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차돈

異次頓

약 527년 · 경주 (신라)

  • 종교

한 문장으로

이차돈은 신라 법흥왕의 젊은 측근으로, 전승에 따르면 527년 불교를 나라에서 받아들이게 하려고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으며, 그의 이야기는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순교 전설이 되었다.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부터 약 1,500년 전, 한반도 동남쪽의 신라에서 법흥왕은 백성들이 불교를 믿기를 바랐어요.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온 종교였고, 이웃 나라 고구려와 백제는 벌써 불교를 받아들였지요. 하지만 신라의 힘센 귀족들은 새 종교를 싫어했어요. 그들은 자기들의 신과 정령을 섬겼고, 무엇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왕을 가까이에서 돕던 젊은이 가운데 이차돈이 있었어요. 스무 살 남짓이었지요. 옛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왕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저를 벌하시면 귀족들이 기적을 보고 믿게 될 것입니다." 왕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차돈은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결국 왕은 이차돈을 처형하라고 명했어요. 전설에 따르면 그가 죽을 때 붉은 피 대신 흰 젖이 솟구치고,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리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대요. 귀족들은 놀라고 두려워서 더는 불교에 반대하지 못했어요.

그 뒤 신라는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숲에 첫 큰 절인 흥륜사를 지었어요. 불교는 신라에서 아주 중요한 종교가 되었고, 뒷날 신라는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유명한 절을 지었어요.

이차돈이 죽고 약 300년 뒤,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려고 여섯 면으로 된 돌기둥을 세웠어요. 한 면에는 그의 이야기가 그림으로 새겨져 있어요. 땅에 떨어진 머리와, 몸에서 솟구치는 물줄기가 보이지요. 이 돌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어요.

한눈에 보기

생애
6세기 초. 22세 또는 26세에 세상을 떠남(기록마다 다름). 전통적으로 527년 순교(『삼국사기』는 불교 공인을 528년으로 적음)
나라
신라, 도읍 경주(서라벌), 법흥왕(재위 514~540) 때
직책
사인(舍人).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측근
다른 이름
염촉(厭髑), 거차돈(居次頓). 성은 박(朴)
알려진 일
전승에 따르면 그의 순교로 신라가 불교를 공인함
기념물
9세기 초의 육면 석당(이차돈 순교비). 백률사에 있다가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주요 사료
『삼국사기』(1145), 『해동고승전』(1215), 『삼국유사』(1280년대), 순교비 명문

쉬움

이차돈은 누구인가

이차돈은 신라 귀족 출신으로 법흥왕을 가까이에서 모신 사인(舍人)이었다. 한국 사료는 그의 성을 박씨라 하고 왕실과 이어진 가계로 적는데, 할아버지는 습보갈문왕의 아들 아진종이라고 전한다. 그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한 전승은 22세, 다른 전승은 26세라고 한다.

그가 기억되는 까닭은 단 하나의 행동 때문이다. 불교를 일으키려는 왕의 뜻이 귀족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자, 이차돈은 그 막힌 상황을 풀려고 스스로 처형되기를 자청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가 죽을 때 일어난 기적이 반대파를 압도했고, 그 결과 신라가 불교를 공인했다. 그래서 그는 흔히 한국 최초의 불교 순교자로 불린다.

이름은 여러 가지로 전한다. 이차돈(異次頓)과 염촉(厭髑)은 같은 신라말 이름을 한자로 적은 두 방식, 곧 소리를 빌린 표기와 뜻을 빌린 표기로 여겨진다. '이차'와 '염(厭)'은 '싫어하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 옛 이름을 이렇게 두 가지로 적는 일은 흔했다.

[1][5][4]

쉬움

불교를 늦게 받아들인 신라

불교는 4세기에 중국에서 한반도로 들어왔다. 372년 전진의 부견이 승려 순도를 불상과 경전과 함께 고구려 소수림왕에게 보냈고, 384년에는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을 거쳐 백제에 왔다. 두 나라 모두 왕실이 일찍 새 신앙을 받아들였고, 불교는 공통의 의례와 글을 아는 승려 집단을 통해 중앙집권 국가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한반도 동남쪽의 신라는 더 고립되어 있었고 더 보수적이었다. 5세기에 고구려에서 온 묵호자와 아도 같은 승려들이 몰래 가르치거나 제한된 성과만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 정치는 여전히 여섯 부의 유력 가문들이 모이는 회의에 크게 좌우되었고, 이 귀족들은 신성한 숲과 산, 조상을 섬기는 토착 신앙에 깊이 매여 있었다.

