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남원성 전투(1597)

남원성 전투 南原城戰鬪 · 일본어 南原城の戦い(난겐조 전투) · 중국어 南原之戰

1597년

처음 게시 2026년 10월 12일 · 마지막 수정 2026년 10월 14일 · 편집 테라 스크립타

AI 작성 · AI 사실 검수

Claude가 쓰고 Codex(gpt-6.1-sol)가 공개 출처와 대조해 사실·연대·인용과 영어·한국어판을 독립 검수했습니다. 사람 전문가의 검토는 거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AI 검수: 2026-10-12. 찾아서 고친 문제 17건.

한 문장으로

1597년 정유재란 때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끈 일본 좌군이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기병 약 3,000명과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끈 조선군이 지키던 전라도 남원성을 에워쌌고, 음력 8월 15일 밤 또는 16일 밤(양력 9월 25일 또는 26일, 기록마다 다름)에 볏단과 풀단으로 해자를 메우고 성벽을 넘어 성을 함락했어요. 이복남과 거의 모든 장수가 전사했고, 탈출한 양원은 뒤에 명나라에서 처형되었으며, 전라도의 중심 전주는 싸움 없이 일본군에게 넘어갔어요.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400여 년 전, 일본은 조선에 두 번 쳐들어왔어요. 1592년 첫 번째 침략 때 일본군은 곡식이 많이 나는 남서쪽의 전라도를 끝내 차지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1597년에 다시 왔을 때는 전라도부터 차지하려고 했어요.

남원은 동쪽 산줄기를 넘어 전라도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는 고을이었어요.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수 양원이 기병 3,000명쯤을 거느리고 이곳을 지켰어요. 조선의 장수 이복남도 군사를 이끌고 적의 포위를 뚫고 성 안으로 들어와 함께 싸웠어요.

1597년 9월, 아주 많은 일본군이 남원성을 둘러쌌어요. 일본군은 사흘 동안 성벽을 향해 총을 쏘았어요. 그리고 들판의 벼와 풀을 베어 단으로 묶은 다음, 밤에 그것을 성 둘레의 해자(물길)에 던져 넣어 비탈길처럼 쌓아 올렸어요.

그날 밤 성은 무너졌어요. 이복남과 거의 모든 장수가 싸우다 죽었고, 많은 군사와 백성이 목숨을 잃었어요. 일본군은 몇 명을 죽였는지 증명하려고 죽은 사람들의 코를 베었어요. 양원은 탈출했지만, 성을 잃은 죄로 뒤에 명나라 조정에서 사형을 당했어요.

뒤에 죽은 이들은 한 무덤에 함께 묻혔어요. 오늘날 이 무덤을 ‘만인의총(萬人義塚)’, 곧 ‘만 명의 의로운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불러요. 지금도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그들을 기억해요.

한눈에 보기

날짜
1597년(선조 30) 음력 8월 12–13일(양력 9월 22–23일,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표 기준)에 일본군이 남원에 이르렀고, 마지막 공격은 『징비록』에 따르면 15일 밤, 8월 18일 자 조정 보고에 따르면 16일 밤(양력 9월 25일 또는 26일)이었다. 한국 측 서술은 대개 16일(양력 9월 26일)을 함락일로 적는다
장소
남원읍성.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에 있는 평지의 읍성으로,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다
전쟁
임진왜란(1592–1598)의 두 번째 침략, 정유재란(1597–1598)
지휘관
명: 부총병 양원, 중군 이신방·천총 장표·모승선 / 조선: 전라병사 이복남, 접반사 정기원, 남원부사 임현, 김경로·오응정·신호 등 / 일본: 좌군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시마즈 요시히로·하치스카 이에마사·가토 요시아키·도도 다카토라 등
병력
수비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명군(요동 기병) 약 3,000명, 조선 관군 약 1,000명. 『징비록』은 이복남이 데려온 군사가 수백 명에 불과했다고 적는다 / 일본: 자료에 따라 약 5만~5만 6,800명(좌군과 수군 부대)
피해
성 안의 명·조선 장수는 거의 모두 전사했다. 전체 희생자 수는 자료마다 크게 다르다. 일본 측 문서를 바탕으로 한 집계는 약 3,700명이고, 후대 한국 측 서술은 수천 명의 군사와 1만 명 안팎의 성민을 말한다. 일본군의 피해는 이 글이 참고한 자료에 나오지 않는다
결과
일본군의 승리. 전주의 명군 수비대가 물러나 일본군은 9월 29일 전주를 싸움 없이 점령했고, 이어 충청도로 진출했다
주요 사료
『선조실록』(1597년 음력 8–9월의 보고), 『선조수정실록』, 유성룡의 『징비록』(생존자 김효의의 증언), 『명사』, 오코치 히데모토의 『조선기』, 히데요시의 주인장, 승려 게이넨의 일기 같은 일본 측 기록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쉬움

남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남원성 전투는 명과 일본의 강화 교섭이 몇 해 동안 이어지다 깨진 뒤 1597년에 시작된 일본의 두 번째 조선 침략, 곧 정유재란 초기의 큰 전투이다. 전라도 동남쪽의 읍성 남원은 경상도에서 오는 군대가 전라도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었고, 조명 연합군은 이곳에서 일본군을 막기로 했다.

성은 부총병 양원이 이끈 명나라 기병 약 3,000명이 지켰고,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끈 그보다 적은 조선군과 여러 지방관이 함께했다. 이에 맞선 것은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끈 수만 명의 일본 좌군이었다. 일본군은 1597년 음력 8월 12–13일(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표로 양력 9월 22–23일)에 남원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다.

사흘 동안 조총을 쏘아 대던 일본군은 15일 밤 또는 16일 밤(양력 9월 25일 또는 26일, 기록마다 다름), 베어 낸 벼와 풀을 단으로 묶어 해자를 메우고 성벽에 쌓아 올린 뒤 성을 넘어 들어왔다. 성은 몇 시간 만에 무너졌다. 이복남, 명나라 장수 이신방·장표·모승선, 그리고 조선의 관원 거의 모두가 전사했고, 많은 군사와 백성이 함께 목숨을 잃었다. 양원은 소수의 부하만 데리고 포위를 뚫고 빠져나갔다.

