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ntoninus(라틴어), Μᾶρκος Αὐρήλιος Ἀντωνῖνος(그리스어)

161–180년 · 빈도보나 (오늘날의 빈 부근)

한 문장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61년부터 180년까지 로마를 다스린 황제로, 전쟁과 무서운 전염병 속에서도 어떻게 하면 침착하고 공정하고 선하게 살 수 있을지 자기 자신에게 쓴 메모를 남겼으며, 이 글이 오늘날의 『명상록』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미지: Unknown · CC BY 2.5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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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약 1,850년 전,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가운데 하나였던 로마 제국을 다스린 황제예요. 그 시대에 가장 힘센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그를 영원히 유명하게 만든 건 전투나 궁전이 아니었어요. 오직 자기 자신만 보려고 쓴 작은 공책이었어요.

그 공책에서 마르쿠스는 어려운 시험을 앞두고 스스로에게 말을 걸듯이 자기에게 조언을 했어요. 이런 식이에요. 사람들이 무례하게 굴면, 그들이 더 나은 걸 몰라서 그렇다는 걸 기억하자. 남이 하는 일은 내가 어쩔 수 없지만, 거기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내가 정할 수 있다. 어떤 일이든 내 인생의 마지막 일인 것처럼, 불평하지 말고 정성껏 하자.

마르쿠스는 ‘스토아 철학’이라는 생각을 따랐어요.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곧 용감하고 공정하고 정직하고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라고 믿었어요. 돈이나 명성, 심지어 건강도 빼앗길 수 있지만, 내가 스스로 버리지 않는 한 나의 착함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고 했지요.

황제 노릇은 힘들었어요. 여러 부족이 제국의 국경을 공격했기 때문에, 마르쿠스는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도나우강 근처 군대 막사에서 여러 해를 지냈어요. 같은 때 무서운 병이 제국에 퍼져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마르쿠스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흔히 밤에, 그리스어로 공책을 썼어요.

그는 다른 사람이 읽기를 바라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가 죽은 뒤 누군가 공책을 간직했고, 오늘날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삶이 힘들 때 침착하고 친절하게 지내는 법을 배우려고 이 책을 읽어요.

한눈에 보기

생몰
121년 4월 26일 ~ 180년 3월 17일
재위
161~180년(161~169년 루키우스 베루스와, 177년부터 아들 콤모두스와 공동 통치)
출생·사망지
로마에서 태어남. 도나우강 방면 원정 중 사망. 사료에 따라 빈도보나(오늘날의 빈) 또는 시르미움(세르비아 스렘스카미트로비차)
역할
로마 황제, 스토아 철학 저술가
주요 저작
『명상록』(그리스어 ta eis heauton, ‘자기 자신에게’). 그리스어로 쓴 개인 메모 12권, 약 170~180년
사상
로마 스토아 철학. 에픽테토스의 영향이 큼
재위 중 주요 사건
파르티아 전쟁(161~166), 안토니누스 역병(165년부터), 마르코만니 전쟁(약 166~180),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175)
유산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 『명상록』은 고대 철학서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는 책의 하나

쉬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누구인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이 브리타니아에서 이집트까지, 히스파니아에서 시리아까지 뻗어 있던 161년부터 180년까지 로마의 황제였습니다. 그는 두 가지 모습으로 기억됩니다. 재위 기간 대부분을 제국 국경을 지키는 데 바친 성실한 통치자, 그리고 고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책 가운데 하나가 된 철학 메모 『명상록』의 저자입니다.

그는 121년 4월 26일 로마에서, 본래 히스파니아 출신의 부유하고 연줄이 든든한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세 살 무렵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도미티아 루킬라와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진지하고 정직한 이 소년을 눈여겨보았고, 가문 이름 베루스(Verus)를 살짝 바꾸어 ‘가장 진실한 아이’라는 뜻의 ‘베리시무스’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없던 하드리아누스는 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후계자로 정하면서, 열여섯 살의 마르쿠스와 더 어린 루키우스(뒷날의 루키우스 베루스) 두 소년을 양자로 들이라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이때부터 마르쿠스는 통치자로 길러졌습니다. 145년에는 안토니누스의 딸 소(小) 파우스티나와 결혼해 적어도 열세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많은 아이가 어려서 죽었습니다.

