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쇼토쿠 태자

聖徳太子 (쇼토쿠 타이시); 厩戸王 / 厩戸皇子 (우마야도)

594–622년 ·

  • 법·제도
  • 종교
  • 외교·교류

한 문장으로

쇼토쿠 태자는 600년 무렵 일본의 정치를 도운 왕족으로, 불교를 널리 퍼뜨리고 관리들이 지킬 규칙을 만들고 중국에 사신을 보낸 인물로 기억되지만, 그 이야기 가운데 얼마나 사실인지는 지금도 학자들이 논쟁한다.

쇼토쿠 태자
이미지: Kano Osanobu (August 18, 1796 - June 12, 1846)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1,400년 전 일본은 스이코라는 여성 천황이 다스렸어요. 스이코에게는 같은 집안의 조카인 우마야도 왕자가 있었고, 왕자는 나랏일을 도왔어요. 훗날 사람들은 그에게 ‘거룩한 덕을 지닌 태자’라는 뜻의 쇼토쿠 태자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 주었어요.

왕자는 얼마 전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들어온 불교를 무척 아꼈어요. 불교를 가르쳐 준 스승은 고구려에서 온 스님 혜자였어요. 왕자가 세웠다고 전하는 호류지 같은 절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곳의 나무 건물 몇 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꼽혀요.

왕자는 나라에서 일하는 관리들을 위한 규칙 열일곱 가지로 유명해요. 첫 번째 규칙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차분히 의논하는 것이 가장 귀하다’는 내용이에요. 다른 규칙에는 재판을 공평하게 하고, 뇌물을 받지 말고, 아침 일찍 나와 부지런히 일하라는 말이 들어 있어요.

왕자는 바다 건너 중국에 사신을 보낸 일로도 기억돼요. 당시 중국은 수나라가 다스리는 거대한 제국이었어요. 편지 첫머리에는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편지를 보낸다”라고 적혀 있었어요. 수나라 황제는 기분이 상했어요. 하늘의 아들, 곧 천자는 자기 혼자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왕자에게는 한꺼번에 열 사람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이야기처럼 놀라운 전설이 아주 많아요.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궁금해해요. 그 덕분에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해서뿐 아니라, 사람들이 영웅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도 배울 수 있어요.

한눈에 보기

생애
574 ~ 622년(사망 연도는 호류지 석가삼존상 광배 명문 기준, 『일본서기』는 621년)
본래 이름
우마야도(厩戸). 흔히 우마야도 황자·우마야도왕이라 부르며, ‘쇼토쿠’는 뒤에 붙은 존칭
가계
요메이 천황과 아나호베노하시히토 황녀의 아들, 스이코 천황의 조카. 혼인과 혈연으로 소가씨와 이어짐
지위
전통적으로 593년부터 스이코 천황의 황태자이자 섭정으로 대신 소가노 우마코와 함께 정치를 이끈 것으로 전함
그의 업적으로 전하는 것
관위 12계(603), 17조 헌법(604), 수나라 사신 파견(600?, 607, 608), 사찰 건립, 역사서 편찬(620)
관련 사찰
시텐노지(오사카), 호류지(이카루가), 주구지 등
주요 사료
『일본서기』(720), 『수서』(636), 호류지 명문, 천수국수장, 『상궁성덕법왕제설』
논쟁
실제 업적의 범위를 두고 이견이 있으며, 8세기에 이상화된 인물상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학자도 있음

쉬움

쇼토쿠 태자는 누구인가

쇼토쿠 태자는 일본 고대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는 훗날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를 쓰게 되는 야마토 왕가의 일원이었다. 본래 이름은 ‘마구간 문’이라는 뜻의 우마야도로, 마구간 앞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뒤에 생겼다. ‘거룩한 덕’을 뜻하는 쇼토쿠라는 이름은 죽은 뒤에 붙은 것이며, 8세기 무렵에는 이 이름이 널리 쓰였다.

