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645년, 아스카에 있던 일본 왕궁에서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어요. 천황 앞에서 중요한 의식이 열리는 도중에 나카노오에 왕자와 그의 친구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조정에서 가장 힘이 센 소가노 이루카를 공격해 죽였어요. 다음 날 이루카의 아버지는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 숨졌어요.
오랫동안 소가 집안은 임금보다도 힘이 셌어요. 왕자와 친구들은 이것을 바꾸고 싶었어요. 천황이 맨 위에 있고, 부자 집안이 아니라 관리들이 나랏일을 맡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새 정부는 처음으로 해에 이름을 붙였어요. ‘큰 변화’라는 뜻의 다이카예요. 그리고 646년에 큰 계획을 발표했어요. 땅과 농민은 이제 힘센 집안이 아니라 나라의 것이 되고, 나라를 여러 지방으로 나누고, 모든 집안을 장부에 적고, 누구나 같은 방식으로 세금을 내게 한다는 것이었어요.
새 지도자들은 이런 생각을 많은 부분 당시 강대한 당나라가 다스리던 중국에서 가져왔어요. 그들의 조언자 가운데에는 중국에서 30년 넘게 살면서 그곳의 정치를 직접 보고 온 사람도 있었어요.
나라 전체를 바꾸는 일은 느려요. 계획 가운데 많은 것이 50년 넘게 걸려서야 이루어졌어요. 역사학자들은 646년에 정말로 얼마나 바뀌었는지, 그리고 역사책을 쓴 사람들이 뒤에 얼마나 덧붙였는지를 지금도 논쟁하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 시기
- 645년 6월 정변(을사의 변), 646년 정월 초하루 개신의 조(詔) 반포, 650년대까지 개혁 지속
- 장소
- 정변은 아스카 이타부키궁, 새 정부는 나니와(오사카)로 옮겨 652년 나니와 나가라토요사키궁 완성
- 주도 인물
- 나카노오에 황자(뒤의 덴지 천황),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뒤의 후지와라노 가마타리), 고토쿠 천황
- 자문
- 수·당에서 유학한 다카무코노 구로마로와 승려 민을 ‘국박사(國博士)’로 임명
- 주요 목표
- 토지·백성의 사적 소유 폐지, 지방 행정 구역 설치, 호적과 토지 분배, 통일된 조세
- 첫 연호
- 다이카(大化, ‘큰 변화’), 일본 최초의 연호
- 주요 사료
- 『일본서기』(720). 목간과 궁터 발굴로 검증
- 결과
- 701년 다이호 율령으로 완성되는 율령국가로 가는 첫걸음
쉬움
다이카 개신이란 무엇인가
다이카 개신은 645년 정변으로 시작된 일본의 일련의 정치 개혁을 역사학자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다이카(大化)’는 ‘큰 변화’라는 뜻으로, 그해에 선포된 새 연호였다. 일본이 중국식으로 연호를 쓴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개혁의 목표는 큰 씨족들이 저마다 땅과 사람을 거느리던 체제를, 한 사람의 군주인 천황이 관리·법·장부를 통해 다스리는 체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우리가 아는 내용 대부분은 720년에 완성된 관찬 역사서 『일본서기』에서 나온다. 『일본서기』는 정변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646년 정월 초하루에 반포되었다는 긴 개신의 조를 인용한다. 그러나 이 책은 70여 년 뒤 개혁 주도 세력의 후손들이 쓴 것이어서, 역사학자들은 한 세기 가까이 그 서술을 다른 증거, 특히 목간과 궁터 유적에 비추어 검증해 왔다.
개신은 하룻밤 사이에 새 국가를 만들지 않았다. 덴지(재위 668~671)와 덴무(재위 673~686) 시대를 거쳐 701년 다이호 율령으로 마무리되는 긴 과정의 출발점이었다. 그래도 645년의 사건은 일본 천황제 국가의 전통적인 시작점이 되었다.
쉬움
645년 이전: 소가씨와 씨족들
6세기부터 7세기 초까지 야마토의 대왕은 유력 씨족(우지)과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씨족마다 세습 칭호와 땅, 그리고 물건이나 노역을 바치는 예속민 집단(베)이 있었다. 7세기 초 가장 강한 씨족은 소가씨였다. 소가씨 지도자들은 딸들을 왕실에 시집보내고, 불교를 앞장서 받아들이고, 아스카데라를 세웠으며, 왕위 계승까지 좌우했다.
