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후한 말·삼국 시대의 전쟁

漢末三國戰爭 · 三國

184–280년 · 적벽, 장강 (후한 말 · 위·촉·오)

한 문장으로

184년부터 280년까지 중국의 한 제국은 반란과 내전 속에 무너져 위·촉·오 세 나라로 갈라졌다가 진(晉)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이 한 세기의 전쟁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역사가 되었다.

후한 말·삼국 시대의 전쟁
이미지: Ian Kiu · CC BY 3.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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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부터 약 1,800년 전 중국은 한나라 황제가 다스렸어요. 나라는 크고 오래되었지만 황제의 힘은 약해져 있었어요. 궁궐 안에서는 높은 사람들끼리 싸우고, 백성들은 홍수와 굶주림에 시달렸지요. 그러다 184년에 큰 반란이 일어났어요. 반란군이 머리에 누런 두건을 둘러서 ‘황건적’이라고 불러요.

나라의 군대가 반란을 막아 냈지만, 싸움에 나섰던 장군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저마다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자기 땅을 다스렸지요. 동네를 차지한 골목대장들처럼요. 이런 장군들을 ‘군벌’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오랫동안 서로 싸웠어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셋이었어요. 조조는 황제를 곁에 두고 넓고 풍요로운 북쪽을 차지했어요. 황실의 먼 친척이라고 한 유비는 서쪽 산속에 나라를 세웠어요. 손권은 동남쪽의 강과 호수를 다스렸어요. 220년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자리에서 물러난 뒤, 세 집안은 각자 황제를 세웠어요. 이 세 나라가 바로 위·촉·오, ‘삼국’이에요.

가장 유명한 싸움은 208년 장강(양쯔강)의 적벽에서 벌어졌어요. 손권과 유비의 배들이 조조의 함대에 불을 질러, 조조가 남쪽까지 차지하지 못하게 막았지요. 그 뒤 촉나라의 지혜로운 재상 제갈량이 여러 번 위나라를 공격했지만 끝내 이기지는 못했어요.

결국 세 나라 중 어느 나라도 이기지 못했어요. 위나라의 장군 집안인 사마씨가 위나라를 차지하고, 촉을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세운 뒤 280년에 오나라까지 무너뜨렸어요. 중국은 다시 하나가 되었지요. 훗날 『삼국지연의』라는 긴 소설이 이 전쟁을 모험 이야기로 만들었고, 중국·한국·일본·베트남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이야기를 읽고, 보고, 게임으로 즐겨요. 하지만 소설에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도 많이 들어 있답니다.

한눈에 보기

시기
184년(황건적의 난)부터 280년(진의 오 정복)까지. 좁은 의미의 삼국 시대는 220~280년
장소
한 제국의 영역 — 화북과 중원, 쓰촨, 장강 유역과 남방. 요동·윈난·북방 초원 경계까지 원정이 이어졌다
주요 세력
조조와 그 후계(조위, 220~266), 유비와 그 후계(촉한, 221~263), 손권과 그 후계(동오, 229~280), 그리고 마지막 승자인 사마씨의 진(晉)
주요 전투
관도(200), 적벽(208), 동관(211), 한중(217~219), 번성(219), 이릉·효정(221~222), 제갈량의 북벌(228~234), 촉한 정복(263), 오 정복(279~280)
인명 피해
호적상 인구가 약 5,650만 명(150년대 한 호구 조사)에서 약 1,620만 명(280년 진 호구 조사)으로 줄었다. 얼마만큼이 죽음이고 얼마만큼이 호적 이탈인지는 논쟁이 있다
주요 사료
진수의 『삼국지』(3세기 말)와 배송지 주(429), 『후한서』, 사마광의 『자치통감』(1084)
대표적 재구성
나관중 작으로 전하는 14세기 소설 『삼국지연의』 — ‘칠분은 사실, 삼분은 허구’

날짜로 따라가는 전쟁

재생을 누르면 지도에서 전쟁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표시는 전투·사건, 화살표는 기록에 남은 진군로입니다.

