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호스로 1세 아누시르반

Husraw (중세 페르시아어) · خسرو انوشیروان (페르시아어)

531–579년 · 크테시폰 (사산 제국)

  • 전쟁
  • 외교·교류
  • 경제
  • 문화·학문

한 문장으로

호스로 1세(아누시르반)는 531년부터 579년까지 사산조 페르시아를 다스린 개혁 군주로, 세금과 군대를 새로 짜고,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와 싸우고 협상했으며, 인도와 그리스의 책과 학자를 받아들여, 뒤에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정의로운 왕의 본보기로 기억되었어요.

호스로 1세 아누시르반
이미지: Unknown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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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1,500년 전,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제국이 오늘날의 이란과 이라크, 그 주변 땅에 걸쳐 있었어요. 왕들은 오늘날 바그다드 근처 티그리스강 가의 크테시폰이라는 큰 도시에 살았지요. 그 왕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한 사람이 호스로 1세예요.

호스로는 나라가 강하고 잘 다스려지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관리들에게 농토를 재게 하고 작물과 넓이에 따라 세율을 정해서, 해마다 관리가 수확을 어림짐작하는 대신 나라가 거둘 세금을 미리 알 수 있게 했어요. 그래도 사람들의 신분에 따라 내는 세금은 서로 달랐어요. 또 병사들에게 직접 봉급을 주어서, 군대가 힘센 귀족 가문이 아니라 왕에게 속하도록 했지요.

호스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나라를 다스린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어요. 두 임금은 때로는 큰 전쟁을 벌였고, 때로는 평화 조약을 맺어 유스티니아누스가 호스로에게 금을 주기도 했어요. 한 세상을 나눠 가진 두 거인 같은 맞수였지요.

호스로는 배움을 사랑했어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동물 우화책을 가져오려고 의사 한 명을 멀리 인도까지 보냈고, 체스는 인도 왕의 선물로 그의 궁정에 들어왔대요. 뒤에 『칼릴라와 딤나』로 알려진 그 우화책은 아랍 세계와 유럽까지 전해졌어요.

그가 죽고 한참 뒤, 페르시아와 아랍의 이야기꾼들은 그를 ‘정의로운 누시르반’이라고 불렀어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면 누구나 줄을 당겨 왕에게 정의를 청할 수 있도록 종을 매달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요.

한눈에 보기

재위
531~579년(512~514년 무렵 출생, 579년 크테시폰에서 사망)
왕조
사산조. 카바드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 아들 호르미즈드 4세가 뒤를 이음
수도
티그리스강 가의 크테시폰(오늘날 이라크 살만 파크 부근)
별칭
아누시르반(‘불멸의 영혼을 지닌’). 페르시아·아랍 전통에서 ‘정의로운 왕’으로 기억됨
개혁
토지 측량과 정액 토지세, 인두세, 데흐칸(지방 지주층)의 성장, 네 지역 사령관 체제로의 군제 개편
전쟁
동로마와의 전쟁(532년 영원한 평화, 540년 안티오키아 약탈, 541~562년 라지카 전쟁, 572년 재개), 돌궐과 함께 에프탈 격파(557~560년 무렵), 예멘 정복(570년 무렵)
문화
『칼릴라와 딤나』로 알려진 인도 우화 등의 번역, 체스 전래, 그리스 철학자 환대, 전통적으로 곤디샤푸르의 후원자로 여겨짐
주요 사료
프로코피우스·아가티아스·메난드로스(그리스어), 사산조 전승을 바탕으로 한 타바리와 피르다우시 『샤나메』(아랍어·페르시아어)

쉬움

호스로 1세는 누구인가

호스로 1세는 224년부터 630~640년대 아랍 정복 때까지 이란과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린 사산 왕조의 스물두 번째 왕이다. 531년 아버지 카바드 1세가 죽자 왕위에 올라 579년까지 48년 동안 다스렸다. 그의 제국은 캅카스에서 페르시아만까지, 치세 말에는 남서쪽의 예멘에서 동쪽의 중앙아시아와 간다라 접경까지 뻗었다.

그는 여러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 페르시아어로는 후스라우, 그리스 저술가들은 코스로에스라 불렀고, 아랍어로는 키스라가 되었는데, 뒤에 아랍 저술가들은 이 이름을 페르시아 왕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도 썼다. 별칭 아누시르반은 ‘불멸의 영혼을 지닌’이라는 뜻이다. 후대 페르시아·아랍 문학에서 그는 그냥 ‘정의로운 누시르반’이다.

