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임진왜란

壬辰倭亂 · 文禄・慶長の役 · 萬曆朝鮮之役

1592–1598년 ·

한 문장으로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며 조선에 대군을 보낸 전쟁으로, 조선은 명의 도움을 받아 끝내 일본군을 몰아냈지만 한반도는 큰 피해를 입었고 세 나라 모두의 역사가 바뀌었어요.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400여 년 전 일본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힘센 지도자가 있었어요. 그는 오랫동안 서로 싸우던 일본을 하나로 합쳤는데, 거기서 멈추지 않았어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나라인 중국(명나라)까지 차지하고 싶어 했고, 그러려면 조선을 지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1592년 봄, 수백 척의 일본 배가 군사를 싣고 바다를 건너 부산에 도착했어요. 일본군은 조총이라는 총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오랜 전쟁으로 싸움에 익숙했어요. 조선은 오랫동안 큰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싸움마다 졌어요. 겨우 3주쯤 만에 일본군이 서울(한양)에 들어왔고, 임금은 북쪽으로 피란을 가야 했어요.

하지만 조선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 같은 튼튼한 배와 뛰어난 작전으로 일본 수군을 계속 물리쳤어요. 땅에서는 농민과 선비, 스님들까지 ‘의병’이 되어 싸웠어요. 명나라 황제도 결국 자기 나라가 목표라는 것을 알고 큰 군대를 보내 도왔어요.

몇 년 동안은 싸움을 멈추고 평화를 이야기했지만 협상은 실패했고, 1597년에 일본이 다시 쳐들어왔어요. 이 두 번째 전쟁을 정유재란이라고 해요. 전쟁은 1598년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이 돌아간 뒤에야 끝났어요.

이 전쟁으로 보통 사람들이 정말 큰 고통을 겪었어요. 많은 사람이 죽거나 굶주렸고, 마을과 궁궐이 불탔으며,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을 비롯해 수만 명의 조선 사람이 일본으로 끌려갔어요. 한국, 일본, 중국은 지금도 이 전쟁을 기억하지만, 나라마다 이야기하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요.

한눈에 보기

기간
1차 침략 1592–1593년, 휴전·강화 교섭 1593–1596년, 2차 침략(정유재란) 1597–1598년(1598년 음력 11월 종전)
장소
한반도 전역과 연안 바다, 특히 남해안
참전 세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대 조선(선조)·명(만력제)
나라별 이름
한국: 임진왜란·정유재란 / 일본: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 / 중국: 만력조선지역(萬曆朝鮮之役)
규모
일본군은 침략 때마다 약 15만–16만 명(2차 약 14만 명), 명군은 국면마다 수만 명 파병
주요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 이순신, 권율, 유성룡 / 이여송, 진린
결과
히데요시 사망 뒤 일본군 철수. 영토 변화는 없었으나 조선에 막대한 피해
주요 사료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이순신 『난중일기』, 유성룡 『징비록』, 명의 기록, 일본 다이묘의 서간·일기

날짜로 따라가는 전쟁

재생을 누르면 지도에서 전쟁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표시는 전투·사건, 화살표는 기록에 남은 진군로입니다.

1592년 5월 23일
1/12 · 부산 상륙과 한성 함락
조선(의병 포함)명일본(도요토미 정권)

단계

  1. 일본군 선봉이 부산에 상륙해 해안 성들을 함락하고 세 갈래 길로 북상했다. 조선군은 상주와 충주(탄금대)에서 패했고, 선조가 도성을 떠난 뒤 상륙 약 20일 만에 한성이 함락되었다.

    Imjin War (English Wikipedia)임진왜란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incl. table of battles임진왜란 (Korean Wikipedia)음양력 변환 계산 (KASI lunar–solar converter); conversions done with the korean-lunar-calendar package built on KASI data

최근 사건

재생 화면은 그날까지 자료로 확인된 사실을 보여 줄 뿐, 매일 새 사건이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월·연도까지만 알려진 날짜는 기간으로 표시하고, 점선 화살표는 확인된 두 지점을 잇기만 한 개략선입니다.

