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1889년 프랑스는 새로운 발명품을 세계에 자랑하고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축하하려고 파리에서 아주 큰 박람회를 열었어요. 박람회를 준비한 사람들은 입구에 놀라운 무언가를 세우고 싶어 했고, 귀스타브 에펠이라는 기술자의 회사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을 짓겠다고 나섰어요.
탑은 철 조각 약 1만 8천 개로 이루어져 있고, 조각들은 ‘리벳’이라는 작은 쇠못 수백만 개로 이어져 있어요. 조각 하나하나를 공장에서 만들어 말이 끄는 수레로 공사장까지 나른 다음, 커다란 조립 장난감처럼 맞춰 끼웠어요. 짓는 데 2년 조금 넘게 걸렸어요.
완성되었을 때 높이는 300미터, 100층 건물쯤 되는 높이였어요. 그 뒤 41년 동안 세상 어디에도 사람이 만든 것 가운데 이보다 높은 것은 없었어요. 탑은 알파벳 A처럼 아래는 넓고 위는 가늘어서, 바람이 탑 사이로 빠져나가 쓰러뜨리지 못해요.
모두가 좋아한 건 아니었어요. 유명한 화가와 작가들이 “쓸모없고 괴물 같은” 탑이 아름다운 파리를 망친다는 편지에 이름을 올렸어요. 탑은 원래 20년만 서 있을 예정이었어요. 탑이 살아남은 까닭 가운데 하나는 무선 전파를 보내는 데 아주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해마다 600만~700만 명이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수백 개의 계단을 걸어서 탑에 올라요. 밤이 되면 탑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수천 개의 전구가 반짝여요. 세계 어디서나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면 곧바로 파리를 떠올리지요.
한눈에 보기
- 건설
- 1887년 1월 28일 기초 공사 시작, 1889년 3월 31일 구조물 완성, 1889년 5월 15일 일반 공개
- 위치
- 프랑스 파리 센강 옆 샹드마르스 공원
- 설계
- 귀스타브 에펠이 이끈 에펠 회사(Compagnie des Établissements Eiffel)의 기술자 모리스 쾨클랭·에밀 누기에와 건축가 스테판 소베스트르
- 높이
- 완공 당시 300m. 방송 안테나를 더한 지금은 약 330m
- 재료
- 연철(퍼들 철) 약 7,300톤. 부재 18,038개를 리벳 약 250만 개로 결합
- 처음 목적
-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중심 구조물이자 입구
- 지위
- 프랑스 역사 기념물(1964),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리의 센강변’의 일부(1991)
- 기록
- 1889년부터 뉴욕 크라이슬러 빌딩(1930)이 생길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공 구조물
쉬움
에펠탑은 무엇인가
에펠탑은 파리 서쪽 센강 옆의 넓은 공원 샹드마르스에 서 있는 철제 격자탑입니다. 1887년부터 1889년까지 만국박람회(엑스포지시옹 위니베르셀)의 중심 구조물로 지어졌습니다. 이 박람회는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고 프랑스의 산업과 과학을 보여 주려고 열렸습니다.
높이 300미터의 에펠탑은 당시까지 인류가 만든 어떤 구조물보다도 훨씬 높았습니다. 워싱턴 기념탑 같은 당대 최고층 구조물의 거의 두 배였고, 1930년까지 그 기록을 지켰습니다. 파리 사람들은 곧 이 탑에 ‘철의 여인(La dame de fer)’이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탑은 원래 임시 구조물이었습니다. 건설자는 20년 동안 탑을 운영할 권리를 받았고, 그 뒤에는 파리시가 탑을 철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탑은 살아남아 과학과 무선 통신에 쓰였고, 파리와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파리시가 소유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유료 기념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쉬움
탑을 ‘읽는’ 법
먼저 네 다리를 보세요. 다리는 한 변이 약 125미터인 정사각형 바닥에서 출발해 위로 올라가며 안쪽으로 휘어 꼭대기에서 만납니다. 네 다리 사이 아래쪽에는 커다란 장식 아치가 있습니다. 이 아치는 무게를 거의 받치지 않습니다. 건축가 스테판 소베스트르가 탑을 더 웅장해 보이게 하고 박람회로 들어가는 문을 만들려고 덧붙인 것입니다.
탑에는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층이 셋 있습니다. 첫째 층은 땅에서 약 57미터, 둘째 층은 약 115미터, 꼭대기 층은 약 276미터 높이에 있습니다. 그 위에는 등탑, 에펠이 손님을 맞고 실험을 하던 옛 아파트, 그리고 오늘날의 라디오·텔레비전 안테나가 있습니다.
