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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일본에는 강한 지도자가 없었어요. 교토에 있던 무사 정부의 우두머리인 쇼군은 힘을 잃었고, ‘다이묘’라고 불린 수백 명의 지방 영주가 땅을 두고 서로 싸웠어요. 이 시대를 ‘싸우는 나라들의 시대’, 곧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라고 불러요.
그러다 세 사람이 차례로 나라를 하나로 모았어요. 오다 노부나가는 유명한 전투에서 이기고 수도 교토를 차지했어요. 그가 자기 부하 장수에게 죽임을 당하자, 원래 이름 없는 병사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을 마무리하고 일본 전체의 지배자가 되었어요.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기고 쇼군이 되었어요. 1615년에는 히데요시 가문의 마지막 근거지인 오사카성을 함락했어요. 그 뒤로 일본은 약 250년 동안 큰 전쟁 없이 지냈어요.
일본에는 세 사람을 떡 만드는 사람에 빗댄 말이 있어요. 노부나가가 쌀을 찧고, 히데요시가 반죽을 하고, 이에야스는 앉아서 떡을 먹었다는 거예요. 이 전쟁들 때문에 총과 거대한 돌 성이 퍼졌고, 보통 사람들은 큰 고통을 겪기도 했어요.
한눈에 보기
- 시기
- 1560년(오케하자마 전투)부터 1615년(오사카성 함락)까지, 센고쿠 시대의 마지막 단계
- 무대
- 남쪽 사쓰마부터 북쪽 무쓰까지 혼슈·시코쿠·규슈, 중심은 교토·오사카 일대
- 통일의 주역
- 오다 노부나가(1534~1582),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
- 주요 적대 세력
- 이마가와, 아자이·아사쿠라, 다케다, 우에스기, 혼간지의 잇코잇키, 모리, 아케치 미쓰히데, 시바타 가쓰이에, 시마즈, 호조, 1600~1615년의 서군과 오사카의 도요토미 가문
- 결정적 전투
- 오케하자마(1560), 나가시노(1575), 야마자키(1582), 세키가하라(1600), 오사카 전투(1614~1615)
- 결과
-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1590년까지)과 도쿠가와 막부(1603~1868) 성립
- 주요 사료
- 오타 규이치의 『신초코키』, 귀족들의 일기, 무장들의 서신, 예수회 보고서, 에도 시대의 역사서
날짜로 따라가는 전쟁
재생을 누르면 지도에서 전쟁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표시는 전투·사건, 화살표는 기록에 남은 진군로입니다.
단계
1560년 오와리 일부를 다스리던 오다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에서 침공해 온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대군을 무너뜨렸다.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뒤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마가와에서 벗어나 노부나가와 손잡았고, 동북쪽에서는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가와나카지마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1567년 노부나가는 미노를 정복하고 기후를 거점으로 삼았다.
Sengoku period (English Wikipedia)Oda Nobunaga (English Wikipedia)Battle of Okehazama (English Wikipedia)Battles of Kawanakajima (English Wikipedia)稲葉山城の戦い (Japanese Wikipedia)日本の暦日データベース (NAOJ Japanese calendar database; Julian before 15 Oct 1582, Gregorian after), based on 内田正男『日本暦日原典』
최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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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전쟁이란 무엇인가
일본의 통일 전쟁은 몇몇 강력한 무장이 일본 전체를 하나의 정권 아래 두기까지 이어진 전투·포위전·정치적 거래의 긴 연속이다. 1560년 오와리(지금의 나고야 일대) 일부를 다스리던 오다 노부나가가 오케하자마에서 침공군을 무너뜨리면서 시작되어, 1615년 도쿠가와 군이 오사카성을 함락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마지막 후계자가 죽으면서 끝났다.
일본 역사학에서는 이 전쟁들의 목표를 ‘천하 통일(덴카 도이쓰)’이라고 부른다. ‘천하’는 처음에는 천황과 쇼군이 있던 교토 주변 지역을 가리켰고, 차츰 나라 전체를 뜻하게 되었다. 노부나가가 교토에 들어간 1568년부터 세키가하라 전투가 있던 1600년까지는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성 이름을 따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라고도 한다.
