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1592년, 진주라는 성곽 도시에서 적은 수의 조선군이 훨씬 큰 일본군을 물리쳤어요. 일본의 지도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몹시 화가 났어요. 이듬해, 일본 관리들이 명나라와 평화 협상을 하고 있는데도 히데요시는 장수들에게 진주성을 다시 쳐서 빼앗으라고 명령했어요.
이번 일본군은 어마어마하게 많았어요. 조선과 명나라의 장수 여럿이 성을 지킬 수 없으니 사람들이 피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김천일, 황진, 최경회 같은 몇몇 장수는 성에 남기로 했어요. 진주는 쌀이 많이 나는 서쪽 전라도로 가는 문과 같은 곳이고, 성만 차지하고 물러가겠다는 일본군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한여름 9일 동안 수비군은 성벽 위에서 싸웠어요. 일본군은 흙으로 언덕을 쌓아 성안으로 총을 쏘고, 덮개를 씌운 수레를 성벽에 붙여 돌을 파냈어요. 성안의 남자와 여자들도 흙과 돌을 날라 도왔어요. 그런데 큰비가 내려 성벽이 젖어 약해졌어요. 가장 용감한 장수였던 황진이 전사했고, 9일째 되는 날 성벽 한쪽이 무너졌어요.
일본군이 밀려 들어왔어요. 김천일과 최경회는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남강에 몸을 던졌어요. 그 뒤 일본군은 군사와 보통 사람을 가리지 않고 성안 사람들을 엄청나게 많이 죽였어요. 조선 기록에는 싸움과 함락 때 강에 빠져 죽은 사람까지 모두 합쳐 6만 명쯤이 죽었다고 나와요. 전쟁 전체에서 가장 슬픈 날 가운데 하나였어요.
진주 사람들은 지금도 논개라는 젊은 여인을 기억해요. 논개가 일본 장수를 꼭 끌어안고 함께 강으로 뛰어들었다는 이야기예요. 이 이야기는 30년쯤 뒤에야 처음 글로 적혔기 때문에 모든 내용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임진왜란에서 가장 유명한 기억 가운데 하나가 되었어요.
한눈에 보기
- 무엇
-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였던 때, 1592년 진주에서의 패배를 갚으라는 명령에 따라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해 함락한 싸움
- 언제
- 1593년 음력 6월 21일–29일(양력 1593년 7월 19일–27일). 본격적인 공방은 7월 20일부터. 영어 위키백과는 7월 20일–27일로 적는다
- 장소
- 남강 가의 진주성. 경상우도의 중심 고을로,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
- 수비 측
-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복수의병장 고종후, 장윤, 김해부사 이종인, 거제현령 김준민, 진주목사 서예원 등
- 공격 측
- 일본 측·현대 서술에 이름이 나오는 장수로 포위군의 우키타 히데이에·가토 기요마사·구로다 나가마사·시마즈 요시히로 등, 지원 임무를 맡은 모리 히데모토·고바야카와 다카카게·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 등
- 병력
- 일본군: 작전에 동원된 병력 약 9만–10만 명. 한 재구성에 따르면 그 가운데 실제로 성을 에워싼 병력은 약 4만 명(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또는 42,491명(일본어 위키백과가 인용한 시마즈 가문의 명부)이지만, 대군 전체가 진주에 왔다고 보는 서술도 있다. 수비군: 싸울 수 있는 군사는 ‘수천 명’, 피란민까지 성안에 6만–7만 명
- 결과
- 7월 27일 함락. 장수들이 거의 모두 죽고 성이 약탈당했다. 조선 기록은 6만여 명 이상이 죽었다고 하고, 일본 측 기록은 벤 목의 수를 센다. 일본군은 구례 방면까지 노략질했지만 전라도를 점령하지는 않았다
- 기억
- 창렬사(1607년 사액), 논개를 기리는 의암과 의기사. 진주성에서는 1593년의 희생자를 1592년의 승리와 함께 기린다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쉬움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어떤 싸움이었나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여름, 바로 전해 가을에 일본군을 물리쳤던 남강 가의 성곽 도시 진주에서 벌어진 싸움이다. 그사이 전쟁의 모습은 크게 바뀌어 있었다. 2월에는 명과 조선의 군대가 평양을 되찾았고, 일본군은 5월에 한양에서 물러나 남해안의 요새화된 진지로 내려갔으며, 명과 일본의 사신들은 강화 교섭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교섭 도중에 일본군은 조선에 있던 병력 대부분을 모아 진주로 진격했다.
음력 6월 21일부터 29일까지(양력 1593년 7월 19일–27일), 수비군보다 몇 배나 큰 일본군이 진주성을 에워쌌다. 성안에는 김천일·최경회·황진 등이 이끄는 군사와 의병 수천 명, 그리고 수만 명의 성민과 피란민이 있었다. 후반에는 큰비까지 수비를 어렵게 한 9일간의 싸움 끝에 일본군은 29일(양력 7월 27일) 성안으로 쳐들어왔다.
함락 뒤에는 임진왜란에서 가장 참혹한 학살 가운데 하나가 이어졌다. 조선 측 기록은 강에 빠져 죽은 이들까지 군사와 백성을 합쳐 모두 6만여 명 이상이 죽었다고 전한다. 장수들도 거의 모두 죽었고, 그 가운데 여럿은 남강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 뒤 전라도를 점령하지 않았다. 서쪽으로 노략질을 벌인 뒤 해안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 이 싸움은 비극이자 충절의 상징으로 기억되며, 지금도 어려운 질문을 남긴다. 과연 진주성을 지켜야 했을까?
