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660~676)

新羅의 三國統一戰爭 · 羅唐戰爭

660–676년 · 한반도와 요동 (신라·백제·고구려·당)

한 문장으로

660년부터 676년까지 신라는 처음에는 당나라의 동맹으로, 나중에는 당나라의 적으로 싸우면서 백제와 고구려가 무너지는 전쟁에 참여했고, 끝내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 대부분을 다스리게 되었어요. 한국에서는 이를 오랫동안 ‘통일’이라고 불러 왔지만, 남한·북한·중국·일본의 역사가들은 이 일을 저마다 다르게 설명해요.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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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1,400년 전 한반도에는 세 나라가 있었어요. 북쪽의 고구려, 남서쪽의 백제, 남동쪽의 신라예요. 세 나라는 수백 년 동안 서로 싸웠어요. 그 옆에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나라인 당나라가 있었지요.

셋 가운데 가장 작았던 신라는 백제에게 자꾸 땅을 빼앗겼어요. 그래서 신라의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서 황제와 약속을 했어요. “우리 함께 적과 싸웁시다.”

660년, 당나라의 큰 함대가 황해를 건너오고 신라의 김유신 장군은 동쪽에서 군대를 이끌고 왔어요. 백제의 계백 장군은 겨우 5천 명으로 용감하게 싸웠지만, 며칠 만에 백제의 수도가 함락되었어요. 8년 뒤에는 수십 년 동안 중국 군대를 막아 냈던 고구려도 두 나라에게 무너졌어요.

그런데 친구였던 두 나라가 적이 되었어요. 당나라가 신라까지 포함해 한반도 전체를 다스리려고 했거든요. 670년부터 676년까지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서 온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당나라와 싸웠고, 마침내 당나라 군대는 돌아갔어요.

보통 사람들에게는 정말 힘든 시절이었어요. 병사들은 눈보라 속에서 군량을 나르다 얼어 죽었고, 수십만 명이 중국으로 끌려갔으며, 많은 가족이 일본으로 피란을 떠났어요. 오늘날 한국·중국·일본 사람들은 이 전쟁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통일’이라는 말을 두고도 의견이 갈려요.

한눈에 보기

기간
660년(백제 멸망)~676년(기벌포 전투). 부흥운동은 660~663년(백제), 670~673년(고구려)
장소
한반도, 남만주(요동), 황해. 왜(야마토)가 백제에 함대를 보냄
참전 세력
신라, 당, 백제와 백제 부흥군, 고구려와 고구려 부흥군, 왜(661~663년 백제 지원)
주요 국면
백제 정복(660), 백제 부흥운동과 백강 전투(660~663), 고구려 멸망(666~668), 나당 전쟁(670~676)
주요 인물
태종무열왕(김춘추)·문무왕·김유신, 의자왕·계백·복신, 연개소문과 그 아들들·검모잠·안승, 당 고종·소정방·이적·유인궤·설인귀·이근행
결과
백제·고구려 멸망, 당은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옮김, 신라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선 이남을 차지
명칭
남한: ‘신라의 삼국통일’, ‘나당 전쟁’ / 북한: 이후 시기를 ‘후기신라’로 부름 / 일본: 백촌강(하쿠스키노에) 전투
주요 사료
『삼국사기』(1145), 『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 『일본서기』(720), 중국에서 출토된 백제·고구려 유민 묘지명

날짜로 따라가는 전쟁

재생을 누르면 지도에서 전쟁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표시는 전투·사건, 화살표는 기록에 남은 진군로입니다.

660년 7월 12일
1/9 · 나당 연합군의 침공과 백제 멸망
신라당백제(부흥군 포함)고구려(부흥군 포함)왜(야마토)

단계

  1. 소정방의 당 수군이 황해를 건너오고 김유신의 신라군이 서쪽으로 진군했다. 계백의 백제군은 황산벌에서 무너졌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된 뒤 의자왕은 웅진성에서 항복했다. 소정방은 왕과 포로 수천 명을 데리고 돌아가고 사비성에 수비군을 남겼다.