스이코 천황(재위 593~628) 시대에는 소가노 우마코가 쇼토쿠 태자와 권력을 나누었다. 두 사람이 죽은 뒤 우마코의 아들 에미시와 손자 이루카는 더욱 막강해졌다. 643년 이루카는 쇼토쿠 태자의 아들이자 왕위 후보였던 야마시로노오에 왕을 이카루가에서 공격했고, 야마시로와 그 일족은 목숨을 잃었다. 『일본서기』는 소가씨가 왕실의 특권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거대한 무덤과 저택을 지었다고도 적는다.
같은 무렵, 쇼토쿠 태자 시대의 사절과 함께 중국에 갔던 유학생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수나라가 무너지고 당나라가 일어서는 것을 지켜보았고, 능력에 따라 등급을 매긴 관리, 호적, 모든 성인에게 매기는 세금, 나라가 나누어 주는 토지 같은 중국식 국가의 작동 방식을 알고 있었다. 야심 있는 젊은 왕족들에게 이런 생각은 소가씨를 꺾을 길이 되었다.
쉬움
645년의 정변
음모를 이끈 이는 고교쿠 천황의 아들 나카노오에 황자와 궁정 제사를 맡던 씨족 출신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였다. 『일본서기』에는 두 사람이 만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스카데라(호코지)에서 열린 게마리(공차기) 놀이 중 황자의 신발이 벗겨져 날아가자 가마타리가 주워 돌려주었고, 그때부터 우정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645년 6월 12일, 아스카 이타부키궁에서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의식이 열렸다. 『일본서기』는 이것이 한반도 나라들이 보낸 조공을 바치는 의식이었다고 적는다. 음모자들은 자객에게 칼을 휘두르게 할 계획이었지만 이들이 머뭇거리자 나카노오에가 직접 이루카를 베었고 호위병들이 숨을 끊었다. 다음 날 소가노 에미시는 저택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 이 불로 쇼토쿠 태자와 우마코가 엮은 역사서 같은 왕실 기록이 타 버렸다고 전한다.
고교쿠 천황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기록에 남은 일본 최초의 양위다. 그의 동생이 고토쿠 천황이 되었고 나카노오에는 황태자가 되었다. 새 대신들이 임명되고 가마타리는 최측근 자문역인 내신(內臣, 우치노오미)이 되었으며, 다카무코노 구로마로와 승려 민은 국박사가 되었다. 645년 말 조정은 한반도와 중국으로 가는 바닷길의 관문인 오사카만의 나니와로 옮겨 갔다.
중급
646년 개신의 조
『일본서기』에 따르면 개신의 조는 646년 정월 초하루에 반포되었고 네 개의 주요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째, 왕족·대신·지방 수장이 사사로이 거느리던 토지와 백성을 없앤다. 그 대신 고위 관리에게는 일정한 수의 호(戶)에서 나오는 산물을 녹봉으로 준다. 둘째, 수도 지역과 지방의 국(國)·군(郡)을 설치하고 관리, 관문, 역마, 전마를 둔다. 셋째, 호적과 계장(計帳)을 만들고 논을 나누어 주는 제도를 정한다. 넷째, 옛 부담을 없애고 논과 호를 기준으로 비단·베 같은 물품으로 내는 통일된 새 세금을 매기며, 말·무기·인부·궁중 시종도 바치게 한다.
같은 시기에 다른 조서들도 나왔다. 신분에 따라 무덤의 크기를 제한한 이른바 박장령(薄葬令), 동쪽 지방에 관리를 보내 사람과 무기를 조사하게 한 명령, 관위 제도의 개편 등이다. 무덤 크기 제한은 씨족 권력의 상징이던 거대한 전방후원분이 더는 만들어지지 않게 된 까닭을 설명해 준다.
