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Mary Wollstonecraft (결혼 후 이름 Mary Wollstonecraft Godwin)

1787–1797년 · 런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한 문장으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18세기 말 영국의 작가·철학자로, 『여성의 권리 옹호』(1792)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못해 보이는 것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페미니즘 사상의 선구자가 되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이미지: John Opie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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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지금으로부터 260여 년 전인 175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어요. 집안은 늘 돈 걱정이 많았고, 아버지는 난폭할 때가 있었어요. 메리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았어요.

그 시절 여자아이들은 주로 바느질, 춤, 악기, 그리고 예쁘게 보이는 법만 배웠어요. 좋은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였지요. 사람들은 여자는 어려운 공부를 할 만큼 똑똑하지 않다고 말했어요. 메리는 그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했어요.

메리는 이렇게 물었어요. “학교에 한 번도 보내 주지 않고서, 어떻게 그 사람이 똑똑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나요?” 새의 날개를 묶어 두고 “새는 날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거예요. 메리는 배울 기회만 있다면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생각하고 따질 수 있다고 말했어요.

메리는 글을 써서 스스로 돈을 벌기로 했어요. 그때 그런 여성은 아주 드물었어요. 어린이 책, 소설, 여행기,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썼고, 가장 유명한 책 『여성의 권리 옹호』를 썼어요. ‘옹호’는 무언가가 옳다고 편들어 지켜 준다는 뜻이에요.

메리는 1797년, 서른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 둘째 딸을 낳고 며칠 뒤 세상을 떠났어요. 그 딸이 자라서 유명한 이야기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가 되었어요.

오랫동안 사람들은 메리의 생각보다 남다른 삶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했어요. 나중에 여성의 투표권과 대학 입학을 위해 싸운 사람들이 메리의 책을 다시 읽었어요. 오늘날 메리는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처음으로 깊이 생각한 위대한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돼요.

한눈에 보기

생몰
1759년 4월 27일 ~ 1797년 9월 10일
출생지
잉글랜드 런던 스피탈필즈
주 활동지
런던(아일랜드, 파리, 르아브르에서도 지냈고 스칸디나비아를 여행함)
역할
작가, 번역가, 서평가, 교육자, 정치철학자
대표작
『여성의 권리 옹호』(1792)
기타 주요 저작
『딸들의 교육에 관한 고찰』(1787), 『인간의 권리 옹호』(1790),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도덕적 고찰』(1794),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서 쓴 편지』(1796), 『마리아, 또는 여성의 억울함』(미완, 1798)
가족
1797년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과 결혼. 패니 임레이와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의 어머니
시대
계몽주의 후기, 프랑스 혁명의 시대

쉬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누구인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기본권과 교육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한 영국의 작가이자 철학자다. 가장 유명한 책인 『여성의 권리 옹호』는 1792년 런던에서 나왔다. 그는 여성이 본래 남성보다 머리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 사회가 여성을 교육하지 않고 외모와 남의 환심을 사는 일에만 신경 쓰도록 길렀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가 살던 때는 유럽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시기였다. 아메리카 식민지가 막 독립을 쟁취했고, 1789년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왕과 귀족의 낡은 질서를 뒤흔들었다. 어디서나 ‘인간의 권리’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날카롭게 물었다. 그 권리가 이성과 신에게서 나온다면, 왜 남성에게만 속해야 하는가?

십 년 남짓한 짧은 활동 기간에 그는 여자아이 교육 지침서, 어린이 책, 소설 두 편, 정치 팸플릿, 프랑스 혁명사, 여행기 등 여러 형식의 글을 썼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책을 번역했고 런던의 한 잡지에 서평을 썼다. 오늘날 그는 페미니즘 철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그가 살아 있을 때는 ‘페미니스트’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2][1]

쉬움

힘든 어린 시절과 이른 자립

메리는 1759년 4월 27일 런던 스피탈필즈에서 일곱 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넉넉한 집이었지만 아버지 에드워드 존 울스턴크래프트가 실패한 사업에 돈을 날리면서 가족은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폭력을 휘둘렀고, 10대의 메리는 어머니를 지키려고 어머니 침실 문 앞에서 잠을 잤다고 전한다. 그는 동생 에버리나와 엘리자에게 평생 어머니 같은 역할을 했다.

