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산이 쩍 갈라진 좁고 구불구불한 틈을 걷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양쪽 바위벽이 너무 높아서 하늘은 가느다란 띠처럼만 보여요. 1킬로미터 넘게 걸으면 틈이 갑자기 열리고, 눈앞에 기둥과 조각상이 달린 거대한 건물이 나타나요. 12층 건물만큼 높지요. 그런데 이 건물은 벽돌로 쌓은 게 아니에요. 절벽 자체를 조각처럼 깎아서 만들었어요. 이것이 ‘보물창고’라는 뜻의 알카즈네로, 페트라에 온 사람들이 가장 먼저 보는 건물이에요.
페트라는 나바테아 사람들의 도시였어요. 2,000여 년 전 이들은 장사꾼이었어요. 낙타 행렬을 이끌고 유향과 몰약처럼 귀한 물건을 날랐지요. 유향과 몰약은 나무에서 나오는 향기로운 진액으로, 사람들이 신전에서 태웠어요. 이 물건들을 아라비아에서 사막을 건너 지중해 바닷가 도시들까지 옮겼어요. 페트라는 쉬어 가는 정거장이자 보물 창고 같은 곳이었어요.
페트라는 1년에 비가 몇 번밖에 오지 않는 아주 메마른 곳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수천 명이 살 수 있었을까요? 나바테아 사람들은 물을 다루는 솜씨가 아주 뛰어났어요. 바위에 물길을 파고, 댐을 쌓고, ‘저수조’라는 커다란 땅속 물탱크를 만들어 빗물을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모았어요. 갑자기 몰려오는 홍수가 도시를 쓸어 가지 않도록 막기도 했지요.
나중에 로마가 페트라를 차지했어요. 지진이 건물을 무너뜨리고, 무역길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떠났어요. 수백 년 동안 그 길을 아는 사람은 이 지역의 베두인 가족들뿐이었어요. 1812년, 스위스 여행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현지 여행자처럼 옷을 입고 아랍어로 말하며 페트라에 들어갔고, 세상에 이곳을 알렸어요.
지금 페트라는 세계유산이고, 많은 해에는 100만 명쯤이 찾아와요. 덕분에 일자리가 생기지만, 사람들의 발길과 홍수, 바람, 소금이 무른 돌을 조금씩 닳게 해요. 페트라를 안전하게 지키는 일은 고고학자와 요르단 정부, 그리고 이곳 주민들이 함께 풀어 가고 있는 큰 숙제예요.
한눈에 보기
- 위치
- 요르단 남부 마안주 와디 무사 일대, 와디 아라바 동쪽의 사암 산지
- 세운 사람들
- 나바테아인 — 향료·향신료 대상로를 장악한 아랍계 민족
- 주요 시기
- 기원전 312년 첫 기록,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에 기념물 건설 절정
- 로마 지배
- 106년 트라야누스 황제 때 병합되어 아라비아 속주(아라비아 페트라이아)에 편입
- 대표 유적
- 시크 협곡, 알카즈네(‘보물창고’), 왕릉군, 극장, 대신전, 카스르 알빈트, 알데이르(‘수도원’)
- 재료
- 무르고 여러 색 띠가 있는 사암 — 대부분 쌓지 않고 깎아 만듦
- 유럽에 알려짐
- 1812년 8월 22일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의 방문
- 지위
- 유네스코 세계유산(1985년 등재), 2007년 공개 투표로 뽑힌 ‘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
쉬움
페트라는 어떤 곳인가
페트라는 요르단 남부, 뾰족한 사암 산들에 둘러싸인 분지에 숨어 있는 옛 도시 유적이다. 이름은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이다. 도시를 세운 나바테아인은 이곳을 라크무(Raqmu)라고 불렀고, 이 이름은 그들 자신의 비문에 나온다. 주 출입구 바로 바깥에는 ‘모세의 골짜기’라는 뜻의 현대 도시 와디 무사가 있다.
페트라가 유명한 까닭은 건설자들이 지형을 다룬 방식에 있다. 이들은 돌을 쌓아 건물을 세우는 대신 절벽을 직접 깎아 건물을 만드는 일이 많았다. 골짜기 벽을 따라 무덤, 제의용 식당, 사당, 주거 등 수백 개의 암굴 파사드(정면)가 늘어서 있다. 골짜기 바닥에는 다듬은 돌로 쌓은 독립 건물도 있었다. 신전, 열주 도로, 시장, 목욕장 등이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무너졌다.
