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400여 년 전, 일본의 큰 영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또 다른 영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0년 세키가하라라는 곳에서 큰 전투에 이겼고, 나중에 일본의 무사 정권을 이끄는 쇼군이 되었어요. 그런데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는 여전히 오사카의 거대한 성에서 많은 금과 은을 가지고 살고 있었어요.
두 집안은 오랫동안 함께 지냈지만 사이가 불편했어요.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이제 도쿠가와가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바랐어요. 1614년, 절의 종에 새긴 글자를 두고 생긴 다툼이 전쟁으로 번졌어요.
겨울에 이에야스의 엄청난 군대가 성을 둘러쌌어요. 사나다 노부시게라는 무사가 성 앞에 흙으로 작은 요새를 쌓고 적을 물리쳤어요. 그 뒤 두 편은 화해했는데, 그 대가로 성을 지켜 주던 깊은 도랑인 해자가 메워졌어요.
1615년 여름에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어요. 해자가 없는 성으로는 버틸 수 없어서 히데요리의 군사들은 성 밖으로 나가 싸웠어요. 사나다는 이에야스의 본진까지 돌격했지만 결국 전사했고, 성은 불탔어요.
히데요리와 어머니는 목숨을 끊었고, 히데요시의 집안은 끝이 났어요. 그 뒤로 약 250년 동안 일본의 큰 영주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일은 없었어요.
한눈에 보기
- 날짜
- 겨울 전투: 게이초 19년 11~12월 = 양력 1614년 12월 19일(기즈가와구치에서 첫 전투)~1615년 1월 21일(강화 서약서 교환). 여름 전투: 게이초 20년 4~5월 = 양력 1615년 5월 하순~6월 4일. 주요 전투는 6월 2일과 3일,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자결은 6월 4일(양력은 일본 국립천문대 역일 데이터베이스로 변환)
- 장소
- 셋쓰국의 오사카성과 그 주변. 1615년에는 가시이(이즈미), 도묘지·야오·와카에(가와치), 그리고 성 바로 남쪽의 덴노지·오카야마 일대. 모두 지금의 오사카부
- 양측
- 도쿠가와 막부: 오고쇼(전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거의 모든 다이묘 / 도요토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어머니 요도도노, 오노 형제와 기무라 시게나리, 그리고 사나다 노부시게·고토 마타베에·조소카베 모리치카·모리 가쓰나가·아카시 가몬 등 낭인 장수들
- 병력
- 모두 추정치다. 겨울: 도쿠가와 약 20만(한 백과사전은 약 30만), 도요토미 약 10만. 여름: 도쿠가와 약 15만 5천, 도요토미 약 7만 8천
- 계기
- 방광사(호코지) 종명 사건(1614년 8월 31일 이에야스가 대불 공양을 중지시킴)과, 도요토미 가문의 가로 가타기리 가쓰모토가 오사카를 떠난 일(1614년 11월 2일). 이에야스는 같은 날 출병을 결정했다
- 결과
- 도쿠가와의 승리. 오사카성은 1615년 6월 3일 함락되어 불탔고, 6월 4일 히데요리와 요도도노가 자결했으며, 6월 19일 히데요리의 아들 구니마쓰가 처형되었다. 도요토미 종가는 끊겼다
- 그 뒤
- 다이묘에게 거성 말고는 성을 모두 허물게 한 일국일성령(1615년 8월 7일), 무가제법도(8월 30일), 연호를 겐나로 바꿈(9월 5일). 후대에 이를 '겐나엔부', 곧 겐나 때 무기를 거두었다고 불렀다
- 주요 사료
- 이에야스 측근의 기록 『슨푸키(駿府記)』와 이신 스덴의 일기, 연대기 『당대기(當代記)』, 공가의 일기와 다이묘들의 편지, 예수회 연보와 히라도의 영국·네덜란드 상관 기록, 에도 시대 군기물(후대 기록이라 신뢰도가 낮음), 조선에 전해진 소식은 『광해군일기』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쉬움
오사카 전투란 무엇인가
오사카 전투(일본어로 오사카노진)는 도쿠가와 막부가 오사카성에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공격한 두 차례의 전쟁, 곧 게이초 19년의 겨울 전투와 게이초 20년의 여름 전투를 함께 이르는 이름이다. 이 글의 날짜는 당시 일본의 음력을 일본 국립천문대 역일 데이터베이스로 바꾼 양력이다. 그렇게 보면 '겨울' 전투는 1614년 12월부터 1615년 1월까지 이어졌고, 여름 전투는 1615년 5~6월에 벌어졌다. 일본이나 조선 기록의 음력 날짜를 그대로 옮길 때는 그렇다고 밝혀 둔다.
겨울에는 성이 버텼다. 1615년 1월 3일 사나다 노부시게가 흙으로 쌓은 출성 사나다마루가 큰 공격을 물리쳤고, 포격 끝에 양측은 강화를 맺었다. 그 조건으로 성은 바깥 방어 시설과 해자를 잃었다. 다시 전쟁이 벌어지자 도요토미군은 성 밖 들판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1615년 6월 2일 도묘지와 야오·와카에에서 패했고, 6월 3일 성 남쪽 덴노지와 오카야마에서 사나다의 돌격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까지 이르렀지만 그는 결국 전사했다. 성은 그날 불탔고, 6월 4일 히데요리와 어머니 요도도노가 자결했다.
이 전쟁으로 도요토미 가문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에서 이긴 지 15년 만에 무너졌다. 흔히 1467년 오닌의 난으로 시작된 오랜 내전이 이것으로 끝났다고 본다. 아래에서는 1600년부터의 흐름을 따라가고, 쟁점과 조선이 이 전쟁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살펴본 뒤, 세키가하라에서 살아남은 도요토미 가문이 왜 15년 만에 무너졌는지 묻는다.
쉬움
도요토미 가문은 왜 세키가하라 뒤에도 살아남았나
1600년 10월 21일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와 도요토미의 전쟁이 아니었다. 두 군대는 모두 히데요리를 위해 싸운다고 내세웠고, 전투가 끝난 뒤 히데요리는 이에야스를 충신으로 치하했다. 패자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그 동맹 세력이었다. 도요토미 가문 자체는 적으로 취급되지 않았고, 히데요리는 아버지가 오사카에 쌓은 거대한 성에 그대로 남았다.
