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난마돌

Nan Madol (폰페이어로 ‘사이의 공간’; 옛 이름으로 전하는 Soun Nan-leng, ‘하늘의 암초’)

약 1180–1628년 · 폰페이 템웬섬 앞바다 (사우델레우르 통치 체제)

한 문장으로

난마돌은 미크로네시아 폰페이섬 앞바다의 산호초 위에 현무암과 산호로 쌓아 올린 100개 가까운 인공 섬 유적으로, 12세기 무렵부터 17세기 초까지 섬 전체를 다스린 사우델레우르 통치자들의 의례·장례·정치 중심지였다.

난마돌
이미지: NOAA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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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태평양 한가운데에 비가 많이 오는 초록빛 섬, 폰페이가 있어요. 이 섬 동쪽 바닷가 바로 앞, 산호초 위의 얕은 바다에 사람들이 작은 섬 수십 개를 만들었어요. 원래 있던 섬이 아니라, 돌과 부서진 산호를 하나하나 쌓아서 직접 만든 섬이에요.

작은 섬들 사이로는 바닷물 길이 나 있어요. 물로 된 골목길 같지요. 밀물이 들어오면 물길이 차올라서 카누를 타고 섬에서 섬으로 다닐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곳 이름이 ‘사이의 공간’이라는 뜻의 난마돌이에요.

벽은 길쭉하고 어두운 돌로 되어 있어요. 단면이 오각형이나 육각형이라 커다란 연필처럼 생겼지요. 뜨거운 용암이 천천히 식으면 이렇게 기둥 모양으로 갈라져요. 옛사람들은 이 돌기둥을 통나무집처럼 가로세로 엇갈려 쌓고, 가운데는 산호 부스러기로 채웠어요.

어떤 돌은 자동차만큼 무겁고, 그보다 훨씬 무거운 바위도 있어요. 쇠 연장도, 바퀴도, 기중기도 없었지요. 아마 뗏목에 돌을 싣고 바다를 건너, 나무줄기로 만든 비탈과 식물 섬유로 꼰 밧줄, 그리고 많은 사람의 힘을 모아 옮겼을 거예요.

옛날 난마돌에는 ‘사우델레우르’라는 힘센 통치자와 사제들이 살았고, 중요한 사람들의 무덤도 있었어요. 폰페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통치자들이 점점 욕심 많고 잔인해지자, 이소켈레켈이라는 영웅이 나타나 섬을 다스리는 방식을 바꾸었대요.

지금 난마돌은 세계유산이에요. 그런데 진흙이 물길을 메우고 식물이 벽을 뒤덮고 있어서 잘 보살펴야 해요. 이곳은 지금도 폰페이섬에 사는 사람들의 조상이 세운 곳이라는 걸 기억해 주세요.

한눈에 보기

위치
미크로네시아 연방 폰페이주 마돌레니움(Madolenihmw), 폰페이섬 동쪽 템웬섬 앞 산호초 평원
규모
약 1.5×0.5km의 성벽 안에 인공 섬 92개(물길 포함 약 80헥타르). 고고학 지구 전체는 18km² 이상
재료
가로·세로 엇갈려 쌓은 주상절리 현무암, 현무암 바위, 산호 잡석 채움
연대
1~2세기 무렵부터 사람의 활동, 900년 무렵 인공 섬 조성, 1180~1200년 무렵 거석 건축 시작, 사우델레우르 통치의 끝은 흔히 1628년 무렵으로 본다
세운 사람들
오늘날 폰페이 사람들의 조상(사우델레우르 통치 체제 아래)
주요 구역
북동쪽 마돌 포웨(사제 거처와 난다우와스 같은 무덤 섬), 남서쪽 마돌 파(판케디라 같은 통치자 거처)
보호
미국 국가사적지(1974), 국가역사기념물(1985). 201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난마돌: 동부 미크로네시아의 의례 중심지’로 등재되며 같은 해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오름

쉬움

난마돌은 무엇인가

난마돌은 서태평양 캐롤라인 제도의 화산섬 폰페이 동쪽, 템웬섬 옆 얕은 산호초 위에 세운 인공 섬들의 무리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중심부는 길이 약 1.5km, 너비 약 0.5km이고, 그 안에 돌을 쌓고 속을 산호 잡석으로 채운 인공 섬 92개가 조수로 채워지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흩어져 있다. 주변 해안과 바깥 섬까지 포함한 고고학 지구는 18km²가 넘는다.