184년 2월 1일
1/11 · 황건적의 난
한 조정·조조 → 조위 → 진유비 → 촉한손씨 → 동오황건적동탁 세력기타 군벌(원소·여포·유표·마초·유장·공손연 등)

단계

  1. 동방 여러 주에서 일어난 종교적 민중 봉기는 한 해 안에 진압되었지만, 지방은 무장했고 조정은 약해졌다.

    Yellow Turban Rebellion (English Wikipedia)黃巾之亂 (Chinese Wikipedia)sxtwl — Chinese calendar library (Shouxing tianwenli) used for lunar-date conversion

최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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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삼국 시대의 전쟁이란?

삼국 시대의 전쟁은 184년 황건적의 난부터 280년 통일까지, 중국에서 거의 백 년 동안 이어진 싸움을 가리킨다. 이 시기에 약 4백 년 동안 중국을 다스린 한 왕조가 통제력을 잃었고, 나라는 장군과 지방 세력가들이 나누어 가진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다.

수많은 군벌 가운데 세 나라가 살아남았다. 위는 옛 도읍 낙양을 품은 북방을, 촉(촉한)은 성도를 도읍으로 한 서쪽의 쓰촨을, 오는 오늘날의 난징인 건업을 도읍으로 장강 중·하류를 차지했다. 약 60년 동안 세 명의 황제가 동시에 존재했고, 저마다 자신이 온 천하의 정당한 주인이라고 주장했다.

역사가들은 마지막 한 황제가 제위를 물려준 220년부터 280년까지를 좁은 의미의 ‘삼국 시대’로 본다. 하지만 누구나 아는 이야기는 그보다 앞서, 한의 붕괴와 조조·유비·손권의 등장, 관도와 적벽의 큰 싸움에서 시작된다. 이 글은 그 전 과정을 따라간다.

[1][2]

쉬움

무너지는 제국 — 한은 왜 무너졌나

180년대의 한 조정은 약했다. 어린 황제가 잇달아 즉위하면서 실권은 외척(황후의 친정)과 환관(궁궐 안에서 일하던 사람들) 사이를 오갔고, 이에 반대한 관리들은 숙청되었다. 한편 홍수와 전염병, 무거운 세금에 시달린 농민들은 가난에 빠지거나 대지주의 소작인이 되었다.

184년 장각이 이끄는 태평도라는 종교 집단이 동방 여러 주에서 일제히 봉기했다. 반란군은 ‘누런 하늘’이 낡은 하늘을 대신할 것이라고 외쳤다. 조정은 군대를 일으켜 그해 안에 주력을 진압했지만, 그 과정에서 지방의 목·태수와 장군들이 자기 군대를 키우도록 허락했다.

189년 영제가 죽자 대장군 하진이 환관을 없애려다 오히려 살해되었다. 이 혼란을 틈타 변경의 장수 동탁이 낙양에 들어와 어린 황제를 폐하고 어린 유협(헌제)을 세웠다. 동방의 제후들이 동탁에 맞서 연합군을 일으키자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고 조정을 장안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황제는 서로 차지하려는 전리품이 되었고, 제국은 가장 강한 군대를 가진 자의 것이 되었다.

[2][1]

쉬움

주요 인물

조조(155~220)는 현실적이고 강인한 장군이자 뛰어난 시인이었다. 196년 헌제를 허현으로 맞아들여 황제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최대의 경쟁자 원소를 꺾고 화북을 통일해 위왕이 되었지만, 스스로 황제가 되지는 않았다. 오늘날 전하는 『손자병법』 주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도 조조가 쓴 것이다.