그래도 전후 처리로 도요토미 가문은 크게 약해졌다. 이에야스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도요토미 직할지 약 220만 석의 대부분을 승자들에게 포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남은 것은 오사카 주변 세 지방(셋쓰·가와치·이즈미)의 약 65만 석이었고(사전마다 약 60만~70만 석으로 다르다), 큰 은광과 나가사키·사카이 같은 항구도 도쿠가와의 손에 넘어갔다.
하지만 히데요리는 그저 여러 다이묘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오사카성과 히데요시가 남긴 금은이 있었다. 공가들은 해마다 새해에 오사카로 내려와 그에게 인사했고, 그는 관위도 계속 올라 1605년에는 우대신이 되었으며, 그의 가신들은 문서에서 쇼군의 직속 가신과 같은 격으로 기록되었다. 역사학자 가사야 가즈히코는 이 시기를 정당한 권력의 중심이 둘이었던 '이중공의(二重公儀)' 체제로 보았다. 이 견해를 부정하거나 의심하는 학자도 많지만, 도요토미 가문이 새 도쿠가와 질서에 쉽게 들어맞지 않는 특별한 지위를 지녔던 것은 분명하다.
쉬움
에도의 쇼군과 오사카의 주군, 1603~1614년
1603년 3월 24일 이에야스는 쇼군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그의 손녀이자 히데타다의 딸인 센히메가 히데요시가 생전에 정해 둔 대로 히데요리에게 시집갔다. 센히메의 어머니는 요도도노의 동생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사촌이었다. 1605년 6월 2일 쇼군 자리는 히데타다에게 넘어갔다. 천하의 정권은 도요토미에게 돌아가지 않고 도쿠가와 가문이 대대로 잇는다는 분명한 신호였다. 이에야스가 히데요리에게 교토로 올라와 새 쇼군을 축하하라고 요구하자 요도도노는 이를 거절했다.
두 사람은 1611년 5월 10일(게이초 16년 3월 28일) 교토의 니조성에서 마침내 만났다. 히데요리는 만 열일곱 살이었고, 1599년 이후 처음으로 오사카성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가토 기요마사와 아사노 요시나가처럼 히데요시 덕분에 출세한 다이묘들이 회견을 주선하고 자리에 함께했다. 일본어 위키백과가 정리한 기록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대등한 예로 먼저 오르라고 권했지만 히데요리는 사양하고 이에야스를 먼저 오르게 했다. 이 만남이 히데요리의 신종(臣從)을 뜻하는지, 대등한 지위를 지킨 것인지는 지금도 견해가 갈린다.
회견 직후 이에야스는 교토에 있던 다이묘 22명에게, 1612년에는 다시 65명에게 막부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서약서를 받았다. 히데요리에게서는 받지 않았다. 같은 시기 도요토미와 가까웠던 원로 다이묘들이 잇달아 죽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영지로 돌아가는 배에서 병을 얻어 1611년 8월 2일 세상을 떠났고, 이케다 데루마사·아사노 요시나가·마에다 도시나가도 1613~1614년에 죽었다. 이에야스가 이들을 독살했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연극과 소설에서 나왔다. 동시대 연대기 『당대기』는 기요마사와 아사노의 죽음을 병 때문이라고 적었다.
쉬움
종에 새긴 여덟 글자, 1614년
히데요리는 절과 신사에 많은 돈을 썼다. 가장 큰 사업은 히데요시가 세운 교토 대불, 곧 뒤에 방광사(호코지)로 불린 절의 대불을 다시 짓는 일이었다. 일본대백과(닛포니카) 등에 실린 통설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의 재력을 소모시키려고 이런 사업을 권했다는 것이다. 반면 1610년의 기록을 근거로, 재건은 이에야스가 명하고 비용은 히데요리가 대며 공사는 도쿠가와의 목수 나카이 마사키요가 맡은 공동 사업이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1614년 8월 31일(게이초 19년 7월 26일), 공양을 앞두고 이에야스는 대불전 큰 종에 새긴 글이 불쾌하다며 공양을 미루라고 명령했다. 이어 막부가 의견을 물은 학자들은 두 구절을 문제 삼았다. 「국가안강(國家安康, 나라가 편안하고 강녕하기를)」은 이에야스의 이름 가강(家康) 두 글자 사이에 안(安) 자를 넣어 이름을 갈라놓았고, 「군신풍락(君臣豐樂, 임금과 신하가 풍요롭고 즐겁기를)」은 '풍신(豐臣), 곧 도요토미를 임금으로 삼아 즐긴다'로 읽힌다는 것이었다. 두 구절은 이에야스를 저주하고 도요토미의 통치를 바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글을 지은 사람은 남선사(난젠지)의 승려 분에이 세이칸으로, 1592년 가토 기요마사의 서기로 조선에 건너갔던 인물이다. 그는 축하하는 뜻으로 이에야스의 이름을 일부러 넣었다고 해명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이에야스가 지어낸 트집으로 이야기되었고, 지금도 많은 사전이 '억지 트집'이라고 쓴다. 그러나 윗사람의 이름 글자를 허락 없이 쓰는 것은 당시 실제로 무례로 여겨질 수 있었다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막부가 의견을 물은 선종 승려들은 대체로 이름을 함부로 쓴 것은 잘못이라고 했지만 저주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야스의 측근 승려 이신 스덴의 편지에는 종의 글을 갈아 지우면 된다는 이에야스의 속뜻이 전한다. 이 사건이 만들어 낸 구실이었는지, 실제 결례가 커진 것인지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쉬움
쫓겨난 가로, 모여든 낭인
도요토미 가문은 가로 가타기리 가쓰모토를 슨푸의 이에야스에게 보내 해명하게 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이에야스를 납득시킬 세 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히데요리가 에도에 살거나, 요도도노가 인질로 에도에 가거나, 히데요리가 오사카를 내주고 다른 지방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성 안에서는 그가 이에야스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았고, 그를 죽이려는 계획까지 알려졌다. 1614년 11월 2일 가타기리는 부하들을 이끌고 오사카를 떠났다. 같은 날 교토쇼시다이 이타쿠라 가쓰시게에게서 이 계획을 보고받은 이에야스는 출병을 결정했다. 측근 혼다 마사즈미의 편지에는 이 소식에 이에야스가 젊어진 듯했다고 적혀 있다.
