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부터 430년쯤 전, 일본 군대가 조선에 쳐들어왔어요. 선조 임금은 도읍 한양을 떠나 피란을 가야 했어요. 떠나기 직전, 임금은 열여섯 살인 둘째 아들 광해군을 다음 임금이 될 사람, 곧 세자로 정했어요.
몇 주 뒤 임금은 나라의 일을 맡은 사람들을 두 무리로 나눴어요. 한 팀이 붙잡혀도 다른 팀이 경기를 이어 갈 수 있게 팀을 둘로 나누는 것과 비슷해요. 임금은 중국과 맞닿은 국경 쪽으로 가고, 세자는 몇 안 되는 신하들과 산골로 들어가 나라 살림을 꾸리고 사람들에게 싸울 힘을 북돋웠어요.
조선은 중국 명나라 황제와 가까운 사이여서, 새 세자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그런데 명나라 신하들은 몇 번이고 안 된다고 했어요. 맏아들이 먼저라는 규칙이 있었는데, 광해군에게는 형이 있었거든요. 광해군은 16년을 기다렸지만 세자로서 허락은 끝내 받지 못했어요.
160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광해군은 그래도 임금이 되었어요. 전쟁으로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궁궐을 짓고, 서울 가까운 경기도에서 세금을 더 공평하게 내는 방법을 시험하고, 유명한 의학책을 펴냈어요. 하지만 그가 다스리는 동안 형과 어린 이복동생이 목숨을 잃었고, 새어머니인 대비는 궁에 갇혔어요.
1623년 몇몇 신하들이 군사를 일으켜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냈어요. 그를 몰아낸 사람들이 그의 시대 역사책까지 썼기 때문에, 광해군이 나쁜 임금이었는지 똑똑한 임금이었는지, 아니면 둘 다였는지 지금도 사람들이 다투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 생애
- 1575~1641. 1575년 음력 4월 26일(양력 6월 14일) 출생, 1641년 음력 7월 1일(양력 8월 7일) 유배지 제주도에서 사망. 만 66세(실록의 셈으로는 67세)
- 가족
- 선조(재위 1567~1608)와 첫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 맏아들 임해군(1572~1609)의 친동생이고, 선조의 아들 가운데 유일하게 왕비가 낳은 영창대군(1606~1614)의 이복형
- 세자 시절
- 1592년 6월 8일, 조정이 한양을 떠나기 하루 전 세자로 책립. 1592년 7월부터 1593년 2월까지 분조, 1594년 무군사를 이끌었다. 명은 1594~1604년 사이 다섯 번의 세자 책봉 요청을 모두 거부하거나 미뤘다
- 재위
- 1608년 3월 17일 ~ 1623년 4월. 조선 제15대 국왕. 1609년 명 황제에게 국왕으로 책봉받았다. 인조반정(1623년 음력 3월 13일, 양력 4월 12일)으로 폐위되어 다시 왕자 칭호인 ‘군’으로 낮춰졌기 때문에 묘호가 없다
- 전후 복구
- 선혜청 설치(1608)와 경기도의 공물 작미 시험, 양전(1611), 국가 서적 재간행, 허준의 『동의보감』(1610년 완성, 1613년 간행), 궁궐 중건과 새 궁궐 공사
- 대외 관계
- 일본과 기유약조(1609). 1619년 명의 요구로 약 1만 3천 명을 보냈으나 사르후 전역의 심하 전투에서 패한 뒤 도원수 강홍립이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다. 그 뒤 명의 번국으로 남으면서 후금과의 전쟁은 피하려 했다
- 주요 사료
- 『선조실록』(광해군 때 북인 주도 편찬), 『선조수정실록』·『광해군일기』(폐위 뒤 서인 주도 편찬), 분조를 따라간 정탁의 「피난행록」, 실록에 옮겨 적힌 명나라 문서
- 논쟁점
- 명이 거부한 까닭, 선조가 세자를 바꾸려 했는지, 옥사를 광해군 자신이 주도했는지, 외교가 앞을 내다본 ‘중립’이었는지 기회주의였는지, 적대적 기록이 그를 얼마나 왜곡했는지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쉬움
광해군은 누구인가
광해군(光海君), 이름 이혼(李琿)은 1608년부터 1623년까지 재위한 조선의 제15대 국왕이다. 조선의 왕들은 대개 세상을 떠난 뒤 받은 ‘○조’, ‘○종’ 같은 묘호로 불린다.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난 뒤 끝내 복위되지 못했기 때문에 왕자 시절의 칭호로 역사에 남았다. 조선 왕 가운데 이런 경우는 연산군과 광해군 둘뿐이다.
그의 삶은 둘로 나뉜다. 1592년부터 1608년까지 세자로서 그는 전쟁 속의 젊은 지도자였다. 일본이 쳐들어오고 왕이 북쪽으로 피란하자, 그는 산골에서 조정의 한쪽을 이끌었다. 그러나 조선의 상국인 명나라 황제가 그를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자리는 늘 불안했다. 1608년 왕이 된 뒤에는 전쟁으로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워야 했고, 1616년 여진의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 만주에서 새로운 위협이 다가왔다.
광해군은 한국사에서 평가가 가장 엇갈리는 임금 가운데 하나다. 1623년 그를 몰아낸 사람들이 그의 재위 기록도 편찬했고, 그 뒤 300년 가까이 그는 형제를 죽인 폭군으로 기억되었다. 20세기에는 많은 역사가가 그를 조선의 손실을 줄이고 명·후금 양쪽과의 관계를 관리하려 한 현실주의자로 다시 평가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그 평가 역시 도전을 받고 있다.
쉬움
피란 전날의 세자 책립, 1592년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광해군과 형 임해군은 후궁 공빈 김씨의 아들이었다. 신하들은 이런 왕자들 가운데서 세자를 정하자고 건의했지만, 선조는 결정을 미뤘다. 그러다 1592년 봄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고, 6월 7일(음력 4월 28일) 충주에서 조선군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날 밤 선조는 처음으로 도성을 떠날 뜻을 내비쳤다.
