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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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1597년, 일본이 조선에 두 번째로 쳐들어왔어요. 그해 말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물러나 바닷가에 일본식 성을 튼튼하게 쌓았어요. 그중 가장 동쪽에 있던 성이 울산의 작은 산 위에 있었어요.
중국의 명나라는 조선을 도우려고 큰 군대를 보냈어요. 한겨울에 명나라 군사와 조선 군사가 함께 울산으로 갔어요. 일본의 이름난 장수 가토 기요마사를 새 성이 다 지어지기 전에 붙잡으려는 것이었어요.
연합군은 성 밖의 진영을 불태우고 바깥 울타리를 뚫었지만, 산꼭대기의 돌성벽은 너무 튼튼했어요. 성 안의 일본군은 먹을 것이 거의 없고 마실 물도 모자랐으며, 날씨는 몹시 추웠어요. 연합군도 얼어붙는 비를 맞으며 고생했고, 성벽에 다가가다 총에 맞은 군사가 많았어요.
포위가 이어지는 동안 일본의 구원군이 땅과 바다로 모여들었어요. 열이틀쯤 지나 명나라와 조선 군대는 포위를 풀고 물러났는데, 물러나는 길에 많은 군사가 죽었어요. 명나라 장수 양호는 황제에게 거의 이긴 싸움이었다고 보고했지만, 나중에 피해를 숨겼다는 고발을 받고 자리에서 물러났어요.
1598년 가을, 연합군은 울산을 다시 공격했지만 또 실패했어요. 그해 12월, 일본군은 결국 일본으로 돌아갔어요. 우두머리 히데요시가 9월에 이미 죽었고, 뒤를 이은 지도부가 철수를 명령했기 때문이에요. 지금 그 산은 울산 시내의 공원이 되었고, 옛 돌성벽 일부를 아직 볼 수 있어요.
한눈에 보기
- 날짜
- 제1차: 성 밖의 첫 전투는 1597년(선조 30) 음력 12월 22일 또는 23일(양력 1598년 1월 28일 또는 29일,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표 기준), 포위 해제는 1598년 음력 1월 4일(양력 2월 9일). 제2차: 1598년 음력 9월 하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투 시작을 22일, 곧 양력 10월 21일로 잡는다)부터 마귀의 보병이 물러난 음력 10월 4일(양력 11월 2일)까지
- 장소
- 울산왜성. 연합군은 도산(島山)이라 불렀다. 태화강 어귀의 높이 약 50m 산 위, 지금의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 서생포왜성의 북쪽
- 전쟁
- 임진왜란(1592–1598)의 두 번째 침략, 곧 정유재란(1597–1598)
- 지휘관
- 명: 경리 양호(조선 군무를 맡은 문관), 제독 마귀, 그 밖에 이여매·고책·이방춘 등 / 조선: 도원수 권율 / 일본: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오타 가즈요시와 모리 가문 군대. 구원군은 모리 히데모토, 구로다 나가마사, 하치스카 이에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
- 병력
- 명: 『명사』에 따르면 세 협(協)으로 나눈 약 4만 / 조선: 처음에 도착한 군사가 3,500명뿐이라는 양호·마귀의 말부터 일본 참모본부 전사의 12,500명까지 다양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권율의 군사를 5만여 명으로 적는다 / 일본: 명 장교와 일본 측 기록 『기요마사 고려진 비망록(清正高麗陣覚書)』은 성 안에 약 1만, 포로들은 양호에게 3천 명이 안 된다고 말했다
- 피해
- 명: 포위 중 사망 약 700명, 부상 3천여 명(이덕형의 보고). 철수 때의 큰 피해는 집계되지 않았다(“혹 3천이라고도 하고 혹 4천이라고도 한다”). 훗날의 『명사』는 거의 2만이라고 한다 / 조선·일본: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믿을 만한 집계가 없다
- 결과
- 일본군의 방어 성공. 연합군은 경주로, 양호는 한양으로 물러났다. 양호는 1598년 피해를 숨겼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제2차 공격도 실패했고, 가토는 1598년 음력 11월 18일(양력 12월 15일) 성을 불태우고 떠났다
- 주요 사료
- 『선조실록』(이덕형·권율·이시언 등의 장계, 양호의 제본), 『선조수정실록』, 유성룡의 『징비록』, 『명사』, 일본 참고서가 요약한 일본 측 가문 기록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쉬움
울산성 전투란 무엇인가
울산성 전투는 임진왜란의 마지막 국면인 일본의 두 번째 침략(정유재란, 1597–1598) 때, 조·명 연합군이 남해안의 일본 성을 처음으로 크게 공격한 싸움이다. 조선 기록은 성 밖의 첫 전투를 1597년 음력 12월 22일 또는 23일로, 포위가 끝난 날을 1598년 음력 1월 4일로 적는다. 한국천문연구원(KASI)의 음양력 변환표로 바꾸면 1598년 1월 28일 또는 29일부터 2월 9일까지이다.
공격 목표는 일본군이 가토 기요마사의 설계에 따라 울산의 산 위에 쌓고 있던 일본식 성, 곧 왜성이었다. 이 성은 일본군 전선의 동쪽 끝에 있었다. 경리 양호와 제독 마귀가 이끈 명군은 도원수 권율의 조선군과 함께 성이 완공되기 전에 공격했다. 연합군은 일본군을 진영에서 몰아내고 바깥 토성을 빼앗아, 수비군을 산꼭대기의 돌성 안에 가두었다.