쉬움
왜 다시 진주였나: 강화 교섭 한가운데의 보복전
1592년 음력 10월의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일본군이 육지에서 겪은 가장 큰 패배 가운데 하나였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명의 협상가 심유경과, 규슈의 나고야(名護屋) 본영에서 히데요시를 만나고 돌아온 명의 사신 두 사람은 “수길(秀吉)이 반드시 전년에 패전한 원한을 갚고자 하여 군사를 연합해서 진주를 공파한 뒤에 바다를 건너겠다”고 한다고 보고했다. 심유경은 조선의 도원수에게도 글을 보내, 관백이 장수들에게 “너희도 진주에 진공하여 성지(城池)를 파괴함으로써 전일의 원한을 풀라”고 했다고 전했다. 심유경은 일본 측의 다른 불만도 함께 들었다. 진주에서 매우 많은 군사가 죽었고, 바다에서 배를 잃었으며, 조선 군사가 풀을 베러 나온 일본 병사를 자주 죽였다는 것이다.
보복만이 동기는 아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일본군이 강화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 했다고도 쓰고, 한국어 위키백과는 이 공격을 강화 협상을 위한 무력시위로 설명한다. 이 무렵 히데요시는 명의 사신들에게 조선 남쪽 4도를 일본에 넘기라는 조건이 들어 있는 강화 조건을 내놓고 있었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일본군이 남부 장악을 기정사실로 만들려 했다고 설명한다. 진주는 또한 경상도 서부의 중심 근거지였고, 일본군이 1592년에 전주와 주요 곡창 지대를 끝내 손에 넣지 못한 전라도로 가는 길 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 공격은 전쟁이 공식적으로는 잦아들던 때에 일어났다. 일본군은 명과의 합의에 따라 음력 4월 18일(양력 5월 18일) 한양에서 물러났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때 명이 회담을 이유로 싸움을 피하고 있었다고 쓴다. 침략군을 몰아낼 때까지 싸우기를 원했던 조선은 사실상 교섭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외교가 싸움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쉬움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진주성을 지키기로 한 결정
남쪽의 조명 연합군은 흩어져 있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명의 총병 유정(劉綎)은 대구에, 참장 낙상지(駱尙志)는 남원에, 유격 왕필적(王必迪)은 상주에 있었고, 심유경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영에서 강화를 협상하고 있었다. 조선의 도원수 김명원과 전라순찰사 권율은 조정의 명을 받고 의령에 이르렀으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표현대로 적의 기세에 눌려 물러났다.
경고는 양쪽에서 왔다. 심유경은 일본 측 교섭을 이끌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말을 전했다. 진주로 가는 일본군은 엄청난 대군(고니시는 30만이라고 했다)이니 진주 백성들이 그 예봉을 피하게 하라, 성이 텅 비어 있으면 일본군은 곧 철수해 동쪽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심유경 자신도 조선 장수들에게, 다른 방책은 없고 성을 비우고 잠시 피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상우병사 최경회는 자신의 장계로 이 경고를 조정에 전했다. 심유경을 수행한 통사는, 고니시가 히데요시에게 진주 공격을 강력히 주장한 가토 기요마사를 힘껏 말렸다고 했다고 전했다.
여러 조선 장수는 성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전라병사 선거이와 홍계남은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나 안쪽을 지키는 것이 낫다며 성을 나가 운봉에 진을 쳤다. 경상도에서 가장 이름난 의병장 곽재우는 성에 들어가라는 명을 따르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그는 “3리밖에 안 되는 외로운 성으로 어떻게 방어하겠습니까. 나는 차라리 밖에서 원조를 할지언정 성에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싸움에 노련한 군졸들을 차마 버릴 수 없다고 했다.
남기로 한 이들도 있었다. 전라도 나주 출신의 전직 관리로 창의사(倡義使)라는 직함을 받은 김천일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음력 6월 14일(양력 7월 12일) 의병 300명을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갔고, 물러나자는 의견을 물리쳤다. 충청병사 황진이 700명, 최경회가 500명, 1592년 아버지 고경명을 잃은 고종후가 ‘복수’ 의병 400명을 거느리고 왔으며, 다른 이들도 목사 서예원과 이종인·김준민 등에 합류했다. 조선 측 서술에 따르면 이들은 진주가 전라도로 가는 길목이며, 진주만 차지하고 물러가겠다는 일본군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보았다. 충청병사는 진주 수비와 직접 관계가 없으니 밖에서 싸우는 것이 옳다는 말을 듣자, 황진은 이미 창의사와 약속했으니 저버릴 수 없다고 답했다. 김천일과 최경회가 함께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김천일은 의병을, 최경회는 관군을 거느렸고, 황진은 순성장(巡城將)이 되었다. 성안의 창고에 곡식이 매우 많은 것을 보고, 그들은 함께 지키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쉬움
1593년 7월의 9일
21일(양력 7월 19일) 일본 기병이 성 동북쪽 산 위에 나타났다. 22일(양력 7월 20일)에는 대군이 뒤따라와 두 갈래로 진을 쳤고, 처음 맞붙었을 때 성안에서 왜적 30여 명을 쏘아 맞히자 적이 물러갔다. 적은 초저녁에 다시 쳐들어와 밤새 공격을 되풀이했다. 수비군은 성 남쪽은 남강과 촉석 벼랑이 막아 주고 서쪽과 북쪽은 물을 채운 해자가 지켜 주니 적이 동쪽으로만 공격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해자의 물을 빼고 흙으로 메워 큰길을 만들었다. 또 주변 고을에 군사를 나누어 매복시켜 바깥의 구원을 막았다. 뒤에 탈출한 한 군관은 포위한 적의 진이 사방 5리가량 퍼져 있었다고 전했다.
