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부터 약 1,400년 전, 한반도 북쪽과 오늘날 중국 동북 지방의 넓은 땅에는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었어요. 도읍은 평양이었지요. 서쪽에는 중국을 하나로 합친 커다란 나라 당이 있었고, 한반도 남쪽에는 백제와 신라가 있었어요.
연개소문은 고구려에서 손꼽히는 귀족 집안 출신이었어요. 642년, 왕과 몇몇 대신이 그를 없애려고 몰래 계획을 세웠어요. 그런데 연개소문이 먼저 알아챘어요. 그는 먼저 움직여 자기에게 맞서던 대신들과 왕까지 죽이고, 왕의 조카를 새 왕으로 세웠어요. 그 뒤로 왕은 이름뿐이었고, 중요한 일은 연개소문이 결정했어요.
몇 해 뒤 당나라 황제 태종이 엄청난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어요. 고구려 사람들은 산 위의 돌로 쌓은 성을 굳게 지켰어요. 안시성이라는 성에서는 두 달 가까이 버텨서, 겨울이 다가오자 황제가 결국 군대를 돌려야 했어요. 당나라는 그 뒤로도 여러 번 쳐들어왔지만,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평양을 차지하지 못했어요.
연개소문이 죽은 뒤 아들들이 누가 권력을 가질지를 두고 다투었어요. 한 아들은 당나라 편으로 넘어가기까지 했지요. 고구려의 적들은 이 틈을 노렸고, 668년에 고구려는 무너지고 말았어요.
연개소문은 좋은 지도자였을까요? 옛 중국 역사책과 뒷날 한국의 여러 역사책은 왕을 죽였다는 이유로 그를 잔인한 사람이라고 적었어요. 그런데 약 100년 전부터 몇몇 한국 학자들은 그를 나라를 지킨 용감한 영웅으로 칭찬하기 시작했어요.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두 모습을 함께 보려고 해요.
한눈에 보기
- 생몰
- 출생 연도 미상(흔히 594년 또는 603년 무렵으로 추정), 아들 연남생 묘지명에 따르면 665년 사망(다른 기록은 664년·666년)
- 나라
- 고구려(전통적으로 기원전 37년~668년), 도읍 평양
- 권력
- 642년 정변으로 집권,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보장왕(재위 642~668)을 앞세워 통치
- 전쟁
- 645년, 647~648년, 661~662년 당의 침공을 막아 냄
- 이름 표기
- 연개소문(淵蓋蘇文). 당나라 기록은 당 고조의 이름을 피해 천개소문(泉蓋蘇文), 『일본서기』는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로 적음
- 가족
- 아버지 연태조, 아들 남생·남건·남산, 동생 연정토
- 주요 사료
- 『삼국사기』(1145), 『구당서』·『신당서』, 『일본서기』(720), 뤄양 부근에서 나온 아들들의 묘지명
쉬움
연개소문은 누구인가
연개소문은 642년부터 660년대 중반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구려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쥐었던 귀족이자 군사 지도자다. 당시 고구려는 만주의 랴오허(요하)에서 한반도 한강 유역에 이르는 동북아시아의 큰 나라였고, 도읍은 평양이었다.
그는 힘으로 권력을 잡았다. 왕과 고위 대신들이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먼저 움직여 반대파 백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한 뒤, 왕의 조카인 보장왕을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흔히 '최고 재상'으로 풀이되는 대막리지 자리에 올라 행정과 군사의 권한을 한 손에 모았다.
그가 권력을 쥔 시기는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위태로운 때였다. 중국을 다시 통일한 당은 고구려를 굴복시키려 했고, 한반도 남쪽의 신라는 경쟁국에 맞서려고 당의 도움을 구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는 당의 대규모 침공을 여러 차례 물리쳤다. 그러나 그가 죽고 3년도 안 되어 아들들의 다툼을 틈탄 당·신라 연합군에게 668년 나라가 무너졌다.
쉬움
집안과 여러 이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연(淵)이라는 성씨에는 집안의 시조가 샘 또는 물에서 태어났다는 설화가 얽혀 있다. 할아버지 자유와 아버지 태조는 모두 막리지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고, 연개소문은 동부 대인이던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는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고구려 귀족 사회의 한가운데에 있던 인물이었다.