남원이 무너지자 전라도의 문이 열렸다. 전라도의 중심 고을 전주를 지키던 명군은 성을 버렸고, 일본군은 9월 29일 싸움 없이 전주를 차지했다. 이 전투는 참혹함으로도 기억된다. 이 원정에서 일본군은 전과의 증거로 죽은 이들의 코를 베었다. 오늘날 남원성의 희생자들은 ‘만 명의 의로운 사람들의 무덤’이라는 뜻의 만인의총에서 기려진다.

[1][2][16][28][29][35][48][43][8]

쉬움

전라도부터: 1597년 일본군의 계획

1592년 첫 침략 때 일본군은 한양과 평양까지 휩쓸었지만, 조선 최대의 곡창 전라도는 끝내 차지하지 못했고, 전라도는 계속 조선의 전쟁을 먹여 살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새 침략의 1차 목표를 호남, 곧 전라도의 장악으로 설명하고, 일본어 위키백과는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를 “전라도를 남김없이 성패(成敗)하고, 나아가 충청도로도 출격할 것”이라고 요약한다. 그 뒤에는 해안에 성을 쌓도록 되어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새 침략에 편성된 병력을 14만 명가량으로 적는다.

이 계획은 바다에 달려 있었다. 1597년 8월,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거의 궤멸했고(8월 27–28일), 『징비록』은 이어 일본 배들이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두치진에 상륙하고 남원으로 진격했다고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일본군은 음력 7월 28일(양력 9월 9일)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키타 히데이에를 대장으로 한 좌군은 사천에서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왔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수륙으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또 하나의 군대인 모리 히데모토의 우군은 가토 기요마사를 선봉으로 초계·안의를 거쳐 더 북쪽의 산줄기를 넘어 전주로 향했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이때 스물다섯 살 무렵이었다. 비젠·미마사카의 영주로 히데요시의 양녀 고히메와 혼인했으며, 1593년 행주 전투에서 이미 총대장을 맡은 적이 있었다. 좌군에는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하치스카 이에마사 같은 노련한 장수들이 함께했다.

[3][2][37][29][44][48]

쉬움

양원, 이복남, 그리고 수비군

양원은 북방 변경 출신의 명나라 장수였다. 1593년에는 평양을 되찾은 명군의 한 날개를 이끌었고, 한국어·중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벽제관에서 이여송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탰다. 1597년 그는 명의 본군보다 앞서 음력 5월 군사 3,000명을 이끌고 한양에 왔다. 『명사』는 명의 지휘부가 그에게 남원에 주둔하라고 명한 뒤, 거짓 보고로 강화 교섭을 그르치는 데 한몫한 사신 심유경을 붙잡게 했다고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다른 명군은 전주·성주·충주에 배치되었다.

남원을 지키기로 한 결정은 서둘러 내려졌다. 음력 8월 15일 신하들을 만난 자리에서 선조는, 양원이 어디를 지켜야 하느냐고 묻자 비변사가 그 자리에서 “남원”이라고 답했으며, 양원이 “나는 범과 같고 적은 양과 같으니 저들이 어찌 나를 당하겠는가”라고 큰소리쳤다고 돌아보았다. 같은 날 한 신하는 양원이 북쪽 오랑캐를 막을 줄만 알지 일본군을 겪어 본 적이 없는 북방 장수라며 걱정했다.

성 안의 조선 측 인물로는 양원의 접반사 정기원, 남원부사 임현과 여러 지방관이 있었다. 조선의 주력은 1592년 웅치에서 싸웠고 남원부사를 지낸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끌기로 되어 있었다. 양원이 그를 불렀지만 이복남은 늑장을 부렸다. 『징비록』은 그가 겨우 수백 명을 데리고 왔다고 적고, 선조가 명에 보낸 자문은 그가 정예 1,000여 명을 이끌고 적진을 뚫고 들어갔으며 성에 이른 것은 700명이었다고 적는다. 그는 김경로, 근처 교룡산성의 별장 신호 등과 함께 북문을 맡았다.

수비군이 지켜야 할 백성 가운데 많은 이들은 이미 떠난 뒤였다. 정기원은 양원에게 남원 백성들이 그를 “장성(長城)처럼” 믿고 있다고 말했지만, 『징비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수륙으로 몰려온다는 급보가 오자 성 안은 술렁였고 백성들은 흩어져 달아나, 성 안에는 양원이 거느린 요동 기병 3,000명만 남았다. 포위 직전 전주의 명나라 장수가 올린 보고에는 남원 성이 텅 비었다는 말이 있었고, 함락 뒤 사헌부는 조선의 군사와 백성이 흩어져 달아나 명군이 홀로 성을 지키다 함락되었다고 탄식했다.

[26][31][2][15][13][14][17][18][29][1][4][40][41][38]

중급

평지의 읍성

남원성은 산성이 아니라 평지에 쌓은 고을의 돌 성곽, 곧 읍성이었다. 1477년에 쌓기 시작해 1530년 이전에 둘레 약 3.4km, 한 변이 850m 남짓한 규모로 넓혀졌고, 네 벽 가운데에 문을 하나씩 내고 안쪽 길은 바둑판 모양으로 짰다. 1593년에는 명나라 참장 낙상지가 첫 침략 때 부서진 성을 고치고 옹성과 치성을 덧붙였다.

양원은 성을 더 보강했다. 생존자의 증언을 담은 『징비록』에 따르면 그는 성을 한 길(약 3m)쯤 더 높이고, 성 밖의 낮은 담장인 양마장(羊馬墻)에 포혈을 많이 뚫었으며, 성문에 대포 여러 문을 걸고 해자를 한두 길 깊이로 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여장을 이용해 성벽 높이를 16척으로 높였다고 덧붙인다. 1997년 이후의 발굴 조사로 북쪽 성벽과 북문 터, 치성, 그리고 성벽에서 7–8m 바깥에 있는 양마장의 기초와 그 밖의 너비 4–5m 돌 해자가 확인되었고, 양마장에서는 조선의 총통 한 점이 나왔다.

