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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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지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에 죽었을 때, 아들 히데요리는 겨우 다섯 살이었어요. 히데요시는 가장 힘센 영주들에게 아이가 자랄 때까지 돌봐 달라고 부탁했어요.
하지만 영주들은 서로를 믿지 않았어요. 그중 가장 강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기가 우두머리인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지요. 히데요시의 또 다른 부하 이시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를 두려워하는 영주들을 모았어요. 일본은 두 편으로 갈라졌고, 사람들은 뒷날 이들을 동군과 서군이라고 불렀어요.
1600년 가을 안개 낀 아침, 각각 수만 명의 병사를 거느린 두 군대가 세키가하라라는 좁은 골짜기에서 맞붙었어요. 싸움은 치열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어요—서군의 젊은 장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자기 편을 공격했고, 다른 장수 몇 명도 그렇게 했어요. 서군은 하루 만에 무너졌어요.
이에야스는 일본에서 가장 힘센 사람이 되었어요. 3년 뒤 그는 쇼군이 되었고, 그의 가문은 260년 넘게 일본을 다스렸어요. 세키가하라에서 싸운 영주 가운데 많은 수는 몇 해 전 조선에서도 싸웠던 사람들이었고, 새로 들어선 도쿠가와 정권은 곧 조선과 화해하려고 했어요.
일본 사람들은 지금도 세키가하라를 ‘천하를 가른 싸움’이라고 불러요. 하지만 이에야스가 고바야카와에게 총을 쏘아 편을 바꾸게 했다는 이야기처럼 유명한 일화 가운데 몇 가지는 한참 뒤에야 기록된 것이라, 많은 역사학자가 의심하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 날짜
- 게이초 5년 9월 15일 = 양력 1600년 10월 21일. 주요 전투는 오전부터 한낮 무렵까지 벌어졌으며,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지는 논란이 있다
- 장소
- 미노국 세키가하라(일부 초기 문헌에는 아오노가하라). 나카센도가 이세만 평야와 비와호 사이의 산지를 넘는 골짜기로, 지금의 기후현 세키가하라정
- 양측
- 동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후쿠시마 마사노리·구로다 나가마사·호소카와 다다오키·이이 나오마사·도도 다카토라 등 / 서군: 명목상 총대장 모리 데루모토(오사카성에 머묾)와 이시다 미쓰나리·우키타 히데이에·오타니 요시쓰구·고니시 유키나가·시마즈 요시히로 등
- 편을 바꾼 장수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키자카 야스하루·구쓰키 모토쓰나·오가와 스케타다·아카자 나오야스가 서군을 공격했고, 깃카와 히로이에는 난구산의 모리군이 싸우지 않겠다고 이에야스와 약속해 두었다
- 병력
- 불확실하다. 일본의 사전류는 양군을 각각 약 8만 명으로 보고, 한 영어 연구서는 동군 약 8만 9천, 서군 약 8만 2천으로 잡는다. 많은 수치는 1893년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영지 규모로 추산한 값에서 나왔다. 서군의 상당 부분은 끝내 싸우지 않았다
- 피해
- 알 수 없다. 9월 20일 자 고노에 사키히사의 편지는 서군 전사자를 4,000–5,000명으로 전하고, 후대 군기물은 약 8,000명(1656) 또는 32,600명(1713)으로 적는다
- 결과
- 동군의 승리. 이시다 미쓰나리·고니시 유키나가·안코쿠지 에케이는 교토에서 처형되었다. 한 집계에 따르면 서군 영주 91가가 영지를 몰수당하고 4가가 감봉되었다. 도요토미 가문은 오사카를 지켰지만 그 밖의 영지 대부분을 잃었다. 이에야스는 1603년 쇼군이 되었다
- 주요 사료
- 전투 직후 며칠 사이에 쓰인 편지(이에야스, 그의 관리 이시카와 야스미치·히코사카 모토마사, 깃카와 히로이에, 고노에 사키히사), 1601년의 오타 규이치 기록, 에도 시대의 군기물과 가문 기록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쉬움
세키가하라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세키가하라 전투는 게이초 5년 9월 15일, 양력으로 1600년 10월 21일에(이 글에서 월·일은 따로 밝히지 않는 한 당시 일본의 태음태양력이다) 미노국 세키가하라, 지금의 기후현에서 벌어졌다. 한쪽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다른 쪽에는 이시다 미쓰나리 등 도요토미 정권의 관료들이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일으킨 서군이 섰다.
양군 모두 대군이었다. 싸움이 벌어지는 가운데 전장 남쪽 끝 마쓰오산에 진을 치고 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서군을 공격했고, 다른 서군 장수 네 명도 서군에 등을 돌렸다. 그 시점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서군의 전열은 무너졌다. 오타니 요시쓰구는 자결했고, 이시다 미쓰나리는 산속으로 달아났으며, 사쓰마의 시마즈군은 적진을 뚫고 빠져나갔다.
이 전투는 1600년 북쪽 도호쿠에서 남쪽 규슈까지 일본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의 일부였다. 그러나 승패를 가른 것은 세키가하라였다. 몇 주 안에 서군 수뇌부는 붙잡혀 처형되었고, 이에야스는 패자들의 영지를 동맹 영주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었다. 1603년 천황은 그를 쇼군에 임명했다.
이 사이트의 독자에게 세키가하라는 임진왜란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하다. 양쪽 장수 가운데 많은 이가 몇 해 전 조선에서 군대를 이끌었고, 이 전투로 들어선 도쿠가와 정권은 곧 조선과의 화해를 추진했다. 이 전투는 히데요시의 전쟁과 에도 시대의 긴 평화를 잇는 다리다.
쉬움
히데요시 이후: 어린 후계자와 경쟁하는 영주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시미에서 죽었을 때 후계자 히데요리는 다섯 살이었다. 히데요시는 다섯 대영주인 오대로(도쿠가와 이에야스·마에다 도시이에·모리 데루모토·우키타 히데이에·우에스기 가게카쓰)와, 그의 행정을 상당 부분 맡아 온 이시다 미쓰나리 등 다섯 부교(오봉행)가 정권을 운영하도록 해 두었다. 이들은 모두 히데요리를 섬기겠다고 거듭 맹세했다.
균형은 금방 무너졌다. 1599년 초 이에야스가 히데요시가 금지한 대로 합의 없이 자기 집안과 다른 영주들 사이의 혼인을 추진한 사실이 드러나, 그를 지지하는 쪽과 마에다 도시이에를 지지하는 쪽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다. 1599년 봄 도시이에가 죽자 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구로다 나가마사 등 일곱 장수가 이시다 미쓰나리를 겨냥해 움직였다. 예전 책들은 이를 습격이라 부르지만, 최근에는 습격이라기보다 소송을 앞세운 무력 시위에 가까웠다고 보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어느 쪽이든 미쓰나리는 직위에서 물러나 자기 성인 사와야마로 은거해야 했다.
이어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 들어갔고, 1599년 가을에는 히데요리가 살던 오사카성에 들어가 자기 권한으로 영주들에게 상과 벌을 내리기 시작했다. 오대로의 한 사람인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아이즈에서의 군비에 대해 해명하러 상경하기를 거부하자, 이에야스는 그를 정벌하겠다고 선언하고 1600년 6월 미쓰나리와 사이가 나쁜 많은 영주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진군했다.