그러나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수비군은 식량과 물이 모자랐고 양쪽 모두 겨울비와 추위에 시달렸지만, 높은 돌성벽을 공격한 연합군의 피해가 컸다. 일본 구원군이 육지와 바다로 모여들자 양호와 마귀는 포위를 풀었다. 물러나던 군대는 공격을 받았고, 양호는 뒤에 이 싸움을 황제에게 거의 성공한 싸움으로 보고했다. 그는 1598년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98년 가을, 마귀는 연합군의 네 갈래 동시 공격 가운데 하나로 울산을 다시 공격했다. 이 공격도 실패했고, 가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할 때에야 울산을 떠났다. 아래에서는 성의 모습, 전투의 경과, 전투에 관한 보고, 그리고 숫자에 관해 사료가 말하는 것을 차례로 살펴본다.
쉬움
40일 남짓 만에 쌓은 성
1597년 가을 일본군의 북진이 멈추자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물러났다. 그들은 1593년에 쌓은 성들을 그대로 쓰면서 그 바깥에 새 성들을 쌓기 시작했는데, 한국과 일본의 참고서는 동쪽의 울산부터 서쪽의 순천까지 여덟 곳을 든다. 울산은 그중 가장 동쪽으로, 바닷가에 있는 가토 기요마사의 거점 서생포의 북쪽에 있었다. 명나라 장수들은 가토를 일본 장수 가운데 가장 강하다고 보았고, 양호는 황제에게 그를 먼저 쳐야 한다고 썼다.
성터는 울산만 가장 안쪽의 외따로 솟은 낮은 산으로, 남쪽으로 태화강 어귀가 흘렀다. 1597년에는 물이 산 아래까지 닿아 배를 성 바로 밑에 댈 수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가토가 설계하고 아사노 요시나가가 음력 10월 12일부터 1만 6천 명을 동원해 40여 일 만에 쌓았으며, 공사 감독은 오타 가즈요시가 맡았다고 한다. 일본 측 서술은 공사 시작을 음력 11월 중순으로 적고 모리 히데모토의 군대도 공사에 참여했다고 하며, 양호의 제본은 이 성을 지난해 섣달(음력 12월)에 쌓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사를 언제 시작했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성돌은 울산읍성과 근처 병영성의 성벽을 헐어 마련했으며, 발굴에서는 1585년에 세운 조선 수군 절도사의 선정비가 문지돌로 쓰인 것이 확인되었다.
완성된 성은 산꼭대기의 본환(혼마루)과 그 북쪽·서북쪽 아래의 두 곽으로 이루어졌고, 망루 12개와 일본식으로 비스듬히 쌓은 돌성벽을 갖추었다. 바다 쪽을 뺀 세 면에는 목책과 해자를 두른 긴 토성이 있었고, 남쪽에는 배를 대는 곳이 있었다. 한 명나라 장교는 조선 조정에 이 성을 네 겹이라고 설명했다. 바깥의 낮은 토성은 깨뜨릴 수 있었지만, 안쪽 세 겹은 돌로 쌓았고 성벽 위에 건물을 잇대어 지어서 수비군이 아래로 총을 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공사는 거의 끝나 가고 있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성 안에는 식량이 비축되지 않았고, 산에는 우물이 없었다. 일본 측 서술에 따르면 모리 가문 군대는 이미 철수를 시작했고, 가토 자신도 서생포에 가 있었다.
쉬움
바깥 방어선은 무너지고 본성은 버티다: 1598년 1월
양호와 마귀는 음력 12월 한양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권율의 조선군과 함께 경주에 모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들은 서쪽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돕지 못하도록 순천 쪽을 칠 것처럼 군사를 움직였다. 명군은 세 협으로 나뉘었고, 조선 장수로는 성윤문·이시언·정기룡 등이 참여했으며, 경상좌수사 이운룡은 바다에서 서생포 쪽을 견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연합군은 23일 새벽 경주에서 세 길로 나뉘어 출발했다. 권율과 이덕형 등의 장계에 따르면, 이여매가 이끄는 좌협의 선봉이 새벽에 일본군 진영에 이르러 패한 척 물러나며 적을 끌어낸 뒤 반격해 500여 급을 베었다. 다른 기록은 이 첫 전투를 22일로 적는다. 성 밖의 일본군 진영은 불탔고 살아남은 군사는 산 위로 달아났다. 서생포에 있던 가토는 그날 밤 적은 군사를 데리고 돌아왔는데, 조선 기록은 말을 타고 왔다고 하고 일본 측 서술은 배로 왔다고 한다.
이튿날 연합군은 바깥 보루와 외성을 공격했다. 명군이 쳐들어가 건물과 강가의 일본 배 2척을 불태우자 수비군은 돌성 안으로 물러났다. 명군 10명이 성 위로 올라갔으나 돌아오지 못했다. 『선조수정실록』과 『징비록』은 명군이 바깥 목책을 빼앗은 뒤 노획에 정신이 팔려 곧바로 진격하지 않았고, 그사이 수비군이 성문을 닫았다고 덧붙인다. 그 뒤로는 모든 공격이 실패했다. 성벽은 가파른 산 위에 있었고, 수비군은 성벽의 구멍으로 총을 쏘았다. 한 조선 관원이 뒤에 임금에게 아뢴 바에 따르면, 성이 너무 높아서 명군의 대포는 성을 넘어가 버렸다.