조서의 바탕이 된 생각은 중국에서 왔다. 당나라의 통치는 원칙적으로 각 호에 토지를 주고 각 성인에게 세금을 매기는 균전제, 호적, 그리고 임명된 관리가 다스리는 주·현의 위계에 기반하고 있었다. 뒤의 일본에서 시행된 반전수수(班田收授)와 조(租)·용(庸)·조(調)라는 세금은 이런 제도를 본뜬 것이다.
중급
나니와: 새 국가를 위한 새 궁
나니와로 옮긴 것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었다. 나니와는 사신과 승려, 물자가 드나드는 항구였고, 652년에 완성된 나니와 나가라토요사키궁은 개혁 정부에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이 페이지의 지도 위치는 이 궁터를 가리킨다.
1954년 야마네 도쿠타로의 지휘로 시작된 오사카 도심 발굴에서 위아래로 겹친 두 시기의 궁터가 드러났다. 이른 시기의 궁에는 불탄 흔적이 있어 686년에 불탄 궁으로 보며, 개신 뒤 고토쿠 천황이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궁은 당시로서는 매우 컸고, 넓은 조정 마당과 팔각 건물을 포함한 전각들이 중국식 배치로 늘어서 있었다. 많은 역사학자는 이 궁의 규모 자체가 650년대 정부가 큰 관료 조직으로 나라를 다스리려는 뜻을 실제로 품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고 본다.
개혁 세력의 결속은 오래가지 않았다. 653년 나카노오에는 조정 대부분을 이끌고 아스카로 돌아갔고, 나니와에 남은 고토쿠는 654년에 죽었다. 고교쿠가 사이메이 천황으로 다시 즉위했고, 실권은 여전히 나카노오에에게 있었다.
중급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645년의 정변은 동아시아 위기의 한가운데서 일어났다. 642년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피비린내 나는 정변으로 왕과 많은 귀족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같은 해 백제는 신라 서쪽의 성들을 빼앗았고, 신라의 김춘추는 도움을 청하러 고구려에 갔다가 억류되었다. 그리고 바로 일본에서 정변이 일어난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안시성 포위에서 막혀 물러나야 했다. 많은 역사학자는 일본의 권력 집중을 같은 흐름의 일부로 본다. 고구려·백제·신라·야마토 모두에서 군주나 실력자가 당 제국의 위협에 맞서 권력을 한데 모으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외교는 일본에 직접 닿았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47년 김춘추가 직접 사신으로 야마토에 왔고, 이듬해에는 당나라 조정에 가서 백제에 맞선 동맹을 얻어 냈다. 이 동맹은 660년 백제를 무너뜨렸다. 일본은 백제 부흥을 돕기 위해 대군을 보냈으나 663년 백강 전투에서 당·신라 연합군에게 크게 패했다. 이 패배로 야마토 조정은 서일본에 성을 쌓고, 관리와 학자가 많았던 백제 유민을 받아들이고, 중앙집권 국가 만들기를 서둘렀다.
더 멀리 보면, 645년은 중국 승려 현장이 인도에서 16년을 보내고 장안으로 돌아온 해이기도 하다. 그는 인도에서 날란다 사원에 머물며 공부했다. 당시 당나라 수도는 중앙아시아까지 뻗은 제국의 중심이었고, 634년에 짓기 시작한 대명궁은 곧 그 중심 궁궐이 된다. 서쪽에서는 아랍 군대가 630~640년대에 비잔티움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무찔렀고, 사산 왕조의 마지막 왕은 651년에 죽었다. 일본의 개혁가들이 자기 나라를 세우려 애쓰던 바로 그때, 이슬람 칼리파 국가도 중앙집권 제국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중급
개혁에서 율령국가로
백강 전투 뒤 나카노오에는 667년 비와호 근처의 오미로 도읍을 옮기고 668년 정식으로 덴지 천황에 즉위했다. 669년 가마타리는 죽음을 앞두고 후지와라라는 새 성을 받았다. 그의 후손은 몇 세기 동안 조정을 주도하게 된다. 670년에는 전국 규모의 첫 호적인 경오년적(庚午年籍)이 만들어졌다. 개신의 조가 약속한 인구 파악으로 가는 중요한 단계였다.
