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수백 년 동안 쓰인 규칙 책 수천 권이 쌓인 도서관을 상상해 보세요. 그런데 그 규칙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해서, 재판관은 헷갈리고 사람들은 어느 규칙이 맞는지 다퉈요. 약 1,500년 전, 콘스탄티노폴리스(오늘날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에서 나라를 다스리던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어요.
황제는 트리보니아누스라는 똑똑한 법률가와 전문가들에게 모든 책을 읽고, 낡았거나 서로 부딪치는 부분은 버리고 가장 좋은 것만 남기라고 했어요. 그들은 단 몇 년 만에 법률 책 한 벌을 만들었어요. 황제들의 법을 모은 책, 뛰어난 법학자들의 의견을 모은 아주 두꺼운 책, 그리고 법을 배우는 학생을 위한 얇은 교과서였지요.
교과서는 유명한 생각으로 시작해요. 정의란 모든 사람에게 그가 받아야 할 몫을 주는 것이라고요. 또 법의 기본 원칙은 정직하게 살고, 남을 해치지 않고,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것이라고 말해요.
그 뒤 서유럽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이 책들을 거의 잊어버렸어요. 그러다 1070년 무렵 이탈리아의 학자들이 다시 찾아냈지요. 유럽 곳곳에서 학생들이 이 책을 공부하러 볼로냐라는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것이 최초의 대학들이 생기는 데 힘을 보탰어요.
오늘날 프랑스, 독일부터 일본, 한국, 브라질까지 많은 나라의 법이 이 오래된 로마법 책에서 자라났어요. 그래서 오늘날 판사가 계약이나 재산, 상속을 이야기할 때, 그 생각 가운데 일부는 유스티니아누스의 편찬단까지 거슬러 올라간답니다.
한눈에 보기
- 편찬
- 529~534년(새 법인 『신칙법』은 565년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 반포)
- 장소
-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 명령한 사람
-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
- 편찬 책임자
- 법무장관(콰이스토르) 트리보니아누스와 관리·법학 교수·변호인으로 이루어진 위원회
- 구성
- 『칙법휘찬』(황제 법령, 12권), 『학설휘찬』(디게스타·판덱텐, 법학자 저술, 50권), 『법학제요』(교과서, 4권), 『신칙법』(새 법령)
- 언어
- 주로 라틴어. 『신칙법』은 대부분 그리스어
- 이름
- ‘시민법대전(Corpus Iuris Civilis)’이라는 이름은 1583년 디오니시우스 고토프레두스의 간행본 이후 굳어짐
- 유산
- 유럽 대륙, 라틴아메리카, 동아시아 등 대륙법 전통의 토대. 교회법과 국제법에도 영향
쉬움
로마법대전이란 무엇인가
로마법대전, 원어로 ‘코르푸스 유리스 키빌리스(시민법대전)’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만들어진 법률 저작 모음에 현대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한 권의 책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목적이 서로 다른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황제의 법령을 모은 『칙법휘찬』, 고전기 로마 법학자들의 저술을 발췌한 『학설휘찬』, 법학 입문생을 위한 교과서 『법학제요』, 그리고 법전 완성 뒤 유스티니아누스가 새로 반포한 법령 『신칙법』이다.
유스티니아누스 자신은 ‘시민법대전’이라는 제목을 쓰지 않았다. 1583년 프랑스 법학자 디오니시우스 고토프레두스(드니 고드프루아)가 네 부분을 한데 묶어 이 이름으로 펴낸 뒤 널리 쓰이게 되었다. 여기서 ‘시민법’은 교회법과 구별되는 로마 시민 공동체의 법(ius civile)을 뜻한다.
이 사업의 목적은 방대하고 뒤엉킨 로마법을 정리하는 데 있었다. 로마법은 약 천 년 동안 불어났다. 황제들의 결정은 서로 어긋났고, 위대한 법학자들의 저술은 수백 권에 달해 다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전문가들에게 이 자료를 모으고, 줄이고, 조화시키고, 당대에 맞게 고치라고 명한 뒤, 새 책만이 법적 효력을 가진다고 선언했다.
