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아스카데라

飛鳥寺 (아스카데라, 비조사); 法興寺 (호코지, 법흥사)

588–596년 · 아스카 (야마토, 일본)

  • 종교
  • 문화·학문
  • 외교·교류

한 문장으로

아스카데라는 596년 일본 아스카 분지에 완성된 일본 최초의 본격 불교 사찰로, 소가씨가 백제에서 온 장인들의 손을 빌려 세웠으며, 그 청동 대불은 지금도 처음 자리에 앉아 있다.

아스카데라
이미지: 663highland · CC BY 2.5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집집마다 초가지붕이나 나무 지붕을 얹은 마을을 떠올려 보세요. 그런데 어느 날 들판 한가운데에 무거운 기와지붕을 얹은 커다란 건물과 높은 탑이 솟아올라요. 약 1,430년 전 일본 아스카에서 일본 최초의 큰 불교 절인 아스카데라를 지을 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절을 짓게 한 사람은 일본 조정에서 가장 힘센 대신 소가노 우마코였어요. 하지만 그때 일본은 이런 절을 짓는 방법을 몰랐어요. 그래서 한반도의 백제 왕이 전문가들을 보냈어요. 절 짓는 목수, 금속 장인, 기와 만드는 사람 네 명, 그리고 화가였어요. 이들은 일본 일꾼들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쳤어요.

절 한가운데에는 부처님의 아주 작은 성스러운 유골(사리)을 모신 탑이 있었어요. 그 둘레에는 금당 세 채가 양옆과 뒤에 하나씩 서 있었어요. 지붕 덮인 긴 복도가 울타리처럼 이 모든 건물을 빙 둘러쌌어요.

본당에는 도리라는 조각가가 만든 커다란 청동 부처님이 앉아 있어요. 사람들은 아스카 대불이라고 불러요. 오래전 불이 나서 크게 상하고 여러 번 고쳐졌지만, 처음 모신 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그래서 처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일지도 몰라요.

오늘날 아스카데라는 논으로 둘러싸인 작은 절이에요. 고고학자들이 주변을 파 보니 옛 건물들의 자리, 탑의 주춧돌, 오래된 기와가 많이 나왔어요. 그래서 이 절이 옛날에 얼마나 크고 화려했는지 알 수 있어요.

한눈에 보기

건립
588년 착공, 593년 탑에 사리 봉안, 596년 완성(『일본서기』). 대불은 606년 또는 609년 안치
장소
일본 나라현 다카이치군 아스카무라(야마토 조정이 있던 아스카 분지)
발원자
대신 소가노 우마코. 소가씨의 씨사(氏寺)로 창건
건축 주체
588년 백제에서 파견된 장인(사공 2명, 노반박사 1명, 와박사 4명, 화공 1명)과 현지·이주민 일꾼
가람 배치
탑 하나를 금당 셋(동·서·북)이 둘러싼 1탑 3금당식. 회랑 북쪽에 강당
다른 이름
호코지(法興寺), 간고지(元興寺). 718년 헤이조쿄(나라)로 옮겨 간고지가 되었고, 옛 터는 뒤에 안고인(安居院)으로 불림
본존
아스카 대불. 청동 석가여래좌상, 높이 275.2cm, 구라쓰쿠리노 도리 작. 중요문화재, 후대 보수가 많음
지정
국가 사적(1966). ‘아스카·후지와라’ 고대 도읍 유적군의 구성 유산

쉬움

아스카데라는 어떤 곳인가

아스카데라는 나라현 아스카무라에 있는 불교 사찰이다. 야마토 조정의 최고 권력자였던 대신 소가노 우마코가 588년부터 596년까지 세웠으며, 온전한 가람을 갖춘 일본 최초의 불교 사찰로 꼽힌다. 처음에는 ‘불법이 흥하는 절’이라는 뜻의 호코지(법흥사), 또는 간고지(원흥사)라고 불렀고, 사람들은 ‘아스카의 절’이라는 뜻으로 아스카데라라고도 불렀다.