폰페이어 ‘난마돌’은 보통 ‘사이의 공간’으로 옮기며, 유적 사이를 가로지르는 물길을 가리킨다. 옛 이름으로 ‘하늘의 암초’라는 뜻의 ‘손 난렝(Soun Nan-leng)’도 전한다. ‘태평양의 베네치아’라는 별명도 있지만 오해를 부를 수 있다. 난마돌은 보통 사람들이 북적이는 교역 도시가 아니라 통치자와 사제, 그리고 죽은 이들을 위한 배타적인 중심지였다.

이곳은 폰페이 구전 역사에서 처음으로 섬 전체를 하나의 권위 아래 묶었다고 하는 사우델레우르 통치자들의 거처였다. 고고학에 따르면 이 산호초에서는 서기 초기 몇 세기부터 사람이 활동했고, 900년 무렵에는 인공 섬 조성이 진행 중이었으며, 난마돌을 대표하는 현무암 기둥 벽은 1180~1200년 무렵부터 올라가기 시작했다. 폰페이 전승은 영웅 이소켈레켈이 사우델레우르를 무너뜨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추장 제도를 열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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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난마돌을 ‘읽는’ 법

난마돌은 두 구역으로 나누어 보면 이해하기 쉽다. 북동쪽 절반은 ‘마돌 포웨’로, 인공 섬 58개가 있으며 상당수에 사제들의 집이 있었고 가장 웅장한 무덤들도 이곳에 있다. 남서쪽 절반은 ‘마돌 파’로, 통치자와 그를 섬기는 사람들의 구역이었으며 통치자의 거처로 전하는 판케디라섬이 여기 있다. 20세기 초 독일 연구자들은 폰페이 정보 제공자들의 설명을 바탕으로 유적을 무덤 벽·왕실 구역·사제 구역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고, 이후의 발굴도 대체로 이 구분을 뒷받침한다.

가장 유명한 섬은 왕실 무덤 섬인 난다우와스다. 높이 약 5.5~7.5m의 현무암 기둥 벽이 안뜰을 둘러싸고, 그 가운데에 중앙 무덤 구역이 있다. 전승에 따르면 첫 사우델레우르를 위해 지은 곳이다. 바깥 벽을 지나 안쪽 벽을 넘고서야 무덤에 닿는 구조 자체가, 일상 세계에서 가장 제한되고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섬마다 맡은 일이 있었다. 전승과 고고학은 다파우섬을 카누 제작과, 페이네링섬을 코코넛 기름 만들기와 연결한다. 이데트섬에서는 사제들이 제물로 바칠 신성한 거북을 조리했고, 작은 돌 울타리 안에는 사람과 신 사이를 잇는 신성한 뱀장어가 살았다. 통치자에게 바치는 음식은 정해진 섬에서 받았는데, 처음에는 페이니오트, 나중에는 더 가까운 우센남우였다.

벽을 자세히 보면 쌓는 법이 보인다. 긴 현무암 기둥을 한 층은 벽과 나란히, 다음 층은 벽에 직각으로 번갈아 놓아 통나무집처럼 쌓았다. 이렇게 길이 방향과 마구리 방향을 엇갈려 쌓으면 돌끼리 맞물려 단단해진다. 벽 안쪽은 산호와 작은 돌로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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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어떻게 지었을까

폰페이는 화산섬이다. 두꺼운 용암이 천천히 식은 곳에서는 길쭉한 다각형 기둥 모양으로 갈라진 주상절리 현무암이 생긴다. 난마돌 바로 옆에는 주상절리 현무암 산지가 없어서 기둥 하나하나를 본섬에서 가져와야 했다. 2016년에 발표된 건축석 지구화학 분석은 폰페이섬 반대편의 화산 암경(volcanic plug)에서 온 현무암을 확인해, 적어도 일부 돌은 먼 거리를 옮겨 왔음을 보여 주었다.

기둥 상당수는 1~5톤이고, 난다우와스 뒤편 방파벽의 바위 가운데는 50톤에 이른다고 추정되는 것도 있다. 가축도 쇠 연장도 바퀴도 없던 사회였다. 20세기 초 폰페이 정보 제공자들은 독일 민족학자 파울 함브루흐에게 무거운 돌을 나무줄기, 특히 코코넛야자 줄기로 만든 비탈 위로 지렛대와 히비스커스 섬유 밧줄을 써서 끌어올렸다고 설명했다. 고고학자 대부분은 돌을 뗏목에 실어, 아마도 밀물 때 산호초까지 띄워 옮겼으리라 본다.