조선 측 기록은 날마다 되풀이된 공격, 흔히 낮에 세 차례와 밤에 네 차례의 싸움을 적고 있다. 25일(양력 7월 23일) 일본군은 동문 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토옥(土屋)을 지어 성안으로 총을 쏘아 댔다. 황진은 전복과 전립을 벗고 몸소 돌과 흙을 져 날랐고, 성안의 남녀가 힘을 보태 하룻밤 만에 마주 보는 언덕을 쌓았으며, 그 위에서 현자총통을 쏘아 적의 진지를 부수었다. 26일에는 적이 생가죽을 씌운 나무 궤짝으로 몸을 가리고 다가와 성벽을 헐었고, 나무 망루 위에서 불화살을 쏘아 성안의 초가에 불을 질렀다. 큰비에 활의 아교가 풀리고 군사들은 지쳐 갔지만, 수가 훨씬 많은 일본군은 군사를 바꿔 가며 쉬지 않고 밀려왔다.
27일 일본군은 동문과 서문 밖 다섯 곳에 언덕을 쌓고 대나무 붕(棚) 위에서 내려다보며 총을 쏘았고,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날 성안에서 300여 명이 죽었다. 또 큰 궤짝을 네 바퀴 수레에 싣고 철갑을 입은 군사들이 그 안에 몸을 숨긴 채 성벽에 다가와 쇠몽둥이로 성을 뚫으려 했다. 성안에서 가장 힘이 센 이종인이 적 5명을 잇달아 죽였고, 수비군은 기름 먹인 횃불을 던져 수레를 불태웠다. 28일(양력 7월 26일) 황진이 성 밑을 내려다보며 오늘 싸움에서 죽은 적이 1천 명은 넘겠다고 말하는 순간, 성 아래에서 쏜 탄환이 목판에 맞고 튀어 그의 이마에 맞았고, 그는 숨졌다. 황진의 죽음에 성안이 흉흉해졌다.
29일(양력 7월 27일) 황진의 자리를 이어받은 목사 서예원은 겁에 질려 허둥댔고, 대신 맡은 장윤도 곧 탄환에 맞아 죽었다. 이날 오후, 비에 젖은 동쪽 성벽 한쪽이 무너졌다. 일본군은 덮개를 씌운 수레를 앞세워 다가왔다. 일본 측 기록은 이를 ‘귀갑차(龜甲車)’라 부르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소가죽을 여러 장 덮은 수레라고 설명한다. 이종인과 그의 군사들은 활을 내려놓고 창과 칼로 첫 물결을 밀어냈지만, 적은 다시 김천일의 의병이 지키던 서북쪽을 뚫고 들어왔고 수비는 무너졌다.
중급
함락과 학살
일본군이 밀려 들어오자 많은 군사가 강 위의 촉석루로 물러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김천일·고종후·최경회 등은 촉석루에서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한 뒤 남강에 몸을 던졌다. 『선조수정실록』은 김천일이 아들 김상건과 함께 죽었고, 나주에서 함께 의병을 일으킨 양산숙도 함께 죽었으며, 이종인은 남강까지 싸우며 나아가 두 팔에 적 둘을 끼고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에서 죽는다”고 크게 외치며 강에 뛰어들었다고 전한다. 김준민은 홀로 말을 달리며 거리에서 싸우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보였을 뿐, 어디서 죽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목사 서예원도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
그다음은 학살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은 성이 함락되자 적이 “대대적으로 도륙을 자행하였다”고 쓰고, 성안의 남녀가 앞다투어 강에 몸을 던져 “흐르는 시체가 강을 메웠다”고 하며, 일본군이 성곽을 헐고 가옥을 불태웠다고 전한다. 뒤에 경상도 감사가 보내 조사하게 한 이에 따르면, 성안에 쌓인 시체가 1천여 구였고, 촉석루에서 남강 북쪽 기슭까지 시체가 겹겹이 쌓였으며, 강 아래쪽 멀리까지 시체가 떠내려갔다. 조선 측 기록은 싸움과 학살, 강에서 죽은 사람을 모두 합쳐 6만여 명 이상으로 적는다. 정확한 수는 결코 알 수 없지만, 수비군이 무너진 뒤 성안의 민간인까지 대규모로 학살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본군도 큰 대가를 치렀다. 『선조수정실록』은 9일 동안 밤낮으로 크고 작은 싸움이 1백여 차례 벌어졌고 적의 죽은 자도 상당했다고 쓴다. 영어 위키백과는 역사학자 케네스 스워프를 인용해 일본군 사상자를 1만 3천 명 이상으로 적지만, 믿을 만한 집계는 없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일본군의 손실도 막대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철수했다고 평가한다.
소식은 늦게 전해졌고 구원은 끝내 오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명의 제독 이여송은 남쪽의 여러 장수에게 군사를 전진시켜 구원하라고 명했지만, 장수들은 적의 형세를 두려워해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함락 후 보름도 더 지난 음력 7월 15일(양력 8월 11일)까지도 선조는 명의 장수들에게 진주 구원을 거듭 청하라고 지시하고 있었고, 함락 소식은 그 이튿날 조정에 닿았다. 선조는 진주 함락의 책임을 명의 협상가 심유경에게 돌렸다. 『선조수정실록』은 또 이여송이 자신이 직접 영남에 가서 진주를 구했다고 본국에 보고하면서 함락 사실을 숨겼고, 강화를 주장하던 명의 경략 송응창이 조선의 급보를 막았다고 비판한다.
