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한산도 대첩

閑山島大捷(한산도대첩) · 일본: 閑山島海戦(간잔토 해전)

1592년

처음 게시 2026년 10월 11일 · 마지막 수정 2026년 10월 11일 · 편집 테라 스크립타

AI 작성 · AI 사실 검수

Claude가 쓰고 Codex(gpt-6.1-sol)가 공개 출처와 대조해 사실·연대·인용과 영어·한국어판을 독립 검수했습니다. 사람 전문가의 검토는 거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AI 검수: 2026-10-09. 찾아서 고친 문제 25건.

한 문장으로

한산도 대첩은 1592년 음력 7월 8일(양력 8월 14일) 남해안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좁은 견내량에 있던 일본 함대를 넓은 바다로 끌어내 대부분을 무찌른 해전으로, 이 싸움 뒤 일본군은 바다에서의 정면 대결을 피했고 조선은 서쪽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을 지켜 냈어요.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부터 430여 년 전인 1592년, 일본의 대군이 바다를 건너 조선에 쳐들어왔어요. 땅에서 일본군은 아주 빨랐어요. 3주쯤 만에 수도 한양(지금의 서울)에 들어왔고, 임금은 멀리 북쪽으로 피란을 가야 했어요.

그런데 바다에서는 이야기가 달랐어요. 이순신 장군은 군사들을 잘 훈련시켰고, 대포를 많이 실은 크고 튼튼한 배를 가지고 있었어요. 1592년 여름, 70척이 넘는 일본 배가 이순신을 찾아 나섰어요. 일본 배들은 견내량이라는 좁은 물길에 머물렀는데, 바위가 많아서 큰 배가 움직이기 어려운 곳이었어요.

이순신은 그 좁은 물길로 들어가지 않았어요. 대신 배 몇 척을 앞으로 보냈다가 도망치는 척 돌아오게 했어요. 일본 배들은 그 배들을 쫓아 한산도라는 작은 섬 앞의 넓은 바다까지 따라 나왔어요. 그러자 조선 배들이 학이 날개를 펼친 것처럼 둥글게 늘어서서 사방에서 대포를 쏘았어요. 저녁이 되자 일본 배 대부분이 불타거나 가라앉거나 붙잡혔어요.

이틀 뒤 이순신은 안골포라는 포구에서 또 다른 일본 함대도 물리쳤어요. 그 뒤 일본의 지도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부하 장수들에게 바다에서 싸우지 말고 해안에서 지키기만 하라고 명령했어요.

이 싸움이 왜 중요할까요? 군대는 날마다 먹을 것과 물자가 필요해요. 집에서 멀리 떠나온 일본군에게 배는 무거운 짐을 나르기에 좋은 수단이었어요. 그런데 이순신의 수군이 서쪽 바다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배들은 조선의 바닷가를 돌아 북쪽의 자기 군대 쪽으로 안전하게 갈 수 없었어요. 일본이 이 바닷길을 쓰려 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어요. 이것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었는지는 학자들이 지금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많은 학자가 전쟁의 흐름을 바꾼 싸움 가운데 하나로 꼽아요.

한눈에 보기

날짜
조선 음력 1592년(선조 25) 7월 8일 = 양력 1592년 8월 14일(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표 기준). 위키백과 등 여러 자료는 8월 15일로, 일본 측 기록은 일본 역법으로 7월 7일로 적는다
장소
한산도(지금의 경상남도 통영시) 앞바다. 일본 함대를 거제도와 육지 사이의 견내량에서 끌어낸 뒤 싸웠다
전쟁
임진왜란(1592–1598) 1차 침략기
지휘관
조선: 이순신(전라좌수사), 이억기(전라우수사), 원균(경상우수사) / 일본: 와키자카 야스하루
병력
조선: 전선 약 55–56척(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5척, 홀리 56척), 거북선 2–3척 포함 / 일본: 73척(대선 36, 중선 24, 소선 13, 이순신 장계 기준)
피해
일본: 조선 측 집계로 한산도에서 59척 격파·나포, 약 400명이 섬으로 도주, 14척 도주 / 조선: 전선 손실 없음. 홀리는 한산도와 안골포를 합쳐 전사 19명·부상 114명으로 적는다
이어진 싸움
음력 7월 10일(양력 8월 16일) 안골포 해전. 구키 요시타카·가토 요시아키의 함대(이순신의 집계로 42척)를 상대했다
주요 사료
이순신의 장계(『임진장초』), 『선조수정실록』, 유성룡 『징비록』, 와키자카 가문의 기록 등 일본 측 기록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쉬움

한산도 앞바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한산도 대첩은 1592년에 시작된 일본의 조선 침략, 곧 임진왜란 때의 해전이다. 조선 음력으로 1592년 7월 8일에 벌어졌다. 한국천문연구원(KASI)의 음양력 변환표로 바꾸면 1592년 8월 14일인데, 위키백과를 비롯한 여러 자료는 8월 15일로 적고, 당시 일본의 역법을 따른 일본 측 기록은 7월 7일로 적는다. 싸움터는 거제도와 지금의 경상남도 통영 해안 사이에 있는 작은 섬,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였다.

한쪽은 세 수영의 함대를 합친 조선 수군 약 55척이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그리고 원균이 이끈 경상우수영의 남은 배들이다. 다른 쪽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끈 일본 함대로, 이순신의 장계는 73척이라고 적었다. 이순신은 일본 함대를 좁은 견내량에서 넓은 바다로 끌어낸 뒤 ‘학익진’이라는 둥근 진형으로 에워쌌고, 조선 측 기록에 따르면 59척을 깨뜨리거나 사로잡았다.