이 전쟁은 두 편이 맞선 하나의 전쟁이 아니었다. 동맹은 끊임없이 바뀌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60년에는 이마가와 편에서 싸웠고, 1562년부터는 노부나가와 손잡았으며, 1584년에는 히데요시와 싸웠다가 그 뒤 그를 섬겼고, 1614년에는 히데요시의 아들과 싸웠다. 정토진종의 잇코잇키 같은 종교 공동체도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무장 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쉬움
세 명의 통일자
오다 노부나가(1534~1582)는 중간 규모 영주의 아들이었다. 대담하고 새로운 무기를 재빨리 받아들였으며 종종 잔혹했다. 1567년부터 ‘천하포무(天下布武)’라는 도장을 썼는데, 흔히 ‘천하에 무력을 펼친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그가 죽을 무렵에는 수도를 포함해 일본의 약 3분의 1을 지배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는 오와리의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노부나가 밑에서 낮은 신분부터 출세해 하시바라는 이름으로 핵심 장수가 되었다. 노부나가가 죽은 뒤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간파쿠(관백)와 다이조다이진(태정대신) 같은 조정의 최고 관직을 얻었으며, 1590년에는 일본의 모든 다이묘가 그를 따랐다. 그 뒤 두 차례 조선을 침략했으나(1592~1598, 임진왜란) 실패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는 어린 시절 일부를 인질로 보냈고, 20년 동안 노부나가의 동맹자였다. 1590년 히데요시가 그를 간토 지방으로 옮기자 에도(지금의 도쿄)를 근거지로 키웠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세키가하라에서 이기고 1603년 쇼군이 되었으며, 1615년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켰다. 그의 자손은 1868년까지 일본을 다스렸다.
쉬움
한 걸음씩 보기(1560~1582): 노부나가의 전쟁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대군을 이끌고 오와리를 지나 서쪽으로 진군했다. 훨씬 적은 병력을 가진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에 있던 요시모토의 진영을 공격해 그를 죽였다. 이마가와 가문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고, 그 젊은 가신 마쓰다이라 모토야스, 곧 뒤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스스로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었다. 1567년 노부나가는 미노의 이나바야마성을 빼앗고 이름을 기후로 바꾸었다.
1568년 노부나가는 살해된 쇼군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들고 교토에 들어갔고, 요시아키는 제15대 쇼군이 되었다. 두 사람은 곧 사이가 틀어졌다. 요시아키는 아자이·아사쿠라, 히에이산의 엔랴쿠지, 혼간지의 잇코잇키, 그리고 1573년 미카타가하라에서 이에야스를 참패시킨 다케다 신겐으로 노부나가 포위망을 꾸렸다. 노부나가는 반격에 나서 1571년 히에이산을 불태웠고, 1573년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몰아낸 뒤 아사쿠라와 아자이를 멸망시켰다. 같은 해 신겐은 원정 중에 죽었다.
1575년 나가시노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목책 뒤에 많은 조총병을 배치해 다케다 가쓰요리의 군을 격파했다. 노부나가는 비와호 가에 웅장한 아즈치성을 쌓았고, 오사카의 요새화된 사찰 이시야마 혼간지를 10년 동안 공격해 1580년 항복을 받아 냈으며, 히데요시를 서쪽의 모리씨에게 보냈다. 1582년 봄에는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켰다.
1582년 음력 6월 2일(당시 유럽에서 쓰던 율리우스력으로 6월 21일), 노부나가는 적은 호위병만 데리고 교토의 혼노지에 머물고 있었다. 그의 장수 아케치 미쓰히데가 군대로 절을 에워쌌고, 노부나가는 불길 속에서 죽었다. 맏아들이자 후계자인 노부타다도 같은 날 죽었다.
쉬움
한 걸음씩 보기(1582~1615):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히데요시는 모리 측의 빗추 다카마쓰성을 포위하던 중 소식을 들었다. 그는 서둘러 강화를 맺고 군대를 이끌고 교토 쪽으로 약 200킬로미터를 일주일 남짓 만에 되돌아와, 혼노지의 변 11일 만에 야마자키에서 미쓰히데를 무찔렀다. 1583년에는 노부나가의 중신 시바타 가쓰이에를 시즈가타케에서 꺾고 오사카성을 쌓기 시작했다.