폰페이 전설은 다른 설명을 한다. 돌이 마법으로 날아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많은 민족이 가장 위대한 건축물에 이런 이야기를 남기며, 폰페이 사람들에게 이 전설은 창건자들의 신성한 힘을 드러낸다. 고고학자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섬 곳곳의 사람들이 참여한 계획·채석·운반·건설, 곧 엄청난 규모의 노동 조직을 강조한다.

건설은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방사성탄소 연대는 900년 무렵부터 산호초 위에 낮은 단이 조성되었고, 거대한 현무암 벽을 쌓는 본격적인 거석 건축은 1180~1200년 무렵 시작되어 여러 단계를 거쳐 몇 세기 동안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오늘 우리가 보는 모습은 여러 세대에 걸친 건설과 보수, 증축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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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사우델레우르: 섬 전체의 통치자

폰페이 사람들은 섬의 역사를 사람(또는 건설)의 시대, 사우델레우르 시대, 난므와르키 시대, 외국인의 시대로 나눈다. ‘사우델레우르’는 흔히 ‘델레우르의 주인’으로 풀이하는데, 델레우르는 폰페이 또는 그 일부의 옛 이름이다. 사우델레우르 시대는 한 통치자가 폰페이 전체를 다스린 첫 시기로 기억되며, 전성기 섬 인구는 약 2만 5천 명으로 추정된다.

창건 이야기에 따르면 신성한 힘을 지닌 두 형제 올리시파와 올로소파가 ‘서쪽 카타우’라는 곳에서 카누를 타고 와 농업의 신에게 제단을 쌓을 자리를 찾았다. 몇 차례 실패한 끝에 템웬섬 앞 산호초에서 성공했고, 올리시파가 죽자 올로소파가 첫 사우델레우르가 되었다. 그가 이 섬 여인과 혼인해 통치자의 계보가 이어졌다고 하지만, 몇 명이 다스렸는지는 전승마다 달라 역사학자 데이비드 핸런은 8명부터 17명까지의 설이 있다고 정리했다.

구전에 따르면 사우델레우르는 땅과 그 위의 모든 것을 소유했다. 각 지역 추장이 공물을 조직했고, 백성들은 풍요의 계절에는 빵나무 열매를, 궁핍한 계절에는 얌·타로·발효 빵나무 열매를, 그리고 물고기와 해산물을 바쳤다. 섬은 ‘거북’이라는 뜻도 있는 ‘웨이(wehi)’라는 세 구역, 곧 동쪽 마돌레니움, 서쪽 키티, 북쪽 소케스로 나뉘었다. 난마돌에는 수석 조언자, 음식 준비 담당, 입구와 거처의 경비 등 직무에 따른 칭호 체계가 있었다.

종교는 사우델레우르 권력의 핵심이었다. 난마돌의 중심 제의는 폰페이 고유의 신인 천둥신 난사프웨를 섬겼고, 통치자들은 이 신에게서 정당성을 얻었다. 사제들이 제물·점복·장례를 이끌었고, 거북 제사와 신성한 뱀장어가 사람과 신을 이었다. 일부 전승은 사우델레우르가 자신들의 신을 폰페이 사람들에게 강요하려 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고 전한다.

[3][8][1]

중급

난마돌의 삶: 따로 떨어진 중심지

난마돌에는 민물도 농경지도 없다. 음식 한 바구니, 물 한 통까지 모두 본섬에서 카누로 날라야 했다. 이것은 이곳의 성격을 알려 주는 가장 강력한 단서다. 난마돌은 일부러 일상 세계에서 떨어뜨려 놓은 곳이었고, 섬의 나머지가 떠받쳐야만 돌아갈 수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한때 이곳에 산 사람이 많아야 1,000명 정도, 어쩌면 그 절반도 안 되었으리라 본다. 추장과 사제도 있었지만 이들을 섬기는 평민이 다수였다. 널리 논의되는 해석 가운데 하나는,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추장들을 고향이 아닌 난마돌에 살게 함으로써 사우델레우르가 이들을 가까이서 감시했다는 것이다.

