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1597년, 일본 군대가 두 번째로 조선에 쳐들어왔어요. 일본군은 남서쪽의 남원과 전주 같은 고을을 빼앗았고, 그중 일부는 북쪽의 수도 한양(지금의 서울)을 향해 올라갔어요. 한양 사람들은 너무 무서워서 많은 사람이 피난을 떠났어요.
그때 중국을 다스리던 명나라는 조선을 돕기 위해 군대를 보내 두었어요. 명나라 관리 양호는 서둘러 한양으로 와서, 말을 탄 군사들을 남쪽으로 보내 일본군을 막게 했어요.
직산이라는 작은 고을 근처에서 명나라 기병은 일본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의 앞선 부대와 마주쳤어요. 한 보고에 따르면, 명나라 군사들은 처음에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조선 사람으로 생각했어요. 일본군이 총을 쏘자 말을 탄 명나라 군사들이 돌격했고,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어요. 두 편 모두 군사가 더 몰려왔어요. 어떤 기록은 해가 질 무렵 양쪽 모두 물러났다고 하고, 다른 기록은 싸움이 더 이어졌다고 해요.
두 편은 저마다 자기가 더 잘 싸웠다고 말했어요. 명나라와 조선의 보고는 승리라고 했어요. 일본 기록은 싸움터를 떠난 쪽이 명나라 군대였다고 해요. 오늘날의 역사가들도 누가 정말 이겼는지를 두고 의견이 달라요.
며칠 뒤 일부 일본군은 수도에 더 가까운 고을까지 들어와 노략질했어요. 하지만 한양을 공격하지는 않았어요. 일본군은 방향을 돌려 남쪽 바닷가의 성으로 돌아갔어요. 왜 되돌아갔는지는 기록마다 설명이 달라요. 이 기록들만으로는 직산 싸움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요.
한눈에 보기
- 날짜
-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7일(조선 접반관의 보고와 일본 측 기록의 날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9월 5일로 적는다). 양력으로는 흔히 1597년 10월 16일로 적고,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표로 바꾸면 10월 17일이다
- 장소
-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 근처, 천안에서 북쪽 수원·한양으로 가는 길목. 보고들은 싸움터를 ‘천안과 직산 사이’, 직산에서 10리 또는 15리 되는 곳으로 적고, 한국의 전통적인 서술은 직산 북쪽의 소사평을 든다. 지도의 점은 직산 고을을 가리킨다
- 전쟁
- 임진왜란(1592–1598) 가운데 일본의 두 번째 침략(정유재란, 1597–1598)
- 지휘관
- 명: 부총병 해생(解生. 영어로는 Jie Sheng이라고도 적음)과 양등산·우백영·파귀, 증원군을 이끈 파새. 이들을 보낸 경리 양호와 제독 마귀 / 일본: 구로다 나가마사(선봉은 구로다 나오유키·구리야마 도시야스), 증원군을 보낸 우군 총대장 모리 히데모토
- 병력
- 명: 접반관 신충일의 보고로는 네 장수가 거느린 정병 2,000명. 『선조수정실록』은 파새의 기병 2,000명이 합류했다고 적고, 9일의 다른 보고에는 파새에게 정병 2,500명을 거느리고 수원 길에서 적을 맞아 치라는 명령이 나온다. 이 숫자들을 더해서는 안 된다. 영어 위키백과는 스워프를 인용해 6,000명으로 적는다 / 일본: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사 약 5,000명. 근처 천안에는 모리 히데모토의 훨씬 큰 군대가 있었다. 실제로 싸움에 나선 병력은 확실하지 않다
- 피해
- 명군의 주장을 옮긴 조선의 보고: 벤 머리 약 30급, 화살과 곤봉에 맞아 죽은 일본군 500~600명, 명군도 ‘죽은 자가 많다’ / 일본 측 기록: 구로다 군 전사 29명, 명군 전사 200여 명. 어느 숫자도 확인할 수 없다
- 결과
- 논란이 있다. 『선조실록』의 초기 보고는 격전 뒤 명군이 수원 쪽으로 물러났다고 전하고, 일본어 위키백과가 요약한 일본 측 기록은 명군이 수원 쪽으로 물러나고 일본군은 천안으로 돌아갔다고 하며, 『선조수정실록』은 명군이 추격해 다시 이겼다고 서술한다. 명과 조선의 기록은 승리라고 부른다. 며칠 뒤 일본군이 안성과 죽산을 노략질했지만 한양은 공격하지 않았고, 음력 9월 중순 무렵부터 남쪽으로 물러났다
- 주요 사료
- 『선조실록』의 보고들(9월 8~9일과 그 뒤), 『선조수정실록』, 유성룡의 『징비록』, 『명사』, 일본어 위키백과가 요약한 일본 측 기록, 『선조실록』에 실린 일본군 포로의 진술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쉬움
직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직산 전투는 명과 일본의 강화 교섭이 깨진 뒤 1597년에 시작된 일본의 두 번째 조선 침략 때 벌어졌다. 조선 접반관의 보고와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날짜는 1597년 음력 9월 7일이다. 양력으로는 흔히 1597년 10월 16일로 적고, 한국천문연구원(KASI)의 음양력 변환표로 바꾸면 같은 음력 날짜가 10월 17일이다. 한국 역사학자들은 직산 북쪽의 들판 소사평의 이름을 따서 소사전투라고도 부른다.