1584년 히데요시는 고마키·나가쿠테에서 이에야스와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카쓰를 상대로 싸웠다. 주요 전투에서는 이에야스가 이겼지만,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와 따로 강화를 맺어 전쟁에서 이겼고, 이에야스도 뒤에 그의 신하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1585년 시코쿠를, 1587년 규슈를 정복해 사쓰마의 강력한 시마즈씨를 굴복시켰다. 1590년에는 오다와라의 호조씨를 포위했고, 동북 지방의 다이묘들도 찾아와 충성을 맹세했다. 1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의 모든 지역이 한 지배자를 따르게 되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었을 때 아들 히데요리는 다섯 살이었다. 섭정들 가운데 가장 강한 이에야스와 히데요시의 행정 관료였던 이시다 미쓰나리는 격렬하게 대립했다. 1600년 두 사람의 군대, 곧 동군과 서군이 세키가하라에서 맞붙었다. 전투 도중 서군 다이묘 몇이 편을 바꾸었고, 이에야스는 하루 만에 승리했다.
이에야스는 1603년 쇼군이 되었지만, 히데요리는 여전히 막대한 재산과 권위를 지닌 채 오사카성에 있었다. 1614년 겨울 이에야스는 오사카를 포위했으나 수비군이 버텨 강화가 맺어졌다. 1615년 여름 도쿠가와 군은 다시 공격해 도묘지와 덴노지 전투에서 이기고 불타는 성을 함락했다. 히데요리와 어머니는 자결했고, 내란의 시대는 끝났다.
중급
배경: 일본은 왜 분열했나
아시카가 쇼군은 14세기부터 교토에서 일본을 다스렸지만, 그 권위는 지방의 유력한 슈고(守護)들에게 기대고 있었다. 1467~1477년 교토와 그 주변에서 슈고 세력이 편을 갈라 싸운 오닌의 난으로 수도는 폐허가 되고 막부는 힘을 잃었다. 역사가들은 보통 이 전쟁을 센고쿠 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이후 100년 동안 실권은 센고쿠 다이묘라 불리는 지역 영주들에게 넘어갔다. 간토의 호조, 서쪽의 모리, 그리고 오다 가문까지 그 가운데 상당수는 옛 윗사람을 무너뜨리거나 대신한 신흥 세력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흐름을 ‘아래가 위를 이긴다’는 뜻의 하극상(게코쿠조)이라 불렀다. 강한 다이묘들은 독자적인 법령, 토지 조사, 성시(조카마치), 가신과 징발한 농민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갖춘 영역 국가를 만들었다.
다이묘가 아닌 세력도 있었다. 촌락과 지역 무사들의 연합체인 잇키는 가가나 이가 같은 지역 전체를 다스렸다. 오사카의 이시야마 혼간지를 중심으로 한 정토진종 사찰망은 수만 명의 무장 신도를 불러 모을 수 있었다. 엔랴쿠지 같은 대사찰은 장원을 소유하고 무장 병력을 거느렸다. 사카이 같은 도시는 상인들의 합의체가 운영했다.
더 큰 다이묘가 아니라 노부나가가 통일을 시작한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가들은 교토에 가까운 오와리·미노의 풍부한 논과 교역로, 쇼군과 천황을 이용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 전략, 그리고 운을 꼽는다. 1573년 다케다 신겐과 1578년 우에스기 겐신의 죽음은 가장 위험한 적들을 결정적인 순간에 없애 주었다.
중급
총, 성, 대군
1543년 포르투갈 상인들이 다네가시마에 화승총을 전했고, 곧 사카이와 구니토모 같은 곳의 대장장이들이 대량으로 만들어 냈다. 1570년대에는 조총(뎃포)이 창·활과 함께 보병인 아시가루의 기본 무기가 되었다. 1575년의 나가시노 전투는 이 변화의 상징이 되었지만, 오늘날 역사가들은 정확히 번갈아 쏜 ‘3단 사격’ 이야기를 후대의 윤색으로 본다.
군대의 규모도 크게 늘었다. 센고쿠 초기의 전투에는 보통 수천 명이 참여했지만, 히데요시는 1590년 오다와라 원정에 20만 명이 훨씬 넘는 병력을 동원했다고 전하며, 세키가하라에서는 양측이 각각 수만 명을 투입했다. 이런 군대에는 도로, 보급 기지, 함대, 치밀한 병참이 필요했다. 특히 히데요시는 미키, 돗토리, 빗추 다카마쓰에서처럼 굶기거나 물에 잠기게 하는 포위전의 명수였다.