신하들은 그보다 먼저 세자를 정해야 한다고 했다. 실록에 따르면 대신들은 이것은 임금이 스스로 정할 일이라며 몇 번이나 미뤘고, 신잡은 “오늘은 기필코 결정이 내려져야 물러갈 수 있습니다”라고 버텼다. 밤이 깊어서야 선조는 “약간 미소를 띠고”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한다며 그를 지목했다. 다음 날인 6월 8일 광해군은 세자가 되었다. 만 16세, 당시 셈으로 열여덟 살이었다. 6월 9일 새벽, 왕과 세자는 비 내리는 어둠 속에서 한양을 떠났다.
왜 맏아들이 아니었을까. 그날 밤 선조는 그해 봄에 이미 세자를 책립하려 했다고 말했고, 사관은 그 전에 세자 책봉을 청하는 상소가 많았다고 덧붙였다. 전쟁이 이미 굳어 가던 결정을 앞당긴 것으로 보인다. 서인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부터 현대의 백과사전까지 뒷날의 기록은 임해군을 난폭하고 학문을 게을리한 인물로 그리지만, 이런 인물평은 결과를 아는 뒤에 쓴 것이다. 분명한 것은 광해군이 맏아들도, 왕비의 아들도 아니었고, 이 사실이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는 점이다.
쉬움
분조를 이끌다, 1592~1593년
일본군의 진격이 워낙 빨라서 1592년 7월 평안도 영변에 이른 선조는 여차하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그렇다면 조선 땅에 남아 나라를 붙잡을 사람이 필요했다. 7월 21일(음력 6월 13일) 밤, 선조는 세자에게 국사를 임시로 맡기고 관직 임명과 상벌도 형편에 따라 스스로 결정하게 했다. 이튿날 조정은 둘로 나뉘었다. 왕은 국경의 의주 쪽으로, 세자는 영의정 최흥원 등 10여 명의 중신과 함께 반대쪽으로 향했다. 이 작은 두 번째 조정을 분조(分朝), 곧 ‘나뉜 조정’이라 부른다.
세자를 따라간 정탁의 일기 「피난행록」은 그 길을 날짜별로 남겼다. 처음 목적지는 압록강 상류 산골의 강계였다. 그러나 일본군 대군이 함경도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일행은 동쪽으로 길을 꺾어 맹산·양덕·곡산의 고개를 넘었다. 한 고개에서 정탁은 “열 걸음을 걸으면 아홉 번을 넘어져”라고 적었다. 8월 17일 밤 강원도 이천에 닿자, 처음으로 하삼도(충청·전라·경상) 감사들의 장계가 올라왔다. 세자는 장수와 병사들을 모아 나라를 되찾겠다는 뜻을 직접 밝혔고, 각지의 의병에게 사람을 보내 격려했다.
분조는 이어 성천에서 두 달 넘게 머물렀다. 1592년 11월 의주의 선조는 나머지 기무는 분조에서 처리하라며 “회복의 희망이 모두 여기에 달려 있다”고 했다. 그보다 앞서 세자는 찾아온 도승지 유근에게 감당하지 못할 일을 맡아 처신할 바를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겨울에 분조는 용강 산성으로 옮겼고, 세자는 그곳에서 병을 앓기도 했다. 1593년 2월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평양을 되찾았고, 2월 20일 세자는 정주에서 아버지를 맞았다. 헤어진 지 일곱 달 만이었다. 한 백과사전은 분조가 함경도까지 오갔다고 쓰지만, 정탁의 날짜별 일기에는 평안·황해·강원도만 나온다.
중급
남쪽의 무군사와 거듭된 선위 파동
명과 일본이 강화 협상을 벌이고 명군 대부분이 철수하자, 명 쪽은 세자가 남쪽 전선을 직접 맡으라고 요구했다. 1594년 1월 세자는 무군사(撫軍司)라는 야전 본부를 이끌고 다시 한양을 떠났다. 공주를 거쳐 전주에 이르러서는 진주와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의 가족을 불러 부역을 면제하는 문서와 쌀·콩을 주라고 명했다. 같은 무군사 일기는 수행 관리들의 접대와 음주가 백성에게 짐이 되었고 세자가 이를 엄금했다는 사실도 적었다. 그 뒤 세자는 충청도 홍주에 반년 가까이 머물다 가을에 돌아왔다. 1595년 명 황제의 칙서는 그에게 전라도와 경상도의 군무를 맡겼다.
그사이 선조는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거나 섭정을 시키겠다는 말을 거듭했다. 한명기는 전쟁 중에만 열다섯 번 물러나겠다고 했다고 세지만, 무엇을 한 번으로 세느냐에 따라 숫자가 달라진다. 이를테면 1593년 9월 선조는 ‘광병’과 눈병 등 자신의 병을 늘어놓으며 “예로부터 어디에 광병을 앓은 임금이 있었던가”라고 했다. 그때마다 세자와 신하들은 엎드려 명을 거두어 달라고 빌었다. 선조가 든 이유는 병, 명 경략 송응창에 대한 분노, 전쟁의 부담 등으로 그때그때 달랐고, 그것이 진심이었는지 세자와 신하들을 떠보려는 것이었는지는 기록만으로 알 수 없다.
전쟁이 끝나 갈 무렵 기록에는 냉랭한 장면이 나온다. 1598년 1월(음력 1597년 12월)에는 이이첨이 왕이 명나라 장수를 접견할 때 임해군을 동석시키지 말라고 청했다. 1600년의 기사는 왕이 세자를 매우 엄하게 대해 만나 주는 일이 드물어, 세자가 문안할 때마다 바깥문에 이르렀다가 물러갔다고 적었다. 두 기사 모두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에 실려 있어 왕의 냉대를 강조했을 수 있다.
중급
명나라는 왜 그를 인정하지 않았나
조선의 국왕과 세자는 명 황제의 책봉(冊封)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책봉을 받지 못한 세자도 조선 안에서는 엄연한 세자였지만, 상국의 눈에는 아직 아니었다. 조선은 1594년부터 사신을 보내 광해군의 책봉을 청했다. 실록에 옮겨 적힌 1604년 명 예부의 상주문은 1594·1595·1596·1603·1604년의 다섯 차례 요청을 짚으며 앞의 네 번을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고 정리했고, 다섯 번째 요청에는 조선의 세자 논의를 “단연코 따를 수 없다”고 답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다섯 차례 거절당했다고 쓴다.