720년에 완성된 관찬 역사서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의 고모 스이코가 593년 왕위에 오르면서 그를 황태자로 삼고 정치를 맡겼다. 그는 당대 최고 권력자이자 스이코와 태자 모두의 친척인 대신 소가노 우마코와 권력을 나누었다. 『일본서기』는 새로운 관위 제도, 관리들을 위한 도덕 규범, 중국으로 보낸 외교 사절, 불교 사찰 건립 같은 개혁을 태자의 업적으로 기록한다.

일본 불교, 성문 규범, 통일 중국과의 외교 같은 여러 ‘처음’의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쇼토쿠 태자는 국가적 상징이 되었다. 20세기의 상당 기간 그의 초상이 일본 지폐에 실렸고, 그의 이름을 딴 학교와 절도 많다. 동시에 현대 역사학자들은 사료를 꼼꼼히 따져 그의 명성 가운데 얼마만큼이 후대 기록자들이 만든 것인지를 묻고 있다.

[1][2][13]

쉬움

600년 무렵의 일본

600년 무렵의 일본은 아직 뚜렷한 국경과 관료 조직을 갖춘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다. 야마토의 대왕은 저마다 땅과 예속민, 세습 칭호(가바네)를 가진 유력 씨족(우지)들의 연합을 이끄는 지도자였다. 앞선 3세기 동안 만들어진 거대한 무덤인 고분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 부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는지 보여 준다.

왕궁은 오늘날 나라 남쪽의 아스카 분지에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서기, 건축가, 금속 장인, 도공, 승려 가운데 상당수는 한반도와 중국에서 건너온 이주민이거나 그 후손이었다. 한자로 글을 쓰는 일 자체가 이런 교류를 통해 들어왔다.

가장 큰 변화는 불교였다. 6세기 중엽 한반도 서남부의 백제 왕이 야마토에 불상과 경전을 보냈다. 조정에서는 이 외래 종교를 받아들일지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다. 소가씨는 찬성했고 모노노베씨와 나카토미씨는 반대했다. 587년 소가씨와 그 편에 선 세력이 모노노베씨를 전투에서 무너뜨렸는데, 『일본서기』는 어린 우마야도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적는다. 이후 불교는 왕실의 지지를 받았고, 소가노 우마코가 첫 본격 사찰인 아스카데라를 세웠다.

[11][1][12]

쉬움

불교를 믿은 태자와 한반도에서 온 스승

『일본서기』는 태자가 고구려 승려 혜자(慧慈, 일본어로 에지)에게 불교를 배우고, 각가(覺哿)라는 학자에게 유교 경전을 배웠다고 전한다. 혜자는 595년에 일본에 와서 20년 가까이 머물며 백제 승려 혜총(慧聰)과 함께 아스카데라에 살았고, 615년에 고구려로 돌아갔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사료 해설은 이 기록을 고구려와 야마토 사이의 문화 외교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한다.

태자는 스이코 천황에게 불경을 강의했다고 하며, 『법화경』·『유마경』·『승만경』에 대한 주석서인 『삼경의소(三經義疏)』가 전통적으로 그의 저작으로 전한다. 그가 직접 썼는지, 스승들과 함께 엮었는지, 아니면 중국에서 들여온 책인지는 지금도 학자들이 논의하는 문제다.

태자와 관련된 절로는 587년 전투 중에 세우기로 서원했다는 오사카의 시텐노지(사천왕사), 그리고 607년 그의 궁 옆에 세운 이카루가의 호류지가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호류지는 670년에 불탔고 얼마 뒤 다시 지어졌다. 금당과 오층탑은 지금 남아 있는 목조 건물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에 든다. 나이테 연대 측정 결과 탑 중심 기둥(심주)의 나무는 594년에 벤 것으로 밝혀졌다.