양원의 선택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성 밖에는 가파른 산 위의 오래된 돌 성인 교룡산성이 있었고, 전쟁 중에 수리되어 있었다. 정기원과 남원부사 임현은 읍성과 산성이 서로 의지하는 ‘자모진(子母陣)’을 이루자고 양원에게 청했고, 『선조수정실록』도 여론이 산성을 지키자는 쪽이었다고 적는다. 양원은 따르지 않았다. 그는 읍성으로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보았고, 정기원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 군사는 싸움에 임하면 달아난다고 비웃었다.

[6][7][29][13][26]

쉬움

1597년 9월의 나흘

포위전을 가장 자세히 전하는 것은 김효의의 증언이다. 그는 양원을 따라 남원에 들어간 군기시 파진군 12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 가운데 홀로 살아남았다. 유성룡은 “뒤에 성을 지키는 이들이 경계로 삼게 하려고” 그의 말을 『징비록』에 자세히 적었다. 13일(양력 9월 23일), 일본군 선봉 100여 명이 성 아래로 와서 조총을 쏘고는 논밭 사이로 서너 명씩 흩어졌다. 수비군은 승자소포로 응사했지만 흩어진 적을 맞히지 못했고, 성 위의 군사들은 이따금 일본군의 탄환에 맞아 쓰러졌다. 이어 일본군이 성 위를 향해 말을 걸자, 양원은 가정(家丁) 한 사람을 통사와 함께 일본 진영에 보냈는데, 그가 가지고 돌아온 것은 싸움을 청하는 글이었다.

14일(양력 9월 24일), 일본군은 성의 세 면을 둘러 진을 치고 전날처럼 총을 쏘아 댔다. 양원은 남문 밖에 빽빽하던 민가를 불태우게 했지만 돌담과 흙벽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일본군은 그 뒤에 숨어 쏘아 성 위의 군사를 많이 맞혔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남쪽에는 우키타·도도 다카토라·오타 가즈요시, 서쪽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소 요시토시, 북쪽에는 시마즈 요시히로·가토 요시아키, 동쪽에는 하치스카 이에마사 등이 진을 쳤다.

15일(양력 9월 25일), 성 위에서는 일본군이 성 밖의 잡초와 논에 여문 벼를 베어 수없이 많은 단으로 묶는 모습이 보였지만,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했다. 명나라 유격 진우충이 약 3,000명을 거느리고 전주에 있었고, 남원의 군사들은 날마다 그가 구원하러 오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김효의에 따르면 이날 저녁 성가퀴를 지키던 군사들은 서로 귓속말을 나누며 말안장을 챙기는 등 달아날 기색을 보였다.

밤 1경(초저녁)에 일본 진영에서 큰 함성이 일더니, 총탄이 우박처럼 성 위로 쏟아져 수비군은 고개를 내밀지 못했다. 한두 시간 만에 풀단이 해자를 메우고 양마장 안팎에 쌓여 성벽 높이와 같아졌고, 일본군은 그것을 밟고 성을 넘었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일본 측 기록을 따라 높은 공성용 누대에서 성 안으로 사격했고 긴 사다리를 걸었다고 덧붙인다. 며칠 뒤 조정에 이른 보고는 일본군이 16일 밤 남문으로 기어올랐다고 했고, 『징비록』은 마지막 공격을 15일 밤으로 적는다. 한국 측 서술은 대개 16일(양력 9월 26일)을 함락일로 적지만, 마지막 공격이 어느 날 밤이었는지는 기록이 서로 다르다.

[29][16][37][35][48]

중급

함락, 학살, 그리고 코

일본군이 성 안으로 들어오자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남문 밖 양마장을 지키던 김효의가 허둥지둥 성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성 위에는 이미 사람이 없었다. 북문에서는 명나라 기병들이 모두 말에 올라 빠져나가려 했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거리는 말로 꽉 막혀 있었다. 문이 열리자 군마가 앞다투어 쏟아져 나갔지만, 일본군은 성 밖을 두세 겹으로 둘러싸고 길목마다 지키다가 긴 칼로 그들을 베었다. 달이 밝아 빠져나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김효의는 논에 뛰어들어 풀숲에 숨어 있다가 일본군이 물러간 뒤에야 빠져나왔다.

성 안에서는 조선의 장수들이 끝까지 싸웠다. 양원과 함께 빠져나온 통사의 말을 바탕으로 선조가 명에 보낸 자문은, 이복남·신호와 구례현감이 성 안의 시가전을 버티지 못하고 정기원, 남원부사 임현, 판관 이덕회, 그리고 관군 700여 명과 함께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적는다. 『선조수정실록』은 명의 이신방·장표·모승선, 조선의 정기원·이복남·오응정·김경로·신호·임현·이덕회·구례현감 이원춘을 전사자로 들고, 명군과 조선군이 모두 베였다고 적는다. 정기원은 피하라는 양원의 권유를 거절하고, 아버지에게 “소자는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다”는 편지를 남겼다.

살육은 군사에서 그치지 않았다. 정유재란 때 히데요시는 노소·남녀·승속을 가리지 말고 베라고 명했고, 머리보다 옮기기 쉬운 코를 베어 전과의 증거로 일본에 보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수만 명에 이른 전라도의 ‘코베기’ 피해지로 남원을 맨 먼저 든다. 박현규의 2019년 연구는 시마즈 요시히로, 도도 다카토라 등 여러 장수에게 남원성 전투의 전과를 인정한 히데요시의 주인장(朱印狀)이 남아 있다고 밝힌다. 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다.