실록에 옮겨 적힌 명나라 문서는 여러 이유를 든다. 첫째는 태어난 순서다. 명 예부는 1595년 장유의 차례는 “털끝만큼도 문란하게 할 수 없다”고 했고, 1604년에는 아우를 형 위에 올리는 것을 ‘역(逆)’이라 부르며 조선의 우환이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안에 있지 않을까” 우려했다. 둘째는 조선의 설명에 대한 의심이다. 명 관리들은 임해군이 정말 병으로 폐인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고, 한 관리는 선조의 첫 주문은 둘째 아들을 칭찬했을 뿐이고 맏아들이 병들었다는 말은 나중에야 나왔다고 지적했다. 셋째는 공로다. 1595년 한 명 관리는 둘째 아들에게 아직 “현저한 공로가 없다”고 했고, 예부는 칙지를 받은 뒤로 조그마한 공적을 세웠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고 썼다. 넷째는 시기와 안보다. 전쟁 중에 명은 공을 더 세우라고 했고, 1598년 종전 뒤에도 일본의 재침 우려와 조선의 미완의 복구를 들어 2~3년을 기다렸다가 다시 청하라고 했다. 예부는 왕의 편애와 형제 사이의 잔인함도 경계했다.
베이징에도 사정이 있었다. 만력제는 총애하는 후궁의 아들을 아껴, 맏아들 주상락을 황태자로 세우라는 신하들의 압박에 오랫동안 버티다가 1601년에야 물러섰다. 조선의 대신들은 1595년 이번 요청이 “중국 조정에서 말하기 꺼려하는 것과 상치되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했고, 1602년 조선 예조는 지난번 거절이 황태자를 책봉하지 않았던 때문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당시 사람들의 그럴듯한 해석이지만, 1601년 뒤에도 거절은 이어졌고 명 문서는 맏아들이라는 일반 원칙을 들어 논박했으니 황제 자신의 문제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명은 1595년 칙서처럼 칭호 없이 군사 임무만 맡겼는데, 명 관리들의 의견이 하나였던 것도 아니다. 1595년 조선 사신은 예부 상서는 허락할 뜻이 있으나 아래 낭관들이 이견을 낸다고 보고했다.
역설은 마지막에 찾아왔다. 1608년 3월 세자에게 빨리 왕위를 넘기라는 정인홍의 상소에 선조는 오히려 그를 꾸짖으며 “제후의 세자는 반드시 천자의 명을 받은 뒤에 비로소 세자라고 할 수 있다”고 적었다. 책봉받지 못한 세자에게 왕위를 넘겼다가는 명의 추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명은 광해군이 이미 왕이 된 뒤에야 태도를 바꿨다. 1608년 요동에서 관리를 보내 임해군을 직접 만나 보게 했고, 1609년 황제의 칙서는 형이 “병으로 폐해져” 온 나라 신민이 한목소리로 청했다며 광해군을 국왕으로 책봉했으며, 조서는 ‘어진 사람을 세우는 대의’를 말했다. 요컨대 한 가지 이유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맏아들 원칙을 지키려는 명 관료 조직이 있었고, 마침 황제 자신의 후계 다툼 때문에 그 원칙은 더 민감했다. 명은 임해군의 병과 광해군의 공로에 관한 조선의 설명을 의심했고, 나라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세자 책봉은 끝내 오지 않았고, 국왕 책봉은 계승이 이미 기정사실이 된 뒤에야 왔다.
중급
적자의 탄생: 인목왕후와 영창대군
의인왕후는 1600년에 세상을 떠났다. 1602년 선조는 김제남의 딸을 젊은 계비로 맞았으니, 곧 인목왕후다. 인목왕후는 1603년 정명공주를, 1606년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창대군은 선조의 아들 가운데 유일하게 왕비가 낳은 적자였다. 이때 선조는 쉰을 넘겼고 세자는 서른을 넘긴 나이였다. 조정은 북인 가운데 두 갈래, 곧 영의정 유영경을 중심으로 한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한 정인홍·이이첨 중심의 대북으로 갈라져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가 세자를 바꿀 생각을 품었고 유영경 등 소북이 여기에 영합했다고 쓰며, 1623년 반정 뒤 편찬된 『인조실록』도 같은 주장을 한다. 그러나 실록에는 선조 자신이 그렇게 말한 기록이 없다. 오히려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기록이 있다. 1607년 11월 쓰러진 뒤 선조는 세자에게 왕위를 전하거나 섭정을 시키라고 명했는데, 이를 받들지 않은 것은 유영경 등 현직 대신들이었다. 이들은 “죽는 한이 있어도 끝내 감히 따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뒤에 서인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은 원로 대신들이 이 논의에서 배제되었다고 덧붙인다.
1608년 3월 정인홍이 유영경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고, 선조는 앞에서 본 천자의 명에 관한 말로 그를 꾸짖었다. 그로부터 여드레 뒤인 3월 16일 선조가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일기』는 찹쌀밥을 먹은 뒤 갑자기 위급해졌다고 적었다.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소문은 1623년 반정 뒤 『인조실록』의 사관 논평에만 나오며, 독살의 증거는 아니다. 이튿날 인목왕후의 교지로 광해군이 즉위했다. 선조의 유교는 신민의 기대가 그에게 모였다고 하며 형제를 자신이 살아 있을 때처럼 사랑하라고 당부했다. 즉위식에서 그는 슬픔이 망극하다며 거듭 어좌에 오르기를 사양했으나, 결국 신하들의 청을 받아들여 어좌에 올라 하례를 받았다.
