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마리 퀴리는 186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어요. 그때 이름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였고, 가족들은 ‘마냐’라고 불렀어요. 부모님은 선생님이었고, 마리아는 공부, 특히 과학과 수학을 좋아했어요.
그 시절 폴란드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바르샤바에서는 여자가 대학에 다닐 수 없었어요. 그래서 마리아는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며 몰래 수업하는 ‘떠도는 대학’에서 공부하고, 가정교사로 일하며 돈을 모았어요.
스물네 살에 마리아는 유명한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하려고 파리로 갔어요. 너무 가난해서 추운 다락방에서 옷을 모두 껴입고 지내기도 했어요. 그래도 1등으로 졸업했고, 과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했어요.
마리는 우라늄이라는 금속에서 왜 보이지 않는 광선이 나오는지 궁금했어요. 광선을 아주 꼼꼼히 재 보았더니, 그 광선은 아주 작은 원자 안에서 나오고 있었어요. 마리는 이것을 ‘방사능’이라고 불렀어요. 비가 새는 낡은 헛간에서 마리와 피에르는 새로운 원소 두 개를 찾아냈어요. 하나는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 다른 하나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라듐이라고 이름 지었어요.
마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상인 노벨상을 두 번 받았어요. 한 번은 물리학, 한 번은 화학이었어요. 서로 다른 두 과학 분야에서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마리뿐이에요. 제1차 세계대전 때는 X선 장비를 실은 자동차를 몰고 전선 가까운 병원에 가서, 의사들이 다친 군인 몸속의 총알과 부러진 뼈를 볼 수 있게 도왔어요.
그때는 방사성 물질이 사람을 크게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어요. 마리는 병에 걸려 1934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마리의 공책은 지금도 방사능을 띠고 있어요! 마리는 폴란드와 프랑스, 그리고 온 세상에서 여성 과학자들에게 문을 열어 준 과학의 영웅으로 기억돼요.
한눈에 보기
- 생몰
- 1867년 11월 7일 ~ 1934년 7월 4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폴란드 왕국(회의 왕국)의 바르샤바
- 활동지
- 파리: 파리 시립 산업물리화학학교(ESPCI), 파리 대학(소르본), 라듐 연구소
- 분야
- 물리학과 화학. 방사능 연구와 그 의학적 이용의 개척자
- 발견
- 원자의 성질로서의 방사능, 원소 폴로늄(1898년 7월)과 라듐(1898년 12월), 라듐 분리
- 노벨상
- 1903년 물리학상(피에르 퀴리, 앙리 베크렐과 공동), 1911년 화학상(단독)
- 최초 기록
-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파리 대학 최초의 여성 교수(1906), 자신의 업적으로 팡테옹에 안장된 최초의 여성(1995)
- 가족
- 1895년 피에르 퀴리와 결혼. 딸 이렌 졸리오퀴리(1935년 노벨 화학상), 전기 작가가 된 딸 에브 퀴리
쉬움
마리 퀴리는 누구인가
마리 퀴리(1867~1934)는 본명이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인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귀화 물리학자이자 화학자다. 그가 이름 짓는 데 앞장선 ‘방사능’ 연구, 그리고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새로운 화학 원소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한 일로 유명하다.
그는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노벨상을 두 번 받은 최초의 사람, 그리고 서로 다른 두 과학 분야(1903년 물리학, 1911년 화학)에서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1906년에는 파리 대학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었다. 나중에는 파리와 바르샤바에 방사능의 과학과 그 암 치료 이용을 함께 연구하는 연구소를 세웠다.
퀴리는 평생 프랑스에서 일했지만 폴란드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두 성을 함께 썼고, 딸들에게 폴란드어를 가르쳤으며, 처음 발견한 원소에 당시 독립 국가로 존재하지 않던 조국의 이름을 붙였다. 폴란드와 프랑스는 모두 그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쉬움
점령된 바르샤바에서 보낸 어린 시절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는 1867년 11월 7일, 당시 러시아가 지배하던 폴란드 왕국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교사 부부의 다섯 자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친가와 외가 모두 러시아 지배에 맞선 폴란드 봉기에 가담했다가 재산을 잃었다. 아버지는 수학과 물리를 가르쳤는데, 러시아 당국이 폴란드 학교에서 실험 수업을 없애자 실험 기구를 집으로 가져와 아이들에게 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는 친폴란드 성향 때문에 뒤에 좌천되었다.