성도 달라졌다. 예전의 요새는 주로 산 위에 흙으로 쌓은 것이었다. 1576년 짓기 시작한 노부나가의 아즈치성은 높은 돌담과 안을 화려하게 꾸민 여러 층의 천수(덴슈)를 갖추어, 거처이자 정치의 무대이며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히데요시의 오사카성·후시미성과 뒤이은 도쿠가와 시대의 성들이 이 양식을 일본 전역에 퍼뜨렸다. 성 주변에는 성시가 자라 오늘날 많은 일본 도시의 기원이 되었다.
중급
종교와 전쟁
노부나가의 가장 긴 전쟁은 다이묘가 아니라 혼간지와의 전쟁이었다. 1570년부터 1580년까지 주지 겐뇨는 신도들에게 저항을 호소했고, 잇코잇키 세력은 오사카, 나가시마, 에치젠, 가가에서 노부나가와 싸웠다. 노부나가는 극단적인 폭력으로 대응했다. 1574년 나가시마에서는 포위된 공동체가 항복하려고 나오자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 혼간지는 1580년 결국 천황이 중재한 화의를 받아들여 오사카를 떠났다.
1571년 노부나가군은 적을 숨겨 준 천태종의 총본산 히에이산 엔랴쿠지의 사찰들을 불태웠다. 당시의 일기들은 수천 명이 희생되었다고 전한다. 현대의 발굴에서는 이 기록이 말하는 것보다 불탄 흔적이 적게 나와 규모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이 공격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노부나가가 불교를 파괴한 자라는 뒷날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리스도교는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들어왔다. 노부나가는 불교 세력을 견제하려는 뜻과 유럽 물품에 대한 관심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교토와 아즈치에서 포교하도록 허락했고, 일부 다이묘는 개종했다. 1587년 규슈 원정을 마친 히데요시는 선교사들에게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처음에는 엄격하게 시행되지 않았다. 뒤에 도쿠가와 막부는 그리스도교를 완전히 금지했다. 이렇게 통일 전쟁은 종교 기관의 군사력을 끝내고 모든 종교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었다.
중급
결과: 새로운 정치 질서
히데요시는 군사적 승리를 오래가는 제도로 바꾸었다. 전국적인 토지 조사(다이코 검지)로 논밭을 측량해 쌀의 양인 석(고쿠)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모든 다이묘 영지의 가치가 수치로 드러났다. 1588년의 칼사냥(가타나가리) 명령으로 농민들은 무기를 내놓아야 했고, 뒤이은 법령들은 성시에 사는 무사와 마을에 남는 농민 사이의 경계를 고정했다. 다이묘는 그의 명령에 따라 다른 영지로 옮겨질 수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 정책들을 이어받아 다듬었다. 막부는 주요 도시와 광산을 직접 장악하고, 다이묘를 믿을 만한 후다이와 옛 경쟁자였던 도자마로 나누어 배치했으며, 뒤에는 한 해씩 번갈아 에도에서 지내게 했다. 오사카 함락 직후인 1615년에 반포된 무가제법도는 성의 신축과 다이묘끼리의 동맹을 제한했다.
그 결과 유난히 긴 평화가 찾아왔다. 1615년부터 1860년대까지 일본 안에서는 1637~1638년의 시마바라의 난을 빼면 큰 전쟁이 없었다. 무사는 행정가가 되었고, 도시와 상업이 성장했으며, 에도 시대의 문화가 꽃피었다. 한편 이렇게 통일된 군사력은 히데요시가 1592~1598년 조선을 침략하는 바탕이 되기도 했는데, 그 경과는 임진왜란 항목에서 다룬다.
중급
전쟁의 대가
통일의 연대기는 위대한 장수들을 칭송하는 경향이 있지만, 전쟁의 무게를 가장 크게 짊어진 것은 보통 사람들이었다. 군대는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했고, 적의 보급을 끊으려고 마을을 불태웠으며, 물건뿐 아니라 사람도 붙잡아 갔다. 당시 사료는 포로가 팔려 가는 일, 때로는 외국 상인에게 팔리는 일을 전하며, 1587년의 법령들도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히데요시의 명성을 높인 굶기기 포위전은 수비군뿐 아니라 성 안으로 피란한 성시 주민과 농민에게도 느린 죽음을 뜻했다. 1581년 돗토리성에 관한 기록은 성 안의 끔찍한 기근을 전한다. 종교 공동체는 히에이산, 나가시마, 에치젠에서 학살을 당했고, 1581년의 이가 침공은 그 지역에서 재앙으로 기억된다.
