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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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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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400여 년 전인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은 조선에서 긴 전쟁을 벌였어요. 중국의 명나라도 조선을 도우려고 군대와 배를 보냈어요. 1598년 일본의 지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 지도자들은 군사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내기로 했어요.
그런데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는 남해안 순천의 성에 갇혀 있었어요. 조선의 이순신과 명나라의 진린이 이끄는 전선들이 성 앞바다를 막고 있어서 그의 군대는 배를 타고 떠날 수 없었어요.
그러자 시마즈 요시히로를 비롯한 다른 일본 장수들이 수백 척의 배를 모아 그를 구하러 서쪽으로 왔어요. 그 길은 남해도와 육지 사이의 좁은 바닷길인 노량을 지나야 했어요. 이순신과 진린은 밤새 노를 저어 그곳으로 가서 기다렸어요.
전투는 어두운 밤에 시작되어 해가 뜬 뒤까지 이어졌어요. 대포가 울리고 불화살이 날았으며 배끼리 부딪쳤어요. 많은 일본 배가 불타거나 붙잡혔고, 나머지는 물러갔어요. 달아나는 적을 쫓던 이순신은 총탄에 맞았어요. 옛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했어요.
이순신은 세상을 떠났고, 나이 많은 명나라 장수 등자룡도 전사했어요. 모두가 싸우느라 바쁜 사이 고니시의 군대는 다른 길로 빠져나갔어요. 며칠 뒤 마지막 일본군이 부산을 떠나 돌아가면서 긴 전쟁이 끝났어요. 한국 사람들은 지금도 이순신을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해요.
한눈에 보기
- 날짜
- 1598년(선조 31) 음력 11월 18일 밤~19일(조선 역법) = 양력 1598년 12월 15~16일(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표 기준). 전투는 12월 16일 동트기 전에 시작되어 오전까지 이어졌다. 일본 측 기록은 일본 역법의 11월 18일로 적는데, 이는 조선 역법의 11월 19일과 같은 양력 날짜이다
- 장소
- 남해도와 육지 사이의 노량 해협(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하동군). 마지막 전투는 남해도 관음포 근처에서 벌어졌다
- 전쟁
- 임진왜란의 두 번째 침략(정유재란, 1597~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본군이 철수하던 시기
- 지휘관
-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전사) / 명: 진린, 등자룡(전사) 등 / 일본: 시마즈 요시히로, 다치바나 무네시게·소 요시토시·데라자와 마사나리 등
- 병력
- 조선: 영어 위키백과(새뮤얼 홀리를 따름)에 따르면 판옥선 82척, 약 8,000명 / 명: 같은 자료에 따르면 이순신이 빌려준 판옥선 2척 외에 63척, 광둥 수군 5,000명과 조선 배에 탄 명 수병 2,600명. 연합 함대 전체는 약 150척(영어 위키백과) 또는 200여 척(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으로 적는다 / 일본: 이덕형의 장계에 따르면 300여 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약 500척
- 피해
- 일본: 이덕형의 장계에 따르면 배 200여 척이 부서지고 사상자가 수천 명. 진린의 차관은 200척을 불태우고 100척을 나포했으며 500급을 베고 180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보고했다. 일본 측 기록의 주장도 엇갈려 믿을 만한 전체 수치를 확정하기 어렵다 / 조선: 이순신을 포함한 장수 10여 명이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고 보고됨 / 명: 등자룡 등 전사
- 결과
- 바다에서는 조명 연합군의 승리. 일본 구원 함대는 큰 피해를 입고 동쪽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전투 중에 다른 길로 순천을 빠져나갔고, 일본군은 1598년 12월 하순 부산에서 철수를 마쳤다
- 주요 사료
- 『선조실록』(11월 21~29일의 보고들. 이덕형의 장계와 사관의 논평 포함), 『선조수정실록』, 유성룡의 『징비록』, 『명사』, 현대 저작이 요약한 일본 가문 기록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쉬움
노량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노량 해전은 1592년에 시작되어 1597년에 다시 이어진 일본의 조선 침략, 곧 임진왜란의 마지막 큰 전투이다. 1598년 음력 11월 18일 밤부터 19일까지 바다에서 벌어졌다. 한국천문연구원(KASI)의 음양력 변환표로 바꾸면 전투는 1598년 12월 16일 동트기 전에 시작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해전을 11월 18일부터 19일 사이의 일로 적는다.