이 원정을 직접 본 일본인 가운데 이례적으로 비판적인 기록을 남긴 이도 있다. 남원 공격에 참여한 장수 오타 가즈요시를 따라 조선에 건너간 늙은 의승(醫僧) 게이넨은 1597년 6월 24일부터 이듬해 2월 2일까지(일본 역법 기준) 일기 『조선일일기(朝鮮日々記)』를 썼다. 이 일기는 일본군의 방화와 살육, 인신매매를 기록하고 있는데, 한 대목에서는 군대를 따라다니는 인신매매 상인들이 남녀노소를 사들여 목에 줄을 매어 몰고 가는 모습을 그린다. 다만 이 글이 참고한 자료에는 게이넨이 남원에서 본 일을 어떻게 적었는지는 인용되어 있지 않다.

[29][18][28][5][3][46][45][32][33][47][37][34]

중급

이복남은 어떻게 죽었나

이복남의 죽음은 두 가지로 전해진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적는다. 남원성 전투 문서는 그가 오응정·김경로와 함께 북문의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했다고 하고, 이복남 문서는 16일에 군졸을 시켜 볏짚을 자신의 주위에 쌓고 불을 지르게 해 분신했다고 한다. 남원 만인의총 문서도 분신 자결을 말한다. 그러나 이 문서들은 출처를 밝히지 않으며, 그 방식도 서로 다르다.

더 이른 공식 기록은 그가 싸우다 죽었다고만 적는다. 함락 뒤 3주가 채 안 되어 양원과 함께 탈출한 목격자의 말을 바탕으로 쓴 선조의 자문은, 이복남 등이 “성 안의 시가전을 버티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선조수정실록』은 그를 “모두 죽은” 이들 가운데 들고, 『징비록』도 그와 장수들이 “모두 죽었다”고 적으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일본군이 남문을 돌파한 뒤 벌어진 혼전 속에서 그가 전사했다고 쓴다.

이 글은 더 강한 사료를 따른다. 이복남은 성이 함락될 때 성 안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분신 자결 이야기는 집안이나 지역의 전승, 또는 후대의 추모 글에서 나왔을 수 있지만,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그 출발점을 확인할 수 없다. 이복남은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1612년 남원 충렬사에 배향되었으며, 뒤에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6][38][39][18][28][29][1][4]

중급

양원의 탈출과 처형

양원은 살아서 빠져나왔지만, 그 과정은 기록마다 다르다. 조정에 처음 이른 보고는 그가 300여 명을 데리고 서문으로 쳐 나갔으며, 탄환 두 발을 맞고 겨우 10여 명만 남아 돌아왔다고 한다. 선조의 자문은 기병 100여 명을 이끌고 겹겹의 포위를 뚫었다고 하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50기로 적는다. 『징비록』은 그가 가정 몇 사람과 말을 달려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고 하면서 “일본군이 총병인 줄 알고 일부러 놓아주었다는 말도 있다”는 소문을 덧붙인다. 『명사』에는 일본군이 아직 화의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양원을 죽이지 못했다”는 명나라 참모의 말이 실려 있다. 뒤의 실록 기사는 양원이 정기원을 찾으려고 세 번이나 성 안을 드나들다가 끝내 혼자 빠져나왔다고 전한다.

명 조정은 양원에게 책임을 물었다. 음력 9월 20일(양력 1597년 10월 30일) 명의 도찰원은, 양원과 전주를 버린 진우충이 “몰래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아났으니” 붙잡아 엄히 처벌하라는 황제의 명을 알렸다. 경리 양호는 조선이 양원을 위해 변호하면 다른 장수들도 그를 본받을 것이라며 조선 조정에 구명하지 말라고 일렀다. 1598년 여름에는 명나라 관원이 선조에게 양원이 요양의 옥에 갇혀 있다고 전했다.

양원은 1598년에 처형되었다. 그해 음력 10월 8일(양력 11월 6일), 베어진 그의 머리가 한양 남대문 밖에 이르러 내걸렸다.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도 명이 그를 처형하고 조선에 조리돌렸다고 적는다. 비변사는 평양 탈환의 공을 잊을 수 없다며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자고 청했다. 사관은 양원이 원군 없이 외로운 성에서 피 흘려 싸웠는데, 전주에서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은” 진우충은 아직 목숨을 보전하고 있다며, 사람들이 양원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고 덧붙였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두 사람 모두 처형되었다고 하지만,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진우충의 최종 처분을 확인할 수 없다.

[16][18][20][21][23][24][25][28][29][31][2][37]

중급

같은 무렵: 황석산성과 전주

좌군이 남원을 에워싸고 있을 때, 우군은 북동쪽에서 산줄기를 넘고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끈 우군의 선봉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인 안음의 황석산성을 공격했다. 체찰사 이원익은 안음현감 곽준에게 세 고을의 군사를 맡겨 이 성을 지키게 하고 김해부사 백사림에게 돕게 했으며, 전 함양군수 조종도도 가족을 이끌고 성에 들어왔다. 공격은 음력 8월 16일(양력 9월 26일)에 시작되었다. 함락일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17일(9월 27일), 한국어 위키백과가 18일(9월 28일)로 적는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남문으로 몰려오자 백사림은 처자를 줄에 매달아 성 밖으로 내려보내고 달아났다. 『징비록』도 백사림이 먼저 빠져나가자 군사들이 모두 무너졌다고 적는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곽준은 빨리 계책을 세우라고 울며 청하는 가족에게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인데 무슨 계책을 다시 세운단 말인가”라며 웃고는 호상에 태연히 걸터앉은 채 죽임을 당했다. 두 아들도 그 곁에서 죽었고, 남편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딸은 스스로 목을 맸다. 조종도는 싸움에 앞서 성을 지키다 죽는 것도 영광이라는 시를 지었고, 곽준과 함께 죽었다.

전라도의 중심 전주는 싸움 없이 넘어갔다. 『명사』에 따르면 남원에서 겨우 100리(약 50km) 떨어진 전주의 진우충은 남원의 구원 요청에 응하지 않았고, 남원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성을 버렸다. 조선 조정은 전주부윤 박경신의 책임도 물었다. 그는 적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달아날 채비를 했고, 이것이 군민의 소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음력 8월 19일(양력 9월 29일) 일본군은 전주를 점령했고, 좌군과 우군은 이곳에서 합류한 뒤 충청도로 진출했다.