페트라는 수백 년 동안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였다. 이 왕국은 아라비아와 이집트, 시리아, 지중해 연안을 잇는 사막 무역로를 장악했다. 전성기인 기원후 1세기의 인구는 약 2만~3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이는 인구 조사가 아니라 근거를 갖춘 추정치일 뿐이다.
페트라는 198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올랐다. 보호 구역은 약 2만 6천 헥타르(약 260제곱킬로미터)에 이를 만큼 넓고, 관광로 주변의 유명한 기념물 말고도 훨씬 많은 유적을 품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옛 도시 가운데 발굴된 부분이 아직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곤 한다.
쉬움
페트라를 ‘읽는’ 법: 시크에서 수도원까지 걷기
페트라는 하나의 여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방문자는 ‘시크의 문’이라는 뜻의 바브 알시크에서 출발하는데, 길가에는 첫 대형 무덤들과 ‘진(정령) 블록’이라 불리는 커다란 돌덩이가 서 있다. 이어 길은 시크로 들어선다. 시크는 길이 약 1.2킬로미터의 좁고 구불구불한 협곡으로, 좁은 곳은 폭이 3미터 남짓이고 양쪽 벽은 까마득히 높다. 시크는 사람이 판 것이 아니라 지각 운동으로 갈라진 틈이 나중에 물에 깎여 매끄러워진 자연 지형이다. 나바테아인은 이 길에 돌을 깔고, 벽을 따라 물길을 내고, 신성한 돌을 모시는 작은 벽감을 새겼다. 1998년 발굴에서는 낙타를 끄는 상인 두 사람을 새긴 부조의 흔적이 드러났는데, 도시를 부유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게 한다.
시크 끝에서 협곡은 갑자기 열리며 알카즈네, 곧 ‘보물창고’가 나타난다. 어둡고 좁은 통로와 빛나는 파사드의 대비는 연극적이라 할 만하며, 많은 학자는 이 효과가 의도된 것이라고 본다. 알카즈네는 높이 약 39미터, 너비 약 25미터다. 2층으로 된 정면은 기둥, 가운데가 끊긴 박공, 톨로스라는 둥근 정자 모양 구조물, 그리고 인물 부조로 덮여 있다. 아래층에는 흔히 쌍둥이 신 카스토르와 폴룩스로 보는 기마상이, 위층에는 도끼를 든 춤추는 아마조네스가 있고, 한가운데 여성상은 흔히 이시스나 여신 알웃자로 해석된다. 안으로 들어가면 장식 없는 소박한 방들만 있다.
알카즈네를 지나면 골짜기가 넓어지며 이른바 ‘파사드의 거리’가 이어진다. 무덤 윗부분을 계단 모양 띠(‘계단형 흉벽’ 문양)로 장식한 무덤들이 늘어서 있다. 다음은 산비탈을 깎아 만든 극장으로, 약 8,500명을 수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맞은편 동쪽 절벽에는 항아리 무덤, 비단 무덤, 코린트식 무덤, 궁전 무덤으로 이루어진 왕릉군이 거대한 파사드의 줄을 이루는데, 어떤 무덤에는 분홍·노랑·흰색 돌결이 대리석 무늬 비단처럼 흐른다.
길은 도시의 중심 대로인 열주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꺾여 대신전과 정원·연못 유적을 지나, 돌을 쌓아 지은 큰 독립 신전 카스르 알빈트에 이른다. 여기서 약 800개의 돌계단 길이 산으로 올라가 알데이르, 곧 ‘수도원’에 닿는다. 높이와 너비가 모두 47~48미터쯤 되는 페트라 최대급 파사드다. 가는 길과 주변 봉우리에는 ‘높은 곳’이라 불리는 산정 제단이 있어, 나바테아인이 제물을 바치고 의례를 치르던 야외 성소 역할을 했다.
페트라를 읽는다는 것은 세 가지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도시는 움직임과 갑자기 드러나는 경관을 중심으로 설계되었다. 무덤과 신전과 식당이 뒤섞여 있어 죽은 이와 신들이 도시 생활의 일부였다. 그리고 건축은 토착 전통에 그리스·이집트·근동의 요소를 섞었다.
쉬움
파사드는 어떻게 깎았나
페트라의 바위는 철제 도구로 깎을 수 있을 만큼 무르면서도 형태를 유지할 만큼 단단한 사암이다. 나바테아 석공들은 절벽 전체 높이에 먼저 비계를 세우지 않았다. 페트라와 사우디아라비아의 헤그라에 남은 미완성 파사드를 근거로 한 통설에 따르면, 이들은 위에서 아래로 작업했다. 먼저 절벽 면을 고르고, 꼭대기에 닿도록 계단이나 턱을 깎은 뒤, 가장 높은 부분의 장식부터 새기며 바위를 걷어 내면서 아래로 내려왔다. 석공이 딛고 선 땅은 아직 깎지 않은 바위였다.