다리의 곡선은 아름다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에펠은 이 곡선이 바람의 힘을 계산한 결과라고 설명했습니다. 바람이 가장 세게 미는 아래쪽은 넓고 튼튼하게, 위쪽은 가늘고 성기게 만든 것입니다. 격자 구조라 바람은 틈 사이로 빠져나갑니다. 강풍이 불어도 꼭대기는 몇 센티미터밖에 흔들리지 않지만, 더운 날에는 햇볕 받는 쪽 철이 늘어나 꼭대기가 해 반대쪽으로 조금 기울기도 합니다.
첫째 층 바로 아래 탑 둘레에는 라부아지에, 앙페르, 라플라스 등 프랑스 과학자·기술자·수학자 72명의 이름이 금빛 글자로 새겨져 있습니다. 에펠은 탑을 과학의 기념비로 보이게 하려고 이들을 골랐습니다. 72명은 모두 남성이며, 수학자 소피 제르맹 같은 여성이 빠졌다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쉬움
탑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나
탑은 귀스타브 에펠 자신의 스케치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1884년 그의 회사 수석 기술자 모리스 쾨클랭과 에밀 누기에가 거대한 철탑을 그렸습니다. 아래에서는 떨어져 서 있다가 꼭대기에서 하나로 만나는 네 개의 격자 기둥이었습니다. 에펠은 처음에 별로 내켜 하지 않았지만 계속 연구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 뒤 건축가 스테판 소베스트르가 장식 아치, 첫째 층의 유리 홀 같은 세부를 더했습니다.
새 설계가 마음에 든 에펠은 동료들에게서 특허권을 사들이고, 자기 이름으로 이 계획을 적극적으로 알렸습니다. 1885년 그는 토목기술자협회에서 이 탑이 “산업과 과학의 세기”와 1789년 혁명을 상징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1886년 5월 프랑스 정부는 박람회의 중심 구조물을 뽑는 공모를 발표했는데, 샹드마르스에 300미터 금속 탑을 세우는 안을 요구한 조건은 사실상 에펠의 승리를 보장했습니다. 1887년 1월에 맺은 계약으로 에펠은 예상 비용의 4분의 1도 안 되는 150만 프랑을 받았고, 박람회 기간과 그 뒤 20년 동안 탑에서 나오는 모든 수입을 가질 권리를 얻었습니다. 나머지 돈은 스스로 마련해야 했습니다.
중급
어떻게 지었나
기초 공사는 1887년 1월 28일에 시작되었습니다. 강에서 먼 두 다리는 단단한 땅에 놓은 콘크리트 판 위에 섰습니다. 센강에 가까운 두 다리는 땅이 무른 곳이어서, 노동자들은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압축 공기를 채운 거대한 철제 상자인 케이슨을 약 22미터 깊이까지 가라앉히고 그 안에 콘크리트 기초를 부었습니다. 콘크리트 위에는 석회암 블록을 얹어, 각 다리가 딛고 설 철제 ‘신발’을 받쳤습니다.
건설의 진짜 비결은 준비였습니다. 에펠의 설계실은 부재 18,038개에 대해 전체 도면 약 1,700장과 상세 도면 3,600장 넘게 그렸습니다. 리벳 구멍 위치는 1밀리미터 단위까지 정했고, 각도는 매우 정밀하게 계산했습니다. 부재는 파리 외곽 르발루아페레의 회사 공장에서 만들어 흔히 여러 개를 미리 조립한 뒤 말이 끄는 수레로 현장에 날랐습니다. 맞지 않는 부재는 현장에서 고치지 않고 공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다리는 처음에는 비스듬히 뻗은 외팔보처럼 올라가다가 임시 나무 비계에 기대었습니다. 작은 ‘기어오르는 크레인’이 나중에 엘리베이터 선로가 될 길을 따라 다리를 타고 올라가며 부재를 들어 올렸습니다. 가장 아슬아슬한 순간은 1888년 3월, 네 다리를 첫째 층에서 정확히 맞물려야 할 때였습니다. 다리 밑의 유압 잭과 모래 상자 덕분에 기술자들은 다리 위치를 아주 조금씩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현장 노동자는 약 300명이었습니다. 난간, 가림막, 이동식 발판 덕분에 공사 중 사망자는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9세기의 이런 공사로서는 놀랄 만큼 적은 수입니다. 1889년 3월 31일 에펠은 관리와 기자들을 이끌고 계단으로 꼭대기까지 올라가 프랑스 국기를 올렸습니다.