덴지가 죽은 뒤 672년 임신의 난으로 그의 동생이 덴무 천황이 되어 중앙 정부를 더욱 강화했다. 법전이 편찬되고 694년에는 바둑판 모양의 큰 도성인 후지와라쿄가 세워졌으며, 701년 다이호 율령으로 형법과 행정법 체계가 완성되었다. 646년에 발표된 국·군, 호적, 토지 분배, 통일 조세의 계획이 법으로 온전히 갖추어진 것은 이때였다.
그래서 많은 역사학자는 다이카 개신을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 내부의 권력 다툼과 당·신라와의 전쟁이 준 충격이 함께 밀어붙인 반세기 국가 형성의 첫 국면으로 설명한다.
심화
개신은 기록대로 일어났는가
『일본서기』에 실린 개신의 조 본문은 701년 다이호 율령과 용어가 매우 비슷하다. 그래서 720년의 편찬자들이 자기 시대 법의 언어로 조서를 고쳐 쓴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생겼다. 가장 유명한 시험대는 ‘군’을 가리키는 글자였다. 『일본서기』는 다이호 율령의 용어인 ‘郡(고리)’을 쓴다. 646년의 정부가 정말 이 말을 썼다면 7세기 후반 문서에도 그렇게 나타나야 한다.
이 문제, 곧 ‘군평 논쟁(郡評論爭)’은 20세기 중반 역사학계를 둘로 나누었다. 사카모토 다로는 조서의 본질적인 진정성을 옹호했고, 이노우에 미쓰사다는 본문이 크게 고쳐졌다고 주장했다. 답은 고고학에서 나왔다. 1967년 후지와라궁터에서 나온 목간, 그 가운데 699년(기해년) 연대가 적힌 목간은 ‘군’에 ‘評(효)’라는 다른 글자를 쓰고 있었다. 701년 이전에는 군을 ‘평’이라 불렀고, 『일본서기』의 조서 본문이 적어도 일부는 후대 용어로 고쳐졌음이 밝혀진 것이다.
1960~1970년대에는 645~646년에 큰 개혁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의심하며 ‘다이카 개신’을 후대의 창작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발견은 조건부 긍정 쪽으로 여론을 되돌렸다. 나니와궁 일대에서 648년(무신년) 연대의 목간이 나왔고, 아스카의 다른 유적에서 나온 665년(을축년) 목간은 이미 행정 단위가 쓰이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른 시기 나니와궁의 규모와 함께 이 자료들은 640~650년대에 실제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오늘날 주류 견해는 ‘신긍정론’이라고도 불리며, 개혁 정부가 중앙집권을 추진했음은 인정하되 조서의 문구는 후대 편찬자가 손본 것으로 본다.
심화
여러 관점
일본에서 개신에 대한 해석은 일본 자신의 정치와 함께 바뀌어 왔다. 새 정부가 천황의 직접 통치를 되살린다고 내세운 메이지 시대(1868~1912)에는 다이카 개신이 그 고대의 선례로 자주 거론되었고, 이루카 살해는 왕위를 넘보는 씨족에 맞선 충성스러운 행동으로 이야기되었다. 1945년 이후 역사학자들은 오히려 토지·노동·조세 같은 사회경제적 문제를 강조했고, 『일본서기』의 영웅적 서사에 더 회의적이 되었다. 그 끝에 개신이 있었는지 자체를 묻는 논쟁이 나왔다.
또 다른 해석은 국제 정세를 강조한다. 일본과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645년 정변을 고구려 연개소문의 정변(642), 같은 시기 백제의 정치 변동, 신라의 친당 노선과 견주며, 당의 팽창에 대한 나란한 대응으로 읽어 왔다. 특히 한국 학계는 일본의 행정 체계를 세우는 데 백제·고구려 출신 이주민과 유민, 그리고 한반도 국가 모델이 한 역할을 강조한다. 663년 이후 많은 백제 관리가 일본 조정에 들어간 사실이 그 근거다.
중국사의 관점에서 이 개혁은 보통 율령, 과거, 호적, 불교, 한자 같은 당의 제도가 신라·일본, 뒤에는 베트남까지 포함하는 ‘한자 문화권’으로 퍼져 나간 과정의 일부로 이해된다. 큰 틀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일본이 얼마나 가려서 받아들였는지를 가릴 수 있다. 일본은 과거제를 오래 유지하지 않았고, 세습 귀족 가문을 최상층에 두었으며, 중국식 법을 토착 신(가미) 제사와 결합했다.