유비(161~223)는 평생 대부분을 패배 속에서 보냈다. 이 군벌 저 군벌에게 몸을 의탁했고, 차지한 근거지마다 쫓겨났다. 그러나 의리로 이름이 높아 관우·장비·조운 같은 용장과 뛰어난 참모 제갈량이 그를 따랐다. 210년대에 마침내 쓰촨과 한중을 얻었고, 221년 한 왕실을 잇는다며 황제에 올랐다.

손권(182~252)은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에게서 장강 이남의 땅을 물려받았다. 신중하고 유연한 군주였던 그는 나라를 지키는 데 유리하다면 유비와 손잡고 조조에 맞서기도 하고, 조조와 손잡고 유비를 치기도 했다. 229년 오의 황제에 올랐다.

제갈량(181~234)은 유비가 죽은 뒤 승상으로서 그 아들 유선을 대신해 촉을 이끌었다. 유능한 행정가이자 신중한 지휘관이었다. 후대 전설 속에서는 거의 신통력을 지닌 천재가 되었지만, 역사 속 제갈량이 존경받는 까닭은 무엇보다 청렴과 성실함에 있다.

[1][4][10]

중급

황건적에서 관도까지(184~207)

190년대는 군벌의 시대였다. 명문가 출신 원소는 계교에서, 그리고 마침내 역경(199)에서 공손찬을 꺾고 하북을 장악했다. 회수 일대를 차지한 원술은 197년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가 고립되었다. 손견은 191년 형주의 유표와 싸우다 전사했고, 아들 손책이 장강 하류를 평정했다. 동탁은 192년 장안에서 암살되었고, 그의 부하들이 도성을 두고 다투는 사이 헌제는 동쪽으로 탈출했다.

조조는 연주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웠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193~194년 서주를 침공했는데, 사료는 이때 민간인 학살을 숨김없이 기록한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부하들이 여포를 연주로 끌어들여 조조는 모든 것을 잃을 뻔했다. 조조는 이를 극복하고 196년 헌제를 허현으로 모셨으며, 둔전을 두어 군량을 마련하고, 198~199년 하비에서 여포를 멸했다.

결정적 대결은 200년 황하 평원의 관도에서 벌어졌다. 원소의 군대가 훨씬 많았고, 조조는 군량이 떨어져 가는 가운데 몇 달 동안 방어선을 지켰다. 원소의 참모 허유가 넘어오자 조조는 밤에 직접 군을 이끌고 오소의 군량 창고를 불태웠고, 원소군은 무너졌다. 원소가 202년 죽자 조조는 아들들의 다툼을 이용해 204년 그들의 근거지 업을 빼앗았고, 207년에는 산맥을 넘어 동맹 세력인 오환을 백랑산에서 격파했다. 208년, 화북 전체가 조조의 것이 되었다.

[2][1][10]

중급

적벽 대전 — 역사와 소설

208년 가을 조조가 형주로 남하했다. 유표가 죽고 그 아들은 싸우지 않고 항복했으며, 조조의 기병은 피난하던 유비의 행렬을 장판에서 따라잡았다. 하구로 달아난 유비는 제갈량을 손권에게 보냈다. 조조는 손권에게 80만 대군을 자랑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손권의 장수 주유는 실제 병력을 약 23만 명으로, 그중 상당수를 믿을 수 없는 형주 병사로 보고 항전을 주장했다. 손권이 이를 받아들여, 그해 겨울 약 5만 명의 연합군이 장강에서 조조와 맞섰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첫 교전 뒤 조조는 북쪽 기슭의 오림으로 물러났고, 그곳에 배들을 서로 묶어 두었다. 주유의 부장 황개가 거짓 항복 편지를 보낸 뒤, 마른 갈대와 기름을 실은 배들을 이끌고 조조의 함대로 다가가 불을 붙였다. 불은 강가의 진영까지 번졌다. 조조는 화용도를 따라 늪지대로 퇴각하며 진창과 굶주림, 질병으로 많은 병사를 잃었다. 사료로 보면 조조군은 이미 전염병으로 약해져 있었던 듯하다.