어린 시절에는 두 우정이 큰 영향을 주었다. 요크셔의 베벌리에서는 친구 제인 아든과 함께 책을 읽고 과학 강연을 들었다. 런던에서는 패니 블러드를 만났는데, 메리는 그를 깊이 존경했고 훗날 패니가 자기 눈을 뜨게 해 주었다고 말했다. 1784년에는 출산 뒤 우울증을 앓던 것으로 보이는 동생 엘리자가 불행한 결혼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남편을 떠난 아내가 불명예와 가난을 감수해야 했던 시대에 대담한 행동이었다.

가난하지만 체면 있는 집안의 여성이 돈을 벌 길은 귀부인의 말벗, 가정교사, 학교 교사 정도뿐이었고, 메리는 이 일을 모두 해 보았다. 동생들, 패니 블러드와 함께 런던 북쪽의 뉴잉턴 그린에 학교를 열었는데, 이곳은 국교회에 속하지 않은 비국교도가 많이 사는 마을이었다. 패니가 결혼해 리스본으로 떠나자 메리는 1785년 난산을 겪는 친구를 돌보러 그곳까지 갔지만, 패니는 끝내 세상을 떠났다. 메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학교도 문을 닫았다.

[2][4]

쉬움

“새로운 종(種)의 첫 번째”: 작가가 되다

패니가 죽은 뒤 메리는 아일랜드의 부유한 영국계 지주인 킹즈버러 가문에서 1년가량 딸들의 가정교사로 일했다. 킹즈버러 부인과는 사이가 나빴지만 아이들은 그를 무척 따랐다. 그 딸 가운데 마거릿 킹은 훗날 메리가 자기 정신을 온갖 미신에서 해방해 주었다고 말했다. 이때의 경험은 어린이 책 『실생활에서 나온 이야기』(1788)에 담겼다.

1787년 메리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글을 써서 먹고살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펜으로 생계를 꾸리는 여성은 매우 드물었다. 그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새로운 종의 첫 번째”가 되려 한다고 썼다. 런던에서는 자유주의·급진주의를 지지하던 출판업자 조지프 존슨이 살 곳을 마련해 주고 꾸준히 일을 맡겼다. 메리는 책을 번역하고, 젊은 여성을 위한 읽기 책을 엮고, 존슨이 펴내던 잡지 『애널리티컬 리뷰』에 주로 소설 서평을 썼다.

존슨의 유명한 저녁 모임에서 그는 팸플릿 작가 토머스 페인, 훗날 남편이 될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 등 당대의 가장 대담한 사상가들을 만났다. 첫 만남에서 고드윈은 언짢았다. 페인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는데 메리가 밤새 그와 논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존슨은 메리에게 아버지이자 오빠 같은 친구가 되었다.

[2]

쉬움

두 권의 ‘옹호’: 인간의 권리와 여성의 권리

1790년 11월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을 펴냈다. 그는 군주제와 귀족, 전통을 옹호하고, 뉴잉턴 그린에서 메리가 알고 지내던 목사 리처드 프라이스를 비롯한 영국의 혁명 지지자들을 공격했다. 분노한 메리는 한 달도 안 되어 반박문을 썼다. 『인간의 권리 옹호』는 1790년 11월 29일 처음에는 익명으로, 곧 2판에서는 저자 이름을 밝히고 나왔다. 이는 훗날 ‘혁명 논쟁’이라 불리게 된 수많은 반박문 가운데 첫 번째였고, 메리를 하루아침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다음 책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791년 프랑스의 정치가 탈레랑이 국민의회에 국민교육 계획을 제출하면서, 여자아이는 집안에서 가정생활을 위한 교육만 받으면 된다고 제안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 옹호』(1792)로 응답하며 이 책을 탈레랑에게 바치고 생각을 다시 해 보라고 요청했다. 그는 여성이 남편의 참된 동반자, 아이들의 지혜로운 어머니, 훌륭한 시민이 되려면 이성을 쓰도록 교육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그린 유명한 이미지가 있다. 어릴 때부터 아름다움이 여성의 왕홀(王笏)이라고 배운 여성의 정신은 몸에 맞추어 모양을 갖추고, 금박 입힌 새장 안을 맴돌며 오직 제 감옥을 꾸미려 한다는 것이다. 흔한 오해와 달리 이 책은 처음 나왔을 때 대체로 호평을 받았다. 그의 평판이 무너진 것은 훗날 사생활이 알려진 뒤였다.