사료에 나오는 사망자 수는 대개 과장하려고 쓴 어림수여서 현대 역사가들은 조심스럽게 다룬다. 분명한 것은 뒤이은 평화가 센고쿠 시대에 스스로를 다스리던 수많은 독립 공동체, 곧 마을과 잇키, 사찰과 도시의 파괴 위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중급
기억과 이미지의 변화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막부는 이에야스를 인내심 많고 현명한 창업자로 그리는 역사서를 장려했고, 그는 닛코에서 신(도쇼다이곤겐)으로 모셔졌다. 도쿠가와가 멸망시킨 도요토미 가문의 히데요시는 공식적으로는 낮게 평가되었지만, 『다이코키』 같은 대중서 덕분에 농민에서 천하인이 된 그의 출세담은 인기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세 통일자는 국민적 영웅으로 다시 해석되었다. 특히 히데요시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조선 침략 때문에 찬양받았는데, 한국은 바로 그 전쟁을 민족의 재난이자 항전의 역사로 기억한다. 노부나가는 근대화를 이끈 혁신가의 본보기가 되었고, 이 이미지는 지금도 소설, 드라마, 영화, 비디오 게임에서 인기를 끈다.
일본 바깥의 시각은 다르다. 한국과 중국에서 이 시대의 핵심 인물은 통일자 히데요시가 아니라 침략자 히데요시다. 일본 안에서도 역사가들은 ‘영웅 중심’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마을, 종교 공동체, 교역, 보통 사람들의 경험을 연구하게 되었고, 세 통일자에 얽힌 오래된 전설 상당수가 의문에 부쳐졌다.
심화
사료: 연대기, 일기, 서신, 후대의 역사서
노부나가에 관한 가장 중요한 서술 사료는 옛 가신 오타 규이치가 당시 적어 둔 기록을 바탕으로 1582년 이후 엮은 『신초코키(信長公記)』다. 역사가들은 노부나가를 호의적으로 그리기는 하지만 날짜와 장소는 대체로 믿을 만하다고 본다. 2011년에는 J. S. A. 엘리소나스와 J. P. 라머스의 영어 번역이 나왔다. 히데요시에 관해서는 1620년대 오제 호안의 『다이코키(太閤記)』가 더 생생하지만 신뢰도는 떨어진다.
『도키쓰구쿄키(言継卿記)』, 『가네미쿄키(兼見卿記)』, 고후쿠지의 『다몬인닛키(多聞院日記)』 같은 귀족과 승려의 일기는 교토와 나라의 시각에서 사건을 날마다 기록했다. 무장들이 직접 내린 수천 통의 서신과 명령서가 남아 있어 현대 연구의 문헌적 뼈대를 이룬다. 예수회 서한과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História de Japam)』는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그들의 도시를 외부인의 눈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 전쟁의 대중적 이미지 상당 부분은 후대의 저작에서 나왔다. 17세기 초에 엮인 다케다 가문의 병법서 『고요군칸(甲陽軍鑑)』, 『미카와 모노가타리』와 막부의 공식 사서 『도쿠가와짓키』 같은 에도 시대 역사서, 그리고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펴낸 전사(戰史)가 그것이다. 병력 수, 연설, 기발한 계략 같은 극적인 세부는 이전 사료로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날짜도 일본 밖의 독자에게는 어려운 문제다. 일본 사료는 연호와 태음태양력을 쓰기 때문에, 덴쇼 10년 6월 2일(혼노지의 변)은 당시 유럽에서 쓰던 율리우스력으로 1582년 6월 21일에 해당한다. 영어권 문헌은 보통 1582년 10월 이전에는 율리우스력, 이후에는 그레고리력으로 적는다. 일본 국립천문대가 공개한 역일 대조표 같은 변환표가 표준 도구이며, 책마다 하루 정도 차이가 나는 일도 흔하다.