『삼국지연의』는 이 싸움을 천재들의 지략 대결로 바꾸었다. 소설에서 제갈량은 안개 속에 짚단을 두른 배를 보내 화살 10만 개를 ‘빌려’ 오고(초선차전), 제단에서 동남풍을 불러오며, 관우는 옛 은혜 때문에 화용도에서 조조를 놓아준다.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진수의 『삼국지』에는 없다. 소설은 또 역사서가 주유·황개·노숙에게 돌린 공을 제갈량에게 돌린다. 실제 적벽 대전은 손권군이 주도하고 유비군이 함께한 승리였다.

전장의 위치조차 확실하지 않다. 장강 가의 여러 곳이 ‘진짜’ 적벽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학자는 오늘날 우한 남서쪽의 강변을 유력하게 보며, 그곳의 푸치(蒲圻)는 1998년 이름을 츠비(赤壁)시로 바꾸었다. 송나라 시인 소식(소동파)의 「적벽부」로 유명한 황저우의 ‘적벽’은 대체로 실제 전장이 아닌 것으로 본다.

[3][5][8]

중급

세 나라가 모습을 갖추다(208~223)

적벽 이후 연합군은 장강 중류의 부유한 형주를 나누어 가졌다. 유비는 이어 한중의 장로를 막아 달라는 익주(쓰촨)의 유장의 초청을 받아 들어갔다가 도리어 주인을 공격했다. 참모 방통을 잃은 1년 가까운 낙성 포위 끝에 유비는 214년 성도를 차지했다. 한편 조조는 동관에서 마초와 관서 군벌을 꺾고(211) 장로에게서 한중을 빼앗았다(215). 217~219년 유비는 한중을 두고 조조와 싸웠고, 황충이 정군산에서 조조의 장수 하후연을 베자 조조는 물러났다.

219년 형주를 지키던 관우가 번성의 조인을 공격했다. 가을 장마로 한수가 넘쳐 구원군이 물에 잠기고 우금이 항복하자, 조조는 한때 도읍을 옮길 것까지 고민했다. 그러나 관우의 기세를 경계하고 형주 문제로 불만을 품은 손권이 몰래 조조와 손잡았다. 여몽은 상선으로 위장한 배에 병사를 숨겨 강가의 초소를 장악했고 강릉의 항복을 받아 냈다. 퇴로가 끊긴 관우는 219년 말 사로잡혀 처형되었고, 형주는 오의 땅이 되었다.

조조는 220년 초 세상을 떠났다. 그해 아들 조비가 헌제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아 한을 끝내고 위를 세웠다. 유비는 221년 황제에 올라 오에 대한 복수전에 나섰다. 222년 오의 젊은 장수 육손은 여름 내내 버티다가 효정(이릉)에 길게 늘어선 유비의 진영을 불태웠다. 유비는 223년 백제성에서 죽었고, 유선을 대신해 나라를 이끈 제갈량은 오와의 동맹을 되살렸다. 손권은 229년 황제를 칭했다. 이로써 세 나라의 지도가 한 세대 동안 굳어졌다.

[1][2][8]

중급

제갈량의 북벌과 긴 교착(225~262)

촉은 세 나라 가운데 가장 작았다. 제갈량은 225년 먼저 남중(오늘날의 윈난·구이저우) 사람들을 상대로 남쪽 변경을 안정시켰다. 이어 228년부터 234년까지 진령 산맥을 넘어 다섯 차례 북벌에 나섰다. 성공에 가장 가까웠던 것은 첫 번째로, 위의 세 군이 호응했지만 마속이 가정에서 패해 군을 돌려야 했다. 이후에는 진창을 포위하고, 기산 부근에서 위군을 이기기도 했으며, ‘목우’와 ‘유마’라는 운반 도구로 산길에서 군량을 날랐다.