쉬움

임진왜란은 어떤 전쟁인가

임진왜란은 1592년과 1597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다. ‘임진’은 60갑자로 따진 1592년의 이름이다. 한국에서는 첫 침략을 임진왜란, 두 번째 침략을 정유재란이라 부르고 둘을 합쳐 임진왜란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제 때의 조선 전쟁, 곧 만력조선지역(萬曆朝鮮之役)이라 부른다.

싸운 나라는 셋이다. 막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이 쳐들어왔고, 조선이 제 땅을 지켰으며, 조선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있던 명나라가 군대와 수군을 보냈다. 명이 참전한 것은 두 나라의 오랜 관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히데요시가 대놓고 명을 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쟁은 7년 가까이 이어졌지만, 큰 싸움은 주로 1592–93년과 1597–98년에 벌어졌고 그 사이에는 긴 휴전과 강화 교섭이 있었다. 16세기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전쟁이었으며, 동아시아 전체를 끌어들였다는 뜻에서 일부 학자들은 ‘동아시아 대전’이라고도 부른다.

[1][2][8]

쉬움

일본은 왜 쳐들어왔나

일본은 한 세기 넘게 여러 영주(다이묘)가 서로 싸우는 전국(戰國) 시대를 겪었다. 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력으로 나라를 다시 하나로 묶었고, 1590년 오다와라의 호조 가문을 꺾으면서 통일을 마무리했다. 그의 손에는 전쟁에 단련된 수십만 명의 무사와 병사가 있었고, 이들 상당수는 포르투갈인과의 접촉 이후 널리 퍼진 조총(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정복하겠다고 선언하고, 조선에게 길을 빌려 달라(정명가도, 征明假道)고 요구했다. 명을 섬기던 조선은 이를 거절했다. 히데요시가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개인적 야망과 공명심, 많은 무사에게 나눠 줄 새 영지의 필요, 대명 무역을 장악하려는 뜻 등이 거론되며, 여러 동기가 섞여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그가 명의 크기를 제대로 알고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1590년 조선은 일본의 사정을 살피려고 통신사를 보냈다. 흔히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반드시 쳐들어올 것이라 보고했고, 부사 김성일은 히데요시가 두려워할 인물이 아니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붕당에 속해 있었고 조정의 판단은 엇갈렸다. 조선이 성을 고치는 등 대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큰 전쟁을 치르지 않은 군대로는 대규모의 잘 무장된 침략을 막기 어려웠다.

[1][2][8]

쉬움

1592년: 첫 침략과 한양 함락

1592년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3일 무렵),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며칠 만에 무너졌고, 정발·송상현 같은 지휘관과 많은 군사,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뒤이어 여러 부대가 잇따라 건너와, 모두 15만–16만 명가량의 일본군이 몇 갈래로 북상했다.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적을 막으려 했지만, 그의 기병은 일본군의 조총 사격에 무너졌다. 상륙한 지 3주쯤 만에 일본군이 한양에 들어왔다. 선조는 이미 평양을 거쳐 압록강 가의 의주까지 피란했고, 세자 광해군은 분조(分朝)를 이끌며 나라 안에서 정부 기능을 이어 갔다. 한양의 궁궐도 불탔는데, 누가 불을 질렀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일본군은 계속 올라갔다. 고니시는 그해 여름 평양을 차지했고,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 깊숙이 들어가 그곳 반란 세력이 넘겨준 두 왕자(임해군·순화군)를 사로잡았다. 몇 달 동안은 조선이 완전히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1][2]

쉬움

전세를 바꾼 힘: 수군, 의병, 명군

바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1592년 음력 5월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뒤 연이어 이겼다. 사천 해전에서는 덮개를 씌우고 화포를 단 거북선을 처음 썼고, 음력 7월 한산도 대첩에서는 적 함대를 넓은 바다로 끌어내 학익진으로 에워싸 대부분을 격파했다. 이 승리들로 일본은 서해 쪽 바닷길로 군량과 병력을 보내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땅에서는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곽재우, 조헌 같은 선비와 서산대사 휴정, 사명대사 유정 같은 승려가 의병과 승병을 이끌었다. 이들은 산과 길을 잘 알았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1592년 음력 10월 진주성에서는 목사 김시민이 대군을 막아 냈다(진주대첩). 김시민은 이 싸움에서 입은 상처로 숨졌다.

