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광개토대왕

廣開土王; 비문 칭호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394–413년 ·

  • 전쟁
  • 외교·교류

한 문장으로

광개토대왕은 391년부터 412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리며 만주에서 한반도 남부까지 사방으로 전쟁을 벌인 왕으로, 무엇보다 414년 아들이 무덤 곁에 세운 거대한 비석을 통해 기억됩니다.

광개토대왕
이미지: Reignsh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1,600년 전, 한반도 북쪽과 지금의 중국 동북 지방 일부는 고구려라는 나라였어요. 담덕이라는 소년이 겨우 열여덟 살에 왕이 되었을 때, 고구려는 얼마 전 전쟁에 져서 할아버지 왕이 싸움터에서 돌아가신 뒤였어요. 담덕은 나라를 다시 강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는 왕으로 있는 동안 거의 늘 군대와 함께 움직였어요. 남쪽의 백제와 싸우고, 서쪽과 북쪽의 말 타는 민족들과 싸우고, 신라가 공격받았을 때는 큰 군대를 보내 도와주기도 했어요. 땅이 아주 넓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중에 그를 ‘땅을 널리 연 왕’이라는 뜻으로 광개토왕이라고 불렀어요.

그는 서른아홉 살에 세상을 떠났어요. 2년 뒤 아들은 무덤 가까이에 엄청나게 큰 돌기둥을 세웠어요. 높이가 6미터가 넘어서 어른 세 명이 어깨 위에 올라선 것보다 높고, 네 면 모두에 한자 약 1,775자가 새겨져 있어요.

비석에는 고구려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관한 옛이야기, 해마다 벌인 전쟁, 그리고 왕의 무덤을 영원히 돌볼 집안들에 관한 규칙이 적혀 있어요. 왕의 가족이 왕을 자랑하려고 쓴 커다란 돌 성적표 같은 것이라서, 역사학자들은 이 글이 한쪽 이야기만 한다는 점을 잊지 않고 꼼꼼히 읽어요.

지금 이 비석은 북한과 맞닿은 중국 지안시의 유리 전각 안에 서 있어요. 한국·중국·일본 학자들이 모두 연구하는데, 가끔은 닳아서 잘 안 보이는 몇 글자가 무슨 뜻인지를 두고 논쟁하기도 해요.

한눈에 보기

재위
능비 기준 391~412년(12세기 『삼국사기』는 392~413년)
이름
담덕(談德)
능비의 칭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줄여서 호태왕
연호
영락(永樂). 한국 고대 국가가 쓴 것으로 확인되는 이른 시기의 연호
도읍
국내성(國內城). 압록강 가 퉁거우 분지, 지금의 중국 지린성 지안시
주요 원정
거란(395), 백제(396), 숙신(398), 왜 등의 공격을 받은 신라 구원(400), 왜 격퇴(404), 요동의 후연, 동부여(410)
기념물
광개토왕릉비(414). 높이 약 6.39m, 약 1,775자. 아들 장수왕이 세움
세계유산
능비와 지안의 왕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2004)의 일부

쉬움

광개토대왕은 누구인가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제19대 왕입니다. 고구려는 서남쪽의 백제, 동남쪽의 신라와 함께 기원 전후부터 한반도와 남만주를 나누어 가졌던 삼국 가운데 하나입니다. 왕의 이름은 담덕이고 374년에 태어났으며, 죽은 뒤 세워진 비석에 따르면 391년 열여덟 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광개토’는 본래 이름이 아니라 업적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비석에 새겨진 긴 칭호를 줄인 것으로, 대략 ‘국강상에 묻힌, 영토를 널리 개척하고 평안하게 한 훌륭한 태왕’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흔히 광개토대왕이라고 부릅니다.

