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대명궁

大明宮

634–904년 · 장안, 오늘날 시안 (당나라)

  • 문화·학문
  • 외교·교류

한 문장으로

대명궁은 634년부터 당나라 수도 장안의 북동쪽 언덕 위에 지어진 거대한 황궁으로, 904년 파괴될 때까지 당 황제들이 살며 나라를 다스리고 신라·일본·중앙아시아에서 온 사신을 맞이한 곳이에요.

대명궁
이미지: xiquinhosilva · CC BY 2.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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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궁궐 하나가 작은 성곽 도시만큼 크다고 상상해 보세요. 전각과 정원, 관청, 섬이 떠 있는 연못, 수천 명이 설 수 있는 넓은 돌 광장까지 있었어요. 그곳이 바로 ‘크게 밝은 궁궐’이라는 뜻의 대명궁이에요. 오늘날 중국 시안(옛 이름 장안)에 있었지요.

대명궁은 약 1,300년 전 중국을 다스린 당나라 황제들의 궁궐이었어요. 634년 당 태종이 나이 든 아버지를 위해 시원한 여름 별궁으로 짓기 시작했어요. 뒤의 황제들이 궁을 훨씬 크게 넓히고 이곳으로 옮겨 와 살면서 나라를 다스렸어요.

맨 앞의 큰 건물인 함원전은 5층 건물만큼 높은 흙 단 위에 서 있었어요. 거기에 가려면 길이가 500m가 넘는 넓은 광장을 걸어가야 했지요. 새해 첫날이면 신라와 일본 같은 먼 나라의 사신들이 이곳에 와서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어요.

나랏일을 보는 건물 뒤쪽에는 태액지라는 큰 연못이 있는 정원이 있었어요. 잔치를 벌이고 음악을 연주하고 시를 짓는 정자들도 있었지요. 유명한 시인 이백도 한때 궁궐 안의 관청에서 황제의 글을 쓰는 일을 했어요.

안타깝게도 대명궁은 전쟁 때 불탔고, 904년에는 한 장군이 도시를 허물어 목재를 가져가 버렸어요. 그 뒤 천 년 동안 그 자리는 밭과 집터가 되었어요. 1957년부터 고고학자들이 땅을 파서 조사했고, 지금은 옛 전각의 윤곽을 따라 걸어 볼 수 있는 큰 공원이 되었답니다.

한눈에 보기

건립
634년 착공(당 태종), 662~663년 대규모 확장(당 고종)
사용 종료
904년, 군벌 주전충(주온)의 명으로 장안이 해체됨
위치
당 장안성 북동쪽 용수원(龍首原) 위(오늘날 중국 산시성 시안시)
이름 변화
영안궁(634) → 대명궁(635) → 봉래궁(662) → 함원궁(670) → 다시 대명궁(701)
주요 전각
함원전(외조), 선정전(중조), 자신전(내조), 연회장 인덕전, 정원 태액지
거주
당나라 황제 17명이 이곳에 살며 정무를 봄
발굴
1957년부터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가 체계적으로 조사
현재
대명궁 국가유지공원(2010년 개장).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실크로드: 장안-톈산 회랑의 교역로 네트워크’의 구성 유산

쉬움

대명궁은 어떤 곳이었나

대명궁(大明宮)은 당나라(618~907) 역사의 대부분 동안 황제가 머문 으뜸 궁궐이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수도 장안, 곧 오늘날 산시성 시안의 북동쪽 모서리 바로 바깥, 용수원이라는 약간 높은 대지 위에 자리했다. 황제의 전각은 이 높은 땅에서 바둑판처럼 짜인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대명궁은 건물 한 채가 아니라 수십 채의 전각과 문, 관청, 거처, 정원, 커다란 인공 연못을 품은 궁성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전각과 누각 터를 40곳 넘게 찾아냈다. 궁은 중국 궁궐의 전통에 따라 큰 의식을 치르는 외조, 날마다 정무를 보는 중조, 황제와 가족이 사는 내조로 나뉘었다.

중국의 옛 기록과 현대 학자들은 대명궁이 당시 중국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궁궐이었다고 본다. 시안의 문화유산 당국은 흔히 대명궁의 넓이를 다른 유명한 궁궐과 견주는데, 베이징 자금성보다 몇 배나 넓다고 한다. 대략적인 비교이지만 규모를 짐작하게 해 준다.