쉬움
네 부분을 하나씩 살펴보기
『칙법휘찬』(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은 2세기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후 역대 황제의 법령을 모은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528년 2월 10인 위원회를 꾸렸다. 위원회는 비공식 모음인 『그레고리우스 법전』과 『헤르모게니아누스 법전』, 공식 법전인 438년의 『테오도시우스 법전』, 그리고 그 뒤의 법령을 바탕으로 작업했다. 첫 법전은 529년 4월 반포되었고, 534년 개정 제2판으로 대체되었다. 제2판은 12권으로, 1권은 교회법·법원(法源)·고위 관직, 2~8권은 사법, 9권은 범죄, 10~12권은 행정을 다룬다. 전해지는 것은 제2판뿐이며, 제1판은 이집트 파피루스에 남은 목차 조각 말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학설휘찬』은 ‘모든 것을 담았다’는 그리스어에서 온 『판덱텐』이라고도 불리며, 가장 방대하고 법률가에게는 가장 값진 부분이다. 530년 12월 유스티니아누스는 트리보니아누스에게 주로 1~3세기에 활동한 고전기 법학자들의 저술을 발췌해 편찬하라고 명했다. 트리보니아누스는 관리 1명, 교수 4명, 변호인 11명으로 16인 위원회를 꾸렸고, 3년 만에 일을 마쳤다. 『학설휘찬』은 50권으로 되어 있고, 각 권은 주제별 장(章)으로 나뉘며, 발췌문마다 지은이와 원래 저작이 표시되어 있다. 본문의 약 5분의 2가 울피아누스, 약 6분의 1이 파울루스의 글이다.
『법학제요』는 학생을 위한 짧은 입문서로, 사람·물건·소송이라는 틀에 따라 네 권으로 짜였다(상속과 채권은 물건 부분에서 다룬다). 2세기 법학자 가이우스의 『법학제요』를 충실히 본떴다. 특이하게도 이 교과서에도 완전한 법적 효력이 주어졌다. 책은 수백 년 동안 되풀이된 정의로 시작한다. 정의란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려는 한결같고 영속적인 의지라는 것이다.
『신칙법』(Novellae, ‘새 법령’)은 534년 이후 유스티니아누스가 반포한 법이다. 황제 스스로 공식 모음을 만들지는 않았고, 몇 가지 사찬 모음으로 전한다. 대부분 동로마의 일상 언어인 그리스어로 쓰였는데, 편찬이 끝나던 바로 그때에도 법의 세계가 바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쉬움
유스티니아누스와 트리보니아누스: 누가 만들었나
유스티니아누스는 482년 무렵 발칸반도의 라틴어를 쓰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숙부인 황제 유스티누스 1세를 통해 권력에 올랐다. 그는 527년부터 565년까지 다스리며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려 했다. 그의 장군들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되찾았고,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다시 지었다. 황후 테오도라는 54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치의 영향력 있는 동반자였다.
법률 사업은 법안 기초를 맡은 장관(콰이스토르) 트리보니아누스가 이끌었다. 당대 저술가들은 그의 학식을 칭송하는 한편 탐욕스럽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관리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베리투스(베이루트) 법학교의 교수들, 현직 변호인들과 함께 일했다. 『법학제요』는 교수 테오필루스와 도로테우스가 그를 도와 썼다.
황제는 이 사업을 자신의 업적으로 내세웠고, 각 부분을 반포하는 서문 법령도 황제의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나 수천 개의 글을 실제로 읽고 자르고 다듬은 것은 이 편찬단이었고, 그들은 앞선 황제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불과 몇 년 만에 끝냈다.