재위 기간은 21년 남짓으로 길지 않았지만 동북아시아의 지도를 바꾸었습니다. 고구려는 압록강 서쪽 요동 지역으로 나아갔고, 백제를 굴복시켰으며, 신라를 보호 아래 두고, 북쪽과 동북쪽의 여러 세력을 정복했습니다. 뒤를 이은 아들 장수왕은 이 성과를 바탕으로 80년 가까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왕이 죽고 2년 뒤 왕실이 직접 새긴 비문, 그리고 몇백 년 뒤 중국과 한국에서 쓰인 역사책입니다. 이 자료들을 나란히 놓고 서로 어긋나는 곳을 살피는 일이 광개토대왕 연구의 재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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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무엇을 했을까

광개토대왕은 무엇보다 싸움에 능한 왕으로 기억됩니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 고구려는 큰 충격에서 벗어나는 중이었습니다. 371년 백제군이 평양을 공격했을 때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전사했기 때문입니다. 젊은 왕은 이 치욕을 되갚으려 했습니다.

비문에는 거의 모든 방향으로 벌인 원정이 적혀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랴오허 강가에 살던 거란과 싸웠습니다. 남쪽으로는 백제를 쳐서 396년 백제 왕의 항복과 충성 맹세를 받아 냈습니다. 400년에는 비문에 따르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왜(일본 열도의 세력)와 그 연합군에게 땅을 빼앗긴 신라를 도왔습니다. 동북쪽으로는 숙신과 동부여를 쳤습니다.

전쟁만 한 것은 아닙니다. 삼촌인 소수림왕 때 불교와 국립 학교가 막 자리 잡았고,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393년 평양에 절 아홉 곳을 세웠습니다. 왕실은 왕릉을 지키는 집안들에 관한 규칙도 꼼꼼히 기록했는데, 이는 고구려의 통치 조직이 커지고 정비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비문은 왕이 평생 성 64곳과 마을 1,400곳을 차지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숫자는 왕실 기념비의 자랑으로 읽어야 하지만, 고구려 왕실이 사람들에게 자기 왕을 어떻게 기억시키고 싶었는지는 잘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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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왕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대한 돌

414년 장수왕은 압록강 가 퉁거우 분지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 근처에 커다란 돌기둥을 세웠습니다. 거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한국과 일본의 사전은 응회암 또는 응회질 각력암이라고 설명합니다. 높이는 약 6.39m, 각 면의 너비는 약 1.35~2m입니다. 네 면에 세로 44줄, 모두 약 1,775자가 예서에 가까운 글씨로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고구려의 건국 이야기입니다. 시조 추모왕은 하늘 임금의 아들이자 강의 신 하백의 딸이 낳은 아들로, 거북과 물고기가 놓아 준 다리로 강을 건너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 둘째는 광개토대왕이 해마다 벌인 원정의 기록입니다. 셋째는 옛 고구려 사람과 새로 정복한 지역 사람들로 이루어진 330가(家)의 이름을 적고 왕릉을 지키게 한 내용으로, 이들을 사고파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도 들어 있습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이 지역은 변경이 되었고, 비석은 천 년 넘게 잊혔습니다. 19세기 말 청나라가 이 지역의 출입 금지를 풀면서 다시 발견되었습니다. 지금은 중국 지린성 지안시의 유리 보호각 안에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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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광개토대왕 이전의 고구려: 패배와 개혁

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 무렵 압록강 중류 산간 지대의 여러 집단이 모인 연맹에서 출발해 강한 왕국으로 자랐지만, 4세기에는 위기를 겪었습니다. 342년에는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이 고구려 도읍을 함락했습니다. 371년에는 전성기를 맞은 백제 근초고왕이 북진했고, 고국원왕이 평양성을 지키다 전사했습니다.

그 아들 소수림왕(재위 371~384)은 개혁으로 대응했습니다. 372년 당시 화북을 장악한 전진에서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태학을 세웠습니다. 373년에는 율령을 반포했습니다. 이런 조치는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층에 공통의 교육과 신앙을 주었습니다. 소수림왕 다음에는 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고국양왕이 잠시 재위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제도는 다시 세웠지만 위신은 아직 회복하지 못한 나라를 물려받은 셈입니다. 4세기 초부터 중국은 북쪽의 단명한 여러 왕조와 남쪽의 동진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383년 비수 전투에서 패한 전진이 무너지자, 요동과 북쪽 변경은 고구려와 다시 일어선 모용씨의 후연이 다투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이런 유동적인 정세가 야심 있는 왕에게 팽창의 여지를 주었습니다.