중급
군대는 얼마나 컸나: 동원 병력과 포위 병력
일본군의 규모가 자료마다 크게 다른 것은 서로 다른 것을 세기 때문이다. 이 작전에 동원된 전체 병력은 흔히 9만–10만 명으로 서술된다. 영어 위키백과는 역사학자 스티븐 턴불을 따라 9만 명이라 하고, 이를 전쟁 전체에서 단일 작전에 동원된 일본군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고 쓴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5개 번대 합계 9만 명을 제시하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김천일」 항목은 “10만에 가까운” 대군, 「창렬사」 항목은 “10여만의 대군”이라고 쓴다.
여러 자료는 이 병력이 모두 성을 에워싼 것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주성」 항목은 왜군 4만여 명이 진주성을 공격했다고 쓴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시마즈 가문 문서에 남은 명부를 인용해 공성군을 42,491명으로 적는다. 구로다 나가마사·가토 기요마사·시마즈 요시히로·나베시마 나오시게 등의 제1대와 우키타 히데이에·이시다 미쓰나리 등의 제3대다. 모리 히데모토, 그리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다치바나 무네시게 등의 부대는 성 쌓는 일을, 고니시 유키나가·호소카와 다다오키·소 요시토시 등의 부대는 부산에서의 수송과 거점 수비를 맡았다. 일본어 위키백과가 제시한 이들 부대의 수를 모두 더하면 약 9만 1천 명이다. 이렇게 재구성하면 약 9만 1천 명이 작전에 배치되었고 그 가운데 4만 2,500명가량이 성을 에워싼 셈이다. 다만 모든 서술이 이와 같지는 않다. 턴불을 따른 영어 위키백과는 9만 명 전체가 진주에 이르렀다고 하고, 고니시가 2만 6천 명을 이끌고 성 서쪽에 진을 쳤다고 쓴다. 따라서 4만–4만 3천 명가량이라는 포위 병력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시마즈 명부가 함께 뒷받침하기는 하지만 추정치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훨씬 큰 숫자를 들었다. 『선조실록』은 가토 기요마사가 여러 장수의 군대를 합치면 30만이라 했다고 적는다. 고니시가 심유경에게 말한 것과 같은 숫자다. 7만–8만 명이라고 한 이도 있었다. 이런 주장은 그 자체로 수비군을 압박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수비군은 훨씬 적었다. 『선조수정실록』은 성에 들어간 부대(김천일 300명, 황진 700명, 최경회 500명, 고종후 400명, 장윤 300명과 그보다 작은 부대들)를 열거하고, 싸울 수 있는 군사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고 쓴다. 현대의 수치는 군사 4,000–6,000명(영어 위키백과가 인용한 턴불)에서 군인 6,000명과 의병 2,800명(한국어 위키백과), 약 7,000명(일본어 위키백과)까지 다양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피란민까지 합쳐 성안에는 6만–7만 명이 있었다. 한 생존자는 상황을 살피러 성에 와 있던 명군 20여 명이 적의 기세가 매우 성한 것을 보고 곧 성을 나갔다고 전했다.
중급
함락 그 뒤: 전라도 쪽 노략질과 해안으로의 철수
함락 뒤 일본군의 일부는 서쪽으로 움직였다. 음력 7월 4일(양력 7월 31일), 전라도 구례 경계의 석주(石柱)에 매복하고 있던 복병장 왕경조는 “흉적 2만여 기가 진주로부터 곧바로 악양창(岳陽倉)으로 와서 분탕한 다음 점점 우리 군사가 매복해 있는 곳으로 나오고 있다”고 보고했고, 소문만 듣고도 매복한 군사들이 모두 달아났다고 전했다. 전라 관찰사 이정암은 이 보고를 조정에 올리면서, 전라도가 와해되는 화는 시간 문제라며 정예병을 급히 보내 달라고 청했다. 같은 장계에서 그는 일본 배 7백–8백 척이 웅천에 모였다가 거제 쪽으로 옮겨 왔고, 삼도의 수군이 한산도와 견내량에서 죽기로 막기로 했다고 보고했다. 전라도는 땅과 바다 양쪽에서 위협받는 것처럼 보였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함락 뒤 일본군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한 갈래는 단성·산음(지금의 산청)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다른 한 갈래는 진주 서쪽으로 나아가 이들과 합세해 구례·광양·남원·순천 등지로 흩어져 마을을 노략질했다. 또 다른 갈래들은 사천·고성과 삼가·의령 일대의 집들을 불태운 뒤 함안·창원 등지에 주둔했고, 한 갈래는 사로잡은 남녀와 짐을 싣고 김해로 돌아갔다. 『선조수정실록』은 이곳들이 전년에는 적의 칼끝이 미치지 않았던 땅이었다고 적는다. 명의 참장 낙상지는 남원성을 고쳐 쌓고 포수 300명을 앞으로 보냈으며, 조선의 홍계남은 적의 선봉과 수십 리를 싸우며 구례·광양까지 내려가 적을 물러가게 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일본군은 음력 7월 5일 구례, 7일 곡성까지 나아갔으나 남원의 수비가 굳건한 것을 보고 9일 진주 쪽으로 물러났다. 일본군은 전라도 깊숙이 공세를 이어 가지 않았고, 주력은 남해안의 진지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는 이미 모리·고바야카와 등의 부대가 오래 머물 성(왜성)을 쌓기 시작한 상태였다. 일본군이 왜 거기서 멈추었는지, 곧 진주에서 입은 큰 손실 때문인지, 남원의 방비 때문인지, 강화 교섭의 논리 때문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시위 이상을 노리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아래에서 살펴본다.