역사학자들은 그를 가장 중요한 사산조 군주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그의 치세에 행정 개혁, 군사적 성공, 문화 후원이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지식의 상당 부분이 그를 이상화한 후대 사료에서 오기 때문에, 역사 속의 왕과 전설 속의 왕을 가려내는 일이 중요하다.

[1][2][3]

쉬움

어지러운 유산: 카바드 1세와 마즈다크파

호스로가 물려받은 제국은 힘든 반세기를 막 지나온 참이었다. 5세기 말 사산조는 중앙아시아의 강력한 세력 에프탈에게 패해 공납을 바쳤다. 안에서는 대귀족 가문과 조로아스터교 사제층이 권력과 토지를 두고 왕과 다투었다.

호스로의 아버지 카바드 1세는 한때(496~498/499) 폐위되었다가 에프탈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기도 했다. 그의 치세에 마즈다크라는 설교자가 이끈 종교 운동이 신도를 모았다. 마즈다크파는 빛과 어둠의 이원론을 가르쳤고, 사료에 따르면 탐욕을 줄이려고 재산을 나누자고 주장했다. 다만 거의 모든 기록이 그들의 적이 쓴 것이어서, 사회 개혁안이 실제로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는 논쟁거리다. 카바드는 처음에는 이 운동을 용인하거나 귀족 견제에 이용한 듯하다.

카바드 치세 말이나 호스로 즉위 직후에 마즈다크파 지도자들이 처형되고 운동은 폭력적으로 진압되었으며, 호스로 자신이 앞장섰다. 토지와 재산을 둘러싼 분쟁을 비롯한 이 시기의 혼란이 뒤이은 개혁의 배경이 되었다.

[6][1][2]

쉬움

국가를 다시 세우다: 세금, 지주층, 군대

호스로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조세 개혁이다. 전에는 토지세가 흔히 수확의 일정 몫이었고 관리가 해마다 사정했기 때문에, 비리가 생기기 쉽고 왕실 수입도 들쭉날쭉했다. 호스로는 농토를 측량하고, 곡물·포도·대추야자 같은 작물의 종류와 면적에 따라 정해진 세율을 매겼다. 또 귀족·병사·사제·관리 같은 집단을 빼고 대부분의 성인 남자에게 인두세를 거두었다. 일부 역사학자는 이 작업이 카바드 때 시작되어 호스로 때 완성되었다고 본다.

개혁은 데흐칸이라는 중소 지주층을 키웠다. 이들은 세금을 거두고 마을을 관리하며 기병으로 복무했고, 대귀족 가문이 아니라 왕에게 기댔다. 아랍 정복 뒤에도 데흐칸은 수백 년 동안 페르시아의 전통과 이야기를 지킨 사람들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호스로는 군대도 재편했다. 대귀족이 거느린 병력에 기대는 대신 기병에게 직접 봉급과 장비를 주었고, 제국의 변경을 네 개의 큰 군사 구역으로 나누어 각각 사령관(스파흐베드)에게 맡겼다. 이로써 제국은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싸울 수 있게 되었고, 군대는 왕실에 더 충성하게 되었다.

[1][2]

중급

유스티니아누스와의 맞수 관계: 전쟁, 공납, 평화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가 호스로 치세의 상당 부분을 규정했다. 그가 즉위했을 때 로마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532년 그는 유스티니아누스와 이른바 ‘영원한 평화’를 맺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북방 유목민을 막는 캅카스 고갯길 방어 분담금이라는 명목으로 금 110켄테나리움(1만 1천 파운드)을 냈고, 로마는 국경 사령부를 다라에서 뒤로 물렸으며, 양쪽은 서로를 대등한 존재로 인정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재정복에 나서려고 평화가 필요했다.

평화는 8년 갔다. 540년 이탈리아에서 유스티니아누스와 싸우던 동고트의 사절에게 부추김을 받은 호스로는 로마령 시리아에 쳐들어가 동지중해의 대도시 안티오키아를 함락했다. 도시는 약탈당했고 많은 주민이 메소포타미아로 끌려갔다. 호스로는 크테시폰 근처에 그들을 위한 새 도시 ‘베흐 안디오크 후스라우(호스로의 더 나은 안티오키아)’를 세웠다. 로마 쪽에서 이 전쟁들을 직접 목격한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이 원정을 자세히, 그리고 적대적으로 기록했다.

