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티루쿠랄(쿠랄)

திருக்குறள் (Tirukkuṟaḷ, 티루쿠랄)

약 450–500년 · 마일라포르(첸나이), 티루발루바르와 전통적으로 연결되는 곳

AI 작성 · AI 사실 검수

Claude가 쓰고 Codex(gpt-6.1-sol)가 공개 출처와 대조해 사실·연대·인용과 영어·한국어판을 독립 검수했습니다. 사람 전문가의 검토는 거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AI 검수: 2026-10-03. 찾아서 고친 문제 11건.

한 문장으로

『티루쿠랄』, 곧 『쿠랄』은 덕, 재물과 통치, 사랑을 다룬 두 줄짜리 시 1,330수를 모은 타밀어 고전으로, 티루발루바르라는 시인의 작품으로 전하며 대략 5세기 무렵에 지어졌다고 보지만 연대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티루쿠랄(쿠랄)
이미지: பேரா. சுந்தரசண்முகனார் · CC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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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가르침 하나하나가 짧은 두 줄에 쏙 들어가는 책을 떠올려 보자. 학교 가는 길에 한 구절을 외우면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않을 것이다. 흔히 『쿠랄』이라고 줄여 부르는 『티루쿠랄』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 사람들이 2천 년 넘게 말하고 써 온 타밀어로 쓰였다.

『쿠랄』에는 ‘쿠랄’이라고 부르는 두 줄짜리 작은 시가 1,330수 들어 있다. 이 시들은 정확히 10수씩 133개 장으로 묶여 있다. 보물이 열 개씩 든 작은 상자 133개를 생각하면 된다. 장마다 친절하게 대하기, 진실 말하기, 고마움 잊지 않기, 배우기, 좋은 친구 고르기,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법, 농부가 왜 소중한지, 그리고 사랑에 빠지면 어떤 기분인지까지 이야기한다.

유명한 구절 하나는 나를 괴롭힌 사람을 ‘벌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에게 잘해 주어서 스스로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구절은 남에게 받은 은혜를 잊는 것이 거의 어떤 잘못보다도 나쁘다고 한다. 말하기는 쉽지만 지키기는 어려운 생각들이라서, 사람들은 지금도 이 책을 되풀이해 읽는다.

누가 언제 『쿠랄』을 썼는지는 아무도 확실히 모른다. 전통은 지은이를 티루발루바르라고 부르고 그에 관한 이야기도 많지만, 대부분은 몇백 년이 지난 뒤에 기록된 것이다. 학자들은 그가 약 2,300년 전 사람인지 1,500년 전쯤 사람인지, 또 어떤 종교를 믿었는지(혹은 믿지 않았는지)를 두고 아직도 토론한다.

오늘날 인도 남부의 타밀나두주에서 『쿠랄』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구절을 외우고, 인도 남쪽 끝 칸니야쿠마리 앞바다의 바위 위에는 13층 건물만 한 티루발루바르 석상이 서 있다.

한눈에 보기

무엇
고전 타밀어로 쓴 짧은 윤리·실천 격언시(2행시) 모음
지은이
티루발루바르(발루바르)의 작품으로 전한다. 본문에는 지은이 이름이 없고, 그의 생애에 관해 믿을 만한 기록은 없다
시기
논쟁 중. 현대의 여러 설은 대개 기원전 300년 무렵부터 6세기에 걸쳐 있다(1886년 포프는 800–1000년설까지 내놓았다). 많은 학자가 카밀 즈벨레빌의 450–500년설을 따른다
장소
인도 아대륙 남부의 타밀어권. 전승은 시인을 마일라포르(오늘날 첸나이의 일부)와 마두라이에 연결한다
구성
1,330수, 133장(장마다 10수). 아람(덕, 38장)·포룰(재물과 통치, 70장)·인밤 또는 카맘(사랑, 25장)의 3부
운율
쿠랄 벤바: 두 줄로, 첫 줄은 운각 4개, 둘째 줄은 운각 3개
주석
전통은 중세 주석가 열 명을 꼽는다. 거의 온전히 남은 주석은 다섯이며, 그중 파리멜라라카르(13세기 후반)의 주석이 표준이 되었다
인쇄와 번역
1812년 마드라스에서 첫 인쇄. 베스키의 라틴어역(1730, 1–2부), 드루·라자루스의 영어 산문 완역(1840년대–1885)과 포프의 운문 완역(1886). 지금은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쉬움

『티루쿠랄』은 어떤 책인가

『티루쿠랄』은 고전 타밀어로 쓴 지혜 문학이다. 제목은 ‘거룩한’, ‘훌륭한’을 뜻하는 존칭 티루(tiru)에, 이 책의 모든 시가 따르는 아주 짧은 두 줄 시형의 이름인 쿠랄(kuṟaḷ)을 붙인 말이다. 흔히 『쿠랄』이라고 줄여 부르고, 한 수 한 수도 ‘쿠랄’ 또는 2행시라고 한다.

