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1791년 5월 3일 헌법

Ustawa Rządowa(‘통치법’), 폴란드어 Konstytucja 3 maja, 리투아니아어 Gegužės 3-iosios konstitucija

1791년 · 바르샤바 왕궁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한 문장으로

1791년 5월 3일 헌법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의회가 바르샤바에서 채택한 성문 헌법으로, 국정을 마비시키던 자유 거부권을 없애고 권력을 셋으로 나누며 도시민에게 새 권리를 주어 약해진 나라를 구하려 했지만, 러시아의 침공으로 19개월 만에 무너졌다.

1791년 5월 3일 헌법
이미지: Ignacy Potocki (1750–1809), Hugo Kołłątaj (1750–1812), Stanisław August Poniatowski (1732–1798)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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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230여 년 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연방’이라는 하나의 아주 큰 나라였어요. 왕이 있었지만 진짜 힘은 귀족들에게 있었고, 나라는 무척 약해져 있었어요.

가장 큰 문제는 의회의 이상한 규칙이었어요. 의원 한 명이라도 “나는 반대한다!”라고 외치면 그 회의에서 정한 모든 것이 취소됐어요. 반 친구 한 명이 “싫어!” 한마디로 반 전체가 정한 일을 모두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무 일도 할 수 없겠지요. 게다가 힘센 이웃 나라가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싫어!”라고 말하게 할 수도 있었어요.

이웃 나라인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1772년에 이미 이 나라의 땅을 크게 떼어 갔어요. 많은 폴란드 사람과 리투아니아 사람은 정부를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1791년 5월 3일, 바르샤바 왕궁에서 의회는 나라 전체의 새 규칙인 ‘헌법’을 통과시켰어요. “나는 반대한다!” 규칙을 없애고, 힘을 법을 만드는 사람, 왕의 정부, 재판관으로 나누고, 도시 사람들에게 새 권리를 주고, 농민을 법으로 보호하겠다고 약속했어요.

거리의 사람들은 환호했어요. 미국 헌법이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나온, 유럽 최초의 근대적인 성문 헌법이었어요.

하지만 이웃 나라들은 옆에 강한 나라가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러시아가 군대를 보냈고, 1795년 연방은 완전히 나뉘어 사라졌어요. 그래도 사람들은 이 헌법을 잊지 않았어요. 오늘날 5월 3일은 폴란드의 국경일이고, 리투아니아에서도 기억하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공식 명칭
Ustawa Rządowa(통치법)
채택
1791년 5월 3일, 대의회(4년 의회, 1788~1792)
장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수도 바르샤바의 왕궁
주요 기초자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이그나치 포토츠키, 후고 코와타이, 그 밖에 시피오네 피아톨리, 스타니스와프 마와호프스키 등
구성
전문과 11개 조, 그리고 도시·지방의회·양국 연합에 관한 부속 법률
핵심 변화
자유 거부권과 연맹(콘페데라치아) 폐지, 삼권 분립, 세습 군주제, 도시민의 권리, 농민을 법의 보호 아래 둠
시행 기간
약 19개월. 1793년 11월 23일 러시아의 압력 속에 그로드노 의회가 무효화
원본
바르샤바 중앙역사기록보관소(AGAD)에 필사본 소장

쉬움

5월 3일 헌법이란 무엇인가

1791년 5월 3일 헌법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이루어진 중동부 유럽의 큰 나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기본법을 글로 적은 것이다. 공식 명칭은 ‘통치법(Ustawa Rządowa)’, 곧 나라의 통치 체제를 정하는 법이었다. 세임(Sejm)이라 불린 의회가 바르샤바 왕궁에 모여 채택했다.

이 헌법은 흔히 유럽 최초, 미국 헌법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근대적 성문 국민 헌법으로 불린다. 여기서 ‘근대적’이란 국가 조직을 하나의 문서에 적고, 권력을 서로 다른 기관에 나누며, 통치자도 법 아래 둔다는 뜻이다. 다만 1755년 단명한 코르시카 공화국에도 헌법이 있었기 때문에, 신중한 저자들은 이 주장에 단서를 붙인다.