[27][29][2][11][10][42][31][17][1][48][43]

중급

같은 해 세계에서는(1597)

그해 앞서 1597년 2월 5일, 히데요시 정권은 나가사키에서 일본인과 외국인 가톨릭 신자 26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다. 일본의 그리스도교 박해에서 전환점이 된 사건이다. 유럽에서는 잉글랜드와 에스파냐의 긴 전쟁이 이어졌다. 1597년 10월부터 11월 사이 에스파냐의 세 번째 무적함대가 브리튼섬을 향해 출항했지만 폭풍에 흩어졌다.

잉글랜드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1597년 처음 인쇄되었다. 이 첫 사절판은 본문 상태가 나빠 뒤의 판본에서 바로잡혔다. 아일랜드에서는 1593년에 시작된, 아일랜드 영주들과 잉글랜드 왕실 사이의 ‘9년 전쟁’이 한창이었다.

이 사건들은 남원과 아무 관련이 없다. 나란히 놓아 보면, 전라도가 짓밟힌 해가 일본에서는 종교 박해의 해였고 유럽에서는 바다의 전쟁과 새 문학의 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49][50][51][52]

중급

만인의총과 남원의 기억

죽은 이들은 한 무덤에 모아 묻혔다. 박현규의 2019년 연구에 따르면 1598년 음력 4월 남원으로 돌아온 명나라 장수 이방춘이 성 안팎에 산처럼 쌓여 있던 유해를 거두어 큰 무덤을 만들었고, 이것이 오늘날 만인의총의 전신이다. 1612년에는 지역 유림이 전사한 관원들을 모시는 사당 충렬사를 세웠다. 처음에는 정기원·이복남 등 네 사람을 모셨고, 뒤에 더 늘어났다. 사당은 자리를 옮겼다가 1869년 철폐되어 다시 세워졌고, 일제강점기에 또 헐렸다가 1964년에 다시 세워졌다.

무덤도 1964년 남원의 지금 자리로 옮겨졌고, 1981년 대한민국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11년부터 공식 명칭은 ‘남원 만인의총’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곳을 성을 지키다 전사한 군·관·민을 함께 묻은 무덤으로 설명한다. 박현규는 ‘만인’이라는 이름이 1945년 해방 이후 희생자가 아주 많았다는 뜻으로 붙은 것이며, 정확한 숫자의 증거는 아니라고 본다.

남원의 함락은 문학에도 들어갔다. 1621년 조위한은 전쟁으로 흩어진 남원의 한 가족을 그린 한문 소설 『최척전』을 지었다. 남원이 함락되자 아내 옥영은 일본군에게 끌려가고 남편 최척은 명나라 장수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는데, 여러 해 뒤 두 사람은 안남(베트남)에서 다시 만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작품이 역사성과 지리 감각을 사실적으로 드러냈다고 높이 평가한다.

일본에서도 남원의 죽음은 다른 방식으로 기억된다. 박현규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하가 만들었다는 ‘천인비총(千人鼻塚)’과, 1599년 시마즈 요시히로 부자가 고야산에 세운 적군·아군 전사자 공양비를 소개하는데, 이 비문에는 남원성 희생자 420명을 공양한다는 내용이 있다. 교토에서는 조선에서 보내온 코를 묻은 무덤, 뒤에 귀무덤(미미즈카)으로 불리게 된 무덤이 1597년에 만들어졌다. 승려 기엔의 일기는 그해 9월 조선에서 귀와 코 15통이 올라왔다고 적고, 일본 역법 9월 28일에는 이곳에서 공양 법회가 열렸다.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교토에 묻힌 코 가운데 얼마가 남원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다. 우스키에 전하는 게이넨의 일기는 2026년 3월 일본 국가 중요문화재 지정이 답신(권고)되었다.

[32][8][9][39][12][46][45][34]

심화

얼마나 싸웠고, 얼마나 죽었나

수비군의 숫자는 셈법에 따라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명군 3,000명과 조선 관군 1,000명, 모두 4,000명으로 적고, 일본어 위키백과는 명군 약 3,000명과 조선군 1,000–3,000명으로 적는다. 『징비록』은 백성들이 달아나 성 안에 양원의 명나라 기병 3,000명이 남았고, 이후 이복남이 수백 명의 군사만 데리고 들어왔다고 하며, 선조의 자문은 성에 이른 조선군을 700명으로 적는다. 당대 보고들은 또 포위 전에 백성 대부분이 이미 달아났다고 하므로, 성 안에 1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있었다는 후대의 숫자는 이 기록들과 맞추기 어렵다.

공격군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남원전투」 항목에서 5만 6,000여 명, 「임진왜란」 항목에서 5만 명이고, 일본어 위키백과는 좌군과 수군을 합쳐 5만 6,800명, 영어 위키백과는 4만 9,600명으로 적는다. 이는 군대 전체의 숫자여서, 실제로 공격에 나선 병력이 얼마였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희생자에 대한 가장 이른 조선 측 숫자는 선조의 자문에 나온다. 장수들과 함께 조선 관군 700여 명이 죽었고, 여기에 명군의 희생이 더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남원 만인의총」 항목은 군사 2,000명과 주민 1만여 명, 「충렬사」 항목은 “5천여 영령”, 한국어 위키백과는 군사 4,000명과 성민 7,000명, 일본어 위키백과는 명·조선군 5,000명이 죽었다고 적는다. 박현규는 오코치 히데모토의 기록(『조선물어』, 『조선기』라고도 한다)의 집계와 히데요시가 도도 다카토라에게 내린 주인장을 합쳐 희생자를 3,735명으로 보며, 1만 명이라는 숫자를 뒷받침할 근거는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이 숫자들 가운데 어느 것도 온전한 명단으로 확인할 수 없다. 일본 측 집계는 포상을 받으려고 바친 코와 머리에 달려 있고, 조선 측 숫자는 후대의 추모에, ‘만인’이라는 이름은 현대의 전승에 기대고 있다. 이 자료들을 종합하면, 성 안의 장수가 거의 다 전사했고 명군 수비대가 대부분 궤멸했으며 성이 함락될 때 군사와 민간인이 학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의 피해는 이 글이 참고한 자료에 나오지 않는다.