중급
편찬자들은 어떻게 일했나
편찬자들은 단순히 베끼지 않았다. 결과물이 일관되고 당대의 법에 맞도록 옛 글을 줄이고, 합치고, 고칠 권한이 있었다. 낡은 제도는 지우고, 모순은 해소하고, 일부 규칙은 바꾸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학설휘찬』이 완성되기 전에 법학자들 사이의 오랜 논쟁을 정리하려고 ‘50개 결정’(529~531)이라는 일련의 법령도 내렸다. 편찬자들이 원문에 가한 이런 변경을 ‘개찬(인테르폴라티오)’이라고 부른다.
『학설휘찬』을 반포한 법령에서 유스티니아누스 자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위원들은 약 300만 행에 달하는 2천 권 가까운 책을 읽고 이를 약 15만 행으로 줄였다. 정확한 수치가 어떻든 축약의 규모는 엄청났고, 고전기 법학 문헌의 상당 부분은 오늘날 『학설휘찬』에 뽑혀 들어간 발췌문으로만 남아 있다.
편찬이 끝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재판관과 법률가가 옛 저작을 직접 인용하는 것을 금하고, 『학설휘찬』에 대한 주석도 금지하며 축자적 그리스어 번역과 짧은 요약만 허용했다. 닫힌 권위적 법체계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방의 법률가 대부분이 라틴어를 쉽게 읽지 못했기에, 곧 그리스어 요약과 주석이 나타났다.
중급
로마법 인용 표기를 읽는 법
법학자와 역사학자는 로마법대전을 간결한 숫자 체계로 인용한다. 예컨대 D. 1.1.10은 『학설휘찬』 제1권 제1장 제10개소를 뜻하며, 더 길게 쓰면 항 번호가 붙는다. C.는 『칙법휘찬』, Inst.(또는 I.)는 『법학제요』, Nov.는 『신칙법』이다. 중세 법률가들은 숫자 대신 장과 개소의 첫 낱말로 인용했기에, 오래된 책은 오늘날 독자에게 낯설게 보인다.
『학설휘찬』의 각 개소는 법학자와 출처 저작을 밝히는 머리글로 시작한다. 예를 들면 법무관 고시에 관한 울피아누스 주석서의 몇 권이라는 식이다. 이 표시 덕분에 학자들은 한 책의 조각을 모두 모아 사라진 고전기 법학자의 저작을 재구성할 수 있고, 위원회의 작업 방식에 관한 이론도 바로 이 증거에 기댄다.
그러니 로마법대전을 읽는 일은 공들여 편집된 선집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 2세기 법학자의 목소리와 6세기 편집자의 목소리가 한 문장 안에 함께 있을 수 있고, 로마법사 연구의 솜씨는 그 둘을 모두 알아듣는 데 있다.
중급
법의 내용: 사람, 재산, 계약, 범죄
로마법대전의 상당 부분은 사법을 다룬다. 사람의 신분(자유인과 노예, 시민, 아버지의 권력 아래 있는 자녀), 혼인과 지참금, 소유와 점유, 상속과 유언, 계약과 불법행위에서 생기는 채무 등이다. 로마 법학자들은 소유와 점유의 구별, 합의만으로 성립하는 계약의 유형, 손해를 끼친 데 대한 과실 개념처럼 정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뒤의 유럽 법률가들이 가장 유용하게 여긴 것도 이런 개념이었다.
로마법대전은 그 사회의 모습도 비춘다. 노예제는 법질서의 온전한 일부였지만,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은 노예 해방을 쉽게 했다. 『칙법휘찬』 제1권은 삼위일체와 가톨릭 신앙에 관한 법으로 시작하며, 이단·이교도·유대인·사마리아인을 제한하는 법을 담고 있다. 흔히 테오도라의 영향과 연결되는 일부 『신칙법』은 지참금과 상속 같은 문제에서 여성의 법적 지위를 높이고, 배우와 강제로 성매매에 내몰린 여성을 보호했다.