헌법은 거의 통치가 불가능해진 나라를 구하려 했다. 의원 한 명이 모든 입법을 막을 수 있던 규칙을 없애고, 정부와 군대를 강화하고, 도시민에게 정치적 권리를 주며, 농민에게 법의 보호를 약속했다. 외국 군대와 국내 반대파에 의해 약 19개월 만에 무너졌지만,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역사에서 가장 소중한 상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2][3]

쉬움

문제: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는 큰 나라

17세기에 연방은 유럽의 강대국이었고, 18세기에도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에서 영토가 넓은 나라였다. ‘귀족 민주정’이라고도 불린 이 나라의 정치 체제는 귀족층인 슐라흐타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었다. 귀족들은 왕을 선출하고, 세임과 지방의회(세이미크)에 참여했으며, 왕에 맞서 합법적으로 무장 동맹을 맺을 수도 있었다. 이를 ‘연맹(콘페데라치아)’이라 했다.

가장 큰 약점은 ‘자유 거부권(리베룸 베토)’이었다. 1652년부터 의원 한 명만 반대해도 세임 회기 전체가 깨지고 그 회기에 통과된 모든 법이 무효가 되었다. 외국과 부유한 대귀족(마그나트)은 의원을 매수해 이 권리를 쓰게 했고, 세임은 오랫동안 거의 아무 법도 만들지 못했다. 아우구스트 3세 치세 30년 동안 입법에 성공한 회기는 단 한 번뿐이었다. 군대는 약 1만 6천 명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약 30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각각 약 20만의 군대를 거느렸다.

러시아는 연방을 사실상 보호국으로 여겼다. 1768년 예카테리나 2세는 자유 거부권과 국왕 선출제 등 귀족의 특권을 자신이 직접 보장하는 ‘기본법’으로 만들었다. 1772년에는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가 1차 분할로 연방 영토의 약 3분의 1과 인구 400만 명을 빼앗았다. 깨어 있는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에게 교훈은 분명했다. 개혁하지 않으면 망한다.

[1]

쉬움

채택 과정: 바르샤바의 대담한 하루

기회는 1788년 10월 6일 바르샤바에서 이른바 대의회, 곧 4년 의회가 열리면서 찾아왔다.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 스웨덴과 전쟁 중이었고, 프로이센과의 동맹이 연방을 지켜 줄 것처럼 보였다. 의회는 자유 거부권을 피하려고 스스로 연맹을 선언해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게 했다. 1790년에는 새로 선출된 의원들이 합류해 규모가 두 배가 되었다.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는 1790년 말부터 개혁파 지도자 이그나치 포토츠키, 사제이자 사상가 후고 코와타이, 이탈리아 출신 비서 시피오네 피아톨리, 의회 의장 스타니스와프 마와호프스키 등과 함께 비밀리에 새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1791년 4월 의회는 먼저 도시민에게 중요한 권리를 준 왕립도시법을 통과시켰고, 이 법은 뒤에 헌법에 편입되었다.

반대파를 두려워한 개혁파는 보수파 의원 다수가 부활절 휴회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토론을 5월 3일로 앞당겼다. 국왕의 조카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 공은 왕실 근위대를 왕궁 주변에 배치했다. 출석한 의원은 약 182명으로 전체의 절반 정도였다. 격렬한 토론 끝에 통치법은 큰 차이로 채택되었고, 밖에 모인 군중은 환호했다. 국왕은 헌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했고, 의원들은 가까운 성 요한 성당으로 가서 감사 미사를 드렸다. 역사가들은 이날을 흔히 평화적인 ‘준(準)합법 쿠데타’라 부른다.

[1][2]

쉬움

헌법의 내용

헌법은 전문과 11개 조로 이루어져 있다. 제1조는 로마 가톨릭을 ‘지배적 종교’로 인정하면서도 모든 신앙에 관용과 자유를 약속했다. 제2조는 귀족의 권리를 확인했다. 제3조는 새 왕립도시법을 헌법의 일부로 삼아, 도시민(부르주아)에게 재판 없이 체포되지 않을 권리, 토지를 살 권리, 관직과 장교직에 오를 권리를 주었다. 제4조는 가장 크고 가장 억압받던 계층인 농민을 국법의 보호 아래 두었지만, 농노제를 없애지는 않았다.