아스카데라 이전 일본의 불상은 개인 집이나 작은 사당에 모셔졌다. 아스카데라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을 중심으로, 돌 기단 위에 기와지붕을 얹은 커다란 목조 건물들을 계획적으로 배치한 복합 건축이었다. 이 절은 종교뿐 아니라 측량, 기초 공사, 목공, 기와, 청동 주조 같은 기술 일체를 일본에 들여왔다.

처음 지은 절은 대부분 오래전에 사라졌다. 지금 터에 남아 있는 것은 옛 중금당 자리에 에도 시대에 다시 지은 작은 본당과, 그 안의 청동 아스카 대불이다. 고고학자들은 주변 논 아래에서 옛 건물들의 기초를 찾아냈다.

[1][5][3]

쉬움

불교는 어떻게 일본에 왔나

불교는 기원전 5세기 무렵 인도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다시 한반도의 여러 나라로 퍼졌다. 그리고 한반도 서남부의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 성왕이 야마토의 긴메이 천황에게 금동 불상과 번(幡), 경전을 보냈다. 『일본서기』는 이를 552년의 일로 적지만, 다른 초기 사료는 538년이라고 한다.

야마토 조정은 둘로 갈렸다. 외교와 많은 이주민 장인을 관리하던 소가씨는 새 신앙을 받아들이자고 했고, 토착 신(가미) 제사와 얽힌 모노노베씨와 나카토미씨는 신들이 노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염병이 돌자 반대파는 불교 탓이라며 불상을 수로에 던져 버렸다. 이 다툼은 587년 소가노 우마코와 그 편이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전투에서 무너뜨리며 끝났다.

불교는 그보다 앞서 개인적으로도 들어와 있었다. 후대의 한 역사서는 조각가 도리의 할아버지인 이주민 시바 닷토가 522년에 이미 야마토에서 불상을 모시고 있었다고 전한다. 587년 이후 우마코는 전에 없던 규모로 절을 지을 수 있었고, 그 결과가 아스카데라였다.

[8][9][7]

쉬움

절을 짓다, 588~596년

『일본서기』는 드물게 자세한 건립 기록을 남겼다. 588년 백제는 부처의 사리와 승려, 그리고 전문가 집단을 보냈다. 절을 짓는 사공(寺工) 2명, 탑 꼭대기 금속 장식을 맡는 노반박사(鑪盤博士) 1명, 기와를 만드는 와박사(瓦博士) 4명, 화공(畵工) 1명이었다. 절터로는 아스카키누누이노미야쓰코의 조상 고노하라는 사람의 집을 헐고 그 자리를 골랐다. 590년 일꾼들이 산에 들어가 목재를 베었고, 592년 불당과 회랑을 세웠으며, 593년 탑 심주의 초석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다. 596년 절이 완성되자 우마코의 아들 젠토쿠가 절의 책임자(사사)가 되었다.

같은 해 외국 승려 두 사람이 이곳에 머물렀다. 고구려의 혜자와 백제의 혜총으로, 두 사람은 ‘삼보의 동량’이라 불렸다. 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불교 스승이기도 했으니, 아스카데라는 조정과 이주민 장인, 그리고 두 한반도 나라에서 온 승려들이 만나는 자리였다.

백제의 역할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증거는 기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와박사가 백제에서 기와 전문 기술자에게 준 직명이었으며, 연꽃무늬를 새긴 아스카데라의 기와가 일본에 기와지붕을 들여오고 일본 도공들을 기와 장인으로 길러 냈다고 설명한다. 절터에서는 창건기 기와 무늬가 두 계통으로 나오는데, 모두 백제와 이어지는 양식이다.

[2][4][6]

중급

가람 배치를 ‘읽는’ 법

1956~1957년 발굴에서 독특한 배치가 드러났다. 한가운데에 탑이 있고, 그 동쪽·서쪽·북쪽에 금당이 하나씩 있었다. 북쪽 금당은 중심축 위에 놓였다. 지붕 덮인 회랑이 이 건물들을 둘러쌌고, 남쪽에 중문, 회랑 북쪽 바깥에 강당이 있었다. 이런 ‘1탑 3금당’ 배치는 뒤의 일본 사찰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탑과 금당을 한 줄로 놓는 백제의 일반적인 1탑 1금당 배치와도 다르다.