연합군은 산을 에워싸고 굶주림과 목마름이 수비군을 무너뜨리기를 기다렸다. 불을 질러 성을 깨뜨리려고도 했다. 군사들이 섶 다발과 방패를 지고 성벽 밑까지 가서 쌓으려 한 것이다. 이시언과 성윤문은 27일(양력 2월 2일)의 두 번째 큰 공격을 보고하면서, 섶을 지고 화공에 나섰던 경주·울산 등지의 군사가 거의 다 전사했고, 안동 등 예닐곱 고을 백성은 군량 운송 부역으로 힘이 다했다고 적었다.
중급
굶주림, 목마름, 그리고 추위
성은 물자를 채우기 전에 포위되었다. 한 명나라 장교는 성 안에 식량이 적고 물이 다 떨어졌다고 조선 조정에 전했다. 29일에 연합군 진영을 찾아간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도산에는 물이 없어 일본군이 밤마다 성 밖으로 나왔다고 썼다. 양호의 명으로 김응서가 성 밖의 샘 옆에 군사를 숨겨 두었더니, 며칠 밤 사이에 백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모두 굶주려 여위고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고 한다.
포로들은 양호에게 성을 지키는 군사가 3천 명도 안 되고, 대포와 화살에 맞아 죽거나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쳐 죽은 자의 시체가 널려 있으며, 조총수 200명이 하루에 한 사람당 생쌀 한 홉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수비군이 군마의 피와 오줌을 마시고 종이와 흙벽까지 끓여 먹었다고 덧붙이며, 일본어 위키백과도 이 백과사전을 인용해 같은 내용을 적는다. 이런 이야기는 뒤에 엮인 기록과 전언에서 나온 것이라 모두 확인할 수는 없다. 여러 기록이 심각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전하지만, 그 정도와 개별 이야기의 사실성은 확정하기 어렵다.
가토 자신에 관한 이야기도 1598년 음력 3월 조선 조정에 전해졌다. 서생포에 포로로 잡혀 있던 조선 수군 한 사람은, 가토가 50명을 데리고 성에 들어가다 20명을 길에서 잃었고, 형세가 급해지자 두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부하들에게 제지당했다고 말했다. 이는 전해 들은 이야기이며 이 글이 참고한 일본 측 서술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일본 측 자료를 인용해 가토가 약 500명을 데리고 들어갔다고 적는다.
포위한 쪽도 고통을 겪었다. 『선조수정실록』은 큰비가 내린 뒤 혹독한 추위가 닥쳐 군사들이 지치고 동상에 걸렸으며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고 적는다. 『징비록』은 겨울비 속에 군사들의 손발이 얼어 터졌다고 했고, 유성룡은 동풍이 불며 비가 오는데 군사들이 들판에서 노숙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연합군은 싸움을 빨리 끝낼 줄 알았기에 긴 포위에 대비하지 못했다. 한 조선 관원은 뒤에, 처음 돌격할 때 명군이 장비를 대부분 버리고 달려가는 바람에 막상 공성 기구가 필요할 때 없었다고 말했다.
중급
땅과 바다로 온 구원군, 그리고 값비싼 철수
성이 버티는 동안 다른 일본 장수들이 서생포로 모여들었다. 일본 측 서술에 따르면 야마구치 무네나가(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대신해), 구로다 나가마사, 모리 히데모토, 하치스카 이에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 가토 요시아키가 잇따라 도착했고, 조소카베 모토치카 등의 수군이 바다로 왔다. 조선 측 보고는 이미 태화강 하류에 일본 배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고 적었고, 양호는 절강 보병 2천 명과 기병 1천 명을 강가에 두어 상륙을 막게 했다.
교섭도 있었다. 양호의 제본과 조선 측 보고에 따르면, 가토는 통사를 통해 항복하겠다고 하거나, 전에 고니시를 보내 준 것처럼 자기를 보내 주면 철수하겠다고 했으며 양호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 측 서술은 연합군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요구했고 가토가 교섭을 이용해 시간을 벌었다고 한다. 사료가 함께 말하는 것은 글이 오갔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음력 1월 2일(양력 2월 7일), 일본군이 성을 마주 보는 먼 봉우리에 깃발을 많이 세우고 나타났고, 3일에는 내려와 작은 싸움을 벌였다. 그날 밤 연합군은 횃불을 들고 사방에서 마지막 공격을 했는데, 자정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이어졌다. 이시언과 성윤문에 따르면 적의 탄환이 비 오듯 쏟아져 사상자가 매우 많았고, 성에 다가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4일(양력 2월 9일), 양호와 마귀는 철수를 결정했다. 보병을 먼저 내보내고 기병이 뒤를 막았으며, 남은 군량과 화약은 불태웠다. 그런데 전탄(箭灘) 여울을 지키던 절강 군사는 철수 사실을 알지 못하다가 산에서 내려온 일본군에게 당했다. 보병 가운데 살아 돌아온 사람이 많지 않았고, 갑옷을 버리고 몸만 빠져나온 사람도 많았다. 이여매의 접반사 이덕열은 일본군이 30리 밖까지 추격했으며, 명군 전사자가 “혹 3천이라고도 하고 혹 4천이라고도 한다”고 보고했다. 그는 북쪽으로 물러가던 군사들이 마을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했으며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는 사실도 함께 적었다. 양호는 한양으로 돌아가고 마귀와 권율이 남아 경주를 지켰다.
