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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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1400년 전, 한반도 북쪽과 지금의 중국 동북 지방 상당 부분은 고구려라는 나라의 땅이었어요. 고구려 사람들은 산 위에 튼튼한 돌성을 쌓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기로 유명했어요.
바로 서쪽의 중국은 300년 가까이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었어요. 589년 수나라가 이 땅을 다시 하나로 합쳤지요. 수나라 황제는 이웃 나라가 모두 자기에게 고개를 숙이기를 바랐지만, 고구려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래서 수나라는 고구려를 정복하려고 어마어마한 군대를 보냈어요. 598년에 한 번, 그리고 612년·613년·614년에 해마다 한 번씩이었지요. 612년에 황제가 모은 군사는 역사책에 100만 명이 넘는다고 적혀 있어요. 행군하는 줄이 얼마나 길었던지 모두 진영을 떠나는 데만 40일이 걸렸대요.
고구려는 이렇게 큰 군대와 넓은 들판에서 맞붙지 않았어요. 병사들은 오르기 어렵고 식량이 가득한 성 안에서 버티며 적이 지치고 배고파지기를 기다렸어요. 수나라는 요동성 하나를 몇 달 동안 공격하고도 끝내 빼앗지 못했어요.
그러자 황제는 30만 5천 명을 따로 뽑아 고구려의 서울 평양으로 곧장 보냈어요.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은 싸울 때마다 일부러 지는 척 도망가서 적을 점점 더 깊이 끌어들였어요. 지친 수나라 군사가 돌아가려고 살수라는 강을 건널 때, 을지문덕은 뒤에서 들이쳤어요.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겨우 수천 명뿐이었어요.
전쟁에 너무 많은 사람과 돈을 쏟아부은 수나라에서는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618년 황제가 죽임을 당한 뒤 당나라가 새로 세워졌어요. 한국 사람들은 지금도 을지문덕을 영웅으로 기억해요. 서울의 큰길 '을지로'도 그의 이름에서 따왔답니다.
한눈에 보기
- 시기
- 598년, 612년, 613년, 614년(모두 네 차례). 해마다 봄부터 가을 사이에 주로 싸웠다
- 장소
- 요서·요동(지금의 중국 랴오닝성)과 평양에 이르는 한반도 서북부. 발해·황해를 건넌 수군 공격도 있었다
- 교전국
- 고구려(영양왕, 을지문덕, 고건무) 대 수나라(598년 문제, 612~614년 양제)
- 규모
- 수나라 기록상 598년 30만, 612년 전투병 113만 3800명(수송 인원은 그 두 배). 현대 학자들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 주요 전투
- 요하 도하전과 요동성 전투(612·613), 평양성 수군 격퇴(612), 살수 대첩(612)
- 결과
- 모든 침공이 실패했다. 614년 고구려가 형식적으로 항복하고 망명자 곡사정을 돌려보내자 수는 철군했다
- 영향
- 613년 양현감의 난을 시작으로 중국 전역에 반란이 번졌고 수는 618년 멸망했다. 당은 645년부터 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 주요 사료
- 『수서』(당 초 편찬), 『자치통감』(11세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1145). 『삼국사기』의 이 부분은 대체로 중국 사서를 따랐다
날짜로 따라가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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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
고구려가 말갈병을 거느리고 요서를 친 뒤, 수 문제는 아들 한왕 양량에게 수륙군 30만을 맡겨 고구려를 치게 했다. 육군은 임유관을 나섰으나 장마로 보급이 끊기고 전염병이 돌았으며, 동래에서 떠난 주라후의 수군은 폭풍을 만나 배를 많이 잃었다. 9월에 돌아왔을 때 죽은 자가 열에 여덟아홉이었다고 한다. 이후 영양왕이 사죄 사신을 보내자 수는 군사를 거두었다.
隋書 卷2 高祖紀下 (Book of Sui, Annals of Emperor Wen, part 2), Wikisource隋書 卷65 (biographies of Zhou Luohou, Li Jing and Xue Shixiong), Wikisource三國史記 卷20 高句麗本紀 嬰陽王 (Samguk sagi, Annals of Goguryeo: King Yeongyang), Wikisource여수전쟁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Goguryeo–Sui War (English Wikipedia)sxtwl (Shouxing calendar library) used for lunar/sexagenary → Julian conversion
최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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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고구려-수 전쟁이란?