이 책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 대신 잘 사는 법에 관한 1,330개의 독립된 격언을 내놓는다. 화를 다스리는 법이나 남을 시기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 같은 개인적인 물음에서, 통치자가 신하를 고르고 세금을 거두고 나라를 지키는 법 같은 공적인 문제까지 폭이 넓다. 마지막 부분은 남녀의 사랑으로 넘어가는데, 연인들 자신의 감정을 통해 그려진다.

『쿠랄』은 후대 전통이 ‘파티넨킬카나쿠(18편의 소품)’라는 이름으로 묶은, 주로 교훈적인 타밀 문학 작품 열여덟 편 가운데 하나이며, 일찍부터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6세기 무렵의 타밀 불교 서사시 『마니메칼라이』가 이미 이 책의 한 수를 낱말 하나만 살짝 바꾸어 인용하면서 지은이를 ‘거짓말하지 않는 시인’이라고 부른다.

『쿠랄』은 어떤 신을 섬기고 어떤 의례를 치르라고 말하지 않은 채 사람의 행실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여러 종교의 사람들이 이 책을 저마다 자기 것으로 여겼고, 거듭 번역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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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책의 짜임: 3부, 133장, 1,330수

『쿠랄』은 보기 드물게 규칙적이다. 장(아디가람)이 133개이고, 장마다 제목이 알려 주는 한 가지 주제로 정확히 10수가 들어 있다. 장들은 다시 세 부(팔)로 묶인다. 첫째 「아라투팔」(덕의 부)은 38장 380수, 둘째 「포루트팔」(재물 또는 통치의 부)은 가장 길어서 70장 700수, 셋째 「카마투팔」 또는 「인바투팔」(사랑의 부)은 25장 250수다.

오늘날의 판본은 각 부 안에 더 작은 묶음도 표시한다. 덕의 부는 「신을 찬양함」, 「비의 훌륭함」으로 시작하는 서장 네 개로 열린 뒤, 가장(家長)의 덕을 다룬 장들과 출가자의 덕을 다룬 장들을 거쳐 운명에 관한 한 장으로 끝난다. 사랑의 부는 고전 타밀 사랑시의 두 큰 국면, 곧 혼인 전의 숨은 사랑(칼라부)과 혼인한 뒤의 사랑(카르푸)을 따른다. 뒤에서 보듯, 옛 주석가들이 이 작은 묶음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다.

모든 수가 쿠랄 벤바라는 같은 운율을 쓴다. 첫 줄은 운각(시르) 4개, 둘째 줄은 3개여서 한 수는 일곱 운각으로 이루어지고, 짧고 단호한 둘째 줄로 끝난다. 이 형식은 극도의 압축을 요구한다. 논증과 비유와 결론이 오늘날의 문자 메시지 한 통보다 짧은 공간에 들어가야 한다. 첫 수가 그 문체를 잘 보여 준다. “글자들 가운데 ‘아’가 첫째이듯, 세상의 첫째는 태초의 주님이다.”

세 부는 산스크리트 학문이 말하는 ‘인생의 네 가지 목적’ 가운데 세 가지, 곧 다르마(덕), 아르타(재물과 권력), 카마(즐거움)와 맞아떨어진다. 넷째 목적인 해탈(목샤)에는 따로 부가 없는데, 주석가 파리멜라라카르는 해탈은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풀었다. 이 구성이 산스크리트 전통에서 빌려 온 것인지, 타밀의 사유에서 자라난 것인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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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무엇을 가르치나: 덕, 자비, 배움, 통치, 사랑

덕의 부는 좋은 사람의 모습을 차근차근 쌓아 올린다. 사랑하는 가족, 손님 대접, 다정한 말, 감사로 이루어진 가정생활을 높이 친다. 한 수는 다른 어떤 선을 무너뜨린 사람에게도 빠져나갈 길은 있지만, 받은 은혜를 저버린 사람에게는 길이 없다고 말한다(110수). 이어지는 장들은 시기, 험담, 탐욕, 분노를 경계하고, 적을 대하는 데에도 높은 기준을 세운다. “나를 해친 이를 벌하려거든, 그에게 선을 베풀어 부끄럽게 하라”(314수).

모든 생명에 대한 자비는 이 책의 가장 강한 주제 가운데 하나다. 자비를 다룬 장 바로 뒤에 「고기를 먹지 않음」 장이 와서, 남의 살을 먹어 제 살을 찌우는 사람이 어찌 자비를 지닐 수 있느냐고 묻는다(251수). 「죽이지 않음」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덕스러운 행위란 무엇인가? 죽이지 않는 것이다. 죽임은 다른 모든 악을 불러온다”(321수). 많은 학자가 이 엄격한 불살생과 채식을 자이나교 윤리와 연결하지만, 인도의 다른 전통에도 같은 생각이 있다.