고고학자 조이스 배스와 J. 스티븐 애선스는 1990년 논문에서 ‘도시’나 ‘마을’ 같은 말이 잘못된 인상을 준다고 지적했다. 이들의 발굴에서는 난마돌이 수공업 생산지나 공물 저장·재분배 중심지였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이들은 난마돌을 지배층이 피지배층과 물리적으로 분리된 곳, 곧 정치·종교 중심지이자 무엇보다 장례의 중심지로 보았다.

섬에서 나온 증거는 구전과 들어맞는다. 자귀와 갈돌 같은 생활 도구는 사제 구역에 몰려 있고, 의례용 사카우(카바)를 찧는 큰 돌은 주로 무덤 섬과 판케디라에서 나온다. 이데트섬에는 거북 뼈가 섞인, 불에 탄 산호 조리석 더미가 2m 넘게 쌓여 있어 거북 제사 전승과 일치하고, 작은 현무암 울타리는 신성한 뱀장어의 웅덩이 전승과 맞아떨어진다.

[1][8]

중급

이소켈레켈과 사우델레우르 통치의 끝

폰페이 구전은 후기 사우델레우르를 점점 가혹해진 통치자로 기억한다. 백성이 굶주릴 때까지 공물을 거둔 통치자, 탐욕과 잔인함으로 악명 높은 통치자의 이야기가 있고, 적어도 두 번의 암살도 전한다. 학자들은 이 이야기들을 통치자 개개인의 행적을 그대로 적은 기록이라기보다, 중앙집권 통치가 왜 거부되었고 이후 체제가 왜 더 나은지를 설명하는 도덕적 역사로 읽는다.

왕조의 몰락은 이소켈레켈 이야기로 전한다. 대부분의 판본에서 마지막 사우델레우르는 천둥신 난사프웨의 노여움을 사고, 신은 동쪽 섬 코스라에와 흔히 동일시되는 카타우로 떠난다. 그곳에서 난사프웨의 아들로 태어난 이소켈레켈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자라, 333명의 일행과 함께 폰페이로 항해한다. 전쟁 과정은 출판된 판본만 열세 가지가 넘을 만큼 제각각이다. 아이들끼리의 다툼이 싸움으로 번졌다는 판본, 억압받던 주민의 도움을 얻었다는 판본, 지배 가문의 여인이 도왔다는 판본 등이 있다. 결국 사우델레우르는 내륙으로 물러났고, 전승에 따르면 개울에서 물고기로 변했다.

이소켈레켈은 ‘난므와르키’ 칭호를 받고 처음에는 난마돌에 살았다. 그는 섬을 각자 난므와르키를 둔 자치 추장국들로 나누었고, 이와 나란한 또 하나의 추장 계보인 ‘난켄’이 세워졌다. 각 추장국에 두 개의 서열 칭호 계보를 두는 이 이중 추장 제도는 오늘날에도 폰페이 사회의 중요한 부분이며, 지금 폰페이에는 다섯 개의 전통 추장국이 있다.

난마돌은 왜 결국 버려졌을까. 한 설명은 현실적이다. 섬 전체의 공물을 받지 못하게 된 난마돌의 난므와르키가 물을 긷고 먹을 것을 직접 길러야 했기에 자기 구역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급격한 인구 감소를 원인으로 드는 견해도 있다. 한 폰페이 기록은 마돌레니움의 다섯 번째 난므와르키 때 태풍과 기근으로 버려졌다고 전한다. 19세기에 서양인들이 왔을 때 난마돌은 더 이상 거주 중심지가 아니었지만, 일부 의례는 1800년대까지 이어졌다.

[4][3][8][1]

중급

바깥의 시선: 탐험가에서 ‘잃어버린 대륙’까지

유럽인이 폰페이를 어느 정도 자세히 기록한 것은 1828년 표도르 리트케가 이끈 러시아 탐험대가 들렀을 때이며, 대원 F. H. 폰 키틀리츠가 바다 위의 폐허를 묘사했다. 1836년 영국 범선 램턴호의 선의 캠벨은 이 유적이 피라미드만큼 오래되었다고 하면서도 폰페이 사람들은 그 기원을 전혀 모른다고 결론지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핸런은 캠벨이 마주한 것이 무지가 아니라 언어 장벽, 그리고 신성한 지식에 대해 침묵하도록 한 문화적 규범이었다고 지적한다. 1874년 폴란드 박물학자 얀 스타니스와프 쿠바리가 처음으로 난마돌을 자세히 기록했고, 1895년 영국 인류학자 F. W. 크리스천이 조사했으며, 20세기 초 독일 민족학자 파울 함브루흐가 유적을 측량하고 폰페이 사람들의 설명을 기록했다.