[3][2]

중급

혁명과 사랑과 슬픔: 프랑스, 스칸디나비아, 런던

1792년 12월 울스턴크래프트는 혁명을 직접 보기 위해 파리로 갔다. 루이 16세가 처형되기 한 달쯤 전이었다. 그는 온건파인 지롱드파, 그리고 헬렌 마리아 윌리엄스 같은 영국인 체류자들과 어울렸다. 1793년 2월 프랑스가 영국에 선전포고한 뒤 영국인은 위험한 처지가 되었고, 자코뱅파가 권력을 잡아 공포정치를 시작하자 그의 친구 여럿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연인이던 미국인 모험가 길버트 임레이는 그를 보호하려고, 실제로 결혼하지 않았는데도 미국 대사관에 그를 아내로 신고했다.

1794년 5월 그는 르아브르에서 첫딸 패니를 낳았다. 세상을 떠난 친구의 이름을 딴 것이다. 같은 해 펴낸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도덕적 고찰』에서 그는 혁명을 온 국민이 미쳐 버린 결과가 아니라 사회·경제·정치적 조건이 낳은 결과로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임레이의 마음은 멀어져 갔다. 1795년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자살을 시도했다. 그 뒤 임레이의 사업 문제로 갓난아기와 하녀만 데리고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를 여행했고, 이때 쓴 편지들이 생전에 가장 인기를 끈 책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서 쓴 편지』(1796)가 되었다. 돌아온 뒤 템스강에 몸을 던져 두 번째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구조되었다.

그는 차츰 글쓰기와 존슨의 모임으로 돌아왔고, 윌리엄 고드윈과의 우정은 사랑으로 자랐다. 둘 다 결혼 제도를 비판해 왔지만 메리가 임신하자 1797년 3월 29일 결혼했다. 두 사람은 런던 서머스타운에 살았고, 고드윈은 근처에 따로 작업실을 두어 서로의 독립을 지켰다. 1797년 8월 30일 딸 메리가 태어났다. 그러나 태반이 완전히 나오지 않아 감염이 생겼고, 울스턴크래프트는 9월 10일 패혈증으로 서른여덟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런던의 세인트판크라스 옛 교회 묘지에 묻혔다.

[2][4]

중급

사상: 이성, 덕, 독립

울스턴크래프트 사상의 중심에는 모든 인간이 신이 지은 이성적·도덕적 존재이며, 삶의 목적은 덕을 기르는 데 있다는 생각이 있다. 그에게 덕은 “오직 하나의 영원한 기준”을 가진다. 그렇다면 남성의 선함과 여성의 선함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여성은 그저 상냥하고 매력적이고 순종적이도록 길러져서는 안 되며, 남성처럼 이해력과 자제력, 정신의 독립을 길러야 한다. 이는 거꾸로 남성도 여성과 같은 도덕 기준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었고, 당대의 성적 이중 잣대를 드러냈다.

그렇다고 그가 이성으로 감정을 짓눌러야 한다고 본 것은 아니다. 철학자 실바나 토마셀리는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에서, 울스턴크래프트에게 이성과 정념과 욕구는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었다고 강조한다. 그가 공격한 것은 거짓되고 지나친 ‘감수성’, 곧 여성을 “순간순간 부는 감정의 바람에 휩쓸리게” 만들어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유행하던 섬세한 감정 숭배였다.

변화의 핵심 수단은 교육이었다. 그는 남녀가 함께 “같은 방식으로” 배우는 국민 주간학교를 제안했다. 결혼해 시민을 길러 낼 남녀라면 같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여성이 의사가 되고, 정치를 공부하고, 사업을 할 수도 있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에는 계급적 한계도 있었다. 아홉 살 이후에는 특별히 뛰어난 아이를 빼고 가난한 아이들을 부유한 아이들과 따로 가르치자고 했다.