도요토미 가문은 옛 은혜를 입은 다이묘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한 명도 오지 않았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오사카 창고의 쌀을 가져가는 것을 묵인했을 뿐이고, 시마즈 가문은 도요토미에 대한 봉공은 이미 끝났다고 답했다. 대신 도요토미 가문은 히데요시가 남긴 금은으로 낭인, 곧 주군을 잃은 무사들을 모았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세키가하라 뒤 주군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낭인을 합친 병력은 약 10만으로 추정된다. 도쿠가와 쪽은 히데요시의 옛 장수들을 경계해, 후쿠시마와 구로다 나가마사 등을 겨울 전투 동안 에도에 남겨 두었다.
낭인 장수 가운데에는 이른바 '다섯 장수', 곧 사나다 노부시게·고토 마타베에·조소카베 모리치카·모리 가쓰나가·아카시 가몬이 있었다. 이들 중 여럿이 조선에서 싸운 적이 있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고토는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귀갑차로 성벽을 공격하고 먼저 입성하는 공을 다투었다. 모리 가쓰나가는 1598년 초 울산왜성 구원전에서 공을 세웠다고 전하며, 조소카베는 아버지 모토치카와 함께 조선에 출병했다. 사나다 노부시게는 조선에 건너가지 않았다. 그는 세키가하라 때 아버지와 함께 우에다성에서 히데타다의 군대를 붙잡아 둔 뒤로 구도야마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쉬움
겨울 전투와 사나다마루
이에야스는 1614년 11월 12일 슨푸를, 히데타다는 11월 24일 에도를 떠났다. 도쿠가와군은 흔히 약 20만으로 추정된다(닛포니카는 약 30만이라고 쓴다). 전투는 12월 19일 성 서쪽 기즈강 어귀의 도요토미 측 요새에서 시작되었고, 12월 30일까지 수비군은 바깥 요새들을 버리고 성 안으로 물러났다.
오사카성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우에마치 대지의 북쪽 끝에 서 있었다. 북쪽의 요도가와를 비롯한 강과 낮은 땅이 세 방향을 막아 주었고, 땅이 그대로 이어지는 남쪽만 마른 해자로 지켰다. 방어선은 여러 겹이었다. 본성인 혼마루, 그것을 둘러싼 안쪽 성곽, 그리고 성 아랫마을의 상당 부분까지 감싼 바깥 성벽과 해자인 소가마에가 있었다.
사나다 노부시게는 남쪽 방어선 앞에 흙으로 쌓은 출성, 사나다마루를 지었다. 흔히 바깥 해자에 붙은 반원형 성채로 그려지지만, 옛 그림지도를 연구해 다른 모양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나왔고, 옛 지형을 복원한 결과 그 뒤에 폭 약 200미터의 골짜기가 있어 더 독립적인 요새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위치는 지금의 메이세이 학원 부근으로 추정된다.
1615년 1월 3일(게이초 19년 12월 4일), 사나다 쪽의 도발에 넘어간 마에다 도시쓰네(당시 이름은 도시미쓰)의 군대가 제대로 된 엄폐물 없이 사나다마루로 몰려들었다. 수비군은 적이 성벽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총을 쏘았다. 성 안에서 화약이 잘못 터진 소리를 내통 신호로 착각한 군대가 더 몰려들었다가 큰 피해를 입었고, 이에야스는 퇴각을 명했다. 이 전투로 노부시게의 이름이 처음 널리 알려졌다. 히데타다가 총공격을 제안하자 이에야스는 싸우지 않고 이길 방법을 생각하라며 거절했다.
중급
대포, 강화, 그리고 해자 메우기
이에야스는 대포와 압박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월 15일부터 전군이 일제히 포격했고, 성 북쪽 비젠지마에서만 대포 약 100문이 혼마루의 거처 쪽으로 포탄을 쏘았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 대포 가운데에는 그해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사들인 것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달 전 오사카를 떠난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이제 도쿠가와 쪽 포수들을 이끌고 비젠지마에서 요도도노의 거처 쪽을 포격했다. 19세기에 편찬된 막부의 공식 역사서 『도쿠가와 실기』는 포탄에 요도도노 거처 일부가 무너져 시녀 7~8명이 죽었고, 그 뒤 요도도노가 강화 쪽으로 기울었다고 적는다.
교섭은 1월 17일 시작되었다. 도쿠가와 쪽에서는 혼다 마사즈미와 이에야스의 측실 아차노쓰보네가, 도요토미 쪽에서는 요도도노의 동생 조코인이 나섰다. 1월 18일 조건이 합의되었고 1월 21일 서약서가 교환되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정리에 따르면 도요토미 쪽은 혼마루만 남기고 니노마루·산노마루를 허물며 바깥 성곽의 해자를 메우고, 요도도노를 에도에 보내는 대신 다른 인질을 내기로 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의 안전과 영지를 보장하고 성 안 무사들의 죄를 묻지 않기로 약속했다.
누가 어느 해자를 메우기로 했는지부터 쟁점이다. 일본어 위키백과가 전하는 분담은 니노마루는 도요토미, 산노마루와 바깥 해자는 도쿠가와였다. 도쿠가와의 공사 책임자들은 포위군과 주민을 동원해 바깥 해자를 서둘러 메운 뒤, 음력 새해 1월(양력 1615년 1월 말)부터는 니노마루까지 메웠고 이를 위해 주변 집들까지 허물었다. 공사는 1615년 2월 20일(게이초 20년 1월 23일)에 끝났고 성문과 망루도 헐렸다. 사나다마루도 이때 사라졌다. 이에야스의 측근 승려 스덴은 해자가 메워진 오사카성이 혼마루만 남아 볼품없게 되었다고 적었다.
