었다. 1857~1859년 조사에서 농노는 약 6,710만 명 가운데 약 2,310만 명이었다.

[3][2][1]

쉬움

러시아는 왜 농노제를 없앴나

러시아의 군주들은 수십 년 동안 개혁을 이야기했다. 파벨 1세는 1797년 노동 부역을 주 3일로 제한하려 했고, 알렉산드르 1세는 1803년 지주가 합의에 따라 농노를 땅과 함께 해방할 수 있게 했다. 1816~1819년 발트 지방인 에스틀란트, 쿠를란트, 리플란트에서는 땅 없이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농민 문제를 다루는 비밀위원회를 열 개 남짓 만들었지만, 강력한 지주들이 실질적인 변화를 막았다.

모든 것을 바꾼 충격은 1853~1856년의 크림 전쟁이었다. 러시아는 자기 영토에서 영국·프랑스·오스만 제국에 패했다. 이 전쟁은 러시아의 경제, 교통, 군대가 얼마나 뒤처졌는지 드러냈다. 많은 관리는 예속된 농민의 나라로는 산업화하는 서구 국가와 경쟁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농민 소요도 늘고 있었다. 한 집계에 따르면 1845~1854년에 348건, 1855~1860년에 474건의 소요가 있었다.

새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1856년 3월 30일 모스크바 귀족들 앞에서, 농민과 지주 사이의 적대감은 이미 존재하며 농노제가 아래로부터 저절로 무너지기를 기다리기보다 위로부터 폐지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말했다. 경제적 압박도 한몫했다. 1850년대에는 귀족 영지와 농노의 약 3분의 2가 국가 신용 기관에 저당 잡혀 있어 지주들의 저항력이 약해져 있었다.

[2][1]

쉬움

개혁은 어떻게 준비되었나

1857년 1월 알렉산드르는 보수적 고관들이 주도하는 농민 문제 비밀위원회를 만들었다. 돌파구는 1857년 11월, 빌나 일대 서부 지방의 총독 V. I. 나지모프에게 내린 칙서(나지모프 칙서)였다. 이 칙서는 지방 귀족들에게 개혁안을 마련할 위원회를 만들라고 지시했고, 모든 지사에게 회람되면서 제국 곳곳의 귀족들은 해방을 논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858년부터 각 현에 귀족 위원회가 열렸는데, 모스크바 귀족이 가장 소극적인 축에 속했다.

정부안은 여러 번 바뀌었다. 초기 구상은 농민에게 인신의 자유만 주고 땅은 모두 지주에게 남기는 것이었다. 농민은 이런 ‘땅 없는 자유’를 두려워했고, 1848년 유럽 혁명을 기억하는 관리들도 땅 없는 농촌 프롤레타리아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1858년 말 야코프 로스톱체프 장군과 연결된 새 계획은 농민에게 분여지를 영구히 쓰게 하고 국가 신용으로 사들일 권리를 약속했다.

1859년 지방안을 법으로 다듬기 위해 로스톱체프를 위원장으로 하는 ‘편찬위원회’가 꾸려졌다. 실제 추진력은 개혁파 관료 니콜라이 밀류틴에게서 나왔다. 1860년 로스톱체프가 죽자 보수적인 빅토르 파닌 백작이 뒤를 이었고, 분여지는 다소 줄고 부담은 늘었다. 위원회는 82개 지방안을 검토했고 자료는 인쇄본 35권에 이르렀다. 1861년 1월 알렉산드르는 봄 농사 전에 발표할 수 있도록 국가평의회에 서둘러 마무리하라고 압박했다.

[2][1]

중급

선언과 법령의 실제 내용

선언과 함께 17개 법률로 이루어진 「농노 신분에서 벗어나는 농민에 관한 법령」이 공포되었다. 옛 농노는 ‘자유로운 농촌 주민’의 권리를 얻었다. 집과 건물, 동산은 그들의 재산이 되었다. 마을 공동체와 그보다 큰 단위인 볼로스트를 통해 선출제 자치가 주어졌다. 농민 매매가 끝났고, 결혼과 가정사에 지주의 허락이 필요 없어졌다.

땅 문제는 전혀 다르게 처리되었다. 지주는 땅의 소유권을 유지하되 농민에게 집터와 경작용 분여지를 내주어야 했는데, 분여지는 개인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에 주어졌다. 땅을 사들일 때까지 농민은 ‘일시 의무 농민’으로서 계속 노동이나 공납을 바쳐야 했고, 처음 9년 동안은 분여지를 거부할 수도 없었다. 분여지 크기와 부담은 지주가 작성하고 ‘조정관’이라는 새 관리가 확인하는 증서에 정해졌다. 지역마다 분여지의 최대·최소 기준이 정해졌다.