남서쪽의 남원과 전주를 차지한 뒤, 일본 우군의 일부가 충청도를 지나 조선의 수도 한양을 향해 북쪽으로 올라왔다. 막 한양에 도착한 명나라 경리 양호는 정예 기병을 남쪽으로 보내 이들을 맞게 했다. 천안 북쪽의 작은 고을 직산 근처에서 명나라 기병은 구로다 나가마사의 선봉과 마주쳤다. 양쪽 모두 증원군이 합류했지만, 싸움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이 글이 참고한 자료에는 이 전투에서 싸운 조선군 부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명군과 일본군 사이의 충돌이었다. 명과 조선의 기록은 이 싸움을 수도를 구한 승리라고 불렀고, 일본 측 기록은 명군을 물리쳤다고 전한다. 며칠 뒤 일본군 일부는 직산보다 한양에 더 가까운 안성과 죽산 경계까지 들어왔지만 수도를 공격하지는 않았고, 곧 일본군은 남해안 쪽으로 되돌아갔다.
일본군이 왜 되돌아갔는지는 지금도 논란이 있다. 사료들은 직산에서의 명군의 저항, 히데요시의 작전 계획, 다가오는 겨울, 보급난, 외교 등 여러 설명을 내놓지만, 각 요인이 얼마나 작용했는지는 보여 주지 않는다. 아래에서는 사료마다 무엇을 말하고 어디에서 서로 엇갈리는지 살펴본다.
쉬움
전주에서 한양 가는 길목까지
두 번째 침략의 목표는 제한적이었다. 1597년 음력 2월 21일 자 히데요시의 명령을 인용한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일본군은 ‘붉은 나라(赤國)’인 전라도를 남김없이 정벌하고, ‘푸른 나라(靑國)’인 충청도와 그 밖의 지역에는 할 수 있는 만큼 군사를 움직여야 했다. 그 뒤에는 성을 쌓고 성을 지킬 부대를 정한 다음 나머지 군사는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1597년 늦여름, 일본의 두 군대가 내륙으로 나아갔다.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끈 좌군은 음력 8월 16일(양력 9월 26일) 남원을 함락했고, 모리 히데모토가 이끌고 가토 기요마사·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속한 우군은 황석산성을 함락했다. 명나라 장수 진우충이 버리고 떠난 전주는 8월 19일(양력 9월 29일) 싸움 없이 일본군의 손에 들어갔다. 우군은 전주에서 북쪽의 공주로 나아갔다. 『명사』는 마귀가 유격 우백영을 보내 공주에서 진우충과 합류하게 했다고 적고, 일본 측 기록은 일본군이 다가오자 우백영이 한양으로 물러났다고 덧붙인다.
공주에서 우군은 길을 나누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모리와 가토의 군사가 전의와 진천에 이르렀고, 그 일부인 구로다의 군사가 직산까지 왔다고 적는다. 일본어 위키백과가 요약한 일본 측 기록은 가토가 청주로 가고, 모리는 구로다를 선봉으로 삼아 9월 6일 천안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명군은 약하고 생각도 갈라져 있었다. 조선에 온 명군의 제독이 된 지 얼마 안 된 마귀는 음력 8월 27일 선조에게, 천안에 있는 명군이 수가 적어 적을 당하기 어렵고 지쳐 있으니 해생과 양등산을 보내 교대하겠다고 말했다. 『명사』에 따르면 마귀는 한양을 버리고 압록강까지 물러나자고까지 했는데, 관리 소응궁(蕭應宮)이 평양에서 서둘러 와서 이를 말렸다. 명군 전체를 맡은 문관인 경리 양호는 9월 3일 한양에 도착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그는 마귀가 싸우지 않은 것을 꾸짖고, 마귀와 함께 정예 기병을 몰래 골라 해생·우백영·양등산·파귀에게 이끌고 남쪽으로 가게 했는데, 다른 명군 부대도 조선 사람들도 이를 알지 못했다. 이어서 유격 파새가 기병 2,000명을 이끌고 뒤따랐다.