탑이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은 무엇이 가장 중요했는지를 알려 준다. 탑은 부처의 몸에서 나온 사리를 모신 기념물이므로, 이를 중심에 두고 불상을 모신 전각으로 둘러싼 것은 사리를 절의 심장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그 뒤 한 세기 동안 일본의 절은 점차 금당을 중심에, 탑을 옆에 두게 된다. 호류지에서는 금당과 탑이 나란히 서 있고, 뒤의 나라 시대 절들에서는 탑이 중심 구역 바깥으로 나간다.

한국 학자들은 3금당 배치를 고구려 절터와 비교해 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아스카데라 항목은 이 배치가 백제 방식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영향을 반영한다고 설명한다. 이 점은 중요하다. 아스카데라가 어느 한 나라만의 산물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백제 장인, 고구려 승려, 그리고 어쩌면 고구려를 통해 알려진 설계가 모두 한몫했다.

[1][3][2]

중급

아스카 대불

『일본서기』에 따르면 605년 스이코 천황은 구리와 자수로 큰 불상을 만들라고 명했고, 고구려 왕이 황금 300냥을 보내 도왔다. 청동 석가여래상은 606년에, 다른 사찰 기록에 따르면 609년에 안치되었다. 만든 사람은 이주민 시바 닷토의 후손으로 말안장을 만들던 집안 출신인 구라쓰쿠리노 도리(도리 불사)였다. 안장 공방에서 익힌 주조와 옻칠 기술은 불상 제작에 쓰였고, 그는 뒤에 623년 호류지 석가삼존상도 만들었다.

좌상의 높이는 275.2cm다. 이 불상은 큰 수난을 겪었다. 1196년 금당이 불탔고, 그 뒤 한동안 한데에 앉아 있었으며,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1973년 조사는 이마에서 코 위까지의 얼굴 일부와 오른손 손가락 세 개만 원래 부분이라고 결론지었다. 2015~2017년의 후속 연구는 그 범위를 조금 넓혔지만 몸체 대부분은 여전히 후대 보수라고 보았다. 그래도 1,400년 넘게 처음 자리를 지켜 왔기에, 연대를 알 수 있는 일본 불상 가운데 원위치에 있는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소중히 여겨진다.

남아 있는 부분의 양식, 곧 긴 얼굴과 살구씨 모양의 눈, 옅은 미소는 호류지 삼존상의 도리 양식과 닮았다. 미술사학자들은 이 양식이 중국 북위의 불교 조각에서 비롯해 한반도를 거쳐 전해졌다고 본다.

[2][7][3]

중급

왜 절을 지었나: 신앙, 권력, 수호

소가씨와 조정에게 절은 종교 시설이자 정치적 선언이며 기술의 전시장이었다. 불교는 발원자와 그 조상에게 공덕을, 병든 이에게 치유를, 나라에 수호를 약속했다. 『일본서기』는 절을 짓는 일을 위기 때의 서원과 거듭 연결한다. 우마코는 모노노베씨를 이기면 절을 세우겠다고 서원했다고 하며, 쇼토쿠 태자도 같은 싸움에서 시텐노지를 세우겠다고 서원했다고 전한다.

아스카 골짜기 위로 솟은 돌 기단 위의 기와 건물은 새로운 언어로 권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300년 동안 일본의 지배층은 거대한 무덤을 쌓아 지위를 보여 주었다. 아스카데라는 그 과시를 무덤에서 절로 옮겼다. 한 지도자를 위한 봉분 대신, 승려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해 의식을 올리는 영구적인 건물군이 들어선 것이다. 수십 년 안에 아스카와 이카루가 일대에 수십 곳의 씨사가 생겼고, 거대한 전방후원분 축조는 끝났다.