제5조는 “시민 사회의 모든 권력”이 국민의 의지에서 나온다고 선언하고 통치를 세 부문으로 나누었다. 입법권은 선출된 대의원원과 원로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제 세임에 주었다. 행정권은 국왕과 ‘법의 수호자(Straż Praw)’라 불린 대신 회의에 주었는데, 대신들은 국왕의 명령에 부서(副署)해야 했고 세임이 해임할 수 있었다. 재판관은 선출되고 독립적이어야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6조였다. 자유 거부권을 폐지하고 연맹을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라며 금지했다. 이제 결정은 다수결로 내려졌다. 외국이 국왕 선거 때마다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선거 왕정을 세습 왕정으로 바꾸었고,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다음에는 작센 선제후가 왕위를 잇기로 했다. 제11조는 나라를 지킬 10만 명의 상비군을 두도록 했다. 또 25년마다 특별 의회를 열어 헌법을 고칠 수 있게 했다.

[1]

중급

전쟁, 배신, 그리고 연방의 종말

예카테리나 2세는 격노했다. 그의 측근 한 사람은 폴란드 왕이 거의 주권자가 되어 버렸다고 한탄했다고 전한다. 프로이센도 되살아난 연방이 1772년에 빼앗긴 땅을 돌려 달라고 할까 두려워했다. 러시아가 오스만·스웨덴과의 전쟁을 끝내자 예카테리나는 행동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특권을 잃은 대귀족들, 곧 프란치셰크 크사베리 브라니츠키, 스타니스와프 슈첸스니 포토츠키, 세베린 제부스키 등은 1792년 4월 2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작성한 선언문으로 타르고비차 연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헌법을 파리의 나쁜 본보기를 따른 ‘민주주의 사상의 전염병’이라 비난하며 옛 자유를 되찾기 위해 러시아 군대를 불러들였다.

1792년 5월 러시아군이 쳐들어왔다. 연방이 내보낼 수 있는 군대는 약 3만 7천 명뿐이었고, 그중 상당수는 훈련이 부족한 신병이었다.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와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가 이끄는 군대는 몇몇 전투에서 선전했지만, 프로이센은 동맹 의무를 저버렸다. 바르샤바가 위협받자 국왕과 대신 다수는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고, 1792년 7월 24일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는 여제의 요구대로 타르고비차 연맹에 가담했다.

타르고비차 지도자들은 옛 연방을 되살려 다스리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1793년 2차 분할을 단행했다. 러시아 군대의 압력 속에 그로드노에서 열린 의회는 분할을 승인하고 1793년 11월 23일 헌법을 무효로 선언했는데, 그럴 법적 권한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1794년 코시치우슈코는 전국적 봉기를 일으키고 포와니에츠 선언으로 농민에게 인신의 자유를 약속했다. 봉기는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진압되었고, 1795년 3차 분할로 남은 연방은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에 나뉘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1918년에야 독립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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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계몽사상과 폴란드의 전통

헌법은 유럽 계몽사상에 기대고 있다. 입법·행정·사법의 분리를 주장한 몽테스키외, 사회계약과 국민의 의지를 말한 루소의 언어가 울린다. 실제로 루소와 프랑스 사상가 마블리는 1770~1772년 무렵 폴란드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에 대한 조언서를 썼다. 국왕은 이 헌법이 주로 잉글랜드와 미국의 헌법에 바탕을 두되 둘의 결함을 피했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현대 학자 가운데에는 이 헌법이 만든 군주제가 당시 영국 모델에 가깝다고 보는 이도 있다.