[4][3][10]

중급

관위 12계와 17조 헌법

『일본서기』에 따르면 603년 조정은 관위 12계를 만들었다. 관리들은 비단 관모를 썼고 그 색으로 등급을 나타냈다. 등급 이름은 덕(德)·인(仁)·예(禮)·신(信)·의(義)·지(智)의 여섯 덕목을 각각 대(大)와 소(小)로 나눈 것이다. 세습되던 가바네와 달리 관위는 개인에게 주어졌고 올라갈 수도 있었다. 수나라에 사신으로 간 오노노 이모코가 대표적인 예로, 그는 사행을 마친 뒤 최고 등급까지 올랐다. 다만 최상층인 소가씨 지도자들은 이 제도 밖에 있었다. 본보기는 대륙에 있었으며, 역사학자들은 고구려·백제·중국의 관등제와 비교한다. 이 제도는 647년 새 제도로 바뀌었다.

『일본서기』는 604년 태자가 직접 17개 조항을 지었다고 적는다. ‘헌법(憲法)’이라고 부르지만 형벌을 정한 법전이 아니라 관리들에게 주는 도덕적 가르침이다. 제1조는 화(和)를 가장 귀하게 여기고 차분히 의논하라고 한다. 제2조는 불(佛)·법(法)·승(僧)의 삼보를 공경하라고 한다. 제3조는 천황의 명령을 받으면 반드시 따르라고 하며, 군주를 하늘에, 신하를 땅에 비유한다.

뒤의 조항들은 재판을 맡은 이가 뇌물을 받지 말 것, 관리는 아침 일찍 나오고 늦게 물러날 것, 지방관이 백성에게 제멋대로 세금을 거두지 말 것을 요구한다. 나라에는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16조는 농사철을 피해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라고 하고, 제17조는 중요한 일은 혼자 정하지 말고 여러 사람과 의논하라고 권한다.

이 글에는 여러 사상이 섞여 있다. 군신 관계에 대한 유교의 언어, 인간의 약함과 자비에 대한 불교의 생각, 그리고 중국 고전과 통치서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 함께 쓰였다. 관리들이 자기 씨족이 아니라 한 사람의 군주를 섬기는 중앙집권 국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런 국가는 수십 년 뒤에야 현실이 된다.

[9][5][6][14]

중급

‘해 뜨는 곳’: 수나라에 보낸 사신

589년 수나라가 300년 가까운 분열을 끝내고 중국을 다시 통일했다.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에 이것은 충격이었다. 대륙에 하나의 강력한 제국이 들어선 것이다. 고구려·백제·신라가 모두 사신을 보냈고, 야마토도 그랬다.

600년의 첫 사신은 『일본서기』에는 없고 중국의 『수서』에만 나온다. 『수서』는 아메노타리시히코라는 이름의 왜왕이 사신을 보냈으며, 문제가 사신이 설명한 왜왕의 정치 방식을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고 적는다. 607년 오노노 이모코가 이끈 두 번째 사절은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낸다”로 시작하는 국서를 가져갔다.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서 천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기에 양제는 불쾌해했다. 그래도 그는 608년 배세청(裴世清)을 이모코와 함께 일본에 보냈다.

같은 해 이모코가 다시 중국으로 갈 때 다카무코노 구로마로(겐리), 미나부치노 쇼안, 승려 민(旻) 같은 유학생과 학승이 함께 갔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수십 년 동안 중국에 머물며 수의 멸망과 당의 건국을 직접 보았고, 중국의 통치 제도를 몸소 익혀 돌아왔다. 그중 여럿이 645년 이후 다이카 개신의 자문역이 되었다. 쇼토쿠 태자의 시대와 뒤의 일본 율령국가를 잇는 가장 뚜렷한 고리 가운데 하나다.

607년의 국서는 일본을 ‘해 뜨는 곳’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도 유명하다. 이 생각은 뒤에 ‘해의 근본’을 뜻하는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로 이어진다. 학자들은 이 국서가 중국과 대등하다는 주장이었는지, 서툰 외교였는지, 불교식 표현이었는지를 두고 논쟁하지만, 적어도 야마토 조정이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자기 자리를 정하려 했음을 보여 준다.