541년부터 562년까지는 오늘날 조지아의 흑해 연안인 라지카에서 전쟁이 이어졌다. 전쟁은 다시 로마의 지불을 포함한 ‘50년 평화’로 끝났다. 이 평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572년 유스티니아누스의 후계자 유스티누스 2세가 지불을 끊자 전쟁이 재개되었고, 579년 호스로가 죽을 때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5][4][1][3]

중급

돌궐, 에프탈, 그리고 예멘

북동쪽 변경에서 호스로는 오랜 에프탈의 위협을 끝냈다. 557~560년 무렵 그는 초원에서 새로 강성해진 돌궐과 동맹을 맺었고, 함께 에프탈을 무너뜨린 뒤 그 땅을 대략 옥수스강(아무다리야강)을 경계로 나누었다. 후대 페르시아·아랍 전승은 그가 돌궐 공주와 혼인했다고 전하며, 이 동맹으로 사산조는 중국 쪽까지 뻗은 새로운 초원 제국과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

남서쪽에서는 570년 무렵 사령관 와흐리즈가 이끈 페르시아군이 바다를 건너 예멘으로 가서, 그곳을 지배하던 악숨(에티오피아) 세력을 몰아냈다. 예멘은 사산조의 속령이 되었다. 이로써 페르시아는 아라비아반도의 정치와 홍해 교역로에 개입하게 되었는데,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바로 이 무렵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태어났다.

호스로는 방어 시설과 건설에도 힘을 쏟았다. 데르벤트 같은 캅카스의 요새는 전통적으로 그와 연결되며, 그는 여러 도시와 궁전을 세우거나 다시 지었다. 크테시폰의 유명한 아치형 대전 타크 카스라는 흔히 그의 작품으로 여겨지지만, 더 이른 시기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1][2][8]

중급

왕의 도시 크테시폰

호스로는 오늘날 바그다드에서 남동쪽으로 약 35km 떨어진 티그리스강 양안의 도시군 크테시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파르티아가 이곳을 왕의 거처로 삼았고, 3세기에 권력을 잡은 사산조는 둥근 도시를 비롯해 이곳을 다시 지었다. 관개 농지가 펼쳐진 메소포타미아는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고, 호스로의 개혁이 체계화한 세수의 상당 부분이 이곳에서 나왔다.

크테시폰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호스로의 아치’라는 뜻의 타크 카스라다. 높이 약 37m, 너비 약 26m의 벽돌 볼트는 오랫동안 사람이 지은 가장 큰 독립 볼트였다. 이것은 왕이 사절을 맞고 위엄을 드러내던 궁전의 알현실이었다. 637년 아랍군이 크테시폰을 점령한 뒤 이 대전은 잠시 모스크로 쓰였고, 762년 아바스 왕조가 근처에 바그다드를 세울 때 그 둥근 도시 계획은 사산조 크테시폰을 떠올리게 했다.

안티오키아에서 끌려온 사람들을 위해 지은 새 도시 베흐 안디오크 후스라우는 크테시폰 가까이에 있었다. 사료에 따르면 로마 포로들이 고향처럼 느끼도록 안티오키아를 본떠 목욕탕과 전차 경기장까지 갖추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전쟁이 물건만이 아니라 기술과 종교를 지닌 공동체 전체를 한 제국에서 다른 제국으로 옮겼음을 보여 준다.

[3][8][1]

중급

배움의 궁정: 인도, 그리스, 페르시아

호스로의 궁정은 여러 전통의 지식이 만나는 배움의 중심지로 기억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의사 부르조이(보르주야)를 인도로 보내, 산스크리트 『판차탄트라』에서 나온 우화와 지혜 이야기 모음을 구해 570년 무렵 중세 페르시아어로 옮기게 했다. 중세 페르시아어 판은 사라졌지만, 시리아어 번역과 무엇보다 이븐 알무카파의 아랍어 『칼릴라와 딤나』(750년 무렵)가 이를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뒤에는 유럽으로 전했다.

중세 페르시아어 이야기는 체스가 호스로의 궁정에 들어왔다고 전한다. 『체스 해설과 백개먼 발명』이라는 이 문헌은 인도 왕이 체스를 수수께끼로 보내오자 호스로의 현명한 재상 부주르그미르(보조르그메르)가 이를 풀고 그 답으로 백개먼을 발명했다고 이야기한다. 체스는 아마 이 무렵 인도에서 이란으로 들어왔겠지만, 정확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페르시아어 이름 차트랑은 산스크리트 차투랑가에서 왔다.