[8][4]

중급

해마다의 원정

비문은 391년을 원년으로 하는 연호 ‘영락’으로 연대를 적습니다. 영락 5년(395) 왕은 직접 랴오허 유역의 거란 계통 집단인 패려(稗麗)를 쳐서 가축과 포로를 얻었습니다. 영락 6년(396)에는 수군과 육군을 이끌고 백제를 쳤는데, 비문은 백제를 ‘백잔(百殘)’이라는 낮춤말로 부릅니다. 비문은 성 58곳과 마을 700곳을 빼앗았다고 하며, 백제 왕이 항복해 남녀 1천 명과 왕의 아우 및 대신 10명을 인질로 바치고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적습니다.

영락 8년(398)에는 동북쪽의 숙신에 군대를 보냈습니다. 비문에 따르면 영락 9년(399)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와 손잡았고, 신라는 왜군이 나라 안에 가득하다고 알려 왔습니다. 영락 10년(400) 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남쪽으로 보냈고, 고구려군은 신라에서 왜군을 몰아낸 뒤 한반도 남단 가야 지역의 성까지 뒤쫓았습니다. 영락 14년(404)에는 옛 대방 지역(지금의 황해도 일대)에 들어온 왜군을 바다와 육지에서 무찔렀습니다.

영락 17년(407)에는 갑옷 1만여 벌을 노획한 큰 승리가 적혀 있지만, 상대가 누구인지는 글자가 닳아 알 수 없습니다. 영락 20년(410)에는 조공을 끊은 동부여를 쳐서 복속시켰습니다. 비문은 재위 동안 성 64곳, 마을 1,400곳을 차지했다고 정리합니다.

비문은 서쪽 전선에 대해 말이 적지만, 중국 역사서에는 400~407년 무렵 고구려와 후연이 싸운 기록이 있습니다. 후연이 고구려 서쪽 성들을 공격하고 고구려가 반격한 내용입니다. 이 시기가 끝날 무렵 고구려는 기름진 평야인 요동을 차지했고, 7세기까지 이곳을 지키며 수·당 제국과 맞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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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신라 구원과 한반도 남부

400년의 원정은 한 번의 전쟁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경주 분지를 중심으로 한 작은 나라였던 신라는 5세기 대부분 동안 고구려의 강한 영향 아래 놓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왕자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고, 이 시기 신라 무덤에서는 고구려 물건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예가 1946년 경주 호우총에서 나온 청동 그릇입니다. 바닥에 ‘을묘년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 16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을묘년은 능비를 세운 이듬해인 415년으로, 죽은 왕을 기리는 제사에 쓰려고 만든 그릇으로 보입니다. 이 그릇이 100년쯤 뒤인 6세기 초에 만든 신라 무덤에 묻혔다는 사실은 신라 지배층이 고구려와 얼마나 가깝게 얽혀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남해안의 가야 여러 나라에게 400년 원정은 흔히 전환점으로 여겨집니다. 많은 연구자는 그때까지 가야를 이끌던 금관가야(지금의 김해)가 쇠퇴하고 주도권이 내륙의 대가야(고령)로 옮겨 간 것을, 비문에 나오는 ‘임나가라’까지의 고구려군 추격과 연결합니다. 다만 타격의 규모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립니다.

비문이 왜를 자주 쳐들어오는 세력으로 그린 점은 이 시기 일본 열도에 대한 질문도 낳습니다. 당시 열도는 거대한 앞트기 뒤둥근 무덤(전방후원분)을 만든 고분 시대였고, 지배층은 한반도의 철과 기술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비문의 ‘왜’가 긴키 지방의 중앙 권력이 보낸 군대인지, 서일본의 무사 집단인지, 한반도 세력과 섞인 연합군인지는 아래 심화 부분에서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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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하늘 아래의 태왕: 칭호, 연호, 수묘인