그가 그린 이상적인 결혼은 재산이나 육체적 매력만이 아닌, 평등한 두 사람의 우정이었다. 그가 보기에 덕은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자랄 수 있으므로, 여성을 의존적으로 만드는 사회는 남녀 모두를 타락시킨다. 의존은 여성을 교활하고 하찮게 만들고, 남성을 폭군으로 만든다.

[1][3]

중급

두 ‘옹호’ 밖의 저작들

초기 저작은 교육에 관한 것이었다. 『딸들의 교육에 관한 고찰』(1787)은 올바른 처신을 가르치는 지침서이고, 『실생활에서 나온 이야기』(1788)는 어린이를 위한 도덕 이야기책이다. 두 책 모두 자기 절제, 정직, 이성의 사용을 가르쳐 철학자 존 로크의 영향을 보여 주지만, 신앙과 감정에도 큰 자리를 내준다.

두 편의 소설은 당시의 결혼 제도를 비판한다. 『메리: 허구』(1788)의 여주인공은 돈 때문에 사랑 없는 결혼을 강요당한다. 그가 죽은 뒤 1798년에 나온 미완성 소설 『마리아, 또는 여성의 억울함』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정신병원에 가둔다. 이 소설에서 상류층 여성 마리아와 그를 감시하는 노동계급 여성 제미마 사이의 우정은, 계급이 다른 여성들도 여성이라는 점에서 이해관계를 함께한다는 생각을 페미니즘 문학에서 처음으로 내비친 장면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서 쓴 편지』(1796)는 거친 북유럽 풍경 묘사, 사회에 대한 관찰, 자신의 슬픔에 대한 성찰이 섞인 편지 25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잘 팔렸고 평도 좋았으며,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에게 영향을 주었다. 고드윈은 훗날 저자와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책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이라고 썼다.

[2][1]

중급

무너진 평판과 긴 복권

1798년 1월 고드윈은 『여성의 권리 옹호의 저자에 관한 회고록』을 펴냈다. 사랑을 담은 추모였지만, 그는 아내의 연애, 혼외로 낳은 아이, 자살 시도를 숨김없이 적었다. 많은 독자가 충격을 받았다. 시인 로버트 사우디는 고드윈이 죽은 아내를 발가벗겼다고 비난했고, 그와 그를 닮은 여성들을 조롱하는 풍자물이 쏟아졌다. 거의 한 세기 동안 그의 이름은 본보기가 아니라 경고로 쓰였고, 소설가들은 그를 본뜬 우스꽝스러운 인물을 만들어 냈다.

그래도 그의 생각을 이어 간 독자들이 있었다. 시인 메리 로빈슨은 1799년 그를 기렸다. 학자들은 그를 한 번도 이름으로 언급하지 않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그의 주장에 대한 암시를 찾아낸다. 1840년 런던에서 만난 미국의 개혁가 루크레샤 모트와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은 둘 다 그의 책을 읽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는 1848년 세니커폴스 대회로 이어졌다. 19세기 중엽 영국과 미국에서는 『여성의 권리 옹호』의 새 판이 나왔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일어나면서 울스턴크래프트는 다시 불려 나왔다. 참정권 운동가 밀리센트 개릿 포셋은 1892년 『여성의 권리 옹호』 출간 100주년 판의 서문을 써서 그를 운동의 선구자로 내세웠다. 1929년 버지니아 울프는 그가 지금도 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썼다. 1970년대부터 페미니즘 학계는 새 전기와 연구를 잇달아 내놓았고, 최근에는 철학자들이 그를 진지한 도덕·정치 사상가로 읽는다. 2020년에는 뉴잉턴 그린에 그를 기리는 조형물이 세워졌다.

[2][3]

심화

자유주의자인가, 공화주의자인가, 종교적 급진주의자인가: 해석 논쟁

울스턴크래프트가 어떤 사상 전통에 속하는지를 두고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버지니아 사피로 등과 연결되는,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영향력 있는 해석은 그를 로크로 이어지는 자유주의적 가치와 개인의 권리를 옹호한 사람으로 본다. 반면 앨런 코피, 레나 할데니우스, 상드린 베르제스 등은 그를 공화주의 전통, 곧 자유를 누군가의 자의적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 상태로 보는 전통 속에서 읽는다. 이 관점에서 그의 핵심 표적은 단순한 법적 불평등이 아니라 지배와 의존이며, 그래서 그는 결혼·재산·교육을 정치 문제로 다룬다. 일찍이 클라우디아 L. 존슨은 『여성의 권리 옹호』를 “공화주의 선언문”이라 부르며 17세기 공화정(커먼웰스) 전통과 연결했다.