그리스의 학문도 존중받았다. 비잔티움 역사가 아가티아스는 531~532년 무렵 다마스키오스와 심플리키오스를 비롯한 아테네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몇 명이 유스티니아누스 치하의 상황에 실망해 호스로의 궁정으로 갔다고 전한다. 아가티아스는 그들이 페르시아에도 실망해 돌아왔으며 532년 평화 조약이 그들을 보호했다고 덧붙인다. 페르시아인 파울루스라는 학자는 왕을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관한 글을 썼다. 후대 사료는 호스로가 이란 남서부의 곤디샤푸르를 의학의 중심지로 키웠다고 하지만, 그곳에 정식 학원이 있었다는 증거는 빈약하며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전설일 수 있다.

[9][10][7][2]

중급

종교와 왕권

호스로는 조로아스터교도 왕으로서 ‘선한 종교’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후대 조로아스터교 전통은 그의 치세를 경전의 정리와 기록에 연결한다. 오랫동안 입으로 전해진 『아베스타』는 사산조 후기, 아마도 그의 시대 전후에 전용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여겨진다.

제국에는 큰 그리스도교·유대교 공동체도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세력이 컸던 동방교회는 대체로 용인되었고 로마와의 관계에서 왕에게 쓸모가 있기도 했지만, 조로아스터교에서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은 금지되고 처벌받았으며, 왕의 비위를 거스른 교회 지도자는 연금되거나 유배되기도 했다. 호스로의 정책은 소수자에 대한 현실적 관용과, 마즈다크파 진압에서 보듯 왕권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단호한 통제를 함께 담고 있었다.

[2][1][6]

중급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호스로의 치세는 유스티니아누스(527~565)의 치세와 거의 겹치며, 두 군주는 서로의 정책을 빚어냈다. 532년 유스티니아누스가 낸 금은 그에게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재정복, 로마법대전 반포, 하기아 소피아 재건에 나설 여유를 사 주었고, 540년 호스로의 안티오키아 약탈과 뒤이은 541~542년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그 계획을 약화시켰다. 두 제국이 장악하려 다툰 비단 교역로는 동쪽으로 중국까지 이어졌는데, 중국은 호스로가 죽고 10년 뒤인 589년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남북조로 나뉘어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538년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554년 신라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백제 성왕, 그리고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힌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의 시대였다. 불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인도에서는 굽타 제국이 무너졌는데, 그 원인의 하나가 바로 호스로가 돌궐과 함께 무너뜨린 에프탈의 압박이었다.

아라비아에서는 570년 무렵 호스로의 예멘 정복이 전통적으로 전하는 무함마드의 탄생 해와 겹친다. 호스로가 죽고 60년 뒤,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고무된 아랍 무슬림 군대가 사산 제국을 무너뜨렸다. 호스로의 후손 페로즈 3세는 당나라로 피신해 장안의 조정에 받아들여졌는데, 그때 장안에서는 대명궁이 지어지고 있었다. 한편 호스로에 대한 기억은 정의로운 왕의 본보기로 아랍·페르시아 문학 속으로 이어졌다.

[5][1][2]

중급

정의로운 누시르반: 전설 속의 왕

이슬람 이전의 군주 가운데 호스로만큼 이슬람 세계에서 따뜻하게 기억된 이는 드물다. 타바리의 역사서 같은 아랍어 저작과 피르다우시의 『샤나메』(1010년 무렵 완성) 같은 페르시아어 저작은 사라진 중세 페르시아어 『왕들의 책(흐와다이나마그)』 등 사산조 전승에 기대어 그의 치세를 길게 서술한다. 『샤나메』에서 왕과 재상 보조르그메르의 대화는 호스로의 궁정을 지혜의 학교로 만든다.

군주에게 통치의 도리를 조언하는 ‘군주의 거울’ 문학에서 누시르반은 정의로운 왕의 표준이 되었다. 그가 궁전의 대칭을 해치는데도 가난한 노파가 집을 지키게 해 주었다거나, 억울한 백성 누구나 당길 수 있는 종 달린 사슬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런 이야기는 역사 기록이라기보다 교훈이지만, 후대 사회가 군주에게 무엇을 바랐는지를 보여 준다.

크테시폰의 궁전 타크 카스라는 사라진 영광의 상징이 되었다. 9세기 아랍 시인 알부흐투리는 그 폐허를 노래한 유명한 송시를 지었고, 12세기 페르시아 시인 하카니도 시로 그것을 애도했다. 거대한 아치의 일부는 오늘날까지 서 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손상과 부분 붕괴를 겪었다.