능비는 고구려 왕실이 스스로를 어떻게 보았는지 보여 줍니다. 왕은 ‘태왕’으로 불리고, 시조는 하늘 임금의 아들로 그려집니다. 중국 황제의 연호가 아닌 자기 연호 ‘영락’을 쓴 것은 고구려가 스스로 세계 질서의 중심에 있다고 여겼음을 보여 주며, 주변 세력은 조공하러 오는 속민으로 묘사됩니다. 연구자들은 이를 중국 제국의 관념을 본뜨되 그로부터 독립한 고구려식 천하관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고구려 왕들은 외교상 필요할 때 중국 왕조가 주는 관작을 받기도 했습니다. 안으로는 중국식 왕권의 형식을 빌려 쓰고 밖으로는 중국 왕조와 협상하는 이런 이중적 태도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흔했으며, 뒤에 볼 역사 해석 논쟁에서도 중요한 쟁점이 됩니다.

비문의 마지막 3분의 1인 수묘인 연호 부분은 거의 법령처럼 읽힙니다. 이전 왕들은 옛 고구려 백성만 무덤지기로 삼았지만 광개토대왕은 새로 정복한 사람들도 쓰게 했다고 설명하고, 이들을 국연(國烟) 30가와 간연(看烟) 300가로 나눕니다. 무덤지기를 사고파는 것도 금지합니다. 사회사 연구자에게 이 부분은 고구려가 노동력을 어떻게 조직하고 정복한 집단을 어떻게 흡수했는지 보여 주는 가장 값진 자료입니다.

광개토대왕이 정확히 어디에 묻혔는지는 비석 위치만큼 확실하지 않습니다. 근처의 거대한 돌무지무덤 두 기가 후보입니다. 하나는 1913년 ‘태왕의 능이 산처럼 편안하고 큰 산처럼 굳건하기를 바란다(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는 글자가 찍힌 벽돌이 나온 태왕릉이고, 다른 하나는 보존 상태가 더 좋은 장군총입니다. 뒤에 태왕릉에서 ‘신묘년’과 ‘호태왕’이 새겨진 청동 방울이 나와 지금은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1][2][6]

중급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광개토대왕이 다스린 391~412년은 세계사에서 유명한 전환점들과 겹칩니다. 로마 세계에서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391~392년 공개적인 이교 제사를 금지했고, 395년 그가 죽은 뒤 제국은 동서로 영영 나뉘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죽기 2년 전인 410년에는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로마시를 약탈했습니다. 397~400년 무렵 『고백록』을 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충격에 답하여 『신국론』을 썼습니다.

인도에서는 굽타 제국이 찬드라굽타 2세(재위 약 375~415) 아래에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재위와 거의 같은 399~412년, 중국 승려 법현은 장안에서 육로로 인도에 가서 불경을 배우고 모은 뒤 스리랑카를 거쳐 바닷길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여행기는 굽타 시대 인도를 알려 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인도 전승은 시인 칼리다사가 ‘비크라마디티야’ 왕의 궁정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 왕은 흔히 찬드라굽타 2세로 여겨집니다.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386년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북위가 일어나 뒷날 화북을 통일하고 고구려의 가장 중요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대번역가 구마라집은 401년 장안에 와서 한국과 일본 승려들이 수백 년 동안 읽게 될 한역 불경을 내놓았습니다. 372년 고구려에 들어온 불교는 군대와 사신이 오가던 바로 그 길을 따라 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멀리 아메리카에서는 마야 도시 티칼에 378년 테오티우아칸과 연결된 강력한 외부 인물이 도착했고, 중앙 멕시코와 관련된 새 왕조가 광개토대왕의 생애 내내 이 도시를 다스렸습니다. 4세기 말~5세기 초 유라시아와 그 너머는 제국이 쪼개지고, 그 가장자리에서 새 왕국이 자라고, 보편 종교가 상인과 승려를 따라 퍼지던 시대였습니다. 고구려의 팽창은 그 흐름의 동아시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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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그 뒤: 장수왕, 평양, 그리고 오늘의 기억

아들 장수왕(재위 413~491)은 넓고 자신감 넘치는 나라를 물려받았습니다. 427년 그는 한반도의 농경지와 경쟁국에 더 가까운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475년 고구려는 지금의 서울 근처에 있던 백제 도읍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 왕을 죽였고, 백제는 남쪽 웅진(공주)으로 옮겨 가야 했습니다.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에 맞서 손을 잡았습니다. 광개토대왕이 만든 세력 균형이 이후 두 세기의 한반도 정치를 결정한 셈입니다.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광개토대왕은 한국의 왕국이 만주의 넓은 땅을 다스리던 시절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20세기 일제 강점기와 광복 이후 그의 이야기는 민족적 자부심을 북돋우는 데 쓰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거리, 동상, 한국 해군 구축함에 붙었고 소설과 드라마에도 등장합니다. 이런 현대의 쓰임새는 5세기보다는 20~21세기의 관심사를 더 많이 말해 줍니다.