중급
마침내 왕위에: 형제, 명의 조사관, 1609년의 책봉
왕이 되었다고 정통성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1609년의 명 문서도 여전히 그를 ‘조선국 권서국사(權署國事)’, 곧 임시로 나랏일을 맡은 사람이라 불렀다. 1608년 여름 명은 계승 문제를 조사하려고 요동에서 관리 두 명을 보냈고, 이들은 7월 31일(음력 6월 20일) 서강으로 가서 임해군을 직접 만나 보고 그날로 돌아갔다. 역사학자 한명기는 조선 조정이 이 위기를 넘기려고 이들에게 많은 은을 주었다고 쓴다.
임해군은 이미 역모 혐의로 진도에, 이어 교동에 유배되어 있었고 1609년 그곳에서 죽었다. 『광해군일기』는 수장이 그에게 독을 마시게 하려다 따르지 않자 목을 졸라 죽였다고 적는데, 같은 기사는 이 사실이 1623년 반정 뒤 그를 시중든 관비에게 물어서야 알려졌다고 밝힌다.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은 유영경도 사사되었다.
1609년 7월 2일(음력 6월 2일) 명 태감 유용이 서울에 와서 광해군을 국왕으로, 부인 유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칙서를 전했다. 한명기에 따르면 유용은 수만 냥의 은을 받아 갔고, 1610년에는 다른 환관이 와서 광해군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다. 광해군 자신이 16년 동안 얻지 못한 바로 그 승인이었다.
중급
전쟁 뒤의 복구: 세금, 책, 의학, 궁궐
즉위 초 광해군은 이원익을 영의정에 앉히고 여러 붕당에 고루 자리를 주었다. 이원익의 건의에 따라 1608년 6월 18일(음력 5월 7일) 경기도를 대상으로 선혜청(宣惠廳)을 두었다. 공물을 현물로 바치게 하면 중간의 방납인이 값을 몇 배, 몇십 배로 부풀렸는데, 그 대신 토지 1결마다 한 해 쌀 16말을 거두고 그 가운데 일부를 고을 경비로 남기게 한 것이다. 역사학자 이정철은 이 ‘선혜법’이 시험적 형태였을 뿐, 지방 몫을 훨씬 크게 잡은 뒷날의 대동법과 같다고 볼 수 없다고 강조한다. 대동법은 1623년부터 1708년 사이 도별로 확대되었고 지역별 차이도 있었으며, 평안도와 제주도에는 시행되지 않았다. 계승범은 광해군 자신은 대동법에 미온적이었지만 그 시행을 처음 결재한 왕이라는 의의가 있다고 쓴다.
1611년에는 전쟁 뒤 숨겨진 땅을 찾아내 세금을 다시 매기는 양전을 시작했다. 전쟁으로 없어진 국가 서적을 다시 펴내거나 새로 엮었고, 적상산에 새 사고를 두었다.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책은 허준의 『동의보감』이다. 선조가 1596년 편찬을 명했고, 허준은 1610년 이를 완성해 광해군에게 바쳤으며, 내의원이 1613년 간행했다. 『동의보감』은 조선 의학을 대표하는 책이 되어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었고,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라 있다.
광해군은 전쟁 때 불탄 창덕궁과 창경궁도 다시 지었다. 준공 연도는 자료마다 조금 달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610년과 1616년, 우리역사넷은 1608년과 1615년으로 쓴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경덕궁(뒤의 경희궁)과 인경궁을 새로 지었다. 경덕궁은 1619년 주요 전각이, 1620년 궁궐 전체가 완공되었고, 인경궁은 끝내 완공하지 못했다. 공사비를 대려고 무리하게 세금을 거두어 민심을 잃었다. 오항녕 같은 비판자들은 세금 개혁이 줄이려던 바로 그 공물을 궁궐 공사가 크게 소모했다며, 광해군의 복구 업적이 부풀려졌다고 본다.
중급
옥사: 계축옥사와 대비 유폐
광해군의 재위는 잇단 역모 사건으로 얼룩졌다. 가장 큰 사건은 1613년, 계축년에 일어났다. 서얼이라 벼슬길이 막혔던 일곱 명이 문경 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을 빼앗은 사건이 있었는데, 붙잡힌 박응서가 국문 과정에서 영창대군을 왕으로 세우려는 역모를 꾸몄다고 자백했다.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은 사사되었고, 어린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갇혔으며, 많은 대신이 쫓겨났다. 영창대군은 1614년 그곳에서 죽었다. 『광해군일기』는 1614년 3월 19일(음력 2월 10일)자 기사에서 강화부사 정항이 음식을 막고 방을 뜨겁게 달궈 그를 죽였다고 적는다. 반면 뒤의 『인조실록』 기사는 별장 이정표가 광해군의 밀명을 받아 음식에 잿물을 넣어 죽였다고 주장한다. 두 기록은 가해자와 살해 방법 모두에서 차이가 난다.
1617년 대북은 인목대비를 폐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반대한 이항복·기자헌 같은 원로는 유배되었다. 1618년 초 대신들은 대비를 낮추는 절목을 마련했고, 대비는 칭호를 잃고 갇혀 있던 경운궁(오늘날의 덕수궁)을 따라 그저 ‘서궁’이라 불렸다. 인목대비와 정명공주는 1623년까지 그곳에 갇혀 지냈다. 유교의 눈으로 보면 아버지의 왕비를 박대하고 어린 아우를 죽인 이른바 ‘폐모살제’는 임금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죄 가운데 하나였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었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여러 항목을 비롯한 이전의 서술은 대북의 이이첨에게 대부분의 책임을 돌리고, 반정 뒤 서인이 규정한 대로 1613년 역모를 조작된 무옥으로 본다. 반면 같은 사전의 현행 「광해군」 항목에서 계승범은 광해군이 특정 정파에 휘둘리지 않았다는 실증 연구가 나왔으며, 경쟁자들 때문에 불안해한 왕 자신이 옥사를 이끌었다고 본다. 어느 쪽이든 이 옥사들은 그의 왕위를 끝낸 정변의 가장 큰 명분이 되었다.