[7][8][1]

중급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쇼토쿠 태자의 생애는 유라시아 역사의 큰 전환점과 겹친다. 한반도에서는 고구려가 598년, 612년, 그 뒤로도 이어진 수나라의 대규모 침공을 막아 냈다. 특히 612년 살수에서 수나라 군대가 무너진 일은 수 왕조 자체의 몰락을 앞당겼다. 이렇게 보면 고구려가 595년 혜자를 야마토에 보낸 이유가 더 잘 이해된다. 거대한 제국과 맞선 나라에는 바다 건너 우방을 만들 까닭이 충분했다. 그동안 백제와 신라는 한강 유역을 두고 서로 싸우며 일본과 중국에서 각각 동맹을 찾았다.

중국에서 수나라는 대운하를 건설하고 관리 선발 시험을 처음 시행하는 등 통치 체제를 정비했지만 618년에 무너졌다. 뒤이은 당나라는 태자 사후 일본이 가장 가까이 본뜬 모델이 된다. 북인도에서는 606년부터 하르샤 왕이 큰 왕국을 다스렸고 불교 교학의 중심인 날란다 사원이 전성기를 누렸다. 머지않아 중국 순례승들이 경전을 구하러 그곳까지 가게 된다.

더 서쪽으로 가면, 태자가 죽은 622년은 예언자 무함마드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겨 간 히즈라의 해이기도 하다. 이슬람력은 이 해를 기준으로 삼는다. 비잔티움 황제 헤라클리우스와 사산 왕조의 호스로 2세는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의 마지막 대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 전쟁은 아랍 정복 직전에 두 제국을 모두 지치게 했다. 잉글랜드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서튼 후의 호화로운 배 무덤이 만들어졌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 590~604)는 597년 앵글로색슨인에게 선교사를 보냈다.

이 사건들을 함께 놓고 보면 공통된 흐름이 보인다. 유라시아 곳곳의 통치자들이 불교·그리스도교, 그리고 곧 이슬람 같은 보편 종교와 성문화된 규범을 이용해 더 큰 나라를 묶어 가고 있었다. 불교 신앙과 관리 규범을 함께 내세운 쇼토쿠 태자의 모습은 그 흐름의 동아시아판이라 할 수 있다.

[7][4][1]

중급

만년과 죽음, 그리고 소가씨

601년 태자는 아스카에서 북서쪽으로 20km쯤 떨어진 이카루가에 궁을 짓기 시작했고, 605년 무렵에는 그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카루가는 나니와(오사카)와 바다로 이어지는 야마토강 뱃길에 가까웠고, 궁 옆에 호류지가 들어섰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20년 태자와 소가노 우마코는 왕들의 계보와 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천황기』와 『국기』를 편찬했으나 전하지 않는다.

호류지 석가삼존상 뒷면의 명문에 따르면 태자는 622년 초에 죽었다. 이 불상은 이듬해 불사 도리(止利)가 만들었다. 『일본서기』는 그의 죽음을 621년으로 적는다. 태자의 비가 사후의 태자가 ‘천수국(天壽國)’에 있는 모습을 나타내려고 만든 큰 자수 휘장인 천수국수장은 일부가 주구지에 남아 있다. 고구려로 돌아간 혜자는 이듬해 같은 날 죽겠다고 서원했다고 전한다.

태자는 끝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628년 스이코가 죽은 뒤 왕위 계승은 소가씨가 좌우했다. 643년 소가노 이루카는 이카루가에 있던 태자의 아들 야마시로노오에 왕을 공격했고, 야마시로와 그 일족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년 뒤 이루카 자신도 다이카 개신의 문을 연 645년 정변에서 살해되었다. 태자 집안의 이런 비극은 후대 기록자들이 쇼토쿠 태자를 오만한 씨족에게 희생된 덕 있는 인물로 그리는 데 한몫했다.