고구려-수 전쟁은 598년부터 614년까지 중국 수나라가 삼국 가운데 가장 큰 나라였던 고구려를 여러 차례 침공한 전쟁이다. 두 나라 이름의 첫 글자를 따 여수전쟁(麗隋戰爭)이라고도 한다. 중국 사서는 흔히 '요동 정벌'이라고 부른다.
침공은 네 번이었다. 598년 수나라를 세운 문제가 보낸 수륙군은 주로 장마와 역병, 폭풍 때문에 무너졌다. 612년에는 그의 아들 양제가 전근대 역사에서 손꼽히는 대군을 몸소 이끌고 왔다. 요동성에서 몇 달을 허비한 양제는 30만 5천 명의 별동대를 평양으로 보냈으나, 이 군대는 살수에서 거의 전멸했다. 양제는 613년에 다시 왔지만 후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포위를 풀어야 했고, 614년의 네 번째 원정은 고구려의 형식적인 항복으로 체면만 세운 채 끝났다.
이 전쟁의 의미는 전쟁터 밖에서 더 컸다. 수나라는 국력을 너무 많이 소모해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건국 37년 만인 618년에 무너졌다. 한편 고구려는 이 승리로 반세기 가까이 독립을 더 지켰고, 을지문덕은 한국인의 역사 기억에서 가장 이름난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쉬움
두 강국의 만남: 고구려와 수
600년 무렵 고구려는 이미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나라였다. 압록강 중류 일대에서 일어나 요동과 만주 상당 부분, 한반도 북부를 다스렸고, 427년부터는 평양에 도읍했다.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였다. 산 위에 돌로 쌓은 성은 대개 안에 물이 있어 병사와 농민이 곡식을 가지고 들어가 버틸 수 있었다. 고구려는 말갈·거란 같은 이웃 종족에게도 영향력을 미쳤다.
반면 중국은 4세기 초부터 남북의 여러 왕조로 갈라져 있었다. 581년 북쪽에서 양견이 권력을 잡아 수나라를 세웠고, 589년에는 남쪽의 진(陳)을 멸망시켜 중국을 다시 통일했다. 그가 문제(文帝)이다. 문제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세웠고, 아들 양광, 곧 양제(煬帝)는 부유한 남쪽과 북쪽을 잇는 대운하를 완성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5세기 중반 이래 동아시아는 중국의 남북조, 몽골 고원의 유연과 그 뒤를 이은 돌궐, 서쪽의 토욕혼, 동북아시아의 고구려 등 여러 강국이 저마다의 세력권을 가진 다원적 세계였다. 중국 전체를 다스리는 하나의 제국이 나타나자 이 균형이 흔들렸다. 수는 고구려가 신하의 나라로 복속하기를 바랐고, 고구려는 독자적인 세력권을 지키려 했다.
중급
전쟁은 왜 일어났나
고구려는 이전 중국 왕조들에게 그랬듯 수나라에도 사신과 조공을 보냈지만 관계는 팽팽했다. 『수서』에 따르면 진(陳)이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평원왕은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훈련하고 곡식을 쌓았다'. 597년 수 문제는 평원왕에게 거친 국서를 보냈다. 번신(藩臣)을 자처하면서도 정성이 부족하고, 말갈을 몰아붙이고 거란이 수에 오지 못하게 막으며, 몰래 재물로 수의 장인과 쇠뇌 기술자를 빼돌렸다는 비난이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598년에 찾아왔다. 새로 즉위한 영양왕이 말갈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하 서쪽의 요서를 공격했으나 영주(지금의 차오양) 총관 위충에게 격퇴되었다. 한국 학계에서는 이를 수의 전진기지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격분한 문제는 영양왕의 관작을 빼앗고 침공을 명했다.
이후의 전쟁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었다. 607년 양제가 돌궐의 계민가한 막사를 찾았을 때 그곳에 고구려 사신이 와 있었다. 고구려와 돌궐이 손잡을 가능성은 수 조정을 긴장시켰다. 신하 배구는 고구려 땅이 본래 한나라의 군현이었으니 '딴 나라'로 남겨 둘 수 없다고 주장했다. 양제는 사신에게, 왕이 직접 입조하지 않으면 계민가한을 거느리고 '그 땅을 순행하겠다'고 전하게 했다. 영양왕은 오지 않았고, 611년 전쟁 준비가 시작되었다.