161년 안토니누스가 죽자 마르쿠스는 황제가 되었고, 곧바로 루키우스를 공동 황제로 삼았습니다. 로마가 같은 칭호를 지닌 두 황제의 통치를 받은 첫 사례였습니다. 루키우스가 169년에 죽은 뒤 마르쿠스는 홀로 다스리다가 177년 아들 콤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세웠습니다. 마르쿠스는 180년 도나우강 방면 원정 중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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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철학에 빠진 학생

미래의 황제로서 마르쿠스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가장 유명한 스승은 당시 으뜸가는 라틴어 웅변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로, 그에게 대중 연설의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두 사람은 수십 년 동안 다정한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 가운데 많은 편지가 남아 있어 젊은 황태자의 일상, 공부, 감기, 포도 수확 이야기까지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 수사학은 아테네의 부호 헤로데스 아티쿠스에게 배웠습니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수사학보다 철학에 더 끌렸습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그는 열두 살 무렵 그리스 철학자의 거친 망토를 걸치고 맨바닥에서 잤는데, 어머니가 설득해 겨우 침대를 쓰게 했다고 합니다. 이십 대 중반에는 프론토를 실망시키며 철학으로 확실히 돌아섰습니다. 그의 철학 스승 가운데에는 스토아 철학자 유니우스 루스티쿠스, 칼케돈의 아폴로니오스, 카이로네이아의 섹스투스가 있었습니다.

『명상록』 제1권은 감사의 목록입니다. 마르쿠스는 가족과 스승과 친구의 이름을 하나하나 들며 각자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적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서는 좋은 성품과 온화함을, 어머니에게서는 너그러움과 검소한 생활을, 루스티쿠스에게서는 자기 성격을 고쳐야 한다는 깨달음과 함께 루스티쿠스가 자기 서재에서 빌려 준 에픽테토스 강의록을 얻었다고 합니다. 노예 출신으로 가장 위대한 스토아 스승이 된 에픽테토스는 마르쿠스를 가장 크게 빚어낸 사상가였습니다.

이 목록은 마르쿠스에 관해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는 선함이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이며, 감사란 따르고 싶은 본보기를 기억하는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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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한눈에 보는 스토아 철학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300년 무렵 키티온의 제논이 아테네에서 세운 철학 학파입니다. 제논이 가르치던 ‘채색 주랑(스토아 포이킬레)’에서 이름이 나왔습니다. 마르쿠스 시대에 스토아 철학은 세네카, 무소니우스 루푸스, 에픽테토스 같은 인물들이 가르치며 교육받은 로마인 사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이 되어 있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오직 덕(德)만이 참으로 좋은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지혜, 정의, 용기, 절제가 그것입니다. 부, 건강, 명성, 심지어 목숨조차 ‘선악과 무관한 것(아디아포라)’입니다. 어떤 것은 본성상 더 바람직하지만, 그 무엇도 사람을 참으로 선하거나 악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또 우주가 하나의 살아 있는 전체이며, 모든 것을 꿰뚫는 신적인 이성(로고스)이 질서를 부여한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이 이성을 나누어 가졌기에 모든 사람은 하나의 세계 도시에 사는 동료 시민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자연에 따라’ 사는 것, 곧 전체 속에서 자기 자리를 이해하고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로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리의 괴로움이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서 온다고 가르쳤습니다. 에픽테토스는 이를 유명한 공식으로 정리했습니다. 어떤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판단, 욕구, 행동),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몸, 재산, 평판)는 것입니다. 마르쿠스는 이 생각으로 거듭 돌아갑니다.

[4][3]

중급

위기의 제국을 다스리다: 전쟁과 역병

마르쿠스는 오랜 평화기의 끝자락에 즉위했지만, 그의 치세는 위기로 가득했습니다. 161년 파르티아 제국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로마군을 격파했습니다. 루키우스 베루스가 동방으로 파견되었고, 로마 장군들, 특히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잇달아 승리해 165~166년 파르티아의 수도 셀레우키아와 크테시폰을 약탈하며 전쟁을 끝냈습니다.