유명한 이야기는 바깥 해자만 메우기로 했는데 도쿠가와가 '소(惣, 바깥)'를 '전부'로 억지 해석해 안쪽 해자까지 메웠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일본 사전이 이렇게 쓰고, 영어 위키백과의 서술에도 도요토미 쪽의 항의가 나온다. 그러나 이 항의는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나 1686년의 『무덕대성기(武德大成記)』 같은 후대 저작에만 나온다. 역사학자 고자 유이치는 호소카와 다다토시·모리 데루모토 등 도쿠가와 편 다이묘들의 편지가 니노마루·산노마루 철거를 강화 조건으로 적고 있고, 한 달에 걸친 공사 동안 도요토미 쪽이 항의했다는 동시대 기록이 없다고 지적한다. 한편 일본어 위키백과는 니노마루는 허물지 않아도 되었다는 사료도 있다고 덧붙인다. 철거는 대체로 합의 범위 안이었고, 그 속도와 철저함은 도쿠가와가 만든 것이라는 해석이 가장 그럴듯하다. 양측의 정확한 의무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중급
여름 전투: 도묘지, 야오와 와카에
강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많은 낭인이 오사카에 남았고, 1615년 4월 이타쿠라 가쓰시게는 낭인들의 난동, 해자와 담의 복구, 교토에 불을 지르려 한다는 소문을 막부에 보고했다. 막부는 도요토미 쪽에 새로 모은 낭인을 모두 내보내거나 야마토나 이세로 옮기라고 요구했다.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프레데릭 클레인스가 소개한 네덜란드 상인 와우테르센의 1615년 봄 편지도, 히데요리가 받아들인 무사들을 내보내지 않으려 해서 이에야스가 다시 온다고 적었다. 교섭을 맡던 오노 하루나가는 성 안에서 습격을 당했고, 도요토미 쪽은 낭인들에게 금은을 나누어 주며 메워진 해자 일부를 다시 팠다.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는 5월 18일까지 교토에 들어왔다. 약 15만 5천의 도쿠가와군은 가와치 평야를 지나는 길과 야마토를 거쳐 산을 넘는 길, 두 갈래로 오사카로 향했다. 이탈자가 생겨 도요토미군은 약 7만 8천으로 줄었다. 해자를 잃은 성으로는 버틸 수 없었으므로 도요토미 쪽은 들판에서 싸우며 적 총대장을 칠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5월 26일 이즈미의 가시이에서는 반 나오유키 등이 패해 전사했다.
결정적인 전투는 6월 2일(게이초 20년 5월 6일) 시작되었다. 산을 넘어 나오는 야마토 길의 도쿠가와군을 치기 위해, 고토 마타베에는 약 2천8백 명을 이끌고 밤새 행군해 동트기 전 성에서 남동쪽으로 15킬로미터쯤 떨어진 도묘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른 부대들은 오지 않았고, 짙은 안개 때문에 늦었다고 전한다. 적은 이미 진을 치고 있었다. 고토는 고마쓰야마라는 언덕에서 다테 마사무네 등이 이끄는 2만이 넘는 군대를 상대로 오전 내내 버티다 총에 맞았다. 최후의 모습은 기록마다 다르다. 사나다와 모리 가쓰나가는 뒤늦게 도착했고, 사나다는 다테군의 선봉을 밀어냈지만 다른 전선의 패배 소식을 듣고 도요토미군이 물러날 때 맨 뒤에서 적을 막았다.
같은 날, 성에서 남동쪽으로 8킬로미터쯤 떨어진 야오와 와카에에서 기무라 시게나리와 조소카베 모리치카가 가와치 길로 오는 도쿠가와 본대를 막으려 했다. 야오에서 조소카베는 기마무사까지 모두 말에서 내리게 해 강둑 위에 엎드리게 한 뒤, 도도 다카토라의 군대가 가까이 오자 일제히 일어나 창으로 찔렀다. 1597년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무너뜨린 장수 가운데 한 사람인 도도는 6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와카에에서 기무라는 이이 나오타카의 군대와 싸우다 전사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투구에 향을 피워 두었다고 전한다. 기무라가 죽자 조소카베도 물러났고 그의 부대는 사실상 무너졌다.
중급
덴노지와 오카야마: 사나다의 돌격
1615년 6월 3일(게이초 20년 5월 7일) 도요토미군은 성 남쪽에 마지막 진을 쳤다. 사나다 노부시게는 겨울 전투 때 이에야스의 본진이던 차우스야마에, 모리 가쓰나가는 시텐노지(사천왕사) 앞에 섰고, 오노 하루후사는 동쪽의 오카야마 길을 맡았다. 이에야스는 덴노지 쪽으로, 히데타다는 오카야마 쪽으로 다가왔다. 이날 오노 하루후사에게 내린 군령장이 남아 있는데, 먼저 싸움을 거는 것을 금하고 이 싸움이 천하를 가르는 싸움이라고 적었다.
한낮 무렵(기록에 따라 오전 10시쯤에서 오후 1시쯤까지 다르다) 모리 쪽 병사들이 도쿠가와 선봉 혼다 다다토모의 부대에 총을 쏘면서, 계획과 달리 전투가 시작되었다. 모리군은 혼다 다다토모를 쓰러뜨렸고, 도쿠가와의 1진·2진·3진이 잇달아 무너져 이에야스 본진 앞이 비었다. 노부시게는 마쓰다이라 다다나오의 대군을 뚫고 이에야스의 본진으로 돌격했다. 두 번, 세 번 또는 그 이상 돌격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횟수는 알 수 없다.
가장 유명한 증언은 편지와 보고다. 시마즈 쪽 문서는 이에야스의 무사 가운데 3리(약 12킬로미터)쯤이나 달아난 자들은 모두 살아남았고, 사나다는 세 번째 공격에서 전사했으며, 그가 옛이야기에도 없는 '일본 제일의 무사'였다고 적었다. 예수회 연보에는 이에야스가 낙담해 배를 가르려 했다는 소문이 실렸다. 막부는 뒤에 이날의 행동을 이유로 이에야스 본진의 깃발 담당 관리 등 여러 사람을 처벌했다.