어린 시절은 상실로 얼룩졌다. 큰언니 조피아는 장티푸스로, 어머니는 마리아가 열 살이던 1878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는 1883년 금메달을 받으며 중등학교를 졸업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여성은 정규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리아와 언니 브로니스와바는 여성을 받아들이고 당국의 눈을 피해 장소를 옮겨 다니던 비밀 고등 교육 기관 ‘떠도는 대학(Flying University)’에 다녔다.
자매는 약속을 했다. 먼저 마리아가 일해서 브로니스와바의 파리 의학 공부를 돕고, 나중에 브로니스와바가 마리아를 돕기로 한 것이다. 마리아는 몇 년 동안 가정교사로 일했다. 1890~1891년에는 사촌 유제프 보구스키가 운영하던 바르샤바 산업농업박물관의 화학 실험실에서 실습 훈련도 시작했다.
쉬움
파리의 학생, 그리고 피에르와의 결혼
1891년 말 마리아는 프랑스식 이름 마리로 파리에 가서 파리 대학, 곧 소르본에 등록했다. 라탱 지구의 싸구려 다락방에 살며 때로 먹는 것도 잊은 채 낮에는 물리·화학·수학을 공부하고 저녁에는 과외를 했다. 1893년 물리학 학위를, 1894년에는 장학금의 도움으로 두 번째 학위를 받았다.
1894년 강철의 자기적 성질을 연구할 실험 공간이 필요했던 그는, 한 폴란드 물리학자의 소개로 파리 시립 산업물리화학학교(ESPCI)의 강사 피에르 퀴리를 만났다. 과학에 대한 공통의 열정은 사랑으로 이어졌다. 마리는 처음에 폴란드로 돌아가려 했지만 크라쿠프 대학에서 자리를 얻지 못했다. 학계의 성차별 때문이었다. 피에르의 설득으로 그는 파리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1895년 7월 26일 소 시에서 종교 의식 없이 결혼했다. 마리는 웨딩드레스 대신 짙은 파란색 옷을 입었고, 이 옷을 그 뒤 여러 해 동안 실험복으로 입었다. 첫딸 이렌은 1897년에 태어났다. 마리는 가족을 부양하려고 강의를 맡았고, 1900년에는 여성 교사를 양성하던 세브르 여자고등사범학교 최초의 여성 교수진이 되었다.
쉬움
수수께끼의 광선과 두 개의 새 원소
1895년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1896년 앙리 베크렐이 우라늄염이 외부 에너지 없이 투과력 있는 광선을 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리는 이 ‘우라늄선’을 박사 논문 주제로 골랐다. 피에르와 그의 형 자크가 발명한 매우 민감한 전위계를 써서, 광선이 공기를 전기가 통하게 만드는 정도를 측정했다. 그 결과 광선의 세기는 우라늄의 화학적 형태가 아니라 양에만 달려 있었다. 그는 방사선이 원자 자체에서 나온다고 결론지었다. 원자는 쪼개지거나 변하지 않는다고 믿던 시대에 대담한 생각이었다.
여러 물질을 시험한 끝에 그는 1898년 토륨도 이런 광선을 낸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이상한 점도 알아차렸다. 우라늄 광석인 피치블렌드와 칼콜라이트가 순수한 우라늄보다 더 강한 활성을 보였던 것이다. 그는 광석 속에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미지의 원소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흥미를 느낀 피에르는 자신의 결정 연구를 제쳐 두고 합류했다.
퀴리 부부는 ESPCI 옆, 해부실로 쓰이던 비가 새고 환기도 안 되는 헛간에서 피치블렌드를 빻고 녹여 화학적으로 분리하며 방사능을 추적했다. 1898년 7월 비스무트처럼 행동하는 부분에서 새 원소를 발견했다고 발표하고 폴란드의 이름을 따 폴로늄이라 불렀다. 1898년 12월에는 바륨처럼 행동하는 부분에서 두 번째 원소를 발표하고 ‘광선’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따와 라듐이라 이름 지었다. 이 과정에서 ‘방사능(radioactivité)’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중급
라듐 분리와 첫 번째 노벨상
많은 화학자는 새 원소를 순수한 형태로 보고 무게를 잴 수 있을 때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폴로늄은 빨리 붕괴해 모으기가 매우 어려웠지만, 라듐은 반복 결정화로 바륨에서 떼어 낼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기증한 약 1톤의 피치블렌드 찌꺼기로 마리는 3년 넘게 작업해 1902년 염화라듐 0.1그램을 얻었고, 이로써 라듐의 원자량을 정할 수 있었다. 1898~1902년 퀴리 부부는 모두 32편의 논문을 냈는데, 그중에는 라듐이 종양을 만드는 병든 세포를 건강한 세포보다 빨리 파괴한다는 보고도 있었다.