그러나 헌법은 대의 정치, 왕권 제한, 왕과 귀족 사이의 문서 계약이라는 폴란드의 오랜 전통에도 뿌리를 두었다. 선출된 왕마다 서명한 ‘헨리크 조항’과 ‘팍타 콘벤타’가 그 예다. 폴란드 개혁가들은 수십 년 전부터 변화를 제안해 왔다. 스타니스와프 코나르스키는 1760년대에 자유 거부권을 비판했고, 흔히 세계 최초의 교육부로 불리는 1773년의 국민교육위원회는 새로운 세대를 길러 냈으며, 코와타이, 스타니스와프 스타시츠, 유제프 비비츠키는 영향력 있는 개혁 구상을 내놓았다.

아래로부터의 압력도 있었다. 1789년 말 도시 대표들은 검은 옷을 입고 바르샤바에서 ‘검은 행진’을 벌여 도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요구했다. 프랑스의 사태를 의식한 의회는 대결 대신 타협을 택했고, 그 결과인 왕립도시법이 헌법의 일부가 되었다. 코와타이의 표현대로 개혁파가 바란 것은 폭력 없는 ‘온건한 혁명’이었다.

[1][3]

중급

문서 자체: 초안, 필사본, 번역

본문은 여러 차례 초안을 거쳤다. 국왕이 전체 틀을, 코와타이가 최종 형태를 다듬은 것으로 평가되며, 1791년 3월 말에는 최종본에 가까운 초안이 있었다. 채택된 법은 국가의 공식 기록부에 올랐다. 오늘날 남아 있는 필사본은 바르샤바의 중앙역사기록보관소(Archiwum Główne Akt Dawnych, AGAD)에 리투아니아 기록부(Metryka Litewska), 4년 의회 문서 등의 일부로 보관되어 있다.

헌법은 곧바로 인쇄되어 널리 퍼졌다. 리투아니아어로도 필사 번역되었고, 영어·프랑스어·독일어판이 출간되어 유럽 곳곳의 독자가 폴란드의 실험을 지켜볼 수 있었다. 채택 이틀 뒤인 1791년 5월 5일 의회는 ‘집결한 신분들의 선언’으로 헌법을 확인하고 5월 3일을 국경일로 정했다.

통치법은 완성된 체제가 아니었다. 1791년 5~6월 의회는 세임 법원, 법의 수호자, 경찰위원회, 도시 행정에 관한 법률을 잇달아 통과시켰다. 1791년 10월 22일에는 ‘두 민족의 상호 보증’을 채택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연합을 확인하면서 주요 기관에서 리투아니아의 동등한 대표권을 보장했다. 코와타이는 ‘경제 헌법’과 ‘도덕 헌법’도 준비 중이라고 했고 새 법전 편찬도 요구되었지만, 이를 쓰기 전에 전쟁이 닥쳤다.

[2][1]

중급

기억: 국경일이자 희망의 상징

독립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가 존재하지 않던 123년 동안, 헌법에 대한 기억은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지켜 주었다. 포토츠키와 코와타이는 이 헌법을 “숨을 거두는 조국의 마지막 유언”이라 불렀다. 한 세기 뒤 헌법학자 브로니스와프 뎀빈스키는 헌법의 기적이 국가는 구하지 못했지만 민족은 구했다고 썼다.

5월 3일 기념일은 분할 열강에 의해 금지되었다가, 1919년 4월 새로 독립한 폴란드 공화국의 첫 공식 기념일 가운데 하나로 되살아났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와 소련 점령 당국이 모두 금지했다. 노동절인 5월 1일을 앞세운 공산 정권은 1951년까지 이날을 공식 기념일에서 뺐고, 1989년까지 5월 3일은 종종 반공 시위의 날이 되었다. 1990년 국경일로 복원되었다. 시카고 같은 해외 폴란드계 공동체는 퍼레이드로 이날을 기린다.

헌법은 당대에도 폴란드 밖에서 찬사를 받았다. 프랑스 혁명을 비판한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는 이 헌법을 크게 칭송하며, 프랑스의 격변과 대비되는 온건한 개혁으로 보았다. 반대로 적들은 이를 동유럽의 자코뱅주의로 그렸다. 온건한 개혁이라는 상과 위험한 혁명이라는 상, 이 두 이미지는 후대의 해석에도 영향을 미쳤다.