마지막으로 절은 학교였다. 승려들은 한문과 불경을 가르쳤고, 장인들은 제자를 길렀으며, 조정은 큰 공사를 계획하고 비용을 대는 법을 배웠다. 건물을 축선에 맞춰 배치하고, 기와를 대량으로 굽고, 큰 청동상을 주조하는 아스카데라의 기술은 뒤에 후지와라쿄와 헤이조쿄 같은 궁궐과 도성을 짓는 데 쓰였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첫 도성들은 첫 절에서 얻은 교훈 위에 세워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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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아스카데라는 동아시아 전역에 불던 사찰 건립 물결의 일부였다. 백제에서는 위덕왕이 577년 죽은 왕자를 기려 부여에 왕흥사를 세웠다. 2007년 그 탑 터에서 그해 연대가 새겨진 사리기가 나왔다. 백제의 도읍 사비는 『일본서기』가 일본에 불교를 전했다고 적은 바로 그 성왕이 세운 곳이다. 신라에서는 이차돈의 순교 뒤 520년대에 불교가 공인되었고, 도읍 경주에서는 거대한 황룡사가 지어지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아스카데라를 짓기 시작한 이듬해인 589년 수나라가 나라를 다시 통일했다. 수 문제는 불교의 큰 후원자로, 600년대 초 제국 곳곳의 탑에 사리를 나누어 봉안하게 했다. 아스카데라 탑의 사리 봉안과 나란히 놓고 볼 만한 중국의 사례다. 인도에서는 날란다 사원이 번성하고 있었고, 머지않아 중국 순례승들을 불러 모으게 된다.

더 서쪽에서는 537년에 완공된 유스티니아누스의 하기아 소피아가 이미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였고, 59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인에게 선교사를 보냈다. 아라비아에서는 570년 무렵 무함마드가 태어났고, 마야 저지대의 도시 티칼은 562년 패배 뒤 이른바 ‘공백기’에 들어가 있었다. 유라시아 곳곳에서 통치자들은 신앙과 새로운 건축 기술을 함께 과시하는 거대한 종교 건축을 후원하고 있었고, 아스카데라는 그 이야기에 일본이 처음 보탠 한 장이었다.

[10][8][1]

중급

그 뒤의 역사: 국가 사찰에서 마을 절로

7세기 아스카데라는 궁정 생활의 한가운데 있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나카노오에 황자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를 처음 만난 곳이 이 절의 공차기 놀이 자리였고, 645년 정변 때 나카노오에는 이 절을 소가씨에 맞서는 거점으로 삼았다. 소가씨가 몰락한 뒤 절은 씨족의 절이 아니라 국가가 관리하는 관사가 되었다.

710년 도읍이 헤이조쿄(나라)로 옮겨 가자 절의 조직도 따라갔다. 718년 새 도읍에 간고지가 세워져 나라의 대사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옛 터는 ‘혼간고지(본원흥사)’로 남았지만 쇠락했다. 1196년 벼락으로 난 불에 탑과 금당이 타 버렸고, 1447년 무렵에는 대불이 지붕 없이 한데에 앉아 상한 채였다.

지금의 작은 본당은 에도 시대인 1826년 오사카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다시 지은 것이며, 오늘날 안고인이라 불리는 이 절은 진언종에 속한다. 절터는 1966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지금은 일본이 세계유산으로 추천한 ‘아스카·후지와라’ 고대 도읍 유적군의 구성 유산 가운데 하나다.

[1][2][5]

심화

고고학: 발굴이 밝혀낸 것

1956~1957년 발굴은 일본에서 이른 시기 사찰을 대규모로 조사한 첫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이 발굴로 3금당 배치가 확인되었고, 회랑과 문의 크기가 측정되었으며, 탑의 초석이 드러났다. 동·서 금당은 2단 석조 기단 위에 서 있었는데, 탑과 중금당의 더 정교한 기단보다 한 단계 낮은 격이었다. 기단에까지 위계를 둔 치밀한 대륙식 설계를 보여 준다.

탑의 초석에는 의례용 매납품이 있었다. 비취와 유리 구슬, 금속 장신구, 마구, 갑옷 조각 등이다. 이 가운데 많은 것이 고분에 묻힌 부장품과 같은 종류다. 고고학자들은 이를 연속성의 증거로 읽는다. 소가씨는 지배층이 무덤에 넣던 위세품으로 부처의 사리를 받든 것이다. 그래서 아스카데라는 고분 시대와 불교의 아스카 시대가 만나는 자리에 서 있다.