1903년 6월 마리는 파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 12월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방사선 연구의 공로로 앙리 베크렐, 피에르 퀴리, 마리 퀴리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여했다. 위원회는 처음에 베크렐과 피에르만 수상자로 올리려 했는데, 스웨덴 수학자 예스타 미타그레플레르가 이를 피에르에게 알렸고, 피에르가 항의해 마리의 이름이 추가되었다. 마리는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다.
라듐은 곧 의료와 사치품을 위한 새 산업의 기반이 되었다. 퀴리 부부는 방법에 대한 특허를 내지 않았고 이 사업에서 얻은 것이 거의 없었다. 피에르의 기구를 만들던 회사가 생산 규모를 키우는 데 협력했고, 화학자 앙드레 드비에른이 그들의 기법을 대규모 생산에 맞게 바꾸었다. 둘째 딸 에브는 1904년 12월에 태어났다.
중급
비극, 스캔들, 그리고 두 번째 노벨상
1906년 4월 19일 피에르 퀴리는 빗속에서 길을 건너다 마차 바퀴에 깔려 그 자리에서 숨졌다. 마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5월 파리 대학은 피에르의 물리학 교수 자리를 마리에게 제안했고, 그는 대학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었다. 그는 피에르가 끝내 갖지 못한 실험실을 세우는 일을 떠맡았고, 1909년 파리 대학과 파스퇴르 연구소는 그를 위해 라듐 연구소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1910년 그는 라듐을 순수한 금속으로 분리하고, 뒤에 ‘퀴리’라 불리게 된 방사능의 국제 표준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911년 1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한두 표 차이로 그의 입회를 거부했다. 우익 신문들은 그를 외국인이자 무신론자라고 공격했고, 드레퓌스 사건 이후 프랑스의 외국인 혐오와 반유대주의를 반영하듯 그가 유대인이라는 거짓 주장까지 퍼졌다.
그해 말 언론은 그가 아내와 별거 중이던 물리학자 폴 랑주뱅과 사귄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격렬한 비난이 쏟아졌고 그의 집 앞에는 군중이 몰려들었다. 이 폭풍 한가운데서 노벨 위원회는 라듐과 폴로늄의 발견, 라듐 분리의 공로로 그에게 1911년 노벨 화학상을 주었다. 한 위원이 시상식에 오지 말라고 권하자, 그는 상이 자신의 발견에 대해 주어진 것이며 과학 업적과 사생활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답했다. 그는 시상식에 참석했고, 그 뒤 우울증과 신장 질환으로 쓰러져 1912년 대부분을 공적 생활에서 물러나 지냈다.
중급
‘작은 퀴리’: 제1차 세계대전의 부상병을 위한 X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파리의 새 라듐 연구소는 막 완공된 참이었지만, 연구원 대부분이 군대에 징집되었다. 퀴리는 전선 근처의 외과의들이 총알과 파편을 찾고 부러진 뼈를 맞추려면 X선 영상이 필요하며, 그러면 팔다리 절단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방사선학, 해부학, 심지어 자동차 정비까지 빠르게 익혔다.
그는 차량에 X선 장비와 발전기를 실었고, 이 차들은 곧 ‘작은 퀴리(petites Curies)’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적십자 방사선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다. 군의관 한 명과 열일곱 살 딸 이렌의 도움으로 전쟁 첫해에 이동식 장비 20대와 고정 방사선 시설 약 200곳을 세웠고, 여성들을 X선 기사로 훈련했다. 이 장비로 검사받은 부상병은 1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는 또 자신의 라듐에서 뽑은 라돈 가스로 감염된 조직을 소독하게 했고, 노벨상 상금을 프랑스 전쟁 채권에 투자했다. 전쟁 경험은 뒤에 『전쟁 속의 방사선학』(1919)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에도 그는 전시 공로로 프랑스 정부의 공식 훈장을 받지 못했다.