이런 방식에서는 실수를 바로잡기 어렵다. 잘못 깎은 기둥머리는 갈아 끼울 수 없다. 또 파사드의 기둥은 아무것도 떠받치지 않는다. 구조물이 아니라 조각인 셈이다. 웅장한 파사드 뒤에는 대개 단순한 직사각형 방이 있고, 벽에 시신을 안치하는 벽감(로쿨리)을 판 경우도 있다.
지금 보이는 파사드는 맨돌이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곳곳에 회반죽(스투코)과 채색의 흔적이 남아 있어, 고고학자들은 많은 표면이 색을 칠한 회반죽으로 마감되어 사암의 자연 줄무늬를 가렸을 것으로 본다. 카스르 알빈트 같은 독립 건물은 다듬은 돌과 석회 모르타르를 썼고 벽 속에 나무 들보까지 넣었다. 방사성 탄소 분석으로 연대 추정에 쓰인 이 나무는 흔들림을 일부 흡수해 지진에 견디는 데 도움을 주었을 수 있다.
나바테아 장인들은 고전 기둥머리를 단순하게 바꾼 이른바 ‘나바테아식 기둥머리’도 만들었다. 대신전에서는 코끼리 머리로 장식한 기둥머리가 발견되었는데, 나바테아인이 얼마나 폭넓게 외래 요소를 받아들여 바꾸었는지 보여 주는 인상적인 증거다.
중급
인공 오아시스: 물 관리 기술
페트라는 비가 아주 적게 오고, 그나마 짧고 거센 폭우로 쏟아진다. 주민들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있었다. 건기에 쓸 물을 충분히 모아 두는 것, 그리고 좁은 골짜기를 따라 엄청난 힘으로 몰려오는 돌발 홍수에서 도시를 지키는 것이다. 나바테아인은 댐, 계단식 밭, 수로, 관, 저수조로 이루어진 체계로 두 문제를 모두 풀어 분지를 이른바 ‘인공 오아시스’로 바꾸었다.
이 체계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 시크다. 협곡 벽에 판 수로와 그 안에 끼운 토관이 아인 무사 샘을 비롯한 도시 밖 샘물을 중심부로 날랐다. 입구에서는 댐과 터널이 와디 무사의 홍수를 시크 밖으로 돌려 산을 에둘러 흐르게 했다. 같은 자리에 1963년과 1991년에 다시 세운 현대의 댐도 옛 댐의 원리를 따른다.
유적 전역에서 수백 개의 저수조가 맨 바위를 타고 흐르는 빗물을 모았다. 뚜껑 없는 수조도 있고 지붕을 덮은 지하 방도 있다. 옆 골짜기의 계단식 석축은 빗물의 흐름을 늦춰 농사를 가능하게 했다. 도심에서는 한때 시장으로 여겨졌던 곳에서 섬 모양 정자가 딸린 큰 연못과 정원이 발굴되었다. 사막 한가운데 물을 넓게 펼쳐 둔 것은 부와 자연 통제력을 의도적으로 과시한 것이었다.
물 관리는 페트라의 번영과 취약성을 함께 설명한다. 수로가 잘 관리될 때 도시는 많은 인구와 화려한 공공 공간을 유지할 수 있었다. 363년처럼 지진이 체계를 망가뜨리고 이를 고칠 돈과 인력이 부족해지자 도시 생활은 어려워졌다. 2,000년 전 페트라를 위협한 홍수가 오늘날에도 방문객과 유적을 위협하기 때문에, 현대 보존가들은 옛 배수 체계의 일부를 되살려 쓰고 있다.
중급
나바테아인: 사막의 상인에서 왕국으로
나바테아인은 기원전 4세기 말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아랍계 민족이다. 기원전 1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시칠리아의 디오도로스는 더 이른 시기의 자료를 바탕으로 기원전 312년의 사건을 서술하며 이들을 묘사했다. 그의 기록에서 나바테아인은 사막에서 유목하며 집을 짓지 않고, 물이 있는 곳을 비밀로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을 나눈 장군 가운데 하나인 안티고노스 1세가 부하 아테나이오스에게 군대를 주어 한 바위 요새를 습격하게 했다. 습격대는 남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물자를 빼앗았지만, 나바테아인이 뒤쫓아 이들을 전멸시켰다. 이 ‘바위’가 페트라였는지는 논란이 있고, 당시 그곳에 도시가 있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후 두 세기 동안 나바테아인은 정착하고 부유해져 왕국을 이루었다. 사료에 이름이 나오는 첫 왕은 기원전 169~168년 무렵 언급된 아레타스 1세다. 이후 기원전 93년 무렵 하스몬 왕조의 알렉산드로스 얀나이오스를 물리치고 죽은 뒤 신으로 숭배된 오보다스 1세, 왕국을 다마스쿠스까지 넓힌 아레타스 3세, 페트라 최대의 건설기와 겹치는 긴 치세를 누린 아레타스 4세(재위 기원전 9년~기원후 40년)가 있었다. 마지막 왕 라벨 2세는 106년에 죽었다.