중급
보고서 속의 승리: 양호의 보고와 탄핵
한양에 처음 전해진 소식은 승전보였다. 사자들은 수백 급을 베었고 가토가 “토굴” 속에 갇혔다고 전했으며, 선조는 명나라 장수들에게 승리를 감사했다. 그러나 양호의 접반사 이덕형은, 양호가 성을 함락하기 전에는 벤 머리를 세지 못하게 하고 아군의 사상자 수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 보고했다.
철수한 뒤 양호는 황제에게 올린 제본에서 이 싸움을 거의 성공한 싸움으로 그렸다. 군사들이 40여 리에 걸쳐 적진을 쳐부숴 불타 죽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셀 수 없고, 사로잡거나 벤 자가 1,300여 명이며, 가토를 거의 사로잡게 되었을 때 수만의 구원군이 들이닥쳐 지친 군사를 살리려 물러났다는 것이다. 황제의 답은 그의 용맹과 많은 참획을 칭찬하면서도, 왜 난을 평정할 계획 대신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렸느냐고 물었다. 조선 측 보고는 덜 너그러웠다. 이덕형이 집계한 명군 피해는 포위 중 사망 약 700명, 부상 3천여 명이었고, 여기에는 철수 때 전탄에서 잃은 군사가 들어 있지 않았다.
1598년, 조선에 와 있던 명 병부 주사 정응태가 양호를 탄핵했다. 청대에 편찬된 『명사』는 군적에 사망자가 거의 2만으로 올라왔는데 양호가 이를 감추고 백여 명이라고만 보고했으며, 정응태가 죄 28가지를 늘어놓았다고 적는다. 선조는 참수할 만한 죄가 29가지라고 했다고 말했다. 한양에 전해진 다른 혐의로는 양호가 가토와 강화했다는 것, 조선을 움직여 성을 쌓게 했다는 것 등이 있었다. 양호는 파직되고 만세덕이 뒤를 이었으며, 파직 소식은 음력 6월 23일(양력 1598년 7월 25일)에는 이미 한양에 와 있었다.
조선 조정은 양호를 변호했다. 신하들은 명군의 남병과 북병이 공을 두고 다툰 것이 원인이라고 보았고, 선조는 최천건, 이어 이원익을 북경에 보내 양호를 변호하는 주문을 올리게 했다. 『징비록』은 양호가 떠날 때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배웅했다고 적는다. 그러자 정응태는 조선 국왕이 일본과 내통했다고 무고했고, 조선 조정은 이 혐의에도 대응해야 했다. 양호는 뒤에 다시 기용되어 1619년 사르후에서 누르하치의 여진군에게 크게 패한 명군을 지휘했고, 1629년에 처형되었다.
중급
제2차 울산성 전투: 1598년 10~11월
1598년 가을, 명의 총독 형개는 더 큰 계획으로 다시 공격에 나섰다. 네 갈래 동시 공격이다. 마귀는 동쪽의 울산을, 동일원은 가운데의 사천을, 유정은 서쪽의 순천을 맡았고, 수군 도독 진린은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함께 바다에서 공격했다.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8년 9월 18일에 이미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마귀는 명군 약 2만 4천 명을, 김응서는 조선군 5,500명을 이끌고 음력 9월 21일(양력 10월 20일) 경주를 떠났고, 성에 대한 공격은 22일(양력 10월 21일)에 시작되었다. 일본어 위키백과가 요약한 한 조선 측 보고는 성에 대한 공격이 20일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김응서는 먼저 동래 쪽의 일본군을 쳐서 울산과 부산 사이의 길을 끊었고, 명군은 온정(온천)의 일본군을 소탕해 포로가 되었던 조선 사람 1천여 명을 데리고 나왔다. 마귀의 차관은 마귀가 강 건너편에 쌓인 일본군 군량을 모두 불태웠고, 조선 사람 1,100여 명이 넘어왔다고 보고했는데, 여기에는 앞의 포로들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가토가 준비되어 있었다. 같은 차관은 일본군이 해자를 파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사람이 건널 수 없게 했으므로 함락하기 어려울 듯하다고 전했다. 일본 측 서술에 따르면 가토는 군사를 성 안에 두고 유인에 응하지 않았다. 22일 밤에는 일본군의 기습으로 명군 5명이 죽었다. 곧 마귀의 접반사 이광정은 제독이 내성에서 물러난 뒤 겁을 먹고 경주로 물러나려 한다고 보고했다.
음력 10월 1일(양력 10월 30일) 동일원이 사천에서 크게 졌다는 소식이 결정타였다. 4일(양력 11월 2일)에 마귀의 보병은 군수품과 무기를 모두 거두어 철수했고, 경주에는 기병만 남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울산의 전투를 음력 9월 22~25일로 잡지만, 조선 측 보고를 보면 군대는 음력 10월 초까지 성 근처에 머물렀다. 가토는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할 때 음력 11월 18일(양력 1598년 12월 15일) 성을 불태우고 떠났고, 마귀의 군사가 성에 들어갔다.