대명궁은 약 240년 동안 당 정치의 중심이었다. 황제는 이곳에서 외국 사신을 맞고, 새해 조회를 열고, 개혁을 선포했으며, 어떤 황제는 이곳에서 즉위하고 또 어떤 황제는 이곳에서 권력을 잃었다. 궁은 당나라가 망하기 3년 전인 904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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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아버지를 위한 여름 별궁에서 제국의 중심으로

이야기는 한 집안의 일에서 시작한다. 정관 8년인 634년, 당 태종은 제위에서 물러난 아버지 고조(이연)를 위해 새 궁궐을 짓게 했다. 원래의 황궁인 태극궁은 도성 북쪽의 낮고 습한 땅에 있었는데, 높은 대지의 새 터는 여름에 더 서늘하고 건조했다. 처음 이름은 ‘영원한 평안’이라는 뜻의 영안궁이었고, 이듬해 대명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고조가 635년에 세상을 떠나 공사는 느려졌다.

결정적인 단계는 태종의 아들 고종 때 왔다. 662년 고종은 대규모 공사를 다시 시작했는데, 습한 태극궁에서 풍질을 앓았던 것도 한 이유였다고 전한다. 함원전과 선정전이 완성되자 663년 조정이 새 궁으로 옮겨 왔다. 고종은 궁 이름을 신선이 사는 섬의 이름을 딴 봉래궁으로, 다시 함원궁으로 바꾸었고, 701년에 대명궁이라는 이름이 되돌아와 이후 그대로 쓰였다.

이때부터 9세기 말까지 대명궁은 당 정치의 주 무대였다. 측천무후의 강력한 통치(다만 그는 재위 기간 상당 부분을 낙양에서 보냈다), 현종 초기의 찬란한 조정, 그리고 뒤에는 궁중 환관이 금군을 장악하고 황제의 즉위까지 좌우하는 모습이 모두 이곳에서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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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궁궐을 ‘읽는’ 법: 중심축을 따라 걷기

대명궁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신이 그랬듯이 남북으로 뻗은 중심선을 따라 걸어 보는 것이다. 남쪽 정문인 단봉문으로 들어간다. 단봉문에는 출입구가 다섯 개 있었고, 가운데 문은 황제만 지날 수 있었다. 발굴로 이 다섯 문길 구조가 확인되었다.

문을 지나면 길이 600m가 넘는 넓은 광장이 함원전까지 이어진다. 함원전은 높이 약 15m, 너비 약 200m, 깊이 약 100m의 높은 기단 위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길게 경사진 오름길을 올라가야 했기에, 건물은 군중 위에 떠 있는 듯 보였다. 좌우 앞쪽에는 상란각과 서봉각이라는 두 높은 누각이 팔을 벌린 듯 솟아 있었다. 이곳이 새해 조회, 대사면 선포, 외국 사절 접견에 쓰인 외조다.

그 북쪽에 황제가 신하들과 정기 조회를 연 중조 선정전이, 다시 그 북쪽에 소수의 대신만 만나는 내조 자신전이 있었다. 북쪽으로 한 걸음씩 나아갈수록 더 은밀하고 출입이 제한된 세계로 들어가는 셈이었다. 중서성·문하성 같은 핵심 관청은 선정전 곁에 두었다.

정무 공간의 북쪽으로 땅이 낮아지면 태액지라는 큰 연못이 나온다. 연못 가운데에는 역시 신선의 섬 이름을 딴 봉래산이라는 섬이 있었다. 연못 둘레에는 정자와 회랑, 도교 사당인 삼청전 같은 종교 건물이 섰다. 서쪽의 인덕전은 여러 전각을 이어 붙인 거대한 건물로, 관리와 외국 손님을 위한 연회장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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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궁궐과 도시 장안

대명궁은 장안과 떼어서 이해할 수 없다. 수·당의 수도 장안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계획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동서 약 9.7km, 남북 약 8.6km의 직사각형 성곽 안에 넓은 대로와 담으로 둘러싼 거주 구역(방)이 바둑판처럼 배치되었다. 750년 무렵 성안 인구는 많게는 100만 명으로 추정되며, 성 밖에도 많은 사람이 살았다. 동시와 서시라는 두 큰 시장이 교역을 맡았는데, 특히 서시에는 중앙아시아와 이란에서 온 상인이 많았다.