귀환한 병사들이 끔찍한 전염병, 곧 안토니누스 역병을 들여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병은 165년 무렵부터 제국 전역에 퍼졌습니다. 마르쿠스의 궁정에서 일한 의사 갈레노스가 증상을 기록했으며, 현대 학자들은 대개 천연두로 보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사망자 추정치는 인구의 몇 퍼센트에서 훨씬 높은 수치까지 크게 엇갈립니다. 병은 여러 해에 걸쳐 여러 차례 되풀이되었습니다.

160년대 말,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이아지게스족 등 도나우강 북쪽의 게르만계·사르마티아계 민족들이 로마 영토로 넘어왔습니다. 170년 무렵에는 침입자들이 북이탈리아까지 들어와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는데, 이탈리아가 적의 침입을 받은 것은 수백 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마르쿠스는 170년대 대부분을 카르눈툼과 시르미움 같은 기지에서 군대와 함께 보냈습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그가 세금을 올리지 않고 전쟁 비용을 대려고 트라야누스 포룸에서 황실 보물을 경매에 부쳤다고 전합니다.

175년 마르쿠스가 죽었다는 헛소문이 돌자, 동방 총독이 된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황제로 추대되었습니다. 반란은 카시우스가 자기 부하 장교들에게 살해되면서 석 달 남짓 만에 무너졌습니다. 마르쿠스는 질서를 회복하러 동방으로 갔고, 그 길에 아내 파우스티나가 카파도키아에서 죽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아테네에 들러 엘레우시스 비의에 입문했고, 플라톤학파, 아리스토텔레스학파,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의 네 학파에 철학 교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1][6][10]

중급

『명상록』: 자기 자신에게 쓴 공책

『명상록』은 로마 세계에서 철학의 언어였던 그리스어로 쓴 열두 권의 메모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는 마르쿠스 생애의 마지막 10년, 대략 170~180년에 썼다고 봅니다. 사본에 남은 두 줄의 메모가 작품 일부를 “그라누아 강가 콰디족 땅에서”(그라누아는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강)와 “카르눈툼에서” 쓴 것으로 적고 있어, 적어도 일부는 원정 중에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해지는 제목 ta eis heauton은 ‘자기 자신에게’ 또는 ‘자신에게 하는 말들’이라는 뜻이며, 마르쿠스가 직접 붙인 제목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영어 제목 ‘Meditations’는 메릭 카소본의 1634년 번역 이후 굳어졌고, 한국어 『명상록』도 이를 따른 것입니다. 이 책은 계획을 세워 쓴 논문이 아닙니다. 한 문장짜리부터 한 쪽 분량까지 짧은 글들을 모은 것으로, 마르쿠스는 그 속에서 스스로를 일깨우고 꾸짖고 격려합니다.

메모는 일부러 되풀이됩니다. 피에르 아도 같은 학자들은 마르쿠스가 스토아 철학의 핵심 원리를 생생하게 간직하려고 자기 말로 다시 쓰는 ‘영적 수련’을 했다고 보았습니다. 유명한 예로 제2권 첫머리의 아침 다짐이 있습니다. 오늘 나는 참견하고, 배은망덕하고, 오만하고, 속이는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해칠 수 없고, 나는 두 손이나 위아래 이처럼 그들과 함께 일하도록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또 권력에 ‘카이사르가 되어 버리지’ 말고, 자줏빛 황제 옷에 ‘물들지’ 말라고 스스로 경계한 대목(6.30)도 있습니다.

마르쿠스는 이 글을 출판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매력입니다. 독자는 한 권력자가 분노와 피로, 슬픔과 죽음의 두려움과 씨름하며, 늘 성공하지는 못해도 자기 원칙대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엿듣게 됩니다.