이틀 뒤인 7월 10일(양력 8월 16일)에는 안골포에 머물던 구키 요시타카·가토 요시아키의 일본 함대를 공격했고, 이순신의 장계에 따르면 그 대부분을 부쉈다. 새뮤얼 홀리는 두 싸움에서 일본이 잃은 배를 모두 합쳐 100척 안팎으로 본다. 얼마 뒤 침략을 일으킨 일본의 최고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장수들에게 바다에서 싸움을 걸지 말라고 명령했다.

한국에서는 이 싸움을 1592년 진주성 싸움(진주대첩), 1593년 행주산성 싸움(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는다. 이 승리로 조선이 거제 서쪽 남해 바다의 주도권을 확실히 쥐었다고 널리 평가된다. 다만 이것이 일본의 전쟁 전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는 학자들이 지금도 논의하는 문제이며, 아래에서 근거와 여러 견해를 차례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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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1592년 여름: 땅에서의 승리, 바다에서의 고전

침략은 1592년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일본군 제1번대가 부산에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서술에 따르면 히데요시의 육군은 9개 부대, 명목상 약 15만 8700명이었고, 이와 별도로 약 5000명의 수군이 편성되었다. 같은 서술은 다이묘들이 할당된 병력을 다 채우지 못해 실제 병력은 명목상 숫자보다 적었다고 덧붙인다. 일본군은 상륙 3주쯤 만인 5월 2–3일(양력 6월 11–12일)에 한양을, 6월 중순(양력 7월 21일 무렵, 자료마다 며칠씩 다르다)에는 평양을 차지했다. 선조는 명나라와의 국경인 의주까지 피란했다.

그러나 도시를 빼앗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일본군이 장악한 것은 큰길과 성곽 도시였다. 그만한 대군에 필요한 화약과 새 병력 등 많은 것이 부산에서부터 적지를 가로지르는 긴 길을 따라 올라와야 했고, 식량은 현지에서 빼앗기도 했다. 곧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 이 보급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일본군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패배를 맛보았다. 여수에 본영을 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동쪽으로 나아가 5월 7일(양력 6월 16일) 거제도 옥포에 정박한 일본 배들을 깨뜨렸다. 두 번째 출동에서는 5월 29일(양력 7월 8일) 사천에서 이겼는데, 이 싸움에서 거북선이 처음 출전했고 이순신도 총탄에 맞아 다쳤다. 이어 6월 초 당포와 당항포(양력 7월 10일, 13일)에서도 승리했다. 이 가운데 몇몇 싸움에서는 선원들이 뭍에 올라가 있는 사이 해안에 정박한 일본 배들을 덮쳤다.

히데요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세 다이묘에게 조선 수군을 쳐부수라고 명령했다. 이들은 부산에 모였지만 와키자카가 다른 둘보다 먼저 출항했다. 일본 측 기록은 그가 공을 혼자 차지하려 했다고 전한다. 한편 땅에서는 일본군 한 부대가 전라도의 중심 전주로 향하고 있었다. 한산도 대첩과 같은 날, 권율의 부대가 이치 고개에서 이들을 막아 냈다. 일본군은 금산 등 전라도 일부를 점령했지만, 이치를 비롯한 땅에서의 저항 덕분에 조선 최대의 곡창이자 이순신 함대의 근거지인 전라도의 중심 전주와 대부분의 지역이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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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전투: 견내량의 함대를 끌어내다

이순신과 이억기는 여수에 함대를 모아 7월 5일(양력 8월 11일) 함께 훈련한 뒤 이튿날 출항했다. 노량에서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류하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집계로 모두 55척이었다(새뮤얼 홀리의 책은 56척). 7월 7일(양력 8월 13일) 저녁 당포에 이르렀을 때, 그곳의 목동 김천손이 일본 배 70여 척이 견내량에 머물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육지 사이의 좁은 물길로, 물밑에 암초가 많다. 이순신은 장계에서 이곳에서는 큰 전선끼리 부딪칠 염려가 있어 싸우기 어렵고, 궁지에 몰린 일본군이 뭍으로 달아나 버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한산도 앞바다는 넓게 트여 있고 육지에서 떨어져 있어, 헤엄쳐 섬에 오른 적도 갇히게 된다. 수십 년 뒤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은 원균이 곧장 공격하려 하자 이순신이 말렸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는데, 두 지휘관의 갈등이 뒷날의 많은 기록에 색을 입혔으므로 이런 대목은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7월 8일 아침, 판옥선 5–6척이 일본 함대가 정박한 곳으로 다가갔다가 쫓기는 척 물러났다. 일본 배들은 이들을 쫓아 물길을 빠져나와 넓은 바다로 나왔다. 이순신은 그때 전 함대에 학익진을 펼치게 했다. 날개처럼 넓게 휜 대열이 일본 함대의 선두를 감싸며 일제히 포를 쏘았다. 처음 두세 척이 부서지자 나머지 배들은 대열이 무너졌고, 싸움은 해가 질 때까지 이어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정리한 장계의 숫자에 따르면 일본 배 47척이 불타거나 부서지고 12척이 나포되었다. 일본군 400여 명은 배를 버리고 한산도로 달아났고, 뒤처져 있던 14척은 도망쳤다. 와키자카 자신도 빠져나갔다. 조선 수군은 사상자가 있었지만 전선은 한 척도 잃지 않았다. 홀리는 한산도와 안골포 두 싸움을 합쳐 전사 19명, 부상 114명으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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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배와 화포, 그리고 학익진