부의 원천은 무역이었다. 나바테아인은 남아라비아의 유향과 몰약, 인도에서 들어온 향신료와 사치품을 북쪽의 지중해 항구 가자, 다마스쿠스, 이집트로 나르는 대상로를 장악했다. 길목마다 물과 길잡이, 경비, 시장을 제공하고 통행세를 거두었다. 왕국에는 하우란 지방의 보스라, 히자즈의 헤그라(마다인 살레), 네게브의 아브다트와 맘시트 같은 도시가 속했다.
나바테아 사회는 여러 언어를 썼다. 사람들은 아랍어의 한 형태를 말한 것으로 보이지만, 공식 비문은 근동의 국제어인 아람어로 썼다. 이들의 아람 문자는 독특한 흘림체로 발전했고, 대부분의 학자는 훗날 아랍 문자가 여기서 나왔다고 본다. 나바테아 주화에는 왕뿐 아니라 왕비도 새겨졌고, 여성이 무덤을 소유했다는 비문도 있어 상류층 여성이 법적·공적으로 드러나는 역할을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로마와의 관계는 길고 복잡했다. 기원전 62년 로마 장군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가 페트라를 포위하자 아레타스 3세는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이후 왕국은 로마의 영향 아래 있는 종속국이 되었고, 이웃 유대의 정치에 자주 얽혔다.
중급
신, 무덤, 잔치: 페트라의 종교
나바테아의 최고신은 두샤라(그리스어로 두샤레스)였다. 이름은 흔히 페트라를 둘러싼 샤라 산지와 연결해 ‘샤라의 신’으로 풀이되며, 왕실의 특별한 후원을 받았다. 여신도 중요했는데, 특히 그리스의 아프로디테나 이집트의 이시스와 동일시되곤 한 알웃자, 그리고 알라트가 있었다. 처음에 나바테아인은 신을 주로 장식 없는 선돌이나 돌덩이로 나타냈고, 눈만 간단히 새기거나 아예 새기지 않기도 했다. 베틸(baetyl)이라 불리는 이런 돌은 지금도 시크의 벽감 등에서 볼 수 있다. 그리스·로마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을 사람 모습으로 나타내는 일이 늘었다.
예배는 여러 곳에서 이루어졌다. 제단과 수반, 액체를 흘리는 홈이 있는 산꼭대기의 ‘높은 곳’, 길가의 벽감과 사당, 그리고 카스르 알빈트 같은 도심의 큰 신전이다. 카스르 알빈트가 어느 신을 모셨는지는 아직 논쟁 중이다. 두샤라가 가장 흔한 후보지만, 그리스어 비문과 베틸 조각 때문에 다른 견해도 나왔다.
죽음 또한 종교 생활의 중심이었다. 페트라 암굴 파사드의 대부분은 무덤이며, 많은 무덤 단지에 안뜰과 저수조, 바위를 깎은 긴 의자가 있는 식당(트리클리니움·비클리니움)이 딸려 있다. 가족과 결사가 이곳에 모여 죽은 이와 신을 기리는 제의 식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알데이르의 비문은 ‘신 오보다트’와 관련된 마르제아(mrzḥ), 곧 종교 결사나 연회를 언급하는데, 여기서 신은 아마 신격화된 오보다스 1세일 것이다. 이는 알데이르가 무덤이 아니라 모임 장소였음을 시사한다.
중급
로마 속주, 비잔티움 도시, 중세의 폐허
106년 라벨 2세가 죽은 뒤, 나바테아 왕국은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에서 로마에 병합되었다. 당시 시리아 총독은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팔마였다. 왕국은 흔히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라고 부르는 아라비아 속주가 되었다. 병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사료는 거의 말하지 않으며, 전투가 있었는지도 불확실하다. 주화는 새 영토를 기념했고, 트라야누스는 보스라에서 페트라를 거쳐 홍해의 아일라(아카바)까지 이어지는 도로 ‘비아 노바 트라이아나’를 닦았다.