배경은 일본군의 철수였다. 침략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9월에 죽자 일본 지도부는 군대를 불러들이기로 했다. 가장 서쪽에 있던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조명 연합 함대가 성 앞바다를 봉쇄하고 있어서 떠날 수 없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를 비롯한 다른 일본 장수들은 동쪽 해안에서 함대를 모아 고니시를 구하러 서쪽으로 나섰다. 그 길목이 남해도와 육지 사이의 좁은 바닷길, 노량 해협이었다.
조선의 이순신과 명의 진린은 밤새 동쪽으로 나아가 이들을 맞았다. 전투는 어둠 속에서 시작되어 동이 튼 뒤까지 이어졌다. 연합군은 화포와 불화살을 썼고, 적의 갑판에 불붙은 것을 던져 넣었으며, 곳곳에서 배와 배가 맞붙어 싸웠다. 아침이 되자 일본 함대는 많은 배를 잃고 동쪽으로 물러가고 있었다. 이순신은 추격하던 중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유성룡의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그는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싸움이 아직 한창이니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했다. 명의 장수 등자룡도 이 해전에서 전사했다.
승리는 완전하지 않았다. 함대들이 노량에서 싸우는 사이 고니시의 군대는 다른 길로 순천을 빠져나갔고, 1598년 12월 하순 마지막 일본군이 부산을 떠나 돌아갔다. 따라서 노량 해전은 전쟁의 마지막 큰 전투였지만,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낸 사건은 아니었다. 강화 조약은 없었고,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1607~1609년에야 회복되었다. 이 글의 뒷부분에서는 이 해전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사료가 무엇을 말하고 어디서 엇갈리는지를 살펴본다.
쉬움
다시 세운 수군: 고금도와 진린과의 연합
노량 해전 한 해 전, 조선 수군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1597년 8월 원균이 이끈 함대가 칠천량에서 궤멸했고, 그해 초 파직되어 옥에 갇혔던 이순신은 겨우 몇 척의 배와 함께 다시 기용되었다. 1597년 10월 그는 좁은 명량 해협에서 훨씬 큰 일본 함대를 물리쳤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그 뒤 그는 보화도(목포의 고하도)를 근거지로 삼았다가 1598년 음력 2월(양력 3월) 지금의 완도군에 있는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겼다.
고금도는 수군을 다시 일으킨 기지가 되었다. 『징비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이곳에 8,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렸고, 이들을 먹이려고 해로통행첩을 발행했다. 바닷가를 오가는 피란민의 배는 쌀을 내고 통행첩을 받아야 했는데, 큰 배는 3석, 중간 배는 2석, 작은 배는 1석이었다. 열흘 만에 군량 1만여 석을 모았다. 또 백성을 모아 구리와 쇠를 가져오게 해 대포를 만들고 나무를 베어 배를 지었으며, 피란민들이 기지 주변에 모여 살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고금도에서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을 판매했다고 덧붙이며, 『선조실록』의 사관 논평도 다시 기용된 뒤의 그에게 같은 조치를 돌린다.
1598년에는 명나라 함대가 합류했다. 지휘관 진린은 광둥 출신으로, 중국 남부에서 반란군과 해적을 토벌하며 경력을 쌓은 인물이었다. 『명사』는 그를 유능한 장수이면서도 가는 곳마다 탐욕스러워 여러 차례 탄핵당한 인물로 묘사한다. 그는 광둥 병사 5,000명을 이끌고 조선에 파견되었고, 1598년 명 수군의 지휘를 맡았다. 그해 그의 함대는 남쪽으로 내려와 고금도에서 이순신과 합류했다.
『징비록』은 두 사람의 연합을 두 장면으로 전한다. 선조가 한양에서 진린을 전송할 때, 유성룡은 진린의 군사들이 지방 관리를 때리는 것을 보고 진린이 이순신의 지휘를 방해할까 걱정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큰 잔치를 열어 진린을 맞았고, 조선 수군이 작은 싸움에서 벤 적의 머리 40급을 모두 진린의 공으로 돌렸다. 『징비록』에 따르면 진린은 이후 모든 일을 이순신과 의논했고, 임금에게 글을 올려 이순신에게 “천지를 경영할 재주와 하늘을 깁고 해를 씻긴 공(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 있다고 했다. 모든 기록이 이렇게 화목하지는 않다. 한국어 위키백과의 「진린」 문서는 노량 해전 직전까지 두 사람이 전공과 작전 문제로 불화했다고 적는다. 어느 쪽이든 1598년 말 두 함대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는 점은 같다.