    三國史記 卷五 新羅本紀 第五 (Samguk sagi, Silla Annals 5: Muyeol) — Chinese WikisourcePaekche–Tang War (English Wikipedia)의자왕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DDBC Time Authority Database (Korean calendar data: first-day Julian Day Number of each lunar month); lunar dates converted with its month tab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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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이란 무엇인가

7세기 한반도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가 패권을 다투었고, 고구려는 중국의 수나라·당나라와도 거듭 전쟁을 치렀다. 648년 신라는 당과 군사 동맹을 맺었고, 두 나라는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승리는 평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당은 정복한 땅에 자기 군정 기관을 두고 신라마저 당의 한 주처럼 대했다. 670년부터 676년까지 신라는 멸망한 두 나라의 유민과 손잡고 당과 싸웠고, 당이 평양의 본부를 옮기자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를 다스리게 되었다.

한국 교과서는 이 16년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야기로 설명해 왔다. 그런데 이 표현 자체가 역사의 일부다. ‘통일’은 신라가 내세운 주장이었고, 고구려의 옛 땅 대부분인 만주를 포함하지 않으며, 북한과 중국의 역사가들은 같은 사건을 다르게 서술한다. 이 글은 전쟁의 경과를 살펴본 뒤 이러한 여러 시각을 소개한다.

[1][6][3]

쉬움

세 나라와 한 제국: 전쟁은 왜 일어났나

7세기 중반 신라는 위기에 빠져 있었다. 642년 백제는 오늘날 합천에 있던 요충지 대야성을 비롯해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았다. 신라는 고구려와 왜에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이에 신라의 귀족 김춘추가 당나라 조정으로 건너가 648년 태종과 동맹을 맺었다.

『삼국사기』에 실린 문무왕의 답서에 따르면, 태종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 땅을 신라에 주겠다고 약속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대동강을 경계로 나누기로 한 합의로 요약한다. 당이 이 약속을 지킬 생각이 있었는지가 전쟁 마지막 국면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당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대규모 침공을 물리쳤고 645년 당 태종의 원정도 막아 냈다. 먼저 백제를 정복하면 남쪽에 거점이 생겨 고구려를 양쪽에서 칠 수 있었다.

[6][9][2]

쉬움

660년: 백제의 멸망

660년 여름, 당은 소정방에게 『삼국사기』 기록으로 13만 명에 이르는 군대를 주어 보냈다. 당의 함대는 덕물도(오늘날 덕적도)에서 신라 태자 김법민을 만난 뒤 금강 어귀로 향했다. 한편 김유신은 약 5만 명의 신라군을 이끌고 동쪽에서 산을 넘었다.

백제의 계백은 5천 명을 이끌고 오늘날 논산 부근의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맞았다.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처자를 죽였다고 전한다. 백제군은 처음 네 번의 싸움에서 이겼다. 『삼국사기』는 열여섯 살의 화랑 관창이 두 번이나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목이 베여 돌아왔고, 그의 죽음에 격분한 신라군이 백제군을 무너뜨렸다고 적었다. 계백은 전사했다.

같은 날 당군은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이겼다. 연합군은 수도 사비성(오늘날 부여)을 에워쌌고, 의자왕은 웅진성(공주)으로 피했다가 며칠 만에 항복했다.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신료, 백성 약 1만 2천 명을 당으로 데려갔다. 당은 백제 땅을 신라에 넘기지 않고 웅진을 중심으로 다섯 도독부를 두었다.

[9][7][6]

중급

백제의 저항: 부흥운동과 백강 전투(660~663)

백제가 갑자기 무너졌기 때문에 지방의 성과 군대는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몇 주 만에 흑치상지는 오늘날 예산의 임존성에 3만 명을 모았고,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은 주류성을 근거지로 삼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들은 200여 성을 되찾고 사비성에 남은 당군을 거듭 포위했다.