처음 계획에서 황궁(태극궁)은 도성 북쪽 가운데에 있었고, 그 바로 남쪽에 관청가인 황성이 있어서, 황제가 하늘의 북극성처럼 남쪽을 향해 도시를 굽어보는 구조였다. 대명궁을 북동쪽 모서리 바깥에 지으면서 정치의 무게중심이 옮겨 갔다. 관리들이 도시 동쪽에 살며 일하게 되자 동쪽 구역이 선망받는 곳이 되었다. 현종은 동쪽 성벽 근처에 세 번째 궁인 흥경궁을 더했다.

장안은 국제도시였다. 소그드 상인, 페르시아 망명객, 인도와 한반도의 승려, 신라와 일본의 유학생, 토번과 돌궐계 여러 민족의 사신이 오갔다. 불교 사찰과 도교 사원뿐 아니라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동방교회(경교)의 예배 장소도 있었다. 대명궁은 이 온 세계가 황제를 만나는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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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궁궐 안의 의례, 행정, 권력

당나라의 통치는 의례 위에 서 있었다. 정기 조회, 새해 조하, 새 연호 반포, 사면 선포 같은 일이 대명궁의 전각에서 연출되었고, 건축도 이런 행사에 맞게 설계되었다. 함원전의 높이와 광장을 가로지르는 긴 진입로는 황제가 세계 질서의 중심에 있음을 보여 주려는 장치였다.

궁궐에는 실제로 일하는 기구들도 있었다. 일부가 발굴된 한림원의 학사들은 조서를 기초하고 황제의 문학 고문 노릇을 했다. 시인 이백은 740년대 초 잠시 황제 곁에서 일했고, 많은 당시(唐詩)가 새벽 조회의 종소리와 전각에 감도는 향 냄새를 노래했다.

안사의 난(755~763) 이후 당 후기에는 궁 안의 권력이 달라졌다. 환관이 금군인 신책군을 거느리고 황제에게 가는 길목을 장악했다. 여러 황제가 궁중 음모로 즉위했고, 적어도 한 명은 살해되었다. 835년 관료들이 환관 세력을 없애려다 실패한 감로의 변은 궁 안에서 관리들이 대거 살육되는 참극으로 끝났다. 화려한 건축은 황제 권위가 약해지는 과정도 지켜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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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동아시아의 무대: 사신, 유학생, 승려

중국 주변 나라들에게 대명궁 방문은 외교의 정점이었다. 신라, 발해, 일본, 토번, 위구르, 아랍, 여러 중앙아시아 나라의 사신이 함원전의 새해 조회에 참석하고 인덕전에서 연회를 받았다. 당 조정에게 이 방문은 황제의 천하 통치를 확인하는 일이었고, 찾아온 나라들에게는 교역, 관작, 서적, 그리고 국제적 인정을 얻는 기회였다.

일본은 630년부터 마지막 사절이 떠난 838년까지 당에 공식 사절(견당사)을 보냈고, 894년에 계획된 파견은 취소되었다. 사절과 함께 간 기비노 마키비, 당의 관리가 되어 끝내 돌아가지 못한 아베노 나카마로, 뒤의 승려 구카이와 사이초 같은 이들이 중국의 율령, 불교, 문학, 건축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한 추정에 따르면 떠난 사람의 3분의 1가량이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바닷길이 험했고, 외국에 남은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753년의 한 일화는 사신들 사이의 경쟁을 보여 준다. 일본의 역사서 『속일본기』에 따르면, 이해 대명궁의 새해 조회에서 일본 부사 오토모노 고마로가 일본의 자리가 신라보다 아래에 놓인 데 항의하자 당의 담당 관리가 두 나라의 자리를 바꾸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일본 쪽 기록에만 전하므로, 역사학자들은 세부 내용을 조심스럽게 다룬다.

신라는 특히 670년대 나당전쟁이 끝나고 8세기에 관계가 회복된 뒤 많은 사신과 유학생을 보냈다. 신라 학생 가운데는 당이 외국인을 위해 연 빈공과에 급제한 이들도 있었는데, 가장 유명한 최치원은 874년에 급제해 당에서 벼슬하다가 신라로 돌아왔다.

[7][3][2][1]

중급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대명궁이 세워지고 번성한 시기는 유라시아 전체가 크게 요동친 때였다. 태종이 첫 공사를 명한 634년,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난 뒤 아랍 무슬림 군대가 아라비아 바깥으로 원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20년도 지나지 않아 사산조 페르시아가 무너졌다. 마지막 왕의 아들 페로즈 3세는 동쪽으로 피신했고, 당 조정은 고종이 대명궁 공사를 재개한 바로 그해인 662년에 그에게 ‘페르시아 왕’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고종과 측천무후의 무덤인 건릉에 늘어선 외국 사절 석상 가운데 페로즈의 상도 있다. 그를 통해 대명궁은 호스로 1세와 사산조 왕들의 세계와 이어진다.