쉬움
직산 근처의 충돌
첫 소식은 음력 9월 8일 양호의 경리 아문에 들어왔다. 이를 전한 조선 관원들에 따르면, 명군은 직산 남쪽 10리쯤의 험하고 좁은 곳에 매복해 있다가 누구의 부대인지 모르는 일본군 선봉과 마주쳤다. 명군은 말에서 내려 싸웠고, 잠시 양쪽 모두 물러났다. 한 명나라 병사는 머리 30급을 베었고 총에 맞아 죽은 일본군은 셀 수 없으며, 벤 머리 가운데 금 투구와 금 갑옷을 갖춘 자가 몇 있어 우두머리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9일에는 더 자세한 보고 두 건이 올라왔다. 마귀를 맡은 접반사 장운익은 싸움터에서 돌아온 명나라 병사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천안과 직산 사이에서 흰옷을 입은 일본군 선봉이 들판을 덮으며 다가왔고, 명군은 처음에 이들을 조선 사람으로 여겨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군이 먼저 총을 쏘자 명나라 기병이 일제히 돌격했다. 한참 싸운 끝에 화살이나 곤봉에 맞아 죽은 일본군이 거의 500~600명에 이르렀고 머리 30여 급을 베었다. 그러자 일본군이 산에 올라가 흰 깃발을 들었고, 천안의 대군이 곧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수가 모자란 명군과 일본군은 각자 물러나 지켰다. 명군도 죽은 자가 많았고, 해생 등 네 장수는 지난밤 직산을 떠났다.
접반관 신충일은 7일에 일본군 선봉이 천안에서 올라왔고, 네 장수가 정예병 2,000명과 장관 15명을 거느리고 직산에서 15리쯤 되는 곳에서 맞서 싸워 머리 31급을 베었다고 보고했다. 해생은 손수 2급, 양등산은 1급, 파귀는 3급을 베었다. 돌아오는 길에 명군은 진위를 지나 초저녁에 수원에 이르러 저녁을 먹고, 밤 2경에 다시 말을 타고 떠났다.
일본어 위키백과가 요약한 일본 측 기록은 반대편에서 본 이야기를 전한다. 7일 동트기 전 구로다 나가마사는 구로다 나오유키·구리야마 도시야스가 이끄는 선봉을 직산 쪽으로 먼저 보냈다. 해가 뜨자 선봉은 명군이 산과 들에 가득한 것을 보았고, 물러나기보다 공격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나가마사가 3,000명을 이끌고 달려왔고, 명군에는 유격 파새의 증원군이 왔다. 승부가 쉽게 나지 않다가, 천안에 있던 모리 히데모토가 보낸 시시도 모토쓰구·요시미 히로유키의 선봉이 명군의 옆과 뒤를 쳤다. 그러자 명군은 수원 쪽으로 물러났고, 일본군은 오후 3시가 지나 추격하지 않고 천안으로 돌아갔다. 영어 위키백과는 케네스 스워프를 인용해, 구로다와 모리가 자기들의 조총으로 명군의 철 방패를 뚫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고 덧붙인다.
중급
공황에 빠진 한양, 그리고 누가 싸웠나
일본군이 올라온다는 소식에 한양은 공황에 빠졌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적이 직산에 이르자 도성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9월 9일에는 왕비가 난리를 피해 서쪽으로 떠났다고 적었다. 『선조수정실록』은 명나라 장수들이 선조에게 강가로 나가 보자고 청해 왕이 마지못해 나갔고, 백성들은 짐을 지고 서 있었으며, 승전 소식이 오고서야 서울이 조금 진정되었다고 덧붙인다. 세자는 이미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떠난 뒤였고, 선조는 명나라 장수에게 형세가 너무 급박해 가족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고 말했다.
명나라 장수들의 생각도 갈라져 있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12일 양호는 한강의 동작진으로 말을 몰았다. 마귀는 남대문 밖까지 뒤쫓아 와, 일본군이 다른 길로 돌아 나오면 명군이 갈 곳도 물러날 곳도 없어진다고 말렸지만, 양호는 “나대로 방법이 있다”고 답했고 왕도 그 뒤를 따랐다. 강을 건넌 양호와 마귀는 명나라 기병 1,000여 기를 양쪽 산봉우리에서 달리게 했다. 다시 강을 건너 동작진 이쪽으로 돌아온 뒤, 양호는 명나라와 조선 사수들에게 활쏘기를 겨루게 하고 강가에서 대포를 쏘게 했다. 실록은 여러 명나라 장수가 적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세가 외롭고 약하다는 핑계로 철수하려 했기 때문에, 양호가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 준 것이라고 설명한다.