중급
명과 후금 사이에서: 1619년 사르후 전역
1616년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허투알라에서 금(후금)의 수립을 선포했고, 1618년 명의 요동을 공격했다. 명은 대규모 원정군을 일으키며 조선에도 파병을 요구했다. 조선의 신하들에게 답은 분명해 보였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세워 준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광해군이 홀로 파병에 반대했으나 신료들의 압박에 밀렸다고 쓴다. 광해군 자신은 이듬해, 파병을 막으려던 것이 아니라 조선 군사가 훈련되지 않아 쓸모가 없다는 사정을 미리 명에 알리려 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어에 능한 문관 강홍립을 도원수로 골랐다.
1619년 4월 5일(음력 2월 21일)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가 이끄는 약 1만 3천 명의 조선군이 창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명 장수 유정의 남로군에 합류했다. 명의 주력은 사르후 부근에서 무너졌고, 4월 17일(음력 3월 4일) 유정의 군대도 심하(深河) 근처 부차에서 매복에 걸렸다. 유정은 죽었고, 조선군 좌영과 우영도 짓밟혔다. 좌영장 김응하는 끝까지 싸운 장수로 기억되었다. 포위된 채 굶주린 강홍립의 중영은 여진과 협상한 끝에 이튿날 아침 항복했다. 비변사는 뒤에 죽은 사람이 8~9천 명에 이른다고 했고, 강홍립과 김경서는 누르하치의 근거지에 억류되었다.
조정의 신하들은 강홍립의 가족을 가두라고 요구했지만 광해군은 이를 미뤘다. 그는 조선에는 여진을 막을 군사력이 없다며, 대국을 섬기는 정성을 “더욱 다하면서” 한창 기세가 왕성한 적을 잘 미봉하는 것이 나라를 보전하는 계책이라고 했다. 그는 명의 번국으로 남으면서 포로가 된 강홍립을 통로 삼아 누르하치와 연락을 이어 갔다. 1622년 명이 감군어사를 보내 다시 파병을 요구하자 광해군은 따르지 않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명을 받드는 신료들이 거듭 반발해 국정이 사실상 마비되었다.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항복하라는 밀지를 내렸을까. 『광해군일기』 편찬자들의 주석은 왕이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여진과 몰래 통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가 “때를 맞추어” 항복했다고 적고, 1623년 광해군을 폐위하는 교서는 그가 은밀히 장수를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 했다고 비난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강홍립」 항목은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명에 따른 것이었다고 쓴다. 그런데 실록에 왕의 하유로 실제 남아 있는 것은 1619년 3월 18일(음력 2월 3일)의 지시로,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에 힘쓰라는 내용이며 항복에 관한 말은 없다. 한명기도 왕의 지침을 이런 신중론으로 설명하며, 누가 먼저 항복을 제의했는지에 관해 조선 기록과 만주 기록이 다르다고 지적한다. 항복하라는 밀명이 있었다는 주장은 광해군이 쫓겨난 뒤의 진술에 기대고 있다. (누르하치와 후금은 별도 글에서 다룬다.)
중급
1623년의 정변과 18년의 유배
1623년 음력 3월 13일(양력 4월 12일)로 기록된 정변에서, 이귀·김류가 이끌고 최명길·김자점 등이 가담한 서인 세력은 이서의 군사와 함께 선조의 손자이자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밤에 창의문을 넘어 창덕궁으로 들어갔고, 불길이 전각들로 번졌다. 광해군은 궁을 빠져나가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붙잡혔다. 반정 세력은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찾아갔고, 능양군은 그곳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인조다.
이튿날 인목대비는 폐위의 까닭을 밝히는 교서를 내렸다. 교서는 광해군이 대비의 아버지와 아들을 죽이고 대비를 가두었으며, 형과 아우와 조카들을 해치고, 10년 동안 민가 수천 채를 헐어 궁궐 두 채를 지었으며, 뇌물로 벼슬을 팔았다고 했다. 이어 외교로 넘어가, 조선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세워 준 명의 은혜를 입었는데 광해군은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고” 은밀히 장수를 시켜 형세를 보아 행동하게 해 전군이 항복하게 했으며, 황제가 여러 차례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집안의 패륜과 명에 대한 배신이라는 이 두 갈래 죄목이 이후 300년 동안 그를 평가하는 틀이 되었다.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왕비 유씨와 폐세자인 아들은 몇 달 만에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는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 때 태안·교동 등지로 옮겨졌다가 마지막으로 제주도에 보내졌고, 1641년 8월 7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조는 사흘 동안 조회를 멈췄다. 왕비와 함께 묻힌 그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으며, 다른 왕릉보다 훨씬 소박하다.
심화
기록 읽기: 광해군의 이야기는 누가 썼나
광해군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다 실록에서 나오는데, 관련된 실록은 모두 붕당 싸움의 어느 한쪽이 편찬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자신의 재위 중인 1609년부터 1616년 사이에 편찬되었다. 처음에는 이항복이 총재관이었으나 뒤에는 이이첨·기자헌 등 북인이 주도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오항녕은 이 실록이 공정한 입장을 지키지 못한 부분이 많고 북인을 칭찬하고 서인·남인을 비방했다고 평한다. 1623년 뒤 서인은 『선조수정실록』을 따로 만들어 1657년에 완성했는데, 한 달의 기사를 한 날짜 아래 몰아 싣는 경우가 많다.