같은 사람이 나라마다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당나라 역사책은 성을 천(泉)으로 적는데, 당을 세운 고조의 이름이 이연(李淵)이어서 황제의 이름 글자를 쓰지 않는 관습(피휘)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뤄양 부근에서 나온 맏아들의 묘지명에도 '천남생'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는 소리를 빌린 글자로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라고 적었는데, 고구려 말에서 이름이 어떻게 소리 났는지를 보여 주는 것일 수 있다.
출생 연도는 기록에 없다. 594년이나 603년 무렵이라는 설명이 흔하지만 모두 추정이다. 사망 연도도 다르게 전한다. 아들 연남생의 묘지명은 665년을, 『삼국사기』는 666년을 가리키고, 『일본서기』는 664년 조에 그의 죽음을 적었다. 묘지명이 사건과 가까운 시기에 집안사람을 위해 쓰인 기록이어서 많은 연구자가 665년을 따른다.
쉬움
642년의 정변
630년대에 고구려는 당을 막으려고 서쪽 국경을 따라 긴 방어선, 이른바 천리장성을 쌓았다. 연개소문은 이 공사의 최고 감독을 맡으면서 국경 지대의 병력과 인력을 거느리게 되었다. 조정이 그를 그곳에 보낸 것이 강력한 경쟁자를 도읍에서 떼어 놓으려는 뜻이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전통적인 기록에 따르면 642년 왕과 대신들이 그를 죽이려 했다. 이를 알아챈 그는 대신들을 군대 사열식에 불러 모아 그 자리에서 죽였고, 곧바로 궁궐에 들어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웠다. 중국 사료는 백여 명이 죽었다고 하고, 다른 기록은 180여 명이라고 한다. 세부는 달라도 정변이 피비린내 났다는 점, 그리고 큰 귀족 가문들 사이의 옛 권력 균형을 무너뜨렸다는 점은 모든 사료가 같다.
같은 해에 또 하나의 전환점이 있었다. 고구려의 남쪽 이웃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빼앗은 것이다. 다급해진 신라는 그해 겨울 김춘추(뒷날의 태종 무열왕)를 평양에 보내 도움을 청했다. 연개소문 정권은 신라가 먼저 예전에 고구려가 잃은 한강 유역 땅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협상은 깨졌고, 김춘추는 가까스로 돌아갔으며, 신라는 당에 기대게 되었다.
중급
645년 당 태종의 대침공
당 태종(재위 626~649)은 이 전쟁을 벌을 주는 전쟁으로 내세웠다.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괴롭히며, 당의 충실한 동맹인 신라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밑에는 전략적 계산이 있었다. 수나라가 598년과 612~614년 고구려 원정 실패로 무너진 기억이 생생했고, 당의 동북쪽에 강하고 독립적인 고구려가 버티고 있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여겨졌다.
645년 당군은 랴오허를 건너 개모성·요동성·백암성 같은 주요 성을 차례로 빼앗았다. 안시성을 구하러 온 고구려의 대규모 구원군도 들판 싸움에서 졌다. 그러나 안시성은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당군은 두 달 가까이 성을 포위하고 성벽 앞에 거대한 흙산까지 쌓았지만 성은 버텼다. 날이 추워지고 군량이 떨어지자 태종은 철수를 명했다. 안시성주의 이름은 정사에 나오지 않는다. 흔히 알려진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훨씬 뒤 조선 시대 기록에야 보인다.
이 원정은 당에 큰 손실을 주었고 평양에는 이르지도 못했다. 태종은 이후 전략을 바꾸어 647년과 648년에 작은 부대로 되풀이해 쳐들어가 고구려 국경을 지치게 하려 했다. 그는 또 한 번의 대원정을 준비하던 중 649년에 세상을 떠났다.
중급
버텨 낸 650~660년대
태종의 아들 고종은 방법을 바꾸었다. 서쪽에서만 고구려를 치지 않고 신라와 손잡아 먼저 백제를 공격한 것이다. 660년 당의 수군과 신라군이 백제를 멸망시키자, 고구려는 남쪽의 동맹을 잃고 서북과 남쪽 양면에서 공격받을 처지가 되었다.