조선군은 직산에서 싸웠을까? 이 글이 참고한 자료에는 이 전투에서 싸운 조선군 부대가 나오지 않는다. 『선조수정실록』은 기병을 보낸 사실을 조선 사람들도 몰랐다고 강조하고, 『선조실록』의 보고들은 명나라 병사에게 들은 말을 조선 접반관들이 옮겨 조정에 전한 것이다. 조선군은 형편없는 상태였다. 13일 도원수 권율은 왕에게, 충청 병사 이시언이 처음에는 2,000여 명을 거느리고 영남으로 갔지만 호남으로 돌아올 무렵에는 대부분 흩어져 50여 명만 남았다고 아뢰었다. 『명사』는 조선 조정이 도체찰사 이원익을 조령을 거쳐 충청도로 내보내 적을 막게 했다고 적지만, 이는 직산에서 싸웠다는 기록이 아니다. 그래서 이 전투는 조·명 연합군의 전투라기보다 명군과 일본군의 충돌로 설명하는 것이 알맞다.
중급
안성, 죽산, 그리고 남쪽으로의 회군
직산이 일본군이 가장 멀리 올라온 곳은 아니었다. 『선조실록』은 9월 14일 조에, 일본군이 10일에 안성을 노략질하고 나아가 죽산 경계를 침범했다고 적는다. 두 곳 모두 직산보다 한양에 가깝다. 조정에서는 직산에서 명군에게 가로막힌 일본군이 안성과 죽산으로 돌아 나와 용인 큰길을 따라 곧장 서울로 올 것을 걱정했고, 사간원은 권율을 돌려보내 양지와 죽산의 길을 지키게 하자고 건의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본군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15일 밤 선조는 신하들을 불러, 적이 갑자기 철수하고 있고 명나라 장수들이 정예병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추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논의했다. 왕은 명군을 끌어내려고 거짓으로 물러나는 척하는 계략이 아닐까 의심했고, 김수는 일본군이 충주 길을 따라 경상도로 돌아갈 것이라고 보았다. 20일 조선 관원들은 추격하는 명군 부대들이 모두 155급을 베었다는 명군의 보고를 전했다. 청주와 공주의 일본군 큰 진영이 모두 떠나 일부는 전라도로 들어가고 일부는 조령 쪽으로 흩어져 물러났으며,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을 모두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22일 선조는 적이 경기와 충청도에서 물러가기 시작했으나 마을마다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적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구로다가 며칠 동안 직산에 머물며 그 일대를 분탕질한 뒤 모리와 합쳐 공주를 거쳐 상주로 물러났고, 모리와 구로다는 성주로 후퇴했다가 10월 중순 양산으로 물러났다고 적는다. 『징비록』은 그 결과를 이렇게 요약한다. 적은 경기 경계에서 되돌아갔고, 가토 기요마사는 다시 울산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에, 시마즈 요시히로(『징비록』의 표기는 沈安頓吾)는 사천에 진을 쳐, 머리부터 꼬리까지 700~800리에 이르는 성들이 남해안에 늘어섰다.
심화
일본군은 왜 되돌아갔나
한국의 서술은 오래전부터 일본군의 철수를 직산과 연결해 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임진왜란」 항목은 소사평의 싸움이 일본군의 북상을 완전히 막았고, 이순신의 명량 승리가 바다로 서쪽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았다고 적는다. 이 항목은 두 전투를 각각 9월 5일과 16일로 적어 날짜상으로는 11일 차이지만, 본문에서는 ‘10일이 지난’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자료에는 일본군의 철수에 대한 여러 설명이 제시되어 있으며,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어떤 요인이 실제로 얼마나 작용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첫째, 작전 계획이다. 일본어 위키백과가 인용한 1597년 초 히데요시의 명령은 전라도를 정벌하고 충청도와 그 밖의 지역에서 가능한 만큼 작전한 뒤 성을 쌓고 수비대를 정하도록 했다. 이 명령은 한양을 목표로 들지 않았지만, 한양을 명시적으로 제외한 것도 아니다. 서울을 공격하지 말라는 지시는 아래의 포로 진술에만 나온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우군이 안성과 죽산에 이르면서 목표를 이루었고 계획대로 되돌아갔다고 본다. 음력 10월 3일 자 『선조실록』에 실린, 충청 병사 이시언에게 붙잡힌 일본군 포로 후쿠다 간스케(福田勘介)의 진술에 따르면, 히데요시가 장수들에게 서울은 침범하지 말고 9월까지 닥치는 대로 죽인 다음 10월 안으로 서생포나 부산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했으며, 그래서 서울까지 사흘 길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곧바로 돌아갔다. 포로의 진술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일본 측 자료가 인용하는 명령과 대체로 어긋나지 않는다.