연구자에게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무엇보다 능비입니다. 삼국 시대에서 전하는 가장 긴 글이며, 400년 무렵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의 역사를 알려 주는 드문 당대 문자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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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재발견, 탁본, 그리고 석회 도포 문제

능비는 19세기 말 청나라가 이 지역의 봉금을 풀면서 역사에 다시 등장했습니다. 현지 농민과 관리가 이끼와 덩굴에 덮인 비석을 찾았고, 1880년대 초 덩굴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표면이 상했습니다. 초천부·초균덕 부자 같은 현지 탁공들이 탁본을 떠서 팔았습니다. 1883년 일본군 장교 사코 가게아키는 글자 윤곽을 먼저 그리고 먹을 칠한 묵수곽전본(진짜 탁본은 아님)을 얻어 일본으로 가져갔고,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이를 연구해 1889년 판독문을 발표했습니다.

20세기 초 무렵부터 탁공들은 울퉁불퉁한 비면에 석회를 발라 더 선명하고 잘 팔리는 탁본을 만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글자의 겉모습이 달라졌습니다. 1972년 재일 사학자 이진희는 일본 참모본부가 왜 관련 구절을 강화하려고 의도적으로 석회를 발라 글자를 바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능비는 식민주의 역사 조작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뒤의 연구는 의도적 변조설을 뒷받침하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 말부터 현지에서 비석을 조사하고 1984년 연구서를 낸 중국 학자 왕건군은, 석회는 현지 탁공들이 장사 목적으로 바른 것이지 역사를 왜곡하려던 것은 아니라고 결론지었습니다. 2006년 쉬젠신(徐建新)은 석회를 바르기 전에 뜬 가장 이른 탁본들을 사코의 본과 비교해 왜 관련 구절이 같다는 것을 보고했습니다. 지금은 한국·일본·중국의 전문가 대부분이 조작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후대 탁본은 매우 신중하게 써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문헌학적으로 핵심 문제는 140자 이상이 닳거나 알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복원은 시기가 다른 초기 탁본, 사진, 비석 자체를 비교하고, 문법과 비문 전체 구조에 관한 논증에 기대야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신묘년조’뿐 아니라 여러 구절이 둘 이상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1][6][7]

심화

여러 관점

신묘년조. 396년 원정을 소개하는 문장은 흔히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으로 판독됩니다. 19세기 말 일본 학자들이 세운 전통적 해석은 문장 끝까지 왜를 주어로 봅니다.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 전쟁 이전 일본에서 이 해석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 뒷날 ‘임나일본부’와 연결되는 생각의 근거로 쓰였고 식민 지배 이념에 이용되었습니다.