661년 당군은 평양성을 직접 포위했다. 662년 초 고구려는 가장 이름난 승리 가운데 하나를 거두었다. 연개소문이 이끄는 군대가 사수(蛇水) 부근에서 당나라 장군 방효태의 군대를 무찔러, 기록에 따르면 방효태와 그 아들들까지 전사했다. 곧이어 당은 평양 포위를 풀었다.
663년에는 백제를 되살리려고 건너온 왜의 수군이 백강 전투에서 당·신라군에게 크게 졌다. 고구려는 점점 고립되었지만,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지도부가 흔들리지 않았다.
중급
어떻게 다스렸나: 권력, 종교, 외교
연개소문은 스스로 왕이 되지 않고 보장왕을 앞세워 다스렸다. 이렇게 하면 왕실의 정통성은 그대로 두면서 인사와 군대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대막리지 자리는 뒤에 맏아들 남생에게 넘어갔으니, 그는 다른 왕조의 강력한 섭정들처럼 자기 집안의 세습 정권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셈이다.
눈에 띄는 정책 가운데 하나가 도교 진흥이다. 643년 그의 건의로 고구려 조정은 당에 도교를 청했고, 당은 숙달(叔達) 등 도사들과 『도덕경』을 보냈다. 연구자들의 해석은 갈린다. 노자를 조상으로 받드는 당 황실과의 관계를 누그러뜨리려는 외교적 몸짓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경쟁 귀족들과 얽힌 불교 세력을 누르려는 정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뒷날 한국 불교 전통은 이 정책을 적대적으로 기억했다.
대외적으로 그는 당과 신라에 강경했지만, 왜와는 교류를 이어 갔다. 왜 역시 645년 을사의 변과 다이카 개신으로 정치적 격변을 겪고 있었다. 『일본서기』에는 이 무렵 고구려 사신이 왜에 간 기록과, 그의 정변을 전하는 일본 쪽 서술이 남아 있다.
중급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연개소문이 권력을 쥔 20여 년 동안 유라시아 곳곳이 크게 바뀌고 있었다. 장안에서는 당 태종이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 가운데 하나를 다스렸다. 그가 고구려를 침공한 645년에, 승려 현장은 인도 날란다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뒤 수백 부의 불경을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당은 또 634년부터 장안 북쪽에 거대한 대명궁을 짓기 시작했고, 이곳은 뒷날 나라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같은 645년 소가 씨가 무력으로 쓰러지고 다이카 개신이 시작되었다. 중국식 중앙집권 국가를 세우려는 개혁이었다. 고구려의 642년 정변처럼, 경쟁 가문과 당의 힘을 함께 두려워한 사람들이 일으킨 궁정 혁명이었다.
멀리 서쪽에서는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난 뒤 하나로 뭉친 초기 이슬람 칼리파국의 아랍 군대가 642년 니하완드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무찔렀다. 연개소문의 정변과 같은 해다. 651년 무렵 사산 왕조는 무너졌고, 이 시기 칼리파 우스만 아래에서 꾸란이 표준 문헌으로 정리되었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예배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비잔티움 황제들은 시리아와 이집트를 새 세력에게 잃고 있었다.
이 사건들을 나란히 놓으면, 동쪽의 당과 서쪽의 칼리파국이라는 새 대제국이 빠르게 국경을 다시 그리던 세계가 보인다. 고구려의 오랜 저항과 끝내 맞은 멸망도, 작거나 오래된 나라들이 변화에 적응하거나 떠오르는 세력과 손잡거나 흡수되던 이 큰 흐름의 일부였다.
중급
죽음 이후: 분열과 고구려의 멸망
연개소문이 죽자 맏아들 남생이 서른두 살 무렵에 대막리지를 이었다. 남생이 지방을 순시하는 사이 동생 남건과 남산이 도읍을 장악했다. 남생은 옛 도읍 국내성으로 달아났다가 당에 구원을 청했고, 666년 당에 투항했다. 비슷한 무렵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도 여러 성을 이끌고 신라로 넘어갔다.