[1][8][10]

심화

사료와 학술 논쟁

호스로에 관한 지식은 고르지 않게 분포한 사료에 기댄다. 초기 전쟁을 다룬 프로코피우스, 이어서 아가티아스와 메난드로스 프로텍토르 같은 동시대 그리스 역사가들은 로마 쪽에서 그를 묘사하며, 외교와 전쟁에는 밝지만 이란 내부 사정에는 어둡다. 시리아어 교회 문헌은 제국 안 그리스도교도의 시각을 더한다. 개혁에 관한 가장 자세한 서술은 9~11세기 아랍·페르시아 저자, 특히 타바리와 피르다우시에게서 나오는데, 이들은 이미 왕의 이미지를 빚어 놓은 사산조 궁정 전승에 기댔다. 물적 증거로는 주화, 인장, 명문, 그리고 타크 카스라 같은 유적이 있다.

큰 논쟁 하나는 개혁의 연대와 주체다. 후대 사료가 거의 모든 좋은 일을 호스로에게 돌리기 때문에, 일부 역사학자는 조세와 군제의 핵심 변화가 카바드 1세 때 시작되었고 호스로가 이를 완성하고 널리 알렸다고 본다. 네 지역 사령관의 인장과 여러 행정 인장이 문헌의 주장을 검증하는 데 쓰였다.

두 번째 논쟁은 개혁이 국가를 실제로 얼마나 중앙집권화했느냐는 것이다. 예전 연구는 왕이 ‘봉건’ 귀족에게 결정적으로 승리했다고 말했다. 최근 연구는 6세기 말~7세기 내전에서 보듯 대귀족 가문이 여전히 강력했으며, 개혁은 왕실과 귀족의 동반 관계를 대체했다기보다 재편했다고 본다.

건축물과 제도의 귀속도 불확실하다. 타크 카스라를 호스로 1세가 지었는지 그 이전에 지어졌는지, 곤디샤푸르에 그의 시대에 조직된 학원과 병원이 있었는지는 관련 주장이 훨씬 뒤의 사료에서 나오기 때문에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1][4][8][7]

심화

여러 관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면 호스로는 위험하고 신의 없는 적이었다. 프로코피우스는 그를 약탈을 위해 영원한 평화를 깬 탐욕스럽고 교활한 인물로 그리고, 아가티아스는 그가 철학을 안다고 내세운 것을 조롱한다. 이 저자들은 긴 전쟁 중이나 직후에 로마 독자를 위해 글을 썼으며, 그들의 평가는 그런 배경을 반영한다.

후대 이란과 이슬람 세계에서 보면 그는 현명하고 너그럽고 정의로운 이상적 군주였고, 왕들에게 처신을 가르치는 인물이었다. 이 이미지는 먼저 사산조 궁정의 선전이, 이어서 그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이슬람 이전의 왕을 본보기로 삼은 무슬림 저자들이 빚어냈다. 현대 이란에서 그는 민족사와 이슬람 이전 영광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의 치하에서 고통받은 사람들의 눈에는 또 달랐다. 540년 안티오키아 사람들에게 그는 도시를 약탈하고 자신들을 끌고 간 정복자였고, 마즈다크파에게는 운동을 짓밟은 왕자였으며, 조로아스터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교도에게는 배교를 처벌한 군주였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시각들을 함께 붙잡으려 한다. 호스로는 유능한 개혁가이자 학문의 후원자였고, 동시에 권력을 지키려고 무력을 가차 없이 쓴 군주였다.

[4][1][6][2]

핵심 개념

조세 개혁
수확의 몫을 거두던 세금을 측량한 토지에 따른 정액 세율로 바꾸어 왕실 수입을 예측 가능하게 하고 비리를 줄였다.
데흐칸
징세와 기병 복무로 왕실을 섬기고 뒤에 페르시아 문화를 지킨 지방 지주층.
두 제국의 세계
로마와 페르시아는 대등한 맞수였고, 그들의 전쟁과 조약이 수백 년 동안 서아시아를 빚었다.
지식의 전달
인도의 우화와 체스, 그리스 철학이 호스로의 궁정을 거쳐 후대 아랍·페르시아 문화로 들어갔다.
정의로운 왕의 이상
후대 문학은 누시르반을 ‘군주의 거울’ 전통의 모범 군주로 만들었다.
전설과 역사
호스로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후대의 이상화된 사료에서 오므로, 역사 속 왕과 전설을 구별해야 한다.