중급
라듐 연구소, 미국, 그리고 바르샤바
전쟁 뒤 퀴리가 이끈 라듐 연구소는 케임브리지의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이끈 캐번디시 연구소, 빈 라듐 연구소,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화학 연구소와 함께 세계 4대 방사능 연구 중심지가 되었다. 이 연구소에서 딸 이렌과 사위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가 연구했고, 두 사람은 인공 방사능으로 1935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그는 많은 여성 과학자를 길러 내고 지원했다.
1921년 미국 언론인 마리 매팅리 멜로니가 미국 모금 순회를 기획했고, 워런 G. 하딩 대통령은 미국의 기부금으로 산 라듐 1그램을 퀴리에게 전달했다. 1929년 두 번째 미국 방문으로 바르샤바의 새 라듐 연구소에 쓸 라듐을 마련했고, 연구소는 1932년 언니 브로니스와바를 소장으로 문을 열었다. 1922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앙리 베르그송 등과 함께 국제연맹의 국제지적협력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주머니에 방사성 시료를 넣고 다니고 전쟁 중 차폐되지 않은 X선 장비를 다루며 여러 해 방사선에 노출된 것이 그의 건강을 해쳤다. 그는 1934년 7월 4일 프랑스 알프스 파시의 요양원에서 재생불량성 빈혈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저서 『방사능』은 1935년에 나왔다. 1995년 그와 피에르의 유해는 파리 팡테옹으로 옮겨졌고, 그는 자신의 업적으로 그곳에 안장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심화
과학적 기여의 맥락: 원자의 성질에서 불안정한 원자핵으로
퀴리의 핵심적인 개념적 기여는 방사능이 화학 결합이나 물리적 상태와 무관한 원자의 성질이라는 가설이었다. 정량적인 전위계 측정법과 결합한 이 가설은 방사능을 화학 분석의 도구로 바꾸어 놓았다. 활성을 따라가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적은 미지 물질을 추적하고 농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방법, 곧 방사화학은 지금도 핵과학과 의학의 기초다.
그의 결과는 깊은 수수께끼도 던졌다. 라듐은 뚜렷한 에너지원 없이 계속 에너지를 내놓아, 처음에는 에너지 보존 법칙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다. 일부 물리학자는 원자가 미지의 외부 방사선에서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해답은 1902년부터 방사성 원자가 스스로 다른 원소로 변한다는 것을 보인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프레더릭 소디, 그리고 방사능을 원자핵에 자리매김한 러더퍼드의 원자핵 모형(1911)에서 나왔다. 퀴리 부부가 만든 강한 방사선원은 이 연구에 꼭 필요했다.
역사가들은 퀴리가 이론적 추측에 신중했고 정밀한 측정과 화학을 중시했다고 지적한다. 이런 신중함은 특히 러더퍼드의 대담한 이론화와 대비되어 보수성으로 읽히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의 발견을 굳건하게 만든 엄밀함으로 보는 이도 있다. 그의 대저 『방사능 개론(Traité de radioactivité)』(1910)은 한 세대의 연구자들에게 이 분야를 정리해 주었다.
심화
공로, 젠더, 그리고 ‘퀴리 신화’
공로 문제는 퀴리의 경력 내내 따라다녔다. 1890년대 많은 과학자는 부부 공동 연구라면 남편이 이끌었으리라 여겼다. 전기 작가 로버트 리드는 연구 발상이 그 자신의 것이었고, 그가 피에르의 전기에서 이를 두 번이나 분명히 기록해 두었다고 강조했다. 1903년 노벨상 추천에서 이름이 빠질 뻔한 일은 그의 역할이 얼마나 쉽게 지워질 수 있었는지 보여 주며, 1911년 아카데미 투표와 랑주뱅 스캔들은 성별·국적·종교가 어떻게 그를 공격하는 데 쓰였는지 보여 준다.
동시에 퀴리의 대중적 이미지는 강력한 전설로 빚어졌다. 딸 에브 퀴리의 베스트셀러 전기 『마담 퀴리』(1937~1938)와 할리우드 영화 「마담 퀴리」(1943)는 어두운 헛간의 성스럽고 헌신적인 천재를 그렸다. 프랑수아즈 지루, 수전 퀸, 바버라 골드스미스 같은 후대 전기 작가들은 피에르 사후의 일기와 랑주뱅 사건 등 새로 공개된 자료를 써서 더 복잡한 인간을 보여 주었다. 역사가 에바 헤뭉스 비르텐은 라듐에 특허를 내지 않은 결정과 그의 명성 자체가 과학과 지식재산권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어떻게 구성되고 이용되었는지 분석했다.