이 분열은 당과 신라가 수십 년 동안 얻지 못했던 기회를 주었다. 667~668년 이적(이세적)이 이끄는 당군이 남생의 안내를 받으며 서북쪽에서 밀고 들어왔고, 신라는 남쪽에서 공격했다.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보장왕과 많은 귀족이 당으로 끌려갔고, 당은 옛 고구려 땅을 다스리려고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남생은 남은 생을 당의 고위 관리로 보내다 679년에 죽었다. 20세기 초 뤄양 부근에서 발견된 그의 묘지명은 동생 남산과 후손들의 묘지명과 함께 연씨 집안 안에서 쓰인 몇 안 되는 기록이며,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665년으로 보는 근거가 된다.
심화
사료 문제: 적의 눈으로 본 연개소문
고구려가 남긴 역사책은 전하지 않는다. 연개소문에 관해 아는 것은 거의 모두 세 갈래 자료에서 나온다. 첫째는 중국 정사다. 『구당서』(945), 『신당서』(1060), 『자치통감』(1084)은 그가 맞서 싸운 나라의 역사가들이 쓴 것으로, 태종의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뜻도 섞여 그를 교만하고 잔인한 시역자로 그린다.
둘째는 1145년 고려에서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다. 고구려와 당의 전쟁 부분은 중국 사서를 많이 옮겼고 때로는 거의 그대로 가져왔으며, 임금을 죽인 것을 가장 무거운 죄로 보는 유교의 잣대로 그를 평가했다. 13세기 말의 『삼국유사』는 그의 도교 진흥에 적대적인 불교 쪽 이야기들을 덧붙인다.
셋째는 중국·한국의 관찬 전통 바깥의 자료다. 『일본서기』는 642년 정변을 독자적으로 전하며 그를 위엄 있는 인물로 그려 사뭇 다른 인상을 준다. 중국에서 나온 아들과 후손들의 묘지명도 있다. 이 묘지명들은 당을 섬긴 사람들을 위해 당에서 쓰였으니 나름의 치우침이 있지만, 다른 곳에 없는 집안 내력과 관직을 전한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몸에 칼 다섯 자루를 찼다거나 귀족을 엎드리게 해 말에 오를 때 디딤돌로 삼았다는 식의 생생한 개인 묘사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경력의 큰 줄기는 확실하지만, 동기와 성격은 대부분 적대적인 사료에서 짐작해야 한다.
심화
여러 관점
당과 이후 중국 왕조의 시각: 정사에서 그는 임금을 죽인 찬탈자이고, 당의 전쟁은 정당한 응징으로 서술된다. 당나라 장군 설인귀를 주인공으로 한 후대 중국의 소설과 연극에서는 그를 본뜬 인물이 사나운 적장으로 나온다. 2000년대 초 중국사회과학원의 동북공정은 고구려를 중국 역사 속의 지방 정권으로 규정했고, 이 관점에서는 수·당의 원정이 외국 침략이 아니라 중국 정치 질서 안의 전쟁으로 설명된다. 한국에서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고, 2004년 두 나라 정부는 갈등이 커지지 않도록 비공식 합의를 했다.
전통적인 한국 유학자의 시각: 『삼국사기』부터 조선 시대 역사가들까지 주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임금에 대한 충성이 가장 높은 가치였는데, 연개소문은 임금을 죽이고 독재했으며 이 관점에서 보면 분열된 집안을 남겨 나라를 망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일부 조선 문인들은 안시성의 항전을 높이 샀다. 인물에 대한 평가와 전쟁에 대한 평가를 나누어 볼 수 있었다는 뜻이다.
20세기 초 한국 민족주의 사학의 시각: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를 겪던 시기, 1911년 그의 전기 『천개소문전』을 쓴 박은식과 신채호 같은 역사가들은 그를 강대한 제국에 맞서 나라의 독립을 지킨 위대한 영웅으로 다시 그렸다. 박은식은 그를 '독립과 자주를 외친' 인물로 칭송했다. 북한 역사학도 고구려를 자주적인 국가의 본보기로 강조하는 흐름 속에서 그를 애국자로 기린다.
최근 학계의 시각: 오늘날 한국과 여러 나라의 많은 연구자는 두 극단을 모두 피한다. 642년 정변을 오랫동안 큰 귀족 가문들이 권력을 나누어 온 나라에서 벌어진 귀족 세력 간 권력 투쟁의 결과로 읽고, 그의 대외 정책을 당의 압박과 신라의 외교에 대한 합리적 대응으로 보면서도, 한 집안에 권력을 몰아준 탓에 그가 죽자 나라가 쉽게 흔들렸다는 점을 함께 지적한다. 이런 해석은 고구려 귀족 관등의 구조, 연씨 집안 묘지명, 백제 멸망과의 비교 등을 근거로 든다. 논쟁의 핵심은 사실보다 충성·정통성·나라의 생존을 어떻게 저울질하느냐에 있다.
