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서튼후

Sutton Hoo (고대 영어 hōh, ‘튀어나온 언덕’)

약 610–635년 · 서퍽주 우드브리지 근처 (이스트앵글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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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
  • 외교·교류

한 문장으로

서튼후는 잉글랜드 동부의 풀 덮인 무덤 언덕들로, 약 1,400년 전 사람들이 27미터짜리 배를 강에서 끌어 올려 멀리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온 보물까지 채운 뒤 그 안에 한 권력자를 묻은 곳이다.

서튼후
이미지: User:Amitchell125 · CC BY 3.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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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버스 두 대를 이어 놓은 것보다 긴 배를 통째로 강에서 끌어내 언덕 위로 올린 다음, 거대한 흙더미로 덮어 버렸다고 상상해 보세요. 약 1,400년 전 잉글랜드의 서튼후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한 일이에요.

배 한가운데에는 작은 나무 방을 만들었어요. 아마 아주 중요한 사람, 어쩌면 왕을 위한 방이었을 거예요. 다만 시신도 이름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 사람이 누웠을 자리 곁에는 가장 귀한 물건들을 놓았지요. 얼굴 가리개가 달린 투구, 금과 붉은 석류석으로 꾸민 칼, 방패, 뿔잔, 은그릇, 하프처럼 생긴 악기 리라, 그리고 금화가 가득 든 지갑이었어요.

수백 년이 지나면서 배의 나무는 썩어 없어졌고, 모래가 많은 산성 흙 속에서 사람의 몸도 사라졌어요. 하지만 배를 붙잡고 있던 쇠못(리벳)은 제자리에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1939년 고고학자들이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 내자 모래 위에 찍힌 배 모양, 말하자면 ‘유령 배’가 나타났어요.

무덤 속 물건은 여러 나라에서 왔어요. 은그릇 일부는 동로마 제국에서, 청동 그릇은 지중해 동쪽에서, 금화는 오늘날 프랑스 땅에 있던 프랑크 왕국에서 왔어요. 작고 비가 많이 오는 섬에 살던 사람들도 넓은 세계와 이어져 있었다는 뜻이에요.

무덤 안에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어요. 많은 학자는 624년 무렵 세상을 떠난 이스트앵글리아의 왕 레드왈드라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과학자와 역사가들이 계속 풀고 있는 수수께끼랍니다.

한눈에 보기

무엇
무덤 언덕 약 20기로 이루어진 중세 초기 왕실 묘역. 1호분의 배 무덤이 가장 유명하다
장소
잉글랜드 서퍽주 우드브리지 근처, 데번강 하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배 무덤의 연대
7세기 초. 금화로 보아 약 610–635년이며, 흔히 625년 무렵으로 본다
나라
우핑 왕조가 다스린 이스트앵글리아 왕국
묻힌 사람(추정)
가장 흔히 레드왈드 왕(624년 무렵 사망)으로 보지만 다른 후보도 제기되었다
배
길이 약 27m, 너비 4.4m의 겹붙임(클링커) 방식 배. 노잡이 약 40명 자리
발견
1938–1939년, 토지 소유자 이디스 프리티의 의뢰로 배질 브라운이 발굴. 이후 1965–1971년, 1983–1992년 재조사
유물 소장
영국박물관(이디스 프리티의 기증). 유적은 내셔널 트러스트 소유

쉬움

서튼후는 어떤 곳인가

서튼후는 잉글랜드 동부 서퍽주의 모래 언덕 위에 낮은 흙무덤 스무 기 남짓이 모여 있는 묘역이다. 언덕은 북해로 흘러가는 데번강을 내려다본다. ‘후(Hoo)’는 튀어나온 높은 땅을 뜻하는 고대 영어에서 왔으므로, 이름은 대략 ‘서튼 옆의 언덕 끝’이라는 뜻이다.

무덤들은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당시 이 지역은 이스트앵글족의 왕국, 곧 이스트앵글리아였다. 가장 큰 1호분 아래에서는 북유럽에서 발견된 가장 호화로운 무덤 가운데 하나가 나왔다. 나무배 한 척을 통째로 묻고 그 한가운데에 무덤방을 만들어 무기, 잔치 도구, 장신구, 수입한 은기를 가득 채운 것이다.