쉬움
히데요시의 죽음과 사로병진
1598년 일본군은 동쪽 울산부터 서쪽 순천까지 조선 남해안에 늘어선 왜성들을 지키고 있었다. 울산에는 가토 기요마사, 가운데 사천에는 시마즈 요시히로, 순천에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있었다. 왜성은 바닷가에 지어 일본에서 배로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1598년 1~2월 연합군의 첫 번째 울산성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8년 9월 18일(게이초 3년 8월 18일) 후시미성에서 죽었다. 후계자 히데요리는 다섯 살이었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정권을 맡은 오대로는 사기를 지키려고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조선의 군대에 귀국을 명령했다. 히데요시의 죽음은 조선 조정에 늦게, 그리고 엇갈린 형태로 전해졌다. 음력 11월(양력 12월)에 기록된 보고에서 조선의 한 지휘관은 히데요시가 7월에 죽었다는 돌아온 포로들의 말을 전했는데, 이는 틀린 것이었다. 포로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국사를 맡고 있다고도 말했다.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을 버리면서 남긴 방문은 히데요시가 8월에 죽었다고 바르게 적었다.
그사이 조명 연합군은 정유재란 중 가장 큰 공세를 펼쳤다. 『징비록』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사로병진(四路竝進)’ 작전으로 설명한다. 명의 총사령관 형개는 동쪽의 마귀에게 울산을, 가운데의 동일원에게 사천을, 서쪽의 유정에게 순천을 맡기고 진린에게 바다를 맡겼다. 조선군도 각 부대와 함께 싸웠다. 『징비록』은 결과를 짧게 정리한다. 모든 공격이 실패했고, 동일원의 군대가 가장 크게 패해 죽은 자가 특히 많았다. 사천에서는 10월, 명군 진영에 불이 나고 시마즈의 수비군이 성 밖으로 나와 역습하면서 공격이 무너졌다.
순천에서는 10월 19일 무렵부터 유정의 군대가 육지에서, 이순신과 진린이 바다에서 공격했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일본과 조선의 기록을 요약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유정은 먼저 강화 회담을 핑계로 고니시를 끌어내 사로잡으려 했지만 복병이 너무 일찍 움직여 실패했다. 수륙 총공격도 명군의 큰 피해 속에 실패했다. 명 수군의 야간 공격은 썰물에 많은 명나라 배가 얕은 곳에 걸려 불타는 것으로 끝났다. 11월에 유정은 군대를 물렸고, 연합 함대도 한동안 고금도로 물러났다가 다시 순천 앞바다를 봉쇄했다.
쉬움
갇힌 고니시: 거래, 선물, 그리고 배 한 척
조선 기록이 왜교(倭橋)라고 부르는 순천의 고니시 성에는,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고니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고토 하루마사, 오무라 요시아키 다섯 가문의 군사 약 13,700명이 있었다. 철수 명령이 퍼지자 다른 왜성의 군대는 떠나기 시작했다. 명장 동일원의 접반사 이충원은 동일원이 맡은 지역의 동양창 왜적이 11월 17일부터 철수하기 시작해 다음 날 70여 척이 바다를 건넜다고 보고했고,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을 버렸다. 그러나 연합 함대가 성 앞바다를 막고 있는 한 고니시는 배를 타고 나갈 수 없었다.
고니시는 교섭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조선 관리들은 유정이 그와 사사로이 거래했다고 비난했다. 승정원은 임금에게 유정이 인질을 보내고 일부러 적을 놓아 보냈으며, 바닷길을 끊으려던 진린을 가로막았다고 아뢰었다. 가토는 울산을 떠나면서 명나라 장수들에게 보내는 방문을 붙였고, 경상도 관찰사가 이를 베껴 조정에 올렸다. 가토는 이 글에서 고니시가 명나라 장수들과 세 나라가 화친하자는 약속을 맺었고 고니시에게 인질을 보내기로 했는데, 명군이 약속을 어기고 고니시를 포위했다고 주장했다.