재물의 부는 왕과 신하와 백성을 위한 실용 지침이다. 먼저 통치자에게 필요한 것을 꼽는다. 군대, 백성, 재원, 신하, 동맹, 요새다(381수). 이어서 교육(“배워야 할 것을 흠 없이 배우고, 배운 뒤에는 그대로 살라”, 391수), 아첨꾼의 위험, 바른 통치와 폭정, 첩자의 활용, 외교, 우정, 술과 도박 같은 악덕을 다룬다. 농사에는 특별한 영예를 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쟁기를 따른다. 그러니 고되어도 농사가 으뜸이다”(1031수).

사랑의 부는 도덕 논설과는 전혀 다르다. 앞선 타밀 사랑시의 관습을 따라 사랑하는 남자, 사랑받는 여인, 그 여인의 벗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시다. 한 젊은이는 어떤 여인을 만나 그녀의 눈에 두 가지 눈길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병을 주고, 다른 하나는 그 병의 약이다”(1091수). 뒤의 장들은 떨어져 있는 동안의 그리움, 마을의 소문, 부부의 작은 다툼을 그리고, 맨 마지막 장은 토라졌다가 화해하는 기쁨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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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티루발루바르는 누구인가: 알려진 것과 전설

엄밀히 말하면 지은이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쿠랄』 자체는 아무 이름도 대지 않는다. 가장 이른 언급인 『마니메칼라이』는 그를 그저 ‘포이일 풀라반’, 곧 ‘거짓말하지 않는 시인’이라고 부를 뿐이다. ‘거룩한 발루바르’라는 뜻의 티루발루바르라는 이름은 후대 전승, 특히 마두라이에 있었다는 전설 속 타밀 학술원(상감)의 시인들이 지었다고 하는 찬양시 모음 『티루발루바말라이』에 나타나는데, 대부분의 학자는 이 모음을 10–11세기 무렵의 것으로 본다. ‘발루바르’조차 개인 이름이 아니라 칭호일 수 있다. 이 말은 옛 타밀 사회에서 왕의 북잡이이자 포고를 알리는 일을 맡은 집단을 가리키기도 했다.

이 빈자리를 둘러싸고 풍성한 성인전이 자라났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서 발루바르는 브라만 아버지와 낮은 카스트 어머니(흔히 바가반과 아디라고 부른다)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시 『카필라르 아가발』은 늦은 시기의 작품으로, 즈벨레빌은 15세기로 보았다. 다른 이야기들은 그를 마일라포르의 직조공으로 만들거나, 바수키라는 헌신적인 아내, 또는 엘렐라싱간이라고 불리는 해상 무역 선주를 벗으로 붙여 준다. 한 이야기에서는 마두라이 학술원의 시인들이 처음에 신분이 낮은 지은이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그의 책을 학술원의 의자 위에 올려놓자 의자가 줄어들어 『쿠랄』만 남았다고 한다.

오늘날 전하는 형태의 이야기들은 대개 18–19세기에 모양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때는 타밀 학자들과 유럽 선교사·관리들이 모두 이 시인에 관한 정보를 열심히 모으던 시기였다. 문학사가 스튜어트 블랙번은 이 전설, 특히 낮은 신분의 천재가 끝내 인정받는다는 줄거리가 카스트, 타밀어와 산스크리트어의 관계, 타밀 문명의 오래됨을 둘러싼 19세기의 논쟁을 담는 그릇이 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본문에서 나온다. 지은이는 앞선 타밀 시, 특히 사랑의 부가 전제하는 사랑시의 관습을 잘 알았고, 법·통치·사랑에 관한 산스크리트 저작에도 보이는 생각들에 익숙했다. 중세 주석가들은 모두 이 책을 한 사람의 창작으로 다루었지만, 현대 학자 가운데 몇몇은 여러 손을 거쳐 엮인 모음집일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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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언제 지어졌나: 아직 결론 나지 않은 연대

『쿠랄』이 언제 지어졌는지 정해 주는 비문도, 필사본도, 연대가 분명한 언급도 없다. 그래서 모든 연대는 추론이다. 제안된 연대는 거의 천 년에 걸쳐 있다. 『쿠랄』이 셋째 타밀 학술원에 바쳐진 마지막 작품이라는 전설을 따르는 타밀 전통주의자들은 기원전 300년 무렵까지 올려 잡았다. 기원전 1세기나 기원후 1세기를 주장한 사람들도 있다.

20세기 초, 학자 마라이말라이 아디갈이 이끈 타밀 부흥 운동가들은 발루바르가 태어난 해를 기원전 31년으로 정했다. 새로운 증거에서 나온 결론이라기보다 상징적인 선택이었지만, 이 해는 ‘티루발루바르 연호’의 기점이 되었고, 이 연호는 나중에 타밀나두주의 공문서에서 서력과 함께 쓰이게 되었다.