땅을 사기 위해 농민은 상환 절차에 들어갔다. 국가가 지주에게 땅값의 대부분, 대체로 75~80퍼센트를 이자부 채권으로 치르고, 농민은 연 6퍼센트 이자를 붙여 49년에 걸쳐 국가에 갚았다. 분여지가 지역 기준보다 크면 지주는 넘치는 부분을 떼어 갈 수 있었는데, 이 ‘잘라낸 땅(오트레즈키)’에는 목초지, 숲, 방목지, 물가로 가는 길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다. 농민은 대신 최대 기준의 4분의 1짜리 무상 ‘빈민 분여지’를 받을 수도 있었다. 땅이 없던 가내 농노는 자유만 얻었다.

[2][1]

중급

공포와 농민의 반응

정부는 소요를 우려해 군대와 경찰을 배치하느라 공포를 약 2주 늦추었다. 선언은 1861년 3월 5일(서양력 3월 1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성당에서 낭독되었고, 다른 지역에서는 몇 주에 걸쳐 낭독되었다. 교회식의 장중한 문체로 쓰여 많은 농민이 알아듣기 어려웠다.

많은 농민은 이것이 차르가 뜻한 자유라고 믿지 않았다. 그들은 대가 없이 땅을 받으리라 기대했는데, 여전히 지주를 위해 일하거나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자 귀족과 관리들이 차르의 ‘진짜 자유’를 숨기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가장 유명한 충돌은 1861년 4월 카잔현 베즈드나 마을에서 일어났다. 글을 읽을 줄 알던 농민 안톤 페트로프는 진짜 법은 모든 의무에서 농민을 해방한다고 이웃들에게 말했다. 군대가 군중에게 발포했다. 사상자 수는 공식 기록과 이후 서술에 따라 사망 약 70명에서 사상자 100~300명까지 크게 엇갈린다. 페트로프는 처형되었다.

지식인 여론도 갈렸다. 알렉산드르 게르첸과 니콜라이 오가료프 같은 급진적 비판자들은 민중에게 필요한 것은 ‘땅과 자유’라고 했고, 이 말은 뒤에 혁명 조직의 이름이 되었다. 자유주의 귀족들은 손실을 불평했고, 많은 관리는 개혁이 반란의 씨앗을 없애 전제정을 강화하리라 기대했다.

[2][5][1]

중급

결과: 땅, 돈, 그리고 변하는 사회

많은 농민에게 당장의 물질적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곳에 따라서는 나빠졌다. 중부 러시아의 평균 분여지는 전에 경작하던 땅보다 작았고, 잘라낸 땅 때문에 마을은 지주에게서 목초지나 숲을 빌려야 했으며 그 대가를 노동으로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 상환금도 높았다. 제롬 블룸, 표트르 자이온치콥스키 같은 역사가들은 비흑토 지대의 땅값이 평균적으로 시장가를 크게 웃돌았다고 계산했는데, 이는 농민이 사실상 자신의 인신 자유까지 사들였다는 뜻으로 읽힌다.

개혁은 농민을 공동체에 묶어 두기도 했다. 땅이 마을의 공동 소유이고 공동체가 세금과 상환금을 책임졌기 때문에, 개인은 자기 몫을 팔고 도시로 떠나기 어려웠다. 어떤 공동체는 20년 동안 ‘일시 의무’ 상태로 남았고, 1881년 칙령으로 1883년부터 상환이 의무화되었다. 체납이 늘자 정부는 1883년 상환액을 낮추었고, 1905년 혁명 뒤의 격동 속에서 1907년부터 남은 상환금을 완전히 폐지했다.

그래도 농노제 폐지는 시간이 지나며 러시아 사회를 바꾸었다. 선출제 지방 의회인 젬스트보(1864년부터)가 학교와 병원을 세웠고, 배심원이 있는 독립 법원과 근대화된 군대가 생기는 등 다른 대개혁이 가능해졌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귀족의 토지 비중은 크게 줄고 농민의 소유는 늘었으며, 19세기 말 공장과 철도에 필요한 이동 가능한 노동력이 생겨났다. 국유지 농민은 1866년 더 나은 조건으로 해방되었고, 그루지야를 비롯한 변경 지역에서는 뒤늦게 다른 조건으로 개혁이 이루어졌다.