공정하게 정리하면, 다이카 개신은 씨족 간 권력 다툼 속의 궁정 정변이면서 동시에 동아시아 전체의 변화의 일부였다. 『일본서기』는 이를 건국 신화처럼 만들었고, 고고학은 그 신화 뒤에 실체가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다만 그 실체는 『일본서기』가 말하는 것보다 작고, 더 늦었다.
심화
사료와 읽는 법
『일본서기』는 지금도 유일하게 이어지는 서술 사료다. 이 책은 덴무의 후손들이 후원해 편찬했고, 완성될 무렵 가마타리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조정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두 집안 모두 645년 정변을 정의로운 행동으로, 개혁을 성공으로 그릴 이유가 충분했으므로 그 서술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독립적인 검증 자료는 『일본서기』 바깥에서 나온다. 세금 물품의 꼬리표나 공문서로 쓰인 목간은 해마다 실제로 쓰인 행정 용어를 그대로 보존한다. 나니와와 아스카의 궁터 발굴은 건설 규모를 보여 준다. 당나라의 역사서는 일본 사절(예: 653년, 654년)을 기록해 바깥의 시선을 제공한다. 한국 사료, 특히 『삼국사기』는 김춘추의 외교나 백제 멸망 같은 사건의 한반도 쪽 모습을 전한다.
이들을 함께 읽는 것이 현대 역사학의 방법이다. 『일본서기』를 통째로 믿지도, 통째로 버리지도 않고, 편찬자가 손댈 수 없었던 자료에 하나하나 비추어 보는 것이다.
핵심 개념
- 공지공민(公地公民)
- 토지와 경작자가 씨족이 아니라 국가에 속한다는 원칙으로, 조서 제1조에서 선언되었다.
- 국(國)과 군(郡)
- 세습 지방 수장 대신 임명된 관리가 다스리는 지방 행정 체계.
- 호적
- 모든 호와 사람을 적은 장부로, 토지 분배·조세·노역의 기초.
- 통일된 조세
- 씨족마다 달랐던 부담을 땅과 호를 기준으로 국가에 내는 표준 세금으로 바꾼 것.
- 연호
- 군주의 치세에 따라 해에 이름을 붙이는 중국의 관행으로, 일본은 다이카로 시작해 지금도 쓴다.
- 당에 대한 대응
- 개신은 당 제국이 이웃을 위협하던 시기 동아시아 전체의 권력 집중 흐름의 일부였다.
- 편집된 역사
- 목간이 보여 주듯, 『일본서기』의 조서 본문은 일부가 후대 법률 용어로 고쳐졌다.
기록
- 607년 — 수나라에 사신 파견. 이듬해 뒤에 개혁의 자문역이 되는 유학생들이 중국으로 감.
- 618년 — 당나라가 수나라를 대신함.
- 642년 —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의 정변. 백제가 신라의 성들을 빼앗음. 일본에서 고교쿠 천황 즉위.
- 643년 — 소가노 이루카가 이카루가에서 야마시로노오에 왕 일족을 멸함.
- 645년 — 을사의 변: 이루카 피살, 에미시 사망. 고토쿠 즉위, 연호 다이카, 나니와 천도. 당이 고구려를 침공.
- 646년 — 정월 초하루에 개신의 조 반포.
- 647년 — 신라의 김춘추가 사신으로 일본을 방문.
- 652년 — 나니와 나가라토요사키궁 완성.
- 660년 — 당·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킴.
- 663년 — 일본군과 백제 부흥군이 백강 전투에서 패함.
- 670년 — 전국 규모의 첫 호적인 경오년적 작성.
- 701년 — 다이호 율령으로 율령 체제 완성.
용어 풀이
- 을사의 변
- 645년의 정변. 그해의 60갑자(을사)에서 이름을 땄다.
- 우지
- 세습 칭호와 예속민을 거느린 야마토 조정의 유력 씨족.
- 베(部)
- 조정이나 씨족에 속해 물건이나 노역을 바치던 집단.