위의 대응은 인내였다. 231년부터 제갈량을 상대한 사마의는 싸움을 피하고 보급 문제가 촉군을 지치게 하도록 두었다. 234년 마지막 북벌 때 두 군대는 위수 가의 오장원에서 몇 달 동안 대치했고, 제갈량은 병으로 진중에서 죽었다. 그 뒤를 이은 강유가 거듭 북벌했지만 얻은 것은 적었고, 동쪽에서 오가 합비를 향해 벌인 공세도 번번이 실패했다.

진짜 변화는 위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사마의는 238년 요동의 공손연을 멸했고, 249년 섭정 조상이 고평릉에 참배하러 간 틈에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250년대 수춘에서 일어난 사마씨 반대 반란들은 진압되었고, 맞서려던 황제 조모는 260년 살해되었다. 260년대의 위는 이름만 남은 사마씨의 나라였다.

[1][4]

중급

끝 — 촉과 오의 멸망(263~280)

263년 사마소가 세 갈래 군대로 촉을 쳤다. 종회의 주력은 한중을 차지했지만 검각의 험한 관문에서 강유에게 막혔다. 그러자 등애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음평에서 길 없는 산악 지대를 넘어 촉의 방어선 뒤로 나왔다. 제갈량의 아들과 손자가 면죽에서 전사했고, 황제 유선은 성도를 들어 항복했다. 264년 초 종회가 강유와 함께 반란을 꾀했으나 두 사람 모두 죽임을 당했다.

266년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이 위의 마지막 황제에게서 제위를 넘겨받아 진을 세웠다. 가혹한 마지막 군주 손호가 다스린 오는 장강에 기대 14년을 더 버텼다. 279년 겨울 진은 전선 전체에서 여섯 갈래 군을 출동시켰고, 왕준이 쓰촨에서 건조한 대함대는 오가 협곡에 쳐 놓은 쇠사슬을 불태워 끊으며 장강을 따라 내려왔다. 280년 봄 왕준이 건업에 이르자 손호가 항복했다.

대가는 엄청났다. 150년대 한의 마지막 호구 조사에는 약 5,650만 명이, 280년 진의 호구 조사에는 약 1,620만 명이 올라 있다. 역사가들은 많은 사람이 대지주 밑으로 들어가거나 남쪽으로 옮겨 가 호적에서 빠졌기 때문에 실제 감소는 이 숫자보다 작았을 것으로 본다. 그렇더라도 전쟁과 기근, 전염병으로 매우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은 분명하다. 사료는 파괴된 도시와 텅 빈 고을, 193~194년 조조의 서주 학살 같은 참상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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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전쟁은 어떻게 치러졌나

모든 원정은 지리의 제약을 받았다. 북방에는 기병이 달리기 좋은 평원과 큰 도시, 그리고 인구 대부분이 있었다. 오의 힘은 장강이었다. 수군이 큰 강을 해자로 만들었고, 유수·동흥·강릉의 요새가 나루를 지켰다. 촉은 산맥 뒤에 자리했다. 진령 산맥을 넘는 몇 안 되는 길과 장강의 협곡은 지키기는 쉬워도 뚫고 나가기는 어려웠다. 위가 남방을 정복하는 데 60년이 걸린 것도, 제갈량과 위의 원정이 번번이 퇴각으로 끝난 것도 이 때문이다.

승패를 가르는 것은 대개 보급이었다. 수만 명의 군대를 먼 곳까지 먹여야 했다. 병사와 이주민이 국가의 땅에서 곡식을 기르는 조조의 둔전은 세 나라 모두가 본뜬 모델이 되었다. 관도·진창·기산·오장원 같은 많은 싸움이 군량 창고와 보급로, 혹은 단순히 식량이 떨어졌다는 사실에 따라 결판났다.

병사는 점점 세습되었다. 군호(軍戶)로 등록된 집안이 대대로 병사를 냈고, 장수들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병을 거느리곤 했다. 세 나라 모두 비한족 집단도 동원했다. 북방의 오환·선비 기병, 오의 산월, 촉의 남중 사람들이 그 예다. 208년 조조가 말한 80만 대군 같은 사료 속 숫자는 실제로 센 수가 아니라 선전이나 어림셈으로 읽어야 한다.