부흥군은 왜에 머물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사이메이 천황은 661년 원정을 준비하려고 조정을 북규슈의 아사쿠라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죽었고, 뒤를 이은 태자(훗날의 덴지 천황)가 지원을 이어 갔다. 662년 왜의 배 170척이 부여풍을 왕으로 모셔 왔고, 663년에는 훨씬 큰 군대가 뒤따랐다.

부흥운동은 내분으로 약해졌다. 복신이 도침을 죽였고, 663년에는 부여풍이 반역을 꾀한다는 의심으로 복신을 처형했다. 나당 연합군은 주류성으로 다가갔다. 663년 음력 8월 백강(일본에서는 백촌강, 하쿠스키노에) 어귀에서 당의 배 170척이 왜의 함대와 이틀 동안 싸웠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왜의 장수들은 형세를 살피지 않고 공격하다가 양쪽에서 포위되어 많은 배와 병사를 잃었다. 주류성은 항복했고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많은 백제 귀족이 퇴각하는 왜의 함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은 방식을 바꾸었다.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고, 664년과 665년 신라로 하여금 그와 화친을 맹세하게 했다. 두 번째 맹세는 공주의 취리산에서 있었다. 오랫동안 싸움을 떠맡고 당의 주둔군까지 먹여 살린 신라에게는 쓰라린 결과였다.

[7][10][9]

중급

661~668년: 고구려의 멸망

백제가 무너진 뒤 당의 첫 고구려 공격은 661년에 시작되었다. 소정방은 몇 달 동안 평양성을 포위했고,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은 사수에서 다른 당군을 전멸시켰다. 662년 초 김유신은 수레 2천여 대의 군량을 이끌고 눈과 얼음을 헤치며 북쪽으로 올라가 평양의 당군에게 전달했는데, 많은 사람과 소·말이 얼어 죽었다. 얼마 뒤 당군은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당이 힘으로 이루지 못한 일은 고구려 내부의 분열로 가능해졌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 아들들이 다투었고, 맏아들 연남생은 동생들에게 쫓겨나 당에 투항했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12개 성을 들어 신라에 항복했다. 667년 연남생의 안내를 받은 이적의 당군은 요충지 신성(오늘날 푸순)을 빼앗고 압록강 북쪽의 성들을 휩쓸었다.

668년 당군은 평양으로 모여들었고 신라군은 남쪽에서 공격했다. 한 달 넘는 포위 끝에 보장왕이 항복했고, 승려 신성이 성문을 열면서 연남건의 저항도 끝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은 보장왕과 20여만 명을 당으로 끌고 갔으며,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고구려의 옛 땅을 다스리게 했다.

[2][9]

중급

670~676년: 나당 전쟁

신라는 669년 내내 옛 동맹과의 전쟁을 준비했고 먼저 공격에 나섰다. 670년 봄 설오유가 이끄는 신라군 1만과 고연무가 이끄는 고구려 유민군 1만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의 오골성 부근에서 당군·말갈군과 싸웠다. 같은 무렵 고구려의 검모잠이 봉기해 고구려 왕족 안승을 한성(오늘날 재령)에서 왕으로 세웠다. 신라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뒤에 그 무리를 오늘날 익산의 금마저에 머물게 했다.

670년 여름부터 신라는 당이 차지한 웅진도독부를 공격해 백제의 80여 성을 빼앗았다. 671년에는 석성에서 당의 구원군을 물리치고 옛 백제 도성에 소부리주를 두었다. 당은 북쪽에서 반격했다. 고간과 이근행의 군대는 고구려 부흥군을 제압하고 672년 평양을 차지했으며, 석문에서 신라군에게 큰 패배를 안겼고, 673년 임진강 유역의 호로하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무너뜨렸다. 신라는 방어로 돌아서 성을 쌓고 황해에 수군을 두었다. 674년 당 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빼앗고 그 아우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았다.