대부분의 전문 연구자는 본문의 언어를 근거로 더 늦은 연대를 주장한다. 『쿠랄』에는 가장 오래된 층의 타밀 시에 없는 문법 형태와 상당한 비율의 산스크리트 차용어가 있고, 그 층 이후에 유행한 벤바 운율을 쓰며, 대개 기원후 첫 몇 세기로 연대가 매겨지는 산스크리트 논서들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근거로 타밀 학자 S. 바이야푸리 필라이는 6세기 또는 그 이후로, 체코의 타밀학자 카밀 즈벨레빌은 처음에 450–550년(1973)을 제시했다가 450–500년(1974)으로 좁혔는데, 이 연대는 오늘날 널리 인용된다. 블랙번은 500년 무렵을 현재 학계의 합의로 소개했다.

가장 늦은 연대에는 상한선이 있다. 『쿠랄』을 인용하는 『마니메칼라이』가 대개 6세기 무렵의 작품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물론 이 연대도 논쟁 중이다). 시인이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흡수했다고 믿은 G. U. 포프가 19세기에 내놓은 800–1000년설은 지금은 지지받지 못한다. 여기서는 즈벨레빌의 450–500년을 확정된 사실이 아닌 작업용 추정치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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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중세 주석가 열 명과 파리멜라라카르의 권위

짧고 응축된 시는 풀이를 부른다. 『쿠랄』은 중세 타밀 문학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주석을 얻었다. 전해 오는 ‘떠도는 시’ 한 수는 주석가 열 명의 이름을 든다. 타루마르, 마나쿠다바르, 타마타르, 나차르, 파리디(파리티야르), 파리멜라라카르, 티루말라이야르, 말라르, 파리페루말, 칼링가르다. 마나쿠다바르, 파리디, 칼링가르, 파리페루말, 파리멜라라카르의 주석은 거의 온전히 남아 있고, 타루마르, 타마타르, 나차르의 주석은 조각으로만 전하며, 나머지는 사라졌다.

주석가들의 연대는 불확실해서, 학자들은 이들을 10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놓는다. 마나쿠다바르는 일반적으로 현존하는 가장 이른 주석가로 여겨지며 10세기 후반 무렵에 썼는데, 그의 글에는 그 전에도 본문을 풀이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파리멜라라카르는 13세기 후반에 썼고, 흔히 산스크리트와 타밀 학문에 두루 능한 칸치푸람 출신의 브라만 학자로 소개된다.

주석가들은 낱말 풀이만 한 것이 아니라 본문을 배열하기도 했다. 모두가 세 부, 133장, 장마다 거의 같은 열 수를 받아들이지만, 각 부를 어떤 하위 묶음으로 나눌지, 장 안에서 시를 어떤 순서로 놓을지, 그리고 특히 덕의 부에서는 몇몇 장의 순서와 소속까지 서로 다르다. 예컨대 마나쿠다바르는 후대 판본이 출가자의 덕으로 분류하는 장 몇 개를 가장의 덕에 넣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독자가 보는 시의 순서부터가 하나의 해석이다.

이긴 쪽은 파리멜라라카르의 판본이었다. 그의 주석만이 따로 복주(複註)를 얻었고, 1812년의 첫 인쇄본이 그의 배열을 따랐으며, 그 뒤 거의 모든 판본과 번역이 그렇게 했다. 그의 해석에는 방향이 있었다. 그는 아람(덕)을 마누 법전 같은 문헌이 명하는 것을 행하고 금하는 것을 피하는 일로 정의했다. 20세기에 풀라바르 쿨란타이 같은 타밀 작가들은 『쿠랄』을 브라만적·산스크리트적 틀에서 풀어내려고 그에 맞서는 새 주석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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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그 무렵 세계는: 남아시아의 윤리시와 왕도(王道)의 학문

『쿠랄』이 5세기 무렵에 지어졌다면, 그것은 남아시아 곳곳에서 좋은 삶의 이상이 짧고 외우기 쉬운 시와 체계적인 논서로 정리되던 시기에 속한다. 가장 분명한 연결은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생각과 형식의 공유이며, 이는 텍스트들 자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연결은 행실의 ‘학문’인 산스크리트 샤스트라다. 『쿠랄』의 세 부는 다르마·아르타·카마라는 산스크리트의 삼분법과 짝을 이루는데, 이 셋은 각각 자기 문헌을 가지고 있었다. 『마누 법전』 같은 법전, 통치를 다룬 『아르타샤스트라』, 사랑을 다룬 『카마수트라』다. 몇몇 대목은 아주 가깝다. 재물의 부 첫 수가 왕이 갖추어야 한다고 꼽는 여섯 가지에 왕 자신을 더하면, 『아르타샤스트라』 제6권 첫머리에 나오는 국가의 일곱 요소와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학자들은 차이도 지적한다. 『쿠랄』은 『아르타샤스트라』에 없는 우위를 농민에게 주며, 여러 타밀 학자가 강조하듯 덕을 카스트에 따라 나누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말한다. 같은 무렵 북인도에서는 굽타 왕조(약 320–550)가 칼리다사의 시와 희곡으로 대표되는 산스크리트 궁정 문학의 꽃을 피웠는데, 세련된 수사의 세계로서 『쿠랄』의 소박한 격언과는 사뭇 달랐다.