[1][2][3]

중급

동아시아의 기억

삼국 이야기는 수백 년 동안 이야기꾼과 무대를 통해 전해졌다. 1320년대에는 대중용 판본인 『삼국지평화』가 간행되었다. 나관중 작으로 전하는 대작 『삼국지연의』는 1522년 처음 인쇄되었고, 1660년대 모륜·모종강 부자가 오늘날 가장 널리 읽히는 120회본을 만들었다. 소설은 유비와 제갈량을 영웅으로, 조조를 간교한 악역으로 그린다.

관우는 신이 되었다. 충의의 상징으로 숭배되어 중국 곳곳에서 상인·군인·비밀결사가 그를 모셨다. 한국에서는 서울의 관우 사당 동묘(동관왕묘)가 1599~1601년에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명군이 관우 신앙을 들여왔고 명의 요청으로 세운 것인데, 처음에 조선 관리들은 이를 달갑지 않은 부담으로 여겼고, 18세기 영조 때에 이르러서야 국가 제사에 포함되었다.

한국에서는 ‘삼국지’로, 일본에서는 요시카와 에이지 등의 재구성을 거쳐, 이 이야기는 소설·만화·드라마·게임으로 끊임없이 다시 만들어졌다. 한국사와 일본사에서 이 시대가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진수의 『삼국지』 「동이전」에는 고구려·부여·삼한과 왜에 관한 가장 이른 상세한 중국 측 기록이 실려 있으며, 238년 또는 239년 위에 사신을 보낸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도 여기에 나온다.

[5][7][4][9]

심화

사료와 그 문제점

핵심 사료는 진수(233~297)의 『삼국지』다. 진수는 촉의 관리였다가 진에서 이 책을 썼다. 분량이 적고 대부분 열전으로 이루어졌으며, 위서·촉서·오서로 나뉘어 있고 제왕의 본기는 위의 군주에게만 주어졌다. 진수는 위와 오의 앞선 역사서를 참고했고, 그런 관찬 사서가 없던 촉에 대해서는 스스로 자료를 모았다. 429년 배송지가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수십 종의 책을 인용해 주석을 달면서 분량이 약 세 배로 늘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생생한 일화의 상당수와 많은 모순은 진수의 본문이 아니라 배송지의 인용에서 나온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 자료를 다시 엮었다. 5세기의 『후한서』는 한 쪽 이야기를 다루고, 사마광의 『자치통감』(1084년 완성)은 모든 사료를 한 해 한 해의 서술로 엮으면서 서로 다른 기록 가운데 하나를 고르고, 그 이유 일부를 별도의 고증서(『고이』)에 밝혔다. 오늘날 중국·한국·일본·서양의 서술은 대체로 『자치통감』의 연대를 따르며, 영어권에서는 라프 드 크레스피니의 역주와 조조 전기가 표준으로 꼽힌다.

날짜도 쉽지 않은 문제다. 사료는 연호와 음력 달, 때로는 간지로 된 날짜를 적는다. 이를 서력으로 바꾸려면 옛 중국 역법의 표가 필요하고, 세 나라가 늘 같은 역법을 쓴 것도 아니었다. 오는 223년부터 독자 역법을 썼고, 위는 237~239년 잠시 달의 순서를 바꾸었다. 사료끼리 어긋나기도 한다. 예컨대 적벽 대전을 『자치통감』은 10월로, 『삼국지』 「무제기」는 12월로 적기 때문에, 보통 ‘208년 겨울’이라고만 쓴다.