승부처는 675년이었다. 그해 초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신라군을 이기자 문무왕은 사신을 보내 사죄하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음력 9월 설인귀의 수군이 한강 하구 가까운 천성에서 격퇴되었고, 29일에는 『삼국사기』가 20만이라 적은 매소성의 당군이 패하거나 물러나며 말 3만 380필을 남겼다. 『삼국사기』는 이해 신라가 크고 작은 싸움 18번을 모두 이겼다고 적었다.

676년, 서쪽 변경에서 토번의 공격을 받게 된 당은 전쟁을 마무리했다. 음력 11월 시득이 이끈 신라 수군은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설인귀와의 첫 싸움에 졌지만 이어진 22번의 싸움에서 이겼다. 당은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오늘날 랴오양)으로, 677년에는 신성으로 옮겼다. 신라는 대동강 이남을 지켰고, 당이 이 경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736년이었다.

[6][8][9][1][5]

중급

전쟁이 남긴 고통: 병사, 포로, 피란민

사료는 주로 왕과 장수를 이야기하지만, 전쟁이 보통 사람들에게 무엇이었는지도 보여 준다. 671년 문무왕의 답서는 해마다 징발되는 신라 백성, 북으로는 평양에, 서로는 웅진의 당군에게 군량을 나르느라 죽어 간 소와 말, 때를 놓친 농사를 묘사한다.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모자랐는데 웅진의 당군은 양식이 남았다고 했다.

정복은 대규모 강제 이주를 뜻했다. 660년 소정방은 의자왕과 함께 약 1만 2천 명을 데려갔다. 668년 평양이 함락된 뒤에는 20여만 명이 당으로 끌려갔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669년 당은 고구려 2만 8,300호를 장강·회수 이남과 서쪽의 빈 땅으로 옮겼다.

동쪽으로 피한 사람들도 있었다. 백강 전투 뒤 많은 백제 귀족과 백성이 일본에 정착했고, 『일본서기』는 이들이 관위와 땅, 양식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왜가 침공을 두려워해 쌓은 산성들도 백제 관인들이 설계했다. 고구려 유민은 신라로 몰려들었다. 안승의 보덕국은 684년까지 유지되었고, 신라는 뒤에 고구려·백제·말갈 사람들을 왕의 군대 안의 별도 부대로 편성했다.

[9][10][8][3]

중급

한국·중국·일본에 끼친 결과

신라는 전쟁을 거쳐 훨씬 큰 나라가 되었다. 신라 왕실은 ‘삼한을 하나로 합쳤다(삼한일통)’고 말하기 시작했고, 옛 백제·고구려 귀족에게 관등을 주었으며, 나라를 9주로, 왕의 군대를 9서당으로 재편했다. 당과의 관계는 수십 년 동안 얼어붙었다가 8세기 초에야 회복되었다.

만주의 옛 고구려 땅에서는 698년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 사람들을 이끌고 발해를 세웠다. 이후 약 200년 동안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함께 존재했는데, 오늘날 많은 한국 역사가는 이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부른다.

당에게 정복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두 나라를 무너뜨렸지만 한반도를 지키지 못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동방 원정의 부담이 병력을 댄 당의 여러 지방에 크게 미쳤다고 설명한다. 왜는 백강의 패배 뒤 방인과 봉수, 미즈키(수성), 백제 관인이 지휘해 쌓은 한반도식 산성을 잇달아 갖추었다. 『삼국사기』는 670년 왜가 나라 이름을 ‘일본’으로 바꾸었다고 적었다.

[3][6][10][9]

중급

‘통일’이라는 말은 알맞은가: 나라마다 다른 서술

남한에서는 전통적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이름을 써 왔고, 김유신과 문무왕은 널리 기려지는 인물이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쪽은 신라가 수백 년의 전쟁을 끝내고 고구려·백제의 사람과 문화를 받아들여 이후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단일 국가의 바탕을 놓았다고 강조한다. 비판하는 쪽은 남한 학자들 가운데에도 많은데,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이웃 왕국을 무너뜨렸고 대동강 이남만 차지했으며 고구려 영토 대부분이 당과 발해로 넘어갔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많은 역사가가 ‘통일신라’만이 아니라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남북국 시대’라는 말도 함께 쓴다.