페트라는 로마 지배 아래서 무너지지 않았다. ‘메트로폴리스’ 칭호를 받았고, 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방문하자 ‘하드리아나 페트라’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속주 행정의 중심은 보스라로 옮겨 갔고, 시간이 흐르며 더 많은 물자가 홍해와 이집트를 거치는 바닷길로 움직였다.
363년의 큰 지진은 많은 건물을 무너뜨리고 물 관리 체계를 망가뜨렸다. 그래도 도시는 이어졌다. 비잔티움 시대에 페트라는 주교좌이자 제3팔레스티나 속주의 주요 도시였다. 446년에는 항아리 무덤이 교회로 바뀌었다. 바닥 모자이크가 아름다운 이른바 페트라 교회를 발굴하던 1993년, 불에 타 탄화된 파피루스 두루마리 약 140개가 발견되었다. 6세기에 그리스어로 쓰인 ‘페트라 파피루스’는 대부분 부제 테오도로스를 중심으로 한 한 부유한 가문의 문서로, 혼인·상속·재산 매매·세금 문제를 기록하고 있다. 이 문서들은 500년대에도 페트라가 활기 있는 도시였음을 보여 준다.
7세기 이슬람 정복 이후 페트라는 문헌에 드물게만 나타나고 점차 작은 마을로 줄어들었다. 12세기 십자군은 와디 무사 근처의 알우와이라, 페트라 안 알하비스 산꼭대기 등에 작은 요새를 쌓았다가 잃었다. 13세기 말에는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가 지나가며 폐허를 둘러보았다. 그 뒤 페트라는 유럽의 지식에서 사라졌지만, 진짜로 ‘잃어버린’ 적은 없었다. 이 지역의 베두인이 유적 사이에 살며 이곳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급
부르크하르트, 화가들, 고고학자들
로잔 태생의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1784~1817)는 런던의 아프리카 협회를 위해 일한 여행가로, 협회는 그가 언젠가 사하라를 건너기를 바랐다. 그는 시리아에서 아랍어와 이슬람을 공부했고 ‘셰이크 이브라힘 이븐 압달라’라는 이름으로 여행했다. 1812년 8월 다마스쿠스에서 카이로로 가던 그는 와디 무사에 놀라운 유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근처 산에 있는 예언자 아론(하룬)의 무덤에 염소를 제물로 바치고 싶다고 설명해 현지 안내인을 설득했고, 8월 22일 알카즈네와 다른 기념물을 보았다. 관심을 드러내면 의심을 살 수 있어 오래 머물거나 드러내 놓고 기록할 수 없었다. 그의 기록은 사후에 『시리아와 성지 여행기』(1822)로 출간되었다.
부르크하르트는 다른 이들에게 길을 열었다. 1828년 레옹 드 라보르드와 루이모리스아돌프 리낭 드 벨퐁이 처음으로 정확한 그림을 남겼다. 스코틀랜드 화가 데이비드 로버츠가 1839년에 찾아와 그린 석판화는 페트라의 장밋빛 절벽을 유럽에 널리 알렸다. 1868년의 미국 화가 프레더릭 에드윈 처치를 비롯한 여행가·사진가·화가들이 낭만적 이미지를 더했다. 20세기에는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1989) 같은 영화가 알카즈네를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고대 파사드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과학적 고고학은 더디게 시작되었다. 1929년 영국 고고학자 애그니스 콘웨이와 조지 호스필드가 팔레스타인 의사이자 민족지학자 타우피크 카난, 덴마크 학자 디틀레프 닐센과 함께 초기 발굴과 조사를 했다. 요르단 독립 뒤에는 요르단 문화재청과 여러 외국 조사단이 작업을 이어받았다. 1993년부터 마사 샤프 주코브스키가 이끈 브라운 대학교의 대신전 발굴, 1990년대 미국 동방연구센터(ACOR)의 페트라 교회 발굴, 그리고 여러 나라 조사단의 주거·신전·무덤·수리 시설에 대한 장기 연구가 대표적이다.
발견은 계속되고 있다. 2003년 알카즈네 앞을 발굴하던 조사단은 지금의 지면 아래에 파인 무덤들을 찾아냈는데, 이는 파사드가 원래 골짜기 바닥에서 더 높이 솟아 있었음을 보여 준다. 위성 영상과 드론을 이용한 조사는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구조물을 계속 찾아내고 있다.