[2][10][13]

심화

사료는 실제로 무엇을 말해 주는가

쇼토쿠 태자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는 그가 죽고 100년 가까이 지나 편찬된 『일본서기』에서 나온다. 편찬한 조정에는 지혜로운 불교 태자와 강한 왕실을 기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본서기』에는 기록과 전설이 섞여 있다. 태어나자마자 말을 했다거나, 열 사람의 호소를 한꺼번에 들었다거나, 굶주린 걸인을 만났는데 그가 성인이었다는 이야기 등이다. 다른 초기 사료도 있다. 호류지 불상의 명문, 천수국수장, 가장 오래된 부분은 이른 시기의 것일 수 있으나 전하는 본문은 후대의 것인 전기 『상궁성덕법왕제설』, 그리고 중국의 『수서』다. 저마다 연대와 진위 문제를 안고 있다.

의심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20세기 전반 역사학자 쓰다 소키치는 17조 헌법과 『삼경의소』가 태자 본인의 저작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헌법을 읽은 학자들은 지방관을 가리키는 ‘국사(國司)’ 같은 용어나 강한 중앙집권 국가의 모습이 604년보다 7세기 후반에 더 어울린다고 지적해 왔다.

1999년 오야마 세이이치는 더 나아가, 실제 인물 우마야도 왕은 있었지만 성스러운 창시자로서의 ‘쇼토쿠 태자’는 대부분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이 ‘허구설’은 넓은 논쟁을 불렀다. 비판자들은 일부 명문이 이른 시기의 것이며 개혁 내용도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반박했다. 학자 이시이 고세이는 2021년에 오야마 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논문이 학계에서 10년 넘게 나오지 않고 있다고 평가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전문가는 우마야도가 실존한 중요한 왕족 정치가였다고 보면서도, 그의 업적으로 전하는 개별 사항은 신중하게 다룬다.

『수서』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수서』는 600년의 왜왕을 남성으로 보이는 이름으로 부르고 왕의 아내까지 언급하지만, 당시 일본의 군주는 여성인 스이코였다. 중국 측이 태자나 소가노 우마코를 왕으로 오인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야마토가 바깥에 자국 왕권을 소개한 방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이 어긋남은 중국과 일본의 사료가 각자 다른 독자를 위해 쓰였음을 일깨운다.

[2][3][5][8]

심화

여러 관점

근현대 일본에서 쇼토쿠 태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혀 왔다. 1945년 이전에는 천황을 섬기는 모범적 신하이자 ‘화(和)’라는 일본 정신의 창시자로 그려지기도 했고, 전후에는 제1조의 ‘화’가 합의와 평화로운 정치의 이른 표현으로 자주 인용되었다. 민간 불교는 그를 성인으로 만들었다. 헤이안·가마쿠라 시대부터 ‘태자 신앙’은 그를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받들었고, 신란 같은 종조들도 그를 공경했다.

앞에서 보았듯 일본 역사학자들은 개혁이 태자의 것인지, 소가노 우마코의 것인지, 후대의 투영인지를 두고 논쟁해 왔다. 이 논쟁은 2017년 학교 현장에까지 이르렀다. 문부과학성의 학습지도요령 개정안이 연구 성과를 반영해 ‘우마야도왕(쇼토쿠 태자)’으로 쓰자고 제안했으나, 익숙한 이름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 쏟아지자 한 달 만에 ‘쇼토쿠 태자’로 되돌렸다. 사료의 문제가 곧 국가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 준 일이다.

한국의 학계와 대중 역사서는 이 이야기의 한반도 쪽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태자의 불교 스승 혜자는 고구려 사람이었고, 아스카의 절을 지은 것은 백제의 승려·장인·학자들이었다. 또 호류지에 전해 오던 유명한 태자 초상화는 전통적으로 백제 아좌 태자가 그렸다고 전하지만 이는 입증되지 않았다. 이 시각에서 보면 쇼토쿠 태자 시대의 일본은 고립된 출발점이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이 함께 이룬 불교 세계의 일부로 보인다.