중급
논개: 전승과 기록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논개의 이야기다. 전승에 따르면 함락 뒤 일본 장수들이 촉석루에서 승리를 축하하고 있을 때, 진주의 기생 논개가 일본 장수 한 명을 강가의 바위로 꾀어내 끌어안고 함께 남강에 몸을 던졌다. 그 바위는 지금 ‘의로운 바위’라는 뜻의 의암(義巖)이라 불린다.
이 가운데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논개를 진주목의 관기(官妓)로 설명하며, 그의 순국 사실은 처음에는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다가 1620년경부터 문헌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쓴다. 유몽인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한 것이 그것으로, 전투에서 한 세대쯤 지난 때였다. 진주 사람들이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義巖’ 두 글자를 새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같은 사전에 따르면,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엮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논개가 빠졌는데, 관기를 표창할 수 없다는 일부 편찬자의 주장 때문이었다.
나라의 공식 인정은 18세기에야 이루어졌다. 1721년 진주 사람들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조정에 논개의 포상을 건의했고, 「의암사적비」가 세워졌으며, 논개의 자손에게 부역을 면제하는 특전이 내려졌다. 1739년에는 의암 부근에 사당인 의기사(義妓祠)가 세워졌고, 1868년부터는 해마다 300여 명의 여기가 사흘 동안 제사를 올리는 ‘의암별제’가 열렸으나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었다.
오늘날 논개에 대해 전해지는 많은 내용은 뒷날 덧붙여진 것이다. 19세기 이후 논개가 전라도 장수 출신이고, 성은 주씨이며, 양반 가문 출신이고, 최경회 또는 황진의 애인이었다는 주장들이 나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문헌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논개의 출신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뒷날의 서술은 그 일본 장수를 게야무라 로쿠스케라고 부르지만,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그 신원을 확인할 수 없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목숨을 바쳐 적장을 죽인 진주 여인의 이야기가 전투 뒤 30년쯤 안에 글로 적혔고, 임진왜란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다.
중급
같은 때 세계에서는(1593년 7–8월)
진주성 전투는 강화 교섭이 일본에서 고비를 맞던 때에 벌어졌다. 조선에 있던 명의 지휘부가 보낸 사신들은 음력 5월 규슈의 나고야에서 히데요시를 만났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명의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비로 보낼 것, 감합 무역을 되살릴 것, 조선 8도 가운데 남쪽 4도를 일본에 넘길 것 등 일곱 가지 조건을 제시했고, 그 연표는 이 조건을 제시한 날을 6월 28일, 곧 진주성 함락 전날로 적는다. 이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가신 나이토 조안이 일본의 사신으로 베이징을 향해 떠났지만, 그가 명의 수도에 닿은 것은 일본 달력으로 1594년 12월이었다.
히데요시 자신의 삶도 그해 여름에 바뀌었다. 1593년 8월 28일 측실 요도도노가 아들 히데요리를 낳았다. 이 출생은 후계 문제를 낳았고, 1595년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후계자였던 히데쓰구가 자결을 강요당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멀리 프랑스에서는, 조선과 아무 관련 없이, 진주성이 함락되기 이틀 전인 1593년 7월 25일 국왕 앙리 4세가 개신교를 공식적으로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해 왕위를 굳혔다. “파리는 미사를 드릴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 그의 말로 전해지지만, 그가 정말 그렇게 말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중급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어떻게 기억되어 왔나
1593년의 희생자들은 전쟁이 끝난 뒤 곧 기려졌다. 관민이 함께 진주에 세운 사당은 1607년 ‘창렬사’로 사액되었고, 1871년 서원 철폐 때에도 대상에서 빠져 살아남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정사(正祠)에는 1592년의 수장 김시민을 필두로 김천일·황진·최경회·장윤·고종후·유복립 등 일곱 분을 모시고, 이종인·김상건·양산숙·김준민 등 스무 명 남짓을 동서로 나누어 배향한다. 김천일은 나주 등지의 사당에도, 최경회는 능주(지금의 화순)의 포충사에도 제향되었다.
촉석루 곁에는 다른 기념물들도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686년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촉석정충단비가 세워졌고, 1987년에는 촉석루 맞은편에 1592년의 승리와 1593년의 순국을 함께 기리는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만들어졌다. 의암과 의기사는 논개의 기억을 지키고 있다. 1970년대에 복원된 진주성은 오늘날 1592년의 승리와 1593년의 함락을 나란히 기억하는 사적이다.
이 싸움이 기억되어 온 방식은 뒷날의 가치관도 보여 준다. 스스로 강에 몸을 던진 장수들은 임금에 대한 충절의 본보기로 높여졌다. 반면 목숨을 잃은 수만 명의 평범한 사람들은 기록에 대개 하나의 추정치로만 남았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개인의 이야기는 한 세대 뒤에야 처음 글로 적히고 18세기에야 나라의 인정을 받은 한 여인의 이야기다.