핸런은 19세기 방문자들이 유적의 크기를 거듭 부풀리고 당대의 인종 이론으로 해석했으며, 태평양 섬사람들이 이렇게 거대한 것을 지었으리라고 믿지 않으려 했음을 보여 준다. 난마돌은 A. 메릿의 모험소설 『달의 웅덩이(The Moon Pool)』(1918)의 무대가 되었고, 크툴루 신화 계열 작품에도 영감을 주었다. 1926년 작가 제임스 처치워드는 이곳을 가상의 침몰 대륙 ‘무(Mu)’의 흔적이라고 주장했지만,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이어진다. 2022년 한 텔레비전 시리즈가 난마돌의 연대에 관해 사실이 아닌 주장을 내놓자, 태평양 고고학·지리학 전문가들은 이것이 유적을 세운 폰페이 조상들에 대한 모욕이며 19세기 인종주의적 사고와 이어져 있다고 비판했다. 앞바다에 가라앉은 도시가 있다는 소문도 수중 조사로 검증되었다. 1988~89년과 2013년의 조사는 물속 ‘돌기둥’이 자연적인 산호 덩어리이거나 떨어진 건축석이며, 근처의 블루홀도 산호초 석회암에 생긴 자연 싱크홀임을 밝혔다.

여기서 얻을 교훈은 분명하다. 난마돌은 사라진 이방인이 남긴 수수께끼가 아니다. 폰페이 사람들이 이룬 업적이며, 그 후손은 지금도 섬에 살면서 난마돌의 역사에서 자라난 추장 칭호를 지니고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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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오늘날의 보호와 위협

난마돌은 폰페이가 미국이 관리하던 태평양 제도 신탁통치령에 속해 있던 시기인 1974년 미국 국가사적지에 올랐고, 1985년 국가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유적에서 나온 유물은 2012년 문을 닫기 전까지 리도르키니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2016년 유네스코는 ‘난마돌: 동부 미크로네시아의 의례 중심지’를 기준 (i)·(iii)·(iv)·(vi)에 따라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인간 창의성의 걸작, 사라진 문화 전통의 증거, 뛰어난 건축 유형, 그리고 살아 있는 전통·신앙과 이어진 장소라는 평가다. 같은 해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도 올랐다.

위험 유산 지정의 이유로 든 것은 물길에 계속 쌓이는 퇴적물이다. 퇴적이 식물의 과도한 번성을 부르고 기존 구조물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곧 난마돌을 난마돌답게 만든 물길이 서서히 메워지고, 모르타르 없이 쌓은 벽 속으로 식물이 파고들고 있다. 그래서 보존은 돌벽을 고치는 일만이 아니라 유적 전체의 물과 퇴적물, 식생을 관리하는 일이기도 하다.

[1][6]

심화

연대 측정: 방사성탄소, 산호, 그리고 ‘1628년’ 문제

난마돌의 연대를 세우는 일은 1977년 윌리엄 S. 에어스가 이끈 오리건 대학교의 포나페 고고학 조사(Ponape Archaeology Survey)가 시작된 이래 폰페이 고고학의 핵심 과제였다. 인공 섬 채움층의 방사성탄소 시료는 서기 1년 무렵부터 해변·모래톱, 또는 산호초 위 고상 가옥에서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 주며, 사람의 활동은 80~200년 무렵으로 측정된다. 낮은 단의 조성은 900년 무렵 시작되었다. 에어스의 판케디라 발굴은 두 개의 주요 건설 단계, 곧 본격적 거석 건축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 900~1100년 무렵과, 거석 건축이 이루어진 1300~1500년 무렵을 확인했다.

배스와 애선스는 1990년, 거석 건축과 이데트섬의 거북 제사를 사우델레우르 시대의 지표로 삼는다면 그 시작은 1200년 무렵이라고 주장했다. 1965년 스미스소니언 발굴은 이데트의 조리석 더미를 1200~1400년 무렵으로 측정했고, 이들의 새 연대는 1200년 무렵의 시작을 확인하면서 끝은 1500~1600년대로 늦추었다. 2016년 마크 매코이 연구진은 난다우와스에 있는 첫 섬 전체 추장의 무덤에서 나온 산호에 고정밀 우라늄-토륨(230Th/U) 연대측정을 적용하고 현무암의 산지를 지구화학적으로 추적해, 난마돌의 기념물 건설이 1180~1200년에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이는 1300~1600년 사이에 이어진 오세아니아 다른 섬들의 기념물 건설보다 이르다.