심화
유산과 기억
연개소문의 이야기는 세대마다 저마다의 목적으로 쓰인 상징이 되었다. 유학자들에게는 불충한 신하에 대한 경고였고, 식민지 시기 민족주의자들에게는 한국인이 한때 아시아 최대의 제국에 맞섰다는 증거였으며, 오늘날 한국의 소설과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거대한 전쟁 영웅이다.
동아시아사 연구자에게 그는 삼국 시대를 끝내고 지역 질서를 다시 짠 7세기 위기의 핵심 인물이다. 고구려의 멸망은 나당 전쟁과 신라의 한반도 남부 장악으로 이어졌고, 북쪽에서는 698년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지도자들이 발해를 세웠다. 고구려 유민은 일본으로, 또 당의 관직으로 흩어져 사람과 기술이 지역 곳곳에 퍼졌다.
지금도 열려 있는 질문은 이렇다. 그는 개인적 야망으로 움직였는가, 일관된 전략으로 움직였는가. 그의 정책은 고구려의 수명을 늘렸는가, 아니면 무너짐을 더 갑작스럽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스스로의 목소리가 거의 모두 사라진 나라의 역사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핵심 개념
- 군사 실권 정치
- 연개소문은 자신이 세운 왕을 앞세우고 대막리지로서 실권을 쥐었다. 강한 신하나 장군이 왕위를 좌우하는 비슷한 체제는 여러 왕조에서 나타난다.
- 산성 방어
- 고구려는 서쪽 국경을 따라 늘어선 산성망에 기댔다. 안시성 같은 성에서 버티면 침략군은 고향에서 먼 곳에서 긴 포위전을 해야 했고, 고구려는 이렇게 더 큰 군대를 물리쳤다.
- 동맹 외교
- 642년 신라 김춘추와의 협상 실패는 신라를 당과의 동맹으로 이끌었고, 이 동맹이 결국 백제와 고구려의 운명을 갈랐다.
- 계승 위기
- 한 집안에 권력을 모으는 방식은 우두머리가 살아 있을 때는 통했지만, 그가 죽자 아들들이 서로 싸우며 나라가 갈라졌다.
- 적대적 사료
- 고구려 자신의 기록이 사라져, 연구자들은 적국과 후대 유학자들이 쓴 글을 행간까지 읽으며 그의 모습을 복원해야 한다.
- 역사와 정체성
- 연개소문과 고구려를 기억하는 방식은 오늘날 한국과 중국의 국가 정체성 문제와 얽혀 있어, 같은 사건이 서로 다르게 이야기된다.
기록
- 598년 — 수나라의 첫 고구려 침공이 실패하다.
- 612년 — 수 양제의 대규모 침공이 패배로 끝나고, 613~614년에도 원정이 실패하다.
- 약 631년 — 고구려가 서쪽 국경에 긴 방어선을 쌓기 시작하다. 뒤에 연개소문이 공사를 감독하다.
- 642년 — 연개소문의 정변. 영류왕이 죽고 보장왕이 즉위하다. 신라 김춘추가 평양에 왔으나 동맹을 얻지 못하다.
- 643년 — 고구려가 당에 도교를 청하고, 도사들이 『도덕경』을 가지고 오다.
- 645년 — 당 태종이 침공해 여러 성을 빼앗았으나 안시성 포위에 실패하고 물러나다.
- 647년 — 당이 소규모 침공을 되풀이하기 시작하다(647~648).
- 660년 — 당과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다.
- 662년 — 고구려가 사수에서 방효태의 당군을 무찌르고, 당이 평양 포위를 풀다.
- 665년 — 아들 연남생의 묘지명에 따른 연개소문의 사망(다른 기록은 664년 또는 666년).
- 666년 — 동생들에게 쫓겨난 남생이 당에 투항하고, 연정토가 신라로 넘어가다.
- 668년 — 평양성이 당·신라군에 함락되어 고구려가 멸망하다.