쉬움
1600년 여름: 아이즈에서 미노로
이에야스가 동쪽으로 떠나자 반대 세력이 일어났다. 1600년 7월 모리 데루모토가 오사카성에 들어가 서군의 명목상 총대장이 되었고, 부교 세 사람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규정을 어겼다고 고발하는 탄핵문 「나이후 치가이노 조조(内府ちがひの条々)」를 돌렸다. 서군은 이에야스의 오랜 가신 도리이 모토타다가 지키던 후시미성을 포위해 8월 1일 함락했다.
이에야스의 동맹 영주들은 서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에도 북쪽 오야마에서 열린 군사 회의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이에야스 편에 서겠다고 선언하자 다른 영주들이 따랐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 회의를 전하는 당대의 편지는 없고, 후대 기록이 묘사하는 형태로 회의가 열렸는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문서로 분명한 것은 서부와 중부 일본의 영주들이 도카이도를 따라 되돌아갔고, 이에야스는 에도로 돌아가 그들의 향배를 지켜보았다는 사실이다.
8월 23일 동군 영주들은 노부나가의 손자 오다 히데노부가 지키던 기후성을 공략했다. 그제야 이에야스는 9월 1일 에도를 떠났다. 다른 도쿠가와 군대를 이끌고 나카센도로 진군하던 아들 히데타다는 사나다 마사유키가 지키던 우에다성 앞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는 전투에 늦었다. 이에야스의 명령이 늦게 닿은 데다 궂은 날씨까지 겹쳤기 때문이라고 흔히 설명하지만, 그 원인과 각각의 비중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갈린다. 그가 우에다에서 크게 졌다는 전통적인 이야기는 당대 문서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9월 14일 이에야스는 미쓰나리·우키타·고니시·시마즈가 머물던 오가키성 근처 아카사카에 이르렀다. 같은 날 모리 가문의 중신 깃카와 히로이에는 도쿠가와 측에 인질을 보내, 데루모토의 영지를 보장받는 대신 모리군이 싸우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날 밤 서군 수뇌부는 폭우 속에 오가키를 떠나 서쪽 세키가하라로 이동했다.
쉬움
9월 15일
세키가하라는 여러 길이 만나는 작은 분지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서군은 분지의 서쪽과 남쪽 가장자리 고지를 차지했다. 북쪽에 이시다 미쓰나리, 가운데에 시마즈·고니시·우키타, 남서쪽에 오타니 요시쓰구와 그 동맹 부대, 마쓰오산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있었다. 모리·깃카와 등의 부대는 동군의 등 뒤인 동쪽 난구산에 있었다. 항공 레이저 측량을 이용한 최근 연구에서는 서군의 진지가 더 서쪽, 야마나카 마을 위쪽 산지에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밤새 내린 비로 아침에는 안개가 끼었다. 싸움이 언제, 어떤 순서로 시작되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이틀 뒤 이에야스의 관리 두 사람이 쓴 편지는 이에야스가 오전 10시 무렵 세키가하라로 나아가 싸웠다고 적고, 후대 기록은 안개가 남아 있던 오전 8시 무렵부터 교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후대 군기물은 이이 나오마사와 이에야스의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요시가 첫 공격을 열었다고 전하지만 이 일화를 의심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우키타군과 맞붙었으며,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미쓰나리의 진지를 압박했다.
어느 시점에—시라미네 준이 편지를 읽은 바로는 개전 직후, 전통적인 설명으로는 몇 시간의 싸움 뒤—고바야카와군이 마쓰오산에서 내려와 오타니 요시쓰구의 부대를 쳤다. 산기슭 오타니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와키자카·구쓰키·오가와·아카자도 오타니에게 창끝을 돌렸다. 오타니의 부대는 무너지고 그는 자결했으며, 서군은 남쪽부터 무너져 내렸다. 난구산의 모리군은 끝내 내려오지 않았다. 앞쪽에 진을 친 깃카와 히로이에가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이에야스는 같은 날짜로 다테 마사무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오 무렵(오시의 시각) 싸워 이겼다고 알렸다. 미쓰나리·고니시·우키타는 산속으로 달아났다. 포위된 시마즈 요시히로는 적진을 뚫고 빠져나갔지만 조카 시마즈 도요히사와 병사 대부분을 잃었고, 추격하던 이이 나오마사는 시마즈군의 총탄에 부상을 입었다. 이어 동군은 미쓰나리의 사와야마성을 공격했고, 성은 18일에 함락되었다. 당대 편지는 이에야스가 15일 당일 사와야마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후대 기록은 그의 진군을 이튿날로 적는다.
중급
조선에서는 같은 편, 세키가하라에서는 적: 장수들은 왜 갈라섰나
세키가하라 전투는 마지막 일본군이 조선을 떠난 지 2년도 안 되어 벌어졌고, 조선에서 같은 군대에 몸담았던 장수들이 이제 서로 마주 섰다. 서군에는 첫 침략(임진년 출병) 때 조선 현지의 총대장으로 행주산성 공격을 이끈 우키타 히데이에, 1592년 가장 먼저 부산에 상륙한 고니시 유키나가, 사천과 노량에서 싸운 시마즈 요시히로, 조선에 건너간 부교 가운데 한 사람인 오타니 요시쓰구가 있었다. 정유재란 때 명목상 총대장이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 1592년 한산도에서 이순신에게 함대를 잃은 와키자카 야스하루도 서군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전투 중에 서군을 공격했다. 동군에는 구로다 나가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호소카와 다다오키·도도 다카토라·가토 요시아키 등 조선에서 군대나 수군을 이끈 장수들이 있었고, 가토 기요마사는 규슈에서 동군으로 싸웠다. 이에야스 자신은 조선에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한 군대의 장수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편에 서게 되었을까?
답의 일부는 조선이 아니라 일본 안에 있다. 히데요시는 다섯 살 난 후계자와, 함께 정권을 운영하도록 정해 둔 대영주·부교들의 협의체를 남겼다. 오대로 가운데 가장 강한 이에야스는 곧 히데요시가 정한 규칙을 어기기 시작했고, 1599년 마에다 도시이에가 죽으면서 그를 견제하던 대로가 사라졌다. 영주들은 저마다 히데요리의 정권을 누구에게 맡길지 정해야 했고, 1600년 부교들이 이에야스에게 맞서 일어났을 때 내건 탄핵 조목도 바로 이런 위반들을 늘어놓은 것이었다.