둘째 연결은 불교와 자이나교의 시 형식 가르침이다. 26개 주제별 장에 423게송을 담은 팔리어 『담마파다』(『법구경』)는 5세기에 이미 오래된 텍스트였고, 그 무렵 스리랑카에서 활동한 학승 붓다고사가 지었다고 전하는 큰 주석서가 편찬되었다. 『담마파다』도 『쿠랄』처럼 짧은 윤리시를 주제별 장 제목 아래 배열하며, 현대 학자들은 두 책을 비교한 연구도 썼다. 타밀어 안에서는 자이나교의 『날라디야르』가 있다. 역시 덕·재물·사랑으로 나뉜 400수의 4행 교훈시로, 『쿠랄』과 짝을 이루어 타밀 속담이 둘을 나란히 일컬을 정도다.

셋째 연결은 『쿠랄』이 처음부터 종교의 경계를 넘나들었다는 사실이다. 불교 서사시 『마니메칼라이』는 자기 이야기를 뒷받침하려고 『쿠랄』의 한 수를 인용하고, 훨씬 뒤 14세기의 한 자이나교 주석가는 『쿠랄』을 ‘우리의 경전’이라고 불렀다. 『쿠랄』은 이렇게 힌두교도, 자이나교도, 불교도가 불살생, 자기 절제, 좋은 통치에 관한 같은 생각의 밑천을 함께 쓰고 또 서로 차지하려 했던 남아시아의 공통된 교훈시 문화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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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현대 타밀나두의 『쿠랄』: 기념물, 초상, 정치

20세기에 『쿠랄』은 타밀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다. 브라만과 산스크리트 문화의 지배라고 여긴 것에 맞선 드라비다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 책을 독자적이고 윤리적인 타밀 문명의 증거로 내세웠다. 사회 개혁가 페리야르 E. V. 라마사미는 처음에는 이 책이 브라만의 법전과 너무 가깝다며 물리쳤지만, 나중에는 드라비다 문화의 토대라고 칭송했다. 타밀나두주는 해마다 1월에 ‘티루발루바르의 날’을 기념하며, 버스를 비롯한 공공장소에 『쿠랄』의 구절이 걸려 있다.

시인의 모습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 화가 K. R. 베누고팔 샤르마가 그린 초상은 흰옷을 입고 긴 수염을 기른 발루바르를 종교나 카스트의 표지 없이 그렸는데, 1960년대에 공식 인정을 받았다. 1964년 당시 인도 부통령 자키르 후사인이 이 초상을 공개했고, 이후 관공서와 정부 간행물에 실리는 표준 모습이 되었다. 화가는 『쿠랄』이 특정 교리가 아니라 사람이 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치기 때문에 종파의 표지를 넣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기념물이 뒤따랐다. 첸나이의 발루바르 코탐은 1970년대 중반 M. 카루나니디 주총리 정부 때 건축가 V. 가나파티 스타파티의 설계로 세워졌다. 사원 수레를 돌로 재현한 구조물과 1,330수 전부를 화강암에 새긴 회랑이 있으며, 1976년에 문을 열었고 보수를 거쳐 2025년에 다시 열었다. 2000년 1월 1일에는 카루나니디가 칸니야쿠마리 앞바다의 바위 위에 가나파티 스타파티가 만든 높이 133피트(약 41미터)의 티루발루바르 석상을 공개했다. 38피트의 받침대는 덕을 다룬 38장을, 95피트의 상은 재물과 사랑의 두 부를 상징한다.

시인의 모습에 담긴 의미가 큰 만큼, 그것을 바꾸면 갈등이 생긴다. 2019년 11월 인도인민당(BJP) 타밀나두 지부는 사프란색 옷을 입고 성회(聖灰)를 바르고 루드락샤 염주를 건 발루바르의 그림을 올렸다. DMK를 비롯한 야당들은 보편적인 시인을 힌두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끌어들이려 한다고 비판했고, BJP 지도자들은 오히려 드라비다 정당들이 예전에 그의 힌두 표지를 지워 버렸다고 반박했다. 곧이어 탄자부르 근처 필라이야르파티의 발루바르상이 훼손되면서, 시인의 모습을 누가 정할 수 있느냐는 논란은 더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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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여러 관점

연대를 보는 학파. 전통적·타밀 민족주의적 학파는 발루바르를 기원전 마지막 몇 세기에 놓고, 상감 전설과, 일부는 상징적인 기원전 31년과 연결한다. 바이야푸리 필라이와 즈벨레빌로 대표되는 문헌학적 학파는 언어, 운율, 차용어,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를 근거로 대략 5–6세기를 주장한다. 숫자 뒤에는 더 깊은 물음이 있다. 『쿠랄』을 가장 오래된 타밀의 과거가 낳은 작품으로 볼 것인가, 더 늦고 더 섞인 문화의 작품으로 볼 것인가. 어느 극단도 증명되지 않았다. 5세기 또는 6세기 초설이 학계에서 가장 넓은 지지를 받지만, 전문가들은 여전히 열린 문제로 본다.