널리 알려진 ‘1628년 무렵’이라는 종말 연대는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직접 관찰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선스는 1984년, 완전하다고 가정한 마돌레니움 난므와르키 22대의 목록에 추정 평균 재위 기간을 적용해 이 연도를 계산했다. 구전은 대체로 사우델레우르의 몰락을 그보다 이른 1500년대에 둔다. 따라서 1628년은 근거 있는 추정치일 뿐이며, 전환은 한 번의 정복보다 더 점진적이었을 수 있다.

연대 문제는 동부 미크로네시아의 또 다른 거대 현무암 유적인 코스라에섬 렐루(Leluh)와의 관계에도 걸려 있다. 폰페이 전승은 난마돌 건설자들을 코스라에와 연결하고, 이소켈레켈 이야기도 코스라에를 사우델레우르의 몰락과 잇는다. 그러나 방사성탄소 증거로는 난마돌이 렐루보다 앞서므로, 영향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코스라에에서 폰페이가 아니라 폰페이에서 코스라에로 흘렀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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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구전과 고고학: 누구의 진실인가

난마돌은 고고학이 구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의의 대표 사례다. 사우델레우르에 관한 지식의 상당 부분은 폰페이 사람들 자신의 기록에서 나온다. 폰페이 사람 루엘렌 베르나트가 오랜 세월에 걸쳐 쓰고 1977년 영어 번역으로 출판된 『루엘렌의 책(The Book of Luelen)』, 그의 손자 마사오 해들리의 미간행 기록, 그리고 함브루흐와 솔 리젠버그 같은 민족지학자들의 기록이 그것이다. 배스와 애선스는 폰페이 관습이 외부인에게 비전(秘傳) 지식을 나누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이런 상세한 기록이 특히 귀하다고 했다.

배스와 애선스는 구전에서 끌어낸 아홉 가지 고고학적 예측을 검증했다. 유적의 위치, 사제·통치자·무덤 구역의 구분, 이데트섬의 거북 조리 흔적과 뱀장어 울타리, 팔라카프섬의 U자형 집회소, 그리고 키티의 사프타카이와 마돌레니움 내륙에 같은 주상절리 현무암 양식으로 지은 부속 중심지 등은 뒷받침되었다. 반면 두 창건 형제의 생애 안에 난마돌이 지어졌다는 전승은 확인되지 않았다. 고고학은 사우델레우르 시대 훨씬 전부터 시작된 길고 점진적인 점유의 역사를 보여 준다.

폰페이 웨네 지역에서 구전을 채록한 인류학자 수잰 팰가우트는 문제가 구전이 ‘참이냐 거짓이냐’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폰페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지식은 사람과 칭호에 결부되어 있고, 엄격히 제한되며, 전해지는 과정에서 신중하게 관리·편집된다. 조금씩 다른 판본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누가 지식을 지니고 왜 나누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그 지식을 평가하는 일의 일부다. 지식 있는 폰페이 사람들의 안내를 받은 그의 현장 조사로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유적 수십 곳이 기록되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핸런은 1990년 초기 유럽·미국인의 난마돌 ‘시선’을 다룬 글에서, 19세기의 선의·표류자·박물학자·인류학자들이 부풀린 측정치, 깔끔하지만 부정확한 지도, 사라진 종족 이론을 만들어 냈으며 그것이 폰페이보다 그들 자신의 시대를 더 많이 말해 준다고 보았다. 그는 고고학자들도 자신이 가져온 개념이 보는 것을 규정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이 연구들은 난마돌을 수수께끼로 다루던 시각에서 벗어나 폰페이의 역사·언어·사회 조직을 통해 읽고, 폰페이 사람들을 자기 과거에 대한 권위자로 인정하는 태평양 고고학의 넓은 흐름을 보여 준다.

[8][9][10]

심화

집권과 분권: 난마돌이 추장 사회에 대해 알려 주는 것

폰페이 구전은 사회 이론가들에게 흔치 않은 과정을 전한다. 섬 전체를 아우르던 중앙집권 체제(사우델레우르)가 더 큰 국가가 아니라 여러 작은 자치 추장국(난므와르키 체제)으로 바뀐 것이다. 배스와 애선스는 이를 ‘사우델레우르에서 난므와르키로의 전환’이라 부르고, 이것이 사회 복잡성의 실제 후퇴인지 재편인지를 물었다. 이들은 소규모 신정 체제의 권력을 엘리트의 위세품 통제와 연결한 조너선 프리드먼의 모델, 사회 계층의 수를 인구·영토와 연결한 로스 코디의 모델을 검토했다.