중급
제1차 전쟁(598)
598년 음력 2월, 문제는 막내아들 한왕 양량과 왕세적을 원수로 삼아 수륙군 30만을 맡겼다. 육군은 초여름 지금의 산해관 부근인 임유관을 나섰다. 그런데 장마가 일찍 찾아와 길이 진창이 되었고, 군량 수송이 끊겨 식량이 떨어졌으며, 전염병까지 진영을 휩쓸었다.
주라후가 이끈 수군은 산둥반도의 동래에서 평양을 향해 떠났으나 폭풍을 만나 배가 많이 가라앉았다. 한국의 일부 서술은 고구려군이 수의 함대와 보급선을 쳤다고 덧붙이지만, 초기 사료는 날씨와 역병을 주된 원인으로 적는다. 9월에 군대가 돌아왔을 때 『수서』는 '죽은 자가 열에 여덟아홉'이었다고 전한다.
그 뒤 영양왕은 사신을 보내 스스로 '요동 분토신(糞土臣)'이라 낮추어 사죄했고, 문제는 전쟁을 그만두었다. 백제가 길잡이가 되겠다며 다시 치기를 청했지만, 문제는 고구려를 이미 용서했다며 거절했다. 이 사실을 안 고구려는 백제의 국경을 침략했다. 두 나라 모두 긴 전쟁은 피했으나 근본 문제는 그대로 남았다.
중급
612년: 당대 최대의 원정군
양제의 준비는 엄청났다. 병력과 배, 무기와 곡식이 지금의 베이징에 치소가 있던 탁군으로 모였고, 새로 뚫은 대운하로 물자를 북쪽으로 실어 날랐다. 『수서』에 따르면 612년 정월에 집결한 군대는 전투병만 113만 3800명으로 '200만이라 일컬었고', 군량을 나르는 인원은 그 두 배였다. 군대는 좌우 12군씩 24군과 황제의 친위군으로 나뉘었다. 하루에 한 군씩 40리 간격으로 출발해 모두 떠나는 데 40일이 걸렸고,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고 한다.
고구려는 이 대군과 들판에서 맞서지 않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고구려의 전략을 이렇게 요약한다. 먼저 강에서 도하를 막고, 여의치 않으면 성으로 들어가 들판의 물자를 불태운 뒤 주요 성을 지키며, 소규모 부대로 적을 교란하고 긴 보급선을 끊는 것이었다. 음력 3월 수군은 요하에 이르렀다. 처음 놓은 부교 세 줄은 길이가 모자라 동쪽 기슭에 한 길(약 3미터) 남짓 미치지 못했고, 물에 뛰어든 수군은 높은 곳의 고구려군에게 막혀 많이 죽었다. 장수 맥철장도 전사했다. 이틀 뒤 다리를 이어 건넌 수군은 동안에서 고구려군을 깨뜨리고 요동성을 포위했다.
한나라의 양평성이었던 요동성(지금의 랴오양 부근)은 함락되지 않았다. 양제는 장수들에게 모든 일을 자신에게 아뢰고 항복하면 받아들이라고 명해 두었다. 성이 함락될 듯하면 성안에서 항복을 청했고, 수의 장수들이 황제에게 사람을 보내 회답을 기다리는 사이 성은 다시 방비를 갖추었다. 6월에는 양제가 직접 요동성에 와서 장수들을 꾸짖었지만, 다른 고구려 성들도 굳게 버텼다.
그사이 수의 장수 내호아는 강회 지역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패수, 곧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평양성 60리 앞에서 첫 싸움에 이긴 그는 부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정예 4만여 명으로 곧장 외성에 들어갔다. 병사들이 약탈에 빠진 사이 영양왕의 아우 고건무가 이끄는 고구려군이 빈 절에 숨어 있다가 기습했다. 중국 사서는 이때 결사대 500명을 모았다고 적는다. 배로 돌아간 수군은 수천 명뿐이었고, 수군 함대는 바닷가로 물러나 머물렀다.
중급
을지문덕과 살수 대첩
성을 빼앗지 못하자 양제는 속전속결을 택했다. 우중문·우문술이 이끄는 9군 30만 5천 명이 요동성을 지나쳐 평양으로 진격하고 수군과 합류하는 계획이었다. 느린 보급 행렬을 없애려고 병사마다 100일치 식량에 갑옷·무기·장막까지 3섬이 넘는 짐을 지게 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다. 식량을 버리면 목을 베겠다는 명령에 병사들은 장막 아래에 몰래 곡식을 묻었고, 절반쯤 갔을 때 이미 식량이 바닥나고 있었다.