서튼후가 중요한 까닭은 세 가지다. 문자 기록이 매우 드문 시대에서 놀라운 수준의 유물을 전해 준다. 유럽 변두리의 작은 왕국이 프랑크 세계, 스칸디나비아, 비잔티움 제국과 어떻게 이어져 있었는지 보여 준다. 그리고 로마 지배가 끝난 뒤 브리튼의 몇 세기를 한때 ‘암흑시대’라 부르던 인식을 바꾸어, 솜씨 좋은 장인과 넓은 교류가 있던 사회를 드러냈다.

오늘날 유적은 내셔널 트러스트가 관리하고, 보물 대부분은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발견 직후 토지 소유자 이디스 프리티가 나라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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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배와 무덤방 읽기

1호분의 배는 길이 약 27m, 가운데 너비 약 4.4m였다. 북해 연안에서 쓰던 겹붙임(클링커) 방식으로, 떡갈나무 판자를 한쪽에 아홉 장씩 겹쳐 쇠못으로 잇고 안쪽을 나무 늑재 26개로 받쳤다. 노걸이 자리로 보아 노잡이 약 40명이 탈 수 있었다. 돛대를 세운 뚜렷한 흔적이 없어 노로 젓는 배였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은 이 배를 강에서 끌어내 가파른 비탈을 올라 언덕 위까지 옮긴 다음 구덩이에 내려놓았을 것이다. 배 한가운데에는 박공지붕을 얹은 작은 집 같은 나무 무덤방을 지었다. 부장품을 안에 배치한 뒤 구덩이를 메우고 그 위에 커다란 흙무덤을 쌓았다.

시간이 흐르며 무덤방 지붕이 내려앉고 나무는 썩었다. 모래흙 속에서 판자는 검은 얼룩만 남겼지만, 녹슨 쇠못은 줄지어 제자리에 남았다. 1939년 발굴자들이 모래를 쓸어 내자 판자 하나하나의 모양이 드러났다. 이 ‘유령 배’ 사진은 영국 고고학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무덤방은 잔치와 의례를 위해 꾸민 방처럼 읽힌다. 한쪽에는 무기와 전쟁 도구가, 몸이 놓였을 가운데에는 허리띠 장식과 몸에 지니던 장신구가, 한쪽 끝에는 가마솥과 들통, 솥을 매다는 긴 쇠사슬이 놓였다. 죽은 이를 전쟁의 지휘자이자 연회장의 주인이자 통치자로 한꺼번에 보여 주려 한 배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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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보물이 들려주는 이야기

가장 잘 알려진 유물은 투구다. 쇠로 만든 몸체에 무늬를 찍은 주석 입힌 청동판을 씌우고, 얼굴 가리개·볼 가리개·목 가리개를 달았다. 앞면의 눈썹, 코, 콧수염은 합쳐서 날아오르는 용 한 마리가 된다. 눈썹이 날개이고 코가 몸통이다. 작은 판에는 춤추는 전사들과 쓰러진 적을 짓밟는 기마 전사가 새겨져 있다. 수백 조각으로 부서진 채 발견되어 두 차례 복원되었다.

금 유물의 솜씨는 놀랍다. 속이 비어 있고 숨은 잠금장치가 달린 커다란 금 허리띠 버클은 서로 얽힌 동물 무늬로 덮여 있다. 석류석과 색유리를 박은 한 쌍의 굽은 어깨걸쇠는 로마 의례용 갑옷의 어깨 고정쇠를 본뜬 것이다. 지갑 뚜껑 아래에서는 서로 다른 프랑크 주조소에서 만든 금화 37닢이 나왔다. 얇게 간 석류석 수백 개를 작은 금 칸마다 박아 넣었는데, 이런 기법을 칠보식 상감(클루아조네)이라 한다.