세 번째 해석은 종교를 강조한다. 바버라 테일러는 울스턴크래프트를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것은 시대착오이며, 그를 세속적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로 그리는 시각은 그의 신앙과 신이 약속한 보편적 행복의 시대에 대한 유토피아적 희망을 놓친다고 주장했다. 테일러에 따르면 그의 으뜸가는 목표는 여성이 덕에 이르는 것이었고, 해방은 그 수단이었다. 에밀리 덤러-윙클러의 연구처럼 최근에는 그가 여성 평등을 주장하려고 신학 개념을 어떻게 빌리고 때로 뒤집었는지를 살피는 연구도 나오고 있다.

그가 실제로 얼마나 평등을 주장했는지도 논쟁거리다. 그는 덕의 기준이 남녀에게 하나이며 신 앞에서 남녀가 평등하다고 했지만, 남성이 신의 섭리에 따라 더 높은 덕에 이르도록 지어진 듯하다고 인정하기도 했고, “우리의 사슬을 끊어 달라”는 호소를 남성에게 향했다. 여성의 완전한 투표권을 주장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는 여성이 정부에서 대표되어야 한다고만 시사했다. 코라 캐플런, 메리 푸비 같은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여성의 권리 옹호』가 여성의 성(性)에 대해 깊이 불안해한다고 지적했고, 다른 이들은 그 시대에 여성의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면 곧바로 성적 방종이라는 낙인이 찍혔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1][3]

심화

버크, 루소와의 논쟁

버크에 대한 울스턴크래프트의 반박이 독특했던 것은 그의 정치뿐 아니라 언어까지 공격했기 때문이다. 버크는 앞서 숭고와 아름다움에 관한 논고에서 아름다움을 연약함·여성성과, 숭고를 힘·남성성과 연결한 바 있다. 『인간의 권리 옹호』에서 그는 이 범주를 버크에게 되돌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버크의 연극적인 연민이 시민을 넋 잃은 구경꾼으로 만들고, 전통을 옹호하는 그의 논리는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노예제까지 옹호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클라우디아 존슨은 이를 그의 첫 공공연한 페미니즘 비평으로 본다. 그러나 메리 페어클러프 같은 최근 연구자들은 두 사람이 감정과 본능을 다루는 방식에 공통점이 많았고, 울스턴크래프트가 나중에는 상업 사회에 대한 버크의 우려에 더 공감하게 되었다며 단순한 대립 구도에 의문을 제기한다.

루소와의 관계도 양면적이다. 『여성의 권리 옹호』의 상당 부분은 여성은 남성을 기쁘게 하도록 교육받아야 한다고 한 루소의 『에밀』(1762), 그리고 제임스 포다이스와 존 그레고리 같은 처신서 작가들을 공격한다. 그러나 그는 자연 예찬, 진실한 감정의 강조, 도덕 교육에 대한 기대 등 루소에게서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스칸디나비아 편지는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의 주제를 떠올리게 한다. 크리스토퍼 브룩, 로라 커클리 같은 학자들은 그가 루소의 여성상은 거부하면서도 그 사상의 다른 부분을 어떻게 끌어왔는지 탐구했다.

그의 프랑스 혁명사도 이 논쟁의 일부다. 그는 이야기를 공포정치 이전인 1789년 말에서 멈추었는데, 혁명의 성취를 지키면서 이후의 폭력은 비판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1789년 10월 베르사유로 행진한 여성들을 버크는 ‘복수의 여신들’이라 불렀지만, 그는 빵이 없어 분노한 평범한 주부들이라고 변호했다. 또 마리 앙투아네트를, 여성을 몸과 후계자를 낳는 능력으로만 평가하던 궁정이 만들어 낸 산물로 그렸다. 역사가 톰 퍼니스는 이 책을 그의 가장 소홀히 다뤄진 책이자 최고작이라 불렀다. 2판은 1989년에야 나왔다.