조선 전쟁은 여기에 그 나름의 원한을 보탰다. 정유재란 때 히데요시는 장수들을 감시하도록 감찰관(군메쓰케) 일곱 명을 보냈다. 그 우두머리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매제 후쿠하라 나가타카였고, 이들의 일을 총괄한 사람이 미쓰나리였다. 1598년 초 울산성 포위가 풀린 뒤 후쿠하라는 하치스카 이에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가 명군이 진지 가까이 왔을 때 싸우지 않았다고 보고하고, 다른 감찰관들도 감독을 소홀히 했다고 탓했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장수들이 울산과 순천을 포기해 전선을 줄이자고 건의한 데 이미 격노해 있었다. 그는 이 건의를 지지한 하치스카에게 영지로 돌아가 근신하라고 명하고, 구로다를 꾸짖으며 해명 편지조차 받아 주지 않았으며, 장수들이 어렵게 거둔 승리라고 여긴 싸움에 아무 포상도 내리지 않았다. 장수들은 감찰관들과 미쓰나리를 탓했다. 다만 장수들끼리도 한마음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가토 기요마사는 하치스카가 지지한 전선 축소안에 반대했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돌아온 장수들은 이 문제를 다시 꺼냈다. 한 기록에 따르면 1599년 3월 가토 기요마사·구로다 나가마사·아사노 요시나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호소카와 다다오키·이케다 데루마사·가토 요시아키의 동의를 얻어 미쓰나리에게 감찰관들을 할복시키라고 요구했지만, 미쓰나리는 포상이 없었던 것은 히데요시 자신의 결정이었다며 거절했다. 윤3월 3일 마에다 도시이에가 죽자 그들은 미쓰나리를 겨냥해 움직였다. 누가 참여했는지는 사료마다 다르다. ‘일곱 장수’라는 숫자는 전통적인 것이고, 당시의 한 일기는 다이묘 열 명쯤이라고 적는다. 이것이 무력 습격이었는지, 무력 시위를 동반한 ‘소송’이었는지도 역사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결과는 분명하다. 미쓰나리는 직위에서 물러나 사와야마로 은거했고,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 들어갔으며, 19일에는 후쿠하라와 또 다른 감찰관 구마가이 나오모리가 조선에서의 ‘부정’을 이유로 처벌받고 하치스카와 구로다의 울산에서의 행동은 정당했던 것으로 인정되었다. 가사야 가즈히코는 이에야스가 이 사건을 수습하면서 사실상 정권의 주재자가 되었다고 보고, 미즈노 도모키는 장수들이 처음부터 이에야스의 동의를 받아 움직였다고 본다.
그러나 옛 원한이 모든 것을 정하지는 않았다. 미쓰나리를 몰아붙인 장수들이 모두 울산에서 싸운 것은 아니었고(후쿠시마와 호소카와는 싸우지 않았다), 뒤에 이에야스 편에서 함께 싸운 영주들 사이에도 다툼이 있었다. 이를테면 가토 요시아키와 도도 다카토라는 1597년 칠천량 해전의 공을 두고 맞섰다. 미쓰나리의 가장 유명한 적수인 가토 기요마사는 1599년 시마즈 가문에 맞선 반란(쇼나이의 난)을 도운 일로 이에야스와 틀어져, 아이즈 정벌에서 빠지고 사실상 히고에 근신하게 되었으며 서군의 설득을 받기도 했다. 그가 망설였는지는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갈린다. 1592년 한성 선착을 두고 기요마사와 다툰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에서 돌아온 뒤 이에야스와 영주들 사이를 잇는 중개역(도리쓰기)을 맡기도 했지만 서군에 섰다. 오랜 전쟁으로 군사력이 바닥나 미쓰나리에게 병력을 빌려야 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뒤에 도쿠가와 치하에서 쓰인 기록에 따르면 후시미성 입성을 거절당한 뒤에야 서군에 가담했지만, 7월 15일 자 편지를 보면 그는 이미 반(反)이에야스 연합에 가담해 있었다. 그가 거느린 병력은 1,000명 정도였고, 뒤에 고향에서 자원한 390명가량이 합류했다. 히데요시의 양녀와 혼인해 도요토미 일족으로 대우받은 우키타 히데이에는 서군 최대의 부대를 이끌었지만, 1600년 초 집안 분쟁으로 도가와 미치야스 같은 중신들이 떠나 있었다. 도가와는 이에야스 편으로 넘어가 세키가하라에서 옛 주군과 싸웠다.
옛 역사서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미쓰나리가 이끄는 히데요시의 ‘문치파’ 관료와 기요마사가 이끄는 ‘무단파’ 장수의 반목으로 정리했다. 나카노 히토시 등은 이 구도가 에도 시대 군기물에서 자라났다고 본다. 두 파의 불화를 보여 주는 일화 가운데 많은 수는 당대 문서로 확인되지 않고, 기요마사 자신도 조선 전쟁 이전에는 주로 행정 일을 맡았다. 이 밖에 히데요시가 남긴 규칙을 둘러싼 이에야스와 부교들의 대립, 또는 중앙 통제를 강화하려는 관료와 이에 반발한 영주들의 대립을 원인으로 드는 설명도 있는데, 뒤의 견해 역시 비판을 받는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는 1600년 각 영주의 선택을 여러 요인이 겹친 결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돌아온 장수들은 왜 2년 만에 서로 싸웠을까? 히데요시의 죽음은 어린 후계자와, 그의 정권을 누가 장악할지를 둘러싼 다툼을 남겼다. 조선 전쟁은 공로와 잘못을 둘러싼 원한을 남겨 돌아온 장수 다수를 미쓰나리와 감찰관들에게 등 돌리게 했다. 이에야스는 이 둘을 모두 이용했다. 1599년의 위기를 장수들에게 유리하게 수습했고, 1600년에는 그들 가운데 다수를 이끌고 동쪽으로 갔으며, 편지와 약속으로 다른 이들까지 끌어들였다. 그러나 두 진영은 단순히 ‘조선에서 싸운 장수들’ 대 ‘관료들’이 아니었다. 조선에서 싸운 장수들은 양쪽 모두에 있었고, 혼인 관계·영지·두려움·계산이 옛 원한만큼 중요했다. 이들이 전투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래 ‘처벌과 포상’에서 다룬다.
중급
분지 안에서 단계별로: 전통적인 설명과 그 문제점
세키가하라는 북쪽 이부키 산지와 남쪽 스즈카 산맥 사이의 길목이다. 나카센도가 이곳을 동서로 지났고, 여기서 두 길이 갈라졌다. 하나는 북서쪽 호쿠리쿠 지방으로 가는 길(북국가도), 다른 하나는 남동쪽 이세로 가는 길(이세가도)이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이시다 미쓰나리는 분지 북서쪽 사사오산 기슭에 진을 쳐 북국가도를 눌렀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남쪽 마쓰오산의 산성을 차지했는데, 바로 전날인 14일에 그곳을 지키던 서군 장수를 내쫓고 들어간 것이었다. 모리 히데모토·깃카와 히로이에·안코쿠지 에케이·나쓰카 마사이에·조소카베 모리치카는 동쪽, 곧 동군의 등 뒤인 난구산과 그 주변에 있었고, 이에야스의 첫 본진은 분지 동쪽의 낮은 언덕 모모쿠바리산에 있었다.