심화
논쟁: 연대, 기능, 도시의 모습
페트라의 기념물 가운데 연대가 적힌 비문을 가진 것은 매우 드물어, 연대는 양식 비교와 층위, 가끔의 과학적 연대 측정에 기댄다. 대표적인 예가 알카즈네다. 오늘날 많은 학자는 이를 기원 전후 아레타스 4세 치세로 보고, 그의 무덤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지난 두 세기 동안 제시된 연대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로마 시대까지 걸쳐 있다. 주디스 매켄지의 『페트라의 건축(The Architecture of Petra)』(1990)은 파사드의 고전 장식을 분석해 알렉산드리아 등지의 연대가 확실한 건축과 비교함으로써 상대 편년을 세우려 한 영향력 있는 시도였다. 이 틀은 널리 쓰이지만 모두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며, 새 발굴이 계속 이를 다듬고 있다.
기능도 논쟁거리다. 알카즈네는 왕릉이었을까, 신전이었을까, 아니면 두 역할을 겸한 기념물이었을까? 장식 없는 내부 방과 그 아래에서 발견된 무덤들은 장례 건축이라는 해석을 뒷받침하지만, 신들과 아마조네스, 가운데 여성상 같은 조각은 더 넓은 종교적 의미를 시사한다. 브라운 대학교가 발굴한 대신전 내부에는 약 600석 규모의 작은 극장식 객석이 있다. 발굴자와 다른 학자들은 이 건물이 신전인지, 의회당인지, 왕의 알현실인지, 행정 중심지인지를 두고 논쟁해 왔다. 신격화된 오보다스의 연회 결사를 언급한 알데이르의 비문은 공동체 의례를 가리키지만, 정확한 용도는 여전히 논의 중이다.
더 넓게는 나바테아 문화의 성격 자체가 논쟁 대상이다. 예전 저자들은 페트라를 지중해 유행을 흉내 낸 헬레니즘화·로마화된 도시로 그리기도 했다. 최근 연구는 나바테아인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토착 후원자들이 그리스·이집트·메소포타미아 요소를 골라 베틸, 계단형 파사드, 연회용 식당 같은 아라비아 전통과 결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바테아 문자가 아랍 문자 발달의 핵심 고리라는 점에서 이 논쟁은 문자사와도 닿아 있다.
끝으로 도시 전체가 어떤 모습이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관광로는 주로 기념물이 모인 중심부를 지나지만, 조사 결과 주거지·농지·채석장·수리 시설이 훨씬 넓게 펼쳐져 있었다. 2만~3만 명이라는 인구 추정은 주거 밀도와 물 공급에 대한 가정에 따라 달라지는 대략적인 수치다.
심화
보존, 관광, 그리고 브둘족: 페트라는 누구의 것인가
페트라의 아름다움은 곧 약점이기도 하다. 사암은 구멍이 많고 무르다. 습기에 실려 온 염분이 돌 속에서 결정을 이루며 표면을 떨어뜨리고, 바람은 모래를 파사드에 부딪게 하며, 돌발 홍수는 골짜기를 할퀸다. 지진도 되풀이해 유적을 손상시켰다. 여기에 사람이 만든 위협이 더해진다. 관리되지 않은 구조물의 붕괴, 부실한 배수, 부적합한 재료를 쓴 복원, 그리고 방문객의 압력이다. 유적 상태 조사에서는 흔히 붕괴, 홍수와 배수 불량으로 인한 침식, 염분 풍화, 부적절한 복원, 지속 불가능한 관광을 주요 위험으로 꼽는다.
관광은 1990년대 이후 급격히 늘어 2019년에는 방문객이 100만 명을 넘었지만, 지역 분쟁이 있던 해나 팬데믹이 닥친 2020년에는 크게 줄었다. 관광은 와디 무사와 주변 마을에 수천 개의 일자리를 주지만, 인파는 계단과 바닥을 닳게 하고 호텔은 보호 구역 가장자리까지 밀고 들어온다. 1989년 설립된 페트라 국가 신탁(Petra National Trust)과 요르단 문화재청, 국제 협력 기관들은 시크의 포장을 복원하고 옛 홍수 방지 체계의 일부를 다시 세우고 기념물을 안정화했다. 관광객을 태우는 당나귀와 낙타의 처우도 동물 복지 측면에서 비판을 받아 왔다.
가장 민감한 문제는 브둘(Bdul, Bedul로도 표기)족이다. 이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페트라 안의 동굴과 천막에 살며 농사와 목축을 하다가 나중에는 관광업에 종사한 베두인 부족이다. 기원 전승은 여러 가지로, 고대 나바테아인과 잇는 이야기도 있고 다른 조상을 말하는 이야기도 있으며, 인류학자 케네스 W. 러셀은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쓰였는지를 연구했다. 페트라가 세계유산에 오른 1985년 무렵 요르단 정부는 브둘족 약 140가구를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새 마을 움 사이훈으로 이주시켰고(거리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이 마을에는 주택·학교·진료소·전기·수도가 갖춰졌다.