그의 정체성도 다툼의 대상이었다. 에브가 훗날 지적했듯, 프랑스 신문들은 그가 프랑스의 영예를 구할 때는 외국인 침입자로, 외국 상을 받을 때는 프랑스의 여걸로 그렸다. 폴란드의 기억은 폴로늄에 이름을 붙인 애국자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를, 프랑스의 기억은 팡테옹의 마담 퀴리를 강조한다. 라듐 연구소에서 그가 길러 낸 여성 연구자 네트워크에 관한 연구를 포함해 최근 연구는 그를 두 나라와 많은 협력자에 기대어 업적을 이룬 초국적 인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심화
방사선, 건강, 그리고 생애 자료
퀴리 부부가 연구를 시작할 때는 전리 방사선의 위험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마리는 방사성 물질이 든 시험관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고,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모습을 좋아했다. 그는 몇몇 건강 문제를 다른 원인 탓으로 돌렸고, 암 치료의 희망이기도 했던 라듐이 발견자와 노동자를 해치고 있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1995년 유해를 발굴했을 때 프랑스 방사선 방호 기관은 그가 생전에 치명적인 양의 라듐에 노출되지는 않았다고 결론 내리고, 전시의 X선 작업이 병의 더 유력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이 결론은 지금도 논쟁 중이다.
그의 삶의 물질적 기록은 말 그대로 방사능을 띤다. 1890년대 실험 노트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납으로 안을 댄 상자에 보관되어 있고, 열람자는 동의서에 서명하고 보호복을 입어야 한다. 라듐-226의 반감기는 약 1,600년이다. 역사가들은 이 노트 외에도 그의 논문, 전기 『피에르 퀴리』(1923), 자전적 기록, 서신, 50년이 지나 공개된 노벨 위원회 기록, 신문 보도, 딸들과 제자들의 회고에 기댄다.
이 자료를 비판적으로 쓰려면 퀴리 자신의 말과 후대의 재구성을 구별해야 한다. 그의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말 가운데 일부는 믿을 만한 원문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어렵다. 그래서 미국물리학회(AIP)의 온라인 전시 같은 신중한 현대 자료는 문헌 증거와 과학적 맥락을 결합해 그가 무엇을 했고 그것이 왜 중요했는지 설명한다.
핵심 개념
- 원자의 성질로서의 방사능
- 방사선이 화학 반응이 아니라 원자 자체에서 나온다는 결론. 원자는 쪼갤 수 없다는 생각에 대한 초기의 타격이었다.
- 측정이 곧 발견
- 정밀한 전위계 측정으로 일부 광석이 우라늄보다 활성이 강하다는 것을 밝혀 미지의 원소를 가리켰다.
- 방사화학
- 화학적 분리 과정에서 방사능을 추적해 새 물질을 찾고 농축하는 방법. 지금도 쓰인다.
- 폴로늄과 라듐
- 1898년 발표된 두 새 원소. 폴로늄은 폴란드에서, 라듐은 ‘광선’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이름을 땄다.
- 방사선의 의학적 이용
- 종양의 라듐 치료에서 전시 이동식 X선 장비까지, 그의 연구는 물리학을 의학과 곧바로 이었다.
- 열린 과학
- 퀴리 부부는 라듐 추출법에 특허를 내지 않았다. 이 결정은 훗날 칭송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 과학계의 여성
-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소르본 최초의 여성 교수로서 장벽을 깨고 많은 여성 연구자를 길러 냈다.
기록
- 1867년 — 11월 7일 바르샤바에서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로 태어나다.
- 1891년 — 파리로 가서 파리 대학에 등록하다.
- 1895년 — 7월 26일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다.
- 1898년 — 토륨의 방사능을 발표하고, 피에르와 함께 폴로늄(7월)과 라듐(12월)을 발견하다.
- 1902년 — 염화라듐 0.1그램을 얻다.
- 1903년 — 박사 학위를 받고, 피에르 퀴리·앙리 베크렐과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다.