북쪽부터 미쓰나리·시마즈 요시히로·고니시 유키나가·우키타 히데이에가 서쪽 산기슭에 늘어섰다. 오타니 요시쓰구는 히라쓰카 다메히로·도다 가쓰시게 등과 함께 9월 2일부터 분지 남서쪽 야마나카에 진을 치고 있었고, 마쓰오산 기슭에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구쓰키 모토쓰나·오가와 스케타다·아카자 나오야스가 있었다. 이들은 이미 동군과 내통한다는 소문이 돌던 고바야카와에 대비하는 명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동군 선봉은 나카센도 남쪽에서 우키타와 마주한 후쿠시마 마사노리였고, 그 곁에 도도 다카토라와 교고쿠 다카토모가 있었다. 길 북쪽에서는 구로다 나가마사·호소카와 다다오키·가토 요시아키·다나카 요시마사 등이 미쓰나리를 마주했고, 그 사이에 이이 나오마사와 마쓰다이라 다다요시가 있었다. 이케다 데루마사·아사노 요시나가·야마우치 가즈토요 등은 난구산을 감시하도록 남겨졌다. 그러나 이 배치를 기록한 당대 문서는 없다. 흔히 보는 전투 배치도는 1893년 육군 참모본부가 펴낸 것을 바탕으로 하는데, 시라미네 준은 이 그림이 참모본부 자신의 본문과도 어긋나므로 무비판적으로 인용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싸움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구로다 가보』(1688)에 따르면 이이 나오마사는 이에야스의 넷째 아들이자 자신의 사위인 마쓰다이라 다다요시를 데리고 후쿠시마 부대 사이를 지나가려 했다. 후쿠시마의 부장 가니 사이조가 막아서자 정찰일 뿐이라며 약 300명만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고, 다다요시가 첫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가사야 가즈히코는 이에야스의 군법이 이런 앞지르기를 금했고 후쿠시마가 항의한 기록도 없다는 점을 들어, 이이의 부대가 안개 속 정찰을 명분으로 첫 교전을 우연한 조우처럼 보이게 해, 앞지르기 금지를 노골적으로 어기지 않으면서 도쿠가와군의 첫 공을 확보했다고 해석한다. 이렇게 보면 본격적인 전투는 후쿠시마 부대가 우키타 부대에 총을 쏘면서 시작된 셈이다. 국가 사적 해설도 개전지를 덴마산 남쪽 기슭에 진을 친 우키타에게 후쿠시마가 싸움을 건 곳으로 규정한다. 시각에 대해서는 에도 시대 군기물이 오전 8시 무렵을, 17일 자 관리들의 편지가 오전 10시 무렵을 적으며, 뒤의 것을 개전 시각으로 보는 역사학자도 있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싸움은 곧 전선 전체로 번졌다. 남쪽에서는 후쿠시마 부대가 아카시 다케노리가 이끄는 우키타의 선봉 약 8,000명과 싸우다 한때 밀렸지만 버텼다. 북쪽에서는 다나카·구로다·호소카와·가토 요시아키 등이 미쓰나리의 진지를 공격했고, 미쓰나리의 중신 시마 사콘이 방어를 지휘했다. 한 기록은 간 마사토시가 이끄는 구로다의 철포대가 옆에서 그를 쏘았다고 하지만, 그의 최후는 확실하지 않고 교토에서 살아남았다는 전승까지 있다. 남서쪽에서는 도도와 교고쿠가 오타니 부대와 싸웠고, 가운데에서는 이이 나오마사와 마쓰다이라 다다요시가 시마즈 부대와 맞붙었다. 막부가 편찬한 『조야구문부고』에 따르면 고니시 부대는 정오 전까지 작은 전투만 벌였고, 고니시는 고바야카와의 향배가 분명하지 않다며 시마즈의 출동 요청을 거절했다. 마쓰오산의 고바야카와와 난구산의 부대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바야카와 부대가 마쓰오산을 내려오자(그 시점은 아래 배반 논쟁 단락에서 다룬다), 오타니는 바로 이런 배반에 대비해 남겨 둔 약 600명으로 맞섰고, 전선에서 돌아온 히라쓰카·도다와 함께 두세 차례 그들을 산 위로 밀어냈다고 전한다. 동군이 고바야카와 진영에 붙여 둔 오쿠다이라 사다하루는 이때 치명상을 입었다. 이어 도도 다카토라가 미리 공작해 둔 와키자카·구쓰키·오가와·아카자까지 오타니 부대에 등을 돌리자 부대는 무너졌고, 오타니는 자결했다. 와키자카는 8년 전 한산도에서 이순신에게 함대를 잃은 바로 그 장수다. 『조야구문부고』가 전하는 순서로는, 오타니 부대가 무너지고 우키타·미쓰나리 부대의 선봉이 물러나자 고니시 부대의 선봉이 동요했고 동군의 공격에 고니시 부대 전체가 무너졌다. 우키타 부대는 궤멸했고, 가장 오래 버틴 미쓰나리도 북서쪽 이부키 산지로 달아났다.
난구산과 그 기슭의 부대, 곧 모리 히데모토·깃카와 히로이에·안코쿠지 에케이·나쓰카 마사이에·조소카베 모리치카는 끝내 전투에 끼지 않았다. 앞쪽에 있던 깃카와가 전날의 약속대로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히데모토가 병사들이 도시락을 먹는 중이라며 동료들의 재촉을 물리쳤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일화에 불과하다. 오사카의 모리 데루모토가 깃카와의 밀약을 승인했는지는 논쟁거리다. 와타나베 다이몬은 이를 데루모토 자신과 이에야스의 화목으로 보지만, 미쓰나리 준지는 깃카와가 데루모토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을 가능성은 낮으며 다만 데루모토가 양쪽 길을 열어 둔 채 이를 묵인했을 수 있다고 본다. 서군이 무너진 뒤 이케다와 아사노는 물러나는 나쓰카·조소카베 부대를 추격했지만, 모리·깃카와·안코쿠지 부대는 쫓지 않았다.
중급
시마즈의 퇴각
서군이 무너지자 시마즈 부대는 적 한가운데에 남겨졌다. 오가키시를 위해 만들어진 안내 지도에 따르면 포진 때 병력은 약 1,500명이었지만, 다른 기록들은 이보다 적거나 많은 수를 든다. 뒤에 편찬된 시마즈 가문의 인물 기록에 따르면, 요시히로는 처음에는 이에야스의 본진에 돌격해 죽으려 했으나 조카 시마즈 도요히사 등의 설득을 받아 귀국을 꾀하기로 했다. 시마즈 부대는 서쪽 산지로 물러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후쿠시마 부대를 뚫고, 이에야스 본진 곁을 스쳐 지나, 남쪽 이세가도로 향한 것이다. 왜 이 길을 택했는지는 설이 갈린다. 혼란에 빠진 전장을 가로지르는 편이 산을 넘기보다 쉬웠다는 설, 뒤쪽 길은 사쓰마와 반대 방향이었다는 설, 60대였던 요시히로가 이부키 산지를 넘기 어려웠다는 설이 있다. 요시히로는 가신 가와카미 다다에를 이에야스에게 보내 사쓰마로 돌아가 뒤에 사죄하겠다고 전했다고 한다.