기록

  1. 약 512년 — 카바드 1세의 아들로 호스로 출생.
  2. 531년 — 카바드 1세 사망, 호스로 즉위.
  3. 532년 — 유스티니아누스와 ‘영원한 평화’ 체결. 로마가 금 1만 1천 파운드 지불.
  4. 540년 — 호스로가 시리아를 침공해 안티오키아를 약탈하고 주민을 크테시폰 근처로 이주시킴.
  5. 541년 — 캅카스에서 라지카 전쟁 시작.
  6. 약 560년 — 돌궐과 함께 에프탈을 무너뜨림.
  7. 562년 — ‘50년 평화’로 라지카 전쟁 종결.
  8. 약 570년 — 와흐리즈가 이끈 페르시아군이 예멘 정복. 이 무렵 부르조이가 인도 우화를 번역.
  9. 572년 — 유스티누스 2세가 지불을 끊어 로마와의 전쟁 재개.
  10. 579년 — 호스로가 크테시폰에서 사망하고 아들 호르미즈드 4세가 즉위.
  11. 637년 — 아랍 무슬림군이 크테시폰 점령.
  12. 약 1010년 — 피르다우시가 누시르반을 길게 다룬 『샤나메』 완성.

용어 풀이

사산 제국
이슬람 이전 마지막 이란 제국(224~651).
크테시폰
오늘날 바그다드 남동쪽 티그리스강 가에 있던 사산조의 수도.
아누시르반
‘불멸의 영혼을 지닌’이라는 뜻의 호스로의 별칭.
데흐칸
이란의 지방 지주층.
스파흐베드
고위 군사령관. 호스로 때는 네 지역 군사령관 가운데 하나.
마즈다크파
531년 무렵 진압된 마즈다크의 종교·사회 운동 추종자.
에프탈
5세기 말 사산조 동부 변경을 제압한 중앙아시아 세력.
타크 카스라
크테시폰의 거대한 아치형 대전.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사산조 유적.
칼릴라와 딤나
호스로 시대에 번역되어 뒤에 아랍어로 유명해진 인도 기원의 동물 우화집.
군주의 거울
통치자를 위한 조언서. 누시르반이 정의의 본보기로 등장한다.

묻고 답하기

왜 ‘정의로운 왕’이라고 불리나요?

후대 페르시아·아랍 저술가들이 그의 개혁과 지혜로운 말을 기억하며 공정한 군주의 본보기로 삼았기 때문이에요. 이 칭호는 한 가지 역사적 행동보다는 문학 속 명성을 반영해요.

호스로와 유스티니아누스는 직접 만났나요?

아니요. 두 사람은 사절과 편지, 조약으로 상대했고, 군대는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어요.

안티오키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540년 호스로가 안티오키아를 함락한 뒤 많은 주민이 메소포타미아로 끌려가, 크테시폰 근처에 그들을 위해 지은 새 도시에 정착했어요.

체스가 정말 호스로 때 페르시아에 들어왔나요?

페르시아 전승과 중세 페르시아어 문헌이 그렇게 전하고, 게임 이름도 산스크리트에서 왔어요. 이야기의 세부는 전설이지만, 체스가 대략 이 시기에 인도에서 이란으로 전해졌다는 데는 역사학자들도 동의해요.

타크 카스라는 그의 궁전인가요?

전통적으로 그의 궁전이라 불리고 많은 학자가 그의 치세와 연결하지만, 샤푸르 1세 때로 더 이르게 보는 학자도 있어 아직 논쟁 중입니다.

사료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동시대 로마 역사가들은 적대적이었고, 가장 자세한 페르시아 쪽 서술은 수백 년 뒤에 쓰여 그를 이상화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주화·인장·고고학 자료와 비교합니다.

그의 제국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가 죽은 뒤 약 70년 더 이어졌습니다. 로마와의 소모적인 전쟁 끝에 636년부터 651년 사이 아랍 무슬림의 정복으로 무너졌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Khosrow I. Wikipedia
  2. Joshua J. Mark, Kosrau I. World History Encyclopedia, 2020
  3. Jona Lendering, Ctesiphon. Livius.org
  4. 프로코피우스 (H. B. Dewing 영역), History of the Wars, Books I and II: The Persian War. Project Gutenberg
  5. Eternal Peace (532). Wikipedia
  6. Mazdakism. Wikipedia
  7. Academy of Gondishapur. Wikipedia
  8. Taq Kasra. Wikipedia
  9. Kalila and Dimna. Wikipedia
  10. Chatrang. Wikipedia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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