[2][1][3]

심화

생애 자료와 『회고록』의 문제

울스턴크래프트의 생애에 관한 지식은 출간된 저작, 많이 남아 있는 편지, 고드윈의 『회고록』에 기댄다. 재닛 토드가 엮은 현대판 서간집(2003)에 실린 편지들은 그의 감정, 우정, 고투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러나 대부분 사적이고 감정적인 기록이라, 임레이에게 보낸 고통스러운 편지를 어떻게 읽을지를 두고 비평가들의 의견이 갈린다. 우울증의 징후로 보는 이도 있고, 친구들이 죽어 간 혁명 한가운데서 갓난아기와 홀로 남은 외국인 여성의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보는 이도 있다.

고드윈의 『회고록』은 귀한 자료이자 동시에 문제이기도 하다. 그의 말년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썼지만, 이 책이 한 세기 동안 그의 기억을 틀 지었다. 학자들은 고드윈이 그를 자신의 이성으로 균형을 잡아 준 감정의 존재로, 또 그의 저작이 보여 주는 것보다 종교에 더 회의적인 사람으로 그렸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현대 전기 작가들은 『회고록』을 편지와 저작에 비추어 검증한다. 비평가 코라 캐플런의 말처럼 오랫동안 그의 삶은 글보다 훨씬 꼼꼼히 읽혔고, 최근 연구의 과제는 그 균형을 되돌리는 일이었다.

표준 학술 판본은 재닛 토드와 메릴린 버틀러가 엮은 7권짜리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전집』(1989)이다. 21세기 연구는 그를 후대 페미니즘의 선구자로만 보지 않고, 로크·흄·애덤 스미스·칸트·플라톤과 씨름하고 상업 사회를 비판한 독자적인 철학자로 점점 더 다루고 있다.

[1][2]

핵심 개념

불평등의 뿌리로서의 교육
여성이 남성보다 덜 이성적으로 보이는 것은 본성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 교육을 받지 못하고 외모와 환심 사기를 중시하도록 길러졌기 때문이다.
하나의 덕의 기준
덕에는 신이 준 하나의 영원한 기준이 있으므로 남녀는 같은 도덕적 의무를 진다. 정숙과 겸손은 남성에게도 요구된다.
이성과 감정의 조화
지나친 ‘감수성’을 비판했지만 이성이 정념을 억눌러야 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잘 길러진 감정은 이성을 움직이고 이성의 안내를 받는다.
독립
참된 덕에는 정신과 생계의 독립이 필요하다. 의존은 의존하는 사람과 그 위에 군림하는 사람을 함께 타락시킨다.
우정으로서의 결혼
결혼은 재산 거래나 육체적 매력만이 아니라 평등한 두 사람의 이성적 동반 관계여야 한다.
국민 남녀공학
남녀가 ‘같은 방식으로’ 함께 배우는 무상 주간학교를 제안했다.
전통이 아닌 이성에서 나오는 권리
버크에 맞서, 권리는 오래된 관습이어서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정의롭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기록

  1. 1759년 — 4월 27일 런던 스피탈필즈에서 태어나다.
  2. 1784년 — 동생들, 패니 블러드와 뉴잉턴 그린에 학교를 열다. 동생 엘리자가 결혼에서 벗어나도록 돕다.
  3. 1785년 — 패니 블러드를 돌보러 리스본에 가지만 패니가 세상을 떠나고, 학교도 문을 닫다.
  4. 1786년 — 아일랜드 킹즈버러 가문의 가정교사가 되다.
  5. 1787년 — 『딸들의 교육에 관한 고찰』 출간. 조지프 존슨의 도움으로 런던에서 글로 생계를 꾸리기 시작하다.
  6. 1788년 — 『메리: 허구』, 『실생활에서 나온 이야기』 출간. 『애널리티컬 리뷰』에 서평을 쓰기 시작하다.
  7. 1790년 — 11월 29일 버크를 반박한 『인간의 권리 옹호』 출간.
  8. 1792년 — 『여성의 권리 옹호』 출간. 12월 혁명기의 파리로 가다.
  9. 1794년 — 르아브르에서 딸 패니 임레이 출생.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도덕적 고찰』 출간.
  10. 1796년 — 1795년의 여행을 담은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서 쓴 편지』 출간.
  11. 1797년 — 윌리엄 고드윈과 결혼(3월 29일), 딸 메리 출생(8월 30일), 9월 10일 세상을 떠나다.
  12. 1798년 — 고드윈이 『회고록』과 미완성 소설 『마리아, 또는 여성의 억울함』을 펴내다.