그러나 도요토미군은 수가 너무 적었다. 오카야마 쪽에서는 오노 하루후사의 부대가 히데타다의 본진을 혼란에 빠뜨렸지만, 수가 많은 도쿠가와군은 다시 태세를 갖추었고, 오후 3시쯤 도요토미군의 진형이 무너졌다. 노부시게는 그날 오후 전사했다. 동아시아식 나이로 49세였다. 통설은 그가 야스이 신사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의 기록은 니시오 무네쓰구가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이쿠타마와 쇼만 사이의 고지대에서 그를 죽였다고 적는다. 그날의 교토 공가 일기는 짧게 적었다. '오사카 낙성. 덴노지에서 사나다가 여러 번 용맹을 떨친 뒤 전사했다.'
중급
오사카성 함락
마쓰다이라 다다나오가 이끄는 에치젠군이 가장 먼저 성 안에 들어갔고, 다른 도쿠가와군이 뒤따라 밀려들었다. 불이 나 니노마루와 혼마루가 탔다. 교토쇼시다이 이타쿠라 가쓰시게는 6월 3일 정오에 성이 함락되었고, 이튿날 아침까지 교토에서도 불길이 보였으며, 1만~2만 명의 패잔병과 피란민이 교토로 몰려들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날 늦은 오후 오노 하루나가는 센히메를 성 밖으로 내보내며, 자신이 대신 죽을 테니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를 살려 달라고 청했다. 1712년에 한 시녀의 기억을 바탕으로 기록된 이야기에 따르면, 시녀들은 센히메를 이불로 감싸 화살을 막으며 빠져나와 도쿠가와 진영으로 데려갔다. 이에야스는 판단을 히데타다에게 맡겼다. 모리 히데모토의 편지에 따르면 히데타다는 두 번은 없다며 서둘러 할복하게 하라고 답했다.
히데요리와 어머니는 성 안 야마자토마루의 창고에 피해 있었다. 6월 4일(게이초 20년 5월 8일) 정오 무렵 이이 나오타카의 군대가 창고를 둘러싸고 총을 쏘아 신호했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 그리고 오노 하루나가·모리 가쓰나가·사나다의 아들 다이스케 등 함께 있던 30여 명이 자결했고, 창고는 불탔다. 히데요리는 만 스물한 살(동아시아식 나이로 23세)이었다. 히데요리가 사쓰마로 달아났다는 소문이 곧 퍼졌지만 전설로 남았다.
도쿠가와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추적했다. 조소카베 모리치카는 6월 11일 교토에서 참수되었다. 히데요리의 아들 구니마쓰는 세는나이로 여덟 살이었는데, 6월 19일 로쿠조가와라에서 참수되었다. 예수회 연보는 그가 이에야스가 아버지와의 신성한 맹세를 깼다고 꾸짖으며 죽었다고 전한다. 히데요리의 딸은 비구니가 된다는 조건으로 살아남았다.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옛 주군보다 20일 늦은 6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구로다 나가마사가 그리게 한 『오사카 여름 전투 병풍』에는 도쿠가와 편 병사들이 오사카 사람들을 약탈하고 죽이고 끌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중급
오사카 이후: 일국일성령과 무가제법도
막부는 재빨리 움직였다. 1615년 8월 7일(게이초 20년 윤6월 13일) 히데타다는 이에야스가 세운 방안에 따라 다이묘들에게 영지 안에서 거성(居城)만 남기고 나머지 성을 모두 허물라고 명령했다. 실제 시행에는 예외도 있었다. 며칠 사이에 약 400개의 성이 헐렸다고 한다. 8월 30일(7월 7일)에는 다이묘들을 후시미성에 모아 13개조의 무가제법도를 읽어 주었다. 성을 고칠 때 신고하게 하고, 허락 없이 다이묘 가문끼리 혼인하는 것을 금하는 내용이었다.
1615년 9월 5일 연호가 게이초에서 겐나로 바뀌었다. 후대 사람들은 이때를 '겐나엔부(元和偃武)', 곧 겐나 때 무기를 거두었다고 불렀다. 이 말이 언제 처음 쓰였는지는 알 수 없고, 도쿠가와의 태평을 칭송하던 후대 유학자들이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오닌의 난 이후 150년 가까이 이어진 대규모 내전이 끝났다.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시던 신사는 폐지되었고, 오사카는 이에야스의 외손자 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에게 주어졌다가 1619년 막부 직할지가 되었으며, 이에야스는 1616년 6월 1일 슨푸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급
조선이 보고 들은 오사카
한국 독자에게 이 전쟁에는 임진왜란의 이름들이 다시 등장한다. 1597~1598년 겨울 울산성에서 농성했던 가토 기요마사와 아사노 요시나가는 니조성 회견을 주선했고, 종명을 지은 세이칸은 조선에서 기요마사의 서기였다. 고토·모리 가쓰나가·조소카베는 히데요리 편에서, 도도 다카토라는 그 반대편에서 싸웠다. 오사카성은 조선 사람의 눈에도 담겼다. 1607년 음력 4월 8일, 도쿠가와 막부에 간 첫 조선 사절단의 부사 경섬은 이 성을 보고, 성곽이 겹겹이 싸이고 누각이 층층이 올라갔으며 푸른 기와와 흰 성가퀴가 구름 낀 나무 사이로 은은히 비친다고 적었다. 8년 뒤 이 성은 불탔다.