공법과 형법은 사법보다 분량이 적지만, 『학설휘찬』과 『칙법휘찬』에는 범죄와 형벌, 관리의 의무, 조세에 관한 규정도 있다. ‘모든 사람에게 관계되는 일은 모든 사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과 ‘군주는 법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모두 후대 정치 사상가들이 로마법대전에서 끌어내 서로 전혀 다른 목적에 썼다.
중급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편찬은 위기와 야심이 교차하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학설휘찬』 위원회가 일하던 532년 1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니카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자들은 트리보니아누스를 포함한 인기 없는 대신들의 파면을 요구했고, 도심 대부분이 불탔다. 유스티니아누스의 군대는 반란을 피로 진압했고, 황제는 몇 주 만에 하기아 소피아 재건에 착수해 537년 완성했다. 같은 532년 유스티니아누스는 새로 즉위한 페르시아 왕 호스로 1세와 ‘영원한 평화’ 조약을 맺고 금을 지불하여 군대를 서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이 평화는 540년 호스로가 안티오키아를 약탈하면서 깨졌다.
유라시아 반대편에서도 여러 나라가 법과 종교의 질서를 세우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법흥왕은 520년 율령을 반포했고, 527년 무렵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했다. 523~554년에 재위한 백제 성왕은 538년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불교를 크게 후원한 무제가 다스리던 중국 남조 양나라와 가깝게 지냈다. 같은 시기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했는데, 그 해는 사료에 따라 538년 또는 552년이다.
한 세기 뒤 중국 당나라는 포괄적인 율령을 만들었고, 신라와 일본은 이를 배우고 고쳐 받아들였다. 일본의 645년 다이카 개신이 그 예다. 로마법과 중국법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고 발전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과 당률을 나란히 놓고 보면 같은 문제, 곧 거대한 제국의 흩어진 규칙을 하나의 권위 있는 문서로 만드는 일에 대한 전혀 다른 두 해답을 볼 수 있다.
중급
잊혔다가 다시 찾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볼로냐로
동방에서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은 효력을 유지했지만 점점 그리스어 요약을 통해 쓰였다. 900년 무렵 레오 6세 때에는 『바실리카』라는 방대한 그리스어 법률집으로 다시 정리되어, 제국이 끝날 때까지 비잔티움 법정에서 쓰였다.
서방의 사정은 달랐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복 뒤 그의 법이 이탈리아에 도입되었지만, 곧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으로 반도 대부분이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단절되었다. 『칙법휘찬』과 『법학제요』는 부분적으로 알려졌으나 『학설휘찬』은 약 다섯 세기 동안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 원래 본문에 대한 후대의 지식은 거의 모두 533년 직후인 6세기에 필사된 사본 하나, 『리테라 플로렌티나』에 기댄다. 이 사본은 6세기 말에는 남이탈리아에 있었던 듯하고, 12세기에는 피사가 소장했으며, 1406년 전리품으로 피렌체에 옮겨졌다. 지금은 메디치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에 있다.
1070년 무렵 『학설휘찬』이 북이탈리아에 다시 나타났다. 볼로냐에서 이르네리우스라는 교사가 유스티니아누스의 글을 강의하며 행간과 여백에 짧은 주해(글로사)를 달았다. 그의 학파인 주석학파는 유럽 전역에서 학생을 끌어모았고 볼로냐 대학의 성립에 이바지했다. 13세기에 아쿠르시우스는 주해를 모아 표준 주석서 『표준 주석(글로사 오르디나리아)』을 만들었고, 이 주석은 수백 년 동안 본문과 함께 인쇄되었다.
중급
긴 후일담: 대륙법 전통
볼로냐에서 시작된 로마법 연구는 프랑스, 에스파냐, 독일 등지의 대학으로 퍼졌다. 교회법, 지역 관습과 합쳐져 중세와 근세 유럽의 공통 법학인 ‘보통법(유스 코무네)’을 이루었다. 이 법학을 익힌 법률가들이 왕, 도시, 교회를 위해 일했고, 그 개념이 곳곳에서 법적 논증의 틀이 되었다.