[1]

심화

‘유럽 최초, 세계 두 번째’인가: 비교와 단서

이 헌법이 유럽 최초이자 세계 두 번째 근대 헌법이라는 주장은 헌법학자 앨버트 블라우스타인, 그리고 이를 ‘유럽에서 그 유형의 첫 헌법’이라 부른 역사가 노먼 데이비스 등이 널리 되풀이해 왔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정의에 달려 있다. 1755년 코르시카 헌법이 더 앞서지만 코르시카 공화국은 1769년에 사라졌기 때문에 흔히 지속된 국민 헌법의 계보에서 빠진다. 미국의 일부 주 헌법도 연방 헌법보다 앞섰다. 1791년 9월의 프랑스 헌법은 불과 몇 달 뒤에 나왔다. 따라서 폴란드 헌법은 외로운 ‘최초’라기보다 대서양·유럽 세계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련의 실험 가운데 하나였다.

내용 비교도 제각각이다. 폴란드계 미국인 저술가 야체크 옝드루흐는 이 헌법의 자유주의적 성격을 1791년 프랑스 헌법보다는 낮고, 영국이 캐나다에 적용한 1791년 헌법법보다는 높으며, 1794년 프로이센 일반 국법보다는 훨씬 앞서지만 미국 헌법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이런 순위 매기기는 대략적일 수밖에 없다. 폴란드 헌법은 국민 주권, 권력 분립, 대신 책임제 같은 근대 원리를 특권 귀족, 지배적 교회, 군주제 같은 옛 요소와 뒤섞었기 때문이다.

개혁의 사회적 한계도 논쟁거리다. 헌법은 도시민에게 시민권을 넓히고 농민을 국민의 일부로 언급했지만 농노제를 폐지하지 않았다. 유대인은 제한된 보호만 받았고, 그들의 지위를 개선하려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한편 부속 지방의회법은 약 70만 명의 귀족 가운데 약 30만 명, 곧 대귀족이 시키는 대로 투표하곤 하던 가난한 무토지 귀족의 투표권을 빼앗았다. 이를 민주화로 볼지, 한 엘리트를 다른 엘리트로 바꾼 것으로 볼지는 역사가의 관점에 달려 있다.

[1][2]

심화

혁명인가 회복인가: 정당성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관계

채택 방식은 늘 논란이 되었다. 개혁파는 부활절 휴회를 이용했고, 알려진 반대파에게는 소집 통지를 보내지 않았으며, 왕궁을 군대로 둘러쌌다. 당시 반대파는 의회가 스스로 맺은 연맹 규약을 어기고 지방의회가 의원들에게 준 훈령을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타르고비차 연맹은 이날을 ‘혁명이자 음모’라 불렀다. 옹호하는 쪽은 옛 절차가 오랫동안 외국에 조종당해 왔고, 1791년과 1792년 초에 열린 지방의회 대부분이 헌법을 지지했으며, 이것이 그 세기에 외국의 개입 없이 통과된 첫 헌법적 법률이었다고 반박한다. 같은 논리로, 러시아의 총칼 아래 이루어진 1793년 그로드노 의회의 무효화는 합법성이 의심스럽다고 널리 여겨진다.

두 번째 논쟁은 리투아니아에 관한 것이다. 헌법은 하나의 민족과 국가를 말하며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따로 언급하지 않았고, 이는 연합의 이중적 성격을 지키고자 한 많은 리투아니아 의원을 불안하게 했다. 1791년 10월의 ‘두 민족의 상호 보증’은 동등한 대표권을 비롯해 여러 연방적 요소를 유지한 타협이었다. 폴란드 역사학은 오랫동안 이 헌법을 폴란드 민족의 업적으로 강조해 왔지만, 특히 1990년 이후 리투아니아의 학계와 공공 기억은 이를 리투아니아 자신의 헌정 유산으로 점점 더 받아들이고 있으며, 리투아니아에서도 이날을 기념한다.