중국 사료는 이 사절을 조공 질서 안에서 서술한다. 『수서』는 왜를 사신과 예물을 보내온 먼 나라로 기록하고, ‘천자’ 국서에 대한 양제의 불쾌감을 적는다. 현대 중국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이 사절을 수·당 문명이 동아시아로 퍼져 나간 과정의 일부로 본다. 어느 관점도 단순히 틀린 것은 아니다. 각 관점은 사료의 서로 다른 부분을 비추며, 함께 읽을 때 가장 온전한 그림이 드러난다.

[2][3][4][8]

심화

유산: 아스카에서 율령국가로

태자 개인의 역할이 어떠했든, 스이코 시대는 야마토가 관위, 관리에게 주는 성문 규범, 역법, 역사 편찬, 국가가 후원하는 불교 같은 중국식 제도를 의식적으로 들여오기 시작한 때였다. 그 통로는 흔히 한반도였다. 다음 단계는 토지와 백성을 공적으로 소유한다고 선언한 645년 이후의 다이카 개신, 그리고 당나라를 본떠 율령국가를 완성한 701년의 다이호 율령이었다.

호류지는 태자가 남긴 가장 구체적인 유산이다. 670년 화재 뒤 다시 지어진 이 절에는 아스카·나라 시대 초기의 건축과 조각이 남아 있다. 북위와 한반도 불교 조각과 이어지는 양식의 623년 석가삼존상, 옥충주자(다마무시노즈시), 그리고 739년 태자의 이카루가궁 터에 세운 팔각 건물 유메도노(몽전)가 그것이다. 1993년 호류지 일대의 불교 건조물은 일본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다.

그래서 쇼토쿠 태자의 이야기는 두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나는 수나라, 한반도 불교, 씨족 간 경쟁으로 뒤바뀌던 세계에서 아스카 조정에 실제로 살았던 한 왕자의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8세기의 역사가, 중세의 신자, 근대의 민족주의자, 전후의 교육자, 오늘날의 연구자에 이르기까지 후대 사람들이 저마다의 질문에 답하려고 그의 기억을 거듭 새로 빚어 온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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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화(和)
17조 헌법이 첫머리에 둔 가치. 관리들은 파벌 싸움을 피하고 차분한 의논으로 일을 정해야 한다.
삼보(三寶)
부처(불), 그 가르침(법), 승가(승). 제2조는 모든 사람에게 삼보를 공경하라고 한다.
한 사람의 군주
나라에 임금은 한 사람뿐이라는 원칙으로, 씨족과 지방 수장의 독자적 권력에 도전하는 생각이었다.
능력에 따른 관위
관위 12계는 개인에게 주어지고 올라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세습 칭호와 달랐다.
대등 외교?
607년 국서는 수 황제를 같은 ‘천자’로 불러, 대등한 지위를 주장한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한반도의 매개
불교, 사찰 건축, 학문은 주로 백제와 고구려의 승려·장인·학자를 통해 야마토에 들어왔다.
영웅 만들기
후대의 역사서와 신앙이 한 왕족 정치가를 성스러운 창시자로 만들었기에, 역사학자들은 우마야도와 ‘쇼토쿠 태자’를 구별한다.

기록

  1. 574년 — 훗날 요메이 천황이 되는 왕자의 아들로 우마야도가 태어남.
  2. 587년 — 소가씨와 그 편이 모노노베씨를 무너뜨리고 불교가 왕실의 지지를 얻음.
  3. 589년 —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
  4. 593년 — 스이코가 즉위. 『일본서기』는 우마야도를 황태자로 삼아 정치를 맡겼다고 적음.
  5. 595년 — 고구려 승려 혜자가 건너와 태자의 불교 스승이 됨.
  6. 600년 — 왜가 수나라에 첫 사신을 보냄(『수서』에만 기록).
  7. 601년 — 이카루가궁 건설 시작.
  8. 603년 — 관위 12계 제정.
  9. 604년 — 『일본서기』가 전하는 17조 헌법.
  10. 607년 — 오노노 이모코가 ‘해 뜨는 곳’ 국서를 가지고 수나라에 감. 호류지 창건.
  11. 608년 — 배세청이 일본을 방문. 유학생과 학승이 중국으로 떠남.
  12. 622년 — 태자 사망(『일본서기』는 621년). 같은 해 아라비아에서 히즈라가 일어남.