바다에서 고니시는 진린에게 기대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며 퇴로를 열어 달라고 했고, 진린은 일본 통신선 한 척을 빠져나가게 한 뒤 이순신에게 알렸다. 백과사전은 고니시가 이 배로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와 연락해, 구원 함대가 연합 함대를 뒤에서 치게 하려 했다고 설명한다. 『선조실록』의 사관 논평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한다. 어느 날 저녁 왜적 네 명이 배를 타고 나가자, 이순신은 진린에게 이들이 구원병을 청하러 간 것이니 곧 많은 군사가 올 것이라고 했다. 진린은 처음에는 나가 맞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이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허락했다.
구원군의 규모는 컸다. 좌의정 이덕형은 남쪽에서 올린 장계에서 사천·남해·고성의 왜선 300여 척이 11월 19일 노량에 이르렀다고 보고했다.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은 고니시가 사천의 왜장 ‘심안돈오(沈安頓吾)’, 곧 시마즈에게 구원을 청했다고 적는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고니시를 구하러 나선 장수로 시마즈 요시히로, 다치바나 무네시게, 소 요시토시, 다카하시 무네마스,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지쿠시 히로카도, 데라자와 마사나리를 든다.
쉬움
해협의 밤 전투: 1598년 12월 15~16일
노량 해협은 하동 근처에서 남해도와 육지를 가르는 좁은 바닷길이다. 사천이나 고성에서 순천 쪽으로 서진하는 함대는 이곳을 지나거나 남해도 남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선조실록』의 사관 논평에 따르면 연합 함대는 밤새 노를 저어 날이 밝기 전에 노량에 이르렀고, 과연 많은 왜적이 오고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후대 기록에 전하는 이순신의 그날 밤 기도를 인용한다.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此讎若除死則無憾).”
전투는 한밤중에 시작되었다. 영어 위키백과는 새벽 2시 무렵으로 적는다. 연합군은 화포와 불화살을 썼고, 배들이 아주 가까워져 조선 수군이 일본 배의 갑판에 불붙은 나무를 던져 넣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일본군은 조총을 쏘아 대며 배에 올라타려 했다. 좁은 바다에서 함대들이 뒤엉켰고, 한때 진린의 기함이 포위되었다.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순신의 배가 진린을 구해 내는데, 이때 그 배를 이끈 사람은 이미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었다.
『명사』는 일흔이 넘었다는 명의 노장 등자룡의 죽음을 전한다. 진린은 그를 이순신과 함께 선봉으로 보내 큰 배 세 척에 군사 1,000명을 거느리게 했다. 첫 공을 세우려 한 등자룡은 장사 200명과 함께 조선 배에 뛰어올라 적에게 돌진했다. 그런데 다른 아군 배가 실수로 그의 배에 화기를 던져 불이 붙었고, 일본군이 그 틈을 타 덮쳐 그를 죽였다.
일본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일본 가문 기록을 요약해, 시마즈 요시히로의 배가 뒤처져 적이 올라타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가신들의 조총 사격과 구원하러 온 배들 덕분에 겨우 빠져나왔고, 가바야마 히사타카가 이끈 부대는 본대와 떨어져 관음포에서 배가 얕은 곳에 걸리는 바람에 걸어서 남해도를 가로질러야 했다고 전한다. 아침이 되자 일본 함대는 남해도 남쪽을 따라 동쪽으로 물러갔다. 이덕형은 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판자, 무기와 옷이 바다를 뒤덮어 물이 흐르지 못했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다고 보고했다.
중급
이순신과 등자룡의 죽음
이순신은 아침, 추격전 도중에 전사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그는 남해 경계까지 적을 쫓아가 몸소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싸우다가 날아온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 좌우가 그를 부축해 장막 안(帳中)으로 들이자 그는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라고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징비록』도 같은 말을 전하며, 탄환이 가슴을 뚫고 등 뒤로 나갔다고 덧붙인다. 그의 나이 만 53세(우리 나이 54세)였다.
두 기록에 따르면 조카 이완이 죽음을 숨기고 이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급히 싸움을 독려해, 군중은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진린의 배가 포위되자 이완이 군사를 지휘해 구했다. 진린은 이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고마움을 전하다가 비로소 그의 죽음을 알았다. 『징비록』에 따르면 그는 의자에서 바닥으로 몸을 던지며 “나는 노야(老爺)가 살아서 나를 구하러 오는 줄 알았는데 어찌 돌아가셨단 말인가.”라고 외치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조선군과 명군이 진영마다 통곡했다.