'법을 일으킨다'는 뜻의 이름을 지닌 법흥왕은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520년 율령을 반포하고 관등과 공복을 정했으며, 530년대에는 금관가야를 병합하고 신라 최초의 연호를 썼다. 아시아 곳곳에서 강한 왕들과 연결된 종교인 불교의 수용은 이 계획과 잘 맞았지만, 귀족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8][1][7]

쉬움

순교 이야기

두 주요 역사서는 이야기를 다르게 전한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이 불교를 일으키려 하지만 신하들이 반대한다. 이차돈만이 찬성하며, 왕이 자신을 처형했을 때 불교가 참이라면 반드시 이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모으자 그들은 승려들의 가르침이 괴이하다고 반대하고, 이차돈은 보통이 아닌 가르침은 보통이 아닌 결과를 가져온다고 맞선다. 그가 처형되자 피가 젖처럼 희게 솟고, 신하들은 더는 반대하지 못한다.

한 세기 넘게 뒤 승려 일연이 엮은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더 자세하다. 이차돈과 왕은 비밀 계획을 세운다. 이차돈이 신성한 숲인 천경림에 절을 지으라는 왕명을 전하고, 귀족들이 항의하자 왕은 그런 명을 내린 적이 없다고 부인하며, 이차돈은 책임을 지고 사형을 받는다. 처형 때 그의 머리는 날아가 도읍 북쪽의 산에 떨어지고, 목에서는 흰 젖이 솟으며, 하늘이 어두워지고 꽃비가 내린다. 귀족들은 두려워하며 불교를 받아들인다.

두 이야기의 뼈대는 같다. 왕과 귀족의 갈등, 일부러 몸을 바친 젊은 관리, 그리고 흰 피의 기적이다. 『삼국유사』는 이 일을 법흥왕 14년인 527년에 두고, 『삼국사기』는 불교 공인을 법흥왕 15년인 528년과 연결한다.

[5][6][9]

중급

귀족들은 왜 반대했나

6세기 초 신라는 아직 완전한 중앙집권 왕국이 아니었다. 중요한 결정은 뒤에 화백이라 불리는 회의에서 유력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 이루어졌고, 왕은 여러 면에서 절대 군주라기보다 강한 가문들 가운데 첫째였다. 524년의 울진 봉평리 신라비처럼 법흥왕 때의 비석들은 왕이 여섯 부의 이름난 귀족들과 함께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 이런 그림과 맞아떨어진다.

종교도 이 균형의 일부였다. 신성한 숲, 산, 하늘, 왕실 조상을 중심으로 한 신라의 토착 신앙은 특정한 장소와 가문에 묶여 있었다. 왕이 들여와 후원하는 보편 종교는 종교적 권위를 왕좌와, 왕의 후원으로 지위를 얻는 새로운 승려 집단 쪽으로 옮길 위험이 있었다. 불교는 또 정의로운 왕이 법을 지키고 법이 그 왕을 지킨다는 나름의 왕권 사상을 가지고 왔다.

『삼국사기』에 적힌 반대 이유, 곧 승려의 모습이 이상하고 가르침이 괴이하다는 말은 낯선 외래 신앙에 대한 진짜 불안을 반영했을 수 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현실적인 이해관계도 지적한다. 절을 지으려면 땅과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것을 허락할 권한은 누가 자원을 쥐느냐의 문제였다. 이렇게 보면 불교를 둘러싼 다툼은 왕이 귀족 없이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느냐를 둘러싼 다툼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 이차돈이 사인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왕의 가까운 측근이자 귀족 가문의 일원인 그는 왕좌와 귀족 사이에 서 있었다. 그가 책임을 떠안았기에 왕은 회의를 드러내 놓고 꺾지 않고도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이 구도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

[1][7][6]

중급

순교 이후: 절과 불교 왕국

새 정책의 첫 열매는 흥륜사였다. 전승에 따르면 앞서 아도가 절을 세우려 했던 천경림에 지어진 이 절은 544년 진흥왕 때 완공되었다. 진흥왕은 절 이름을 대왕흥륜사라 하고, 그해 백성이 출가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으며, 말년에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이 절의 주지가 되었다. 뒷날 이 절의 금당에는 신라 불교의 '십성(十聖)'을 그린 그림이 있었는데, 이차돈(염촉)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신성한 숲에 절을 짓는 일은 강한 상징이었다. 새 왕실 종교를 옛 신앙의 땅 위에 세운 것이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신라는 도읍 한가운데 거대한 황룡사를 짓고, 승려들을 중국에 유학 보냈으며, 신라 땅이 먼 옛날 부처들이 머물던 곳이라는 불국토 사상을 발전시켰다.