[2][1][6]

중급

다민족 제국 속의 개혁

1861년 법령은 모든 곳에 똑같이 적용되지 않았다. 대러시아, ‘소러시아’(우크라이나), 서부 등 지역마다 별도의 지방 법령이 있어 분여지 기준과 부담이 달랐다. 지주 상당수가 폴란드 귀족이고 농민은 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리투아니아인이 많았던 서부 지방에서는, 1863년 폴란드 봉기 이후 정부가 반항적인 폴란드 귀족을 약화하려는 목적도 있어 조건을 농민에게 유리하게 고쳤다.

폴란드 왕국에서는 1807년 나폴레옹 치하에서 농노제가 폐지되었으나 러시아 지배 아래 상당 부분 되살아났고, 1864년 별도 칙령으로 역시 정치적 목적을 띠고 농민 문제가 정리되었다. 그루지야에서는 1864년 티플리스현을 시작으로 몇 해에 걸쳐 해방이 확대되었는데, 역사가들은 그 조건이 러시아 본토보다 귀족에게 더 유리했다고 본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1870~1880년대에 농민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런 변경에서 보면 해방은 사회 개혁일 뿐 아니라, 농민을 현지 엘리트에 맞서 차르 편에 묶어 두려는 제국 정책의 도구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발트 국가, 폴란드, 캅카스의 역사가들은 흔히 러시아 중부의 역사가들과 다르게 이 이야기를 서술한다.

[2][1]

심화

해방인가 약탈인가: 역사가들의 평가

최초의 학술적 연구는 개혁 준비 문서를 모은 알렉산드르 스크레비츠키의 저작으로, 1860년대 본에서 출간되었다. 혁명 이전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이 개혁을 국가의 도덕적 결단으로 기렸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와 이후 소련 역사가들은 이를 ‘농노주의적 개혁’이라 불렀다. 미하일 포크롭스키는 대부분의 농민에게 개혁이란 이름이 ‘농노’에서 ‘의무 농민’으로 바뀐 것에 불과했다고 주장했고, 니콜라이 로시코프는 이를 혁명으로 가는 전 과정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소련의 대표적 전문가 표트르 자이온치콥스키는 이자를 포함한 총상환액이 땅의 시장가의 몇 배에 이른 사례를 들며 상환 조건을 ‘약탈적’이라 평했다.

이후 연구는 이런 입장을 다듬었다. 라리사 자하로바, 보리스 리트박 같은 역사가들은 1861년 법이 법적 신분으로서의 농노제는 폐지했지만 사회경제적 제도로서의 소멸은 완결이 아니라 시작 또는 가속했을 뿐이라고 보았다. 농민은 1906년 스톨리핀 개혁 때까지 사실상 분여지에 묶여 있었다. 자하로바는 또 밀류틴 주변의 ‘자유주의 관료’가 해방을 도덕적 목표로 추진했음을 강조하면서도, 개혁의 타협적 성격이 혁명적 결말의 위험을 품고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영어권에서는 대니얼 필드가 전제정이 마지못해 하는 귀족에게 개혁을 어떻게 강요했는지를, 테렌스 에먼스가 귀족층의 대응을 연구했다.

경제사가들은 최근 새로운 자료로 옛 주장을 검증하고 있다. 안드레이 마르케비치(예카테리나 주랍스카야와 공동)의 지방별 자료 연구는 해방이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신병의 키로 측정한 농민의 영양 상태를 개선했다고 보았다. 반면 V. T. 랴자노프 같은 학자들은 개혁 후 첫 10년간 곡물 수확 증가는 이전 추세와 비슷했고 나중에야 빨라졌다고 주장한다. 공동체와 상환 제도가 러시아의 발전을 가로막았는지, 아니면 어려운 전환의 충격을 완화했는지를 두고 논쟁은 계속된다.

[2]

심화

러시아 농노제와 미국 노예제: 비교의 시각

러시아의 해방은 미국의 노예제 폐지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은 1863년 1월 1일에 나왔고, 수정헌법 제13조는 1865년에 비준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남북전쟁에서 북부를 지지했다. 역사가들은 오래전부터 두 부자유 노동 체제를 비교해 왔다. 피터 콜친의 『부자유 노동』(1987)은 고전적인 비교 연구로, 러시아 농노에게는 자신들의 공동체가 있었고 인종적 구분이 없었으며 규모가 훨씬 컸다는 차이를 짚는다.