『선조실록』에서 이덕형의 장계에 붙은 사관의 논평은 이 장면을 다르게 전한다. 여기에는 유언이 없다. 이순신이 몸소 적에게 활을 쏘다가 탄환에 가슴을 맞아 쓰러지자 아들이 울려 하고 군사들이 당황했는데, 곁에 있던 이문욱(李文彧)이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린 다음 북을 치며 진격했다는 것이다. 군사들은 이순신이 살아 있다고 여겨 힘껏 싸웠고, 사람들은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라고 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이문욱을 일본 측에서 활동했던 피로인 출신의 손문욱(孫文彧)과 같은 인물로 본다. 대중적인 현대 판본 가운데에는 북을 치라거나 갑옷을 입으라는 말을 덧붙인 것도 있지만, 이 글이 참고한 실록과 『징비록』에는 그런 말이 없다.
전사한 조선 장수는 이순신만이 아니었다. 이덕형은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 군수 방덕룡, 흥양 현감 고득장 등 10여 명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보고했다. 명나라 쪽에서는 『명사』가 이야기를 압축해, 등자룡이 싸우다 죽자 이순신이 그를 구하러 갔다가 역시 죽었다고 적는다.
중급
고니시의 탈출과 부산을 떠난 마지막 배
해전은 고니시를 막지 못했다. 이덕형은 고니시가 왜선이 크게 패하는 것을 보고 먼 바다로 달아났으며, 진영에 머물던 왜적은 진영을 버리고 남해 강언덕에 쌓아 두었던 식량도 버린 채 달아났다고 보고했다. 『징비록』은 연합 수군이 적을 쫓아 그의 진영 앞을 지나가는 사이 고니시가 뒤로 빠져나갔다고 적는다. 영어 위키백과는 그가 남해도 남쪽 끝을 돌아 노량 해협과 전장을 피해 갔다고 설명한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고니시 등이 그 뒤 남해도에 고립된 시마즈 군사 약 500명을 구출하는 데 힘을 보탰다고 덧붙인다.
일본 장수들은 부산에 모였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고니시, 시마즈, 가토 등은 12월 21일 일본으로 떠났고, 마지막 배는 12월 24일에 출항했다. 소식은 더 느리게 전해졌다. 11월 28일 조선의 한 지휘관은 부산에 남은 왜적이 50~60명뿐이라고 보고했고, 11월 29일(양력 12월 26일) 비변사는 부산의 왜적도 이미 철수했다고 아뢰며 종묘에 고하고 하례하자고 청했다.
조정의 반응은 엇갈렸다. 원로 대신들은 세 길의 왜적이 한꺼번에 달아난 것을 하례하러 왔는데, 7년 동안 적진 하나 섬멸하지 못하고 적의 우두머리들이 버젓이 바다를 건너가게 했다는 점은 스스로 인정했다. 선조는 명의 군문 형개를 찾아가 승리를 사례했다. 사관은 더 나아가, 왜적이 물러가는데 적장 하나 죽이지 못했으면서 대궐에 나아가 하례한 신하들을 꾸짖었다. 명의 총사령관 형개는 유정·동일원·진린을 부산으로 보내고, 조선 조정에 이순신의 후임을 곧바로 정하라고 했다.
노량 해전은 전쟁의 마지막 큰 전투였지만, 전쟁이 조약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명군은 한동안 조선에 머물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일본은 쓰시마 영주를 통해 화친을 추진했다. 조선은 1607년 일본에 공식 사절단을 보냈고, 1609년 기유약조로 쓰시마를 통한 교역 조건을 정했다.
중급
같은 해 세계에서는(1598)
유럽에서 1598년은 정리와 계승의 해였다. 프랑스의 앙리 4세는 1598년 4월 낭트 칙령을 내려 개신교도 위그노에게 권리를 보장했고, 5월 2일 베르뱅 조약으로 스페인과의 전쟁을 끝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1598년 9월 13일 엘에스코리알에서 죽었다. 히데요시보다 닷새 앞선 일이다.
러시아에서는 1598년 1월 17일(당시 러시아가 쓰던 율리우스력으로 1월 7일) 차르 표도르 1세가 후사 없이 죽었고, 그해 섭정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가 되었다. 아일랜드에서는 9년 전쟁 중이던 1598년 8월 14일(잉글랜드가 쓰던 율리우스력, 그레고리력으로는 8월 24일), 휴 오닐이 이끈 아일랜드군이 옐로 포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이 사건들은 노량의 전투와 아무 관계가 없다. 나란히 놓아 보면, 임진왜란이 끝난 해가 다른 곳에서도 무언가가 끝난 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프랑스의 종교 전쟁이 막을 내렸고, 스페인과 러시아에서는 새 군주가 즉위했다.