권력과 환대를 보여 주는 물건도 있었다. 무늬 단조 칼, 방패, 쇠사슬 갑옷, 오록스(거대한 야생 소) 뿔로 만든 뿔잔, 비버 가죽 주머니에 든 여섯 줄 리라, 그리고 양쪽 끝에 사람 얼굴을 새기고 꼭대기에 청동 사슴을 얹은 긴 숫돌이다. 많은 학자는 이 숫돌이 연장이 아니라 왕권을 상징하는 홀(笏)이었다고 본다.

아주 먼 곳에서 온 물건도 있었다. 커다란 은쟁반에는 비잔티움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재위 491–518)의 검인이 찍혀 있다. 겹쳐 넣은 은그릇 열 점도 동로마 세계에서 왔고, 그리스 문자로 ‘사울로스’와 ‘파울로스’라고 새긴 은숟가락 두 점은 사도 바울의 회심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다. 청동 그릇은 지중해 동부에서 왔으며, 내셔널 트러스트는 무덤 속 유물이 스리랑카, 비잔티움 제국, 이집트처럼 먼 곳에서 왔다고 소개한다.

[1][4][2]

쉬움

1939년의 발견

1930년대에 이 땅의 주인은 이디스 프리티였다. 자기 땅의 무덤 언덕들이 궁금했던 그는 1938년 독학으로 고고학을 익힌 지역 발굴가 배질 브라운에게 몇 기를 열어 보게 했다. 여러 무덤은 오래전에 도굴되었지만, 2호분의 작은 배 무덤처럼 호화로운 매장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1939년 5월 브라운은 가장 큰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곧 쇠못 하나가 나왔고, 이어서 줄지어 늘어선 쇠못들이 거대한 배의 윤곽을 드러냈다. 소식이 퍼지자 전문가들이 모여들었고, 그해 여름 케임브리지 대학의 고고학자 찰스 필립스가 이끄는 팀이 무덤방 발굴을 맡았다.

영국이 전쟁 직전이었기에 발굴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유물은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고 배의 자국은 다시 덮였다. 1939년의 법적 심리는 이 보물이 되찾을 의도 없이 묻혔으므로 왕실에 속하는 ‘매장 보물(treasure trove)’이 아니라 토지 소유자의 재산이라고 판정했다. 이디스 프리티는 이를 나라에 기증했는데, 영국 박물관 역사에서 손꼽히는 너그러운 기증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적지는 군사 훈련장으로 쓰였고, 유물은 폭격을 피해 따로 보관되었다. 본격적인 연구는 전쟁이 끝난 뒤에야 다시 시작되었다. 발굴 이야기는 2021년 영화 「더 디그(The Dig)」로 다시 널리 알려졌다.

[1][2]

중급

누가 묻혔을까: 이스트앵글리아와 레드왈드 왕

1호분에는 묻힌 사람의 이름을 적은 글이 없다. 가장 좋은 단서는 금화다. 서로 다른 주조소에서 만든 프랑크 금화 37닢을 연구한 결과, 매장 시기는 대략 610년에서 635년 사이로 좁혀진다. 이 시기의 문헌은 드물지만, 731년 무렵 『잉글랜드 교회사』를 완성한 수도사 베다가 이스트앵글리아 왕들에 대해 전해 준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우핑 왕조의 레드왈드다. 그는 599년 무렵부터 624년 무렵까지 다스렸다. 베다에 따르면 레드왈드는 망명한 노섬브리아 왕자 에드윈을 보호했고, 616년 또는 617년 아이들강 전투에서 에드윈의 적 애설프리스 왕을 물리쳐 에드윈을 노섬브리아 왕위에 올렸다. 베다는 레드왈드를 험버강 남쪽 잉글랜드 여러 왕국 위에 군림한 몇 안 되는 왕 가운데 하나로 꼽는데, 후대에는 이런 지위를 ‘브레트왈다’라고 불렀다.