중급
같은 해 세계에서는(1598)
포위가 시작되기 열흘 남짓 전인 1598년 1월 17일, 러시아의 차르 표도르 1세가 후계자 없이 죽었다. 이로써 이반 4세로 이어진 류리크 왕조의 차르 왕통이 끊겼고, 처남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가 되었으며, 러시아는 ‘동란 시대’라 불리는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프랑스에서는 앙리 4세가 1598년 4월 낭트 칙령에 서명해 개신교도인 위그노에게 폭넓은 권리를 주었고, 이로써 프랑스 종교 전쟁이 끝나 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5월에는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베르뱅에서 강화를 맺었고, 9월에는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가 71세로 죽었다.
이 사건들은 울산과 아무 관계가 없다. 나란히 놓아 보면, 조선에서 전쟁의 마지막 해였던 1598년이 다른 곳에서도 무언가가 끝나고 정리되는 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중급
오늘의 울산왜성: 학성공원
전쟁 뒤 불탄 성터가 곧바로 버려진 것은 아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한동안 조선 수군의 주둔지로 쓰였고, 1624년부터는 전함을 만드는 전선창이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전선창이 1654년에 개운포로 옮겨졌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이 산을 학성(鶴城)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 이름이 뒤에 성 자체의 이름처럼 쓰였다.
1913년 지역 유지 김홍조가 산을 사들여 공원을 만들려고 곰솔과 벚나무,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공원은 뒤에 울산 지역 행정 기관에 넘겨졌다. 이것이 지금 울산의 대표적인 공원인 학성공원이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공원을 꾸미면서 낸 길과 화단, 편의시설 때문에 서북쪽 성벽과 아래쪽 곽들이 대부분 훼손되었다고 지적한다.
성의 문화유산 지정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던 이 성은 1963년 ‘울산학성’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사적 제9호가 되었으나, 1997년 다른 왜성들과 함께 국가 지정에서 해제되었고, 같은 해 10월 30일 ‘울산왜성’이라는 이름으로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현재 종목명 문화유산자료)가 되었다. 1986년, 2011년, 2015년의 발굴에서는 곽의 배치와 평지의 성벽 일부, 동문 터 등이 확인되었다.
지금도 산꼭대기 본환의 돌성벽은 볼 수 있지만, 배를 대던 강가는 주택가가 되었고 강어귀는 훨씬 동쪽으로 옮겨 갔다. 가토 기요마사가 뒤에 성을 쌓은 일본 구마모토에는 ‘울산마치(蔚山町)’라는 노면전차 정류장이 있는데, 울산 또는 그곳에서 데려온 사람들에서 이름이 나왔다고 전한다.
심화
병력과 사상자 세기: 사료가 말하는 것
연합군의 규모는 흔히 4만~6만으로 이야기된다. 『명사』는 명군 4만을 세 협으로 나누었다고 하고, 일본 참모본부의 전사와 이를 따른 일본어 위키백과는 조선군 12,500명을 포함한 약 56,900명을 든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명군 4만과 조선군 11,500명, 영어 위키백과는 5만이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명군 4만 4천과 권율의 군사 5만여 명이라고 적는데, 다른 자료보다 훨씬 큰 숫자이다. 포위를 시작할 무렵 양호와 마귀는 조선군 가운데 실제로 도착한 수가 3,500명뿐이라고 말했다.
수비군의 숫자는 더 크게 엇갈린다. 한 명나라 장교는 조선 조정에 성 안에 일본군 1만 명이 있다고 했고, 일본어 위키백과가 인용한 일본 측 기록 『기요마사 고려진 비망록』도 1만이라고 한다. 이덕형과 권율은 2천 명 정도인 듯하다고 보았고, 포로들은 양호에게 3천 명이 안 된다고 했다. 뒤의 일본 문헌은 2만 또는 2만 3천이라고 하는데, 일본어 위키백과는 너무 많다고 본다. 낙오병과 인부들이 성 안으로 밀려 들어가면서 성 안의 인원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포위 중 연합군의 피해는 비교적 잘 기록되어 있다. 음력 1월 6일에 작성한 이덕형의 보고는 명군 사망 약 700명, 부상 3천여 명이며, 철수 때의 피해는 아직 조사하지 못했다고 했다. 한 접반사는 철수 때 명군 전사자가 3천 또는 4천이라는 소문을 전했다. 영어 위키백과는 명나라 쪽 자료에 따라 사망 1,621명, 부상 2,908명이라고 적는다. 이와 달리 훨씬 큰 숫자도 있다. 『명사』의 “거의 2만”, 그리고 아사노 가문 문서가 성 주변에서 셌다는 시신 10,386구이다. 조선 장수들이 경주·울산 군사의 피해가 매우 컸다고 한 조선군의 손실은, 이 글이 참고한 자료에서 합계를 찾을 수 없다.