최근 연구는 기와의 편년, 건립 순서, 대불의 내력을 더 정밀하게 다듬었다. 불상 대부분이 후대 보수라는 사실은 그 중요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스카 대불은 상처 입은 문화재가 어떻게 수백 년에 걸쳐 기억을 이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가 되었다.

[2][1][5]

심화

여러 관점

첫째 쟁점은 불교 전래 연도다. 『일본서기』는 552년, 『상궁성덕법왕제설』과 간고지의 연기 기록은 538년이라고 한다. 오늘날 많은 학자는 538년을 더 지지한다. 『일본서기』의 이 시기 연대에 문제가 있고, 552년은 불법이 쇠퇴한다는 말법 계산에서 의미 있는 해라서 골랐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두 연도 모두 불확실하며, 공식 전래 이전 시바 닷토 같은 이주민부터 시작된 점진적 과정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과 일본의 서술은 강조하는 주체가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 같은 한국 학계의 서술은 아스카데라를 백제 장인이 짓고, 고구려·백제 승려가 머물고, 고구려의 황금을 받은 절로서, 한국 불교문화가 고대 일본에 어떻게 전해졌는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본다. 일본 학계는 이런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조직자이자 후원자로서 소가씨의 역할, 일본 장인의 양성, 그리고 탑 매납품에서 보이는 토착 고분 전통과의 연속성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두 시각 모두 증거에 근거하며, 주로 어느 부분을 앞에 세우느냐가 다르다.

가람 배치의 기원도 논쟁거리다. 3금당 배치는 왕흥사처럼 발굴된 백제 절의 1탑 1금당 배치와 맞지 않고 고구려 유적과 비교되어 왔다. 그래서 혜자 주변을 통해 들어온 고구려 모델을 보는 학자도 있고, 백제에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같은 배치가 있었을 수 있다거나 현지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한국과 중국에서 이른 시기 절터가 더 발굴되기 전까지 이 문제는 열려 있다.

마지막으로 ‘전파’라는 말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다. 문화가 ‘원천’에서 ‘수용자’로 한 방향으로 흘렀다고 상상하기보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는 연결망으로 설명한다. 중국의 불교 모델, 동맹을 찾아 경쟁하던 한반도 나라들, 일본의 이주민 가문, 그리고 무엇을 받아들일지 고른 일본 지배층이 함께 얽혀 있었다. 아스카데라는 이 모두가 만들어 낸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알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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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씨사(氏寺, 우지데라)
아스카데라는 소가씨의 절로 시작했다. 큰 가문이 권력과 신앙을 드러내는 데 불교를 어떻게 썼는지 보여 준다.
사리 중심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이 절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것은 초기 불교의 우선순위를 반영한다.
기술 이전
절을 지으며 측량, 석조 기단, 기와지붕, 대형 청동 주조가 일본에 들어왔다.
백제 장인
588년 백제에서 온 전문가들이 공사를 이끌고 현지 일꾼을 길렀다.
고구려와의 연결
고구려 승려가 절에 머물렀고, 고구려의 황금이 대불 제작을 도왔으며, 가람 배치는 고구려 유적과 비교된다.
고분 시대와의 연속성
탑 초석의 부장품 같은 매납품은 옛 지배층의 관습이 새 종교에 맞게 바뀌었음을 보여 준다.
상처 입은 불상의 기억
여러 번 보수된 대불은 1,400년 동안 처음 자리를 지켜 왔기에 여전히 소중하다.