심화
학계의 논쟁
혁명가인가, 전통의 계승자인가? 중세 질서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려 한 급진적 혁신가라는 노부나가의 옛 이미지는 도전을 받아 왔다. 예룬 라머스의 『Japonius Tyrannus』(2000)와 최근 일본 학계의 많은 연구는 노부나가가 조정과 협력하고 여러 해 동안 쇼군과도 손잡는 등 기존 제도 안에서 움직였다는 점, 그리고 그의 ‘혁신’ 상당수가 다른 다이묘들에게서도 먼저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한다.
전투와 전설. 오케하자마에서 이마가와 진영 뒤로 돌아 들어가 기습했다는 전통적인 이야기는 주로 후대 저작에서 나왔고, 일부 역사가는 보다 정면에 가까운 공격이었다고 주장한다. 나가시노에서 조총병 3천 명이 세 줄로 번갈아 쏘았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가장 이른 사료에 나오지 않아, 역사가들은 그 수와 전술을 모두 의심하고 오히려 야전 방어 시설과 그것을 공격하기로 한 다케다 측의 결정을 중시한다.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진지에 총을 쏘아 배신을 재촉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1984년 후지모토 마사유키가 의문을 제기했으며, 원정 전에 열렸다는 유명한 오야마 평정도 당시 서신과 맞지 않는 점 때문에 의심받고 있다.
혼노지의 변은 왜 일어났나? 아케치 미쓰히데의 동기에 대해서는 개인적 원한, 야망,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 조정이나 쇼군에 대한 충성, 다른 사람들의 음모 등 많은 설이 나왔다. 2014년 공개된 『이시가이가 문서(石谷家文書)』의 서신은 이른바 ‘시코쿠설’, 곧 미쓰히데 주변과 가까웠던 조소카베 모토치카를 치기로 한 노부나가의 결정에 주목하게 했다. 어느 설도 모든 역사가의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시대 구분과 ‘통일’이라는 개념. 역사가들은 이 과정의 시작을 1560년, 1568년, 1573년 가운데 언제로 볼지, 끝을 1590년, 1600년, 1615년 가운데 언제로 볼지를 두고 의견이 갈린다. 싸운 사람들은 결말을 알지 못했고 상당수는 지역의 자율을 지키려고 싸웠다는 점에서, ‘통일’이라는 목적론적 용어 자체를 문제 삼는 이들도 있다. 비교사 연구자들은 일본의 통일을 조선, 명·청, 무굴 제국, 유럽 왕정 같은 근세 국가 형성 과정과 나란히 놓고 살핀다.
핵심 개념
- 천하 통일(덴카 도이쓰)
- 교토 일대, 나아가 일본 전체를 하나의 무가 정권 아래 두려는 목표.
- 센고쿠 다이묘
- 아시카가 막부의 권위가 무너진 뒤 자기 가신과 법, 군대로 영지를 다스린 지역 영주.
- 하극상(게코쿠조)
- ‘아래가 위를 이긴다’는 뜻으로, 가신이 주군을 무너뜨리는 센고쿠 시대의 전형적 현상.
- 화기와 야전 축성
- 대량의 조총과 목책·해자·요새화한 진영이 결합하면서 전투와 포위전의 방식이 바뀌었다.
- 종교 세력의 무력화
- 통일 전쟁은 혼간지와 엔랴쿠지 같은 사찰·종교 연합의 독자적 군사력을 끝냈다.
- 병농 분리
- 토지 조사, 칼사냥, 신분 법령으로 무사는 성시에 사는 계층이 되고 무장한 농민과 분리되었다.
- 도쿠가와의 평화
- 오사카에서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뒤 1615년부터 1860년대까지 이어진 긴 평화.
기록
- 1467년 — 교토에서 오닌의 난이 일어나 센고쿠 시대가 열리다.
- 1543년 — 포르투갈 상인들이 다네가시마에 화승총을 전하다.
- 1560년 — 오다 노부나가가 오케하자마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죽이다.
- 1568년 — 노부나가가 교토에 들어가고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쇼군이 되다.
- 1571년 — 노부나가가 히에이산의 사찰들을 불태우다.
- 1573년 — 요시아키가 교토에서 쫓겨나고, 아사쿠라·아자이가 멸망하며, 다케다 신겐이 죽다.
- 1575년 —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도쿠가와군이 다케다 가쓰요리를 격파하다.
- 1580년 — 10년의 전쟁 끝에 이시야마 혼간지가 오사카를 떠나다.