16세기 인문주의 학자들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손질 뒤에 있는 원래의 로마법을 되찾으려고 로마법대전을 역사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독일의 판덱텐 법학은 『학설휘찬』 위에 고도로 체계적인 법학을 세웠다. 특히 1804년 프랑스 민법전과 1900년 독일 민법전(BGB) 같은 근대 국가의 대법전은 이 전통에 크게 기댔다. 이 법전들을 거쳐 로마법 개념은 라틴아메리카, 일본, 한국, 튀르키예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 이르렀다.
잉글랜드처럼 로마법을 체계로 받아들이지 않은 영미법 국가에서도 로마법대전은 법적 사고, 교회 법정, 해사법, 법학 용어에 영향을 주었다. 국제법도 ‘만민법(유스 겐티움)’ 같은 로마의 관념을 빌려 왔다. 오늘날 학계의 표준 본문은 19세기에 테오도어 몸젠, 파울 크뤼거 등이 만든 비판 교정본이다.
심화
학술 논쟁: 개찬과 편찬 방식
편찬자들이 글을 고칠 수 있었기에, 고전기 로마법 연구자는 『학설휘찬』의 모든 대목에 대해 얼마만큼이 원래 법학자의 것이고 얼마만큼이 6세기 편집자의 것인지 물어야 한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는 많은 학자가 의심스러운 낱말과 구절을 후대의 삽입으로 표시하며 열정적으로 개찬을 ‘사냥’했고, 의심되는 개찬의 목록까지 편찬되었다. 20세기 중엽부터 이런 접근은 지나치다는 비판을 널리 받았다. 지금은 개찬으로 여겨졌던 많은 대목이 이미 고대 후기의 법학자 저작 판본에서 바뀌었거나, 그저 진짜 고전기의 표현이라고 본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대목마다 더 신중하게 판단한다.
두 번째 논쟁은 『학설휘찬』 위원회가 어떻게 3년 만에 일을 끝냈느냐는 것이다. 1820년 독일 학자 프리드리히 블루메는 대부분의 장에서 발췌문이 되풀이되는 저작 순서의 묶음으로 배열되어 있음을 알아챘다. 그는 위원들이 자료를 몇 개의 묶음(‘덩어리’)으로 나누어 각각 소위원회가 맡은 뒤 결과를 합쳤다고 보았다. 블루메의 ‘덩어리 이론’은 세부가 계속 다듬어지고 있지만 지금도 대체로 받아들여진다.
사업 전체를 어떻게 이해할지도 논쟁거리다. 어떤 학자들은 보수적이고 고전을 숭상하는 성격을 강조한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법학자들의 황금기를 돌아보며 그것을 보존했다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혁신을 강조한다. 편찬자들은 법을 바꾸고 단일한 권위의 본문을 강제하여, 그 이전의 어떤 것보다 근대 법전에 가까운 것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심화
여러 관점
로마인가 비잔티움인가? 유스티니아누스와 그의 백성은 스스로를 로마인이라 불렀고 자기 나라를 로마 제국이라 했다. ‘비잔티움’은 후대에 붙은 이름이다. 연속성을 강조하는 역사가는 로마법대전을 로마법의 완성으로 보고, 다른 역사가는 그것이 『신칙법』과 『칙법휘찬』의 종교 법령에서 드러나듯 나름의 우선순위를 지닌 그리스도교적이고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어떤 틀로 보느냐에 따라 로마법대전은 끝이 되기도 하고 시작이 되기도 한다.
유럽만의 유산인가? 전통적인 서술은 로마법대전을 ‘서양’ 법의 토대로 묘사한다. 최근 연구는 그것이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도시에서 편찬되었고, 지중해 곳곳 출신 법학자들의 글에 기댔으며(예컨대 울피아누스는 오늘날 레바논의 티루스 출신이다), 뒤에 비잔티움, 서유럽, 슬라브 세계, 그리고 근대 법전을 거쳐 동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저마다 다르게 수용되었다는 점을 짚는다. 예를 들어 일본과 한국의 민법은 로마법 개념을 직접이 아니라 독일·프랑스 모델을 거쳐 받아들였다.