9군이 압록강 서쪽에 모이자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항복하러 적진에 들어가 적의 형편을 직접 살폈다. 우중문은 그를 사로잡으라는 밀지를 받았으나, 위무사 유사룡의 만류로 돌려보냈다. 곧 후회한 우중문이 다시 오라고 사람을 보냈지만, 을지문덕은 압록강을 건너 돌아가 버렸다.
을지문덕은 수군의 굶주림을 역이용했다. 싸울 때마다 물러나기를 거듭해 우문술이 '하루에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겼다'고 할 정도였고, 결국 수군은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밖 산에 진을 쳤다. 그러나 병사들은 지쳤고 평양성은 험하고 튼튼했으며, 수군 함대도 오지 않았다.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유명한 시를 보냈다. '신묘한 계책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기묘한 헤아림은 땅의 이치를 꿰뚫었네. 싸워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치기를 바라노라.' 그리고 물러나면 왕을 모시고 황제에게 입조하겠다고 다시 거짓 항복을 청했다.
수군은 이를 핑계로 방진을 이루어 물러났고, 고구려군은 사방에서 공격했다. 음력 7월 24일(그레고리력으로 612년 8월 말), 수군이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뒤에서 후군을 들이쳤다. 장수 신세웅이 전사하자 9군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살아남은 자들은 하루 낮 하룻밤 만에 450리를 달려 압록강에 이르렀다. 요하를 건넜던 30만 5천 명 가운데 요동성으로 돌아온 자는 2700명뿐이었다. 살수는 흔히 지금의 청천강으로 본다. 양제는 이튿날 총퇴각을 명했고, 원정 전체의 소득은 요하 서쪽의 작은 고구려 거점 무려라를 빼앗은 것뿐이었다.
중급
613·614년: 다시 요동성으로, 반란, 그리고 강화
양제는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613년 다시 군사를 모으고 '효과(驍果)'라는 지원병을 뽑아, 음력 4월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공격했다. 이번에는 장수들이 형편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도록 허락했다. 수군은 비루·당차·운제·지도로 20여 일 동안 밤낮없이 공격했고, 흙을 채운 베주머니 100여만 개로 성 높이만 한 길을 쌓고 여덟 바퀴 달린 누거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며 활을 쏘려 했다.
총공격을 앞두고, 죽은 재상 양소의 아들로 여양에서 군량 수송을 맡던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켜 동도 낙양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이 왔다. 고관의 자제 다수가 그에게 가담했다. 양현감과 가까웠던 병부시랑 곡사정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양제는 산더미 같은 장비와 진영을 그대로 둔 채 밤에 몰래 철수했다. 고구려군은 계략일까 의심해 하루 동안 성안에 머물다가 뒤를 쫓아, 요하 부근에서 후군을 쳐 수천 명을 죽였다. 양현감은 두 달 뒤 패해 죽었다.
614년 양제는 세 번째 원정을 명했지만, 이미 중국 곳곳에서 반란이 번져 징발된 군사 상당수가 집결지에 이르지 못했다. 양제는 7월에 요하 서쪽의 회원진에 이르렀고, 내호아의 수군은 요동반도의 비사성에서 고구려군을 깨뜨리고 평양으로 나아가려 했다. 고구려도 지쳐 있었다. 영양왕은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망명자 곡사정을 돌려보냈다. 양제는 '크게 기뻐하며' 이를 받아들이고 철군했다. 도성에 돌아간 양제는 영양왕에게 입조를 요구했지만 왕은 끝내 오지 않았다. 다시 원정을 명했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중급
결과: 수의 멸망과 고구려-당 전쟁
수나라에게 이 전쟁은 재앙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병사와 인부로 끌려갔고, 『수서』는 612년 가뭄과 역병이 원정 물자를 댄 '산동 지방에서 특히 심했다'고 적는다. 613년부터 도적과 반란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늘었다. 615년에는 돌궐이 안문에서 양제를 포위했다. 양제는 남쪽의 강도(양저우)로 옮겨 갔다가 618년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이 이끈 친위군에게 살해되었다. 같은 해 당국공 이연이 당나라를 세웠다. 학자들은 고구려 원정의 실패를 수나라 멸망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본다.