이런 권력은 1호분의 부와 잘 맞는다. 홀처럼 보이는 숫돌, 일부 학자가 깃대로 해석하는 쇠 받침대, 로마 황제의 갑옷을 흉내 낸 어깨걸쇠 등 통치의 상징으로 보이는 물건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이스트앵글리아 왕실의 거점으로 밝혀진 렌들셤이 불과 6.4km 거리에 있어, 서튼후가 왕권의 중심 가까이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래도 이는 유력한 가설일 뿐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레드왈드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에오르프왈드와 시게베르트도 후보로 거론되었고, 2025년 역사학자 헬렌 기토스는 비잔티움 군대에서 복무한 이 지역 엘리트 병사의 무덤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지 전시관은 레드왈드를 유력한 주인공으로 소개하지만, 영국박물관은 좀 더 조심스럽게 ‘이스트앵글리아의 왕’이라고만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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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옛 신들과 새 신앙 사이에서

서튼후는 종교가 바뀌는 순간에 만들어졌다. 59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보낸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교단이 켄트에 도착했고, 켄트의 애설버트 왕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레드왈드는 604년 무렵이나 그보다 조금 뒤 애설버트의 궁정에서 세례를 받아, 이스트앵글리아 왕으로는 처음 새 신앙을 받아들였다.

베다는 그 뒤의 일을 못마땅하게 기록했다. 레드왈드가 고향에 돌아온 뒤 아내와 신하들의 영향으로 한 신전 안에 그리스도를 위한 제단과 옛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작은 제단을 함께 두었다는 것이다. 이 ‘두 제단’ 이야기는 바깥에서 들어온 새 종교와 조상 대대로 섬긴 신들을 함께 붙들려 한 통치자의 모습을 엿보게 하는 귀한 기록이다.

1호분의 매장도 이런 모호함을 비춘다. 흙무덤 아래 배를 묻고 무기와 잔치 도구를 넣는 방식은 그리스도교 이전 스칸디나비아와 공유하던 전통이다. 그러나 무덤에는 ‘사울로스’와 ‘파울로스’ 숟가락, 십자 무늬를 새긴 은그릇도 있었다. 일부 학자는 이를 그리스도교 물건, 나아가 세례 선물로 읽고, 다른 학자는 단지 값비싼 수입 은기로 귀하게 여겼을 뿐이라고 본다.

그리스도교가 이스트앵글리아에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은 다음 세대, 레드왈드의 후계자들 때였다. 그렇게 보면 서튼후는 왕국이 교회 쪽으로 돌아서던 바로 그때 치러진, 옛 방식으로 왕을 기리는 마지막 거대한 표현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3][1][5]

중급

넓은 세계 속의 작은 왕국

유물은 이스트앵글리아가 여러 교류망이 만나는 자리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금화는 해협 건너 프랑크 왕국들과 이어진다. 투구와 방패, 그리고 배 무덤이라는 발상 자체는 스웨덴 동부의 벤델·발스예르데 묘역과 가장 닮았다. 이스트앵글리아 지배층과 스칸디나비아 지배자들 사이에 긴밀한 관계, 어쩌면 혈연까지 있었음을 시사한다.

은기는 더 남쪽과 동쪽을 가리킨다. 아나스타시우스 은쟁반은 묻힐 때 이미 만들어진 지 백 년쯤 된 물건이었다. 외교 선물이나 가보, 전리품으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서퍽까지 왔을 것이다. 비잔티움의 은그릇과 숟가락, 지중해 동부의 청동 그릇, 그리고 아마도 멀리 남아시아에서 왔을 석류석은 유럽을 가로질러 그 너머까지 뻗은 긴 교환의 사슬을 드러낸다.

이 시대의 귀중품은 시장에서 흔한 물건처럼 사고팔리지 않았다. 왕과 왕 사이의 선물, 충성스러운 전사에게 내리는 상, 혼인 예물, 공물로 오갔다. 금과 은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왕이 부하들을 자기 곁에 묶어 둘 수 있었다. 그런 재물을 땅에 묻는 일 자체가 힘의 과시였다. 새 통치자와 공동체가 이런 보물을 죽은 이를 위해 내놓을 만큼 여유가 있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금 버클과 어깨걸쇠를 만든 공방은 이스트앵글리아 궁정을 위해 일한 현지 공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석류석 칠보 상감과 얽힌 동물 무늬를 다루는 솜씨로 보아 중세 초기 유럽 최고의 금세공인들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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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1호분이 만들어진 625년 무렵은 유라시아 곳곳에서 전환점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호스로 1세의 나라를 이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길고 지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무덤 속 비잔티움 은기는 바로 그 동로마 세계에서 왔다. 그 수도에는 유스티니아누스의 하기아 소피아가 솟아 있었고, 한 세기 전에는 그의 법률이 『로마법 대전』으로 정리되었다.