명은 1592년 먼저 적은 병력을 보냈으나 평양에서 패했다. 1593년 초 이여송이 이끄는 대군이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았다. 명군은 곧 벽제관에서 일격을 당했지만, 음력 2월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의 대공세를 물리쳤다(행주대첩). 군량이 떨어지고 사방에서 공격을 받던 일본군은 1593년 음력 4월 한양에서 물러나 남해안에 쌓은 성(왜성)으로 내려갔다. 한산도·진주·행주의 승리를 흔히 ‘임진왜란 3대첩’이라 부른다.

[1][3][2]

중급

휴전과 어긋난 강화 교섭(1593–1596)

교섭이 시작된 뒤에도 싸움은 이어졌다. 1593년 음력 6월 일본군은 진주성을 다시 공격해 함락했고, 조선 측 기록은 성안의 군사와 백성이 대거 학살되었다고 전한다. 논개가 일본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는 이 비극을 상징하는 기억이 되었으나, 자세한 내용은 뒷날의 기록에 기대고 있다.

강화 교섭은 주로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 사이에서 이루어졌고, 조선 조정은 대부분 배제되었다. 두 사람은 합의를 끌어내려고 각자 자기 쪽에 상대의 입장을 왜곡해 전한 것으로 보인다. 히데요시는 명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비로 보낼 것, 조선 남부 4도의 할양, 무역 재개, 조선 왕자 인질 등을 요구했지만, 명 조정은 히데요시가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아 신하의 예를 갖추리라 기대했다.

1596년 명 사절이 일본에서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했다. 자기 요구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안 히데요시는 전쟁을 다시 일으키기로 했다. 그가 화가 나 명의 고명(誥命)을 찢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지만, 그 고명으로 알려진 문서가 일본에 온전히 남아 있어 학자들은 이 일화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분명한 것은 교섭이 서로에 대한 오해 위에 세워져 있었고, 정작 제 땅이 걸린 조선은 협상에서 밀려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1][8][9]

중급

1597–1598년: 정유재란, 명량과 노량

1597년 일본은 다시 14만 명가량을 보냈다. 이번에는 첫 침략 때 피해가 덜했던 전라도를 비롯한 남부를 먼저 노렸다. 그 직전 이순신은 무리하다고 판단한 출전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붙잡혀 고문을 받고 백의종군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조정의 정쟁과 일본의 이간책이 함께 작용했다. 후임 원균은 1597년 음력 7월 칠천량에서 크게 패해 조선 수군은 거의 궤멸했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에게 남은 배는 열두어 척뿐이었다. 1597년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6일) 그는 물살이 거세고 좁은 명량 해협(울돌목)에서 13척으로 100척이 훨씬 넘는 일본 함대를 맞아, 거센 조류와 좁은 물길을 이용해 30척가량을 깨뜨리고 물리쳤다. 땅에서는 조·명 연합군이 직산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막았고, 일본군은 남해안의 성으로 물러났다.

정유재란은 특히 민간인에게 잔혹했다. 일본 장수들은 죽인 적의 증거로 코를 베어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고,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의 코도 베어졌다. 1597년 남원성이 함락된 뒤에는 학살이 이어졌다. 조·명 연합군은 이후 울산·사천·순천의 왜성을 공격했고, 양쪽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8년 음력 8월에 죽었고, 그의 이름으로 정권을 운영하던 다이로(大老)들은 철수를 명했다. 물러가는 일본군을 이순신과 명의 수군 도독 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 함대가 노량에서 가로막았다(1598년 음력 11월 19일, 양력 12월 16일). 이순신은 이 싸움에서 총탄을 맞고 전사했는데, 싸움이 급하니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노량 해전으로 7년 전쟁은 끝이 났다.