법흥왕과 왕비도 말년에 승려와 비구니가 되었다고 전한다. 한 세기가 지나지 않아 불교는 신라의 왕권 사상, 젊은 귀족의 교육, 외교에 깊이 스며들었고, 통일 전쟁 이후에는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걸작을 낳았다.

[3][1][7]

중급

이차돈을 기억하다: 백률사의 돌기둥

그가 죽고 약 300년 뒤인 9세기에 신라 불교도들은 이차돈을 기리는 결사를 만들었고, 이 결사를 위해 쓴 글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 비슷한 무렵에 그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유물이 만들어졌다. 높이 106cm의 화강암 육면 석당으로, 전승에서 그의 머리가 떨어진 곳이라 하는 경주 북쪽 소금강산의 백률사에 서 있었다.

돌기둥의 한 면에는 순교 장면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머리가 땅에 떨어진 인물의 목에서 물줄기가 솟고, 위에서는 꽃이 떨어지는 듯하며, 땅은 흔들리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나머지 다섯 면에는 지금은 많이 닳은 명문이 있는데, 목에서 흰 젖이 한 길(약 3m) 솟았다(頸中白乳一丈)는 구절이 역사서의 기록과 일치한다.

이 돌기둥은 1914년 경주의 박물관으로 옮겨져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신라에서 전하는 역사적 사건의 그림 표현으로는 매우 드문 예이며, 지금 남은 역사서들이 쓰이기 훨씬 전부터 이차돈이 조직적인 추모의 대상이었음을 보여 준다.

[2][1]

중급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520년대는 유라시아 곳곳에서 종교와 법이 정비되던 시기였다. 중국 남쪽에서는 양 무제(재위 502~549)가 당대 가장 독실한 불교 군주였다. 그는 큰 절을 짓고 경전을 강의했으며, 역사서에 따르면 여러 차례 절에 '몸을 바쳐' 신하들이 돈을 내고 그를 되찾아 와야 했다. 신라가 520년대 초에 보낸 사신은 백제의 도움을 받아 양나라에 갔고, 양나라 문화는 무엇보다 백제를 통해 한반도에 들어왔다.

백제에서는 523년 무령왕이 세상을 떠났다. 공주 부근에 양나라식 벽돌로 쌓은 그의 무덤은 백제가 남조의 유행을 얼마나 가까이 따랐는지 보여 준다. 그의 아들 성왕은 538년 사비로 도읍을 옮겼고, 일본 사서에 따르면 야마토 조정에 불상과 경전을 보냈는데 그 연도는 538년 또는 552년으로 전한다. 이후 일본의 불교도 씨족 간 다툼을 겪었고, 587년 불교를 지지한 소가 씨가 이기면서 아스카데라가 세워졌다. 신라와 일본 모두 불교 수용이 궁정의 권력 다툼과 얽혀 있었다.

지중해에서는 이차돈이 죽었다고 전하는 527년에 유스티니아누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가 되었다. 몇 년 안에 그는 로마법을 집대성한 『로마법 대전』(529~534)을 펴내게 하고 하기아 소피아를 다시 지었다(532~537). 페르시아에서는 531년 호스로 1세가 즉위해 세금과 군대를 개편했다. 신라의 법흥왕처럼 이 군주들도 법과 종교를 함께 써서 왕권을 더 강하고 고르게 만들었다.

인도에서는 굽타 제국이 기울고 있었지만 날란다 같은 승원에서는 불교 학문이 꽃피었고, 뒷날 중국과 한국의 구법승들이 그곳을 찾았다. 이차돈이 목숨을 바친 종교는 그의 시대에 경전과 미술, 왕권 사상을 인도에서 일본까지 실어 나르던 아시아의 큰 연결망 가운데 하나였다.

[8][7]

심화

사료: 역사, 전설, 성인전

이차돈에 관한 글은 모두 사건보다 훨씬 뒤에 쓰였다. 『삼국사기』(1145)는 신라 김대문의 『계림잡전』 같은 앞선 기록에 근거했다고 밝히고, 아도 화상의 비문에 전하는 다른 이야기도 적어 둔다. 각훈이 1215년에 엮은 고승 전기집 『해동고승전』과 일연의 『삼국유사』(1280년대)는 9세기 추모 결사의 글을 포함한 자료를 더한다.