광해군 시대의 실록은 그가 폐위되었기 때문에 ‘실록’이 아니라 ‘일기’라 불린다. 편찬은 1624년에 결정되었는데, 그 직전 이괄의 난으로 정부 기록이 많이 흩어졌기 때문에 편찬자들은 옛 사관들이 집에 간직한 사초, 조보, 개인 일기, 상소 초고, 야사까지 모아야 했다. 1633년 음력 12월에 완성되었지만 처음 몇 권만 인쇄되었다. 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고쳐 쓴 흔적이 가득한 중초본(태백산본, 64책)과 정서한 정초본(정족산본)이 함께 남아 있다. 백과사전은 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이 편찬을 주도했으므로 그들의 주관이 작용했음을 감안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 기록들을 층위별로 나누어 읽는다. 왕의 명령이나 옮겨 적힌 사신의 보고는 신하의 공격과 다르고, 둘 다 몇 해 뒤에 덧붙인 사관의 논평과 다르다. 강홍립의 밀지에 관한 주석과 선조 독살 소문은 마지막 층에 속한다. 분조를 따라간 정탁의 일기, 실록에 옮겨 적힌 명나라 문서 같은 독립된 1차 자료가 이를 점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심화
폭군인가, 현실주의자인가, 기회주의자인가: 현대의 평가
조선 시대에 광해군은 ‘폐주(廢主)’, ‘혼군(昏君)’일 수밖에 없었다. 인조의 후손이 왕위를 이어 가는 동안 그를 다시 평가하는 것은 반정의 명분을 흔드는 일이었다. 처음으로 긍정적 재평가를 내놓은 것은 1930년대 일본인 학자들이었다. 이나바 이와키치의 『광해군 시대의 만선 관계(光海君時代の滿鮮關係)』(1933)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광해군이 택한 노선을 높이 평가하고 옥사는 대북의 탓으로 돌렸다. 계승범은 이를 1931년 만주사변 뒤 만주를 중국 본토에서 떼어 한반도와 같은 권역으로 보려던 일제 관학자들의 정치적 해석이라고 비판한다. 해방 뒤 1959년 이병도가 이 견해를 받아들였고,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한명기의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2000)는 훨씬 넓은 사료로 긍정적 평가를 다듬었다. 그의 해석에서 광해군은 명군 원정의 위험을 알아보았고, 조선군의 손실을 줄이려 했으며, 조선이 이길 수 없는 여진과의 전쟁을 피했다. 한명기는 이전 연구가 광해군의 한계를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도 비판했다.
비판자들은 ‘중립’이라는 말이 그 시대를 잘못 읽는다고 반박한다. 오항녕은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과 뒤의 글들에서 내정과 외교는 떼어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궁궐 공사, 멈춰 버린 세금 개혁, 옥사가 제대로 된 외교에 필요한 재정과 민심을 고갈시켰고, 남은 것은 그때그때 눈치껏 처신하는 기회주의뿐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해외 파병을 연구하고 2021년 『모후의 반역』을 쓴 계승범은 그 외교가 과연 현명한 ‘중립’이었는지 묻고, 광해군이 대북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며, 그의 업적 일부가 부풀려졌다고 경고한다.
큰 연대기는 비교적 분명하지만, 영창대군이 어떻게 죽었는지, 강홍립이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누가 먼저 항복을 제의했는지 같은 세부에는 이견이 있고, 동기와 책임, 그에게 붙은 이름표도 논쟁거리다. 백과사전의 현행 항목은 광해군 평가가 시대에 따라 크게 달라졌으니 열린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말로 끝난다.
핵심 개념
- 분조(分朝)
- 1592년 왕이 중국으로 피신해야 할 경우에도 조선 땅에 세자가 이끄는 두 번째 조정이 남도록 조정을 둘로 나눈 것. 광해군에게 실제 권한과 인망을 주었지만, 그만큼 뒷날 그의 처지를 더 미묘하게 만들었다.
- 책봉과 맏아들 원칙
- 명 황제는 조선의 국왕과 세자를 공식 책봉했다. 명 예부는 압도적 이유가 없는 한 맏아들이 먼저라고 보았고, 둘째 아들인 광해군은 전쟁 중에도, 불안한 전후에도 그 기준을 넘지 못했다.
- 정통성의 약점
- 광해군은 맏아들도 왕비의 아들도 아니었다. 1606년 왕비의 아들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이 약점은 위험이 되었고, 1608년 이후의 피바람을 설명하는 한 열쇠가 된다.
- 사대와 생존
- 임진왜란의 원조로 더 굳어진 조선의 명에 대한 의리는 1616년 이후 일어서는 후금의 힘과 부딪쳤다. 광해군은 의리를 지키면서 전쟁은 피하려 했고, 많은 신료는 그가 여진과 우호적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를 명에 대한 배신으로 보았다.
- 승자가 쓴 역사
- 『광해군일기』는 그를 몰아낸 사람들이 흩어진 자료를 모아 편찬했다. 옮겨 적힌 명령과 문서는 귀중하지만, 논평과 비난은 반대파의 목소리로 읽어야 한다.
- 현대의 이름표, ‘중립 외교’
- 광해군이 의도적인 중립 정책을 폈다는 생각은 1930년대 일본인 학자들에게서 시작된 20세기 역사가들의 해석이다. 그것이 그의 선택을 설명하는지, 후대의 관심을 투영한 것인지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기록
- 1575년 — 6월 14일(음력 4월 26일)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 1592년 — 일본 침략. 조정이 한양을 떠나기 하루 전인 6월 8일 세자가 되고, 7월 22일부터 분조를 이끌다.
- 1593년 — 평양 탈환 뒤 2월 20일 정주에서 아버지와 다시 만나다. 9월 선조가 다시 선위를 말하다.
- 1594년 — 무군사를 이끌고 공주·전주·홍주로 내려가다. 조선이 처음으로 명에 세자 책봉을 청하다.
- 1595년 — 명 황제의 칙서가 그에게 전라·경상도 군무를 맡기는 한편, 예부는 책봉을 미루다.
- 1604년 — 명 예부가 다섯 번째 요청을 거부하며 아우를 형보다 앞세우는 것을 ‘역’이라 하다.
- 1606년 — 선조의 유일한 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나다.
- 1608년 — 3월 16일 선조 승하, 3월 17일 즉위. 명 관리들이 와서 임해군을 만나 보다. 경기도에 선혜청을 두다.
- 1609년 — 임해군이 유배지에서 죽다. 7월 2일 명 사신이 그를 국왕으로 책봉하다. 일본과 기유약조.
- 1610년 — 허준이 『동의보감』을 완성해 바치다(1613년 간행).
- 1613년 — 계축옥사.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이 강화도에 갇히다.
- 1614년 — 영창대군이 강화도에서 살해되다.
- 1616년 — 누르하치가 허투알라에서 후금을 세우다.
- 1618년 — 인목대비를 낮추어 서궁에 가두다. 명이 누르하치를 치려고 조선에 파병을 요구하다.