북한의 역사가들은 신라가 민족을 통일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자처한 918년의 고려를 민족을 처음 통일한 나라로 보고, 668년 이후의 신라를 ‘후기신라’라고 부른다.

중국의 전통 사서는 이 사건들을 당 조정의 원정으로 기록했고, 매소성의 경우처럼 한국 사서가 강조하는 당의 패전을 싣지 않기도 한다. 현대 중국에서는 2002년부터 2007년까지 국가 지원으로 진행된 동북공정이 고구려를 한국사의 왕국이 아닌 고대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규정해,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 학자들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이 전쟁이 주로 백촌강의 패전과, 야마토 조정에서 관위와 땅을 받은 백제 유민의 이주로 기억된다.

이런 차이가 중요한 까닭은 오늘날의 각 나라가 7세기에서 자신의 기원을 찾기 때문이다. 신중한 서술은 중세 신라의 ‘삼한일통’ 의식, 근대 국민국가의 논쟁, 그리고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경험을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해 다룬다.

[3][4][6][10]

심화

1차 사료와 그 한계

한국 쪽의 기본 서사는 1145년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로, 사건으로부터 거의 500년 뒤의 책이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신라 기록을 바탕으로 신라의 원정을 날짜 단위로 자세히 적었고, 『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 같은 중국 사서도 활용했다. 이 시기의 백제와 고구려에 대해서는 중국 자료에 크게 기대기 때문에, 패망한 나라들의 목소리는 주로 적의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또 671년 신라를 배신자로 꾸짖은 설인귀의 편지와 이에 대한 문무왕의 긴 답서처럼 중요한 문서를 그대로 싣고 있는데, 이 답서는 신라의 불만을 가장 자세히 보여 주는 자료다.

『일본서기』(720)는 왜의 개입을 알려 주는 핵심 사료로, 백강 전투를 60갑자의 날짜로 하루하루 기록했다. 한국 기록과 어긋나는 곳도 있어서, 연개소문의 죽음을 『삼국사기』는 666년, 『일본서기』는 664년으로 적었다. 중국에서 출토된 백제·고구려 유민의 묘지명은 사서가 빠뜨린 집안 내력과 경력을 알려 주는 또 다른 목소리다.

사료의 날짜는 신라와 당이 쓰던 중국식 태음태양력을 따른다. 따라서 675년 ‘9월 29일’은 오늘날의 9월과 같지 않다. 표준 역일표로 환산하면 황산벌 전투는 율리우스력 660년 8월 20일, 백강 전투는 663년 10월 4~5일이 된다. 병력 수도 문제다. 660년 당군 13만, 675년 매소성의 20만 같은 숫자는 부풀려졌거나 전선 전체의 병력을 합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9][10][7][1]

심화

역사가들의 논쟁

신라와 당은 왜 싸웠을까. 전통적인 설명은 영토 문제다. 당은 태종의 약속을 어기고 웅진도독부와 평양의 안동도호부, 그리고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는 조치를 통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했다는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이상훈은 좀 더 직접적인 원인을 덧붙인다. 연합 원정 과정에서 당이 신라의 군령권을 거듭 침해해 신라 수뇌부의 반발을 샀고, 요충지 비열홀을 둘러싼 갈등도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는 나당 전쟁을 당이 움직이기 전에 요충지를 선점하려 한 신라의 예방 전쟁으로 본다.