[4][6][10]

심화

논쟁 — 정통성, 숫자, 그리고 소설

가장 오래된 논쟁은 정통성이다. 위에서 제위를 물려받은 진의 신하였던 진수는 위를 한의 정당한 계승자로 다루었다. 4세기의 습착치는 유비가 한 황실의 일족이라는 이유로 촉을 정통으로 보았다. 사마광은 세 나라 중 어느 곳도 천명을 온전히 받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편의상 위의 연호를 썼는데, 성리학자 주희는 이를 비판하며 촉을 정통으로 삼았다. 북방을 잃은 남송의 처지와 맞닿아 있던 주희의 관점은 민간 이야기와 소설에 큰 영향을 주었다.

두 번째 논쟁은 규모에 관한 것이다. 사료의 호구 수와 병력 수는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호적 인구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세금을 내는 사람을 헤아린 것이고, 군대의 숫자는 어림수이거나 부풀려진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인구 붕괴가 얼마나 파국적이었는지, 관도나 적벽의 병력이 실제로 얼마였는지를 두고 논쟁하며, 현대의 추정은 대개 소설 속 숫자보다 훨씬 작다.

마지막으로 역사와 허구의 관계가 있다. 청의 역사가 장학성은 소설을 ‘칠분은 사실, 삼분은 허구’라고 평했다. 현대 학계는 소설을 명대의 가치관이 스며든 문학 작품으로 연구하며, 조조를 악인으로 그리는 소설의 이미지는 20세기 이후 통일자·행정가·시인으로서의 업적을 강조하는 작가와 역사가들에게 도전받아 왔다. 그럼에도 소설의 인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많은 독자에게 ‘삼국지’는 역사 시대이자 하나의 이야기이며, 역사가들은 사료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거듭 설명해야 한다.

[1][5][9]

핵심 개념

중심에서의 붕괴
한은 외적의 침입이 아니라 궁정 암투와 반란, 무장한 지방관들이 중앙 권력을 무너뜨리면서 해체되었다.
황제를 손에 쥐다
헌제를 곁에 둔 조조는 왕조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정통성은 곧 무기였다.
지리와 보급
장강, 진령 산맥, 대군을 먹이는 문제가 세 나라가 오래 버틴 이유를 설명한다.
바뀌는 동맹
오와 촉은 위에 맞서 손잡았다가 형주를 두고 싸우고 다시 손잡았다. 이해관계보다 오래가는 우정은 없었다.
사마씨의 찬탈
전쟁의 최종 승자는 세 건국자의 집안이 아니라 안에서 위를 차지한 장군 집안 사마씨였다.
인간의 대가
학살·기근·전염병과 호적 체계의 붕괴가 겹쳐 중국사에 기록된 가장 큰 인구 감소 가운데 하나가 나타났다.
정사와 연의
소설은 이 시대를 도덕극으로 바꾸었다. 진수의 『삼국지』를 읽으면 더 복잡하고 덜 영웅적인 모습이 보인다.

기록

  1. 184년 — 동방 여러 주에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다.
  2. 189년 — 동탁이 낙양을 장악하고 헌제를 세우다.
  3. 190년 — 관동 연합군이 결성되고,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다.
  4. 196년 — 조조가 헌제를 허현으로 맞아들이다.
  5. 200년 — 조조가 관도에서 원소를 꺾다.
  6. 208년 — 적벽 대전 — 손권·유비 연합군이 장강에서 조조를 물리치다.
  7. 214년 — 유비가 성도와 익주를 차지하다.
  8. 219년 — 유비가 한중을 얻고, 오가 형주를 빼앗아 관우를 처형하다.
  9. 220년 — 조비가 한을 끝내고 위를 세우다.
  10. 222년 — 육손이 효정(이릉)에서 유비를 격파하다.
  11. 234년 — 제갈량이 마지막 북벌 중 오장원에서 죽다.
  12. 249년 — 사마의의 고평릉 정변으로 사마씨가 위의 실권을 잡다.
  13. 263년 — 위가 촉을 정복하고 유선이 항복하다.
  14. 280년 — 진이 오를 정복해 중국을 다시 통일하다.