일본군의 피해는 불확실하다. 연합군의 보고는 첫날 500여 급, 이튿날 800여 급, 양호에 따르면 사로잡거나 벤 자가 모두 1,300여 명, 이여매의 좌협이 벤 것이 690여 급이라고 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661급이라고 적는다. 이는 공을 다투는 가운데 나온 주장이라 확인할 수 없다. 성 안에서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로 죽은 일본군의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심화
사료와 그 한계
우리가 아는 내용의 대부분은 『선조실록』에 실린 조선 측 보고에서 나온다. 권율의 장계, 명나라 장수에게 딸린 접반사들(양호의 이덕형, 마귀의 장운익, 이여매의 이덕열)의 치계, 각 도 장수들의 보고, 그리고 조정에서 문답한 명나라 사자들의 말이다. 이들은 며칠이나 몇 주 안에 쓰였지만 저마다 싸움터의 일부만 보았고, 실록 기사의 날짜는 기록이나 조정의 보고·논의 시점으로, 서술된 사건이 일어난 날짜와 반드시 같지는 않다. 양호가 황제에게 올린 제본도 같은 실록에 남아 있다. 포위 현장을 찾았던 유성룡은 『징비록』에 짧은 기록을 남겼다.
청나라 때 편찬된 『명사』는 양호를 매우 비판적으로 서술하므로, 당시 조선 측 보고와 대조해서 읽어야 한다. 양호가 가까운 이여매에게 공을 돌리려고 진인의 성공적인 공격을 멈추게 했다는 이야기나 사망자 2만이라는 숫자는 그런 보고에서 찾을 수 없다. 양호를 존경한 조선 관원들은 명군 파벌 사이의 다툼을 탓했고, 누가 가장 잘 싸웠는지에 대해서도 다르게 설명했다. 이덕형은 첫날 승리 뒤에 양호가 징을 울려 물러나게 한 일로 군사들이 그를 탓한다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일본 측 사료로는 가문 기록과 뒷날의 군기물이 있으며, 일본 참고서들이 이를 요약하고 있다. 그중 일부는 매우 믿기 어렵다. 한 뒷날의 기록은 연합군이 80만 기였다고 하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울산에 있었다고 하지만, 그는 울산에 오지 않았다. 성 안의 장수 가운데 한 사람인 오타 가즈요시를 섬긴 의승(醫僧) 게이넨은 1597~1598년 종군 일기 『조선일일기(朝鮮日々記)』를 남겼다. 일본어 위키백과가 지나가듯 언급하지만, 이 글은 그 일기의 울산 관련 대목을 확인하지 않았으므로 근거로 삼지 않았다.
날짜도 조심해야 한다. 조선·명·일본은 모두 음력을 썼지만 늘 같은 역법은 아니었다. 조선 기록은 첫 전투를 음력 12월 22일 또는 23일로 적는다. 일본 측 서술은 22일로 적는데, 일본어 위키백과는 이를 1598년 1월 29일로 바꾸어 조선의 23일과 같은 날이 된다. 이 글은 조선의 날짜를 한국천문연구원 변환표로 바꾸어 쓴다. 영어 위키백과의 종료일 2월 19일은 조선 기록의 음력 1월 4일, 곧 2월 9일과 맞지 않는다.
심화
왜성 전투와 바다: 두 차례 전투가 보여 주는 것
울산은 남해안의 왜성을 힘으로 함락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보여 준다. 가파른 산 위에 여러 겹의 곽과 비스듬한 돌성벽, 그리고 조총수가 아래로 쏠 수 있는 건물을 갖춘 왜성은, 조총수를 많이 가진 일본군이 지키기에 알맞았다. 조선 측 관찰자들은 연합군의 대포가 높은 성을 맞히지 못했고, 섶을 진 군사들이 성벽에 닿기도 전에 쓰러졌으며, 처음 성벽에 오른 군사들은 돌아오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성은 버텼다.
동시에 이런 성의 약점도 보여 준다. 울산왜성에는 우물이 없었고 식량도 비축되지 않아, 며칠 만에 수비군은 굶주리고 물을 찾아 헤맸다. 한국어 위키백과의 울산왜성 문서는 가토가 이 경험을 기억해 뒤에 구마모토성에 우물을 많이 팠다고 하지만,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그 연결을 직접 확인할 수 없다. 1598년 가을에는 성이 완성되고 바닷물을 끌어들인 해자가 생기고 수비군이 준비를 갖추자, 연합군은 성을 어찌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울산은 바다에 기대고 있었다. 성 아래에는 배를 댈 수 있었다. 포위 중에도 서생포의 일본 배가 날마다 물길로 왔고, 명 측 보고는 이를 막아 돌려보냈다고 하지만, 일본 배들은 결국 강에 모여들었고 구원군은 육지와 바다로 함께 왔다. 연합군은 육지에서 산을 에워쌀 수는 있었지만 일본 배가 성에 다가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조선 수군은 1597년 칠천량에서 거의 전멸했었다. 결국 일본이 철수를 결정했을 때 울산·사천·순천의 성은 모두 일본군 손에 있었고, 전쟁의 마지막 큰 싸움은 바다, 곧 노량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일본 안에서도 파장을 낳았다. 일본 측 서술에 따르면, 울산 전투에 놀란 장수 13명이 울산·순천·양산을 포기하자고 히데요시에게 건의했으나 그는 이를 물리쳤다. 감찰관들은 하치스카 이에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가 구원 작전 중 한 전초전에서 싸우지 않았다고 보고했고, 두 사람은 견책을 받아 영지에 근신하게 되었다. 이 처분은 히데요시가 죽은 뒤 1599년에 철회되었다. 일본어 위키백과가 소개하는 한 해석은, 이때 가토 같은 장수들이 감찰관 한 사람의 인척인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품은 반감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로 이어진 분열과 연결한다.