용어 풀이
- 고구려
-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있던 나라로, 삼국 가운데 하나이며 668년까지 이어졌다.
- 대막리지(大莫離支)
- 642년 이후 연개소문이 차지한 최고 관직으로, 최고 재상과 총사령관의 역할을 겸했다.
- 당
- 고구려와 싸우고 신라와 손잡아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중국 왕조(618~907).
- 정변
- 정부 안의 소수 세력이 갑자기, 흔히 폭력으로 권력을 빼앗는 일.
- 안시성
- 랴오둥 지역의 고구려 산성으로, 645년 당군의 포위를 견뎌 냈다.
- 묘지명
- 무덤 안에 넣은 돌 등에 죽은 사람의 생애를 적은 글. 연개소문 아들들의 묘지명이 뤄양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 피휘
- 황제의 이름 글자를 쓰지 않는 관습. 당나라 기록이 연(淵)을 천(泉)으로 바꿔 쓴 까닭이다.
- 『삼국사기』
- 1145년 김부식 등이 편찬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의 삼국 역사서.
묻고 답하기
연개소문은 왕이 되었나요?
아니요. 영류왕을 죽였지만 왕족인 보장왕을 왕위에 앉히고 그를 앞세워 다스렸어요.
고구려는 당나라를 이겼나요?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 고구려는 645년의 대원정을 비롯한 당의 침공을 여러 번 막아 냈어요.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아들들이 다투었고, 당과 신라가 함께 공격해 668년 고구려가 멸망했어요.
중국 기록은 왜 '천개소문'이라고 쓰나요?
당을 세운 고조의 이름에 연(淵) 자가 들어 있었어요. 당나라 사람들은 황제의 이름 글자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역시 '샘'을 뜻하는 천(泉) 자로 바꿔 썼어요.
정확히 언제 죽었나요?
기록마다 달라요. 『일본서기』는 664년, 아들 연남생의 묘지명은 665년, 『삼국사기』는 666년이에요. 묘지명이 집안과 가까운 기록이라 많은 연구자가 665년을 따릅니다.
영웅인가요, 폭군인가요?
어떤 잣대를 쓰느냐에 달려 있어요. 유학자들은 임금을 죽였다며 비판했고, 20세기 초 민족주의자들은 당에 맞선 것을 칭송했어요. 오늘날 많은 연구자는 그의 냉혹함과 전쟁 지도자로서의 성공을 함께 이야기해요.
안시성주 '양만춘' 이야기는 믿을 만한가요?
안시성 포위전은 잘 기록되어 있지만 성주의 이름은 정사에 나오지 않아요.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훨씬 뒤 조선 시대 기록에야 보이므로, 대부분의 연구자는 확정된 사실이 아닌 전승으로 봐요.
왜 도교를 들여왔나요?
해석이 갈려요. 노자를 받드는 당 황실을 향한 외교적 몸짓이었다는 견해, 경쟁 귀족과 얽힌 불교 세력을 누르려 했다는 견해가 있고, 둘 다였을 수도 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노태돈, 연개소문 (淵蓋蘇文).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연남생 (淵男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천개소문전 (泉蓋蘇文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Yeon Gaesomun. Wikipedia
- Goguryeo–Tang War. Wikipedia
- Battle of Baekgang. Wikipedia
- Goguryeo controversies. Wikipedia
함께 보기
- 고구려-수 전쟁598년과 612~614년 중국 수나라가 고구려를 네 차례 침공했다가 모두 실패한 전쟁. 막대한 손실은 618년 수나라 멸망을 앞당겼다.
-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660~676년 신라가 처음에는 당과 손잡고, 이어 당과 맞서 싸우며 백제·고구려가 멸망한 뒤 대동강 이남을 차지하게 된 전쟁.
- 다이카 개신645년 궁정 정변 뒤 시작된 정치 개혁으로, 유력 씨족들의 연합이던 일본을 당나라를 본뜬 중앙집권 국가로 바꾸려 했다.
- 대명궁당나라 황제들의 으뜸 궁궐. 634년 장안성 북동쪽 바깥 용수원 위에 짓기 시작해 904년 해체될 때까지 정치의 중심이었다.
- 삼국사기김부식 등이 편찬해 1145년 고려 조정에 바친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서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