추격은 거셌다. 이이 나오마사와 마쓰다이라 다다요시가 부대를 이끌고 뒤쫓았다. 도요히사는 후위를 맡았는데, 우토자카에서 싸우다 죽었다는 전승이 있는 한편, 부상한 채 더 나아가 자결했다는 설과 세키가하라 역참 어귀에서 일찍 죽었다는 설도 있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또 다른 가신 조주인 모리아쓰는 요시히로의 진바오리를 걸치고 대신 죽었고, 가치지 고개 기슭 부근에서는 시마즈의 사수 가시와기 겐토가 쏜 총에 이이 나오마사가 말에서 떨어졌다. 다다요시도 이 싸움에서 부상을 입었다. 뒷날 ‘스테가마리’라고 불리는 전술, 곧 작은 부대를 길에 남겨 추격을 막는 사이 본대를 빼내는 방식이 이 퇴각과 연결되어 전하지만, 이 이름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893년에 나온 세키가하라 관련 책에 이 이름이 보인다.
오가키 안내 지도가 현지 기록과 전승으로 재구성한 경로에 따르면(다른 경로를 제시하는 견해도 있다), 요시히로의 본대는 고마노 고개로 요로 산지를 넘어 산중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고소 고개(뒷날 ‘시마즈 고개’로 불림)를 넘어 오미로 들어갔고, 사카이를 거쳐 바닷길로 귀국했다. 요시히로와 함께 사쓰마에 닿은 사람은 80명 정도였다고 전하지만, 병력과 생환자 수는 기록마다 다르다. 이 퇴각은 사쓰마의 자랑이 되었다. 가고시마의 묘엔지 참배 행사가 이를 기리고, 1960년부터는 가고시마의 어린이들이 해마다 그 길을 걷는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시마즈 가문은 2년에 걸친 교섭 끝에 영지를 모두 지켰다.
중급
누가, 얼마나 싸웠나
1600년의 전쟁은 도쿠가와와 도요토미 사이의 전쟁이 아니었다. 양쪽 모두 히데요리를 위해 싸운다고 내세웠다. 동군은 후쿠시마 마사노리·가토 기요마사·구로다 나가마사·이케다 데루마사·호소카와 다다오키처럼 히데요시 덕에 출세한 영주들이 대부분이었고, 여기에 이에야스의 직속 가신들이 더해졌다. 서군은 히데요시의 부교들과 모리 데루모토·우키타 히데이에·시마즈 가문 같은 서일본의 대영주들이 이끌었다.
영주들이 왜 어느 한쪽을 택했는지는 핵심 질문이다. 예전에는 미쓰나리 같은 히데요시의 ‘문치파’ 관료와 가토 기요마사 같은 ‘무단파’ 장수 사이의 반목으로 설명했다. 나카노 히토시 같은 역사학자들은 이 구도가 주로 에도 시대 군기물에서 나왔다고 본다. 최근 연구는 혼인 관계, 영지 분쟁, 이에야스나 미쓰나리에 대한 두려움, 누가 이길지에 대한 계산 등 저마다 다른 여러 이유를 지적한다.
병력 수는 불확실하다. 『일본대백과전서』는 양군을 각각 약 8만 명으로 보면서, 서군 가운데 실제로 싸운 것은 약 3만 5천 명뿐이었다고 한다. 현대 책들이 되풀이하는 부대별 병력의 상당수는 1893년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연구에서 나온 것인데, 이는 실제 동원 병력이 아니라 영지 100석당 3명으로 각 영주가 동원할 수 있었을 병력을 추산한 값이다. 전투 사흘 뒤 보고를 받은 한 조정 귀족은 이에야스의 병력이 약 5만 명이라고 들었다.
세키가하라에 끝내 오지 못한 대군도 있었다. 도쿠가와군의 주력인 히데타다의 군대는 아직 길 위에 있었다. 서군 일부는 오쓰성과 다나베성 포위에 묶여 있었고, 북쪽에서는 우에스기 가문이 모가미·다테 가문과, 규슈에서도 여러 세력이 싸움을 이어 갔다.
중급
조선의 목격자, 그리고 조선과의 화해로
이를 지켜본 조선 사람도 있었다. 1597년 포로로 잡힌 학자 강항은 1599년 후시미에 있었고, 그의 포로 기록 『간양록』은 히데요시 사후 실력자들의 다툼에 관한 풍문을 기록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이 시기의 사료로 조심스럽게 활용한다.
세키가하라는 외교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과의 무역으로 살아가던 쓰시마의 소 가문은 1599년부터 교섭 재개를 시도하고 있었는데, 전투로 교섭이 중단되었다. 이처럼 외교 접촉과 일부 포로의 송환은 세키가하라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조선도 1600년 여름에 이미 명의 뜻을 앞세운 답서를 보냈고, 그해 9월에는 포로 쇄환을 강화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에야스의 승리는 그 정치적 환경을 바꾸었다. 일본의 정변으로 중단되었던 교섭은 이제 새 권력을 위해 움직이는 소 가문을 통해 다시 이어졌다. 조선은 포로를 되찾고 재침이 없으리라는 보장을 원했고, 쓰시마는 국서를 위조해 가면서까지 교섭을 이어 갔다. 이 교섭은 1607년, 공식 명칭으로는 ‘회답겸쇄환사’였던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첫 공식 조선 사절로 이어졌다. 그 사절의 이야기는 조선통신사 글에서 다룬다.
중급
처벌과 포상
이시다 미쓰나리는 오미 북부 산속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부키산 근처에서, 모리 가문의 외교승 안코쿠지 에케이는 교토에서 붙잡혔다. 세 사람은 오사카와 사카이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뒤 교토로 옮겨져 10월 1일 로쿠조가와라에서 참수되었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사쓰마로 달아났다가 뒤에 넘겨졌으나, 마에다 가문과 시마즈 가문의 구명 탄원으로 목숨을 건져 1606년 하치조섬으로 유배되어 1655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모리 데루모토는 영지를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고 오사카성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압수한 편지들이 데루모토가 앞장선 사실을 보여 준다며 약속을 뒤집었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깃카와 히로이에는 자신에게 주겠다는 스오·나가토 두 지방을 모리 가문에 주기를 청했다고 하지만, 아래에서 보듯 이를 뒷받침하는 편지들은 진위가 의심스럽다. 결국 모리 가문은 8개 지방 약 120만 석에서 스오·나가토 2개 지방 약 30만 석으로 줄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영지의 4분의 3을 잃었다. 멀리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은 2년 동안 교섭해 영지를 모두 지켰다.
이에야스는 동맹 영주들에게 대개 수도에서 먼 곳에 큰 영지를 새로 주고, 에도·교토·오사카를 잇는 길목에는 친족과 직속 가신들을 배치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우키타의 오카야마 영지를 받았지만 1602년 그곳에서 죽었고(전통적인 셈법으로 21세), 그의 가문은 끊어졌다. 패자들에게서 거둔 영지의 규모는 자료마다 다르다. 일본의 한 사전은 91가 420만 석으로, 영어 위키백과는 다이묘 약 87가로 적는다.