조선 조정은 쓰시마를 통해 전쟁 소식을 들었다. 1615년 음력 윤8월 12일(양력 10월 초)의 기록에 따르면, 경상 감사는 동래 부사의 보고를 올렸다. 쓰시마 사람 귤지만(橘知滿)이 말하기를, 그해 초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평의지)가 죽었지만 일본에 큰 전쟁이 있어 알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전한 전쟁 이야기는 사실과 많이 달랐다. 히데요시와 히데요리의 총애를 받던 가타기리가 이에야스에게 매수되어 잔치 자리에서 히데요리를 독살하려다 발각되어 쫓겨났고, 5월에 이에야스가 아들 히데타다에게 대군을 주어 히데요리의 성을 쳐서 죽였으며, '지금 히데요리 편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더 엉뚱한 이야기는 1597년 일본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양산 사람 신경란이 전했다. 1617년 음력 5월 30일(양력 7월 초) 기록에 실린, 조선이 명에 보낸 자문에 인용된 그의 진술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첫 싸움에서 지고 체면을 세우려고 히데요리에게 성 일부를 허물게 한 뒤, 히데요리가 성을 다시 쌓는다고 트집을 잡아 다시 쳐들어갔고, 성 안의 첩자가 화약고에 불을 질렀다. 같은 자문은 일본 사신들이 이 전쟁을 히데요리의 반역을 친 것이라고 말했고, 오사카를 병탄한 도쿠가와가 스스로 조선의 원수를 죽였다고 내세운다고 적었다. 그보다 앞서 1616년에는 명나라 유격 구씨(丘遊擊)가 조선에, 적국에 변란이 있는 것은 다행이지만 이에야스는 꾀로 강자를 제압하는 데 능하니 방비를 더 엄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이 전쟁은 다음 사행으로도 이어졌다. 쓰시마 사신들은 이에야스가 나라 안의 분란을 평정했고 히데타다가 조선 사신을 원한다고 전했다. 1617년 조선은 오윤겸을 정사로 하는 두 번째 회답겸쇄환사를 보냈다. 명목은 오사카 평정을 축하하는 것이었지만, 더 큰 목적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오윤겸은 후시미성에서 히데타다를 만났고, 사절단은 23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중급
유키무라, 요도도노, 그리고 종: 오사카의 기억
사나다 노부시게는 이 전쟁의 영웅이 되었다. 『사나다 삼대기』 같은 에도 시대 군기물과 메이지·다이쇼 시대의 강담 책들은 그를 열 명의 전설적 용사를 거느린 '사나다 유키무라'로 만들었다. 유키무라라는 이름은 그가 살았던 때의 믿을 만한 사료에는 나오지 않는다. 요도도노의 이미지도 후대의 글이 만들었다. 흔히 쓰는 '요도기미'라는 호칭은 메이지 시대의 희곡을 통해 자리 잡았고, 아들의 가문을 망친 고집 센 여인이라는 모습은 대체로 도쿠가와 시대의 산물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종은 지금도 교토 방광사에 걸려 있다. 도쿠가와가 벌로 종을 땅바닥에 내려놓아 울리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틀렸다. 메이지 정부가 절 땅을 거두어들이던 1871년 종루가 헐렸고, 종은 1884년 새 종루가 세워질 때까지 땅에 놓여 있었다. 1980년 오사카성 터 발굴에서는 20대 초반의 신분 높은 남성의 두개골이 나왔는데, 히데요리의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되어 1983년 교토의 세이료지에 묻혔다. 사나다마루 터에는 2016년 기념비가 섰다. NHK 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가 방영된 해였다.
심화
세키가하라 뒤에도 살아남은 도요토미 가문은 왜 15년 만에 무너졌나
첫째, 세키가하라는 도요토미 가문의 지위를 정리하지 못했다. 1600년의 전쟁은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치러졌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도요토미의 영지 대부분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이 가문을 패배한 적으로 다룰 수는 없었다. 히데요리는 오사카성과 히데요시의 재물, 높은 관위를 지켰고, 많은 역사학자는 그가 보통 다이묘보다 위의 특별한 지위를 유지했다고 본다. 그래서 오래 함께 갈 수 없는 두 주장이 남았다. 도쿠가와는 1605년 쇼군 자리를 히데타다에게 넘겨 권력이 자기 가문에서 세습된다고 선언했고, 도요토미는 히데요리가 언젠가 천하를 다스릴 가능성을 버리지 않았다.
둘째, 시간은 도요토미의 편이 아니었다. 1614년 이에야스는 이미 일흔을 넘었고, 이 전쟁을 계획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은 그가 죽기 전에 문제를 끝내려 했다고 본다. 그사이 히데요리를 대변하거나 중재할 수 있었던 가토 기요마사·아사노 요시나가·이케다 데루마사·마에다 도시나가는 1611~1614년에 죽었고, 나머지 다이묘들은 막부에 서약서를 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히데요리 편에 선 다이묘는 한 명도 없었다.
셋째, 이에야스가 처음부터 도요토미를 없애려 했는지는 논쟁거리다. 닛포니카의 오카모토 료이치는 사찰 사업으로 재력을 소모시키고 종명을 트집 잡은 계획적인 과정으로 서술한다. 반면 헤이본샤 세계대백과의 다카기 쇼사쿠는 이에야스가 종명 사건을 이용해 히데요리에게 신종을 강요했다고 쓰고, 강화 조건을 다룬 고자 유이치와 네덜란드 편지를 연구한 프레데릭 클레인스도 이에야스의 요구가 히데요리의 지위와 거처, 낭인 해고에 관한 것이었다고 강조한다. 어느 견해를 따르든 위기의 핵심은 막부 아래에서 히데요리가 차지할 자리였고, 선택지는 시기마다 달랐다. 1614년 가타기리가 내놓은 세 가지 방안(히데요리의 에도 거주, 요도도노의 인질행, 오사카를 떠나 다른 지방으로 옮기기)은 성 안에서 거부되었고 가타기리는 쫓겨났다. 겨울 교섭에서 도요토미 쪽은 낭인들에게 줄 땅을 늘려 주는 대신 요도도노를 인질로 보내겠다고 했지만 이에야스가 거절했고, 이어진 강화는 성의 해자를 히데요리의 안전과 맞바꾸었다. 1615년의 마지막 결렬은 도요토미 쪽이 낭인을 내보내지도, 야마토나 이세로 옮기지도 않겠다고 하면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군사적인 힘의 차이가 결과를 정했다. 거대한 성에 든 낭인 군대는 사나다마루에서 보듯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지만, 구원해 줄 동맹이 없었고, 도쿠가와는 밖에서 포격하며 기다릴 수 있었다. 겨울 강화는 성의 방어 시설을 히데요리의 안전과 맞바꾼 것이었다. 도요토미가 낭인을 내보내지 않자 막부는 더는 지킬 수 없는 성으로 다시 쳐들어왔고, 도요토미군은 두 배나 되는 적과 들판에서 싸워야 했다. 정리하면, 도요토미 가문이 1600년에 살아남은 것은 형식상 패자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1615년에 무너진 것은 그사이 도쿠가와가 세습 정권을 굳히고 오사카를 고립시켰으며, 평범한 신하 가문이 되기를 거부한 도요토미가 동맹 없이 이기기 어려운 전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심화
사료와 그 한계
오사카 전투의 익숙한 이야기 가운데 상당 부분은 사건보다 훨씬 뒤에, 흔히 재미를 위해서나 특정 가문을 기리려고 쓴 에도 시대 군기물과 후대 편찬물이 다듬은 것이다. 유명한 장면 가운데 일부는 더 일찍, 사람들의 말을 옮긴 동시대 보고에서 시작되었다. 시마즈 쪽 편지는 이미 사나다의 세 번째 공격을 말하고, 예수회 보고는 이에야스가 자결을 생각했다는 소문을 전하며, 후대 군기물이 이를 부풀렸다. 해자를 둘러싼 속임수처럼 후대 저작에만 나오는 이야기도 있다. 이름마저 영향을 받았다. '유키무라'는 믿을 만한 동시대 사료에 나오지 않고, 고토는 자기 문서에 '모토쓰구'가 아니라 '마사치카'라고 서명했다.