고구려는 승리로 독립과 요동을 지켰지만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었다. 새로 즉위한 영류왕 고건무, 곧 평양에서 내호아를 무찌른 그 왕자는 초기 당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 했다. 622년 두 나라는 포로를 교환했고 고구려는 중국인 포로 1만여 명을 돌려보냈다. 631년 당은 관리를 보내 수나라 병사의 유골을 묻고, 고구려가 전사자의 시신으로 쌓았던 경관(京觀)을 헐었다.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당 태종 역시 고구려의 복속을 원했고, 642년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인 뒤 관계는 무너졌다. 태종은 645년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안시성에서 막혔고, 이후 거듭된 전쟁 끝에 668년 당과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수와의 전쟁은 동북아시아를 둘러싼 70년 싸움의 첫 번째 장이었던 셈이다.
중급
기억: 민족의 영웅, 제국의 재앙
한국에서는 천 년 넘게 이 승리를 기려 왔다.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는 몇 안 되는 고구려 인물 열전 가운데 하나를 을지문덕에게 할애하고 승리의 공을 그에게 돌렸다. 고려 시대 평양 부근에 그의 사당이 세워졌고, 조선 숙종도 1680년 사당을 짓게 했다. 우중문에게 보낸 짧은 시는 한문으로 쓰였지만 한국인이 지은 가장 오래된 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나라가 일본에 주권을 빼앗겨 가던 1908년, 신채호는 『을지문덕전』을 펴내 그를 민족정신의 본보기로 내세웠다. 이후 을지문덕은 한국 민족사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서울의 을지로, 을지무공훈장, 해군 구축함 을지문덕함이 그의 이름을 땄다.
중국 전통은 이 전쟁을 다르게 기억한다. 양제의 교만과 폭정을 보여 주는 상징이다. 당나라 때 편찬된 『수서』는 양제가 '세 번 요동에 거둥하는' 동안 백성이 '목숨을 견디지 못했다'고 평하고, '전쟁은 불과 같아서 거두지 않으면 스스로를 태운다'는 옛말을 인용했다. 근래에는 고구려사가 한국사인가 중국사인가를 두고 한중 학계 사이에 논쟁도 벌어졌다. 국제 학계는 대체로 고구려를 한국 삼국의 하나로 보면서, 그 영역이 지금은 상당 부분 중국 땅인 다민족 공간이었다는 점도 함께 인정한다.
심화
사료와 그 한계
이 전쟁에 관한 정보는 거의 모두 중국 왕조의 사서에서 나온다. 『수서』는 630년대 당나라에서 위징 등이 편찬했다. 본기는 원정을 날짜별로 적고, 내호아·주라후·우문술·설세웅 같은 장수의 열전이 세부를 보탠다. 동이전에는 고구려에 관한 기록이 있다. 1084년 사마광이 완성한 『자치통감』은 이 자료들을 하나의 서사로 엮으면서 때로 기록 사이의 모순을 지적했다.
고구려가 남긴 서사는 전하지 않는다. 1145년 고려에서 편찬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이 시기에 대해 중국 사서, 특히 『자치통감』을 거의 그대로 옮기고 시점만 '우리 군사'로 바꾼 곳이 많다. 598년 요서 공격을 강이식 장군이 이끌었다는 이야기처럼 한국 전승에만 보이는 내용은 훨씬 뒤의 문헌에 나오며 초기 사료로 확인할 수 없다.
중국 본기의 날짜는 음력 달과 간지 날짜로 적혀 있어 역사 역일표로 환산할 수 있다. 예컨대 '7월 임인'으로 적힌 살수 전투는 율리우스력으로 612년 8월 26일, 역산한 그레고리력으로 8월 29일이다. 본문이 잘못 전해진 곳도 있다. 『수서』는 요하 도하 날짜를 그달에 있을 수 없는 간지로 적었는데, 사마광이 이미 『자치통감고이』에서 이를 지적했고 현대의 교감은 4월의 다른 날로 본다. 연도조차 어긋나기도 한다. 『수서』 고구려전은 첫 대원정을 명령이 내려진 대업 7년(611)에 두었지만, 본기는 실제 전투를 대업 8년(612)에 적었다.