한국 학자들은 다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1955년 판독이 발표된 정인보는 문장 중간에 주어가 바뀐다고 보았습니다. 왜가 신묘년에 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또는 백제)를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海(바다)’ 같은 닳은 글자의 판독을 문제 삼거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런 해석들은 문법상 가능하지만 확실히 읽을 수 없는 글자에 기대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 모두 널리 받아들여지는 세 번째 흐름은, 비문이 왜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깨뜨렸다고 말하는 것은 인정하되, 이 문장을 고구려 관점에서 쓴 전치문(前置文)으로 읽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원정을 정당화하고 승리를 부풀리려고 왜의 위협을 과장했다는 것으로, 중립적 보고가 아니라 왕실의 선전문이라는 해석입니다. 하마다 고사쿠, 니시지마 사다오 같은 일본 연구자들도 이런 수사적 성격을 강조했습니다. 다만 이 해석으로도 왜군이 실제로 한반도에서 얼마나 활동했는지는 풀리지 않으며, 고고학자들은 해협 양쪽의 무기·갑옷·전방후원분 분포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누구의 역사인가. 두 번째 논쟁은 나라 전체에 관한 것입니다. 한국 역사학에서 고구려는 한국사의 삼국 가운데 하나이며, 뒤의 고려는 그 이름을 이어받았고 영어 이름 ‘Korea’도 고려에서 나왔습니다. 2002~2007년 중국사회과학원은 정부 지원을 받아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영토 대부분과 초기 도읍이 지금의 중국 안에 있고 왕들이 중국의 관작을 받았다는 점을 들어 고구려를 중국사 속 소수민족의 지방 정권으로 규정했습니다. 한국 학계와 정부는 조공·책봉이 정치적 종속을 뜻하지 않으며, 능비에서도 보이는 고구려의 언어·문화·자의식이 한국사 속에 자리한다고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한국은 이에 대응해 연구 기관을 세웠고, 이는 2006년 동북아역사재단으로 통합되었습니다.

2004년 유네스코는 능비를 포함한 중국의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과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을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습니다. 두 나라 밖의 많은 연구자는 현대 국민국가를 5세기 왕국에 거꾸로 덧씌우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라고 지적합니다. 고구려는 예맥·부여·한인·선비·말갈 등 여러 집단을 품은 다민족 국가였으며 동북아시아의 공동의 역사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중국·일본의 교과서가 지금도 광개토대왕과 능비를 꽤 다르게 서술한다는 점을 기억해 둘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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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사료와 그 한계

능비는 왕이 죽은 지 2년 안에 새긴 당대 사료지만, 후계자가 세운 기념문입니다. 승리만 골라 적고 적을 낮춰 부르며 패배는 말하지 않습니다. 연대도 독자적으로 적는데, 비문으로 계산하면 광개토대왕은 391년 18세에 즉위하고 412년 39세에 죽었습니다.

1145년 고려에서 편찬된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는 즉위를 392년, 죽음을 413년으로 능비보다 한 해씩 늦게 적고, 392년 백제 관미성 함락이나 후연과의 전투처럼 능비에 없는 사건도 전합니다. 편찬자들은 중국 역사서와 지금은 없어진 한국 기록을 참고했습니다. 대부분의 연구자는 연대는 능비를 따르되, 능비가 빠뜨린 사건은 『삼국사기』로 보충합니다.

뒷날 편찬된 진(晉)·후연 시기에 관한 중국 정사는 랴오허 건너편에서 본 모습을 전하며, 주로 전쟁과 외교의 맥락에서 고구려를 언급합니다. 『일본서기』(720) 같은 일본 사서도 이 시기 한반도에 관한 전승을 담고 있지만, 4~5세기 연대는 신뢰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아 한국·중국 자료와 견주려면 흔히 120년을 끌어내리는 식의 보정이 필요합니다.

고고학은 독립적인 검증 수단입니다. 경주에서 나온 415년 청동 호우, 신라 무덤의 고구려계 유물, 지안의 돌무지무덤, 요동의 산성 등은 문헌을 확인하고 때로는 바로잡게 해 줍니다. 관련 지역이 지금 중국·북한·한국으로 나뉘어 있어 공동 조사와 유물 공개가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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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태왕
능비에 쓰인 고구려 왕의 칭호로, 고구려 중심의 세계 질서 속에서 주변 세력을 거느린다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영락 연호
능비에서 연대를 적는 데 쓴 연호로, 고구려가 독자적 주권을 내세웠음을 보여 줍니다.
선전물로서의 비문
비문은 후계자가 왕을 기리려고 쓴 글이므로, 역사가는 승리와 적에 관한 서술을 비판적으로 읽습니다.
신묘년조
391년의 왜에 관한 닳은 문장으로, 한 세기 넘게 한일 학계가 해석을 두고 논쟁해 왔습니다.
수묘인 연호
정복민을 포함해 왕릉을 지키도록 정한 330가로, 고구려의 사회 조직을 보여 줍니다.
다투어지는 유산
고구려는 한국사와 중국사가 서로 다르게 자기 역사로 서술하며, 그 유적은 현대 국경에 걸쳐 있습니다.