아라비아에서는 622년 예언자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이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겨 갔다. 이슬람력은 이 사건에서 시작한다. 서튼후 매장 뒤 한 세대 안에 아랍 군대는 비잔티움과 페르시아를 모두 꺾고, 은기를 서퍽까지 보냈던 지중해 세계를 바꾸어 놓게 된다.

동아시아에서는 고구려 원정(598–614)으로 힘을 소진한 수나라가 618년 무너지고, 새로 선 당나라가 곧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제국을 세웠다. 한반도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고, 그 경쟁은 이 세기 후반 신라의 통일 전쟁으로 끝난다.

가장 닮은 장면은 일본에 있을지 모른다. 강력한 소가씨는 백제에서 전해진 외래 종교인 불교를 앞장서 받아들여 590년대에 아스카데라를 세웠고, 7세기 초에는 쇼토쿠 태자(622년 사망)와 관련된 호류지가 뒤따랐다. 두 제단을 둔 레드왈드처럼 일본의 지배층도 새로운 보편 종교를 조상의 신들 곁에 어떻게 둘지 결정하고 있었다. 두 곳 모두에서 종교의 변화는 왕권, 그리고 바깥 세력과의 동맹과 얽혀 있었다.

무엇보다 서튼 후의 유물은 이스트앵글리아가 실제로 어디와 이어져 있었는지 보여 준다. 프랑크와 스칸디나비아의 공예에 견줄 금·석류석 세공, 메로빙거 왕조 갈리아의 동전, 동지중해에서 온 은그릇이 그 증거다. 북해의 작은 왕국이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3]

중급

그 뒤의 역사와 새로운 발굴

거대한 매장이 끝난 뒤에도 서튼후는 계속 쓰였다. 뒤의 발굴에서 얕은 구덩이에 묻힌 시신 무리가 나왔는데, 일부에는 교수형이나 참수의 흔적이 있었다. 대략 8세기 이후로 연대가 잡히는 이 처형 매장은 옛 왕실 묘역이 뒷날 경계 근처의 처형장으로 쓰였음을 보여 준다. 옛 이교도 지배층과 연결된 장소에 묻는 것 자체가 추가 형벌이었을 수도 있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루퍼트 브루스밋퍼드가 이끈 영국박물관 팀이 1호분을 다시 발굴했다. 이들은 배 자국을 자세히 기록하고 석고로 본을 떴으며 화학 분석을 했다. 무덤방에서 나온 인산염 흔적은 시신이 있었으나 산성 흙에 녹아 사라졌다는 견해를 뒷받침했지만, 결정적 증거는 아니다. 브루스밋퍼드의 세 권짜리 보고서(1975–1983)는 지금도 유물 연구의 기본서다.

1983년부터 1992년까지 마틴 카버가 이끈 새 조사는 일부러 묘역의 일부만 발굴하고 나머지는 미래의 방법을 위해 남겨 두었다. 이 조사에서 처형 매장과 도굴되지 않은 17호분이 드러났다. 17호분에는 무기와 함께 묻힌 젊은 남성이 있었고, 그 옆 무덤에는 그의 말이 따로 묻혀 있었다. 2000년에는 방문자 센터를 짓기 전 조사에서 근처에 또 다른 앵글로색슨 초기 묘역이 발견되었는데, 주인의 건강을 비는 그리스어 글귀가 새겨진 지중해 동부산 청동 들통이 나왔다.