- 1619년 — 약 1만 3천 명의 조선군이 사르후 전역에 참전. 4월 17일 심하에서 패한 뒤 강홍립이 항복하다.
- 1623년 — 4월 12일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다.
- 1633년 — 새 정권 아래에서 편찬한 『광해군일기』가 완성되다.
- 1641년 — 8월 7일 유배지 제주도에서 세상을 떠나다.
용어 풀이
- 분조(分朝)
- ‘나뉜 조정’. 1592년 7월부터 왕이 국경 쪽으로 가는 동안 세자가 이끈 두 번째 조정.
- 무군사(撫軍司)
- 세자의 야전 본부. 특히 1593~1594년 명의 요구로 설치되어 남쪽으로 내려간 것을 말한다.
- 책봉(冊封)
- 중국 황제가 번국의 국왕·왕비·세자를 공식 인정하는 일.
- 세자(世子)
- 조선의 왕위를 이을 사람으로 정해진 왕자.
- 군과 대군(君 · 大君)
- 왕자 칭호. 후궁이 낳은 왕자는 군, 왕비가 낳은 왕자는 대군이다. 폐위된 왕은 군으로 낮춰졌다.
- 선혜청과 대동법
- 1608년 경기도에서 공물 대신 쌀을 거두려고 둔 관청과, 1708년까지 도별로 확대된(평안도·제주도 제외) 본격적 개혁.
- 대북과 소북
- 북인의 두 갈래. 대북(정인홍·이이첨)은 광해군을 지지했고, 소북은 유영경이 이끌었다.
- 서인(西人)
- 1623년 반정을 일으키고 『광해군일기』와 『선조수정실록』 편찬을 주도한 붕당.
- 실록과 일기
- 왕대별 공식 역사 기록. 폐위된 왕의 기록은 같은 방식으로 편찬해도 ‘일기’라 불렀다.
- 후금(後金)
- 1616년 누르하치가 세운 여진의 나라.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꿨다.
묻고 답하기
왜 ‘광해조’가 아니라 ‘광해군’이라고 부르나요?
‘○조’, ‘○종’ 같은 묘호는 왕이 죽은 뒤에 붙인다. 광해군은 폐위된 뒤 복위되지 못했기 때문에 왕자 칭호인 ‘군’만 남았다. 조선에서 같은 처지의 왕은 연산군뿐이다.
광해군은 맏아들이었나요?
아니다. 그는 선조와 후궁 사이에서 난 둘째 아들이었다. 친형은 임해군이었고, 한참 어린 이복동생 영창대군만이 왕비가 낳은 아들이었다.
명나라는 끝내 그를 인정하지 않았나요?
세자로서는 끝내 인정받지 못했다. 1594년부터 1604년까지 다섯 번의 요청이 모두 거부되거나 미뤄졌다. 그가 왕이 된 뒤 명은 관리를 보내 임해군을 확인했고, 1609년 그를 국왕으로 책봉했다.
선조는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바꾸려 했나요?
그렇게 쓴 백과사전 항목이 있지만, 실록에는 선조 자신이 그런 뜻을 밝힌 기록이 없다. 1607년 11월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전하거나 섭정을 시키라고 명했고, 이를 거부한 것은 대신들이었다. 선조의 진짜 속내는 알 수 없다.
광해군이 아버지를 독살했나요?
그런 증거는 없다. 선조가 세상을 떠난 날의 기록은 찹쌀밥을 먹은 뒤 갑자기 위급해졌다고만 적는다. 독살 소문은 1623년 반정 뒤 쓰인 사관 논평에만 나온다.
1619년 강홍립에게 항복하라고 명령했나요?
그가 쫓겨난 뒤 편찬된 기록은 그가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형세를 보아 행동하고 여진과 통하라고 했다고 적는다. 그가 후금과의 전쟁을 피하려 했다는 데에는 대부분의 서술이 동의하지만, 밀지의 정확한 내용은 독립된 당대 문헌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좋은 왕이었나요, 나쁜 왕이었나요?
역사가들의 의견이 갈린다. 명과 여진 사이에서 조선을 지킨 현실주의자로 보는 이도 있고, 옥사와 궁궐 공사로 국정을 망치고 외교는 기회주의에 그친 임금으로 보는 이도 있다. 적대적 기록도, 현대의 신화도 꼼꼼히 따져 봐야 한다는 데에는 대체로 뜻이 모인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계승범, 광해군 (光海君).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
- 이장희, 분조 (分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오종록, 무군사 (撫軍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임해군 (臨海君).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장희, 영창대군 (永昌大君).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순구, 인목왕후 (仁穆王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박광용, 계축옥사 (癸丑獄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장희, 인조반정 (仁祖反正).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차문섭, 광해군일기 (光海君日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오항녕, 선조실록 (宣祖實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정철, 대동법 (大同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
- 동의보감 (東醫寶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장희, 강홍립 (姜弘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선조실록』 25년(1592) 4월 28일 4번째 기사: 광해군을 세자로 정하다 (실록 ID kna_12504028_004).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25년(1592) 4월 29일 1번째 기사: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다 (실록 ID kna_12504029_001).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25년(1592) 6월 13일 8번째 기사: 세자에게 임시로 국사를 다스리게 하다 (실록 ID kna_12506013_008).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정탁, 정탁, 『약포집』 제4권 「피난행록」 상.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정탁, 정탁, 『약포집』 제5권 「피난행록」 하.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25년(1592) 10월 20일 3번째 기사: 군국의 기무를 동궁에게 맡기는 일 (실록 ID kna_12510020_003).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25년(1592) 10월 21일 3번째 기사: 유근이 성천의 동궁에게 다녀와 올린 보고 (실록 ID kna_12510021_003).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26년(1593) 1월 20일 1번째 기사: 대가가 정주에 도착하다 (실록 ID kna_12601020_001).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26년(1593) 8월 30일 2번째 기사: 세자에게 선위하겠다는 뜻을 밝히다 (실록 ID kna_12608030_002).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26년(1593) 12월 27일 5번째 기사: 무군사 일기 (실록 ID kna_12612027_005).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28년(1595) 1월 15일 3번째 기사: 세자 책봉이 인가받지 못한 일 (실록 ID kna_12801015_003).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28년(1595) 3월 27일 2번째 기사: 광해군에게 군무를 맡긴 칙서 (실록 ID kna_12803027_002).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28년(1595) 9월 29일 3번째 기사: 세자 책봉에 대한 제독의 견해와 예부의 복제 (실록 ID kna_12809029_003).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30년(1597) 12월 1일 2번째 기사: 중국 장수 접대 때 임해군을 참석하지 않게 하다 (실록 ID kna_13012001_002).