[1][3][4][7]

중급

사람들이 치른 대가

죽은 사람을 센 사람은 없었다. 전투와 학살, 기근과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은 조선 사람의 수는 수십만에서 100만 명 이상까지 추정이 엇갈린다. 큰 숫자가 자주 인용되지만 믿을 만한 인구 기록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다. 명군의 손실은 흔히 수만 명, 추위와 질병, 굶주림으로 죽은 이를 포함한 일본군의 손실은 10만 명 안팎으로 이야기되지만, 모두 대략적인 추정일 뿐이다.

전쟁은 논밭과 수리 시설을 망가뜨렸고 기근이 뒤따랐다. 자주 인용되는 계산에 따르면 조선의 경작지(결수)는 전쟁 전 약 170만 결에서 전쟁 뒤 약 54만 결로 줄었다. 이 감소에는 땅 자체가 사라진 것보다 토지 대장이 없어진 탓도 크지만, 혼란의 규모를 보여 주기에는 충분하다. 궁궐과 절, 기록이 불탔고, 네 곳의 사고(史庫)에 보관하던 실록 가운데 전주 사고본만 살아남았다.

수만 명의 조선 사람이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다. 그 수는 5만 명에서 10만 명 이상까지 추정이 크게 다르다. 일부는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아시아 각지의 노예 시장으로 팔려 갔다. 도공 같은 장인들은 규슈와 서일본의 다이묘에게 끌려가 아리타 자기, 사쓰마 도자기 같은 일본 도자기 전통을 일으키는 데 이바지했다. 학자와 책, 활자도 함께 넘어갔다. 전쟁 뒤 외교 사절을 통해 돌아온 포로는 수천 명에 그쳤다.

일본 교토에는 1597년 조선과 명의 전사자·민간인에게서 벤 코를 묻은 귀무덤(미미즈카)이 있다. 묻힌 코는 수만 개로 추정된다. 한국인 방문객에게는 추모의 장소이지만, 일본에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1][2][5]

중급

조선·일본·명에 남긴 결과

조선. 전쟁은 큰 개혁을 불러왔다. 비변사가 국정 전반을 다루는 최고 기구가 되었고, 1593년에는 조총병 등 전문 병력을 기르는 훈련도감이 세워졌다. 전쟁 비용을 마련하려고 곡식을 받고 벼슬이나 신분을 주는 납속(納粟)과 이름을 비워 둔 공명첩을 발행하면서 신분 질서가 흔들렸다. 명이 망할 뻔한 나라를 다시 세워 주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은 이후 조선의 외교와 사상에서 중요한 관념이 되었다.

일본. 히데요시의 후계자는 어린아이였고, 침략을 이끈 다이묘들은 서로 대립하는 두 진영으로 갈라졌다. 2년 뒤인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조선에 직접 군대를 보내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했고, 1603년 에도 막부가 열렸다. 도쿠가와 정권은 조선과의 관계 회복을 원했다. 1607년 조선은 첫 사절(회답겸쇄환사)을 보냈고, 1609년 기유약조로 쓰시마를 통한 무역이 다시 열렸다. 전쟁 중 넘어간 도자기, 인쇄 기술, 성리학 지식은 일본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포로로 끌려간 강항이 일본 초기 성리학자 후지와라 세이카와 교류한 것이 대표적 예다.

명. 조선 원정은 만력제의 ‘만력 3대정(三大征)’ 가운데 하나로, 막대한 재정을 소모했다. 많은 역사가는 이 재정 부담과 명의 관심·병력이 조선에 쏠린 틈을 타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합하고 뒷날 청나라가 되는 나라를 세웠다고 본다. 다만 이 전쟁이 1644년 명의 멸망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논쟁 중이며, 당쟁과 재정 정책, 기후 재해 같은 내부 요인을 더 중시하는 견해도 있다.