2021년부터는 자원봉사자들이 떡갈나무 판자와 쇠못으로 1호분 배를 실물 크기로 복원하고 있다. 이런 배를 어떻게 만들었고 물 위에서 어떻게 움직였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1][7][6]

중급

서튼후와 『베오울프』

발견 직후부터 서튼후는 고대 영어 서사시 『베오울프』와 비교되었다. 이 시는 덴마크 왕 스킬드 셰빙의 배 장례로 시작한다. 보물을 둘러 쌓은 배에 왕을 눕혀 바다로 떠나보내는 장면이다. 시에는 멧돼지 장식 투구, 금으로 꾸민 연회장, 잔치에서 연주하는 리라, 주군과 전사가 주고받는 선물도 나온다.

다만 이 비교를 지나치게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베오울프』는 1000년 무렵 쓰인 필사본 하나로만 전하며, 처음 지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시 속의 배는 땅에 묻히지 않고 바다로 떠나보내진다. 그래도 무덤과 시가 충성, 너그러움, 영광, 위대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라는 같은 가치의 세계를 공유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특히 투구는 초기 잉글랜드 역사의 얼굴처럼 책 표지, 우표, 포스터에 쓰이며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박물관 전시, 텔레비전, 영화를 통해 서튼후는 영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고고학 유적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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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여러 관점

1호분에는 누가 묻혔는가? 브루스밋퍼드가 강하게 주장하고 널리 받아들여진 레드왈드설은 금화 연대와 베다가 그린 강력한 이스트앵글리아 패자의 모습을 결합한 것이다. 비판자들은 순환 논증의 위험을 지적한다. 우리가 레드왈드를 아는 것은 주로 베다가 그에 대해 썼기 때문이며, 왕조의 다른 구성원도 비슷한 규모로 묻힐 수 있었다는 것이다. 2025년 헬렌 기토스는 묻힌 사람이 비잔티움의 동맹 기병으로 복무한 이 지역 귀족이라고 보고, 비잔티움 은기와 군사 장비를 왕의 선물이 아니라 개인 경력의 기념품으로 읽었다. 논쟁의 핵심은 이름이 남지 않았을 때 유물이 정체성에 대해 얼마나 말해 줄 수 있느냐다.

이교인가 그리스도교인가? 일부 학자는 이 매장을 켄트와 프랑크가 뒷받침한 그리스도교 선교에 맞선 의도적인 이교의 선언으로 본다. 다른 학자들은 그리스도교풍 숟가락과 그릇을 강조하며, 베다의 두 제단 이야기처럼 그리스도교와 전통 관습이 섞여 있던 시기를 반영한다고 본다. 마틴 카버는 서튼후의 무덤들이 정치적 선택을 표현했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교가 켄트와 프랑크의 영향력과 한 묶음으로 들어오던 때에 이스트앵글리아의, 북해의, 이교의 정체성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누구의 유산인가? 20세기에는 서튼후가 흔히 ‘잉글랜드 민족’ 조상의 보물로 소개되었고, ‘앵글로색슨’이라는 말은 하나로 통일된 민족을 가리키는 데 쓰였다. 지금 많은 역사가는 오히려 7세기 이스트앵글리아가 스칸디나비아·프랑크·지중해와 두루 이어진 작은 왕국이었고, 주민 가운데에는 대륙에서 건너온 이들뿐 아니라 로마 시대 브리튼인의 후손도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앵글로색슨’을 민족 이름처럼 쓰는 현대 관행을 문제 삼는 학자도 있고, 이 시대를 가리키는 확립된 역사 용어로 옹호하는 학자도 있다.

스웨덴과의 연관도 달리 읽힌다. 어떤 이들은 벤델·발스예르데와의 유사성이 우핑 왕조의 스칸디나비아 기원을 보여 준다고 본다. 다른 이들은 혈통을 뜻하지 않는, 북해를 가로지르는 지배층의 공통 유행일 뿐이라고 본다. 유물만으로는 두 설명 가운데 하나를 가를 수 없다.