두 체제가 끝난 방식도 달랐다. 미국의 노예제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무너졌고,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라는 기대에도 해방된 사람들은 땅을 받지 못했다. 러시아에서는 전제 국가가 위로부터 평화적으로 해방을 강제했고 농민은 땅을 받았지만, 돈을 치르고 공동체 안에서만 받을 수 있었다. 두 나라 모두 옛 소유주가 경제력의 상당 부분을 유지했고, 해방된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가난과 제약에 시달렸다.

다른 유럽 국가의 해방과 비교해도 흥미롭다. 프로이센과 합스부르크 영토에서는 나폴레옹 시대부터 1848년 사이에 농노제가 해체되었고, 농민이 땅이나 돈으로 영주에게 보상하는 경우가 많았다. 러시아의 개혁은 더 늦고 더 컸으며, 인신의 자유, 공동체적 토지 보유, 긴 상환 기간의 결합이 독특했다. 농촌 유럽의 구체제 종말을 다룬 제롬 블룸의 연구는 러시아를 이런 유럽적 흐름 속에 놓는다.

[3][4][2]

심화

사료와 기억

주요 사료로는 선언과 법령 자체, 편찬위원회 자료 인쇄본 35권, 현 귀족 위원회·중앙위원회·국가평의회의 기록, 마을의 반응을 전하는 지사·조정관·군 장교의 보고서, 로스톱체프와 밀류틴 같은 관리들의 서신이 있다. 농민의 목소리는 듣기가 더 어렵다. 청원서, 법원·경찰 기록, 그리고 보리스 고르시코프가 영어로 옮긴 옛 농노 사바 푸를렙스키의 회고록 같은 자료에 남아 있다.

숫자는 조심해서 써야 한다. 농노 인구 추정치는 어느 조사(‘레비지야’)를 쓰는지, 남성만 세는지 남녀를 모두 세는지에 따라 다르며, 농노 비율도 인구의 약 3분의 1에서 40퍼센트 가까이까지 다양하게 제시된다. 날짜도 함정이다. 러시아는 19세기에 서양 그레고리력보다 12일 늦은 율리우스력을 썼기 때문에, 같은 선언이 2월 19일 또는 3월 3일로 표기된다.

개혁에 대한 기억은 러시아 정치와 함께 바뀌었다. 제정 러시아는 메달과 ‘해방자 차르’ 기념물로 이를 기렸고, 소련 역사학은 착취적 성격과 농민 봉기를 강조했으며,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는 다시 위로부터의 개혁의 모범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문학도 기억을 빚어냈다. 농노의 인간다움을 교양 있는 독자에게 생생히 보여 준 투르게네프의 앞선 작품 『사냥꾼의 수기』에서, 잘라낸 땅으로 옛 농노를 옭아맨 지주를 풍자한 살티코프-셰드린의 글에 이르기까지.

[2][1][3]

핵심 개념

위로부터의 폐지
농민이 반란으로 농노제를 끝내기를 기다리기보다 국가가 칙령으로 끝내는 편이 안전하다는 알렉산드르 2세의 논리.
인신의 자유와 땅
농노는 즉시 법적 자유를 얻었지만 땅은 사야 했고, 이것이 개혁의 약속과 현실을 갈라놓았다.
일시 의무 농민
분여지 매입을 마칠 때까지 지주에게 계속 노동이나 공납을 바친 옛 농노.
상환금
국가가 지주에게 채권으로 보상하고, 농민은 49년에 걸쳐 이자와 함께 국가에 갚았다. 1907년부터야 폐지되었다.
공동체(미르)
땅은 마을 공동체에 주어졌고, 공동체는 땅을 재분배하며 상환을 공동으로 책임져 개인의 이동을 제약했다.
잘라낸 땅(오트레즈키)
농민의 사용에서 떼어 내 지주가 가진 땅. 목초지, 숲, 물가로 가는 길 등이 많아 오래도록 불만의 원인이 되었다.
대개혁
해방이 가능하게 한 1860~1870년대의 젬스트보, 사법, 군대, 언론 개혁.