종교적 소속. 남인도의 거의 모든 종교 공동체가 이 시인을 자기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즈벨레빌과 자이나교 학자 A. 차크라바르티를 비롯한 많은 학자는 불살생, 채식, 자기 절제에 대한 강조와, ‘꽃 위를 걸은 이’, ‘여덟 가지 덕을 지닌 이’ 같은 신의 칭호에서 자이나교적 배경을 본다. 다른 이들은 다르마·아르타·카마의 구성, 대개 비슈누를 가리키는 ‘연꽃 눈을 지닌 이’라는 표현, 파리멜라라카르의 주석을 근거로 힌두교 작품으로 읽으며, 그중 일부는 특히 샤이바 싯단타를 주장한다. 달리트 불교 개혁가 이요티 타스는 불교 작품이라 했고, 포프는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보았으며, 많은 현대 독자는 종파를 넘어서는 성격을 강조한다. 학자 프랑수아 그로가 지적했듯, 연꽃의 이미지조차 비슈누, 브라흐마, 자이나교의 티르탕카라, 붓다에게 두루 쓰인다.

산스크리트인가 타밀인가. 이와 이어진 논쟁은 『쿠랄』이 산스크리트 문학에 얼마나 빚졌느냐를 묻는다. 한쪽 끝에서 R. 나가스와미는 이 책이 본질적으로 산스크리트 논서의 요약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쪽 끝에서 드라비다 전통의 저술가들은 산스크리트적·브라만적 가치를 의도적으로 거부한 책으로 읽었다. 그 사이에서 많은 학자는 『쿠랄』이 산스크리트의 생각을 알고 왕국의 요소 목록처럼 때로 아주 가깝게 반향한다는 점은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타밀 시의 형식으로 얼마나 다시 빚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S. 마하라잔 같은 이들은 『쿠랄』의 아람이 다르마샤스트라의 카스트별 의무와 달리 보편적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파리멜라라카르처럼 브라만적 틀 안에서 읽는다.

번역의 선택. 번역의 선택은 해석을 바꿀 수 있고, 어떤 번역에는 뚜렷한 입장이 드러난다. 베스키는 사랑의 부를 뺐고, 포프는 시인을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절충주의자로 그렸다. 번역자는 아람을 ‘덕’으로 옮길지, ‘의로움’으로 옮길지, 산스크리트 색채가 짙은 ‘다르마’로 옮길지, 첫 수의 ‘아디 바가반’을 ‘신’으로, ‘태초의 주님’으로, 아니면 번역하지 않은 이름으로 둘지 정해야 한다. 거의 모든 번역처럼 파리멜라라카르의 순서와 하위 묶음을 따르는 것도 중세의 한 해석을 그대로 옮겨 오는 일이다. 그래서 여러 번역을 비교하면 『쿠랄』의 종교와 산스크리트 문화와의 관계에 대한 서로 다른 전제가 드러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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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증거와 방법: 지은이도 연대도 없는 텍스트 읽기

『쿠랄』 연구는 독특한 증거에 기대고 있다. 친필 원고도, 이른 시기의 필사본도, 바깥에서 전하는 전기도 없다. 지어졌을 법한 시기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필사본 사이에는 천 년쯤의 간격이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세 종류의 증언에 의지한다. 다른 작품 속 인용(『마니메칼라이』의 55수 인용, 그리고 일람푸라나르의 『톨카피얌』 주석처럼 수백 수를 인용하는 문법서 주석들), 시의 순서를 저마다 달리 매긴 중세 주석들, 그리고 언어와 내용이라는 내적 증거다.

어느 증거에나 한계가 있다. 인용은 어떤 시가 어느 때까지 존재했음을 보여 주지만, 책 전체가 있었는지, 어떤 순서였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주석은 본문이 어떻게 읽혔는지 보여 주지만 본문을 다시 빚기도 했고, 현대 인쇄본은 파리멜라라카르 하나만 따르면서 주석가들 사이의 이견을 가려 버렸다. 언어에 근거한 연대 추정은 다른 타밀 텍스트들의 연대에 기대는데, 그 연대들도 논쟁 중이다. 그래서 제이슨 W. 스미스의 연구 같은 최근 학계의 일부는 역사 속 지은이와 그의 종교를 찾는 일을 접어 두고, 독자가 실제로 손에 든 형태의 텍스트가 독자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묻는다. 블랙번이 전설에 대해 그랬듯, 전설과 초상과 기념물이 19–20세기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추적하는 일도 하나의 연구 분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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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아람(덕)
첫째 부의 주제인 바른 행실. 손님 대접과 감사 같은 가정의 의무, 그리고 출가자의 자기 절제와 불살생을 아우른다. 산스크리트의 다르마와 같은 것으로 볼지는 논쟁거리다.
포룰(재물과 통치)
통치자, 신하, 동맹, 군대, 돈, 우정, 일로 이루어진 실제 세계. 70장에 이르는 가장 긴 부에서 다룬다.
인밤 또는 카맘(사랑)
연애와 혼인 속 남녀의 사랑. 고전 타밀 사랑시의 관습을 따라 연인들의 목소리로 그린다.
불살생과 채식
26장(고기를 먹지 않음)과 33장(죽이지 않음)은 모든 생명에 대한 자비를 핵심 덕으로 삼는다. 흔히 자이나교 윤리와 연결되는 입장이다.
감사
11장은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것을 근본 의무로 다룬다. 은혜를 저버리는 일은 빠져나갈 길이 없는 거의 유일한 잘못으로 그려진다.
해악을 선으로 갚기
해를 입으면 친절로 갚아 잘못한 이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라는 이상(314수). 현대의 비폭력 옹호자들도 인용했다.
농사의 으뜸
농사를 다룬 장은 다른 모든 일이 쟁기질하는 사람에게 기대므로 농사가 으뜸가는 생업이라고 말한다.