헌법이 마지막 분할을 불러왔는지도 논쟁거리다. 한쪽은 개혁이 러시아와 프로이센을 자극해 나라의 파멸을 앞당겼다고 본다. 다른 쪽은 분할은 이미 이웃 나라들의 목표였고, 헌법은 ‘무질서’라는 구실을 빼앗았을 뿐이라고 답한다. 발레리안 칼린카, 브와디스와프 스몰렌스키 같은 19세기 역사가에서 20세기의 보구스와프 레시노도르스키에 이르는 대의회 연구의 긴 전통, 그리고 예지 루코프스키, 리처드 버터윅 같은 영어권 분할사 연구자들도 이 두 극 사이를 오가며 논의해 왔다.

[1][4][2]

심화

사료와 연구 방법

주요 1차 사료는 AGAD에 보존되고 영인본으로 출간된 통치법과 대의회의 관련 법률, 인쇄된 의회 일지와 토론 기록, 국왕·포토츠키·코와타이·피아톨리의 서신, 개혁기의 정치 팸플릿, 그리고 이웃 궁정이 개혁을 어떻게 보았는지 알려 주는 바르샤바 주재 외교관들의 보고서다. 1791년에 인쇄된 번역본들은 개혁파가 유럽에 자신들을 어떻게 보이고 싶어 했는지도 드러낸다.

헌법은 처음에는 잃어버린 국가의 상징으로, 나중에는 국경일로 빠르게 신화가 되었기 때문에, 역사가는 문서의 실제 조항과 짧은 시행 기간을 이후에 덧붙여진 의미와 구별해야 한다. 헌법이 실제로 작동한 한 해, 지방의회의 반응, 도시민 운동에 관한 연구는 바르샤바의 유명한 토론을 넘어 당대 사람들에게 헌법이 무엇을 뜻했는지 보여 주었다.

용어도 현대 독자에게 함정이 된다. 연방에서 ‘konstytucja’는 원래 기본 헌장이 아니라 세임이 통과시킨 모든 법률을 뜻했다. 그래서 이 문서 자체는 ‘통치법’이라 불렸다. 마찬가지로 1791년의 ‘국민(naród)’은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이라기보다 주로 귀족의 정치 공동체를 뜻했고, 이제 거기에 도시민이 더해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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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자유 거부권 폐지
의원 한 명이 모든 입법을 취소할 수 있던 권리를 없애고 다수결로 바꾸어, 나라가 마침내 움직일 수 있게 했다.
삼권 분립
입법권은 양원제 세임, 행정권은 국왕과 법의 수호자, 사법권은 선출된 법원에 두었다.
국민 주권
제5조는 시민 사회의 모든 권력이 국민의 의지에서 나온다고 선언했다. 다만 ‘국민’의 범위는 여전히 좁았다.
대신 책임제
국왕은 자신의 명령에 부서하고 세임에 책임지는 대신들을 통해 통치했다. ‘왕은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는 영국 원칙과 닮았다.
세습 군주제
외국이 거듭 조종해 온 국왕 선거를 세습 왕위로 대체했다.
도시민의 권리
왕립도시법은 도시민에게 자의적 체포로부터의 안전, 토지 소유권, 관직 진출권을 주었다.
법의 보호를 받는 농민
농노제를 없애지는 않았지만 농민 보호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개혁이냐 멸망이냐
1차 분할로 더욱 절실해진, 제도를 다시 세우지 않으면 연방이 사라진다는 확신.