용어 풀이

야마토
나라 분지를 중심으로 한 왕권으로, 그 왕들이 뒤에 일본의 천황이 되었다.
왜(倭)
‘일본’이라는 국호가 쓰이기 전 중국과 한국 사료가 일본과 그 사람들을 부른 이름.
우지와 가바네
야마토 조정의 씨족과, 그 서열을 나타낸 세습 칭호.
섭정
군주를 대신해 정치를 맡아 하는 사람. 스이코 시대 태자의 역할을 전통적으로 이렇게 설명한다.
『일본서기』
720년에 완성된 한문 관찬 역사서로, 이 시기의 핵심 사료.
『수서』
636년에 완성된 수나라의 정사로, 왜에 대한 기록이 들어 있다.
『삼경의소』
세 불경에 대한 주석서로, 전통적으로 태자의 저작으로 전한다.
율령
중국을 본뜬 형법(율)과 행정법(령) 체계로, 일본은 7세기 후반~8세기 초에 받아들였다.
태자 신앙
후대에 발전한 쇼토쿠 태자에 대한 종교적 숭배.

묻고 답하기

쇼토쿠 태자는 천황이 된 적이 있나요?

아니요. 황태자였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고모인 스이코 천황을 대신해 정치를 맡았지만, 스이코보다 먼저 죽었어요.

정말 열 사람의 말을 한꺼번에 알아들었나요?

그의 지혜를 보여 주려는 전설이에요. 이런 이야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그에 관한 사료를 조심스럽게 읽어요.

17조 헌법은 정말 태자가 썼나요?

『일본서기』는 그렇게 적지만, 20세기 초부터 일부 학자들은 후대에 쓰였거나 고쳐졌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입니다.

왜 한국과 관련이 깊나요?

불교 스승 혜자가 고구려 사람이었고, 당시의 절은 백제의 승려와 장인들이 지었습니다. 불교 자체도 백제를 거쳐 일본에 들어왔습니다.

수나라 황제는 왜 607년 국서를 싫어했나요?

일본의 군주를 ‘천자’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중국 황제는 이 칭호를 자기만의 것으로 여겼습니다.

‘허구설’은 받아들여지고 있나요?

강한 형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는 우마야도가 실존했고 정치적으로 중요했다고 보면서도, 그의 업적으로 전하는 개혁이 모두 그 개인의 일이었는지는 의심합니다.

그의 시대에서 무엇이 남아 있나요?

670년 뒤 곧 다시 지어진 호류지 건물 일부, 623년의 석가삼존상, 천수국수장 조각, 그 밖의 여러 불상과 명문이 남아 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Prince Shōtoku. Wikipedia
  2. 聖徳太子. Wikipedia (일본어)
  3. 쇼토쿠 태자. 위키백과
  4. 쇼토쿠 태자의 스승 혜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5. Seventeen-article constitution. Wikipedia
  6. The Constitution of Prince Shōtoku (W. G. Aston 번역을 다듬은 것). Asia for Educators, Columbia University
  7. Japanese missions to Sui China. Wikipedia
  8. 遣隋使. Wikipedia (일본어)
  9. Twelve Level Cap and Rank System. Wikipedia
  10. Hōryū-ji. Wikipedia
  11. Buddhism in Japan. Wikipedia
  12. About Asuka-Fujiwara: component properties. Ancient Capitals of Asuka and Fujiwara Council
  13. W. G. Aston (역), Nihongi: Chronicles of Japan from the Earliest Times to A.D. 697. Kegan Paul, Trench, Trübner (Japan Society of London), 1896
  14. Wm. Theodore de Bary, Donald Keene, George Tanabe, Paul Varley (편),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Volume 1 (2nd ed.).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1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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