[2][1][9]

중급

나라마다 다른 기억

한국에서 임진왜란은 무엇보다 나라가 겪은 큰 시련이자 저항의 이야기로 기억된다. 이순신은 최고의 민족 영웅이 되었다. 1968년부터 서울 광화문 광장에 그의 동상이 서 있고, 아산 현충사는 국가 차원에서 기리는 사당이다. 의병은 평범한 사람들이 나라를 지켰다는 증거로 기려지며, 유성룡의 『징비록』 등은 대비하지 못한 잘못을 되새기는 교훈으로 읽힌다. 조선 시대에는 명에 대한 의리도 기억의 중심이었다. 1704년 궁궐 안에 세운 대보단은 만력제를 제사 지내는 곳이었다.

일본의 기억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에도 시대에는 히데요시를 다룬 대중 서적과 연극이 조선 출병을 영웅적인 모험으로 그렸고, 가토 기요마사 같은 인물은 전설이 되었다. 19세기 말 이후 근대 제국주의 시기에는 이 침략이 한반도 진출의 선례로 거론되기도 했다. 1945년 이후 일본 교과서는 점차 이 전쟁을 침략으로 서술하게 되었고 많은 일본 학자가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있지만, 귀무덤 같은 장소는 여전히 일본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에서는 『명사(明史)』 등 공식 기록이 이 전쟁을 충성스러운 속국을 지켜 낸 성공적인 원정으로 서술하는 한편, 당시에도 명 장수들의 행태는 비판을 받았다. 케네스 스워프 같은 현대 서양 학자들은 이순신과 의병에 초점을 맞춘 한국·서양의 대중적 서술이 지상전에서 명군이 한 역할을 과소평가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학자들은 반대로 싸움과 고통의 대부분을 조선 사람이 감당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시각을 나란히 놓고 보면, 각 나라의 이야기가 어떤 진실은 밝히면서 다른 진실은 그늘에 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3][9][10]

심화

1차 사료와 그 한계

조선 측 사료는 매우 풍부하다. 『선조실록』은 조정의 논의와 보고, 결정을 담고 있지만 전쟁 뒤에 편찬되었고, 뒤에 정권을 잡은 붕당이 다시 고친 『선조수정실록』이 따로 있어 인물 평가가 서로 다른 경우가 있다. 이순신의 진중 일기인 『난중일기』와 장계는 지휘관의 하루하루를 보여 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라 있다. 전쟁 중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조선 스스로의 잘못을 솔직하게 돌아보았는데, 이 책은 뒤에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널리 읽혔다.

일본 측 사료로는 히데요시와 다이묘의 서간·명령서, 시마즈·나베시마·도도 가문 등의 가문 기록, 개인 일기가 있다. 1597년 한 다이묘의 군대를 따라온 승려 게이넨(慶念)의 일기는 조선 민간인이 죽임을 당하고 끌려가는 모습을 참담한 심정으로 적은 중요한 기록이다. 가문 기록은 자기 공적과 적의 사망자 수를 부풀리는 경향이 있고, 상당수는 훨씬 뒤에 편찬되었다.

중국 측 사료로는 『명실록』, 청대에 편찬된 『명사』, 송응창 같은 지휘관의 상주문, 개인 저술 등이 있다. 이들 기록에는 명 관료와 장수 사이의 치열한 대립이 반영되어 있어, 벽제관 전투나 울산성 전투를 서술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세 나라 사료 모두 병력·함선·사상자 숫자가 부풀려지거나 서로 어긋나는 일이 잦아, 역사가들은 이를 꼼꼼히 비교해야 한다.

[6][7][1][8]

심화

연구사와 논쟁

이름부터가 연구사의 문제다. ‘왜란(倭亂)’은 ‘왜’라는 일본을 낮춰 부르는 옛말을 써서 전쟁을 오랑캐의 난동으로 규정한다. 일본의 ‘분로쿠·게이초의 역’은 연호를 딴 중립적 이름이지만, 예전 일본 문헌은 ‘조선 정벌(朝鮮征伐)’이라 불렀다. 영어권 학자들은 ‘임진전쟁(Imjin War)’, ‘일본의 조선 침략’이라는 말을 쓰고, 김자현(JaHyun Kim Haboush) 등은 전쟁의 국제적 성격을 강조하려고 ‘동아시아 대전(Great East Asian War)’이라는 이름을 쓴다.