조선 수군의 주력은 갑판 위에 한 층을 더 올린 대형 전선 판옥선이었다. 선체가 높고 튼튼해 적이 기어오르기 어려웠고, 화포를 많이 실을 수 있었다. 반면 일본 배는 대부분 더 가벼웠고, 주로 병력과 물자를 나르려고 모은 배들이었으며, 전쟁 초기에는 화포가 거의 없었다. 일본 수군은 조총을 쏘다가 적선에 뛰어올라 백병전을 벌이는 방식에 기댔는데, 일본 안의 전쟁에서는 이 방식이 잘 통했다.

조선 전선에는 천자·지자·현자총통처럼 천자문 순서로 이름을 붙인 여러 크기의 화포가 실려 있었고, 커다란 화살과 탄환을 쏠 수 있었다. 덕분에 이순신은 일본군 조총의 유효 사거리 밖에서 싸우며, 적이 배에 오르기 전에 배를 부술 수 있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서술은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화포의 명중률을 높이려고 학익진을 택했다고 설명한다. 배들을 적을 감싸는 곡선으로 늘어세우면, 다가오는 적 대열의 선두를 향해 동시에 사격할 수 있는 화포도 늘어난다.

영어 위키백과의 서술 같은 현대의 재구성은 거북선을 비롯한 무거운 배를 가운데에, 가벼운 배를 양 날개에 둔 모습으로 학익진을 그린다. 이순신의 장계는 진형의 이름은 적었지만 배 하나하나의 위치까지 설명하지는 않는다. 싸움에 나선 거북선의 수도 확실하지 않아, 2척이라는 기록과 3척이라는 기록이 있다. 정확한 구조가 아직 논쟁 중인 덮개 씌운 전선 거북선은 이 싸움의 가장 유명한 상징이지만, 함대 전체로 보면 작은 부분이었고 승리는 주로 평범한 판옥선들의 포격에서 나왔다.

지휘 체계도 중요했다. 조선의 세 지휘관은 이순신을 중심으로 함께 움직였지만, 일본 쪽에는 수군 전체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없었다. 와키자카, 구키, 가토는 저마다 군대와 이해관계를 가진 별개의 다이묘였고, 와키자카가 혼자 먼저 나선 탓에 그는 일본이 동원할 수 있었던 힘의 일부만으로 하나로 뭉친 조선 함대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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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안골포, 그리고 일본의 전술 전환

7월 9일, 정탐선이 일본 배 40여 척이 안골포(지금의 창원시 진해구)에 정박해 있다고 알려 왔다. 와키자카를 뒤따라온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의 함대였다. 이순신은 10일(양력 8월 16일)에 공격했다. 한산도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이번에는 얕은 포구 안쪽 해안에 배를 바짝 붙이고 나오지 않았다. 조선 전선들은 번갈아 드나들며 포를 쏘았고, 이순신에 따르면 저녁 무렵 일본 배는 거의 다 부서졌다. 살아남은 일본군은 뭍으로 달아났다가 밤사이 바다로 빠져나갔다. 이순신은 근처 산에 숨어 있던 피란민들을 일본군이 해치지 않고 바다로 떠나도록 일부러 배 몇 척을 남겨 두었다고 적었다.

조정은 승리에 상을 내렸다. 이순신은 정2품 정헌대부로 품계가 올랐고, 이억기와 원균도 승진했다.

일본은 전술을 바꾸었다. 히데요시는 수군 장수들에게 바다에서 싸움을 걸지 말고, 부산과 거제 일대의 정박지를 해안의 진지에서 지키라고 명령했다. 일본의 연구자 오가와 다카아키(2022)는 일본 역법으로 7월 14일자로 와키자카에게 내린 히데요시의 주인장(朱印狀)을 들어, 히데요시가 구키·가토와 함께 거제도에 성채를 쌓아 지키게 하고 조선 수군과 따로 해전을 벌이는 것을 금지했다고 소개한다. 이순신이 9월 1일(양력 1592년 10월 5일) 일본 수군의 본거지 부산포를 공격했을 때, 정박한 배를 많이 부수었지만 포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오가와는 이순신이 그 뒤 다시 부산을 공격하지 않았고, 1593년 초 웅천의 일본군 진지를 다섯 차례 공격하고도 일본군을 무찌르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1593년 이순신은 견내량에서 전라도로 이어지는 길목을 지켜볼 수 있는 한산도로 본영을 옮기고, 처음으로 전라·경상·충청 세 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뒷날 그가 붙잡혀 갈 때 그를 천거했던 유성룡은 한산도를 잃으면 호남도 지킬 수 없다고 간청했다고 한다. 1597년 원균의 함대가 칠천량에서 무너진 뒤 한산도 진영은 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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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바다가 왜 중요했나: 보급, 장악, 그리고 부산에서 이어진 긴 길

한양을 3주 만에, 평양을 두 달 만에 차지한 군대가 왜 정복을 끝내지 못했을까? 답의 일부는 보급에 있다. 10만 명이 훨씬 넘는 군대는 날마다 먹어야 한다. 처음 몇 달 동안 일본군은 평양의 관아 창고처럼 빼앗은 곡식으로 얼마간 버텼지만, 멀리 나아갈수록 부산까지 이어지는 보급선은 길어지고 위태로워졌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서술은 부산에서 평양까지 이어진 이 육상 보급로가 일본군 후방의 의병에게 교란당했다고 적는다.