고고학적으로 분권화하는 사회라면 중심지의 포기, 엘리트 장례 기념물의 소멸, 수공업 조직의 변화 같은 흔적을 예상할 수 있다. 난마돌의 최종 포기, 사프타카이(대략 1325~1700년 점유) 같은 고지대 중심지의 건설, 난므와르키 시대 집회소(나스)의 발달이 모두 이 문제와 관련된다. 배스와 애선스는 또 사우델레우르 체제가 후대 전승이 말하는 만큼 실제로 강하게 집권적이지 않았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예컨대 서쪽 키티 지역은 동쪽 권력에 맞선 것으로 이름났다.

더 넓은 비교의 틀에서, 매코이 연구진은 흔히 권위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로 여겨지는 기념물 건설이 태평양 원양 도서 지역에서 언제 처음 나타났는지를 난마돌로 짚어 냈다. 이른 연대 덕분에 난마돌은 오세아니아 전역에서 추장 권력의 등장을 연구할 때 핵심 기준점이 된다.

학자들 사이에는 여전히 이견이 많다. 사우델레우르가 몇 대였는지, 그 통치가 실제로 얼마나 집권적이었는지, 이소켈레켈의 정복이 섬 전체에 미쳤는지 아니면 인류학자 피터슨이 1990년에 제안한 대로 주로 마돌레니움에 한정되었는지, 무엇이 난마돌의 거주를 끝냈는지 등이다. 이런 열린 질문들이야말로 태평양 사회가 정치 세계를 어떻게 세우고 다시 세웠는지를 이해하는 데 이 유적이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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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인공 섬
얕은 산호초 위에 현무암을 쌓고 속을 산호 잡석으로 채워 만든 92개의 섬이 조수 물길로 나뉘어 있다.
주상절리 현무암
자연적으로 생긴 다각형 용암 기둥을 길이·마구리 방향으로 엇갈려 쌓아 높고 튼튼한 벽을 만들었다.
따로 떨어진 중심지
물도 농지도 없는 난마돌은 섬 전체의 뒷받침에 기대어, 통치자·사제를 평민과 물리적으로 분리했다.
장례 기념물
가장 많은 노동이 난다우와스 같은 무덤 섬에 들어갔다. 난마돌은 무엇보다 존귀한 죽은 이들의 장소였다.
사우델레우르에서 난므와르키로
한 명의 섬 전체 통치자에서 이중 추장 계보를 둔 여러 추장국으로의 전환. 이 제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증거로서의 구전
신중히 검토한 폰페이 전승은 많은 고고학 발견과 일치하지만, 건설 속도 같은 부분에서는 다르다.
‘수수께끼’ 신화에 맞서기
잃어버린 대륙이나 외부 건설자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없으며 폰페이 조상들의 업적을 지운다.

기록

  1. 약 1년 — 인공 섬 채움층의 방사성탄소 연대로 본, 템웬섬 앞 산호초의 가장 이른 점유.
  2. 약 900년 — 산호초 위에 낮은 단과 인공 섬 조성이 진행된다.
  3. 약 1180년 — 거석 건축 시작. 난다우와스의 첫 추장 무덤 산호가 1180~1200년으로 측정된다.
  4. 약 1300년 — 판케디라 등에서 주상절리 현무암 건축의 주요 단계(1300~1500년 무렵).
  5. 약 1628년 — 이소켈레켈의 정복 뒤 사우델레우르 통치가 끝나고 난므와르키 시대가 열린 추정 연대(구전은 1500년대를 시사).
  6. 1828년 — 표도르 리트케의 러시아 탐험대가 폰페이를 방문하고 F. H. 폰 키틀리츠가 유적을 묘사한다.
  7. 1874년 — 얀 스타니스와프 쿠바리가 난마돌을 처음으로 자세히 기록한다.
  8. 1911년 — 파울 함브루흐의 유적 지도가 출판되어 무덤·왕실·사제 구역을 나눈다.
  9. 1977년 — 오리건 대학교 포나페 고고학 조사가 체계적 연구를 시작한다.
  10. 1985년 — 미국 국가역사기념물로 지정된다.
  11. 2016년 —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함께 오른다.