누구를 위한 정의였나? 로마법대전은 그 추론으로 찬탄받지만, 노예제를 합법화하고,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권력을 강화하고, 종교적 소수자의 권리를 제한하기도 했다. 이교도 교사를 겨냥한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은 흔히 529년 무렵 아테네 신플라톤주의 학교의 종말과 연결되지만, 그 관련이 얼마나 직접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여성을 보호한 법에서 테오도라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역사가도 있고, 그 그림이 적대적이거나 미화된 사료에 일부 기대고 있다고 경고하는 역사가도 있다. 균형 잡힌 읽기는 법의 지적 성취와 사회적 한계를 함께 보는 것이다.
핵심 개념
- 법전 편찬
- 흩어진 규칙을 하나의 권위 있는 성문 모음으로 만드는 일. 유스티니아누스의 사업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야심 찬 시도였다.
- 법학자의 법
- 로마법의 상당 부분은 권위 있는 전문 법학자들의 의견으로 발전했다. 『학설휘찬』은 그들의 추론을 보존한다.
- 개찬(인테르폴라티오)
- 편찬자가 옛 글에 가한 변경. 이를 가려내는 일은 로마법사의 핵심 과제다.
- 각자에게 그의 몫을
- 『법학제요』를 여는 정의의 정의(定義)로, 법철학의 고전적 공식이 되었다.
- 계수(繼受)
- 볼로냐 주석학파에서 시작된, 중세·근대 유럽의 로마법 수용.
- 대륙법 전통
- 판례 중심의 영미법과 달리, 포괄적 법전과 로마법 개념에 바탕을 둔 법체계.
기록
- 438년 — 앞선 공식 황제 법령집인 『테오도시우스 법전』 반포.
- 527년 — 유스티니아누스 즉위.
- 528년 — 새 법전 편찬을 위한 10인 위원회 구성(2월).
- 529년 —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제1판 반포(4월).
- 530년 — 유스티니아누스가 트리보니아누스에게 『학설휘찬』 편찬을 명함(12월).
- 532년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니카 반란. 페르시아의 호스로 1세와 ‘영원한 평화’ 체결.
- 533년 — 『법학제요』와 『학설휘찬』 반포, 12월 말 시행.
- 534년 — 『칙법휘찬』 개정 제2판 반포(11월).
- 565년 — 유스티니아누스 사망. 그때까지 『신칙법』이 계속 반포됨.
- 약 900년 — 레오 6세 때 유스티니아누스 법을 그리스어로 재정리한 『바실리카』 편찬.
- 약 1070년 — 북이탈리아에서 『학설휘찬』 재발견. 곧 이르네리우스가 볼로냐에서 강의.
- 1406년 — 『학설휘찬』 사본 『리테라 플로렌티나』가 피사에서 피렌체로 옮겨짐.
- 1583년 — 디오니시우스 고토프레두스가 ‘시민법대전’이라는 이름으로 간행.
- 1804년 — 로마법 전통의 영향을 크게 받은 프랑스 민법전 제정.
용어 풀이
- 칙법휘찬(코덱스)
- 황제 법령을 모은 로마법대전의 한 부분. 코덱스는 라틴어로 제본된 책을 뜻하기도 한다.
- 학설휘찬(디게스타·판덱텐)
- 고전기 로마 법학자들의 글을 발췌해 모은 50권의 책.
- 법학제요
- 법적 효력이 부여된 4권의 법학 입문 교과서.
- 신칙법
- 534년 이후 유스티니아누스가 반포한 새 법령. 대부분 그리스어.
- 법학자
- 글로 남긴 의견이 법을 형성한 로마의 법률 전문가.