동시대 기록으로는 이에야스 측근의 기록 『슨푸키』, 측근 승려 스덴의 일기, 연대기 『당대기』, 공가의 일기, 양쪽 다이묘의 편지, 그리고 예수회와 히라도의 영국·네덜란드 상관 같은 바깥 관찰자의 기록이 있다. 이것들은 사건에 더 가깝지만 소문을 옮긴 경우도 많다. '일본 제일의 무사'라는 구절은 오랫동안 주로 후대 사쓰마 번의 편찬물을 통해 알려졌지만, 게이초 20년 음력 6월 11일(양력 1615년 7월 6일) 날짜의 시마즈 가문 문서에도 나온다. 시마즈 이에히사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문서는 2016년 오사카역사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숫자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겨울 약 20만 대 10만, 여름 15만 5천 대 7만 8천이라는 흔한 수치는 추정이며, 상당수는 메이지 시대 육군 참모본부의 전사에서 나왔다. 1615년의 네덜란드 편지는 도요토미군이 15만으로 불었다는 소문을 전했다. 함락 날짜도 기록마다 다르다. 대부분은 혼마루가 불탄 6월 3일로 보지만, 히데요리가 죽은 6월 4일로 적는 책도 있다. 조선의 기록은 전해 들은 것이라 혼란스럽지만, 당시 이 전쟁이 어떻게 이야기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핵심 개념
- 살아남았지만 안전하지 않았다
- 1600년의 전쟁은 히데요리를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치러졌기에 도요토미 가문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영지 대부분을 잃었고, 그 특별한 지위는 도쿠가와 질서와 점점 맞지 않게 되었다.
- 세습되는 쇼군
- 1605년 이에야스가 쇼군 자리를 아들 히데타다에게 넘기면서 권력이 도쿠가와 가문에 남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히데요리는 이를 받아들여야만 지위를 지킬 수 있었다.
- 종명 사건
- 이에야스는 이름을 갈라놓은 종의 글귀를 문제 삼았다. 만들어 낸 구실이었는지 실제 결례였는지는 지금도 논쟁이지만, 이것이 1614년 위기의 시작이었다.
- 낭인의 군대
- 다이묘가 한 명도 오지 않자 도요토미는 히데요시의 금은으로 주군 없는 무사들을 모았다. 용감했지만 서로 손발을 맞추기 어려웠다는 것은 도묘지에서 드러났다.
- 해자와 강화
- 겨울 강화로 오사카성의 해자가 메워졌다. 도쿠가와가 속임수로 안쪽 해자까지 메웠다는 이야기는 후대 저작에서 나왔고, 동시대 편지들은 대체로 합의된 일이었음을 보여 준다.
- 겐나엔부
- 오사카 뒤 연호가 겐나로 바뀌고 막부는 성의 수를 줄이고 다이묘를 묶는 법을 냈다. 후대는 이를 무기를 거둔 때라고 불렀다. 그 뒤 약 250년 동안 큰 영주들 사이의 전쟁은 없었다.
기록
- 1600년 — 10월 21일: 세키가하라 전투. 도요토미 가문은 오사카성을 지켰지만 영지는 약 65만 석으로 줄었다.
- 1603년 — 3월 24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이 된다. 센히메가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시집간다.
- 1605년 — 6월 2일: 히데타다가 쇼군이 된다. 요도도노는 히데요리가 축하하러 교토에 가는 것을 거절한다.
- 1607년 — 조선 사절단의 부사 경섬이 오사카성의 모습을 기록한다.
- 1611년 — 5월 10일: 이에야스와 히데요리가 니조성에서 만난다. 8월 2일: 가토 기요마사 사망.
- 1614년 — 8월 31일: 이에야스가 종명을 문제 삼아 대불 공양을 중지시킨다. 11월 2일: 가타기리 가쓰모토가 오사카를 떠나고, 이에야스가 출병을 결정한다.
- 1614년 — 12월 19일: 기즈가와구치에서 겨울 전투가 시작된다. 12월 30일 수비군이 성 안으로 물러난다.
- 1615년 — 1월 3일: 사나다마루 전투. 1월 15일: 총포격. 1월 18~21일: 강화 합의와 서약. 2월 20일: 해자 메우기가 끝난다.
- 1615년 — 5월 26일: 가시이 전투. 6월 2일: 도묘지 전투와 야오·와카에 전투. 고토 마타베에와 기무라 시게나리 전사.
- 1615년 — 6월 3일: 덴노지·오카야마 전투. 사나다 노부시게가 전사하고 성이 불탄다. 6월 4일: 히데요리와 요도도노 자결.
- 1615년 — 6월 11일: 조소카베 모리치카 처형. 6월 19일: 히데요리의 아들 구니마쓰 처형.