한반도에서는 당과 신라가 손잡고 백제(660)와 고구려(668)를 멸망시킨 뒤, 676년까지 서로 싸웠다. 이 원정을 이끈 당의 장수들은 막 대명궁으로 옮겨 온 조정에서 명령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645년 다이카 개신으로 성문 율령을 갖춘 중국식 국가를 만드는 긴 작업이 시작되었고, 헤이조쿄(나라, 710년부터) 같은 일본의 수도는 장안의 바둑판 도시 계획과, 넓은 뜰을 향해 남쪽으로 선 큰 정전이라는 발상을 본떴다.

더 서쪽에서는 537년 완공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가 이미 100년 넘게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큰 돔 건물로 서 있었다. 751년에는 당과 아바스 왕조의 군대가 중앙아시아의 탈라스에서 맞붙었고, 762년 아바스 칼리프 알만수르는 둥근 도시 바그다드를 세워 실크로드 반대편에 학문과 교역의 경쟁 수도를 만들었다. 800년에는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에서 황제로 대관했다. 나란히 놓고 보면 장안, 바그다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8세기 세계의 3대 제국 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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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불타고 해체되다: 궁궐의 최후

당 후기의 전란 속에서 장안은 거듭 수난을 겪었다. 756년 안녹산의 반란군이 도성을 점령했고, 763년에는 토번군이 잠시 차지했으며, 881년에는 반란군 황소가 장안을 함락하고 약탈했다. 대명궁의 일부도 이런 사건과 뒤이은 군벌 간의 싸움에서 부서지고 불탔다.

마지막 일격은 904년에 왔다. 당의 마지막 황제들을 손에 쥔 군벌 주전충은 소종을 핍박해 수도를 동쪽 낙양으로 옮기게 하고, 장안의 건물을 헐어 목재를 강물에 띄워 보내 다시 쓰게 했다. 대명궁도 도시와 함께 끝났다. 3년 뒤인 907년 주전충은 마지막 황제를 폐위하고 후량을 세웠다.

그 뒤로 이 터에 다시 궁궐이 들어서는 일은 없었다. 천 년이 넘도록 흙 기단은 밭 가운데 남아 있었다. 20세기에 시안이 커지면서 룽하이 철도 북쪽 지역에 피란민과 철도 노동자가 몰려들었고, 임시 가옥이 빽빽한 동네가 유적 대부분을 덮었다.

[6][4][1]

중급

재발견, 발굴, 그리고 유적 공원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고고학자들은 1957년 10월 이 터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궁성의 성벽을 측량하고 주요 전각의 위치를 확인하며 인덕전, 함원전 일대, 삼청전, 청사전, 한림원 일부, 여러 궁문, 태액지, 그리고 2005~2006년에는 단봉문을 발굴했다.

보존 작업은 1980년대 인덕전에서 시작되었다. 1990년대 초 유네스코, 일본 정부, 중국 정부는 유네스코의 일본 신탁기금과 시안시의 자금으로 함원전 터를 함께 보호하기로 합의했다. 1995~1996년의 전면 발굴을 거쳐 보존 공사가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이어졌다. 일본의 무상 지원으로 전시관과 옛 벽돌 가마를 덮는 보호각도 세워졌다.

2007년 시안시는 훨씬 큰 계획, 곧 궁궐 터 전체를 아우르는 국가유지공원 건설에 나섰다. 이 사업을 다룬 한 연구에 따르면 약 350만㎡가 정비되었고, 약 2만 5천 가구, 10만 명가량이 이주했다. 대명궁 국가유지공원은 2010년 10월 1일 문을 열었고, 박물관과 전각 윤곽을 살린 조경, 발굴된 단봉문 위를 덮은 대형 신축 구조물을 갖추었다. 2014년에는 여러 나라가 함께 등재한 실크로드 세계유산의 한 구성 요소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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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학술적 쟁점: 사라진 궁궐을 복원한다는 것

대명궁의 건물은 땅 위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그 모습에 관한 지식은 모두 세 종류의 증거에서 나온다. 발굴된 기단과 기와·건축 부재, 『구당서』·『신당서』와 후대의 장안 지리지, 시문 같은 문헌, 그리고 당대의 현존 건물 및 당 양식을 본뜬 일본 궁궐과의 비교다. 저마다 한계가 있다. 문헌은 구조보다 의례와 이름을 더 자주 기록하고, 시는 과장한다. 기단은 평면을 보여 주지만 높이와 지붕 모양은 알려 주지 않는다.