한국의 기록은 오래전부터 한산도를 이 문제와 연결해 왔다. 전쟁 중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평양을 차지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선조에게 글을 보내 “일본 수군 10여만 명이 또 서해로 올 것인데, 대왕의 행차는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하고 위협했다고 적었다. 유성룡은 일본이 본래 수군과 육군을 합쳐 서쪽으로 내려오려 했는데 이 한 번의 싸움으로 “적의 한 팔을 끊었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고니시는 평양을 차지하고도 형세가 외로워져 감히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동북아역사재단의 서술 같은 한국의 참고서는 이 구상을 ‘수륙병진(水陸竝進)’이라 부르고, 한산도 대첩이 이를 좌절시켰다고 본다.

지켜 낸 것도 그만큼 중요했다. 유성룡은 이 싸움 덕분에 전라도와 충청도, 그리고 황해도와 평안도의 바닷가 일대를 보전하고, 군량을 나르고 명령을 전할 수 있었다고 썼다. 『징비록』에는 같은 무렵의 예가 있다. 충청도 아산 창고의 세곡 1200석이 배에 실려 서북쪽 끝 정주에 닿았고, 유성룡은 이를 명나라에서 오는 원군의 군량에 보탰다. 이 배는 한산도 대첩과 거의 같은 때에 도착했으므로 승리의 결과라기보다 서해 바닷길이 얼마나 쓸모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예다. 바닷길은 그것을 쥔 쪽에 도움이 되었다.

한계도 분명하다. 한산도 대첩은 쓰시마와 부산을 잇는 일본군의 주 보급로를 끊지 못했고, 이 길은 계속 일본군이 썼다. 이순신 자신도 안골포 싸움 뒤 김해 부근에서 하루 수십 척의 일본 배가 오가고 있었다는 보고를 들었다. 북쪽의 일본군은 취약한 육상 연락망과 현지에서 빼앗은 물자로 부족하나마 버텼다. 이 싸움이 한 일은 북쪽으로 가는 데 쓸모 있었을 남서해안의 바닷길을 일본이 안전하게 쓰지 못하게 하고, 전라도의 대부분과 서해를 조선의 손에 남겨 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산도는 일본군이 진격할 수 있는 거리와 실제로 장악할 수 있는 땅 사이의 틈을 더 벌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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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배와 사람의 수: 기록은 무엇을 말하나

조선 함대의 규모부터 자료마다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라좌우도 전선 48척에 원균의 7척을 더해 55척으로, 홀리는 56척으로 적고, 유성룡의 『징비록』은 이순신이 판옥선 40척을 이끌었다고 한다. 이런 차이는 어느 수영의 배와 어떤 종류의 배를 셈에 넣었는지에 따라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함대는 이순신의 장계에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73척으로 나온다. 『선조수정실록』은 “70여 척”이라고 한다. 장계의 한 영어 번역본은 82척(대선 36, 중선 34, 소선 12)으로 적었고 일부 영어 서적이 이 숫자를 옮겼지만, 장계 자체의 집계인 격파·나포 59척과 도주 14척을 더하면 73척이 맞는다. 일본어 위키백과가 인용하는 와키자카 측 일본 기록은 와키자카가 60–70척을 이끌고 나가 39척이 불탔다고 적는다. 안골포의 숫자도 엇갈린다. 이순신은 눈앞의 42척 가운데 일부러 남겨 둔 몇 척을 빼고 거의 다 부수었다고 적었고, 『선조수정실록』은 40척을 불태웠다고 하며, 영어 위키백과의 안골포 해전 문서는 구키의 기함 니혼마루를 포함해 22척이 빠져나갔다고 한다. 이 기록들이 말하는 피해는 서로 다르며, 이를 맞춰 보려면 각 기록이 부서진 배, 버려진 배, 나중에 되찾은 배를 어떻게 셌는지 알아야 한다.

사람의 피해는 더 불확실하다. 이순신은 한산도와 안골포 두 싸움을 합쳐 세 지휘관의 군사들이 적의 머리 250급 가까이를 베었고 훨씬 많은 적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보고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일본 진영에서 한산도 싸움으로 일본군 9000명이 죽었다는 말이 돌았다고 전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일본의 한 동원 기록은 이 전쟁에서 와키자카에게 1500명을 배정했는데, 노 젓는 사람과 뱃사람이 이런 숫자에 다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쪽 피해를 홀리는 두 싸움을 합쳐 전사 19명, 부상 114명으로 적는다. 이순신의 장계는 전사자와 부상자의 이름과 맡은 일을 하나하나 적었는데, 수군·포수·잠수부 등 그 가운데에는 사노비나 사찰 노비로 적힌 사람들도 있어, 실제로 누가 배를 젓고 싸웠는지를 보여 준다.