기록

  1. 약 기원전 31년 — 기원전 31년: 타밀 부흥 운동가들이 나중에 발루바르의 탄생 연도로 정한 해. 역사적 증거가 아닌 현대의 관례로, 오늘날 ‘티루발루바르 연호’의 기점이다.
  2. 약 450년 — 카밀 즈벨레빌이 본 유력한 성립 시기(450–500년). 다른 현대의 설은 대개 기원전 300년 무렵부터 6세기까지 걸쳐 있다.
  3. 약 550년 — 대개 6세기 무렵으로 보는 타밀 불교 서사시 『마니메칼라이』가 『쿠랄』의 한 수를 인용하며 지은이를 ‘거짓말하지 않는 시인’이라고 부른다.
  4. 약 975년 — 마나쿠다바르가 일반적으로 현존 최고(最古)로 여겨지는 『쿠랄』 주석을 쓴다(10세기 후반).
  5. 약 1275년 — 파리멜라라카르가 주석을 쓴다(13세기 후반). 이 주석은 훗날 본문 배열과 해석의 표준이 된다.
  6. 1730년 — 예수회 선교사 베스키가 덕의 부와 재물의 부를 라틴어로 옮긴다.
  7. 1812년 — 『쿠랄』이 마드라스에서 처음 인쇄된다. 파리멜라라카르의 배열을 따른다.
  8. 1886년 — G. U. 포프가 런던에서 한 사람이 운문으로 옮긴 첫 영어 완역을 펴내고, 주석에 베스키의 라틴어역과 엘리스의 영어역을 다시 싣는다.
  9. 1908년 — 레프 톨스토이가 「한 힌두인에게 보내는 편지」(12월 14일)에서 ‘힌두 쿠랄’을 인용한다. 간디가 뒤에 서문을 붙여 구자라트어로 옮긴다.
  10. 1964년 — 종파 표지 없이 흰옷을 입은 K. R. 베누고팔 샤르마의 발루바르 초상을 자키르 후사인 부통령이 공개하고, 이 초상이 공식 모습이 된다.
  11. 1976년 — 1,330수 전부를 화강암에 새긴 기념관 발루바르 코탐이 첸나이에서 문을 연다.
  12. 2000년 — 1월 1일, 칸니야쿠마리 앞바다 바위 위에 높이 133피트의 티루발루바르 석상이 공개된다.

용어 풀이

쿠랄 벤바(kuṟaḷ veṇpā)
『쿠랄』의 두 줄 타밀 운율. 첫 줄은 운각 4개, 둘째 줄은 3개다.
아디가람(atikāram)
『쿠랄』의 장. 모두 133장이며, 장마다 한 주제로 10수가 들어 있다.
팔(pāl)
『쿠랄』의 세 부. 아라투팔(덕), 포루트팔(재물), 카마투팔(사랑).
상감(Caṅkam)
마두라이에 있었다는 전설 속 타밀 시인 학술원. 가장 오래된 층의 타밀 시를 가리키는 이름으로도 쓰인다.
파티넨킬카나쿠(Patiṉeṇkīḻkkaṇakku)
‘18편의 소품’. 『쿠랄』과 『날라디야르』를 포함해 주로 교훈적인 타밀 작품들을 후대에 묶은 이름.
우라이(urai)
타밀 텍스트를 한 수씩 풀이하는 산문 주석. 『쿠랄』에는 전통적으로 주석가 열 명이 있다.
푸루샤르타(삼목적, trivarga)
산스크리트의 ‘인생의 목적’. 다르마·아르타·카마(삼목적)에 해탈(목샤)을 더한다.
아감과 푸람(akam, puṟam)
‘안’과 ‘밖’. 사랑과 공적 삶을 다루는 고전 타밀 시의 두 큰 갈래로, 『쿠랄』의 사랑의 부와 통치의 부에 메아리친다.

묻고 답하기

왜 모든 장이 꼭 10수씩인가요?

지은이가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했는지, 뒤에 편집자들이 고르게 맞췄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현존하는 중세 주석이 모두 이미 10수씩 133장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 배열은 적어도 천 년쯤 되었다.

티루발루바르는 정말 있었던 사람인가요?