기록

  1. 371년 — 백제 근초고왕의 군대가 평양을 공격해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한다.
  2. 372년 — 소수림왕이 전진에서 불교를 공식 수용하고 태학을 세운다.
  3. 374년 — 담덕(뒷날의 광개토대왕)이 태어난다.
  4. 391년 — 능비에 따르면 18세에 즉위(『삼국사기』는 392년), 영락 연호가 시작된다.
  5. 396년 — 백제 원정. 백제 왕이 항복하고 인질을 바친다.
  6. 400년 — 보병·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고 왜군을 가야 방면으로 추격한다.
  7. 404년 — 옛 대방 지역에 들어온 왜군을 격파한다.
  8. 410년 — 동부여를 정벌한다.
  9. 412년 — 능비에 따르면 39세로 세상을 떠난다(『삼국사기』는 413년).
  10. 414년 — 장수왕이 광개토왕릉비를 세운다.
  11. 427년 — 장수왕이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다.
  12. 1883년 — 사코 가게아키가 비문의 묵수곽전본을 일본으로 가져간다.
  13. 2004년 — 능비와 지안의 고분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일부로 등재된다.

용어 풀이

고구려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있던 왕국(전통적으로 기원전 37~기원후 668). 삼국 가운데 하나.
백제
한반도 서남부의 왕국으로,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의 주된 남쪽 경쟁국.
신라
경주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동남부의 왕국으로, 뒷날 한반도 대부분을 통합했다.
가야
백제와 신라 사이 한반도 남해안의 작은 나라들.
왜
이 시기 중국·한국 자료가 일본 열도의 사람과 정치 세력을 부른 이름.
후연
선비족 모용씨가 중국 동북에 세운 나라(384~407)로, 고구려의 서쪽 경쟁자.
비(碑)
글을 새겨 세운 돌.
탁본
비석에 종이를 대고 먹을 두드려 글자를 떠낸 것.
연호
임금이 정한 해의 이름으로, 연대를 적는 데 쓴다.

묻고 답하기

왜 ‘대왕’이라고 부르나요?

나라의 땅을 크게 넓혔기 때문이에요. 뒷날 사람들이 존경의 뜻으로 ‘대왕’을 붙였고, 비석의 칭호에도 이미 ‘땅을 널리 연’ 왕이라는 칭찬이 들어 있어요.

비석은 얼마나 큰가요?

높이가 약 6.39m로 2층 집보다 높고, 네 면 모두에 글씨가 있어요.

능비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414년에 세운 그 자리, 북한과 압록강을 사이에 둔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보호각을 씌워 서 있습니다.

일본군이 비문 글자를 고쳤나요?

1972년 그런 주장이 나왔지만, 석회를 바르기 전에 뜬 탁본을 조사한 뒤의 연구에서 핵심 구절이 원래 같게 읽혔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지금은 현지 탁공이 더 선명한 탁본을 팔려고 석회를 발랐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능비와 『삼국사기』의 연대는 왜 다른가요?

『삼국사기』는 700년도 더 뒤에 편찬되었고 재위를 한 해 늦게 적습니다. 대부분의 연구자는 연대는 당대 자료인 능비를 따릅니다.

고구려는 한국사인가요, 중국사인가요?

한국 역사학은 삼국 가운데 하나로 보고, 중국의 국가 지원 연구(동북공정, 2002~2007)는 중국사 속 지방 정권으로 보았습니다. 많은 연구자는 동북아시아 공동의 역사로 보기도 합니다.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어느 것인가요?

‘호태왕’이 새겨진 청동 방울이 나온 태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근처의 장군총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안정준, 광개토왕릉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태왕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3. 정호섭, 광개토왕호우명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4. Gwanggaeto the Great. Wikipedia
  5. 광개토대왕. 위키백과
  6. Gwanggaeto Stele. Wikipedia
  7. 広開土王碑. 일본어 위키백과
  8. Goguryeo. Wikipedia
  9. Northeast Project. Wikipedia
  10. Faxian. Wikipedia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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