둘째, 명군의 저항이다. 새뮤얼 홀리는 중국군이 조선에 돌아왔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일본군은 겨울이 다가오는 때에 반격에 노출될 땅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고 쓴다. 모리 소속의 노정(奴丁)이었다는 또 다른 포로는, 서울로 진격하려다 직산에서 명군에게 가로막혀 일본군 500여 명이 죽었고 가토 기요마사가 철수 명령을 전했다고 말했다. 셋째, 계절과 보급이다. 영어 위키백과는 다가오는 겨울과 식량 부족으로 북상이 멈추었다고 설명하는 일본 연구를 인용하고, 『명사』는 조선이 전쟁으로 황폐해 일본군이 약탈할 것을 거의 얻지 못했다고 적는다.
『명사』는 또 다른 설명도 내놓는다. 명나라 사자가 붙잡힌 교섭가 심유경의 친필 편지를 일본군에게 가져가자 일본군이 물러났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토의 경솔한 진격을 탓했다는 것이다. 반면 명량은 처음의 남쪽 회군을 설명할 수 없다. 명량 해전은 9월 16일(양력 10월 26일)에 벌어졌지만, 조선 조정은 이미 14일과 15일에 일본군의 철수를 논의하고 있었다. 명량은 조선 수군을 지켜 내고 일본 수군의 서진에 타격을 주었지만, 땅에서의 철수는 그 소식이 전해질 수 있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심화
한 전투, 여러 기록
조선의 기록끼리도 일치하지 않는다. 『선조실록』의 초기 보고들은 양쪽 모두 피해가 큰 격전을 그리고, 그 뒤 수가 모자란 명군이 수원으로 물러났다고 전한다. 수십 년 뒤에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은 소사평에 미리 매복한 명군이 대오를 갖추지 못한 일본군을 덮쳐 매우 많은 적을 죽였고, 파새의 기병 2,000명과 함께 추격해 다시 격파했다고 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이야기를 따르면서, 달아나는 일본군이 조총 등 무기를 버렸다고 덧붙인다.
명나라 쪽 기록도 엇갈린다. 『명사』는 마귀가 ‘청산·직산 대첩’을 보고하자 소응궁이 일본군은 심유경의 편지 때문에 물러난 것이고 청산과 직산에서는 모두 교전 자체가 없었으니 전공을 내세울 수 없다고 반박했으며, 이에 노한 총독 형개(邢玠)와 양호가 소응궁을 탄핵해 잡아들이게 했다고 적는다. 같은 책의 「양호전」은 부총병 해생 등이 ‘여러 차례 적을 꺾었고’ 조선군도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며, 그 뒤 일본군이 울산으로 물러났다고 쓴다. 이 조선군의 활동이 직산에서 있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양호 자신은 1598년, 주로 실패한 울산성 공격을 두고 황제를 속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전투 서술에 요약된 일본 측 기록은 일본군의 승리로 전한다. 명군은 2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수원 쪽으로 밀려났고, 구로다 군의 전사자는 29명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일본군 전사 500~600명이라는 『조선왕조실록』의 숫자도 함께 소개하고, 결과 요약에서는 승부가 나지 않았다고 적는다. 포로 후쿠다 간스케는 직산 싸움에서 구로다 군이 많이 죽어 부끄러워 숨기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세한 것은 모른다고 했다. 영어 위키백과는 서양·한국·중국 저작 대부분이 직산을 명군의 승리로 보지만 일본 저작은 엇갈린다고 하고, 결과를 양측의 철수로 적는다. 홀리는 이 싸움을 ‘중국군 선발대’와의 충돌이라고 부른다.
숫자는 맞춰 볼 수 없다. 조선의 보고는 벤 머리(30급 또는 31급)를 세고 화살과 곤봉에 죽은 적을 어림잡았으며(500~600명), 일본 측의 전사 29명은 구로다 군만 센 것이다. 이 글이 참고한 자료 가운데 명군 피해 전체를 믿을 만하게 전하는 것은 없다. 전투를 자세히 서술한 기록들은 직산 근처에서 명군과 구로다 군이 싸웠다는 데에는 일치하지만, 싸움의 전개와 결과는 서로 다르게 전한다. 『선조실록』의 초기 보고는 명군이 수원으로 물러났다고, 일본 측 기록은 양쪽이 싸움터를 떠났다고, 『선조수정실록』은 명군이 추격해 다시 이겼다고 적으며, 소응궁은 교전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분명한 것은 그 뒤 일본군이 안성과 죽산까지 들어왔지만 한양을 공격하지 않았고, 음력 9월 중순에는 조정이 그들의 철수를 논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심화
날짜, 장소, 그리고 사료
전투 날짜는 하루 단위까지 확실하지 않다. 신충일의 보고와 일본어 위키백과가 요약한 일본 측 기록은 9월 7일로 적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9월 5일로 적는다. 9월 7일을 양력으로 바꾸는 데에도 두 가지 답이 나온다. 원래의 『선조실록』에서 이달의 간지는 10월 16일과 맞는데, 영어 위키백과도 스워프를 인용해 이 날짜를 쓴다. 이달 초하루를 10월 11일로 두는 『선조수정실록』과 한국천문연구원 변환표로는 10월 17일이다. 같은 하루 차이가 이달의 다른 날짜에도 생긴다. 10일의 안성 노략질은 10월 19일 또는 20일이다. 16일의 명량은 이 사이트에서 10월 26일로 적는다.