중급
노량 해전을 기억하는 방식
애도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선조수정실록』과 『징비록』에 따르면 이순신의 운구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제사를 지내고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나아가지 못했다. 조정은 그에게 우의정을 추증했고, 바닷가 사람들은 스스로 사당을 지었다(『선조수정실록』은 충민사, 『징비록』은 민충이라 적는다). 그는 아산에 묻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179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를 가장 잘 알려 주는 시호 ‘충무(忠武)’는 1643년에 내려졌다.
남해도에는 이 해전을 기리는 두 곳이 있다. 해협 가까운 설천면의 충렬사는 이순신의 시신이 아산으로 옮겨지기 전 한때 모셔졌던 곳으로 전한다. 1632년 유림이 작은 사당을 지었고, 1663년 임금이 내린 현판을 받았다. 그가 쓰러진 곳으로 전하는 관음포에는 1832년 왕명으로 제단과 비석이 세워졌고, 비문은 홍석주가 지었다. 이곳의 사당은 ‘이(李)가 떨어진 곳’이라는 뜻의 이락사(李落祠)이다. 두 곳은 197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400주기인 1998년 12월 16일 관음포에서 그의 유언을 새긴 비석이 제막되었다.
연합군 장수들도 기억되었다. 『명사』는 등자룡에게 관직이 추증되었고 조선에서 사당을 지어 제사했다고 적는다.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진린의 손자는 명이 망한 뒤 조선에 와서 정착했고, 그 후손이 광동 진씨를 이루었다. 일본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는 무엇보다 사천 전투의 승리와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의 적중 돌파로 기억된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사천의 승리가 그와 그의 가문에 전설적인 무명을 안겼다고 하며, 일본 측 기록은 조선과 명이 그를 ‘귀석만자(鬼石曼子, 귀신 시마즈)’라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전한다.
현대 한국에서 노량 해전은 민족 영웅 이순신의 이야기에 속한다. 2023년 김한민 감독의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는 「명량」(2014), 「한산: 용의 출현」(2022)으로 이어진 3부작을 마무리했다. 한국에서는 이 전투를 흔히 ‘대첩’이 아니라 ‘노량 해전’이라고 부르는데, 일본어 위키백과는 나라를 구한 영웅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심화
배와 전사자 세기: 사료가 말하는 것
연합 함대의 규모는 분명하지 않다. 영어 위키백과는 새뮤얼 홀리를 따라 조선 판옥선 82척과 수군 8,000명, 그리고 대형 전선 6척, 가벼운 전선 57척, 이순신이 빌려준 판옥선 2척으로 이루어진 명 함대에 광둥 수군 5,000명과 조선 배에 탄 명 수병 2,600명을 들어, 모두 약 150척, 16,000명으로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연합 함대를 200여 척으로 적는다. 『명사』는 진린에게 군사 13,000여 명과 전함 수백 척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노량에 나온 함대가 아니라 그의 수군 전체를 가리킨다. 『징비록』의 8,000여 명도 몇 달 전 고금도 기지의 병력이다.
일본 측 수치는 더 크게 엇갈린다. 이덕형은 사천·남해·고성의 배 300여 척을 보고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영어 위키백과는 약 500척, 영어 위키백과는 병력 약 2만 명으로 적는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300척도 500척도 일본 측 기록에서 나온 수치가 아니며, 참전한 다섯 가문의 동원 정원을 합하면 약 17,000명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어 위키백과의 6만 명이라는 수치는 같은 문서 안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여기에 인용하는 절대적인 손실 수치는 연합군의 보고에서 나온다. 이덕형은 왜선 200여 척이 부서지고 사상자가 수천여 명이며, 남은 적선 100여 척이 남해 쪽으로 달아났다고 보고했다. 진린의 차관은 100척을 나포하고 200척을 불태웠으며 500급을 베고 180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전하면서,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아직 셀 수 없다고 했다. 『선조수정실록』과 『징비록』은 적선 200여 척을 불태웠다고 적는다. 『명사』는 마지막 작전들을 포괄한 서술에서 불타거나 빠져 죽은 자가 만 단위였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노량 해전만의 수치로 분명히 한정되지 않는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시마즈 가문의 기록 『정한록(征韓録)』은 배의 손실을 수치로 적지 않고, 전사자 26명의 이름을 든 뒤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만 적는다. 이처럼 『정한록』에는 전체 수치가 없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일본군의 절반이 전사했다거나 전선 60척이 돌아왔다는 다른 일본 측 기록의 주장도 소개하지만, 어느 주장으로도 믿을 만한 전체 수치를 확정할 수는 없다.