도요토미 가문 자체는 패배한 적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히데요리는 오사카성에 남았고, 전쟁은 적어도 형식상 그의 이름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도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은 약 222만 석에서 약 65만 석으로 줄었고, 영지를 나누어 주는 권한은 사실상 이에야스에게 넘어갔다. 다만 히데요리는 그 뒤에도 자기 가신의 관위를 조정에 따로 추천했다. 도요토미 가문이 여러 대영주 가운데 하나로 떨어졌는지, 아니면 다이묘들 위의 특별한 지위를 유지했는지는 논쟁거리이며,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는 후자를 지지한다. 이는 도요토미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1614–1615년 오사카에서의 또 한 번의 전쟁이 필요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조선에서 싸운 장수들의 운명도 이 전투로 갈렸다. 가톨릭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신앙이 자살을 금한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거부했다고 전하며, 처형될 때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성화를 머리 위로 받들었다고 한다. 울산 보고로 원망을 산 감찰관 후쿠하라 나가타카는 9월 23일까지 오가키성 본성을 지키다 조건부로 항복했지만 용서받지 못했고, 10월 2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긴 쪽에서는 구로다 나가마사가 약 52만 3천 석으로 평가된 지쿠젠을,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모리 데루모토의 히로시마성과 함께 약 49만 8천 석의 아키·빈고를 받았다. 규슈에서 고니시의 성들을 손에 넣은 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의 옛 영지를 받아 약 52만 석으로 평가된 히고 대부분을 다스리게 되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도도 다카토라의 중재로 영지를 지켰지만, 구쓰키 모토쓰나는 감봉되고 오가와 스케타다와 아카자 나오야스는 영지를 잃었다.
중급
세키가하라의 기억
도쿠가와 시대에 세키가하라는 지배 가문의 창업 승리가 되었고, 막부와 참전 가문들을 위해 쓰인 역사서들은 이에야스와 자기 조상을 돋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했다. ‘천하를 가른 싸움(덴카와케메)’이라는 표현이 이 전투에 붙었다.
1893년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일본 전사 시리즈의 하나로 세키가하라 전역을 다룬 책을 펴냈는데, 여기서 추산한 영주별 병력이 지금도 많은 현대 책에 되풀이된다. 소설·영화·드라마는 신중한 이에야스, 충직하지만 인망 없는 미쓰나리, 망설이는 젊은 고바야카와 같은 인물상을 일본 독자들에게 친숙하게 만들었다.
전장은 1931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사자의 머리를 묻은 무덤, 장수들의 진터, 기념비를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2020년 기후현은 이에야스의 마지막 진터에 기후 세키가하라 고전장 기념관을 열었고, 역사학자 오와다 데쓰오가 관장을 맡았다. 세키가하라정은 게티즈버그·워털루 같은 유명한 옛 전장과 자매 결연을 맺었다.
심화
고바야카와는 미리 결심했나: 배반 논쟁
이 전투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망설임이다. 후대 군기물이 퍼뜨린 이야기에 따르면, 히데아키는 몰래 이에야스 편에 서기로 약속해 놓고도 한낮까지 마쓰오산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손톱을 깨물며 초조해하던 이에야스가 히데아키의 진지에 총을 쏘게 하자, 겁에 질린 젊은 영주가 마침내 서군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이 ‘재촉 사격(도이뎃포)’은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에 나온다.
역사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하나씩 따져 보았다. 후지모토 마사유키는 믿을 만한 당대 사료로는 이를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시라미네 준은 1601년 오타 규이치의 기록을 비롯한 가장 이른 기록들이 이 일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뒤에 나타나는 이야기들도 누가 쏘았는지를 두고 서로 다르며, 총격 직후 히데아키가 곧바로 공격했다는 형태는 1727년의 『오치보슈』에야 나타난다는 것을 보였다. 고자 유이치는 알려진 가장 이른 형태가 전투 후 60년도 더 지난 1663년 간행 군기물에 나온다고 지적한다. 턴불 등은 마쓰오산이 이에야스의 진지에서 너무 멀어 총소리를 알아듣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히데아키가 미리 결심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편지들은 동군이 8월 28일 이전부터 그를 설득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며, 구로다 나가마사와 아사노 요시나가가 함께 그에게 보낸 편지도 남아 있다. 전투 이틀 뒤 이에야스의 관리 두 사람이 쓴 편지는 동군 선봉이 공격하자 그때 고바야카와·와키자카, 그리고 오가와 스케타다·스케시게 부자가 ‘배반’했다고 적는데, 시라미네는 이를 개전 직후의 배반으로 읽는다. 그의 견해로는 전투가 짧고 일방적이었다.
다른 역사학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가사야 가즈히코는 싸움이 몇 시간 이어진 뒤에야 고바야카와가 움직였다고 적은 시마즈 요시히로와 그 가신들의 회고를 근거로, 오전 8시 무렵 개전했다면 망설일 시간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즉시 무너뜨렸다’ 같은 표현이 승전 편지의 상투어였다고 지적한다. 가사야는 또 총격 이야기가 후대 기록으로만 전하기는 해도, 서로 다른 계통의 후대 기록이 고바야카와 진영 근처의 총성을 언급하므로 쉽게 버릴 수 없다고 본다. 지금의 연구 상황을 정리하면, 많은 역사학자가 총격 이야기를 의심하지만 그 일부를 옹호하는 견해도 있고, 고바야카와는 몇 주 전부터 동군과 연락하고 있었으며, 그가 공격한 정확한 시점은 아직 논쟁 중이다.
심화
편지, 군기물, 가문 기록
전투 당일에 쓰인 기록은 매우 적다. 가장 중요한 것은 편지들이다. 15일 이에야스가 다테 마사무네에게 정오 무렵의 승리를 알린 편지, 17일 그의 관리 이시카와 야스미치와 히코사카 모토마사가 마쓰다이라 이에노리에게 전투와 배반을 전한 편지, 깃카와 히로이에의 편지, 그리고 20일 전 간파쿠 고노에 사키히사가 이에야스의 진영에서 온 사람의 보고를 아들에게 전하며 서군 전사자를 4,000–5,000명으로 적은 편지가 있다.
오다 노부나가의 전기 작가였던 오타 규이치는 전투 이듬해인 1601년에 이에야스의 전역을 다룬 기록을 완성했으며, 이것이 서사 기록 가운데 가장 이르다. 그러나 오늘날 흔히 이야기되는 세부의 대부분은 1656년의 『세키가하라 시마쓰키』나 1713년의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 같은 후대 군기물에서 나온다. 세키가하라 사료집을 엮은 후지이 지자에몬은 전투 당일을 다룬 군기물 가운데 모든 내용을 믿을 만한 것은 거의 없다고 평했다.
가문 기록은 특히 문제가 많다. 가문마다 조상을 가장 좋게 그리고 싶어 했다. 깃카와 가문에 대한 연구는 깃카와 히로이에가 세운 이와쿠니번이 군기물 저자들에게 돈을 주어 히로이에의 행동에 대한 자기 측 이야기를 싣게 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의 작성까지 용인했음을 밝혔다. 히로이에가 자신에게 주어질 지방을 사양해 모리 가문을 구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원본이 남아 있지 않은 편지들에 기대고 있다.
다른 유명한 일화들도 의문시되고 있다. 후대 기록이 묘사하는 형태로는 열리지 않았을 수 있다는 오야마 평정, 시마즈 요시히로가 제안하고 미쓰나리가 거절했다는 야습 계획(『구로다 가보』(1688)와 이를 더 자세히 꾸민 『오치보슈』(1727) 같은 후대 기록에 나오며 당대 문서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이이 나오마사의 선봉 다툼 등이 그렇다. 이런 이야기들을 당대 편지와 대조해 검증하는 작업은 최근 수십 년 동안 일본 역사학의 활발한 분야였다.