장소도 여러 가지로 적힌다. 첫 보고는 매복한 곳을 직산 남쪽 10리쯤이라고 했고, 장운익에게 말을 전한 병사는 ‘천안과 직산 사이’, 신충일은 직산에서 15리쯤이라고 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직산의 소사평을 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직산 북쪽 소사평의 홍경원(弘慶院)을 싸움터로 적는다. 보고들이 옮겨 다니며 벌어진 싸움의 서로 다른 단계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주된 싸움이 어디에서 벌어졌는지 정할 수 없다.
사료마다 한계가 있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 병사의 말을 옮기는 접반관들을 통해 두세 다리 건너 전투 소식을 들었다. 그때 조정은 좋은 소식이 절실했고 명나라의 호의에 기대고 있었으므로, 이런 사정이 보고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수십 년 뒤에 편찬되어 더 깔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명사』는 그보다 훨씬 뒤에 편찬되었고, 1597년 전역에 대한 서술에는 공을 두고 벌어진 명나라 관리들 사이의 다툼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 글에서 쓴 일본 측 전투 서술은 일본어 위키백과를 거친 것이다. 일부 숫자에는 『일본전사·조선역(日本戦史・朝鮮役)』이 인용되어 있지만, 그 바탕이 된 일본 측 저작들은 이 글을 쓰면서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 포로의 진술은 소문이거나 붙잡은 쪽이 듣고 싶어 한 말일 수 있다. 히데요시가 10월 2일에 배에 올라 20일 안에 일본에 도착하라고 명령했다는 한 포로의 말을 듣고 마귀는 매우 황당한 말이라고 했다.
중급
직산 전투를 기억하는 방식
당시 조선 조정은 직산을 명군의 승리로 여기고 명나라 장수들에게 직접 사례했다. 9월 25일 선조는 부총병 해생의 처소를 찾아가 술을 대접했다. 10월 3일에는 직산 싸움에서 많은 적을 베었다고 실록이 적은 유격 파귀를 찾아가, 흉악한 적이 서울 가까이 다가와 군사와 백성이 무너지고 나라가 거의 망할 뻔했는데 대인의 위력 덕분에 적의 예봉이 꺾여 모두 물러갔다고 말했다. 55세의 파귀는 수많은 싸움을 겪었지만 왜적처럼 사나운 적은 없었다고 하면서도, 철기(鐵騎)로 달려들어 짓밟으면 그들이 용맹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모든 명나라 장수가 이 싸움을 대단하게 여긴 것은 아니다. 선조가 직산의 승전을 말하자, 이씨 성의 한 명나라 부총병은 직산의 일은 말할 것도 없다며, 평양에서처럼 10만 군사를 모조리 죽일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축하할 수 있다고 답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임진왜란」 항목은 이 싸움을 ‘소사평의 대첩’이라고 부른다. 같은 백과사전의 「소사전투」 항목은 이 싸움을 평양·행주의 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陸戰) 3대첩의 하나로 꼽고, 다른 두 싸움이 성을 치거나 지키는 싸움이었던 데 비해 들판에서 벌어진 회전(會戰)이었다는 점을 특징으로 든다. 이는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꼽는 한산도·진주·행주의 ‘3대 대첩’과는 다른 목록이다. 같은 백과사전의 「임진왜란」 항목은 직산과 같은 달 16일의 명량을 짝지어, 하나는 땅에서, 다른 하나는 바다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막았다고 서술한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직산을 이 전쟁에서 두 군대가 들판에서 정면으로 맞붙은 유일한 싸움이라고 한다. 그 전투 서술은 일본군의 성공을 그리지만, 결과 요약에는 승부가 나지 않았고 해 질 무렵 양군이 물러났다고 적는다.
핵심 개념
- 제한적인 침략
- 히데요시의 두 번째 침략은 먼저 전라도와 충청도, 그리고 해안의 성 쌓기를 목표로 삼았다. 한양 점령이 꼭 목표였던 것은 아니다.