중급
“쓸모없고 괴물 같은”: 예술가들의 항의
탑이 올라가기도 전에 거센 반대가 일어났습니다. 300미터 탑을 세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고, 예술적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1887년 2월 14일 신문 『르 탕』에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 작가 기 드 모파상, 작곡가 샤를 구노 등 저명한 예술가와 작가들이 서명한 항의문이 실렸습니다.
그들은 “무시당한 프랑스의 취향의 이름으로” “이 쓸모없고 괴물 같은 에펠탑”에 항의하며, 탑을 노트르담과 루브르를 비롯한 파리의 기념물들을 초라하게 만들 거대한 검은 공장 굴뚝에 빗댔습니다. 이 논쟁에는 도시를 만드는 주체가 건축가인가 기술자인가, 철 같은 산업 재료도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둘러싼 프랑스의 오랜 논쟁이 담겨 있었습니다.
에펠은 공학과 아름다움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며, 자연의 힘의 법칙은 조화의 숨은 법칙을 따른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탑도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나름대로 웅장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항의자 가운데 몇몇은 뒤에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모파상이 탑이 보이지 않는 파리의 유일한 장소라서 탑 안의 식당에서 자주 식사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중급
1889년 만국박람회와 그 그늘
만국박람회는 1889년 5월 6일에 열려 10월 31일에 닫혔고, 3천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았습니다. 탑은 5월 15일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전에도 수만 명이 1,710개의 계단을 걸어 꼭대기까지 올랐습니다. 박람회가 끝날 때까지 약 190만 명이 탑에 올랐습니다. 첫째 층에는 식당들이, 둘째 층에는 신문 『르 피가로』의 인쇄소가, 꼭대기에는 우체국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방문객 가운데에는 에펠의 방명록에 찬사를 남긴 토머스 에디슨도 있었습니다.
박람회가 1789년 혁명을 기념했기 때문에 유럽의 군주국 대부분은 공식적으로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 나라 기업들은 참여했습니다. 박람회는 프랑스를 과학과 진보의 근대 공화국으로 내세웠고, 탑 가까이에는 철과 유리로 지은 거대한 기계관(갈르리 데 마신)이 서 있었습니다.
박람회는 그 자신감의 어두운 면도 보여 주었습니다. 식민지 전시관에서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프랑스 식민지 사람들을 재현한 ‘마을’에 두고 관람객이 구경하게 했는데, 후대 역사가들은 이를 ‘인간 동물원’이라고 부릅니다. 최근 연구는 탑의 자금 조달에도 주목합니다. 탑 건설 자금을 댄 은행 가운데 하나인 크레디 앵뒤스트리엘 에 코메르시알(CIC)이 같은 시기에, 아이티 혁명 뒤 프랑스가 아이티에 강요한 배상금과 얽힌 무거운 대출로 이익을 얻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제 에펠탑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방식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중급
과학과 무선 통신이 구한 탑
에펠은 운영권이 끝나면 탑이 철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탑을 과학적으로 쓸모 있게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탑에 기상 관측 기구를 설치했고, 둘째 층에서 땅까지 늘어뜨린 케이블을 따라 물체를 떨어뜨려 공기 저항을 측정했습니다. 1909년에는 탑 아래에 풍동을 만들었고 뒤에 공기역학 연구소를 오퇴유로 옮겼습니다. 그의 연구는 초기 비행기 설계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무선 통신이었습니다. 1898년 외젠 뒤크레테가 탑과 팡테옹 사이에서 초기 무선 신호를 주고받았습니다. 에펠은 군에 탑을 군용 무선에 쓰라고 권했고, 대위(뒤에 장군) 귀스타브 페리에가 그곳에 강력한 무선국을 만들었습니다. 1909년 남쪽 다리 근처에 영구적인 지하 무선 센터가 세워졌고, 탑은 계속 서 있게 되었습니다. 1910년부터 탑은 파리 천문대의 시각 신호를 바다의 배와 세계로 보내 국제 표준시를 맞추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탑의 무선국은 적의 통신을 가로채 프랑스 정보기관에 넘겼습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이 정보는 1914년 마른 전투에서 연합군이 거둔 성공과 1917년 무용수 마타 하리 사건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뒤에 탑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송신기를 달았고, 지금도 라디오와 디지털 텔레비전 전파를 보냅니다.