심화
정말 결정적인 전투였나
세키가하라는 흔히 일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로 불리며, 영어 위키백과도 그렇게 적는다. 근거는 충분하다. 서군 수뇌부는 몰락했고, 이에야스는 영지를 나누어 주는 권한을 쥐었으며,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를 약 255만 석에서 약 400만 석으로 늘리면서 교토·사카이·나가사키 같은 주요 도시와 사도·이와미·이쿠노의 큰 광산까지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 전투로 도요토미 가문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히데요리는 오사카에 남았고, 전투에서 이긴 영주들은 대부분 히데요시의 옛 가신이었으며, 이에야스는 처음에 그들에게 정식 영지 지급 문서를 내리지 않았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는 1614–1615년 오사카 전투로 무너지기 전까지 도요토미 가문이 도쿠가와 질서 바깥의 특별한 지위를 유지했다고 본다.
연구는 전투 자체의 모습도 바꾸어 놓았다. 미쓰나리가 왜 오가키를 떠나 세키가하라로 갔는지가 다시 검토되었다. 이에야스가 사와야마와 오사카로 진군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그를 끌어냈다는 통설은 의심받고 있으며, 시라미네 등은 서군 수뇌부가 고바야카와의 배반을 알았기 때문에 움직였다고 본다. 2020년의 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는 레이저 측량과 예수회 보고를 근거로 서군이 세키가하라 서쪽 산지에 다마조(玉城)라는 대규모 야전 성채를 쌓았다는 가설을 소개했다. 이런 견해들은 아직 논의 중이며 결론이 나지 않았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그 결과다. 세키가하라는 도쿠가와 막부, 두 세기 반에 걸친 대체로 평화로운 통치, 그리고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위한 정치적 조건을 만들었다. 그 평화는 조선과 일본이 각자의 목적을 품고 교섭해 얻은 것이었으며, 포로의 귀환과 1607년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첫 공식 조선 사절로 이어졌다.
핵심 개념
-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치른 전쟁
- 양군 모두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을 섬긴다고 내세웠다. 이 전투는 처음에는 도요토미 정권의 존속 여부가 아니라, 누가 그 정권을 장악할지를 결정했다.
- 전략으로서의 배반
- 이에야스는 싸움만큼이나 전투 전의 편지와 약속으로 이겼다. 고바야카와와 다른 장수 네 명이 편을 바꾸었고, 모리군은 싸우지 않았다.
- 조선 전쟁의 참전자들
- 양쪽 장수 가운데 많은 이가 1592–1598년 조선에서 싸웠고, 그 전쟁에서 생긴 갈등도 이야기의 일부다. 다만 그 갈등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논쟁이 있다.
- 상벌로서의 영지
- 전투 뒤 이에야스는 패자에게서 땅을 빼앗고 승자를 옮겨 일본의 지도를 다시 그렸고, 이로써 전국 지배자의 권위를 얻었다.
- 다시 검증되는 전설
- 고바야카와를 향한 총격이나 오야마 평정 같은 유명한 장면은 대부분 후대 군기물에서 나왔으며,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를 당대 편지와 대조해 검증한다.
- 전쟁에서 조선과의 화해로
- 새 도쿠가와 정권은 평화와 무역을, 조선은 포로 송환과 안전 보장을 원했다. 새 정권 아래의 교섭은 포로 쇄환과 조선 사절의 일본 파견으로 이어졌다.
기록
- 1598년 — 연초, 조선 울산성의 포위가 풀린 뒤 감찰관 후쿠하라 나가타카의 보고로 히데요시가 하치스카 이에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를 처벌함.
- 1598년 — 8월 18일(양력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연말까지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함.
- 1599년 — 이에야스의 무단 혼인 동맹을 둘러싼 갈등, 마에다 도시이에 사망. 이시다 미쓰나리가 사와야마로 물러나고, 이에야스가 후시미성에 들어감. 감찰관 후쿠하라 나가타카·구마가이 나오모리가 조선에서의 행동으로 처벌됨. 가을에 이에야스가 오사카성에 들어감.
- 1600년 — 6월: 이에야스가 아이즈의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치러 오사카를 떠남.
- 1600년 — 7월: 모리 데루모토가 오사카성에 들어감. 부교들이 이에야스 탄핵문을 돌림. 후시미성 포위 시작.
- 1600년 — 8월 1일 후시미성 함락. 8월 23일 동군 영주들이 기후성을 공략함.
- 1600년 — 9월 1일 이에야스가 에도를 떠남.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우에다성에서 발이 묶임.
- 1600년 — 9월 14일 이에야스가 아카사카에 도착. 깃카와 히로이에가 모리군의 불참을 약속하고, 서군은 밤에 세키가하라로 이동함.
- 1600년 — 9월 15일(양력 10월 21일) 세키가하라 전투.
- 1600년 — 10월 1일 이시다 미쓰나리·고니시 유키나가·안코쿠지 에케이가 교토에서 참수됨. 10월 10일 모리 가문을 스오·나가토 2개 지방으로 감봉하기로 결정함.
- 1602년 — 시마즈 가문이 긴 교섭 끝에 영지를 보전함.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오카야마에서 죽음.
- 1603년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에 임명됨.
- 1607년 — 도쿠가와 시대 첫 조선 사절이 에도에 도착함.
- 1615년 — 오사카성 함락. 도요토미 가문이 끊어짐.
- 1931년 — 전장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됨.
- 2020년 — 기후 세키가하라 고전장 기념관 개관.
용어 풀이
- 동군(도군)
-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끈 연합군.
- 서군(세이군)
- 1600년 도요토미 정권의 부교들과 서일본 영주들이 결성한 연합군. 명목상 총대장은 모리 데루모토.
- 오대로(고타이로)
- 히데요시가 아들을 대신해 정무를 맡긴 다섯 대영주: 도쿠가와·마에다·모리·우키타·우에스기.
- 오봉행(고부교)
- 이시다 미쓰나리를 비롯한 히데요시의 핵심 행정관 다섯 사람.
- 도이뎃포(재촉 사격)
- 이에야스가 고바야카와의 진지에 총을 쏘아 결단을 재촉했다는 이야기. 현대 역사학자들은 의심한다.
- 석(고쿠)
- 땅의 가치를 나타내는 쌀의 단위. 영지는 평가된 수확량(석고)으로 등급이 매겨졌다.
- 구비즈카(수총)
-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묻은 무덤. 세키가하라에 두 곳이 남아 있다.
- 시마즈의 퇴각(시마즈노 노키구치)
- 전투 막바지 시마즈 요시히로가 동군을 정면으로 뚫고 빠져나간 탈출.
- 나이후 치가이노 조조
- 1600년 7월 부교 세 사람이 돌린 이에야스 탄핵문(‘내대신의 위반 조목’).
- 군메쓰케(감찰관)
- 장수들의 행동을 감시해 보고한 감찰관. 정유재란 때는 후쿠하라 나가타카를 우두머리로 일곱 명이 파견되었다.
- 스테가마리
- 시마즈의 퇴각과 연결되어 전하는 후위 전술. 작은 부대를 남겨 추격을 막는 사이 본대를 빼낸다. 이 이름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묻고 답하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누가 이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이겼다. 3년 뒤 이에야스는 쇼군이 되었고, 그의 가문은 1867년까지 일본을 다스렸다.