[5][3][8][9]

중급

『명상록』의 핵심 사상

판단과 내면의 자유. “우주는 변화이고, 삶은 생각이다.”(4.3) 마르쿠스는 사물은 영혼에 닿지 못하며, 동요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서 온다고 거듭 되뇝니다. 우리는 아도가 ‘내면의 성채’라고 부른 자기 안으로 물러나 그 판단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덧없음과 ‘위에서 내려다보기’. 마르쿠스는 인간의 삶을 아득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장면을 자주 떠올리고, 사라져 버린 아우구스투스의 궁정과 잊힌 옛 황제들의 이름을 되새깁니다. “머지않아 너는 모든 것을 잊을 것이고, 머지않아 모든 것이 너를 잊을 것이다.”(7.21) 목적은 절망이 아니라 균형 잡힌 시야입니다. 명성과 재산은 덧없으니 지금 올바르게 행동하는 데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의무와 사회적 본성. 인간은 서로를 위해 태어났습니다. 마르쿠스는 아침에 일어나 ‘인간의 일’을 하라고,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무지해서 그런 것으로 대하라고, 자신을 로마의 시민일 뿐 아니라 우주의 시민으로 여기라고 스스로를 다그칩니다. “벌집에 이롭지 않은 것은 벌에게도 이롭지 않다.”(6.54)

섭리인가 원자인가. 마르쿠스는 두 가능성을 자주 견주어 봅니다. 세계가 스토아학파의 가르침대로 섭리에 따라 질서 잡혀 있든, 에피쿠로스학파의 주장대로 원자들의 무질서한 뒤섞임이든, 올바른 대응은 같다는 것입니다. 정의롭게 행동하고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의심을 드러내는지, 아니면 최악의 가정에서도 스토아 윤리가 성립함을 보여 주는 교육적 기법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죽음. 마르쿠스에게 죽음은 태어남이나 늙음처럼 자연스러운 변화의 과정이며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책의 마지막 글은 삶을 떠나는 것을 감독이 내보낼 때 무대를 떠나는 배우에 빗대며 이렇게 끝맺습니다. “너를 놓아주는 이가 너그러우니, 너도 너그럽게 떠나라.”

[3][5][8]

중급

철학자 뒤의 통치자: 기독교도, 콤모두스, 평가

고대와 현대의 저술가들은 대체로 마르쿠스를 원로원을 존중하고 사법 업무에 성실했던 공정하고 부지런한 황제로 칭송해 왔습니다. 그는 긴 시간을 재판에 쏟았고, 후대 로마법에 남은 그의 판결 가운데 상당수는 로마법의 틀 안에서 노예, 미성년자 같은 약자를 배려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그의 치세가 모두에게 너그러웠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 곳에서 기독교도가 박해를 받았는데, 교회사가 에우세비오스가 기록한 177년 루그두눔(리옹)의 순교가 특히 유명합니다. 로마에서는 165년 무렵 철학자 유스티누스가 로마 시장관 유니우스 루스티쿠스, 곧 마르쿠스의 스토아 스승에게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박해는 대개 지역적이었고 총독과 군중에 좌우되었으며, 마르쿠스 자신의 책임이 어디까지인지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습니다. 『명상록』에서 기독교도를 언급한 유일한 대목(11.3)은 후대에 덧붙인 것으로 보는 학자가 많습니다.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념주 부조가 보여 주듯, 도나우 전쟁은 참혹했습니다. 불타는 마을, 처형되는 포로, 끌려가는 여성과 아이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기념주에는 목마름에 죽어 가던 포위된 로마군이 갑작스러운 폭풍우로 살아났다는 유명한 ‘비의 기적’도 새겨져 있습니다. 이교도 저술가들은 이를 이집트 마술이나 신들 덕분으로, 기독교 저술가들은 기독교도 병사들의 기도 덕분으로 돌렸습니다.

아들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삼은 일은 고대부터 비판을 받았습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황제들은 유능한 성인을 양자로 삼아 왔는데, 180~192년 재위한 콤모두스는 변덕스럽고 잔인한 통치로 이름이 났습니다. 마르쿠스를 옹호하는 이들은 살아 있는 아들을 제쳤다면 내전의 위험이 컸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콤모두스 치세를 직접 겪은 원로원 의원 카시우스 디오는 마르쿠스의 죽음과 함께 역사가 “황금의 왕국에서 쇠와 녹의 왕국으로” 떨어졌다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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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책의 전승과 후대의 영향