용어 풀이

옹호(Vindication)
어떤 것이 옳거나 참임을 밝혀 편들어 지키는 일.
계몽주의
이성을 믿고 전통, 종교적 권위, 세습 특권을 의심한 18세기의 사상 운동.
혁명 논쟁
1790년대 프랑스 혁명을 두고 영국에서 벌어진 팸플릿 논쟁. 버크의 『성찰』로 시작되어 울스턴크래프트, 페인 등이 응답했다.
감수성(sensibility)
섬세하고 세련된 감정을 중시한 18세기의 이상. 울스턴크래프트는 특히 여성의 모범으로서 그 지나침을 비판했다.
처신서(conduct book)
특히 젊은 여성에게 올바른 행실을 가르치는 조언서.
비국교도(Dissenters)
잉글랜드 국교회에 속하지 않은 개신교도. 뉴잉턴 그린은 비국교도 생활의 중심지였다.
지롱드파와 자코뱅파
프랑스 혁명기의 경쟁 세력. 온건한 지롱드파는 1793년 급진적인 자코뱅파에게 밀려났다.
공화주의
자유를 자의적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 상태로 보고 시민적 덕을 강조하는 정치 전통.
패혈증
감염으로 피가 오염되는 병. 울스턴크래프트가 출산 뒤 숨진 원인이다.
원(原)페미니스트
‘페미니즘’이라는 말이나 조직된 여성운동이 생기기 전에 여성의 평등을 주장한 사상가.

묻고 답하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학교나 대학에 다녔나요?

아니요. 당시 잉글랜드에서 여성은 대학에 갈 수 없었어요. 그는 책 읽기와 대화, 번역·서평 일을 통해 거의 혼자 공부했어요.

『프랑켄슈타인』의 작가와 관계가 있나요?

네. 1797년에 태어난 둘째 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이 훗날 『프랑켄슈타인』(1818)을 쓴 메리 셸리예요.

여성도 투표해야 한다고 말했나요?

분명하지는 않다.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여성이 정부에서 대표되어야 한다고 시사했지만, 핵심 요구는 교육, 도덕적 평등, 독립이었다. 그의 정치적 주장이 어디까지였는지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여성의 권리 옹호』는 나오자마자 공격받았나요?

대체로 그렇지 않았다. 1792년에는 호평이 많았고, 적대감은 1798년 고드윈의 『회고록』이 사생활을 드러낸 뒤에 커졌다.

왜 혁명 중인 프랑스에 갔나요?

글로 옹호했던 혁명을 직접 보고 싶었고, 런던에서 거절당한 관계의 아픔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루이 16세의 재판 시기와 공포정치를 목격했다.

그를 페미니스트라고 불러도 되나요?

흔히 그렇게 부르지만 논쟁이 있다. 그 말은 1890년대에야 생겼다. 바버라 테일러 같은 역사가는 그를 현대 페미니스트로 취급하면 그의 신앙과 덕에 대한 관심이 가려진다고 경고한다.

그의 삶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저작, 남아 있는 편지, 윌리엄 고드윈의 『회고록』(1798)을 통해서다. 『회고록』은 그의 평판을 크게 좌우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비판적으로 읽는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Sylvana Tomaselli, Mary Wollstonecraft.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 Mary Wollstonecraft. Wikipedia
  3.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Wikipedia
  4.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위키백과
  5. Janet Todd, Mary Wollstonecraft: A Revolutionary Life. Weidenfeld & Nicolson, 2000
  6. Barbara Taylor, Mary Wollstonecraft and the Feminist Imagin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7. Claudia L. Johnson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y Wollstonecraf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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