- 국박사(國博士)
- 645년 중국 유학 경험자 가운데서 임명한 정치 자문역.
- 반전수수(班田收授)
- 호적에 따라 주기적으로 논을 각 호에 나누어 주고 거두어들이는 제도.
- 조·용·조
- 율령 체제의 벼 세금(租), 노역 대신 흔히 베로 낸 세금(庸), 지역 특산물 세금(調).
- 목간(木簡)
- 글자를 쓴 나무 조각으로, 꼬리표나 문서로 쓰였으며 『일본서기』를 검증하는 핵심 자료.
- 율령
- 중국에서 받아들인 형법(율)과 행정법(령) 체계.
- 평(評)과 군(郡)
- ‘군’을 뜻하는 두 글자. 701년 이전에는 評, 이후에는 郡을 써서 문서의 연대를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묻고 답하기
왕자는 왜 소가노 이루카를 죽였나요?
소가 집안이 왕실보다 더 힘이 세졌기 때문이에요. 왕자와 그 편은 소가씨의 지배를 끝내고 임금을 정말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싶었어요.
‘다이카’는 무슨 뜻인가요?
‘큰 변화’라는 뜻이에요. 645년에 시작된 연호의 이름이고, 일본에서 처음 쓴 연호예요.
농민들은 땅을 빼앗겼나요?
원칙적으로 땅과 사람은 나라의 것이 되었고, 논은 호적에 따라 각 집에 나누어 주게 되었어요. 실제로 이 제도를 갖추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어요.
이런 생각은 어디서 왔나요?
주로 수·당나라에서 왔고, 흔히 한반도 나라들을 거쳤습니다. 중국에서 살다 온 일본 유학생과 승려들의 역할도 컸습니다.
『일본서기』의 개신의 조는 진짜인가요?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목간을 보면 ‘군’을 뜻하는 글자처럼 일부 문구는 701년 이후의 것이어서 편찬자가 손을 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실제 개혁이 있었다고 봅니다.
다이카 개신은 한국사와 어떻게 이어지나요?
고구려·백제·신라가 모두 당의 위협에 맞서 권력을 모으던 위기 속에서 일어났고, 그 뒤 663년 일본이 백제 부흥을 위해 벌인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는 어떻게 되었나요?
최고 자문역이 되었고, 669년 죽기 직전에 후지와라라는 성을 받아 헤이안 조정을 주도한 후지와라 가문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Taika Reform. Wikipedia
- 大化の改新. Wikipedia (일본어)
- Isshi incident. Wikipedia
- Soga clan. Wikipedia
- The Reform Edict of Taika (D. J. Lu, Japan: A Documentary History 수록 번역). Asia for Educators, Columbia University
- 府内の史跡公園等の紹介【難波宮跡(難波宮跡公園)】. 오사카부
- Japanese missions to Sui China. Wikipedia
- Goguryeo–Tang War. Wikipedia
- 태종 무열왕. 위키백과
- Battle of Baekgang. Wikipedia
- About Asuka-Fujiwara: component properties. Ancient Capitals of Asuka and Fujiwara Council
- W. G. Aston (역), Nihongi: Chronicles of Japan from the Earliest Times to A.D. 697. Kegan Paul, Trench, Trübner (Japan Society of London), 1896
함께 보기
- 연개소문642년 정변으로 권력을 잡고 660년대 중반 죽을 때까지 당에 맞선 고구려 항전을 이끈 귀족이자 장군이다.
-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660~676년 신라가 처음에는 당과 손잡고, 이어 당과 맞서 싸우며 백제·고구려가 멸망한 뒤 대동강 이남을 차지하게 된 전쟁.
- 대명궁당나라 황제들의 으뜸 궁궐. 634년 장안성 북동쪽 바깥 용수원 위에 짓기 시작해 904년 해체될 때까지 정치의 중심이었다.
- 과거제수나라 때인 605년 무렵 시작되어 1905년에 폐지된, 신분이 아닌 시험으로 확인한 학식으로 관리를 뽑은 중국의 필기시험 제도다.
- 아스카데라588~596년 소가노 우마코가 백제에서 온 장인들과 함께 세운 일본 최초의 본격 불교 사찰. 청동 대불이 지금도 처음 자리에 앉아 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