- 수도로 가는 길목의 명나라 기병
- 한양에서 남쪽으로 보낸 명나라 기병이 직산 근처 큰길에서 일본군 선봉과 마주쳤다. 싸움은 명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졌고, 이 글이 참고한 자료에는 이 전투에 나선 조선군 부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 양쪽 모두 승리를 주장
- 명과 조선의 기록은 직산을 승리라고 부르고, 일본 측 기록은 명군이 물러났다고 전한다. 조선의 초기 보고 자체도 양쪽의 큰 피해와 명군의 수원 철수를 적고 있다.
- 가장 멀리 온 곳은 아니다
- 전투 며칠 뒤 일본군 일부는 수도에 더 가까운 안성과 죽산 경계까지 들어왔지만 한양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 회군에 대한 여러 설명
- 작전 계획, 명군의 저항, 다가오는 겨울, 보급난, 외교가 모두 철수의 까닭으로 제시되어 왔지만, 사료로는 각각의 비중을 알 수 없다. 명량 해전은 땅에서의 철수가 시작된 뒤에 벌어졌다.
- 건너 들은 보고
- 조선 조정은 접반관들이 명나라 병사의 말을 옮긴 보고로 전투 소식을 들었다. 후대의 『선조수정실록』은 초기 보고보다 명군의 승리를 더 분명하게 서술한다.
기록
- 1597년 — 음력 2월 21일: 히데요시가 장수들에게 전라도를 정벌하고 충청도에서 작전한 뒤 해안에 성을 쌓으라고 명령한다.
- 1597년 — 8월: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크게 패한다.
- 1597년 — 9월 26일(음력 8월 16일): 일본 좌군이 남원을 함락한다.
- 1597년 — 9월 29일(음력 8월 19일): 일본군이 싸움 없이 전주를 차지한다.
- 1597년 — 음력 9월 초(양력 10월 중순): 양호가 한양에 도착해 명나라 정예 기병을 남쪽으로 보낸다.
- 1597년 — 음력 9월 7일(양력 10월 16일 또는 17일): 직산 전투.
- 1597년 — 음력 9월 9일: 왕비가 한양을 떠나 서쪽으로 피난한다.
- 1597년 — 음력 9월 10일: 일본군이 안성을 노략질하고 죽산 경계를 침범한다.
- 1597년 — 음력 9월 14~15일: 조선 조정이 일본군의 철수를 논의한다.
- 1597년 — 10월 26일(음력 9월 16일):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한다.
- 1597년 — 음력 9월 하순~10월(양력 10~11월): 일본군이 남해안의 성으로 물러난다.
- 1598년 — 양호가 주로 실패한 울산성 공격을 두고 황제를 속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된다.
용어 풀이
- 정유재란
- 1597년의 간지 정유(丁酉)를 딴, 일본의 두 번째 침략(1597–1598)을 가리키는 한국의 이름.
- 우군과 좌군
- 1597년 내륙으로 나아간 일본의 두 군대. 남원을 함락한 우키타 히데이에의 좌군,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가 속한 모리 히데모토의 우군이다.
- 경리(經理)
- 조선에서 명군의 군무 전체를 맡은 명나라 문관. 1597~1598년에는 양호가 이 자리에 있었다.
- 제독(提督)
- 명나라 야전군의 지휘관. 1597년에는 마귀가 이 자리에 있었다.
- 접반관·접반사
- 명나라 장수 곁에 붙어 그를 접대하고, 소식과 보고를 조선 조정에 전하던 조선 관원.
- 리(里)
- 수백 미터 정도의 전통적인 거리 단위. 정확한 길이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 왜성
- 전쟁 중 일본군이 조선 남해안에 쌓은 일본식 성. 울산·순천의 성 등이 있다.
- 음력(태음태양력)
- 조선·명·일본이 쓰던 달력. 달의 차고 기욺에 따라 달을 정하므로, 날짜를 양력(그레고리력)으로 바꾸어야 한다.
묻고 답하기
직산 전투에서는 누가 이겼나요?
논란이 있어요. 명과 조선의 기록은 명군의 승리라고 하고, 일본 측 기록은 명군을 물리쳤다고 해요. 조선의 초기 보고는 양쪽 모두 피해가 컸고 두 군대가 모두 물러났다고 적어요.
조선 군사도 직산에서 싸웠나요?
이 글이 참고한 자료에는 이 전투에서 싸운 조선군 부대가 나오지 않아요. 싸움은 명나라 기병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졌고, 조선 관원들은 소식을 전했어요.
직산 전투가 서울을 구했나요?