[1][2][8][9][29][18][17][37][35][36][32]

심화

사료와 그 한계

가장 이른 기록은 함락 이틀 뒤인 음력 8월 18일 자 『선조실록』의 보고이다. 일본군이 12일에 남원을 에워싸고 밤낮으로 공격하다가 16일 밤 남문으로 기어올랐다는 내용으로, 멀리서 급히 쓴 것이다. 9월 2일 자 선조의 자문은 양원과 함께 빠져나온 통사 박의성의 증언을 더하고 전사한 관원들을 열거한다. 수십 년 뒤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은 장수별 수비 성문까지 정리한 깔끔한 요약을 싣는다.

가장 풍부한 사료는 『징비록』이다. 성 위에서 싸운 병졸 김효의의 증언을 바탕으로, 싸움을 청하는 글, 남문 밖의 불탄 민가, 볏단과 풀단, 북문의 아수라장처럼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날짜별 세부를 전한다. 그러나 이는 전쟁 뒤 유성룡이 한 사람의 기억을 받아 적은 것이고, 날짜도 조정의 보고와 꼭 맞지는 않는다. 『징비록』은 일본군 선봉이 13일에 왔고 마지막 공격이 15일 밤이었다고 하지만, 조정의 보고는 12일에 포위가 시작되어 16일 밤에 성이 넘어갔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한 항목에서는 13일부터 16일까지, 다른 항목에서는 14일부터 공격했다고 적는다.

이름과 세부도 엇갈린다. 전사한 구례현감은 『선조수정실록』에서 이원춘이지만, 『징비록』은 광양현감 이춘원으로 적고, 오응정의 이름도 두 가지 한자로 적힌다. 황석산성에 대해 위키문헌의 『징비록』 원문은 조종도를 그가 살던 함안(咸安)의 전 군수로 적지만, 조종도의 문집에 옮겨 실린 같은 대목과 실록은 함양(咸陽)으로 적는다. 『징비록』은 백사림도 전 김해부사로 적지만, 실록은 그를 현직 김해부사로 다룬다.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장계는 더 나아가, 백사림이 성이 함락될 때 아직 성 안에 있다가 항복한 일본 병사의 안내로 빠져나왔다고 전한다. 청나라 때 편찬된 『명사』는 가토 기요마사가 남원을 포위했다고 하지만, 기요마사는 우군과 함께 황석산성 쪽에 있었다. 오타 가즈요시의 가신 오코치 히데모토가 쓴 『조선기』나 히데요시의 서장 같은 일본 측 기록은 공격한 쪽의 시각과 그들의 전과 집계를 전해 주지만, 이 글은 이들을 현대 연구를 통해서만 인용한다.

널리 퍼진 세부 가운데 근거가 약한 것도 있다. 이복남의 분신 자결은 이른 기록에 없고, 양원이 일본군과 밀약을 맺었다는 일부 현대 서술은 사료가 말하는 범위를 넘어선다. 『징비록』은 일본군이 그를 놓아주었다는 소문을, 『명사』는 그들이 감히 그를 죽이지 못했다는 말을 전할 뿐이다. 무덤 이름의 바탕인 ‘1만 명’이라는 숫자도, 박현규의 지적처럼 당대 자료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16][18][28][27][19][22][30][29][1][2][8][31][32][40]

심화

남원은 왜 무너졌고, 무엇을 바꾸었나

당대 사람들은 여러 원인을 들었다. 유성룡은 양원이 오랑캐를 막는 법은 알아도 왜적을 막는 법은 모르는 요동 장수였고, 평지의 성은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는 교훈을 남겼다. 조선 측의 권고를 물리치고 교룡산성 대신 읍성을 택한 결정은, 말이 쓸모없는 성벽 안에 기병 3,000명을 가두어 버렸다. 병력의 차이도 압도적이었다. 백성 대부분이 떠난 성에서 수천 명의 수비군이 그 열 배가 넘는 군대를 맞았고, 전주의 원군은 끝내 오지 않았다.

조선의 관리들은 자신들의 책임도 인정했다. 함락 뒤 사헌부는 조선의 군사와 백성이 흩어져 명군 홀로 싸우게 했고 전주부윤은 적이 오기도 전에 달아났다고 비판했다. 선조도 명에 보낸 자문에서 조선이 약해 명군이 남의 땅에서 싸우게 되었다며 자신의 죄를 말했다. 백성의 피란, 이복남 부대의 늦은 도착, 진우충의 구원 거부가 겹쳐 남원은 고립되었다.

결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남원과 전주를 잃자 전라도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일본군은 전라도를 휩쓸며 충청도로 북상했다. 한양은 공황에 빠져 도성 사람들이 피란하기 시작했다. 『징비록』은 남원이 무너지자 전주 이북이 모두 와해되었다고 적는다. 그러나 일본군은 한양에 이르지 못했다. 10월 직산 부근에서 명군이 일본군 일부와 맞섰고, 10월 26일 이순신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물리쳤으며, 가을부터 일본군은 남해안의 성들로 물러났다. 이 사건들이 각각 철수에 얼마나 작용했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이다.

이처럼 남원성 전투는 정유재란의 갈림길에 서 있다. 1597년 일본군이 땅에서 거둔 큰 승리였고, 동시에 그 원정의 잔혹함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였다. 한국에서 남원성 전투는 1593년의 제2차 진주성 전투와 함께, 군·관·민이 고을을 지키다 함께 죽은 상징이 되었다.