심화
희생자 수와 그 밖의 숫자: 기록은 무엇을 세었나
희생자 수는 이 전쟁의 숫자들이 서로 다른 것을 잰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가장 이른 조선 측의 자세한 기록인 『선조실록』 1593년 음력 7월 16일(양력 8월 12일) 조는 “성 안에 죽은 자가 6만여 인이었다”고 쓰고, 주석에서 8만여 인이라 하는 이도, 3만여 인이라 하는 이도 있다고 덧붙인다. 수십 년 뒤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은 “대략 죽은 자가 6, 7만”이라 하는데, 이는 성안에 있었다는 성민과 피란민의 수와 같으며, 장사로서 벗어난 자는 두세 명에 불과했다고 쓴다. 이 숫자들은 강에 빠져 죽은 이들까지 포함해 군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죽은 모든 사람을 추정한 것이다.
같은 기사에는 실제로 세어 보려 한 흔적도 있다. 경상도 감사 김늑이 보낸 사근 찰방 이정은 성안에 시체 1천여 구가 쌓여 있고, 촉석루에서 남강 북쪽 기슭까지 시체가 겹겹이 쌓였으며, 강 아래쪽 멀리까지 시체가 떠내려갔다고 보고했다. 이런 증거는 학살의 규모를 보여 주지만 전체 수를 내놓을 수는 없었다.
일본 측 숫자는 성격이 다르다. 영어 위키백과는 턴불을 인용해, 일본 측 기록에 승리 뒤 2만 개의 목을 일본으로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고 쓴다. 이는 공을 증명하려고 거둔 전리품의 수이지, 죽은 사람 전체를 센 것이 아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후대 일본의 군기물 『음덕태평기(陰德太平記)』를 인용해 3만 명이라는 숫자를 든다. 이 숫자들은 서로 맞추어 볼 수 없지만, 모두 엄청난 규모의 살육을 가리킨다. 일본군의 손실도 마찬가지로 불확실하다. 영어 위키백과가 스워프를 인용해 제시한 1만 3천 명 이상의 사상자와, 일본어 위키백과가 인용한 훨씬 큰 현대의 추정치는 서로 다른 방법에 기대고 있다.
다른 세부 내용도 자료마다 다르다. 『선조실록』은 황진이 28일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하면서도, 탄환을 맞았으나 죽지 않았고 성이 함락될 때 피살되었다는 말도 있다고 적는다. 턴불을 따른 영어 위키백과는 그가 가슴에 두 발을 맞고도 끝까지 싸웠다고 쓴다. 영어권 서술은 일본군의 공성탑과 포로로 잡은 농민들을 베겠다는 위협도 전하지만, 조선 측 기록에는 이런 형태로 나오지 않는다. 누가 참전했는지도 엇갈린다. 심유경을 수행한 통사는 우키타 히데이에와 고니시가 이 원정에 가지 않았다고 했지만, 일본 측 자료는 우키타를 총대장으로 적는다. 날짜도 변환이 필요하다. 영어 위키백과는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날부터 세어 7월 20일–27일로 적지만, 이 글은 조선의 음력 날짜(6월 21일–29일)를 한국천문연구원의 음양력 변환표로 바꾼 7월 19일–27일을 따른다.
끝으로 조선 측 기록도 중립적이지 않다. 보고는 조정에 올리기 위해 관리와 군인들이 쓴 것이고, 17세기 중엽에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은 김천일을 길게 칭송하는 한편 목사 서예원을 혹독하게 비난하면서, 서예원의 형이 동생의 억울함을 풀려 했다고 적는다. 이 사료의 인물 평가는 다른 칭찬과 비난과 마찬가지로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심화
논쟁: 헛된 희생이었나, 함정이었나, 의미 있는 항전이었나
진주성을 지켜야 했을까? 당시 사람들의 생각도 엇갈렸다. 곽재우·선거이·홍계남은 성을 지킬 수 없다고 보고 들어가지 않았고, 심유경은 성을 비우라고 권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전쟁 뒤 유성룡은 김천일을 의기만 높고 재주가 없었다고 비판했고, 안방준은 이런 유성룡을 반박했다. 김천일과 안방준은 서인, 유성룡은 남인의 영수였으므로 이 논쟁에는 당파적 색채가 있었다. 『선조수정실록』은 세상이 성을 나가 피하자는 의논을 막은 일을 들어 김천일을 허물한다고 적으면서도 그를 변호한다. 김천일 등이 아니었다면 겁 많은 서예원은 하루이틀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성안의 6만–7만 명은 어차피 모두 죽고 많은 식량과 무기가 고스란히 적의 손에 넘어갔으리라는 것이다.
성을 비우라는 권고는 진심이었을까?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자들은 함정을 의심했다. 고니시가 가토와 사이가 나쁜 척하면서, 조선이 결코 진주성을 버리지 않을 것을 알고 일부러 비우라고 권해 조정이 충신과 용장을 더 보내 한꺼번에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학자 강항이 들은 말을 포함해 “조선의 장사들이 진주성에서 다 죽었으니 이후로는 우리를 괴롭힐 자가 없을 것”이라는 일본인들의 말을 근거로 든다. 이는 뒷날 조선 측의 해석이지, 일본의 의도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실록이 아니라 이 글의 해석으로는, 강화 교섭을 이끌던 고니시가 피비린내 나는 공성전이 교섭을 해칠까 걱정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 더 단순한 설명도 가능하다.