날짜도 같은 주의가 필요하다. 조선은 음력(태음태양력)을 썼고, 1592년 음력 7월 8일을 한국천문연구원 변환표로 바꾸면 이 사이트가 쓰는 1592년 8월 14일이 된다. 여러 책과 위키백과는 8월 15일이라 하는데, 하루 차이가 왜 생겼는지는 여기서 참고한 자료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일본의 역법을 따른 일본 측 기록은 7월 7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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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1592년, 같은 해 세계에서는

조선의 동맹국 명나라도 1592년에 따로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해 봄 서북 변경의 영하(닝샤)에서 수비군이 반란을 일으켜 몇 달 동안 성을 차지했다. 명은 1592년 10월까지 이를 진압했고, 그 덕분에 조선 쪽으로 병력을 돌릴 수 있었다. 같은 해 여진의 지도자 누르하치는 일본과 싸우는 조선을 돕겠다며 군대 파견을 제안했지만 조선 조정은 거절했다. 1592년 11월 28일(양력)에는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가 태어났는데, 그는 뒷날 청나라를 세운다. 그의 탄생은 전쟁과 아무 관계가 없고, 그저 같은 해에 일어난 일이다.

1592년 난징에서는 현장 법사의 서역 순례와 원숭이 왕 손오공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서유기』가 출판되었는데, 이것이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이 책은 전쟁과 무관하지만, 제국이 두 변경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명의 출판과 도시 문화는 이어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멀리 서쪽에서는 1592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파도바 대학으로 옮겨 그 뒤 18년 동안 가르쳤다. 프랑스의 수필가 미셸 드 몽테뉴는 1592년 9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런던에서는 1592년 9월 20일 등록된, 로버트 그린의 이름으로 나온 소책자가 “벼락출세한 까마귀”를 조롱했는데, 이는 흔히 극작가 셰익스피어를 가리킨 현존 최초의 언급으로 읽힌다.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조선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나란히 놓아 보면, 한산도 대첩이 있던 해가 세계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과학과 문학, 연극이 움트던 해이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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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를 기억하는 방식

한국에서 한산도 대첩은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싸움 가운데 하나이며, 민족 영웅 이순신에 대한 기억의 중심에 있다. 한산도에 있던 그의 본영 자리인 제승당에는 오늘날 유허비와 사당 건물이 서 있고, 이 싸움은 바다에서 전세가 조선 쪽으로 기운 순간으로 기억된다.

외국인의 찬사는 이 싸움의 명성을 넓혔지만, 오류도 함께 퍼뜨렸다. 미국인 선교사이자 역사가 호머 헐버트는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1906)에서 이순신의 승리를 “전쟁의 전환점”이라 불렀는데, 그 싸움을 “6만 명의 증원군을 싣고 오던” 일본 함대를 거북선이 들이받은 싸움으로 묘사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헐버트가 이 싸움을 그리스의 살라미스 해전에 견주었다고도 전한다. 영국 해군 제독 조지 발라드는 1921년 바다와 일본 정치사에 관한 책에서 넬슨도 이보다 더 잘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썼는데, 그 역시 서쪽 바닷길로 향하던 수백 척의 수송선단을 조선 배들이 들이받으며 뚫고 나간 싸움으로 그렸다. 이순신의 장계는 좁은 물길에서 끌어낸 73척의 함대를 주로 포격으로 무찌른 싸움으로 적었다. 한산도를 거대한 증원 선단을 쳐부순 싸움으로 보는 대중적 이미지의 일부는 이런 초기 영어 서술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싸움이 덜 기억되어 왔지만 무시된 것은 아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1935년 판본으로 인용하는 언론인이자 역사가 도쿠토미 소호의 저술은 침략이 실패한 주된 이유로 의병의 봉기, 명군의 참전과 함께 조선 수군의 우세를 꼽았다. 와키자카 가문에는 패전 뒤 와키자카가 섬에 숨어 며칠 동안 미역을 먹으며 버텼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이는 가문의 전승일 뿐 기록으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이 싸움은 대중문화의 소재도 되었다. 2022년 김한민 감독의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 이 싸움을 다루었고,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여러 차례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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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한산도 대첩은 얼마나 결정적이었나: 해석과 논쟁

가장 강한 해석은 유성룡에게서 시작된다. 그는 『징비록』에서 한산도 대첩이 수군과 육군을 합쳐 서쪽으로 나아가려던 일본의 계획을 꺾어 고니시를 평양에 고립시켰고, 전라·충청과 서쪽 바닷가를 지켰으며, 요동과 톈진 등 명나라 해안까지 놀라지 않게 해 명군이 육로로 와서 도울 수 있게 했다고 보았다. 현대 한국의 참고서도 이 흐름을 따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싸움이 일본의 수륙병진 계획을 좌절시키고 전세를 조선에 유리하게 돌렸다고 하며, 동북아역사재단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를 인용해 전쟁의 흐름을 뒤집은 결정적 계기라고 평가한다. 영어권에서는 새뮤얼 홀리(2005)가 일본의 전략에 조선 서남해안을 돌아 평양으로 이어지는 해상 보급로가 필요했다고 해석하고, 1592년의 해전이 남해안에서 일본 수군의 작전을 멈추게 했다고 본다. 일본에도 비슷한 견해가 있다. 오가와가 인용한 가사야 가즈히코·구로다 게이이치(2000)는 이순신의 수군이 보급로를 끊어 일본군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고 썼다.