『명상록』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수수께끼에 가깝습니다. 4세기 웅변가 테미스티오스의 글에 이 책을 암시하는 듯한 대목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첫 언급은 비잔티움 학자이자 뒷날 카이사레아의 주교가 된 아레타스가 900년 무렵 남긴 것으로, 그는 낡고 해진 사본을 갖고 있어 새로 베끼게 했다고 적었습니다. 10세기 비잔티움 백과사전 『수다』에도 이 책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서유럽에서는 르네상스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첫 인쇄본은 1558~1559년 취리히에서 빌헬름 크실란더가 펴냈는데, 저본이 된 하이델베르크 사본은 그 뒤 사라졌습니다. 이 사라진 사본을 빼면 완전한 사본은 바티칸 도서관의 ‘바티카누스 그라이쿠스 1950’ 하나뿐이고, 나머지 사본들은 발췌본입니다.

인쇄된 뒤 이 책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부터 계몽주의 사상가까지 유럽 곳곳에서 애독자를 얻었습니다. 메릭 카소본의 영어 번역(1634) 이후 수많은 번역이 뒤따랐습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마르쿠스를 흠모했고, 에드워드 기번은 네르바부터 마르쿠스까지의 시대를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기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마르쿠스는 플라톤의 이상을 이룬 듯 보이는 드문 통치자, 곧 ‘철인 군주’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마르쿠스의 모습은 미술 속에도 남아 있습니다. 금박 청동 기마상은 중세에 기독교도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상으로 여겨진 덕분에 녹여지지 않았고,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로마 캄피돌리오 광장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지금 원본은 카피톨리니 박물관 안에 있고 광장에는 복제품이 서 있습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명상록』은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어 정치 지도자, 군인, 운동선수, 심리학자, 그리고 실용적인 지침을 찾는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으며, 이는 스토아 사상의 현대적 부흥과 맞물려 있습니다.

[5][3][1]

심화

학계의 논쟁: 어떤 글이며, 어떤 스토아주의자였나

장르와 목적. 『명상록』은 일기인가, 철학 비망록인가, 영적 수련의 모음인가, 아니면 출판을 위한 미완성 초고인가? 피에르 아도의 『내면의 성채』(프랑스어판 1992, 영어판 1998)는 이 메모들이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을 다시 쓰는 수련이며, 스토아 철학의 논리학·자연학·윤리학에 대응하는 세 가지 훈련, 곧 동의(판단)의 훈련, 욕구의 훈련, 행동의 훈련을 축으로 짜여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도의 해석은 큰 영향을 끼쳤지만, 텍스트에 실제보다 많은 체계를 덧씌운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텍스트 뒤의 인간. 예전 연구는 『명상록』을 외롭고 우울한, 심지어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고백으로 읽곤 했습니다. R. B. 러더퍼드의 연구(1989)와 그 뒤의 연구들은 책의 어두운 대목이 죽음이나 명성의 덧없음에 관한 성찰 같은 문학적·철학적 관습을 따르고 있으므로 곧바로 전기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갈레노스가 처방한 아편이 마르쿠스의 세계관을 형성했다는 20세기의 주장은 대체로 근거 없는 추측으로 여겨집니다.

정통성. 마르쿠스의 스토아주의는 얼마나 정통이었을까요? 되풀이되는 ‘섭리인가 원자인가’ 딜레마, 영혼이 자기 안으로 물러나는 것에 대한 강조, 영혼의 지배적 부분(헤게모니콘)에 대한 관심은 절충주의나 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반면 최근의 스탠퍼드 철학 백과 논의를 비롯한 다른 해석은 이 대목들이 특히 에픽테토스를 거친 스토아 전통 안에 들어맞으며, 원자 가설은 진짜 의심이라기보다 수사적 장치라고 봅니다.

철학과 정책. 마르쿠스의 스토아주의는 그의 통치에 실제로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다른 성실한 황제들과 비교해 그의 정책에 특별한 점이 별로 없다고 보는 역사가도 있고, 그의 판결, 철학 교수직 설립, 반란자에 대한 절제를 근거로 드는 역사가도 있습니다. 이 물음은 고대 철학이 공적 삶을 형성했는지, 아니면 대체로 사적인 수양에 머물렀는지에 관한 더 넓은 논쟁의 일부입니다.