이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지지하는 쪽은 기념물을 보호하고 가족들에게 현대적 생활 여건을 주었다고 본다. 비판하는 쪽은 사람들을 삶의 터전이자 생계였던 경관에서 떼어 냈고, 마을이 곧 과밀해졌으며, 지역 공동체가 관광 수익과 의사 결정에서 늘 공정한 몫을 받지는 못했다고 지적한다. 2024년에도 주민을 이 지역에서 내보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은 이 문제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페트라는 오늘날 문화유산학에서 기념물 보호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권리·지식 존중 사이의 긴장을 보여 주는 사례로 자주 논의된다.
핵심 개념
- 암굴 건축
- 돌을 쌓는 대신 절벽에서 돌을 걷어 내어 만든 건축. 페트라의 파사드는 대개 위에서 아래로 깎았으므로 기둥과 박공은 하중을 받는 구조가 아니라 조각이다.
- 대상 경제
- 페트라의 부는 향료·향신료·사치품이 오가는 사막 무역로를 장악하고 물·경비·시장을 제공하며 통행세를 거두는 데서 나왔다.
- 권력으로서의 물
- 댐·수로·저수조·연못 덕분에 나바테아인은 사막에 살며 홍수를 막았고, 도심의 야외 연못과 정원처럼 사치를 과시하기까지 했다.
- 문화의 융합
- 나바테아 건축가들은 아라비아 전통(신성한 돌, 계단형 문양, 연회용 식당)에 그리스·이집트·메소포타미아의 형식을 골라 결합했다.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선택과 변형이었다.
- 무대로서의 경관
- 어둡고 구불구불한 시크와 갑자기 나타나는 알카즈네는 페트라 건설자들이 자연 지형을 극적인 효과에 활용했음을 보여 준다.
- 긴 후일담
- 페트라는 106년에 사라지지 않았다. 로마와 비잔티움의 도시로 이어져 교회와 파피루스 문서를 남겼고, 십자군 요새가 들어섰으며, 베두인 공동체의 삶터로 남았다.
- 살아 있는 유산
- 현대의 보존은 무른 돌, 대중 관광, 브둘족 같은 지역 주민의 권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며, 그래서 페트라는 유산이 누구의 것인가를 둘러싼 논의의 핵심 사례가 되었다.
기록
- 기원전 312년 — 안티고노스 1세가 한 바위 요새의 나바테아인을 습격하게 함 — 시칠리아의 디오도로스가 전하는 나바테아인에 대한 첫 역사 기록(기원전 312년).
- 약 기원전 169년 — 사료에 이름이 나오는 첫 나바테아 통치자 아레타스 1세가 언급됨(기원전 169~168년 무렵).
- 기원전 62년 — 로마 장군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가 페트라를 포위, 아레타스 3세가 공물을 바치기로 함(기원전 62년).
- 기원전 9년 — 아레타스 4세 즉위(재위 기원전 9년~기원후 40년). 페트라 최대의 건설기로, 알카즈네도 흔히 이 무렵으로 본다.
- 106년 — 라벨 2세 사후 트라야누스 치하의 로마가 나바테아 왕국을 병합하고 아라비아 속주를 설치.
- 363년 — 큰 지진으로 많은 건물이 무너지고 물 관리 체계가 손상됨.
- 446년 — 항아리 무덤이 교회로 바뀜 — 비잔티움 그리스도교 시대의 페트라.
- 약 1100년 — 12세기, 십자군이 알우와이라와 알하비스에 작은 요새를 쌓음.
- 1812년 — 8월 22일,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페트라를 방문한 최초의 근대 유럽인이 됨.
- 1929년 — 애그니스 콘웨이, 조지 호스필드, 타우피크 카난, 디틀레프 닐센이 초기 발굴과 조사를 함.
- 1985년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이 무렵 브둘족 약 140가구가 움 사이훈으로 이주됨.
- 1993년 — 페트라 교회에서 6세기 탄화 파피루스 약 140개 발견, 대신전 발굴 시작.
용어 풀이
- 나바테아인
- 사막 무역로를 장악하고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06년까지 페트라를 중심으로 왕국을 다스린 아랍계 민족.
- 시크(Siq)
- 페트라의 주 출입로를 이루는 길이 약 1.2킬로미터의 좁은 자연 협곡.
- 알카즈네
- 아랍어로 ‘보물창고’. 꼭대기 돌 항아리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붙은 페트라의 대표 암굴 파사드.