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33년(1600) 3월 30일 1번째 기사: 왕세자가 문안하였으나 엄하게 대하다 (실록 ID kna_13303030_001).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35년(1602) 4월 14일 2번째 기사: 세자 책봉은 민력이 회복된 뒤 주청하라 (실록 ID kna_13504014_002).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36년(1603) 5월 16일 4번째 기사: 세자 책봉에 관한 명나라의 자문 (실록 ID kna_13605016_004).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37년(1604) 윤9월 26일 2번째 기사: 광해군 세자 책봉 주문에 대한 예부의 복제와 성지 (실록 ID kna_13709126_002).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37년(1604) 11월 25일 6번째 기사: 광해군 세자 책봉 요청에 관한 명 예부의 자문 (실록 ID kna_13711025_006).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수정실록』 40년(1607) 10월 1번째 기사: 세자에게 전위하거나 섭정케 하라고 하다 (실록 ID knb_14010011_001).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선조실록』 41년(1608) 1월 22일 5번째 기사: 정인홍의 상소에 불편한 심기를 알리다 (실록 ID kna_14101022_005).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광해군일기』 즉위년(1608) 2월 1일 5번째 기사: 선조가 갑자기 위급해지다 (실록 ID koa_10002001_005).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광해군일기』 즉위년(1608) 2월 2일 10번째 기사: 선왕의 유교를 받고 어좌에 오르다 (실록 ID koa_10002002_010).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광해군일기』 즉위년(1608) 5월 7일 2번째 기사: 선혜청을 설치하다 (실록 ID koa_10005007_002).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광해군일기』 즉위년(1608) 6월 20일 3번째 기사: 엄일괴 등이 서강에서 임해군을 보고 돌아가다 (실록 ID koa_10006020_003).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광해군일기』 1년(1609) 4월 29일 5번째 기사: 임해군 이진의 졸기 (실록 ID koa_10104029_005).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광해군일기』 1년(1609) 6월 2일 3번째 기사: 중국 사신이 책봉 조서와 칙서를 전하다 (실록 ID koa_10106002_003).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광해군일기』 5년(1613) 4월 25일 6번째 기사: 죄수 박응서가 역모를 고변하다 (실록 ID koa_10504025_006).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광해군일기』 6년(1614) 2월 10일 2번째 기사: 강화 부사 정항이 영창대군을 살해하다 (실록 ID koa_10602010_002).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광해군일기』 10년(1618) 1월 30일 1번째 기사: 서궁을 폄손하는 절목을 의논하다 (실록 ID koa_11001030_001).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광해군일기』 11년(1619) 2월 3일 2번째 기사: 도원수 강홍립에게 하유하다 (실록 ID koa_11102003_002).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광해군일기』 11년(1619) 2월 21일 4번째 기사: 조선군이 압록강을 건너다 (실록 ID koa_11102021_004).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광해군일기』 11년(1619) 3월 12일 1번째 기사: 평안 감사가 심하의 패전을 보고하다 (실록 ID koa_11103012_001).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광해군일기』 11년(1619) 4월 8일 1번째 기사: 강홍립과 국방에 관한 왕의 전교와 편찬자의 주석 (실록 ID koa_11104008_001).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광해군일기』 11년(1619) 5월 27일 1번째 기사: 비변사가 전사자 휼전을 아뢰다 (실록 ID koa_11105027_001).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인조실록』 1년(1623) 3월 13일 1번째 기사: 의병을 일으켜 즉위하다 (실록 ID kpa_10103013_001).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인조실록』 1년(1623) 3월 14일 7번째 기사: 인조의 즉위와 광해군의 폐위에 대한 왕대비의 교서 (실록 ID kpa_10103014_007).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인조실록』 1년(1623) 9월 14일 1번째 기사와 독약 소문을 적은 사관 논평 (실록 ID kpa_10109014_001).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인조실록』 3년(1625) 3월 19일 3번째 기사: 동양위 신익성에게 영창대군의 비문을 쓰게 하다 (실록 ID kpa_10303019_003).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인조실록』 19년(1641) 7월 10일 1번째 기사: 광해군이 죽다 (실록 ID kpa_11907010_001).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한명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 (16) 광해군과 누르하치, 그리고 명나라 Ⅲ. 서울신문, 2007
- 한명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 (17) 광해군과 누르하치, 그리고 명나라 Ⅳ. 서울신문, 2007
- 한명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 (21)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Ⅲ. 서울신문, 2007
- 오항녕, 벌거숭이 임금님, 그 이후! ‘광해’의 가면을 벗기자!. 프레시안, 2012
- 오항녕, <최종병기 활>이 놓쳤던 광해군의 앞잡이!. 프레시안, 2013
- 이강근, 「경희궁」, 『한국문화사』 39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제5장 「왕권의 상징, 궁궐 건축」.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 Gwanghaegun of Joseon. 영어 위키백과
- Taichang Emperor (태창제). 영어 위키백과
- Battle of Sarhu (사르후 전투). 영어 위키백과
- Donguibogam: Principles and Practice of Eastern Medicine (동의보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 稻葉岩吉 (이나바 이와키치), 光海君時代の滿鮮關係 (광해군 시대의 만선 관계). 大阪屋號書店, 1933
- 한명기,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역사비평사, 2000
-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푸른역사, 2009
- 계승범, 모후의 반역: 광해군 대 대비폐위논쟁과 효치국가의 탄생. 역사비평사, 2021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