누군가 『쿠랄』을 지었고, 중세 주석가들은 모두 한 사람의 작품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이름과 생애는 알 수 없다. 부모, 아내, 기적에 관한 이야기는 훨씬 뒤에 기록되었고, 역사가들은 이를 전설로 본다.

『쿠랄』은 자이나교도가 썼나요, 힌두교도가 썼나요, 아니면 다른 누구인가요?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자이나교적 배경을 뒷받침하는 강한 논거가 있고, 힌두교적 해석도 오래되고 널리 퍼져 있으며, 의도적으로 종파를 넘어선 작품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대부분의 학자는 증거만으로는 결론을 낼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

『쿠랄』은 성경이나 『논어』보다 오래되었나요?

아마 아닐 것이다. 일부 타밀 전통은 기원전 마지막 몇 세기로 보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는 5–6세기 무렵으로 본다. 이는 히브리 성경의 대부분과 공자의 『논어』보다 늦다.

초기 번역자들은 왜 사랑의 부를 뺐나요?

베스키는 1730년에 앞의 두 부만 옮겼는데, 흔히 선교사가 사랑의 시를 번역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설명된다. 포프를 비롯한 뒤의 번역자들은 세 부를 모두 펴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본문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대부분의 시는 글자가 안정되어 있지만, 주석가들은 이본(異本)도 기록한다. 더 크게 바뀐 것은 배열이다. 현대 판본의 장 안 시 순서, 하위 묶음, 그리고 덕의 부 일부 장의 순서는 파리멜라라카르에게서 왔고, 다른 주석가들은 다르게 배열했다.

칸니야쿠마리 석상은 왜 133피트인가요?

높이가 『쿠랄』의 133장과 맞추어져 있다. 38피트의 받침대는 덕의 부 38장을, 95피트의 상은 나머지 두 부를 나타낸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Jason William Smith, Tacit Tirukkuṟaḷ: Religion, Ethics, and Poetics in a Tamil Literary Tradition (Th.D. dissertation). Harvard Divinity School, Harvard University, 2020
  2. Stuart Blackburn, Corruption and Redemption: The Legend of Valluvar and Tamil Literary History. Modern Asian Studies 34(2): 449–482, 2000
  3. Norman Cutler, Interpreting Tirukkuṟaḷ: The Role of Commentary in the Creation of a Text.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12(4): 549–566, 1992
  4. Kamil Zvelebil, The Smile of Murugan: On Tamil Literature of South India. E. J. Brill, Leiden, 1973
  5. Kamil Zvelebil, Tamil Literature (A History of Indian Literature, vol. X, fasc. 1). Otto Harrassowitz, Wiesbaden, 1974
  6. Tirukkuṟaḷ of Tiruvaḷḷuvar (Tamil text). Project Madurai
  7. G. U. Pope, The ‘Sacred’ Kurral of Tiruvalluva-Nayanar, with Introduction, Grammar, Translation, Notes. W. H. Allen & Co., London (Internet Archive scan), 1886
  8. Kural. Wikipedia
  9. Valluvar. Wikipedia
  10. Dating the Tirukkural. Wikipedia
  11. Tirukkuṟaḷ translations into Latin. Wikipedia
  12. Tirukkural translations into English. Wikipedia
  13. Manakkudavar. Wikipedia
  14. Valluvar year. Wikipedia
  15. Nālaṭiyār. Wikipedia
  16. First page of the 1812 Madras edition of the Thirukkural (image and description). Wikimedia Commons
  17. Ramanathan S., Is Tamil New Year really ‘Tamil’? Politics of Thai vs Chitirai. The News Minute, 2017
  18. Leo Tolstoy, A Letter to a Hindu (with an introduction by M. K. Gandhi). Project Gutenberg, 1908
  19. ‘Thirukkural’ translation to be made available in 30 more languages by Jan 2026, says official. The Week (PTI), 2025
  20. Tamil Nadu observes birth anniversary of poet-saint Thiruvalluvar. All India Radio News (newsonair.gov.in), 2026
  21. How did Venugopal Sharma create the official portrait of Thiruvalluvar? (in Tamil). Vikatan, 2019
  22. Valluvar Kottam. Chennai District Administration, Government of Tamil Nadu
  23. Valluvar Kottam back to glory; CM Stalin unveils 2.0 on June 21. DT Next, 2025
  24. Thiruvalluvar Statue. Kanniyakumari District Administration, Government of Tamil Nadu
  25. Thiruvalluvar Statue. Wikipedia
  26. Thiruvalluvar in orange robes: DMK and CPI(M) slam BJP for ‘saffronising’ legendary poet. The News Minute, 2019
  27. Venerated Tamil poet dragged into ugly political row in Tamil Nadu. Deccan Chronicle, 2019
  28. Acharya Buddharakkhita (trans.), The Dhammapada: The Buddha’s Path of Wisdom (introduction by Bhikkhu Bodhi). Access to Insight
  29. Dhammapada. Wikipedia
  30. Gupta Empire. World History Encyclopedia, 2015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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