중급
그 뒤의 역사: 전쟁, 조명, 수많은 방문객
1925년부터 1934년까지 자동차 회사 시트로엥은 탑에 거대한 전광 광고를 달았습니다. 1940년 6월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프랑스인들은 점령군이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도록 엘리베이터 케이블을 끊었습니다. 1944년 8월 연합군이 다가오자 히틀러가 파리의 명소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지만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가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탑이 얼마나 분명한 표적이었는지, 콜티츠가 왜 명령을 따르지 않았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습니다.
1956년 텔레비전 송신기에서 난 불로 꼭대기가 부서졌고, 1957년 새 안테나를 달면서 높이가 늘었습니다. 1964년 탑은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는 여러 차례 현대화되었고, 2014년에는 첫째 층에 유리 바닥이 생겼습니다. 탑은 철이 녹슬지 않도록 약 7년마다 페인트 약 60톤을 들여 전체를 다시 칠합니다.
1985년 말부터 탑은 안쪽에서 비추는 황금빛 조명을 받고 있고, 새천년을 맞은 무렵부터는 몇 차례 중단을 거치며 해가 진 뒤 매시 정각 몇 분 동안 수천 개의 전구로 반짝입니다. 탑은 국가 기념행사, 새해 불꽃놀이, 2024년 파리 올림픽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1889년 이래 3억 명이 넘는 사람이 탑을 찾았습니다.
중급
예술과 문화 속의 상징
예술가들은 곧 탑을 받아들였습니다. 조르주 쇠라는 1889년에 탑을 그렸고, 앙리 리비에르는 호쿠사이의 『후가쿠 36경』에 바치는 판화 연작 『에펠탑 36경』(1902)을 만들었습니다. 로베르 들로네는 1909년부터 근대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탑을 거듭 그렸고,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1918년 탑 모양의 시를 썼습니다. 영화감독, 사진가, 광고인들은 탑을 파리를 뜻하는 시각적 약호로 삼았습니다.
프랑스 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1964년의 유명한 에세이에서 에펠탑이 거의 순수한 ‘기호’라고 주장했습니다. 건물로서는 쓸모가 없지만, 과학에서 사랑, 파리 자체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탑은 바라보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도시를 바라보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탑은 세계 곳곳의 모방작도 낳았습니다. 영국의 블랙풀 타워(1894)부터 도쿄 타워(1958), 라스베이거스와 중국의 한 주거 단지에 세워진 복제품까지 있습니다. 그 모습은 기념품, 로고, 이모지에 이르기까지 지구에서 가장 많이 복제된 이미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심화
논쟁: 설계자, 공학, 의미
누가 설계했나? 탑에는 에펠의 이름이 붙어 있지만 처음 개념은 쾨클랭과 누기에가, 건축적 처리는 소베스트르가 맡았습니다. 에펠은 이들의 특허권을 사들이고 공적인 명성을 가져갔지만, 동시에 회사의 공학 경험, 조직, 재정적 위험을 제공했습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대체로 탑을 한 공학 회사의 집단적 성취로 설명하며, 이는 대형 기술 사업에서 공로를 누구에게 돌리는가에 관한 더 넓은 논의와 이어집니다.
형태는 어떻게 계산되었나? 에펠은 다리의 곡선이 풍하중에서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팀은 도해법과 보수적인 가정을 써서, 탑의 위쪽 절반을 틈이 없는 면처럼 다루었습니다. 뒤의 공학자들은 이 윤곽이 왜 이렇게 잘 작동하는지 설명하는 수학적 모형을 내놓았습니다. 2004년에 발표된 한 연구는 에펠이 1885년 토목기술자협회에 낸 보고서를 바탕으로, 이 형태를 바람의 압력과 구조 내부의 장력을 맞세우는 비선형 적분방정식의 해로 설명했습니다. 에펠이 그런 방정식을 의식하고 설계했는지, 실무 경험으로 형태에 이르렀는지는 여전히 열린 문제입니다.
공학 대 건축. 1887년의 항의는 다리, 기차역 지붕, 전시관 같은 기술자의 철 구조물이 건축이 될 수 있는가라는 19세기 논쟁의 일부였습니다. 에펠 회사는 이미 포르투의 마리아 피아 다리(1877), 가라비 고가교(1884) 같은 큰 다리를 지었고, 자유의 여신상 내부 골조(1886)도 설계했습니다. 오늘날 건축사가들은 흔히 에펠탑을 근대적 구조 표현으로 가는 길의 핵심 작품으로 봅니다.