[8][9][3][4]

심화

마르쿠스의 생애를 알려 주는 사료와 그 신뢰성

카시우스 디오. 원로원 의원 카시우스 디오(3세기 초)의 『로마사』는 가장 중요한 서사 사료입니다. 디오는 마르쿠스를 알던 사람들을 알았지만, 이 시기를 다룬 권들은 11세기 수도사 크시필리노스가 만든 비잔티움 축약본과 발췌로만 남아 있어 세부 사항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이 황제 전기 모음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여섯 저자가 썼다고 내세우지만, 1889년 헤르만 데사우 이후 대부분의 학자는 4세기 말 한 사람이 쓴 것으로 봅니다. 특히 덜 중요한 인물들의 전기에는 지어낸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마르쿠스 전기는 좋은 원사료에 기댄 비교적 믿을 만한 편에 속하지만, 그 일화들은 다른 증거와 대조해 보아야 합니다.

편지, 비문, 기념물. 마르쿠스와 프론토의 서신은 1815년 안젤로 마이가 팔림프세스트, 곧 원래 글을 긁어내고 그 위에 다시 쓴 사본에서 되찾아 냈으며, 단편적이지만 그의 젊은 시절을 친밀하게 보여 줍니다. 주화, 비문, 법률 문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념주의 부조는 그의 정책, 칭호, 전쟁에 관한 증거를 제공합니다. 갈레노스의 의학 저술은 궁정과 역병의 모습을 엿보게 해 줍니다.

『명상록』 자체. 귀중한 개인 사료이지만 까다로운 사료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마르쿠스가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를 말해 줄 뿐,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그대로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역사가는 그 내면 세계를, 긴 전쟁을 벌이고 박해를 묵인하고 아들을 후계자로 고른 통치자의 외적 기록과 함께 저울질해야 합니다.

[7][1][10]

핵심 개념

유일한 선으로서의 덕
지혜, 정의, 용기, 절제만이 참된 선이며 부·명성·건강은 ‘선악과 무관한 것’이다.
우리에게 달린 것과 달리지 않은 것
에픽테토스에게서 온 구분. 판단·욕구·행동은 우리 힘 안에 있고, 바깥 사건은 그렇지 않다.
내면의 성채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마음이 자기 안으로 물러나 판단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뜻으로 아도가 쓴 표현.
위에서 내려다보기
인간사를 우주적 높이에서 상상해 그 작음과 덧없음을 보는 수련.
세계시민주의
이성을 지닌 모든 존재는 하나의 세계에 사는 동료 시민이며, 의무는 도시나 제국을 넘어선다.
섭리인가 원자인가
세계가 이성으로 질서 잡혔든 우연의 산물이든, 올바른 대응은 정의롭게 행동하고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천으로서의 철학
원리를 날마다 쓰고 다시 읽는 영적 수련. 이론에만 머물지 않는다.

기록

  1. 121년 — 4월 26일 로마에서 출생.
  2. 138년 — 하드리아누스가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양자로 삼고, 안토니누스는 마르쿠스와 루키우스 베루스를 양자로 들임. 그해 여름 하드리아누스 사망.
  3. 145년 — 소(小) 파우스티나와 결혼.
  4. 161년 — 안토니누스 피우스 사망. 마르쿠스가 즉위하고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삼음. 파르티아 전쟁 시작.
  5. 약 165년 — 안토니누스 역병이 제국 전역에 퍼지기 시작.
  6. 169년 — 루키우스 베루스 사망. 마르쿠스 단독 통치.
  7. 약 170년 — 북방 민족이 이탈리아로 침입해 아퀼레이아 포위. 마르쿠스의 도나우 원정. 이 무렵 『명상록』 집필 시작으로 추정.
  8. 175년 — 동방에서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 파우스티나 사망.
  9. 176년 — 아테네를 방문해 철학 교수직을 설립.
  10. 177년 — 콤모두스가 공동 황제가 됨. 리옹에서 기독교도 박해.
  11. 180년 — 3월 17일 원정 중 사망. 콤모두스가 뒤를 잇고 강화를 맺음.
  12. 1558년 — 빌헬름 크실란더가 『명상록』 첫 인쇄본 간행(1558~1559).