따라서 함원전의 복원은 해석이다. 건축사학자들은 지붕 형태, 좌우 누각의 배치, 오름길의 모양을 두고 서로 다른 안을 내놓았고, 1990년대 발굴 보고는 그 전의 추정을 수정했다. 책이나 박물관에 실린 복원도는 과거의 사진이 아니라 학술적 가설로 읽어야 한다.

두 번째 쟁점은 연대다. 문헌은 634년, 662~663년, 904년이라는 연도를 알려 주지만, 그 사이에 궁은 여러 번 고쳐 짓고 바뀌었다. 고종 때의 원래 전각과 화재·전란 뒤의 보수를 구별하기는 어렵고, 발굴 유구의 연대는 명문보다는 기와·벽돌의 형식 분류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세 번째는 영향 관계다. 높은 기단 위의 큰 정전이 넓은 뜰을 마주 보는 헤이조큐 같은 일본 궁궐의 배치가 함원전을 떠올리게 한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 차용이 얼마나 직접적이었는지, 일본 장인들이 대명궁 자체를 알았는지 아니면 더 오래된 중국의 모델을 참고했는지는 비교 연구의 과제로 남아 있다.

[4][3][1]

심화

여러 관점: 유산, 이주, 기억

유적 공원은 현대 도시 한가운데 있는 넓은 흙 유적을 보호한 본보기로 많은 이들에게 호평받으며, 폐허를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드러냈다. 반면 우려도 있다. 보존 분야의 비판자들은 주민 이주의 규모, 공원 주변에 계획된 상업 개발, 그리고 단봉문 위 건물 같은 대형 신축물을 문제 삼는다. 이런 구조물이 복원에 너무 가깝고, 국제 보존 헌장이 강조하는 최소 개입 원칙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지지하는 쪽은 이 구조물이 약한 흙 유구를 보호하며 주민들도 더 나은 주거를 얻었다고 답한다.

대명궁에 대한 기억도 관점에 따라 다르다. 중국의 역사 서술에서 대명궁은 흔히 ‘성당(盛唐)’의 자신감과 문명의 중심으로서의 중국을 상징한다. 일본사에서는 주로 견당사를 통해, 곧 일본의 사신과 유학생이 넓은 세계를 만난 곳으로 등장하며, 753년 자리다툼 같은 일화도 일본의 시각에서 기억된다. 한국 역사학은 전쟁기의 동맹과 670년대의 충돌을 모두 포함한 신라와 당의 관계, 그리고 장안에서 공부한 신라 유학생을 통해 대명궁을 바라본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당의 ‘조공’ 외교를 당 조정 자신의 언어로만 보지 말라고 경고한다. 중국 기록은 외국 사신이 우월한 군주에게 공물을 바쳤다고 적지만, 찾아온 나라들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고 대등하거나 서로 이로운 관계로 기록하기도 했다. 대명궁을 외교의 무대로 읽는다는 것은 이 모든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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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외조·중조·내조
중국 궁궐의 전통적인 삼분 구조. 의식(함원전), 일상 정무(선정전), 사적 공간(자신전)이 남에서 북으로 이어진다.
중심축
주요 문과 전각을 남북 한 줄에 늘어놓아, 방문자가 한 걸음씩 황제에게 다가가도록 했다.
의례로서의 건축
높은 기단과 오름길, 거대한 광장은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는 조회와 의식을 위해 설계되었다.
국제도시 장안
장안에는 아시아 곳곳의 상인·승려·유학생·사신이 모였고, 대명궁은 그들이 당 황제를 만나는 곳이었다.
동아시아 국가 모델
신라와 일본은 당의 율령, 관료제, 도성 계획을 받아들였고, 대명궁은 그 핵심 참고점이었다.
토유적 보존
야외의 판축 기단을 보호하기는 기술적으로 어렵다. 대명궁은 중국 대형 유적 공원의 시험대가 되었다.