[29][15][17][18][3][2][36]

핵심 개념

전라도부터
1592년 전라도를 차지하지 못한 일본군은 1597년 침략에서 이 곡창 지대의 장악을 1차 목표로 삼았다. 남원은 그 동쪽 관문을 지켰다.
바다와 땅을 함께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무너지자 일본 배들이 강 쪽에서 남원으로 향하는 육군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
읍성인가, 산성인가
양원은 가까운 교룡산성 대신 평지의 읍성을 지키기로 했다. 당대 사람들은 이를 패배의 한 원인으로 보았다.
흔들린 동맹
명군은 거의 홀로 성을 지켰고, 조선군은 늦게 적은 수로 왔으며, 전주의 명군은 구원하지 않았다. 양쪽은 서로를 탓했다.
영수증이 된 코
정유재란 때 일본군은 민간인을 포함한 죽은 이들의 코를 베어 세고 포상을 받았다. 교토의 귀무덤이 이를 기억하게 한다.
기록과 전승
이른 기록은 이복남이 싸우다 죽었다고 하고, 분신 자결 이야기는 후대의 서술에만 나온다. 둘을 비교하면 기억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알 수 있다.
기억되는 패전
만인의총, 충렬사, 소설 『최척전』은 남원의 함락을 함께 치른 희생의 상징으로 기억하게 한다.

기록

  1. 1593년 — 명나라 참장 낙상지가 첫 침략 뒤 남원성을 수리하고 보강한다.
  2. 1597년 — 음력 5월: 양원이 명군 3,000명을 이끌고 한양에 왔다가 남원에 주둔한다.
  3. 1597년 — 8월 27–28일(음력 7월 15–16일):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한다.
  4. 1597년 — 9월 9일(음력 7월 28일): 일본군이 진격을 시작하고, 좌군은 사천에서 하동·구례를 거쳐 나아간다.
  5. 1597년 — 9월 22–23일(음력 8월 12–13일): 일본군이 남원에 이르러 성을 에워싼다.
  6. 1597년 — 9월 25일 또는 26일 밤(음력 8월 15일 또는 16일, 기록마다 다름): 일본군이 볏단으로 해자를 메우고 남원성을 함락한다. 이복남은 전사하고 양원은 탈출한다.
  7. 1597년 — 9월 26–28일(음력 8월 16–18일): 우군이 황석산성을 함락하고, 곽준과 조종도가 전사한다.
  8. 1597년 — 9월 29일(음력 8월 19일): 수비군이 떠난 전주가 싸움 없이 점령된다.
  9. 1597년 — 10월 30일(음력 9월 20일): 양원과 진우충을 붙잡아 처벌하라는 황제의 명이 내려진다.
  10. 1598년 — 음력 4월: 명나라 장수 이방춘이 남원의 희생자 유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든다.
  11. 1598년 — 11월 6일(음력 10월 8일): 양원의 머리가 한양 남대문 밖에 내걸린다.
  12. 1612년 — 지역 유림이 남원에서 전사한 관원들을 모시는 충렬사를 세운다.
  13. 1621년 — 조위한이 남원 함락으로 흩어진 가족의 이야기 『최척전』을 짓는다.
  14. 1964년 — 무덤과 사당이 남원의 지금 자리로 옮겨진다.
  15. 1981년 — 만인의총이 대한민국 사적으로 지정된다.

용어 풀이

읍성
조선의 군·현 고을을 둘러싼 성으로 대개 평지에 쌓았다. 피란처로 쓰던 산성과 구별된다.
양마장(羊馬墻)
본성 몇 미터 앞에 쌓은 낮은 바깥 담장으로, 포혈을 뚫어 첫 방어선으로 썼다.
병사
병마절도사의 줄임말로, 조선 각 도의 육군 지휘관이다. 이복남은 전라병사였다.
접반사
외국 장수나 사신을 맞아 함께 다니며 연락을 맡은 조선의 관원. 정기원은 양원의 접반사였다.
좌군과 우군
1597년 침략의 두 주력 육군. 우키타 히데이에의 좌군은 남원을, 모리 히데모토와 가토 기요마사의 우군은 황석산성을 함락했다.
부총병
양원이 지닌 명나라의 높은 무관 직함. 조선 기록은 그를 흔히 ‘총병’이라고 부른다.
주인장(朱印狀)
히데요시의 붉은 도장을 찍은 문서. 여기서는 장수들이 바친 머리나 코를 확인해 주는 데 쓰였다.
귀무덤(미미즈카)
교토에 있는 무덤으로, 처음에는 코무덤(하나즈카)이라 불렸다. 1597년 조선인과 명나라 사람 전사자에게서 벤 코를 묻어 만들었다.
만인의총
‘만 명의 의로운 사람들의 무덤’. 남원성 전투 희생자를 함께 묻은 무덤으로, 198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음력(태음태양력)
조선이 쓴 역법으로 달의 차고 기움을 따른다. 날짜를 양력(그레고리력)으로 바꾸어야 한다.
경(更)
밤을 다섯으로 나눈 시간 단위. 1경은 해가 진 뒤 오후 7–9시 무렵이다.

묻고 답하기

일본군은 왜 남원을 공격했나요?

1597년 일본군은 전라도부터 차지하려 했고, 남원은 동쪽에서 전라도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어요. 남원을 차지하면 전주와 전라도 전체로 가는 길이 열렸어요.

이복남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요?

일부 현대 한국 서술은 그렇게 말하지만, 몇 주 안에 쓰인 선조의 자문을 비롯한 이른 기록은 그가 성이 함락될 때 시가전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해요. 이 글은 이른 기록을 따라요.

양원은 어떻게 되었나요?

몇 사람과 함께 탈출했지만, 명 조정은 성을 잃은 책임을 그에게 물었어요. 그는 옥에 갇혔고, 1598년 11월 그의 머리가 한양 남대문 밖에 내걸렸어요.

정말 1만 명이 죽었나요?