가장 큰 문제는 숫자이다. 612년 전투병 113만 3800명이라는 숫자는 수나라 기록에서 나왔지만, 그만한 군대를 기록대로 모으고 먹이고 움직일 수 있었는지 의심하는 현대 학자들도 있다. 30만 5천 명 가운데 2700명만 돌아왔다는 유명한 숫자도 과장이거나 특정 부대만을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숫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이 원정의 규모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 주는 증거로서 의미가 있다.
심화
역사학의 쟁점
수는 왜 실패했나? 사료와 현대 연구가 드는 요인은 여럿이다. 장수들이 모든 결정을 황제에게 아뢰게 한 양제의 명령(사료 스스로 요동성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봄 해빙과 가을장마 사이의 짧은 원정 기간에 먼 거리까지 대군을 먹여야 했던 보급 문제, 고구려 성곽 방어망의 견고함, 그리고 우중문과 우문술의 다툼에서 보이는 지휘부의 분열이다. 데이비드 그라프 같은 군사사가는 이 원정을 중세 중국의 대규모 전쟁 발전 속에 놓고, 지휘 능력 못지않게 보급을 중시한다.
이 전쟁의 본질은 무엇이었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을 쓴 노태돈 등 한국 학자들은 고구려가 지키려던 다원적 동아시아 질서와 수가 세우려던 중국 중심의 일원적 질서가 충돌한 전쟁으로 해석한다. 중국 사서는 이를 군주가 불손한 번신을 벌하는 언어로 적는다. 두 시각은 단순히 정반대가 아니다. 둘 다 고구려가 수의 우위를 받아들일 것인가가 핵심 문제였다는 데는 일치한다.
살수는 어디이며, 어떻게 이겼나? 대부분의 학자는 사료의 거리와 들어맞는 청천강을 살수로 보지만 다른 강을 드는 견해도 있다. 을지문덕이 강을 막았다가 수군이 건널 때 둑을 터뜨렸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신채호와 현대 대중매체를 통해 퍼진 것으로 초기 사료에는 둑이나 수공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초기 사료는 강을 반쯤 건넌 군대의 후미를 공격했다고만 적는다.
을지문덕은 누구였나? 『삼국사기』도 그의 가계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조선 후기의 『해동명장전』은 평양 석다산 사람이라 하지만 믿기 어렵다. '을지'가 성인지 관등 같은 칭호인지를 두고 논의가 있고, 선비족의 성 울지(尉遲)와 같다고 보아 귀화인의 후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뛰어난 한문 실력을 근거로 옛 낙랑·대방 지역에서 새로 성장한 귀족 세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결론은 아직 나지 않았다.
핵심 개념
- 성곽 방어
- 고구려는 대군과 정면 대결을 피하고 사람과 곡식을 요동성 같은 산성·성곽으로 옮겨 버티면서, 소부대로 적의 보급선을 교란해 침공군을 지치게 했다.
- 보급
-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수십만 병력을 먹이는 일이 수군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30만 5천의 별동대는 평양에 닿기도 전에 식량이 떨어졌다.
- 거짓 퇴각
- 을지문덕은 거듭 지는 척 물러나 지친 수군을 고구려 깊숙이 끌어들인 뒤, 돌아가는 길에 결정타를 가했다.
- 중앙 집중 지휘
- 모든 결정을 황제에게 아뢰라는 양제의 명령 때문에 수의 장수들이 명령을 기다리는 사이 요동성 수비군은 성벽을 고칠 수 있었다.
- 조공 질서
- 수는 이웃 군주가 황제를 종주로 인정하기를 요구했다. 신하의 자리를 거부한 고구려의 태도가 전쟁의 핵심이었다.
- 과도한 팽창과 붕괴
- 거대한 토목 사업에 거듭된 원정 비용이 더해져 반란이 일어났고, 수나라는 마지막 침공 4년 만에 무너졌다.
- 엇갈린 기억
- 같은 사건이 한국에서는 민족의 영웅적 승리로, 중국 전통에서는 황제의 교만이 부른 교훈으로 기억된다.
기록
- 589년 — 수가 진(陳)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다.
- 597년 — 수 문제가 평원왕에게 불충을 꾸짖는 국서를 보내다.
- 598년 — 고구려가 요서를 공격하다. 수의 수륙군 30만이 침공했으나 장마·역병·폭풍으로 실패하다.
- 607년 — 양제가 돌궐 계민가한의 막사에서 고구려 사신을 보고 영양왕의 입조를 요구하다.
- 611년 — 양제가 원정을 명하고 탁군에 군사를 모으다.