용어 풀이

한(漢)
기원전 202년부터 기원후 220년까지(짧은 단절 포함) 중국을 다스린 왕조. 25년 이후를 후한(동한)이라 한다.
군벌
중앙 정부에는 이름으로만 복종하면서 스스로 땅과 군대를 거느린 장군이나 지방관.
황건적
184년 누런 두건을 두르고 봉기한 장각의 태평도 신도들.
조위(曹魏)
220년 조비가 화북에 세운 나라. 도읍은 낙양. 266년 진으로 바뀌었다.
촉한(蜀漢)
221년 유비가 쓰촨에 세운 나라. 도읍은 성도. 263년 위에 정복되었다.
동오(東吳)
장강 유역과 남방을 차지한 손씨의 나라. 무창·건업에 도읍했고, 229년 황제국이 되었으며 280년 진에 정복되었다.
진(晉)
266년 사마염이 세운 왕조. 280년 중국을 다시 통일했다.
둔전(屯田)
병사나 이주민이 국가의 땅을 경작해 군량을 대던 제도.
『삼국지』
진수가 쓴 이 시대의 정사. 5세기 배송지의 주석과 함께 읽힌다.
『삼국지연의』
역사서와 민간 전승을 바탕으로 한, 나관중 작으로 전하는 14세기 역사소설.
천명(天命)
하늘이 덕 있는 왕조에게 통치권을 주고 덕을 잃으면 거두어 간다는 전통적 관념.

묻고 답하기

삼국은 정말 ‘왕국’이었나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세 나라의 군주는 모두 온 천하의 황제라고 주장했어요. ‘삼국’은 진수의 역사서 제목에서 나온 전통적인 이름이에요.

누가 이겼나요?

세 건국자의 집안 중 누구도 아니에요. 위를 안에서 차지한 사마씨가 263년 촉을 정복하고, 266년 진을 세운 뒤 280년 오를 정복했어요.

제갈량은 정말 적벽에서 화살을 빌리고 동남풍을 불렀나요?

아니요. 그런 장면은 소설과 그 이전의 전설에서 나온 것이에요. 역사서에서 화공을 계획한 사람은 주유의 부장 황개이고, 제갈량은 주로 손권에게 간 유비의 사신 역할을 했어요.

촉은 훨씬 작은 나라였는데 왜 계속 위를 공격했나요?

촉은 한 왕조의 계승자를 자처했기 때문에 위를 대등한 정통 국가로 인정할 수 없었어요. 전략적으로도 제갈량은 기다리면 더 큰 위의 국력만 커진다고 보았을 수 있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나요?

정확히는 아무도 몰라요. 호적 인구가 약 5,650만 명에서 약 1,620만 명으로 줄었지만, 일부는 죽은 것이 아니라 호적에서 빠진 것이에요. 그래도 인명 피해가 매우 컸다는 데는 역사가들의 의견이 같아요.

진수의 『삼국지』가 한국사와 일본사에 왜 중요한가요?

「동이전」에 고구려·부여·삼한과 왜에 관한 가장 이른 상세한 기록이 실려 있고,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 이야기도 여기에 나오기 때문이에요.

날짜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연도는 대개 확실하고 달도 자주 기록되어 있지만, 사료끼리 어긋나기도 해요. 음력 날짜를 서력으로 바꾸려면 옛 역법 표가 필요하고, 정확한 날짜까지 아는 사건은 일부뿐이에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Three Kingdoms. Wikipedia
  2. End of the Han dynasty. Wikipedia
  3. Battle of Red Cliffs. Wikipedia
  4.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Wikipedia
  5.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Wikipedia
  6. Zizhi Tongjian. Wikipedia
  7. Dongmyo. Wikipedia
  8. 삼국 시대 (중국). 위키백과
  9. 삼국지연의. 위키백과
  10. Rafe de Crespigny, Imperial Warlord: 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Brill, 2010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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