가장 오래된 물적 증거는 9세기 초의 돌기둥이다. 그 명문과 부조는 흰 젖을 포함한 이야기의 뼈대가 그때 이미 굳어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520년대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자세히 되살릴 수는 없다. 기적 요소는 잘 알려진 불교 성인전의 형식에 속하며, 연구자들은 대체로 왕의 불교 후원 결정과 관련된 처형이라는 역사적 핵심과 전설의 층위를 구분한다.

피 대신 흰 젖이 솟는 모티프는 인도와 중국의 불교 문헌에도 나온다. 예컨대 법의 전승을 다룬 중국 문헌에는 사자(師子) 비구가 적대적인 왕에게 처형될 때 흰 젖이 흘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는 신라의 이야기가 편찬자들이 알던 불교의 본보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이차돈이라는 인물 자체를 지어낸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6][9][2][1]

심화

여러 관점

종교적 읽기: 한국 불교 안에서 이차돈은 헌신적인 행동으로 신라에 불법의 길을 연 순교자다. 이 읽기는 그의 신앙을 강조하고 기적을 진리의 표지로 본다. 『삼국유사』와 9세기 추모 결사의 관점이며, 오늘날 한국 불교의 추모 행사에도 살아 있다.

정치적 읽기: 특히 한국의 많은 현대 연구자는 이 일을 권력을 모으려는 왕과 특권을 지키려는 귀족 회의의 대결로 읽는다. 이 관점에서 불교는 여러 가문 위에 선 보편 군주의 이념을 제공했고, 귀족의 반대는 믿음만큼이나 권력의 문제였다. 근거로는 520년의 율령, 새 관등제, 가야 병합, 그리고 첫 절이 귀족들의 신성한 땅에 세워졌다는 사실이 거론된다. 순전히 정치적으로만 읽는 데 비판적인 쪽은 종교적 확신을 정치의 겉옷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문헌 비판적 읽기: 일부 연구자는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순교비 명문을 비교해 이야기가 어떻게 자라났는지에 주목한다. 거짓 왕명을 꾸민 계획은 후대 판본에만 나오고, 흰 젖의 기적은 외국 불교 문헌에 비슷한 예가 있다는 것이다. 이 접근은 사건을 부정하지 않고, 이야기들을 후대 신라·고려 불교도들이 자신들의 기원을 어떻게 기억했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로 다룬다.

연대 문제에서도 연구자들은 『삼국유사』와 순교비 전승을 따라 527년으로 볼지, 『삼국사기』를 따라 528년으로 볼지 여전히 의견이 갈린다. 순교와 공식 공인이 따로 이루어진 단계였고, 국가의 전면적인 지원은 544년 흥륜사 완공 때에야 뚜렷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동아시아 비교도 논쟁거리다. 불교를 지지한 소가 씨와 반대한 모노노베 씨가 싸워 587년에 끝난 일본의 갈등이 신라의 경우와 자주 나란히 놓이지만, 둘이 얼마나 닮았는지는 양쪽 사료를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다.

[6][1][7][5]

심화

유산

정확한 연대와 형식이 어떠했든, 신라의 불교 수용은 천 년 넘게 한국 문명을 빚었다. 불교 사원, 조각, 인쇄, 학문은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며 꽃피었고, 경주의 불교 유적은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경주역사유적지구와 석굴암·불국사에 포함되어 있다.

이차돈 이야기는 불교를 넘어 한국인의 기억이 되었다. 학교 역사책, 어린이 책, 백률사 터의 추모 의례를 비롯한 경주 지역의 기념 행사에 나타난다. 뜻을 위해 몸을 바친다는 메시지는 시대마다 불교적 헌신에서 공동체의 덕목까지 다르게 읽혀 왔다.

연구자에게 이차돈의 사례는 종교가 한 사회에 들어가는 방식을 보여 주는 소중한 예다. 종교는 생각이 퍼지는 것만으로 자리 잡지 않고, 왕과 엘리트와 옛 신앙 사이의 타협을 거치며, 세상이 왜 바뀌었는지 설명하려는 후대의 이야기를 통해 뿌리내린다.

[1][5]

핵심 개념

순교
신앙을 위해 죽는 일. 이차돈이 스스로 받아들인 죽음은 신라 귀족들이 불교를 받아들이게 한 사건으로 전한다.
왕권과 종교
법흥왕은 율령·관등과 함께 불교를 써서 왕을 유력 귀족 가문들 위로 끌어올렸다.
신성한 숲
천경림은 토착 신앙의 성스러운 숲이었다. 그곳에 흥륜사를 지은 것은 새 신앙이 옛 신앙의 자리를 차지했음을 보여 준다.
성인전
성스러운 인물에 관한 글로, 역사와 기적이 섞여 있다. 이차돈 이야기도 이 갈래에 속하므로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불교 연결망
불교는 승려·경전·미술을 통해 인도·중국·한국·일본을 이었다. 신라는 이웃보다 늦게 이 연결망에 들어갔다.
기억의 층위
이 이야기는 9세기 돌기둥에서 13세기 『삼국유사』까지 일곱 세기 동안 다시 쓰였고, 그때마다 세부가 더해졌다.