- 612년 — 대침공. 요하 도하전, 요동성 전투, 평양성 수군 격퇴, 살수 대첩.
- 613년 — 두 번째 요동성 공격. 양현감의 난으로 양제가 철군하다.
- 614년 — 세 번째 원정. 고구려가 형식적으로 항복하고 곡사정을 돌려보내자 수가 철군하다.
- 618년 — 양제가 강도에서 살해되고 당나라가 세워지다.
- 631년 — 당이 고구려 땅의 수나라 병사 유골을 묻고 경관을 헐다.
- 645년 —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안시성에서 막히다.
- 668년 — 당과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다.
용어 풀이
- 고구려
- 전통적으로 기원전 37년~668년에 한반도 북부와 만주 상당 부분을 다스린 나라. 한국 삼국의 하나.
- 수나라
- 589년 중국을 다시 통일한 왕조(581~618). 문제와 양제가 다스렸다.
- 요동
-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요하 동쪽 지역. 또 그곳에 있던 고구려의 핵심 거점 요동성(지금의 랴오양 부근)을 가리키기도 한다.
- 살수
- 612년 수의 별동대가 무너진 강. 흔히 북한의 청천강으로 본다.
- 말갈
- 만주의 여러 종족(중국어 모허). 일부는 고구려와 함께 싸웠다.
- 리(里)
- 중국의 거리 단위. 수나라 때 대략 0.5킬로미터.
- 간지 날짜
- 60일을 주기로 되풀이되는 날짜 이름. 중국 사서는 음력 달 안의 날을 간지로 적었다.
- 경관(京觀)
- 적의 시신을 쌓아 만든 전승 기념물. 고구려가 수와의 전쟁 뒤 쌓았고 631년 당이 헐었다.
- 효과(驍果)
- 양제가 613년 원정을 위해 모집한 날랜 지원병.
묻고 답하기
수나라 군사가 정말 100만 명이 넘었나요?
『수서』는 전투병 113만 3800명, 군량 수송 인원은 그 두 배였다고 적어요. 실제로는 그보다 적었으리라 보는 학자가 많지만,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군대였다는 데는 모두 동의해요.
을지문덕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612년 수의 별동대를 물리친 고구려 장군이에요. 전투 전후의 생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삼국사기』를 엮은 사람조차 그의 가계를 알 수 없다고 했어요.
을지문덕이 둑을 터뜨려 수군을 물에 빠뜨렸나요?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초기 사료에는 둑이 나오지 않아요. 초기 기록은 수군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뒤를 쳤다고만 적어요.
수나라는 왜 요동성을 빼앗지 못했나요?
성이 튼튼하고 물자가 넉넉했으며, 612년에는 수의 장수들이 황제의 허락 없이 항복을 받을 수 없어 그사이 수비군이 성벽을 고쳤어요. 613년에는 중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총공격 직전에 물러나야 했어요.
그럼 고구려가 이긴 건가요?
고구려는 모든 침공을 막아 독립을 지켰어요. 614년 형식적으로 항복하고 망명자를 돌려보내 수가 체면을 세워 물러나게 했지만, 영양왕은 요구받은 입조를 끝내 하지 않았어요.
날짜는 얼마나 믿을 수 있나요?
중국 본기는 음력 달과 간지로 날짜를 적어 역일표로 양력 날짜를 계산할 수 있어요. 다만 몇몇 기록은 글자가 잘못 전해졌고, 달이나 계절까지만 알 수 있는 사건도 있어요.
『삼국사기』의 기록은 중국 사서와 어떤 관계인가요?
이 시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자치통감』과 『수서』를 대체로 옮기면서 시점만 고구려 쪽으로 바꾸었어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건에 대해 독립된 한국 측 증언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Goguryeo–Sui War. Wikipedia(영어)
- Battle of Salsu. Wikipedia(영어)
- Ŭlchi Mundŏk. Wikipedia(영어)
- 노태돈, 여수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살수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을지문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부식, 三國史記 卷20 高句麗本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영류왕). 위키문헌(중국어)
- 위징 등, 隋書 卷4 煬帝紀下 (『수서』 양제기). 위키문헌(중국어)
- 위징 등, 隋書 卷81 東夷傳 (『수서』 동이전: 고구려·백제·신라·말갈). 위키문헌(중국어)
- David A. Graff, Medieval Chinese Warfare, 300–900. Routledge, 2002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