누구의 이야기인가? 최근 연구와 언론 보도는 국가적 자부심을 넘어 시야를 넓혀, 1889년 박람회를 식민지 전시와, 탑의 자금을 아이티의 배상금 부채와 연결합니다. 이를 꼭 필요한 교정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후대의 가치로 과거를 읽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탑의 의미에 공학의 승리와 그것을 낳은 제국주의 세계가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심화
오늘날의 보존과 관리
에펠탑은 역사 기념물로, 파리시가 소유하고 운영 회사인 에펠탑 운영공사(SETE)가 관리합니다. 135년이 넘은 연철 구조물을 계속 쓰려면 끊임없는 공학적 관리가 필요합니다. 다시 칠해서 부식을 막아야 하고, 칠할 때마다 2001년까지 쓰인 납 성분이 든 것을 포함해 오래된 페인트 층을 벗겨 내야 합니다.
다시 칠하는 일은 보존뿐 아니라 색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탑은 처음에는 적갈색이었고, 뒤에는 여러 가지 노랑과 황토색으로 칠해졌으며, 1968년부터는 ‘에펠탑 브라운’이라 불리는 청동색이 되었습니다. 하늘을 배경으로 한 가지 색처럼 보이도록 아래는 어둡고 위는 밝은 세 가지 색조로 칠합니다. 어떤 색을 고를지는 역사적 진정성의 문제로 논의됩니다.
덧붙이는 것과 이미지 관리에 관한 논쟁도 있습니다. 2024년 올림픽 오륜 조형물을 탑에 영구히 두려는 파리시의 계획은 에펠의 후손과 일부 주민들로부터 보호 기념물을 바꾸는 일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또 탑 자체는 1993년부터 퍼블릭 도메인이지만 운영 회사는 탑의 야간 조명이 저작권 보호를 받는다고 주장해, 야경 사진의 상업적 이용은 법적으로 애매한 영역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많은 방문객이 주는 부담, 2018년부터 바닥 둘레에 세운 유리 보안벽 같은 안전 조치, 유지 관리의 필요를 모든 사람에게 열린 공공 기념물이라는 이상과 어떻게 조화시킬지가 과제입니다.
핵심 개념
- 철제 격자 구조
- 작은 철 부재를 삼각형으로 짜 맞춘 뼈대. 튼튼하면서도 가볍고 바람이 잘 빠져나간다.
- 사전 제작(프리패브)
- 정밀하게 잰 부재를 공장에서 만들어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 덕분에 탑은 약 2년 만에 올라갔다.
- 예술로서의 공학
- 기술자가 설계한 구조물도 아름다울 수 있고 건축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 에펠탑이 이를 첨예하게 만들었다.
- 만국박람회
- 산업, 과학, 문화를 보여 주는 대규모 국제 전시회. 1889년 파리 박람회는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했다.
- 임시에서 영구로
- 20년 허가로 지어진 탑은 특히 무선 통신에 쓸모를 증명해 살아남았다.
- 상징과 기호
- 롤랑 바르트가 분석했듯, 탑은 파리와 근대 자체를 뜻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 감춰진 역사
- 박람회의 식민지 전시와 탑의 자금 조달은 이 기념물을 제국주의와 아이티의 부채에 연결한다.
기록
- 1884년 — 모리스 쾨클랭과 에밀 누기에가 거대한 격자 철탑을 구상함.
- 1886년 — 박람회 중심 구조물 공모가 사실상 에펠의 설계를 선택함.
- 1887년 — 계약 체결(1월 8일), 기초 공사 시작(1월 28일), 예술가들의 항의문 발표(2월 14일).
- 1888년 — 네 다리가 첫째 층에서 맞물림(3월).
- 1889년 — 구조물 완성(3월 31일), 만국박람회 개막(5월 6일), 탑 일반 공개(5월 15일).
- 1898년 — 외젠 뒤크레테가 탑과 팡테옹 사이에서 초기 무선 신호를 주고받음.
- 1909년 — 탑 아래에 영구 무선국이 세워지고 탑 존치가 결정됨. 에펠이 샹드마르스에 풍동을 만듦.
- 1910년 — 국제 시보 체계의 일부로 시각 신호 송신을 시작함.
- 1930년 — 뉴욕 크라이슬러 빌딩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 됨.
- 1940년 —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엘리베이터 케이블이 끊김. 1946년에야 수리됨.