- 1582년 — 다케다 가문이 멸망하고,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죽으며, 히데요시가 야마자키에서 이기다.
- 1590년 — 오다와라 포위로 호조씨가 항복하고 히데요시가 통일을 완성하다.
- 1600년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이기다.
- 1615년 — 오사카성이 함락되고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죽어 전란이 끝나다.
용어 풀이
- 다이묘
- 영지를 다스리고 자기 무사들을 거느린 지역 영주.
- 쇼군
- 천황이 임명하는 일본의 세습 무가 통치자. 아시카가 가문이 1573년(공식적으로는 1588년)까지, 도쿠가와 가문이 1603년부터 이 자리를 차지했다.
- 간파쿠(관백)
- 성인 천황을 보좌하는 조정의 최고 관직인 섭정. 히데요시가 1585년부터 맡았다.
- 잇코잇키
- 혼간지가 이끈 정토진종 신도들의 무장 연합.
- 아시가루
- 창·활·조총으로 무장한 보병. 농민 출신이 많았다.
- 뎃포(조총)
- 1543년 이후 일본에서 만들기 시작한 화승총.
- 덴슈(천수)
- 일본 성의 여러 층짜리 중심 누각. 아즈치성에서 처음 대규모로 지어졌다.
- 고쿠(석)
- 토지와 영지의 가치를 매기는 데 쓴 쌀의 단위(약 180리터).
- 칼사냥(가타나가리)
- 농민과 종교 기관에게 무기를 내놓게 한 1588년 히데요시의 명령.
- 동군과 서군
-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맞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과,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끈 연합군.
묻고 답하기
왜 ‘통일’ 전쟁이라고 부르나요?
여러 영주로 갈라져 있던 일본이 마지막에는 하나의 정권 아래 놓였기 때문이에요. 다만 싸운 사람들은 결말을 몰랐고 많은 이가 자기 독립을 지키려고 싸웠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이 말을 조심스럽게 써요.
노부나가는 정말 새로운 사격법으로 나가시노에서 이겼나요?
그의 군대가 목책 뒤에서 많은 조총을 쓴 것은 확실해요. 하지만 3천 명이 세 줄로 번갈아 쏘았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후대 기록에만 나와서, 지금은 많은 역사가가 의심하고 있어요.
아케치 미쓰히데는 왜 노부나가를 죽였나요?
아무도 확실히 몰라요. 개인적 원한과 야망부터 노부나가의 시코쿠 정책에 대한 불안까지 여러 설명이 있어요. 미쓰히데는 2주도 안 되어 죽었고, 자기 이유를 밝힌 글은 남아 있지 않아요.
히데요시는 정말 농민이었나요?
그는 오와리의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아시가루나 농민 집안이었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가 일본 사회의 꼭대기까지 오른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고, 후대 이야기는 이를 더 부풀렸어요.
보통 사람들은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마을이 불타고 약탈당했으며, 사람들이 붙잡혀 팔려 가기도 했고, 포위전은 기근을 불렀어요. 하지만 1615년 이후의 긴 평화 속에서 농업과 상업, 도시가 성장했어요.
같은 전투인데 책마다 날짜가 다른 이유는 뭔가요?
일본 사료는 연호와 태음태양력을 써요. 서양 달력으로 바꾸려면 대조표가 필요하고, 1582년 이전을 율리우스력으로 적을지 그레고리력으로 적을지도 저자마다 달라요. 그래서 하루나 열흘 차이가 흔해요.
이 시대는 한국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그 군대로 1592년과 1597년 조선을 침략했어요. 그 전쟁, 곧 임진왜란은 별도 항목에서 다뤄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센고쿠 시대. 위키백과
- 오다 노부나가. 위키백과
- 도요토미 히데요시. 위키백과
- 나가시노 전투. 위키백과
- 혼노지의 변. 위키백과
- 세키가하라 전투. 위키백과
- 오사카 전투. 위키백과
- Mary Elizabeth Berry, Hideyoshi. Harvard University Press, 1982
- Jeroen P. Lamers, Japonius Tyrannus: The Japanese Warlord Oda Nobunaga Reconsidered. Hotei Publishing, 2000
- Ōta Gyūichi, The Chronicle of Lord Nobunaga (Shinchō kōki), J. S. A. Elisonas·J. P. Lamers 옮김. Brill, 2011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