다른 각도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해군사 연구자 이민웅은 일본 수군의 초기 작전 계획이 체계적이었는지 문제를 제기하며, 일본 수군에 처음부터 조선 수군을 제압하고 제해권을 확보할 전체적인 작전 계획이 없었다고 본다. 이는 홀리의 해상 보급로 해석과는 계획의 다른 측면을 다루는 것으로, 서해 바닷길을 쓰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를 그 자체로 보여 주지는 않는다. 오가와 다카아키의 연구 노트(2022)는 서해안 보급 계획 자체를 뒷받침하는 증거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기타지마 만지와 나카노 히토시의 주요 연구, 이형석의 『임진전란사』에 수륙병진책이 나오지 않으며, 히데요시의 군령을 다룬 나카노의 연구에도 함대를 서해안으로 북상시키라는 명령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고니시의 글을 명의 사신 심유경이 40만 명군을 들먹인 것과 같은 허세로 읽고, 이순신을 천거했던 유성룡이 그의 공을 실제보다 높이 평가했을 수 있다고 본다. 오가와는 히데요시가 적어도 전쟁 초기에는 수군에게 나고야와 부산 사이의 수송선 호위 말고는 별다른 임무를 기대하지 않았다는 도쿠토미 소호의 지적도 인용한다. 사료 자체에도 이런 의문과 맞닿는 한계가 있다. 한산도의 와키자카 함대는 이순신 함대를 없애러 나선 전투 부대였지, 평양으로 군량을 실어 가던 수송선단이 아니었다. 일본이 따로 편성한 수군 병력도 크지 않았다.

둘째 질문은 수군의 역할을 다른 요인과 어떻게 견주느냐는 것이다. 고니시는 사실 한산도 대첩보다 3주쯤 앞선 음력 6월 중순에 평양에서 멈추었으므로, 그가 처음 멈춘 까닭을 이 싸움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유성룡의 논리는 그 뒤 그가 왜 더 나아가지 않았느냐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압력도 작용했다. 후방 보급로를 노린 공격, 음력 7월 명군의 첫 평양성 공격(동북아역사재단의 서술로는 17일, 『징비록』으로는 19일)—동북아역사재단은 이를 일본군이 더 이상의 북진을 포기한 요인의 하나로 꼽는다—, 다가오는 겨울, 그리고 가을부터 명의 사신 심유경과 벌인 휴전 교섭이다. 명나라 쪽을 연구한 케네스 스워프(2009)는 전쟁을 뒤집은 것은 무엇보다 1593년 초 평양성 탈환을 비롯한 명군의 지상 개입이었고, 이순신과 의병 중심의 서술이 이를 낮춰 본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산도 대첩을 일본이 바다를 장악하지 못하게 한 중요한 승리로 다룬다. 이 가운데서 한 번의 싸움이 미친 영향만 따로 떼어 내기는 어렵다.

결국 역사가들은 수군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중요했는지, 그리고 일본의 서해안 보급 계획이 사료로 얼마나 확실히 입증되는지를 두고 모두 견해가 갈린다. 여기서 인용한 자료들이 함께 인정하는 것은 그보다 좁다. 한산도 대첩은 1차 침략이 끝날 때까지 거제 서쪽 바다를 조선이 장악하게 했고 전라도의 대부분과 서해안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한편 일본과 부산 사이의 바닷길은 계속 열려 있었고, 북쪽의 일본군은 취약한 육상 연락망과 현지 조달에 기대야 했다. 이 바다를 조선이 장악한 것은 의병, 명군의 개입, 겨울과 함께 1593년 일본군이 북쪽을 포기하게 된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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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사료와 그 한계

가장 자세한 사료는 이순신이 싸움 며칠 뒤 조정에 올린 장계로, 뒤에 다른 장계들과 함께 『임진장초』로 묶였다. 항로와 날짜, 공을 세운 장수들, 그리고 전사자의 이름까지 담겨 있다. 사건에 가장 가까운 기록이지만, 결국 지휘관이 자기 승리를 보고한 글이고, 적선과 벤 머리의 수는 포상을 청하는 근거이기도 했다.

조선 조정의 기록은 다른 방식으로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선조수정실록』은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 뒤 편찬되었고, 일본군 9000명 전사설처럼 전해 들은 이야기도 담고 있다.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유성룡이 전쟁 뒤에 쓴 『징비록』은 귀중한 해석이지만 때로 여러 사건을 한데 섞는다. 예컨대 견내량 싸움을 서술하면서 거북선과 이순신이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은 일을 함께 적는데, 다른 기록들은 이 부상을 5월의 사천 해전 때 일로 적는다.

일본 측 사료로는 히데요시의 명령서와 와키자카 가문의 기록이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가 『고라이부네 센키(高麗船戦記)』로 인용하는 기록은 와키자카의 배 60–70척 가운데 39척이 불탔다고 적는다. 이 기록이 언제 쓰여 어떻게 전해졌는지는 여기서 참고한 자료에 나와 있지 않으므로, 그 숫자는 이순신의 장계와 나란히 놓아 볼 수는 있어도 어느 쪽이 더 믿을 만한지 가리기는 어렵다. 양쪽은 불탄 배, 나포한 배, 도망친 배처럼 서로 다른 것을 세었기 때문에, 꼼꼼히 비교해도 확정된 합계가 아니라 추정치를 얻을 뿐이다.