매소성 전투는 얼마나 결정적이었을까. 『삼국사기』는 대승으로 기록했지만 『자치통감』에는 그곳의 전투가 아예 나오지 않는다. 김병희는 『삼국사기』의 해당 구절을 보급이 떨어져 이미 물러나던 당군을 신라가 공격한 것으로 읽을 수 있고, 노획한 말이 작은 산성에 다 들어갈 수 없으며, 당의 장수 이근행이 처벌받지 않고 다른 전선으로 옮겨 갔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매소성을 천성·칠중성 등과 함께 675년의 큰 전역의 일부로 보고, 신라가 임진강 선을 지켜 낸 것이 핵심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당은 왜 물러났을까. 학자들은 신라의 군사적 저항과 당의 과도한 확장을 함께 따진다. 676년 토번의 공세로 당은 군대를 서쪽으로 돌려야 했고, 바다 건너 보급은 불안정했으며, 병력을 댄 동부 지방은 지쳐 있었다. 장소를 둘러싼 논쟁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매소성의 후보지로 연천 대전리산성과 양주 대모산성을 함께 들며, 부흥군의 거점 주류성과 백강 전투의 위치 — 금강 하류인지, 더 남쪽의 오늘날 전라북도 지역인지 — 는 18세기부터 논의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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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제국과의 동맹
648년의 나당 동맹은 신라가 경쟁국을 이길 힘을 주었지만, 동시에 당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들게 만들었다.
두 종류의 전쟁
660~668년은 나당 연합군의 정복 전쟁이었고, 670~676년은 정복한 땅을 누가 차지할지를 두고 옛 동맹끼리 싸운 전쟁이었다.
부흥운동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은 수도가 함락된 뒤에도 싸웠다. 이들의 저항은 당의 계획을 늦추었고, 뒤에는 신라군의 일부가 되었다.
삼한일통
‘삼한을 하나로 합쳤다’는 신라의 주장으로, 뒷날 ‘통일’이라는 근대적 관념의 바탕이 되었다.
불완전한 통일
신라는 대동강 이남을 얻었지만, 고구려 옛 영토의 대부분은 당에, 이어 발해에 속했다.
엇갈리는 국가의 기억
남한·북한·중국·일본의 역사 서술은 같은 사건을 각자의 기원 이야기에 맞추어 풀이한다.
늦고 편향된 사료
한국의 기본 사서는 1145년에 쓰였고, 백제·고구려의 목소리는 주로 중국·일본 기록과 유민 묘지명으로 남아 있다.

기록

  1. 642년 —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하고, 신라는 외부에 원병을 구한다.
  2. 648년 — 김춘추가 당 태종과 군사 동맹을 맺는다.
  3. 660년 —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한다. 황산벌 전투, 사비성 함락, 의자왕 항복.
  4. 661년 — 당군이 평양성을 포위하고, 왜의 사이메이 천황이 백제 부흥군을 돕고자 조정을 규슈로 옮긴다.
  5. 662년 — 김유신의 한겨울 군량 수송대가 당군에 도착하고, 왜는 배 170척으로 부여풍을 돌려보낸다.
  6. 663년 — 백강 전투. 주류성이 항복하고 백제 부흥운동이 무너진다.
  7. 665년 — 신라와 당이 세운 웅진도독 부여융이 취리산에서 맹세한다.
  8. 668년 —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은 안동도호부를 설치한다.
  9. 670년 — 신라·고구려 유민군이 압록강을 건너 공격하고, 안승이 왕으로 추대되며, 신라가 당이 차지한 백제 땅을 공격한다.
  10. 672년 — 당군이 평양을 차지하고 석문에서 신라군을 격파한다.
  11. 675년 — 칠중성·천성·매소성 전투.
  12. 676년 — 기벌포 전투. 당이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옮긴다.