핵심 개념
- 왜성
- 1593년과 1597년 조선 남해안에 쌓은 일본식 성. 돌성벽과 여러 겹의 곽, 배를 대는 곳을 갖추었다. 울산왜성은 1597년에 새로 쌓은 성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었다.
- 바깥을 깨뜨려도 성은 남는다
- 연합군은 처음 이틀 동안 진영을 불태우고 바깥 방어선을 돌파했지만, 산꼭대기의 돌성은 모든 공격을 버텨 냈다.
- 굶주림과 목마름이라는 무기
- 완공되지 않은 성에는 우물이 없었고 식량도 매우 부족했다. 연합군은 성을 굶겨 무너뜨리려 했고, 구원군이 왔을 때 수비군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 생명줄이 된 바다
- 성 아래의 배와 서생포의 거점이 울산을 다른 일본군과 이어 주었다. 연합군은 땅에서 성을 에워쌌지만 일본 배를 막지 못했다.
- 겨울 전투
- 비와 서리, 바람은 포위당한 쪽뿐 아니라 포위한 쪽도 지치게 했고, 긴 포위를 값비싼 일로 만들었다.
- 보고와 정치
- 양호는 이 싸움을 거의 이긴 싸움으로 보고했다. 경쟁하던 명 관원은 그가 피해를 숨겼다고 탄핵했고, 조선 조정은 그를 변호했다.
- 역법
- 기록의 날짜는 음력이다. 한국천문연구원 변환표로 바꾸면 제1차 전투는 1598년 1월 28·29일부터 2월 9일까지이다.
기록
- 1597년 — 여름~가을: 정유재란에서 일본군은 남원을 함락하고 전라도를 휩쓸었으나 10월 직산에서 저지되어 남해안으로 물러난다.
- 1597년 — 1597년 말: 일본군이 가토 기요마사의 설계로 울산에 새 성을 쌓는다.
- 1598년 — 1월 28·29일(1597년 음력 12월 22·23일): 조·명 연합군이 울산 성 밖의 진영을 공격하고, 수비군은 성 안으로 물러난다.
- 1598년 — 1월 30일~2월 8일: 성에 대한 공격이 거듭 실패하고, 비와 추위 속에 포위가 이어진다.
- 1598년 — 2월 9일(음력 1월 4일): 일본 구원군이 오자 연합군이 철수하며 큰 피해를 입는다.
- 1598년 — 3월 22일(음력 2월 16일): 양호가 황제에게 올린 제본이 『선조실록』에 실린다.
- 1598년 — 7월 25일(음력 6월 23일)까지: 정응태의 탄핵으로 양호가 파직되었다는 소식이 한양에 전해진다.
- 1598년 —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는다.
- 1598년 — 10월 21일 무렵~11월 2일: 마귀의 제2차 울산 공격이 실패한다.
- 1598년 —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가토 기요마사가 성을 불태우고 울산을 떠난다.
- 1913년 — 김홍조가 산을 사들여 뒷날 학성공원이 되는 공원을 꾸민다.
- 1963년 — ‘울산학성’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9호로 지정된다.
- 1997년 — 국가 지정에서 해제되고 ‘울산왜성’이라는 이름으로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가 된다.
용어 풀이
- 왜성
- 임진왜란 때 조선에 쌓은 일본식 성. 일본에서는 ‘와조(倭城)’라고 읽는다.
- 도산(島山)
- ‘섬 같은 산’. 여러 방향이 물로 둘러싸인 울산왜성의 산을 연합군이 부른 이름이다.
- 본환(혼마루)
- 일본 성에서 가장 높고 중심이 되는 곽으로, 지휘관이 머문다.
- 경리(經理)
- 조선에서의 전쟁을 총괄한 명의 문관 직책. 양호가 맡았다.
- 제독(提督)
- 명군의 야전 지휘관. 1597~1598년에는 마귀가 맡았다.
- 도원수
- 전쟁 때 조선군을 총지휘하는 직책. 울산 전투 때는 권율이 맡았다.
- 접반사
- 명나라 장수를 맞아 돌보며 조정에 보고하던 조선 관원. 양호에게 딸린 이덕형이 그 예이다.
- 사로병진(四路並進)
- 1598년 가을 육지의 세 길로 울산·사천·순천을, 바닷길로 순천을 함께 친 연합군의 작전.
- 리(里)
- 전통적인 거리 단위. 명과 조선에서는 대략 0.5km 안팎이었다.
- 음력(태음태양력)
- 조선·명·일본이 쓴 역법. 달의 모양에 따라 달을 정하고 때때로 윤달을 넣는다. 서양식 양력(그레고리력) 날짜로 바꾸어야 한다.
묻고 답하기
연합군은 울산성을 함락했나요?
아니에요. 처음 며칠 동안 진영과 바깥 토성은 빼앗았지만, 산꼭대기의 돌성은 1차와 2차 모두 끝내 함락하지 못했어요. 가토는 1598년 12월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할 때에야 성을 떠났어요.
수비군이 굶주렸는데 왜 포위가 실패했나요?
성벽이 너무 높고 수비가 튼튼해서 힘으로 오를 수 없었고, 겨울 날씨가 포위한 군사들을 지치게 했어요. 그리고 굶주림이 수비군을 무너뜨리기 전에 일본 구원군이 땅과 바다로 도착했어요.