용어 풀이

스토아 철학
기원전 300년 무렵 키티온의 제논이 세운 그리스 철학 학파. 덕만이 유일한 선이라고 가르쳤다.
로고스
스토아 철학에서 우주에 질서를 주는 신적 이성. 인간의 마음도 이를 나누어 가진다.
아디아포라(선악무관한 것)
건강이나 부처럼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닌 것. 다만 어떤 것은 본성상 더 바람직하다.
헤게모니콘
영혼의 ‘지배적 부분’. 판단과 선택의 중심.
공동 황제
황제의 칭호와 권력을 나누어 가진 둘 이상의 통치자 가운데 한 사람.
양자 입양
법적으로 다른 사람을 아들로 삼는 로마의 관행. 황제들이 후계자를 고르는 방법이었다.
안토니누스 역병
165년 무렵부터 로마 제국에 퍼진 전염병. 천연두였을 가능성이 있다.
마르코만니 전쟁
약 166~180년 도나우 국경에서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이아지게스족 등과 벌인 전쟁.
초판본(에디티오 프린켑스)
고대 문헌을 처음으로 인쇄한 판본.
팔림프세스트
원래 글을 긁어내고 그 위에 다시 쓴 사본. 아래의 옛 글을 되살릴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묻고 답하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좋은 황제였나요?

고대와 현대의 저술가 대부분은 그렇게 봐요. 부지런하고 공정했으며 법을 존중했지요. 하지만 그의 치세에는 참혹한 전쟁, 일부 지역의 기독교도 박해, 그리고 나라를 잘못 다스린 아들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고른 일도 있었어요.

로마 황제가 왜 그리스어로 글을 썼나요?

그리스어는 로마 세계에서 철학의 언어였고, 교육받은 로마인은 어릴 때부터 배웠어요. 마르쿠스가 읽은 에픽테토스 같은 스토아 철학자들도 그리스어로 가르치거나 글을 썼어요.

마르쿠스는 사람들이 『명상록』을 읽기를 바랐나요?

거의 확실히 아닙니다. 스스로를 일깨우고 수련하려고 자기에게 쓴 메모입니다. 그래서 되풀이가 많고 때로는 뜻이 모호합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사실인가요?

별로 그렇지 않아요. 마르쿠스가 원정 중에 죽고 콤모두스가 뒤를 이은 건 맞지만, 콤모두스가 아버지를 죽였다거나 마르쿠스가 공화정을 되살리려 했다는 증거는 없어요.

마르쿠스는 정확히 어디서 죽었나요?

고대 사료마다 다릅니다. 빈도보나(오늘날의 빈)라는 기록도, 시르미움(오늘날 세르비아)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둘 다 도나우 원정의 기지였습니다.

철학자로서 마르쿠스는 얼마나 독창적이었나요?

새로운 학설을 만들지는 않았고 에픽테토스에게 크게 기댔습니다. 그의 독창성은 스토아 사상을 자기 삶에 개인적이고 생생하게 적용한 방식에 있으며, 그래서 학자들은 그를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을 보여 주는 증인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명상록』은 어떻게 전해졌나요?

몇 안 되는 비잔티움 사본을 통해서였을 것입니다. 900년 무렵 학자 아레타스가 낡은 사본을 갖고 있다고 적었고, 첫 인쇄본(1558~1559)은 지금은 사라진 하이델베르크 사본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Marcus Aurelius. Wikipedia(영어)
  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위키백과
  3. Rachana Kamtekar, Marcus Aureliu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4. Stoicism.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5. Meditations. Wikipedia(영어)
  6. Marcomannic Wars. Wikipedia(영어)
  7. Historia Augusta. Wikipedia(영어)
  8. Pierre Hadot (Michael Chase 영역), The Inner Citadel: The Meditations of Marcus Aureliu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8
  9. R. B. Rutherford, The Meditations of Marcus Aurelius: A Study. Clarendon Press (Oxford), 1989
  10. Anthony R. Birley, Marcus Aurelius: A Biography. Routledge, 2000(개정판)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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