가장 큰 논쟁은 조선 수군, 조선 관군, 의병, 명군이 일본을 물리치는 데 각각 얼마나 기여했느냐는 것이다. 식민 지배와 해방을 거치며 형성된 20세기 한국 역사학은 이순신과 민중의 저항을 부각했다. 케네스 스워프는 명 측 연구(2009)에서 지상전에서는 명의 개입이 결정적이었고, 1590년대의 명이 여전히 대규모 군사 행동을 해낼 수 있는 국가였다고 주장한다. 새뮤얼 홀리의 서사사(2005)는 세 나라의 사료를 두루 활용한다. 김자현의 유작(2016)은 전쟁, 특히 의병과 그들의 글이 조선 사람들 사이에 원형적 민족의식을 키웠다고 본다.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도 많다. 히데요시의 진짜 목표와 그가 명을 얼마나 알았는지, 초기 일본군 승리에서 조총이 한 역할과 조선·명이 얼마나 빨리 적응했는지, 포로의 수와 운명, 전쟁이 명을 얼마나 약화해 청의 등장을 도왔는지 등이다. 최근 연구는 전투를 넘어 환경사, 피란민, 노예 매매, 세 나라 사이의 기술·지식 이동으로 관심을 넓히고 있다.

[9][8][10][1]

주요 전투 (24)

  1. 옥포 해전1592년
  2. 부산진 전투1592년
  3. 한산도 전투1592년
  4. 사천 해전1592년
  5. 동래성 전투1592년
  6. 임진강 전투1592년
  7. 다대포 전투1592년
  8. 탄금대 전투1592년
  9. 당포 해전1592년
  10. 평양 전투 (1592년)1592년
  11. 진주대첩1592년
  12. 제2차 평양성 전투1592년
  13. 청주 전투1592년
  14. 영원산성 전투1592년
  15. 행주대첩1593년
  16. 제4차 평양성 전투1593년
  17. 제2차 진주성 전투1593년
  18. 명량 해전1597년
  19. 칠천량 해전1597년
  20. 남원 전투1597년
  21. 직산 전투1597년
  22. 노량 해전1598년
  23. 제2차 울산성 전투1598년
  24. 제1차 울산성 전투1598년

핵심 개념

명을 노린 전쟁, 조선에서 싸우다
히데요시가 내세운 목표는 명 정복이었고, 조선은 그 길목이었기 때문에 전장이 되었다.
제해권
이순신의 해전 승리는 일본의 바닷길 보급을 끊었고, 한국인의 전쟁 기억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의병
관군이 무너졌을 때 선비·농민·승려가 스스로 일어나 지역에서 침략군에 맞섰다.
동맹과 위계
명의 참전은 조공·책봉 관계를 반영했고, 조·명 협력은 자주 긴장을 낳았다.
민간인의 참화
학살과 기근, 전염병, 대규모 포로 납치로 보통 사람들의 피해가 컸다.
사람과 기술의 이동
끌려간 도공·학자·인쇄공이 조선의 기술과 학문을 일본에 전했다.
갈라진 기억
한국·일본·중국은 전쟁을 서로 다르게 부르고 이야기하며, 여기에는 각국의 근현대사가 반영되어 있다.

기록

  1. 1590년 —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을 마무리하고,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다녀와 1591년 엇갈린 보고를 올린다.
  2. 1592년 —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음력 4월)하고, 약 3주 만에 한양이 함락되며, 여름에 평양도 빼앗긴다.
  3. 1592년 — 이순신이 옥포·사천·한산도에서 승리하고, 김시민이 진주성을 지켜 낸다.
  4. 1593년 —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되찾고 권율이 행주에서 승리한다. 일본군이 한양에서 물러나고,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된다.
  5. 1593년 — 조선이 훈련도감을 설치한다.
  6. 1596년 — 명 사절이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지만 강화 교섭은 결렬된다.
  7. 1597년 — 정유재란.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하고, 이순신이 명량에서 승리한다. 교토에 귀무덤이 조성된다.
  8. 1598년 —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이 철수하며,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다.
  9. 1600년 — 세키가하라 전투로 도쿠가와 막부 수립의 길이 열린다.
  10. 1607년 — 조선이 전쟁 뒤 첫 사절(회답겸쇄환사)을 일본에 보내 일부 포로를 데려온다.
  11. 1609년 — 기유약조로 쓰시마를 통한 조일 무역이 다시 열린다.