- 1906년 — 피에르가 교통사고로 숨지고, 마리가 파리 대학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다.
- 1910년 — 라듐 금속을 분리하고 『방사능 개론』을 펴내다.
- 1911년 —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입회가 거부되고, 노벨 화학상을 받다.
- 1914년 — 라듐 연구소가 완공되고, 전쟁을 위해 이동식 X선 장비를 조직하다.
- 1932년 — 언니 브로니스와바가 이끄는 바르샤바 라듐 연구소가 문을 열다.
- 1934년 — 7월 4일 오트사부아의 파시에서 재생불량성 빈혈로 세상을 떠나다.
용어 풀이
- 방사능
- 특정 원자가 변하면서 저절로 방사선을 내놓는 성질. 퀴리 부부가 만든 말이다.
- 원소
- 산소, 금, 라듐처럼 한 종류의 원자로만 이루어진 기본 화학 물질.
- 전위계
- 아주 작은 전하를 재는 기구. 퀴리는 이것으로 방사능을 측정했다.
- 피치블렌드
- 퀴리 부부가 폴로늄과 라듐을 뽑아낸 검은 우라늄 광석(섬우라늄석).
- 동위원소
- 원자핵의 중성자 수가 다른 같은 원소. 많은 동위원소가 방사성을 띤다.
- 반감기
- 방사성 물질의 절반이 붕괴하는 데 걸리는 시간. 폴로늄-210은 약 138일, 라듐-226은 약 1,600년.
- X선
- 몸속을 볼 때 쓰는 투과력 있는 전자기파. 1895년 뢴트겐이 발견했다.
- 퀴리(단위)
- 퀴리 부부를 기려 이름 붙인 방사능 단위.
- 떠도는 대학
- 러시아 지배하의 바르샤바에서 여성도 받아들인 폴란드의 비밀 고등 교육 기관.
- 재생불량성 빈혈
- 골수가 혈액 세포를 충분히 만들지 못하는 병. 방사선 손상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
묻고 답하기
왜 원소 이름을 폴로늄이라고 지었나요?
조국 폴란드를 기리기 위해서예요. 그때 폴란드는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에 나뉘어 독립 국가가 아니었어요. 마리는 이 이름이 세상의 관심을 끌기를 바랐어요.
방사능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마리 퀴리인가요?
우라늄에서 나오는 광선을 처음 찾은 사람은 1896년의 앙리 베크렐이다. 퀴리는 그것이 원자의 성질임을 보이고, 토륨에서도 찾아내고,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발견하고, 현상에 이름을 붙였다.
공책이 아직도 방사능을 띤다는 게 사실인가요?
네. 라듐은 수천 년 동안 남아 있기 때문에 공책은 납으로 안을 댄 상자에 보관되고, 열람하는 사람은 보호복을 입어요.
왜 라듐에 특허를 내지 않았나요?
마리와 피에르는 다른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하기를 바랐다. 이 선택이 그의 명성과 라듐 산업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는 역사가들이 지금도 논의한다.
마리 퀴리는 프랑스인인가요, 폴란드인인가요?
둘 다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교육받았고, 결혼으로 프랑스 시민이 되어 주요 연구를 모두 프랑스에서 했으며, 폴란드인이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지켰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나요?
1911년 여성, 외국인, 무신론자라는 공격 속에 한두 표 차이로 떨어졌다. 여성이 정회원으로 뽑힌 것은 1962년 그의 제자 마르그리트 페레가 처음이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세상을 떠났나요?
오랜 방사선 노출로 생긴 것으로 보이는 재생불량성 빈혈이다. 라듐과 전시 X선 작업 가운데 무엇이 주된 원인이었는지는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Marie Curie. Wikipedia
- 마리 퀴리. 위키백과
- Marie Curie and the Science of Radioactivity. American Institute of Physics
- Research Breakthroughs (1897–1904). American Institute of Physics
- The Discovery of Polonium and Radium. American Institute of Physics
- Radioactivity: The Unstable Nucleus and its Uses. American Institute of Physics
- Susan Quinn, Marie Curie: A Life. Simon & Schuster, 1995
- Eva Hemmungs Wirtén, Making Marie Curie: Intellectual Property and Celebrity Culture in an Age of Informa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5
- Naomi Pasachoff, Marie Curie and the Science of Radioactivity.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함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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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