기록

  1. 372년 — 전진의 승려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다.
  2. 384년 —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하다.
  3. 514년 — 법흥왕이 신라 왕위에 오르다.
  4. 520년 —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고 관등과 공복을 정하다.
  5. 527년 — 전통적인 이차돈 순교 연도(『삼국유사』). 『삼국사기』는 불교 공인을 528년으로 적다.
  6. 532년 — 신라가 금관가야를 병합하다.
  7. 544년 — 신라 최초의 큰 국가 사찰 흥륜사가 진흥왕 때 완공되다.
  8. 553년 — 신라 도읍에서 황룡사 공사가 시작되다.
  9. 약 817년 — 이차돈을 기리는 결사가 만들어지고 백률사에 순교비가 세워지다(9세기 초).
  10. 1145년 — 『삼국사기』가 앞선 신라 기록을 인용해 이야기를 싣다.
  11. 약 1281년 — 승려 일연의 『삼국유사』가 가장 자세한 전설을 전하다(1280년대).
  12. 1914년 — 순교비가 백률사에서 경주의 박물관으로 옮겨지다.

용어 풀이

신라
한반도 동남쪽의 나라로 삼국 가운데 하나이며, 도읍은 경주였다. 뒤에 한반도 대부분을 통합했다.
법흥왕
신라 제23대 왕(재위 514~540). 왕권을 강화하고 불교를 공인했다.
사인(舍人)
이차돈이 맡았던 직책으로,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측근이다.
흥륜사
순교 이후 지어져 544년에 완공된 신라 최초의 큰 절.
천경림
흥륜사가 세워진 신라 토착 신앙의 신성한 숲.
순교자
믿음이나 뜻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
『삼국유사』
승려 일연이 1280년대에 엮은 삼국의 역사·전설·불교 이야기 모음.
석당
명문이나 조각을 새긴 여러 면의 돌기둥. 이차돈 순교비는 육면 석당이다.

묻고 답하기

정말 피 대신 젖이 나왔나요?

전설은 그렇게 말해요.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종교적인 기적 이야기로 봐요. 인도와 중국의 다른 불교 성인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져요.

귀족들은 왜 불교를 싫어했나요?

그들은 신성한 숲과 산, 조상을 섬기는 신라 고유의 신앙을 따랐고, 그들의 힘도 그 신앙과 이어져 있었어요. 왕이 지원하는 새 종교는 왕을 더 강하게, 귀족을 더 약하게 만들 수 있었어요.

이차돈은 승려였나요?

한국 사료는 그를 승려가 아닌, 왕을 모시던 사인이자 독실한 불교도인 관리로 적어요. 일부 영어 책은 그를 승려라고 부르기도 해요.

불교 공인은 527년인가요, 528년인가요?

『삼국유사』와 순교비 전승은 527년, 『삼국사기』는 528년이에요. 어느 쪽이 맞는지 아직 논쟁 중이고, 순교와 공식 결정이 따로 이루어진 단계였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어요.

지금 이차돈과 관련된 것을 볼 수 있나요?

백률사에 있던 육면 순교비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어요. 백률사 터는 경주 시내 북쪽 언덕에 있어요.

이차돈 이야기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몇백 년 뒤에 기록되었고 기적이 들어 있어서, 역사학자들은 있었을 법한 사건의 핵심과 전설을 나누어 봐요. 9세기 초의 순교비는 약 300년 안에 이야기의 뼈대가 굳어졌음을 보여 줘요.

한국에만 있던 일인가요?

아니에요. 일본에서도 6세기에 씨족 사이의 다툼을 거친 뒤에야 불교가 받아들여졌고, 여러 곳에서 새 종교가 퍼질 때 왕과 엘리트 사이의 갈등이 있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이차돈 (異次頓).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차돈 순교비 (異次頓 殉敎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3. 경주 흥륜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4. Ichadon.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of World Religions, via Encyclopedia.com
  5. Ichadon. Wikipedia
  6. 이차돈. 위키백과
  7. Beopheung of Silla. Wikipedia
  8. Korean Buddhism. Wikipedia
  9. Samguk yusa. Wikipedia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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