정확한 싸움터조차 확실하지 않다. 지도와 재구성은 서로 다르다. 영어 위키백과는 한산도 동쪽 바다로 적고, 이 사이트 지도의 표시도 대략적인 위치다. 2019년 주간경향 기사는 통영과 미륵도 사이 바다에 제시되었던 여러 기존 후보지와 함께, 『난중일기』 번역자 박종평의 주장을 소개했다. 그는 18세기 학자 원중거의 일본 관련 저술 『화국지』와 와키자카 측 기록을 근거로, 주된 전투가 한산도 북쪽, 견내량에서 20리쯤 떨어진 바다에서 벌어졌다고 보았다. 이 주장은 옛 거리 단위를 어떻게 환산하느냐에 달려 있어, 아직 문제를 매듭짓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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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싸움터를 고르다
이순신은 일본군에게 유리한 좁고 암초 많은 물길에서 싸우지 않고, 큰 배와 화포를 마음껏 쓸 수 있는 넓은 바다로 적을 끌어냈다.
화포 대 백병전
조선 전선은 멀리서 포를 쏘았고, 일본 수군은 조총과 적선에 뛰어오르는 싸움에 기댔다. 거리를 지킨 쪽이 이겼다.
제해권
한산도 뒤 일본은 바다에서 싸움을 걸지 않았고, 조선은 1차 침략 동안 거제 서쪽 바다를 장악했다.
수륙병진
유성룡 이래 한국의 기록과 홀리는 일본이 육군과 나란히 바닷길로 병력과 물자를 서쪽으로 보내려 했다고 본다. 오가와 다카아키는 그런 서해안 보급 계획을 뒷받침하는 증거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민웅은 이와 별개로 일본 수군의 초기 작전 계획이 체계적이었는지 문제를 제기한다.
전라도를 지키다
수군의 바다 장악은 같은 날의 이치 전투 같은 땅에서의 저항과 함께, 금산 등 일부가 점령되기는 했지만 조선 최대의 곡창이자 수군 근거지인 전라도의 중심 전주와 대부분의 지역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적응
일본은 해안의 진지에서 정박지를 지키는 쪽으로 전술을 바꾸었고, 그 뒤 이순신의 부산·웅천 공격은 배를 부수기는 했지만 일본군 진지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숫자는 누가 세었느냐에 달렸다
함대 규모와 피해, 날짜까지 한국·일본·영어 자료마다 다르다. 숫자는 늘 그 출처와 함께 읽어야 한다.

기록

  1. 1591년 — 이순신이 여수의 전라좌수사가 되어 전선과 화포를 갖추기 시작한다.
  2. 1592년 —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일본군 제1번대가 부산에 상륙하고, 3주쯤 뒤 한양이 함락된다.
  3. 1592년 —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이순신의 첫 승리, 옥포 해전.
  4. 1592년 — 음력 5월 29일(양력 7월 8일): 사천 해전. 거북선이 처음 실전에 투입된 것으로 기록된 싸움이다.
  5. 1592년 — 음력 7월 8일(양력 8월 14일): 한산도 대첩. 같은 날 권율이 전주로 가는 길목인 이치를 지켜 낸다.
  6. 1592년 — 음력 7월 10일(양력 8월 16일): 안골포 해전. 이어 히데요시가 장수들에게 해전을 피하라고 명령한다.
  7. 1592년 — 음력 9월 1일(양력 10월 5일): 이순신이 일본 수군의 본거지 부산포를 공격하지만 포구를 차지하지는 못한다.
  8. 1593년 — 이순신이 한산도로 본영을 옮기고 첫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9. 1597년 —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무너지고 한산도 진영이 버려진다.
  10. 1598년 — 일본군이 철수하는 가운데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다.
  11. 1921년 — 영국 제독 조지 발라드가 일본 해양사 책에서 이순신을 칭송하며, 각색된 한산도 이야기를 영어권에 퍼뜨린다.
  12. 2022년 —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 개봉한다.

용어 풀이

한산도
남해안 통영 앞바다의 작은 섬. 그 앞바다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뒤에 이순신이 본영을 두었다.
견내량
거제도와 육지 사이의 좁은 물길. 싸움 전에 일본 함대가 이곳에 정박했다.
판옥선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 크고 선체가 높으며 화포를 많이 실었다.
거북선
갑판을 덮개로 덮고 사방에 화포를 단 조선의 전선. 몇 척만 만들어졌고 정확한 구조는 논쟁 중이다.
학익진(鶴翼陣)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휘게 늘어선 진형. 적을 감싸며 포화를 한곳에 모은다.
총통
조선의 화포. 천자·지자·현자 등 크기별로 나뉘며 큰 화살과 탄환을 쏘았다.
수륙병진(水陸竝進)
‘수군과 육군이 나란히 나아간다’는 뜻. 한산도 대첩이 좌절시켰다고 하는 일본의 전략을 한국 학계가 부르는 말이다.
『임진장초』
1592–1594년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를 모은 책. 그의 해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료다.
삼도수군통제사
전라·경상·충청 세 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자리. 1593년 이순신이 처음 맡았다.
음력(태음태양력)
조선이 쓴 달력. 달의 차고 기욺에 따라 달을 나누되, 이따금 윤달을 넣어 해의 움직임과 맞춘다. 양력으로 바꿔야 하며, 자료에 따라 날짜가 하루씩 다르기도 하다.

묻고 답하기

이순신은 왜 좁은 물길 안에서 싸우지 않았어요?

견내량은 좁고 바위가 많아 큰 배가 돌기 어려웠고, 일본군이 뭍으로 도망칠 수도 있었어요. 한산도 앞 넓은 바다에서는 모든 배와 대포를 쓸 수 있었어요.