- 베틸(baetyl)
- 신을 나타내는 신성한 선돌이나 돌덩이. 나바테아 종교에서 흔히 쓰였다.
- 두샤라
- 나바테아의 최고신. 페트라 주변 산지와 왕실과 관련된다.
- 높은 곳(산정 성소)
- 언덕이나 산꼭대기에 제단과 수반을 갖춘 야외 성소.
- 트리클리니움·비클리니움
- 세 면(또는 두 면)에 긴 의자를 둔 식당. 페트라에서는 무덤·신과 관련된 제의 연회에 쓰였다.
- 톨로스
- 기둥으로 둘러싼 둥근 건축물. 알카즈네에서는 위층의 중심을 이룬다.
- 저수조
- 빗물을 모아 두는 물탱크. 흔히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
-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 106년 나바테아 왕국을 병합해 설치한 로마의 아라비아 속주.
- 브둘족
- 여러 세대 동안 페트라 안에 살다가 1980년대에 움 사이훈 마을로 이주된 베두인 부족.
묻고 답하기
왜 페트라를 ‘장밋빛 도시’라고 부르나요?
사암의 상당 부분이 특히 아침저녁 햇빛을 받으면 분홍빛과 붉은빛으로 빛나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19세기 영국 시에서 나온 시적인 말이고 정확한 묘사는 아니다. 바위에는 노랑·흰색·보라·갈색 띠도 있다.
보물창고 안에 정말 보물이 있나요?
없다. 이름은 파사드 꼭대기의 돌 항아리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현지 전설에서 왔다. 항아리의 총탄 자국은 이를 쏘아 깨뜨리려 한 사람들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건물은 왕릉이거나 종교적 기능을 가진 기념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계도 없이 어떻게 그렇게 큰 건물을 깎았나요?
철제 끌과 곡괭이, 그리고 뛰어난 기술과 계획으로 깎았다. 석공들은 대개 절벽 꼭대기에서 시작해 아래쪽의 깎지 않은 바위를 딛고 서서 내려오며 작업했다.
페트라는 정말 ‘잃어버린 도시’였나요?
유럽인에게만 그랬다. 현지 베두인은 이곳을 계속 알고 이용했고,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 같은 중세 인물도 찾아왔다. 1812년 부르크하르트의 방문이 페트라를 유럽 학계에 소개했을 뿐이다.
로마가 페트라를 파괴했나요?
아니다. 로마는 106년에 왕국을 병합했고 도시는 한동안 계속 번영했다. 쇠퇴는 무역로 변화, 다른 지역 중심지의 성장, 특히 363년의 지진 같은 요인으로 점진적으로 일어났다.
페트라 기념물의 연대는 얼마나 확실한가요?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연대가 적힌 비문이 있는 파사드가 드물어 양식 분석, 발굴 층위, 일부 과학적 방법에 기댄다. 알카즈네는 흔히 아레타스 4세 치세로 보지만 더 이르거나 늦은 연대도 제시되었다.
페트라 동굴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많은 브둘족 가족이 1980년대에 요르단 정부에 의해 새 마을 움 사이훈으로 옮겨졌다. 이주는 현대적 생활 여건을 가져다주었지만 삶터와 생계를 잃게 하기도 해 지금도 논쟁이 이어진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Petra. Wikipedia
- Nabataean Kingdom. Wikipedia
- Al-Khazneh. Wikipedia
- Siq. Wikipedia
- Ad Deir. Wikipedia
- Great Temple (Petra). Wikipedia
- Petra papyri. Wikipedia
- Johann Ludwig Burckhardt. Wikipedia
- Bedul. Wikipedia
- Judith McKenzie, The Architecture of Petra. Oxford University Press (British Academy Monographs in Archaeology), 1990
함께 보기
- 페르세폴리스이란 남서부에 있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의례·행정 중심지로, 다리우스 1세 때 건설이 시작되었다.
- 악숨 오벨리스크오늘날 에티오피아의 고대 악숨 왕국에서 세운 석조 장례 기념물이다.
- 랄리벨라 암굴 교회군에티오피아 고원의 단단한 화산암을 아래로 파 내려가 만든 교회 열한 채. 전승상 자궤 왕조의 게브레 메스켈 랄리벨라 왕이 ‘새 예루살렘’으로 세웠으며, 지금도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순례 중심지다.
- 아잔타 석굴인도 서부의 불교 석굴군으로, 승원과 예배 공간, 벽화로 알려져 있다.
- 판테온하드리아누스 시대에 다시 지어진 로마의 신전으로, 거대한 콘크리트 돔과 천장의 원형 개구부로 유명하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 알렉산드리아에서 문헌을 모으고 연구하던 중심지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