용어 풀이

폰페이
동부 캐롤라인 제도의 화산섬. 오늘날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한 주다.
사우델레우르
구전에 따르면 처음으로 폰페이를 통일해 난마돌에서 다스린 통치자들의 칭호.
난므와르키
폰페이 각 추장국의 최고 추장 칭호. 이소켈레켈이 처음 지녔다.
난켄
각 추장국의 두 번째 추장 칭호 계보로, 폰페이 이중 추장 제도를 이룬다.
웨이(wehi)
폰페이의 구역·추장국. ‘거북’이라는 뜻도 있어 거북 제사 기원 이야기와 이어진다.
주상절리 현무암
용암이 천천히 식으며 길쭉한 다각형 기둥 모양으로 갈라진 화산암.
난다우와스
마돌 포웨에 있는 왕실 무덤 섬. 난마돌에서 가장 높은 벽을 지녔다.
판케디라
마돌 파에 있으며 전통적으로 통치자의 거처로 여겨지는 섬.
사카우
카바의 폰페이어 이름. 후추과 식물 뿌리를 찧어 만드는 의례용 음료.
우라늄-토륨 연대측정
산호 같은 물질 속 우라늄이 토륨으로 붕괴한 정도를 재어 연대를 구하는 방법.

묻고 답하기

난마돌은 누가 지었나요?

오늘날 폰페이 사람들의 조상이에요. 미크로네시아 바깥 사람들이 지었다는 증거는 없고, 잃어버린 대륙설은 유사과학이에요.

기계도 없이 그 무거운 돌을 어떻게 옮겼나요?

뗏목으로 석호를 건너 옮긴 뒤, 나무줄기 비탈 위로 지렛대와 식물 섬유 밧줄을 써서 많은 사람이 함께 끌어올렸을 가능성이 커요. 폰페이 전설은 돌이 마법으로 날아왔다고 전해요.

그곳에 사람이 많이 살았나요?

아니에요. 한 번에 많아야 1,000명쯤, 추장과 사제, 그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살았어요. 나머지 사람들은 본섬에 살며 카누로 음식과 물을 보냈지요.

1628년이라는 연대는 확실한가요?

아닙니다. 후대 추장 목록의 평균 재위 기간으로 계산한 값입니다. 구전은 사우델레우르의 몰락을 더 이르게 두는 경향이 있고, 고고학 연대는 변화가 점진적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왜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올랐나요?

물길에 퇴적물이 계속 쌓이면서 식물이 섬을 뒤덮고 돌 구조물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소켈레켈 이야기는 역사로서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전쟁에 관한 서로 다른 판본이 적어도 열세 가지 출판되었습니다. 학자 대부분은 역사적 바탕이 있으나 세월 속에 도덕적·정치적 의미로 다듬어졌다고 보며, 정복이 주로 마돌레니움에 한정되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코스라에섬의 렐루와는 관계가 있나요?

둘 다 동부 미크로네시아의 현무암 벽 유적이고 전승도 폰페이와 코스라에를 잇습니다. 방사성탄소 연대로는 난마돌이 더 오래되어, 폰페이에서 코스라에로 영향이 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Nan Madol. Wikipedia
  2. 난 마돌. 위키백과
  3. Saudeleur dynasty. Wikipedia
  4. Isokelekel. Wikipedia
  5. Pohnpei. Wikipedia
  6. List of World Heritage in Danger. Wikipedia
  7. Mark D. McCoy, Helen A. Alderson, Richard Hemi, Hai Cheng, R. Lawrence Edwards, Earliest direct evidence of monument building at the archaeological site of Nan Madol (Pohnpei, Micronesia) identified using 230Th/U coral dating and geochemical sourcing of megalithic architectural stone. Quaternary Research 86(3), 2016
  8. Joyce E. Bath, J. Stephen Athens, Prehistoric Social Complexity on Pohnpei: The Saudeleur to Nahnmwarki Transformation. Micronesica Suppl. 2, 1990
  9. Suzanne Falgout, Getting to the Truth of the Matter: Prospects and Limitations of Oral Traditions for Archaeological Interpretation in Pohnpei, Micronesia. Micronesica Suppl. 2, 1990
  10. David Hanlon, ‘The Pleasure of Speculation and Conjecture’: Early Euro-American Visions of Nan Madol and their Relevance to Post-Modern Archaeological Investigations. Micronesica Suppl. 2, 1990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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