도쿠가와와 도요토미가 싸운 전투인가?
직접적으로는 아니다. 양쪽 모두 히데요리를 섬긴다고 내세웠고, 이에야스의 동맹 상당수는 히데요시의 옛 장수였다. 도요토미 가문 자체와의 전쟁은 뒤의 1614–1615년 오사카 전투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왜 편을 바꾸었나?
그는 스스로 이유를 밝힌 적이 없고 2년 뒤 죽었다. 편지들은 동군이 전투 몇 주 전부터 그를 설득했음을 보여 준다. 조선에서의 일로 미쓰나리를 미워했다는 이야기는 당대 문서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이에야스가 정말 고바야카와의 진지에 총을 쏘았나?
아마 아닐 것이다. 이 이야기는 60년도 더 지나 쓰인 군기물에 처음 나오고, 가장 이른 기록들은 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몇 명이 죽었나?
아무도 모른다. 전투 닷새 뒤에 쓰인 한 편지는 서군 전사자를 4,000–5,000명으로 적고, 후대 군기물은 훨씬 큰 수를 든다.
조선에서 함께 싸운 일본 장수들은 왜 세키가하라에서 서로 싸웠나?
히데요시의 죽음은 어린 후계자와 정권을 누가 운영할지를 둘러싼 다툼을 남겼고, 조선 전쟁은 원한을 남겼다. 특히 1598년 울산성 포위가 풀린 뒤 올라간 감찰관의 보고 때문에 돌아온 장수 다수가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등을 돌렸다. 이에야스는 1599년 그들 편을 들었고 1600년에는 그들 가운데 다수를 이끌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싸운 장수들은 양쪽 모두에 있었고, 혼인 관계·영지·두려움·계산이 옛 원한만큼 중요했다.
세키가하라가 조선과 무슨 관계가 있나?
많은 장수가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이 전투로 집권한 도쿠가와 정권은 포로 송환과 재침 방지를 바라던 조선과 강화를 교섭했고, 쓰시마가 중개한 이 교섭은 포로 쇄환과 조선통신사로 이어졌다.
전장을 찾아가 볼 수 있나?
그렇다. 기후현 세키가하라정의 국가 사적으로, 진터와 수총, 2020년에 문을 연 기념관이 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오카모토 료이치(岡本良一)(닛포니카 항목), 関ヶ原の戦い(세키가하라 전투), 『日本大百科全書(닛포니카)』 및 『브리태니커 국제대백과사전 소항목사전』. 쇼가쿠칸·브리태니커 재팬, 코토뱅크
- 関ヶ原の戦い. 위키백과(일본어)
- Battle of Sekigahara. 위키백과(영어)
- 小早川秀秋(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위키백과(일본어)
- 文禄・慶長の役(분로쿠·게이초의 역). 위키백과(일본어)
- 柳川一件(야나가와 사건). 위키백과(일본어)
- 朝鮮後期 朝·日講和와 朝·明關係, Ⅰ. 日本의 對朝鮮講和交涉의 開始. 『국사관논총』 제12집, 국사편찬위원회
- 간양록(看羊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岐阜関ケ原古戦場記念館(기후 세키가하라 고전장 기념관). 위키백과(일본어)
- 시라미네 준(白峰旬), 新解釈 関ヶ原合戦の真実 — 脚色された天下分け目の戦い(새로운 해석: 세키가하라 전투의 진실). 미야오비 출판사(宮帯出版社), 2014
- Anthony J. Bryant, Sekigahara 1600: The Final Struggle for Power. Osprey (Campaign series), 1995
- 七将襲撃事件(일곱 장수의 이시다 미쓰나리 습격 사건, 1599). 위키백과(일본어)
- 福原長堯(후쿠하라 나가타카). 위키백과(일본어)
- 加藤清正(가토 기요마사). 위키백과(일본어)
- 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 위키백과(일본어)
- 島津義弘(시마즈 요시히로). 위키백과(일본어)
- 宇喜多秀家(우키타 히데이에). 위키백과(일본어)
- 脇坂安治(와키자카 야스하루). 위키백과(일본어)
- 関ヶ原本戦の配置(세키가하라 본전의 배치). 위키백과(일본어)
- 関ケ原町(세키가하라정). 위키백과(일본어)
- 笹尾山(사사오산). 위키백과(일본어)
- 関ヶ原古戦場(세키가하라 고전장) 국가 사적 해설. 문화유산 온라인(일본 문화청)
- 井伊直政(이이 나오마사). 위키백과(일본어)
- 福島正則(후쿠시마 마사노리). 위키백과(일본어)
- 黒田長政(구로다 나가마사). 위키백과(일본어)
- 島清興(시마 기요오키, 시마 사콘). 위키백과(일본어)
- 大谷吉継(오타니 요시쓰구). 위키백과(일본어)
- 島津の退き口(시마즈의 퇴각). 위키백과(일본어)
- 捨て奸(스테가마리). 위키백과(일본어)
- 敵中突破! 関ケ原合戦と島津の退き口 — 上石津ガイドマップ(적중 돌파! 세키가하라 전투와 시마즈의 퇴각 — 가미이시즈 안내 지도). 오가키 관광협회·가미이시즈 마을만들기협의회(오가키시 시제 100주년 기념사업)
- 上田合戦(우에다 전투). 위키백과(일본어)
함께 보기
- 도쿠가와 이에야스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기고 에도를 근거지로 도쿠가와 막부를 연 일본의 무장이다.
- 일본의 통일 전쟁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00년 넘게 이어진 일본의 내전을 끝내고 도쿠가와 막부를 연 1560~1615년의 전쟁들.
- 우키타 히데이에도요토미 집안의 일원으로 대우받은 오카야마의 영주로, 1592–1593년 조선에서 일본군의 고위 지휘관을 맡았고 1597년 좌군을 이끌고 남원성을 함락했으며, 세키가하라 패전 뒤 하치조섬으로 유배되었다.
- 조선통신사1607년부터 1811년까지 조선 국왕이 일본의 도쿠가와 쇼군에게 모두 12차례 보낸 수백 명 규모의 사절단으로, 임진왜란 뒤의 강화에서 비롯해 두 나라 사이의 외교와 문화 교류를 잇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 고니시 유키나가사카이 상인 집안 출신의 기리시탄 다이묘로, 1592년 조선 침략 때 제1번대를 이끌었고 명의 심유경과 강화 교섭을 벌였다.
- 가토 기요마사어려서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오와리 출신 무장으로, 1592년 제2번대를 이끌고 함경도까지 들어갔고 뒤에 구마모토성을 쌓았다.
- 구로다 나가마사구로다 간베에의 아들로 1592년 조선 침략 때 제3번대를 이끌었고 1597년 직산에서 명군과 맞부딪쳤으며, 세키가하라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서서 후쿠오카의 첫 영주가 되었다.
- 시마즈 요시히로1597–1598년 사천왜성을 지키며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노량에서 연합 수군과 맞선 구원 선단을 이끈 사쓰마의 장수로,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적진을 뚫고 퇴각한 일로 유명하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