기록

  1. 634년 — 당 태종이 물러난 아버지 고조를 위해 영안궁을 짓기 시작.
  2. 635년 — 대명궁으로 개칭. 같은 해 고조 사망.
  3. 662년 — 고종이 대규모 공사를 재개하고 궁 이름을 봉래궁으로 바꿈.
  4. 663년 — 조정이 태극궁에서 새 궁으로 옮김.
  5. 701년 — 대명궁이라는 이름을 되찾음.
  6. 753년 — 일본 기록에 따르면 새해 조회에서 일본과 신라 사신의 자리다툼이 벌어짐.
  7. 756년 — 안녹산의 반란군이 장안 점령.
  8. 835년 — 감로의 변. 환관 제거 시도가 실패하고 관리들이 살육됨.
  9. 881년 — 반란군 황소가 장안을 함락·약탈.
  10. 904년 — 주전충이 조정을 낙양으로 옮기고 장안의 건물을 해체.
  11. 1957년 — 체계적인 고고학 조사 시작.
  12. 2010년 — 대명궁 국가유지공원 개장(10월 1일).
  13. 2014년 — 유네스코 세계유산 ‘실크로드: 장안-톈산 회랑의 교역로 네트워크’의 일부로 등재.

용어 풀이

당나라
618년부터 907년까지 장안을 수도로 중국을 다스린 왕조.
장안
수·당의 수도. 오늘날 시안 자리이며 ‘길이 평안하다’는 뜻이다.
함원전
대명궁 맨 앞의 가장 큰 전각. 큰 의식과 외국 사절 접견에 쓰였다.
인덕전
궁 서쪽의 대형 연회용 전각.
태액지
궁 북쪽의 인공 연못. 전설의 봉래산 이름을 딴 섬이 있었다.
단봉문
궁의 남쪽 정문. 출입구가 다섯 개였다.
판축
흙을 층층이 다져 단단한 벽과 기단을 만드는 기법. 당대 건물 기초의 주재료.
환관
거세된 남성 궁중 봉사자. 당 후기에는 금군을 거느리며 큰 정치 권력을 쥐었다.
견당사
일본이 당에 보낸 공식 사절(630~838).
실크로드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을 잇던 육로와 바닷길의 연결망.

묻고 답하기

지금도 대명궁을 볼 수 있나요?

터를 방문할 수 있어요. 원래 건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시안의 대명궁 국가유지공원에서 기단과 전각 윤곽, 박물관, 단봉문 위의 현대 구조물을 볼 수 있어요.

당나라는 왜 성 밖에 새 궁궐을 지었나요?

옛 태극궁은 낮고 습한 땅에 있었어요. 용수원의 새 터는 더 높고 서늘하고 건조했으며,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었지요. 처음에는 고조를 위해 지었고, 뒤에 고종이 건강 문제도 겹쳐 이곳을 으뜸 궁궐로 삼았다고 전해요.

얼마나 컸나요?

뒤에 지어진 베이징 자금성보다 훨씬 넓었어요. 함원전 하나만 해도 높이 약 15m, 너비 약 200m, 깊이 약 100m의 기단 위에 섰고, 앞에는 길이 600m가 넘는 광장이 있었어요.

신라와 일본 사람들이 정말 찾아갔나요?

네. 신라·발해·일본의 사신이 조회에 참석했고, 그 나라의 유학생과 승려가 장안에 살았어요. 일본의 견당사는 630년부터 838년까지 파견되었어요.

누가 대명궁을 없앴나요?

여러 전쟁으로 부서졌고, 904년 군벌 주전충이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면서 장안의 건물을 헐어 최종적으로 사라졌어요.

복원도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근거 있는 가설입니다. 기단으로 평면은 알 수 있지만 지붕과 높이는 문헌, 당대의 현존 건물, 당 양식을 본뜬 일본 궁궐에서 추론해야 하므로 학자마다 세부가 다릅니다.

유적 공원은 왜 논란이 되나요?

매우 많은 주민을 이주시키고 유적 위에 큰 신축 구조물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보호로 보는 전문가도 있고, 복원과 상업 개발 쪽으로 너무 나아갔다고 보는 전문가도 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Daming Palace. Wikipedia
  2. 대명궁. 위키백과
  3. 大明宮. Wikipedia (일본어)
  4. 왕쯔치(王子奇, 베이징대학 고고문박학원), The Present State of the Daming Palace National Heritage Park. Kanazawa University (ISAC publication)
  5. Mark Cartwright, Chang'an. World History Encyclopedia, 2017
  6. Chang'an. Wikipedia
  7. Japanese missions to Tang China. Wikipedia
  8. Peroz III. Wikipedia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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