기록

  1. 1649년 — 법전(소보르노예 울로제니예)이 농민을 땅에 영구히 묶다.
  2. 1803년 — 알렉산드르 1세의 ‘자유 경작민’ 칙령으로 땅과 함께하는 자발적 해방이 가능해지다.
  3. 1816년 — 발트 지방에서 땅 없는 농노 해방이 시작되다(에스틀란트 1816, 쿠를란트 1817, 리플란트 1819).
  4. 1856년 — 크림 전쟁 패배 뒤 알렉산드르 2세가 모스크바 귀족들에게 위로부터의 폐지가 낫다고 말하다(3월 30일).
  5. 1857년 — 농민 문제 비밀위원회 설치. 11월 나지모프 칙서로 귀족 위원회가 시작되다.
  6. 1859년 — 로스톱체프를 위원장으로, 니콜라이 밀류틴을 실질적 추진자로 하는 편찬위원회 구성.
  7. 1861년 — 2월 19일(3월 3일) 선언 서명, 3월 5일(17일)부터 공포, 4월 베즈드나 발포 사건.
  8. 1864년 — 젬스트보 지방자치 창설. 그루지야 해방 시작, 폴란드 왕국에 별도 조치.
  9. 1866년 — 국유지 농민이 더 유리한 조건으로 땅을 받다.
  10. 1883년 — 남은 일시 의무 농민에게 상환이 의무화되고 상환액이 인하되다.
  11. 1907년 — 남은 상환금이 폐지되다.

용어 풀이

농노
법적으로 지주의 영지에 묶여 노동이나 공납을 바치고, 마음대로 떠나거나 결혼할 수 없던 농민.
차르
러시아 황제의 칭호.
선언(마니페스트)
차르가 중대한 법이나 사건을 알리는 엄숙한 공식 포고.
바르시치나
노동 부역. 농노가 지주 직영지에서 해야 했던 일.
오브로크
노동 대신 또는 노동과 함께 바친 돈이나 현물 공납.
미르/옵시치나
가구에 땅을 나누고 공동 의무를 처리한 농민 마을 공동체.
상환
농민이 국가 대출을 받아 수십 년에 걸쳐 갚으며 분여지를 사들이는 절차.
오트레즈키
‘잘라낸 땅’. 개혁 과정에서 농민 분여지에서 떼어 내 지주가 가진 땅.
젬스트보
1864년 만들어진 선출제 지방 의회로, 학교·도로·보건 등 지역 사무를 맡았다.
율리우스력
러시아가 1918년까지 쓴 옛 달력. 19세기에는 서양 그레고리력보다 12일 늦었다.

묻고 답하기

러시아 농노는 노예와 같았나요?

똑같지는 않아요. 농노는 보통 자기 마을과 가족 속에 살며 땅에 묶여 있었지만, 지주는 그들을 팔고 벌할 수 있을 만큼 큰 권력을 가졌어요. 역사가들은 두 체제를 꼼꼼히 비교해요.

농노는 땅을 공짜로 받았나요?

대부분 아니에요. 국가에서 빌린 돈으로 분여지를 사서 49년 동안 갚아야 했어요. 작은 ‘빈민 분여지’를 받아들인 사람만 돈을 내지 않았어요.

선언 날짜가 왜 두 개인가요?

러시아는 서양 달력보다 12일 늦은 율리우스력을 썼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2월 19일은 서유럽의 3월 3일이었다.

1861년에 제국의 모든 농민이 해방되었나요?

1861년 법은 사유지 농노를 해방했다. 황실령 농민은 1863년, 국유지 농민은 1866년, 여러 변경 지역은 그보다 늦게 뒤따랐다.

이 개혁이 러시아 혁명을 일으켰나요?

직접은 아니지만, 해결되지 않은 토지 불만, 상환 부채, 잘라낸 땅이 1905년과 1917년의 농민 봉기를 키웠다고 보는 역사가가 많다.

농민의 형편이 나아졌는지 역사가들은 어떻게 알아내나요?

수확량, 땅값, 세금, 체납액, 심지어 신병의 키 같은 자료를 쓴다. 생활 수준이 얼마나 빨리 나아졌는지에 대해서는 최근 연구들도 의견이 갈린다.

개혁안은 누가 만들었나요?

여러 위원회와 편찬위원회가 준비했다. 야코프 로스톱체프가 위원장을, 니콜라이 밀류틴이 핵심 역할을 맡았고, 차르가 귀족의 저항을 누르고 밀어붙였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Emancipation reform of 1861. Wikipedia
  2. Отмена крепостного права в России. Wikipedia (Russian)
  3. Serfdom in Russia. Wikipedia
  4. Alexander II of Russia. Wikipedia
  5. Bezdna unrest. Wikipedia
  6. Zemstvo. Wikipedia
  7. Jerome Blum, Lord and Peasant in Russia from the Ninth to the Nineteenth Centu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1
  8. Daniel Field, The End of Serfdom: Nobility and Bureaucracy in Russia, 1855–1861. Harvard University Press, 1976
  9. Peter Kolchin, Unfree Labor: American Slavery and Russian Serfdom. Harvard University Press, 1987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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