[1][7][6]

심화

증거와 방법: 빈 무덤을 읽는 법

1호분은 없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뼈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간접 증거로 추론해야 했다. 유물 배치에는 시신이 놓였을 빈자리가 있고, 1960년대 인산염 분석은 썩은 시신과 들어맞는 흔적을 찾았다. 예전에는 시신 없는 기념 무덤(가묘)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실제 매장으로 보지만, 이 질문은 해석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 보여 준다.

연대 역시 간접적이다. 금화는 매장이 그 이후에 일어났다는 가장 이른 한계만 알려 준다. 전문가들은 프랑크 금화의 연대 범위를 여러 차례 고쳐 잡았다. 아나스타시우스 은쟁반이 오래 살아남은 것은 물건이 묻힐 때 이미 오래되었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한 해를 찍기보다 ‘약 610–635년’이라고 말한다.

1939년 발굴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서둘러, 제한된 기록만 남기며 이루어졌다. 그래도 당시의 사진과 도면은 매우 귀중하다. 뒤의 연구팀은 원래 기록을 다시 검토하고 무덤을 재발굴했으며, 새 과학 기법으로 유물을 다시 연구했다. 카버의 조사는 유적의 상당 부분을 미래의 연구자를 위해 파지 않고 남긴다는 원칙에 따라 설계되었는데, 이는 지금 문화유산 관리에서 흔한 원칙이 되었다.

투구는 복원 자체가 하나의 해석임을 보여 준다. 1945–46년의 첫 복원은 조각 배치가 잘못된 것으로 밝혀져 해체되었고, 1970–71년에 완성된 두 번째 복원품이 지금 전시된다. 이것 역시 녹슨 조각 수백 개를 현대에 짜 맞춘 것이어서, 박물관은 새것이었을 때 모습을 추정한 복제품도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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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배 무덤
사람을 배 안이나 배와 함께 묻는 풍습으로, 북해 연안 특히 스칸디나비아에 알려져 있다. 서튼후에서는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 한 척을 통째로 구덩이에 넣고 흙무덤을 쌓았다.
메시지로서의 부장품
고른 부장품은 죽은 이를 전사, 너그러운 주인, 통치자로 보여 주고, 장례를 치른 이들의 힘을 드러냈다.
선물 교환
귀중품은 선물·상·공물로 지배자와 추종자 사이를 오갔다. 비잔티움 은기가 서퍽의 언덕까지 온 까닭이다.
종교의 전환기
이 매장은 이스트앵글리아 왕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서도 옛 관습을 지키던 순간에 놓여 있다. 베다가 전하는 레드왈드의 두 제단 이야기가 그 예다.
북해 세계
이스트앵글리아는 스칸디나비아·프랑크와 양식과 관습을 공유했다. 바다는 이 지역들을 나누기보다 이어 주었다.
없음이 곧 증거
뼈도 목재도 남지 않았기에, 고고학자들은 쇠못의 줄로 배를, 화학 흔적과 유물 배치로 시신을 읽었다.
미래를 위한 보존
최근 발굴자들은 더 나은 방법을 가진 미래 연구자를 위해 묘역 일부를 손대지 않고 남겼다.

기록

  1. 597년 — 로마에서 온 아우구스티누스 선교단이 켄트에 도착하고, 애설버트 왕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다.
  2. 약 599년 — 레드왈드가 이스트앵글족의 왕이 된다.
  3. 약 604년 — 레드왈드가 켄트에서 세례를 받지만, 베다에 따르면 뒤에 그리스도와 옛 신들의 제단을 함께 둔다.
  4. 약 616년 — 레드왈드가 아이들강에서 노섬브리아의 애설프리스를 물리치고 에드윈을 왕으로 세운다(616년 또는 617년).
  5. 약 624년 — 레드왈드가 세상을 떠난다.
  6. 약 625년 — 1호분 배 무덤 조성. 금화로 보아 약 610–635년 사이.
  7. 약 731년 — 레드왈드에 관한 주요 문헌인 베다의 『잉글랜드 교회사』가 완성된다.
  8. 1938년 — 배질 브라운이 토지 소유자 이디스 프리티의 의뢰로 무덤 발굴을 시작한다.
  9. 1939년 — 1호분의 배와 무덤방이 발굴된다. 유물은 프리티의 재산으로 판정되어 나라에 기증된다.
  10. 1965년 — 루퍼트 브루스밋퍼드가 이끄는 영국박물관의 1호분 재발굴이 시작된다(1971년까지).
  11. 1983년 — 마틴 카버의 조사가 시작되어(1992년까지) 처형 매장과 17호분 말 무덤이 드러난다.
  12. 2021년 — 1호분 배를 실물 크기로 복원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용어 풀이