기록

  1. 약 522년 — 후대 역사서에 따르면 이주민 시바 닷토가 야마토에서 불상을 모심.
  2. 약 538년 — 간고지 기록에 따른 백제로부터의 불교 공전(『일본서기』는 552년).
  3. 577년 — 백제 위덕왕이 부여에 왕흥사를 세움(2007년 사리기 발견).
  4. 587년 — 소가노 우마코와 그 편이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무너뜨림.
  5. 588년 — 백제가 사리·승려·장인을 보냄. 아스카데라 착공.
  6. 593년 — 탑 심주 초석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
  7. 596년 — 절 완성. 고구려의 혜자와 백제의 혜총이 머묾.
  8. 606년 — 구라쓰쿠리노 도리가 만든 아스카 대불 안치(다른 기록은 609년).
  9. 645년 — 나카노오에가 소가씨에 맞선 정변에서 이 절을 거점으로 삼음.
  10. 718년 — 새 도읍 헤이조쿄에 간고지가 세워짐.
  11. 1196년 — 벼락으로 난 불에 옛 터의 탑과 금당이 탐.
  12. 1956년 — 발굴 조사(1956~1957)로 1탑 3금당 배치가 드러남.
  13. 1966년 — 국가 사적으로 지정.

용어 풀이

탑
부처의 사리를 모시려고 세운 건축물로, 인도의 스투파에서 발전했다.
금당(金堂)
절의 중심 불상을 모신 전각.
사리
부처를 화장한 뒤 남은 유골로 믿어지는 것, 또는 그것을 상징하는 물건.
와박사(瓦博士)
백제에서 기와 전문 기술자에게 준 직명.
노반박사(鑪盤博士)
탑 꼭대기의 금속 상륜부를 만드는 장인.
씨사(氏寺)
특정 씨족이 자기 씨족을 위해 세운 절.
고분
3~7세기 일본 지배층의 거대한 무덤, 그리고 그 이름을 딴 시대.
석가(샤카)
역사상의 부처인 석가모니. 일본어로 샤카라고 한다.
간고지(元興寺)
아스카데라의 이름이자, 718년 이후 나라로 옮겨 간 후신 사찰의 이름.

묻고 답하기

아스카데라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가요?

보통 일본 최초의 본격 불교 사찰이라고 불러요. 다만 처음 지은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지금 서 있는 가장 오래된 절 건물은 호류지에 있어요.

누가 지었나요?

소가노 우마코가 비용을 댔고, 한반도 백제에서 온 전문가들이 일본 일꾼·이주민 일꾼과 함께 공사를 이끌었어요.

대불은 정말 1,400살인가요?

일부는 그래요. 1196년 화재 뒤 크게 보수되어, 조사에 따르면 얼굴과 손의 일부만 원래 것이라고 해요. 하지만 늘 같은 자리에 있었어요.

금당은 왜 세 채인가요?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배치는 고구려 절과 비교되며, 백제의 일반적인 배치와 다르고 뒤의 일본 절에서는 따라 하지 않았습니다.

불교는 538년에 왔나요, 552년에 왔나요?

초기 사료마다 다릅니다. 『일본서기』는 552년, 다른 사료는 538년이라고 하며,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는 두 연도 모두 불확실하다는 점을 밝히면서 538년을 더 지지합니다.

탑 아래에서는 무엇이 나왔나요?

사리 봉안품과 함께 보석, 구슬, 금속 장신구, 마구, 갑옷 조각이 나왔습니다. 고분 부장품과 비슷한 것들입니다.

가 볼 수 있나요?

네. 지금은 안고인이라 불리는 이 절이 나라현 아스카무라에 있고, 본당에서 대불을 볼 수 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Asuka-dera. Wikipedia
  2. 飛鳥寺. Wikipedia (일본어)
  3. 원영상, 일본 비조사(日本 飛鳥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4. 양기석, 와박사(瓦博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5. About Asuka-Fujiwara: component properties. Ancient Capitals of Asuka and Fujiwara Council
  6. 쇼토쿠 태자의 스승 혜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7. Tori Busshi. Wikipedia
  8. Buddhism in Japan. Wikipedia
  9. 仏教公伝. Wikipedia (일본어)
  10. 부여 왕흥사지. 위키백과
  11. W. G. Aston (역), Nihongi: Chronicles of Japan from the Earliest Times to A.D. 697. Kegan Paul, Trench, Trübner (Japan Society of London), 1896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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