용어 풀이

조선
1392년부터 1897년까지 한반도를 다스린 왕조이자 나라.
명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중국을 다스린 왕조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다이묘(大名)
자기 무사와 군대를 거느린 일본의 지방 영주.
조총
화승으로 불을 붙여 쏘는 초기 소총. 일본 보병이 널리 썼다.
거북선
갑판 위를 덮개로 덮고 화포를 단 조선의 전선. 이순신이 운용했다.
의병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지역 지도자가 스스로 모아 싸운 민간 군대.
조공·책봉
주변국 군주가 중국 황제에게 사신과 예물을 보내고, 황제가 그 군주를 왕으로 인정해 주는 위계적 외교 질서.
왜성
전쟁 중 일본군이 조선 남해안에 쌓은 일본식 성.
결(結)
조선에서 세금을 매기려고 쓴 토지 단위. 면적보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다.
재조지은(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세워 준 은혜라는 뜻으로, 명의 원군에 대한 조선의 인식을 나타내는 말.

묻고 답하기

왜 ‘임진’왜란이라고 해요?

1592년이 60갑자로 임진년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시작된 해의 이름을 따서 불러요.

일본은 조선을 차지하려고 했나요?

히데요시가 내세운 목표는 명나라 정복이었고, 조선은 지나가는 길이자 도움을 받을 곳으로 여겼어요. 조선이 거절하자 조선이 주된 전쟁터가 되었고, 정유재란 때는 조선 남부를 차지하는 데 힘을 쏟았어요.

거북선은 어떻게 생겼어요?

위를 덮개로 덮고 사방에 대포를 단 조선의 전투선이에요. 덮개에 쇠못이 박혀 있었다고 전하지만, 몇 척밖에 만들지 않았고 정확한 모습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논쟁 중이에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나요?

정확히는 아무도 몰라요. 조선 사람은 굶주림과 병으로 죽은 사람까지 합쳐 수십만에서 100만 명이 넘는다고 추정하고, 명군과 일본군도 많이 죽었어요. 모든 숫자에는 불확실성이 커요.

전쟁은 왜 끝났어요?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조·명 연합군의 저항과 일본 안의 권력 다툼에 직면한 일본 지도자들이 군대를 철수시켰어요.

승리의 공은 조선과 명 가운데 누구에게 더 있나?

학자마다 다르다. 한국 쪽 서술은 수군과 의병을, 명 쪽 연구는 명의 지상군을 강조한다. 오늘날 대다수 학자는 조선과 명의 공동 노력에 일본군의 보급 문제와 히데요시의 죽음이 겹쳐 결과가 나왔다고 본다.

사료에 나오는 병력과 함선 숫자는 믿을 만한가?

그다지 믿기 어렵다. 각국은 적의 병력과 손실을 부풀리는 경향이 있었고, 뒷날의 가문 기록과 민족 서사가 과장을 더했다. 역사가들은 조선·명·일본의 기록을 서로 대조해 그럴듯한 범위를 추정한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임진왜란. 위키백과
  2. 이장희, 임진왜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순신. 위키백과
  4. 명량 해전. 위키백과
  5. 귀무덤. 위키백과
  6. 징비록. 위키백과
  7. 난중일기. 위키백과
  8. Samuel Hawley, The Imjin War: Japan’s Sixteenth-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quer China.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2005
  9. Kenneth M. Swope, A Dragon’s Head and a Serpent’s Tail: Ming China and the First Great East Asian War, 1592–1598.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2009
  10. JaHyun Kim Haboush, The Great East Asian War and the Birth of the Korean Nation.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6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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