군사적으로 의미가 있었을까? 한국어 위키백과는 이 싸움으로 김천일을 비롯한 전라도 의병의 지도부가 한꺼번에 사라졌다고 쓴다. 반면 일본군은 전라도를 차지하지 못했다. 구례와 남원 쪽으로 노략질을 한 뒤 해안으로 돌아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 이유를 일본군의 막대한 손실에서 찾고, 영어 위키백과가 인용한 턴불은 진주가 상징적인 이유로만 점령되었으며 그런 목적으로 그 많은 병력을 잃은 것은 낭비였다고 평가한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이 공격을 강화 전에 조선 남부를 확보하려는 시도의 일부로 설명한다. 어느 해석도 이 싸움을 한양을 향한 새로운 진격의 시작으로 보지는 않는다.
이 싸움은 동맹 안의 긴장도 드러냈다. 진주를 구하러 온 명군은 없었고, 선조는 심유경의 외교를 함락의 원인으로 꼽았다. 조선에게 진주는 자신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강화 과정에 희생된 상징이 되었다. 반면 스스로도 보급난을 겪던 명의 지휘부에게, 싸움을 피하는 것은 값비싼 전쟁을 끝내 주리라 기대한 교섭을 지키는 일이었다. 이 대비는 사료가 보여 주는 양쪽의 입장을 이 글이 정리한 것이지, 누가 옳았는지에 대한 판정이 아니다.
핵심 개념
- 강화 교섭 중의 전쟁
- 이 공격은 명과 일본의 사신이 교섭하던 중에 명령되었다. 교섭에서 배제된 조선은, 일부는 교섭의 지렛대를 얻으려고 벌어진 싸움의 대가를 치렀다.
- 1592년에 대한 보복
- 조선 측 기록은 히데요시가 1592년 진주에서의 패배를 갚으려 했다고 전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강화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목적도 함께 든다.
- 동원 병력과 포위 병력
- 이 작전에는 일본군 약 9만–10만 명이 동원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일본어 위키백과가 인용한 시마즈 명부에 따르면 그 가운데 실제로 성을 에워싼 것은 4만–4만 3천 명가량이고 나머지는 성을 쌓거나 보급로를 지켰지만, 대군 전체가 진주에 왔다고 보는 서술도 있다.
- 전라도로 가는 길목
- 수비군은 진주를 전라도로 가는 길목으로 보았고, 진주만 차지하고 물러가겠다는 일본군의 말을 믿지 않아 성에 남았다.
- 서로 다른 종류의 희생자 수
- 죽은 사람 전체를 추정한 조선 측 수치(6만여 명 이상), 거둔 목의 수를 센 일본 측 수치(2만), 후대 군기물의 수치(3만)는 서로 다른 것을 재므로 그대로 비교할 수 없다.
- 전승과 기록
- 논개 이야기는 전투 뒤 한 세대쯤 지나 처음 글로 적혔고 18세기에야 나라의 인정을 받았다. 논개의 출신에 관한 많은 내용은 뒷날 덧붙여진 것이다.
- 함락했지만 돌파하지 못함
- 진주를 차지했어도 전라도는 열리지 않았다. 일본군은 구례·남원 방면으로 노략질을 한 뒤 남해안의 진지로 돌아갔다.
기록
- 1592년 — 음력 10월 5일–10일(양력 11월 8일–13일) 제1차 진주성 전투. 일본군이 물러간다. 수장 김시민은 싸움 중 탄환을 맞고 뒤에 그 상처로 숨진다.
- 1593년 — 2월 조명 연합군이 평양을 되찾는다. 음력 4월 18일(양력 5월 18일) 일본군이 한양에서 물러나 강화 교섭이 이어지는 동안 남해안으로 내려간다.
- 1593년 — 음력 5월 명의 사신이 나고야에서 히데요시를 만난다. 조선 측 기록은 그가 진주의 패배를 갚으려 한다고 전한다.
- 1593년 — 음력 6월 14일(양력 7월 12일) 김천일이 의병 300명을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간다. 황진·최경회 등이 합류하고, 곽재우 등은 성 밖에 남는다.
- 1593년 — 음력 6월 21일–22일(양력 7월 19일–20일) 일본군이 진주성을 에워싸고 본격적인 공방이 시작된다.
- 1593년 — 음력 6월 28일(양력 7월 26일) 황진이 탄환에 맞아 전사한다.
- 1593년 — 음력 6월 29일(양력 7월 27일) 비에 젖은 동쪽 성벽이 무너져 성이 함락된다. 김천일·최경회가 남강에 몸을 던지고, 성안에서 학살이 벌어진다.
- 1593년 — 음력 7월 4일(양력 7월 31일)에 왕경조가 보낸 보고에 따르면, 진주에서 나온 일본군이 이미 악양창을 불태우고 전라도 구례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후 해안으로 돌아간다.
- 1593년 — 음력 7월 16일(양력 8월 12일) 진주성 함락 소식이 선조의 조정에 닿는다.
- 1607년 — 진주성 순절자를 모신 사당이 ‘창렬사’로 사액된다.
- 약 1620년 — 유몽인이 『어우야담』에 논개 이야기를 적고, 바위에 ‘의암’ 두 글자가 새겨진다.
- 1721년 — 진주 사람들의 요청으로 조정에 논개의 포상이 건의되고, 의암사적비가 세워지며 자손에게 특전이 내려진다.
- 1739년 — 진주에 논개를 모신 의기사가 세워진다.
용어 풀이
- 창의사(倡義使)
- 1592년 조정이 의병을 이끄는 김천일에게 내린 직함.
- 병사(兵使)
- 각 도의 병마절도사.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처럼 한 도의 육군을 지휘했다.