- 콰이스토르
-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법안 기초를 맡은 장관.
- 글로사(주해)
- 본문의 행간이나 여백에 단 짧은 설명.
- 유스 코무네(보통법)
- 로마법과 교회법에 바탕을 둔 중세·근세 유럽의 공통 법학.
- 개찬
- 후대 편집자가 앞선 글에 가한 변경.
- 대륙법
- 로마법에서 유래해 법전을 중심으로 하는 법 전통. 좁게는 사인 간의 관계를 다루는 법.
묻고 답하기
유스티니아누스가 직접 법을 썼나요?
아니에요. 황제가 명령하고 승인했으며 법은 황제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실제 편찬은 장관 트리보니아누스가 이끄는 편찬단이 했어요.
왜 ‘시민법’이라고 하나요?
‘시민’은 라틴어 키비스(civis)에서 왔어요. 유스 키빌레는 교회법과 구별되는 로마 시민 공동체의 법이라는 뜻이에요. ‘시민법대전’이라는 제목은 훨씬 뒤인 1583년에 붙었어요.
가장 유명한 문장은 무엇인가요?
『법학제요』의 첫머리예요. 정의란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려는 한결같고 영속적인 의지라는 것이지요. 또 정직하게 살 것, 남을 해치지 말 것, 각자에게 그의 몫을 줄 것이라는 세 가지 기본 원칙을 제시해요.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졌나요?
동방에서는 계속 쓰이며 그리스어로 재정리되었어요. 서방에서는 『학설휘찬』이 거의 사라졌다가 6세기 사본 『리테라 플로렌티나』를 중심으로 살아남아 1070년 무렵 이탈리아에서 다시 발견되었어요.
지금도 중요한가요?
네. 프랑스·독일·이탈리아·에스파냐·라틴아메리카·일본·한국 등 많은 나라의 민법이 여기서 온 개념 위에 세워졌고, 법학도들은 지금도 로마법을 배웁니다.
편찬자들은 옛 글을 얼마나 바꿨나요?
자유롭게 고칠 수 있었습니다. 20세기 초 학자들은 개찬이 곳곳에 있다고 보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더 신중하게 대목마다 따로 판단합니다.
로마법대전은 종교에 대해 뭐라고 하나요?
『칙법휘찬』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법으로 시작하고, 이단·이교도·유대인·사마리아인에 대한 규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제국이라는 유스티니아누스의 구상을 반영한 것입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Corpus Juris Civilis. Wikipedia
- Code of Justinian. Wikipedia
- Digest (Roman law). Wikipedia
- The Institutes of Justinian (발췌 영역). Internet History Sourcebooks, Fordham University
- Yves Lassard, Alexandr Koptev, The Roman Law Library (칙법휘찬·학설휘찬·법학제요·신칙법 라틴어 원문). Université Grenoble Alpes
- Littera Florentina. Wikipedia
- Irnerius. Wikipedia
- Justinian I. Wikipedia
- Eternal Peace (532). Wikipedia
- Damascius. Wikipedia
함께 보기
- 하기아 소피아532년부터 537년까지 비잔티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지은 대성당이다.
- 호스로 1세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재위 531~579). 아누시르반이라 불리며, 조세와 군제를 개혁하고 유스티니아누스와 맞섰으며, 뒤에 정의로운 왕의 본보기로 기억되었다.
-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년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물러난 사건은 흔히 서로마 제국의 종말을 나타내는 기준으로 쓰인다.
-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8세기 바빌론 왕 함무라비의 이름으로 발표된 법률 조항 모음이다.
- 백제 성왕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백제를 양나라와 일본을 잇는 다리로 만들었으며, 신라와 싸우다 전사한 백제 제26대 왕(재위 523~554)이다.
- 다이카 개신645년 궁정 정변 뒤 시작된 정치 개혁으로, 유력 씨족들의 연합이던 일본을 당나라를 본뜬 중앙집권 국가로 바꾸려 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