기록

  1. 1652년 — 자유 거부권으로 세임 회기가 처음 깨지다.
  2. 1772년 — 1차 분할: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가 연방의 약 3분의 1을 빼앗다.
  3. 1788년 — 10월 6일 바르샤바에서 대의회(4년 의회)가 열리다.
  4. 1791년 — 4월 18일 왕립도시법, 5월 3일 통치법 채택, 10월 22일 두 민족의 상호 보증.
  5. 1792년 — 4월 27일 타르고비차 연맹 결성, 5월 러시아 침공, 7월 24일 국왕이 타르고비차에 가담.
  6. 1793년 — 2차 분할. 11월 23일 그로드노 의회가 헌법을 무효화.
  7. 1794년 — 코시치우슈코 봉기와 포와니에츠 선언. 봉기는 진압되다.
  8. 1795년 — 3차 분할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소멸하다.
  9. 1918년 —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되찾다.
  10. 1919년 —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5월 3일 기념일이 부활하다.
  11. 1951년 — 공산 정권이 5월 3일을 국경일에서 빼다.
  12. 1990년 — 폴란드에서 5월 3일이 국경일로 복원되다.

용어 풀이

세임(Sejm)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의회. 오늘날 폴란드 의회의 하원 이름이기도 하다.
슐라흐타
폭넓은 정치적 특권을 누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층.
자유 거부권(리베룸 베토)
의원 한 명이 세임 회기를 해산하고 그 법률을 무효로 만들 수 있던 권리.
연맹(콘페데라치아)
귀족들이 맹세로 맺은 동맹. 때로 무장했으며, ‘연맹 의회’는 다수결로 결정해 거부권을 피할 수 있었다.
마그나트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대귀족 가문의 일원.
도시민(부르주아)
도시 주민, 특히 왕립 도시의 시민.
농노제
농민이 토지에 묶여 영주에게 노동과 복종의 의무를 지던 제도.
분할
1772, 1793, 1795년 이웃 열강이 연방의 영토를 나누어 병합한 일.
법의 수호자(Straż Praw)
헌법이 만든 국왕의 대신 회의로, 국왕과 함께 행정권을 행사했다.
타르고비차 연맹
러시아의 후원을 받아 헌법을 무너뜨린 1792년의 대귀족 동맹. 폴란드에서 그 이름은 반역의 대명사가 되었다.

묻고 답하기

왜 ‘5월 3일 헌법’이라고 부르나요?

1791년 5월 3일에 통과되었기 때문이에요. 공식 이름은 ‘통치법’이었어요.

정말 유럽 최초의 헌법이었나요?

흔히 유럽 최초의 근대적 성문 국민 헌법으로 불린다. 1755년 코르시카에도 헌법이 있었지만 그 공화국은 오래가지 못했고, 프랑스 헌법은 몇 달 뒤인 1791년 9월에 나왔다.

농민을 해방했나요?

아니요. 농민을 법의 보호 아래 두었지만 농노제는 남았어요. 1794년 코시치우슈코의 포와니에츠 선언이 한 걸음 더 나아갔어요.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왜 반대했나요?

개혁으로 강해진 연방은 통제하기 어렵고 1772년에 잃은 땅을 되찾으려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적들은 또 이 헌법을 프랑스 같은 혁명의 위협으로 그렸다.

채택은 합법적이었나요?

논쟁이 있다. 개혁파는 부활절 휴회를 이용하고 왕궁을 경비했지만, 이후 지방의회 대부분이 헌법을 지지했고, 1793년의 무효화는 러시아의 군사적 압력 아래 이루어졌다.

폴란드뿐 아니라 리투아니아에도 중요한가요?

그렇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공동 국가를 위해 채택되었고, 리투아니아어 번역이 만들어졌으며, 뒤이은 ‘두 민족의 상호 보증’이 연합 안에서 리투아니아의 자리를 정했다.

오늘날 5월 3일은 어떻게 기념하나요?

폴란드의 국경일로, 공식 행사와 국기 게양이 있고 해외 폴란드계 공동체는 퍼레이드를 연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Constitution of 3 May 1791. Wikipedia
  2. Konstytucja 3 maja. Wikipedia (Polish)
  3. Great Sejm. Wikipedia
  4. Targowica Confederation. Wikipedia
  5. Second Partition of Poland. Wikipedia
  6. Jerzy Lukowski, The Partitions of Poland: 1772, 1793, 1795. Longman, 1999
  7. Norman Davies, 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 Oxford University Press, 1981
  8. Richard Butterwick,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1733–1795: Light and Flame. Yale University Press, 2020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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