- 1964년 — 프랑스 역사 기념물로 공식 지정됨.
- 1991년 — 탑을 포함한 파리의 센강변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됨.
용어 풀이
- 격자 구조
- 가는 부재를 엇갈리게 짜서 사이사이에 빈 공간을 둔 뼈대.
- 연철(퍼들 철)
- 녹인 쇳물을 용광로에서 휘저어 만든 탄소가 적고 질긴 철. 강철이 싸지기 전에 널리 쓰였다.
- 리벳
- 달군 뒤 망치로 두드려 두 금속판을 단단히 잇는 쇠못.
- 케이슨
- 물 아래에 기초를 놓으려고 쓰는, 흔히 압축 공기를 채운 방수 상자.
- 외팔보(캔틸레버)
- 한쪽 끝만 받쳐진 채 밖으로 뻗어 나간 보나 구조.
- 운영권(콘세시옹)
- 정부가 일정 기간 어떤 시설을 운영하도록 내준 권리.
- 만국박람회
- 여러 나라가 산업과 문화를 전시하는 국제 박람회. 프랑스어로 엑스포지시옹 위니베르셀.
- 샹드마르스
- 옛 군사 연병장이던 파리의 넓은 공원. 에펠탑이 서 있는 곳.
- 풍동
- 모형에 바람을 불어 바람의 힘을 연구하는 관 모양 실험 장치.
묻고 답하기
에펠탑은 얼마나 높나요?
1889년 완성 당시 300미터였어요. 그 뒤 안테나를 더해 지금은 약 330미터예요.
귀스타브 에펠이 혼자 설계했나요?
아닙니다. 첫 설계는 그의 기술자 모리스 쾨클랭과 에밀 누기에가 했고, 건축 세부는 스테판 소베스트르가 맡았습니다. 에펠의 회사가 지었고 에펠이 계획을 밀어붙이고 돈을 댔습니다.
왜 지었나요?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고 프랑스 공학을 뽐낸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중심 구조물로 지었습니다.
정말 철거될 예정이었나요?
에펠의 운영 허가는 박람회 뒤 20년이었고, 그 뒤에는 파리시가 탑을 철거할 수 있었습니다. 탑은 주로 무선 통신에 쓸모가 커져 남게 되었습니다.
계단은 몇 개인가요?
1889년 관람객은 꼭대기까지 1,710개의 계단을 올랐어요. 지금은 둘째 층까지만 계단이 열려 있고, 꼭대기는 엘리베이터로 가요.
탑이 움직이나요?
조금요. 강풍이 불면 꼭대기가 몇 센티미터 흔들리고, 더운 날에는 햇볕 받는 쪽이 늘어나 꼭대기가 최대 18센티미터쯤 옮겨 갈 수 있어요.
역사가들은 왜 에펠탑을 아이티와 연결하나요?
탑 건설 자금을 댄 은행 가운데 하나가 같은 시기에, 아이티 독립 뒤 프랑스가 강요한 배상금과 얽힌 대출로 이익을 얻었다는 사실이 최근 조사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1887년의 항의자들은 무엇에 반대했나요?
거대한 철탑이 흉하며 파리의 역사적 아름다움을 압도해 망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기술자가 예술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의심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에펠탑. 위키백과
- Eiffel Tower. Wikipedia(영어)
- Gustave Eiffel. Wikipedia(영어)
- Exposition Universelle (1889). Wikipedia(영어)
- Paris, Banks of the Seine. Wikipedia(영어)
- Paris, Banks of the Seine.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Roland Barthes, La Tour Eiffel (에펠탑), 1964
함께 보기
- 바스티유 습격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이 요새 겸 감옥을 점령한 사건으로, 프랑스 혁명 초기의 상징이 되었다.
- 아이티 혁명1791년 생도맹그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의 봉기로 시작해 노예제 폐지와 1804년 아이티 독립으로 이어진 혁명.
- 기자의 대피라미드이집트 파라오 쿠푸를 위해 세운 왕릉이다. 기자의 피라미드 가운데 가장 크며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남아 있다.
-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호쿠사이의 목판화. 배들 위로 솟은 거대한 파도와 멀리 작게 보이는 후지산을 담았다.
- 별이 빛나는 밤빈센트 반 고흐가 1889년에 그린 그림. 소용돌이치듯 움직이는 밤하늘 아래 마을이 놓여 있다.
- 아술...루벤 다리오가 1888년에 낸 산문·시 모음집으로, 스페인어권 모데르니스모의 형성에 기여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