거북선이 싸움을 이겼나요?

도움은 되었지만 싸움에 나선 거북선은 2–3척뿐이었어요. 대부분은 평범한 판옥선들이 대포를 쏘아 해냈어요.

일본은 배를 몇 척이나 잃었나요?

조선 측 기록으로는 한산도에서 73척 가운데 59척이 부서지거나 붙잡혔고, 이순신은 이틀 뒤 안골포의 40여 척도 거의 다 부수었다고 적었어요. 홀리는 두 싸움을 합쳐 100척쯤으로 봐요. 일본 가문의 기록이나 영어 위키백과의 안골포 해전 문서 같은 다른 자료는 일본의 피해를 더 적게 적어요.

한산도 대첩으로 일본군의 보급이 완전히 끊겼나요?

아니에요. 일본에서 부산으로 건너오는 길은 계속 열려 있었고, 물자는 육로로도 움직였어요. 한산도 대첩은 남서해안을 돌아가는 바닷길을 막고 서해를 조선 쪽에 남겨 두었어요.

일본군이 평양에서 멈춘 것은 한산도 때문인가요?

기껏해야 이유의 일부예요. 고니시는 한산도 대첩보다 3주쯤 앞서 이미 평양에서 멈춰 있었어요. 유성룡은 그가 끝내 더 나아가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한산도라고 보았지만, 의병의 공격, 명군의 위협, 겨울, 휴전 교섭도 함께 작용했고, 평양으로 가는 바닷길 보급이 확고하게 계획된 적이 있었는지 의심하는 학자도 있어요.

왜 어떤 책은 8월 15일, 이 글은 8월 14일이라고 해요?

싸움은 음력 7월 8일로 기록되어 있어요. 이를 한국천문연구원의 변환표로 바꾸면 1592년 8월 14일이에요. 여러 자료가 8월 15일이라고 하는데, 하루 차이가 왜 생겼는지는 여기서 참고한 자료로는 분명하지 않아요. 일본 기록은 자기 나라 달력으로 7월 7일이라고 적어요.

한산도로 달아난 일본군은 어떻게 되었어요?

이순신의 장계로는 400명쯤(장계 영역본의 주석이 인용한 일본 기록으로는 200명쯤)이 섬에 갇혔어요. 원균이 남아 이들을 처리하기로 했지만, 홀리의 서술에 따르면 일본 함대가 온다는 잘못된 보고를 듣고 물러났고, 일본군은 부서진 배 조각으로 만든 뗏목을 타고 거제도로 건너갔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조성도,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장희, 임진왜란(壬辰倭亂).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순신(李舜臣).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4.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9번째 기사 「이순신이 왜병을 고성 견내량에서 격파하다」.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5. 유성룡(柳成龍), 『징비록(懲毖錄)』 권1(한문 원문). 위키문헌(중국어판)
  6. 이순신 지음, 하태흥(Ha Tae-hung) 옮김, Imjin Changch’o: Admiral Yi Sun-sin’s Memorials to Court(『임진장초』 영역본). 연세대학교출판부(인터넷 아카이브 사본), 1981
  7. 「제1차 침략」, 『동아시아의 역사』 제4장. 동북아역사재단(동북아역사넷)
  8. Battle of Hansan Island. 위키백과(영어)
  9. 閑山島海戦. 위키백과(일본어)
  10. Battle of Angolpo. 위키백과(영어)
  11. Imjin War. 위키백과(영어)
  12. Battle of Ichi. 위키백과(영어)
  13. 새뮤얼 홀리(Samuel Hawley), The Imjin War: Japan’s Sixteenth-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quer China.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동아시아연구소, 2005
  14. 케네스 스워프(Kenneth M. Swope), A Dragon’s Head and a Serpent’s Tail: Ming China and the First Great East Asian War, 1592–1598. 오클라호마대학교 출판부, 2009
  15. 오가와 다카아키(小川隆章), 李舜臣と文禄・慶長の役の海戦に関する考察(이순신과 분로쿠·게이초의 역 해전에 관한 고찰), 연구 노트. 環太平洋大学研究紀要(환태평양대학 연구기요) 20호, 83–88쪽, 2022
  16. James B. Lewis (ed.), The East Asian War, 1592–1598: International Relations, Violence and Memory (이민웅, “The role of the Chosŏn navy and major naval battles during the Imjin Waeran”, 120–140쪽 수록). Routledge, 2015
  17. 조지 발라드(G. A. Ballard),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John Murray, 런던(인터넷 아카이브), 1921
  18.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 멸망사). Doubleday, Page & Company, 뉴욕(인터넷 아카이브), 1906
  19. 윤호우, 한산대첩 ‘정확한 위치’ 찾았다. 주간경향, 2019
  20. 음양력 변환 계산. 한국천문연구원
  21. Wanli Emperor(만력제). 위키백과(영어)
  22. Nurhaci(누르하치). 위키백과(영어)
  23. Hong Taiji(홍타이지). 위키백과(영어)
  24. Journey to the West(서유기). 위키백과(영어)
  25. Galileo Galilei(갈릴레오 갈릴레이). 위키백과(영어)
  26. Michel de Montaigne(미셸 드 몽테뉴). 위키백과(영어)
  27. Greene’s Groats-Worth of Wit(그린의 『서푼짜리 지혜』). 위키백과(영어)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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