일부 기록은 직산 전투가 한양을 지켰다고 평가하지만, 그 역할에는 논란이 있어요. 일본군은 전투 뒤에도 안성과 죽산까지 들어왔고, 그 뒤 물러난 까닭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어요.
1597년에 일본군이 서울에 가장 가까이 온 곳이 직산인가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전투 며칠 뒤 일본군은 수도에 더 가까운 안성을 노략질하고 죽산 경계까지 들어왔다가 되돌아갔어요.
명량 해전 때문에 일본 육군이 되돌아갔나요?
아니에요. 조선 조정은 명량 해전이 벌어지기 전날 이미 일본군의 철수를 논의하고 있었어요. 명량의 승리는 바다에서 중요했지만, 땅에서의 철수는 그 전에 시작되었어요.
날짜는 10월 16일인가요, 17일인가요?
두 날짜가 모두 쓰여요. 전투는 음력 9월 7일에 벌어졌어요. 원래 『선조실록』의 간지에 따르면 이날은 1597년 10월 16일이고, 『선조수정실록』과 한국천문연구원 변환표로는 10월 17일이에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9월 5일로 적어요.
왜 소사전투라고도 부르나요?
조선의 기록이 명나라 기병이 일본군을 친 곳으로 직산 근처의 들판 소사평을 들기 때문이에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선조실록 91권, 선조 30년(1597) 8월 27일 2번째 기사: 남별궁에 거둥하여 도독 마귀의 제독 승진을 축하하고 왜적의 상황을 묻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1597) 9월 3일 4번째 기사: 모화관에 거둥하여 경리 양호를 접견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1597) 9월 8일 2번째 기사: 직산 부근에서 중국군이 올린 전과를 접대 도감이 보고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1597) 9월 9일 1번째 기사: 제독 접반사 장운익이 직산 전투의 상황을 보고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1597) 9월 9일 2번째 기사: 접반관 신충일이 서계하여 직산 전투의 상황을 보고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1597) 9월 10일 3번째 기사: 이 부총의 거처에 거둥하여 내전의 피난을 도와 준 일에 사의를 표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1597) 9월 11일 8번째 기사: 경리 양호가 서울로부터 병력을 철수시키는 것 같다는 보고를 비변사가 올리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1597) 9월 12일 1번째 기사: 대신들이 수원으로 가는 경리 양호를 직접 만류해 볼 것을 건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1597) 9월 12일 2번째 기사: 경리 양호가 동작진으로 행차해 서울 고수의 의지를 보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1597) 9월 13일 4번째 기사: 사간원이 권율로 하여금 양지와 죽산 등의 길을 지키도록 하자고 건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1597) 9월 13일 6번째 기사: 도원수 권율을 인견하고 적의 형세에 관해 논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1597) 9월 14일 5번째 기사: 왜적이 안성을 노략질하고 죽산을 침범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1597) 9월 15일 4번째 기사: 왜군이 철수하는 까닭에 관해 비변사 당상들과 논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1597) 9월 20일 3번째 기사: 접대 도감이 왜군을 추격하는 중국군의 전과를 보고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1597) 9월 22일 2번째 기사: 왜군이 경기·충청도에서 후퇴한 후의 수습책을 승정원에 전교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1597) 9월 25일 1번째 기사: 부총 해생의 하처에 거둥하여 주례를 행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3권, 선조 30년(1597) 10월 2일 4번째 기사: 사로잡힌 왜적 한 사람이 실토한 적의 내부 사정을 접반사 장운익이 보고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3권, 선조 30년(1597) 10월 3일 2번째 기사: 유격 파귀의 관사에 나아가 접견하고 위로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3권, 선조 30년(1597) 10월 3일 3번째 기사: 충청 병사 이시언이 사로잡은 왜적 복전감개의 공초.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31권, 선조 30년(1597) 9월 1일 2번째 기사: 경리 양호가 부총병 해생 등을 시켜 적병을 직산에서 크게 격파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유성룡(柳成龍), 징비록(懲毖錄) 권2 (한문 원문). 위키문헌(중국어)
- 명사(明史) 권320 외국열전 1: 조선 (한문 원문). 위키문헌(중국어)
- 명사(明史) 권259, 양호전 수록 (한문 원문). 위키문헌(중국어)
- 이장희, 소사전투(素沙戰鬪).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장희, 임진왜란(壬辰倭亂).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새뮤얼 홀리(Samuel J. Hawley), The Imjin War. Transactions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vol. 78, 2003
- Battle of Jiksan. 위키백과(영어)
- 稷山の戦い. 위키백과(일본어)
- Yang Hao (Ming dynasty). 위키백과(영어)
- 음양력 변환 계산. 한국천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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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