봉토분(무덤 언덕)
무덤 위에 흙을 쌓아 올린 것.
겹붙임(클링커) 방식
판자를 조금씩 겹쳐 붙여 배를 만드는 방법으로, 북유럽에서 흔했다.
리벳(쇠못)
두 판자를 잇는 금속 못. 서튼후에서는 나무가 썩은 뒤에도 남았다.
칠보식 상감(클루아조네)
작은 금 칸마다 석류석 같은 보석이나 유리를 끼워 넣는 장신구 기법.
트레미시스
솔리두스의 3분의 1 가치를 지닌 작은 금화로, 이 시기 프랑크인이 주조했다.
우핑 왕조(우핑가스)
이스트앵글족을 다스린 왕조. 전설적 조상 우파의 이름을 땄다.
브레트왈다
다른 잉글랜드 왕국들의 패자로 인정받은 왕을 가리키는 고대 영어 용어.
매장 보물(treasure trove)
당시 법에서 되찾을 의도로 숨긴 금·은으로, 왕실에 귀속되었다.
가묘(세노타프)
시신은 다른 곳에 묻고 기념만을 위해 만든 무덤.

묻고 답하기

배 안에 정말 사람이 묻혀 있었나요?

뼈는 남지 않았지만, 화학 흔적과 유물 배치로 보아 무덤방에 시신이 있었고 모래가 많은 산성 흙 속에서 녹아 없어졌다고 봅니다.

배를 어떻게 언덕 위로 옮겼나요?

기록은 없지만, 많은 사람이 밧줄과 굴림대 등을 써서 데번강에서 끌어 올린 뒤 구덩이에 내려놓았을 것입니다.

레드왈드 왕의 무덤이 확실한가요?

아닙니다. 금화 연대가 624년 무렵의 죽음과 맞고 무덤의 부도 강력한 왕에 어울리지만, 이름은 나오지 않았고 학자들은 다른 후보도 제시했습니다.

잉글랜드 무덤에 왜 비잔티움 은기가 있나요?

귀한 은기는 선물, 가보, 대가, 전리품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오갔습니다. 아나스타시우스 은쟁반은 묻힐 때 이미 오래된 물건이었고, 이런 물건이 얼마나 멀리 오래 떠돌았는지 보여 줍니다.

보물은 누구 것인가요?

1939년 토지 소유자 이디스 프리티의 재산으로 판정되었고, 그가 나라에 기증했습니다. 지금은 영국박물관에 있습니다.

서튼후는 『베오울프』와 관련이 있나요?

왕, 연회장, 투구, 선물 주고받기라는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베오울프』가 배 장례로 시작하지만, 이 시가 서튼후를 묘사한 것은 아닙니다.

처형 매장은 무엇을 알려 주나요?

뒤의 몇 세기 동안 옛 왕실 묘역이 처형된 사람들을 묻는 곳으로 다시 쓰였음을 보여 줍니다. 이교도 과거와 연결된 장소였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Sutton Hoo. Wikipedia
  2. History of Sutton Hoo. National Trust
  3. Rædwald of East Anglia. Wikipedia
  4. Sutton Hoo helmet. Wikipedia
  5. 베다(Bede), 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 (잉글랜드 교회사), 제2권, c. 731
  6. Rupert Bruce-Mitford, The Sutton Hoo Ship-Burial (3 vols.). British Museum Publications, 1975–1983
  7. Martin Carver, Sutton Hoo: Burial Ground of Kings?. British Museum Press, 1998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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