용어 풀이

신라
한반도 남동부의 왕국으로 수도는 경주. 676년 이후 935년까지 한반도 대부분을 다스렸다.
백제
한반도 남서부의 왕국으로 마지막 수도는 사비(부여). 660년 멸망했다.
고구려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걸친 왕국으로 수도는 평양. 668년 멸망했다.
당
618~907년의 중국 왕조. 태종과 고종이 한반도 전쟁을 벌였다.
왜(야마토)
초기 일본 국가로 백제의 동맹국. 670년 무렵부터 ‘일본’이라는 이름을 썼다.
화랑
무예와 몸가짐을 닦던 신라 귀족 청년 집단. 황산벌에서 전사한 관창도 화랑이었다.
안동도호부
668년 고구려의 옛 땅을 다스리려고 당이 평양에 둔 군정 기관.
웅진도독부
백제의 옛 땅을 다스리려고 당이 웅진(공주)에 둔 기관. 뒤에 부여융이 도독이 되었다.
부흥운동
멸망한 백제(660~663)나 고구려(668~673)를 되살리려던 유민의 무장 투쟁.
보덕국
신라의 보호 아래 금마저(익산)에 세워진 안승의 고구려 유민 소국. 684년까지 유지되었다.
음력 날짜
달의 삭(초하루)을 기준으로 달을 나누는 중국식 태음태양력의 날짜. 오늘날 달력과 맞추려면 환산해야 한다.

묻고 답하기

신라는 왜 중국을 도와 다른 나라를 무너뜨렸어요?

7세기 사람들은 세 나라를 하나의 민족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당과의 동맹은 살아남고 땅을 얻기 위한 방법이었어요. ‘한 민족’이라는 생각은 뒤에, 어느 정도는 이 전쟁을 거치며 자라났어요.

계백은 누구예요?

660년 5천 명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막은 백제 장군이에요. 몇 번의 싸움에서 이겼지만 끝내 전사했어요. 뒷날 한국에서는 충절의 본보기로 기려졌어요.

신라는 정말 한반도를 통일했나요?

신라는 옛 백제 땅과 고구려 남부를 한 정부 아래 두었고, 신라 왕실은 삼한을 하나로 합쳤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북부와 만주는 당과 발해로 넘어갔기 때문에 많은 역사가가 불완전한 통일이라고 부르며, 북한 역사학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일본은 왜 한반도에서 싸웠어요?

야마토는 백제와 오랫동안 가까웠고, 백제 왕족 가운데 일부는 야마토 조정에 머물고 있었어요. 백제가 무너지자 왜는 부여풍을 왕으로 돌려보내고 함대를 보내 부흥운동을 도왔지만, 663년 백강에서 크게 졌어요.

당은 왜 676년에 물러났나요?

역사가들은 여러 이유를 함께 듭니다. 신라가 임진강 선과 바다에서 효과적으로 막아 낸 것, 황해를 건너 군대를 보급하기 어려웠던 것, 676년 토번의 공격으로 당이 군대를 서쪽 변경으로 돌려야 했던 것입니다.

사서에 나오는 병력 수는 믿을 만한가요?

그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삼국사기』는 660년 당군 13만, 675년 매소성의 당군 20만을 적었지만, 오늘날 역사가들은 이런 숫자를 과장으로 보거나 한 전투가 아닌 전역 전체의 병력으로 봅니다.

음력 날짜는 어떻게 오늘날 날짜로 바꾸나요?

이 시기의 음력 달마다 중국·한국 자료로 만든 역일표에서 율리우스 적일(날짜 번호)을 찾아 환산합니다. 사서에 가끔 적힌 60갑자 날짜, 예를 들어 670년 8월 1일 ‘신축일’ 같은 기록으로 환산 결과를 검증할 수 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Silla–Tang War. Wikipedia (영어)
  2. 고구려-당 전쟁. 위키백과
  3. Unified Silla. Wikipedia (영어)
  4. Northeast Project. Wikipedia (영어)
  5. 매소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6. 이상훈, 나당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7. 백제 부흥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8. 고구려 부흥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9. 김부식 등(1145), 『삼국사기』 신라본기 5~7(무열왕·문무왕), 고구려본기 10(보장왕). 위키문헌(중국어)
  10. 『일본서기』 권27(덴지 천황). 위키문헌(중국어)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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