- 1615년 — 8월 7일: 일국일성령(거성 외의 성 철거). 8월 30일: 무가제법도. 9월 5일: 연호가 겐나로 바뀐다.
- 1615년 — 10월 초: 조선 조정이 쓰시마를 통해 들어온 일본의 전쟁 소식을 기록한다.
- 1616년 — 6월 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슨푸에서 사망한다.
- 1617년 — 오윤겸이 이끄는 조선 사절단이 후시미성에서 히데타다를 만나고, 23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온다.
- 1623년 — 도요토미 편에서 싸운 낭인들이 마침내 사면된다.
- 1980년 — 오사카성 터에서 히데요리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이 발굴된다.
- 2016년 — 사나다마루 터에 기념비가 서고, 발굴에서 그 흔적일 수 있는 성토가 확인된다.
용어 풀이
- 낭인(로닌)
- 주군이 없는 무사. 주군이 패하거나 영지를 잃은 경우가 많았다. 오사카의 도요토미군은 대부분 낭인이었다.
- 혼마루·니노마루·산노마루
- 일본 성의 본성과 그것을 둘러싼 두 번째, 세 번째 성곽.
- 소가마에
- 성 아랫마을까지 감싸는 가장 바깥쪽 성벽과 해자. 오사카성의 소가마에는 겨울 강화 뒤 메워졌다.
- 데마루(출성)
- 성의 주 방어선 앞에 내어 쌓은 작은 성채. 사나다마루가 그 예다.
- 오고쇼
- 실권을 쥔 은퇴한 쇼군. 1605년 이후 슨푸에 있던 이에야스의 지위.
- 다섯 장수(고닌슈)
- 오사카의 대표적 낭인 장수인 사나다 노부시게·고토 마타베에·조소카베 모리치카·모리 가쓰나가·아카시 가몬.
- 석(고쿠)
- 쌀의 양을 재는 단위(약 180리터). 땅의 생산량, 곧 영지의 크기를 나타내는 데 썼다.
- 일국일성령
- 전통적으로 '일국일성령'이라 불리는 1615년의 명령. 다이묘에게 영지 안에서 거성만 남기고 나머지 성을 허물게 했으며, 실제 시행에는 예외도 있었다.
- 무가제법도
- 다이묘를 통제하려고 1615년 처음 낸 법령.
- 겐나엔부
- '겐나 때 무기를 거두었다'는 뜻. 1615년 오사카 함락으로 내전이 끝난 것을 가리키는 후대의 말.
묻고 답하기
도요토미 가문은 왜 세키가하라 뒤에도 살아남았나?
1600년의 전쟁은 양쪽 모두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영지 대부분을 빼앗았지만 히데요리를 관위와 재물과 함께 오사카성에 남겨 두었다.
종명 사건은 그저 트집이었나?
흔히 그렇게 이야기된다. 하지만 윗사람의 이름 글자를 쓰는 것은 당시 실제 결례로 볼 수 있었고, 의견을 낸 승려들도 저주는 아니지만 잘못이라고 했다는 지적이 있다. 이에야스가 위기를 얼마나 만들어 냈는지는 논쟁 중이다.
이에야스는 속임수로 안쪽 해자까지 메웠나?
유명한 이야기는 후대 저작에서 나왔다. 다이묘들의 동시대 편지는 안쪽 성곽 철거가 강화 조건이었다고 적고, 당시 도요토미 쪽이 항의했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누가 어디를 메우기로 했는지는 아직 논의된다.
사나다 유키무라라는 이름이 맞나?
본명은 사나다 노부시게다. '유키무라'는 후대 군기물에서 나온 이름이고, 그가 살았던 때의 믿을 만한 사료에는 없다.
사나다는 정말 이에야스를 죽일 뻔했나?
그의 돌격은 이에야스의 본진을 무너뜨렸고, 편지와 예수회 보고는 그곳의 혼란과 도주를 전한다. 몇 번 돌격했는지, 얼마나 가까이 갔는지는 알 수 없다.
히데요리는 사쓰마로 달아났나?
그런 소문이 돌았고 영국 상인도 기록했지만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일반적으로 1615년 6월 4일 성 안에서 죽은 것으로 본다.
오사카성은 6월 3일 함락되었나, 4일인가?
성은 6월 3일(5월 7일) 점령되어 불탔고,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이튿날 죽었다. 함락을 이튿날로 적는 책도 있다.
조선은 이 전쟁을 알았나?
알았다. 쓰시마와 돌아온 포로를 통해 들었지만 내용은 사실과 많이 달랐다. 1617년 조선 사절단은 오사카 평정 축하를 명목으로 했지만 주된 목적은 포로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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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発掘調査で見つかった恭明宮(발굴 조사로 확인된 교메이큐), 제277회 교토시 고고자료관 문화재 강좌(방광사 터 연표 포함). 교토시 매장문화재연구소, 2016
- 고자 유이치(呉座勇一), 天下統一目前の徳川家康が「切腹を考えた」瞬間…(천하 통일을 앞둔 이에야스가 '할복을 생각한' 순간). 슈에이샤 온라인, 2023
함께 보기
- 일본의 통일 전쟁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00년 넘게 이어진 일본의 내전을 끝내고 도쿠가와 막부를 연 1560~1615년의 전쟁들.
- 도쿠가와 이에야스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기고 에도를 근거지로 도쿠가와 막부를 연 일본의 무장이다.
- 가토 기요마사어려서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오와리 출신 무장으로, 1592년 제2번대를 이끌고 함경도까지 들어갔고 뒤에 구마모토성을 쌓았다.
- 구로다 나가마사구로다 간베에의 아들로 1592년 조선 침략 때 제3번대를 이끌었고 1597년 직산에서 명군과 맞부딪쳤으며, 세키가하라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서서 후쿠오카의 첫 영주가 되었다.
- 조선통신사1607년부터 1811년까지 조선 국왕이 일본의 도쿠가와 쇼군에게 모두 12차례 보낸 수백 명 규모의 사절단으로, 임진왜란 뒤의 강화에서 비롯해 두 나라 사이의 외교와 문화 교류를 잇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