양호는 거짓 보고를 했나요?
그는 이 싸움을 거의 이긴 싸움으로 보고했고, 조선 기록에 따르면 포위 중에는 아군 피해를 보고하지 못하게 했어요. 피해를 숨겼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어요. 조선 조정은 그를 변호했지만, 남은 기록의 피해 수치가 서로 달라 전체 손실을 확정하기는 어려워요.
2월 19일인가요, 2월 9일인가요?
조선 기록은 연합군이 1598년 음력 1월 4일에 물러났다고 해요. 양력으로는 2월 9일이에요. 일부 영어 자료의 2월 19일은 이 날짜와 맞지 않아요.
왜 이 성을 도산성이나 학성이라고도 부르나요?
도산(‘섬 같은 산’)은 1598년 연합군이 이 산을 부른 이름이에요. 학성은 조선 후기에 생긴 이름이고, 지금 공식 이름은 울산왜성이에요.
지금 가 볼 수 있나요?
네. 울산광역시 중구의 학성공원 안에 있어요. 본환의 돌성벽 일부가 남아 있지만, 나머지는 공원을 만들면서 많이 훼손되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김석희, 울산전투 (蔚山戰鬪).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나동욱, 울산왜성 (蔚山倭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선조수정실록, 선조 30년(1597) 12월 1일 2번째 기사: 양 경리와 마 제독이 울산의 적영을 공격했으나 불리하여 돌아오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2월 28일 4번째 기사: 장운익·권율·이덕형 등이 경상도에서 중국군의 승전보를 보고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2월 30일 2번째 기사: 마 제독의 차관이 승전 상황을 보고하자 위로하고 배웅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월 1일 9번째 기사: 승정원에서 가등청정을 토굴 속에 포위했다는 울산의 승전보를 아뢰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월 3일 1번째 기사: 군문 도감에서 적군과 아군의 대치 상황 등 전황을 보고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월 4일 2번째 기사: 울산에서의 전투에서 진 유격이 부상당하는 등의 전황을 보고받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월 6일 4번째 기사: 접반사 이덕형·권율이 울산에서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월 9일 3번째 기사: 이시발이 포위를 풀고 경주로 철수했다는 소식을 알리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월 15일 3번째 기사: 경리 접반사 이덕형이 전투 중 사상자 숫자를 아뢰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월 16일 2번째 기사: 이시언·성윤문이 적과의 전투 상황과 후퇴 사실을 알리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월 16일 3번째 기사: 접반사 이덕열이 후퇴 중 입은 피해와 백성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고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2월 16일 2번째 기사: 경리가 황조에 올린 제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3월 20일 2번째 기사: 접반사 이호민이 도산의 적병 포위 시의 가등청정의 자살 기도 등을 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5월 27일 1번째 기사: 마 제독 전송 시 장운익과 제독의 능력, 도산 전투 등에 대해 논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6월 23일 2번째 기사: 대신들과 함께 양 경리가 참소당한 사정과 중국에 보낼 자문에 대해 논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선조 31년(1598) 7월 1일 1번째 기사: 최천건을 진주사로 삼아 경리 양호를 변호하는 주문을 보내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선조 31년(1598) 9월 1일 1번째 기사: 우리 나라에서 양호를 변호하자 정응태가 서운하게 여겨 황제에게 무고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선조 31년(1598) 10월 1일 1번째 기사: 여러 장수들이 동시에 적의 진영을 진공하였으나 불리한 형세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9월 27일 9번째 기사: 군문 도감이 마 제독의 말을 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9월 30일 4번째 기사: 마 제독의 접반사 이광정이 도산의 적군 세력에 대해 치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0월 2일 3번째 기사: 마 제독 접반사인 이광정이 제독이 경주로 퇴진하려 한다는 치계를 올리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0월 10일 7번째 기사: 마 제독 접반사인 이광정이 제독의 패전에 대한 치계를 올리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0월 20일 4번째 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경세가 마 제독의 계획에 대해 치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1월 25일 7번째 기사: 마 제독 접반사 이광정이 왜적의 철수에 대해 치계를 올리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유성룡(柳成龍), 懲毖錄(징비록) 권2 (한문 원문). 위키문헌
- 장정옥(張廷玉) 등, 明史(명사) 권259, 양호(楊鎬) 열전. 위키문헌
- 울산왜성 (蔚山倭城), 울산광역시 문화유산자료.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음양력 변환 계산. 한국천문연구원
- Imjin War. 위키백과(영어)
- Siege of Ulsan. 위키백과(영어)
- Second siege of Ulsan. 위키백과(영어)
- 울산성 전투. 위키백과(한국어)
- 蔚山城の戦い. 위키백과(일본어)
- 울산왜성. 위키백과(한국어)
- 蔚山倭城. 위키백과(일본어)
- 加藤清正. 위키백과(일본어)
- 太田一吉. 위키백과(일본어)
- 文禄・慶長の役. 위키백과(일본어)
- Yang Hao (Ming dynasty). 위키백과(영어)
- Feodor I of Russia. 위키백과(영어)
- Edict of Nantes. 위키백과(영어)
- Peace of Vervins. 위키백과(영어)
- Philip II of Spain. 위키백과(영어)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