아무도 정확히 몰라요. 일본 측 문서를 바탕으로 한 약 3,700명부터 후대 한국 측 서술의 1만 명 이상까지 숫자가 다양해요. 2019년의 한 연구는 무덤 이름의 ‘만인’이 정확한 숫자가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을 뜻한다고 보았어요.

왜 코를 베었나요?

일본 장수들은 죽인 적의 수에 따라 상을 받았어요. 코는 머리보다 옮기기 쉬워서, 1597년에는 민간인을 포함한 죽은 이들의 코를 베어 세고 일본으로 보냈어요.

날짜는 8월 16일인가요, 9월 26일인가요?

보통 함락일로 쓰는 음력 8월 16일을 양력으로 바꾸면 1597년 9월 26일이에요. 다만 『징비록』은 마지막 공격을 하루 앞선 밤, 양력 9월 25일로 적어요. ‘양력 8월 16일’처럼 쓰면 음력 달을 양력에 섞은 것이 돼요.

전주는 왜 싸움 없이 넘어갔나요?

남원이 함락되자 진우충이 이끈 명군 수비대가 물러났고, 조선의 부윤도 이미 달아날 채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9월 29일 일본군이 왔을 때 전주를 지킬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송정현, 남원전투(南原戰鬪).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장희, 임진왜란(壬辰倭亂).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3. 정유재란(丁酉再亂).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4. 이복남(李福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5. 정기원(鄭期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6. 남원읍성(南原邑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7. 남원 교룡산성(南原 蛟龍山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8. 남원 만인의총(南原 萬人義塚).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9. 박천식, 충렬사(忠烈祠, 남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0. 곽준(郭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1. 조종도(趙宗道).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2. 최척전(崔陟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3.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8월 6일 4번째 기사: 총병 양원과 남원 부사 임현 등의 대화 내용을 접반사 정기원이 치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4.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8월 12일 7번째 기사: 왕자와 나인을 대피시키라는 지시를 철회해 달라고 승정원이 건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5.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8월 15일 2번째 기사: 접반사 장운익이 소대를 청하여 도독 마귀와 나눈 밀담 내용을 보고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6.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8월 18일 2번째 기사: 남원성이 함락당하고 부총 양원을 비롯하여 10여 명만이 살아 돌아오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7.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8월 21일 3번째 기사: 사헌부가 부윤 박경신의 처벌, 속오군 장관들의 처벌 등을 건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8.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9월 2일 4번째 기사: 총독 경략 군문 및 경리 조선 군무 도찰원에 남원 함락을 보고하는 자문을 보내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9.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9월 8일 4번째 기사: 경상 우병사 김응서가 김해 부사 백사림을 구한 항왜 사백구의 포상을 건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0.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9월 11일 9번째 기사: 우리측이 부총 양원의 구명 운동을 벌이는 것에 대해 경리 양호가 힐난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1.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9월 20일 1번째 기사: 패장 양원과 진우충을 처벌하라는 중국 조정의 지시를 도찰원이 받아 발표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2.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1월 14일 1번째 기사: 감사 이용순이 한형의 처 이씨, 조종도의 죽음을 포장하도록 건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3.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월 14일 7번째 기사: 접반사 송순이 부총 해생이 후퇴하자 안동까지 도망해, 그 사실을 아뢰다(정기원에 대한 사관의 논평).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4.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7월 16일 1번째 기사: 황응양과 시어소에서 은 채굴과 조선을 다녀간 중국 장수의 안부를 묻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5.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0월 8일 6번째 기사: 비변사가 양 총병의 참두가 도착했음을 아뢰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6. 선조수정실록 31권, 선조 30년(1597) 5월 1일 3번째 기사: 부총병 양원이 경성을 경유해 남쪽으로 내려가니 정기원을 접반사로 삼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7. 선조수정실록 31권, 선조 30년(1597) 8월 1일 1번째 기사: 적이 안음의 황석 산성을 함락시키니 곽준과 조종도가 전사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8. 선조수정실록 31권, 선조 30년(1597) 9월 1일 1번째 기사: 적이 남원을 함락시키니 양원이 도망쳐 돌아왔으나 후에 중국에서 죽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9. 유성룡(柳成龍), 『징비록(懲毖錄)』 권2(한문 원문). 위키문헌(중국어판)
  30. 대소헌일고(大笑軒逸稿, 조종도 문집) 권3: 『징비록』의 황석산성 대목과 유성룡의 「조대소헌전」(한문 원문). 위키문헌(중국어판)
  31. 『명사(明史)』 권320 조선전(朝鮮傳). 위키문헌(중국어판)
  32. 박현규,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 순절자의 무덤과 제향 연구, 『일본연구』 32, 275–295쪽.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2019
  33. 朝鮮日々記(조선일일기), 『야마카와 일본사 소사전(개정신판)』(2016) 항목. 히스토리스트(야마카와출판사)
  34. 「朝鮮日々記」国重文に答申(『조선일일기』 국가 중요문화재 지정 답신). 니시닛폰신문, 2026
  35. Siege of Namwon. 위키백과(영어)
  36. 남원 전투. 위키백과(한국어)
  37. 南原城の戦い. 위키백과(일본어)
  38. 이복남. 위키백과(한국어)
  39. 남원 만인의총. 위키백과(한국어)
  40. 양원 (명나라). 위키백과(한국어)
  41. 楊元. 위키백과(중국어)
  42. 황석산성 전투. 위키백과(한국어)
  43. 정유재란. 위키백과(한국어)
  44. Ukita Hideie. 위키백과(영어)
  45. Mimizuka. 위키백과(영어)
  46. 耳塚. 위키백과(일본어)
  47. 奴隷貿易(노예무역; 임진왜란 부분, 나이토 슌스케 1976을 따라 게이넨의 『조선일일기』 인용). 위키백과(일본어)
  48. 음양력 변환 계산. 한국천문연구원
  49. 26 Martyrs of Japan. 위키백과(영어)
  50. Third Spanish Armada. 위키백과(영어)
  51. Romeo and Juliet. 위키백과(영어)
  52. Nine Years’ War (Ireland). 위키백과(영어)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 지도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