- 의병(義兵)
- 지방의 선비, 전직 관리, 승려, 평민이 관군과 별도로 일으켜 침략군과 싸운 자원 부대.
- 경상우도
- 한양에서 바라보아 경상도의 서쪽 절반. 진주가 그 중심 고을이었다.
- 전라도(호남)
- 한반도 남서부의 도. 쌀이 많이 났고 1592–1593년 대부분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 귀갑차(龜甲車)
- 가죽 따위로 덮은 공성용 수레. 1593년 일본군이 진주성 성벽에 다가가 성벽을 허무는 데 썼다.
- 왜성(倭城)
- 1593년부터 일본군이 남해안에 쌓은 일본식 성. 일본군은 강화 교섭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 관기(官妓)
- 관청에 딸린 기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논개를 진주목의 관기로 설명한다.
- 의암(義巖)
- ‘의로운 바위’. 논개가 뛰어내렸다고 전하는 촉석루 아래 남강의 바위.
- 선조실록
-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선조 시대의 공식 기록. 이를 고친 『선조수정실록』이 1657년에 완성되었다.
- 태음태양력
- 달의 움직임으로 달을 정한 조선·일본의 역법. 날짜를 양력(그레고리력)으로 바꾸어야 한다.
묻고 답하기
일본군은 왜 1593년에 진주성을 다시 공격했나요?
조선 측 기록은 히데요시가 1592년 진주에서 당한 패배를 갚으려 했다고 전해요. 이 공격은 강화 교섭 도중에 일어났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일본군이 교섭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 했다고도 써요.
일본군은 몇 명이 공격했나요?
작전에 동원된 병력은 약 9만–10만 명이었어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일본 측 공성군 명부에 따르면 그 가운데 실제로 성을 에워싼 것은 4만–4만 3천 명가량이고 나머지는 성을 쌓거나 보급로를 지켰지만, 대군 전체가 진주에 왔다고 보는 서술도 있어요. 당시 일본군은 30만이라고 큰소리쳤어요.
다른 장수들이 떠났는데 왜 수비군은 남았나요?
김천일·황진·최경회 등은 진주를 전라도로 가는 길목으로 보았고, 진주만 차지하고 물러가겠다는 일본군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곽재우 등은 성을 지킬 수 없다고 보고 성 밖에 남았어요.
몇 명이 죽었나요?
정확히는 아무도 몰라요. 조선 측 기록은 군사와 백성을 합쳐 6만여 명 이상, 일본 측 기록은 일본으로 보낸 목 2만 개, 후대 일본의 군기물은 3만 명을 들어요. 서로 다른 것을 센 숫자지만, 모두 엄청난 학살을 보여 줘요.
논개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전투 뒤 한 세대쯤 지난 1620년경 처음 글로 적혔고, 진주 사람들이 바위에 ‘의암’을 새긴 것도 그 무렵이에요. 오늘날 전해지는 출생지나 집안 같은 많은 내용은 뒷날 덧붙여진 것이라 문헌으로 뒷받침되지 않아요.
진주를 차지한 일본군이 전라도를 정복했나요?
아니에요. 일본군은 구례와 남원 근처까지 노략질을 했지만 더 나아가지 않았고, 주력은 남해안의 진지로 돌아갔어요.
제1차 진주성 전투와는 무엇이 다른가요?
1592년에는 김시민이 이끈 수천 명의 수비군이 성 밖 부대의 도움을 받아 일본군을 물리쳤어요. 1593년에는 훨씬 큰 일본군이 다시 왔고, 구원군은 오지 않았으며, 성은 함락되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6월 1일 1번째 기사: 청정이 우리 두 왕자와 재신 황정욱·황혁 등을 돌려보내다(수길이 진주를 공파하려 한다는 보고).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6월 1일 3번째 기사: 왜장이 진주를 공격하니, 원수가 관군과 의병에게 방비하게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6월 1일 5번째 기사: 왜적이 진주를 함락시키자 김천일·최경회 등이 전사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6월 1일 7번째 기사: 순성장 황진의 졸기.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6월 1일 17번째 기사: 적병이 진주성으로부터 군병을 나누어 곤양·하동·산음 등지를 노략질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1593) 7월 10일 8번째 기사: 경상우병사 최경회의 장계(심유경의 경고를 전함).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1593) 7월 15일 13번째 기사: 진주 구원을 거듭 청하라고 전교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1593) 7월 16일 4번째 기사: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의 장계(진주성 생존자의 증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1593) 7월 16일 5번째 기사: 함락된 진주성 싸움의 자세한 경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1593) 7월 18일 5번째 기사: 진주성 함락이 심유경 때문이라며 명에 올릴 글을 의논하게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1593) 7월 20일 9번째 기사: 전라 관찰사 이정암이 해안 지역 상황을 아뢰며 구원군의 파견을 청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김석희, 진주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진주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장희, 임진왜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천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최경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논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창렬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Siege of Jinju (1593). 영어 위키백과
- 제2차 진주성 전투. 한국어 위키백과
- 晋州城攻防戦(진주성 공방전). 일본어 위키백과
- 文禄・慶長の役(분로쿠·게이초의 역). 일본어 위키백과
- Nongae(논개). 영어 위키백과
-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포함). 한국어 위키백과
- Toyotomi Hideyori(도요토미 히데요리). 영어 위키백과
- Henry IV of France(앙리 4세). 영어 위키백과
- 음양력 변환 계산. 한국천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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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