연합군의 손실은 주로 이름으로만 알려져 있다. 조선 쪽에서는 이순신을 포함한 장수 10여 명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보고되었고, 명 쪽에서는 등자룡 등이 전사했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조선 배 4척, 명 배 2척이 침몰했다는 수치를 들지만, 이 글이 참고한 자료에는 양쪽 모두 일반 병사와 격군이 얼마나 죽었는지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심화
사료와 그 한계
소식은 여러 차례에 걸쳐 한양에 닿았고, 첫 보고는 틀렸다. 11월 21일, 명 서로군의 당보수는 19일 연합군이 왜교를 공격했고 적이 배를 타고 달아나려 할 때 수군이 길을 끊어 왜선 50여 척을 불태웠으며, 구원하러 온 ‘심안도’, 곧 시마즈도 죽였다고 전했다. 24일에는 진린의 차관이 전과 수치를 가져와 이순신의 전사를 확인했다. 27일에는 초기 조선 기록 가운데 가장 자세한 이덕형의 장계가 도착했고, 사관은 여기에 이순신의 인품과 죽음에 대한 긴 논평을 붙였다. 실제로 시마즈는 살아남아 1619년 일본에서 죽었다.
가장 잘 알려진 이순신의 유언은 전쟁 뒤에 쓰이거나 편찬된 두 문헌, 곧 유성룡의 『징비록』과 1657년에 완성된 『선조수정실록』에서 나온다. 『선조수정실록』의 노량 기사는 『징비록』을 거의 글자 그대로 따른다. 원래의 『선조실록』에 실린 사관 논평에는 유언이 없고, 죽음을 숨긴 사람도 이완이 아니라 이문욱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두 전승의 요소가 함께 나온다. 『징비록』과 같은 유언을 인용한 뒤 이문욱이 시신을 가린 장면을 서술한다. 두 전승은 이순신이 싸우던 중 총에 맞았고 그의 죽음이 숨겨졌다는 점에서는 같고,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와 누가 나섰는지에서 다르다.
명나라 사료에는 명의 전공 보고 방식이 배어 있다. 『명사』의 진린 열전은 그가 시마즈의 중국식 이름인 석만자(石曼子)를 바다에서 막아 죽였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1599년 베이징에서 일본인 포로들을 바치는 의식이 지위를 부풀린 주장과 함께 치러졌다고 설명하며, 일본의 주요 장수를 하나도 사로잡지 못한 명군이 전과를 과장했을 것으로 본다.
일본 측 사료는 전투 자체에 대해서는 빈약하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시마즈 가신들의 진중 일기와 회고록, 후대의 시마즈 가문 역사서 『정한록』(1671)을 드는데, 이들은 가신 개개인의 공과 죽음은 적지만 전체 수치는 거의 적지 않는다. 일본 기록은 해전과 고니시의 출발을 일본 역법의 11월 18일로 적고, 조선 기록은 19일로 적는다. 두 역법이 하루 어긋나 있었기 때문이며, 양력으로 바꾸면 둘 다 12월 15~16일 밤을 가리킨다.
심화
논쟁: 누가 이겼나, 왜 싸웠나, 이순신은 어떻게 죽었나
누가 이겼나? 한국 쪽 서술과 이 글이 인용한 영어·일본어 위키백과는 노량 해전을 바다에서 거둔 연합군의 승리로 설명한다. 일본 구원 함대는 배를 많이 잃고 물러났으며, 일본어 위키백과는 이것이 일반적인 견해라고 적는다. 동시에 강조되는 점도 있다. 일본군 작전의 목적은 고니시를 순천에서 빼내는 것이었고 그 목적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시마즈 요시히로」 문서는 이를 직접 말하고, 영어 위키백과의 임진왜란 문서도 전략적으로는 일본군이 목표를 이루었다고 적는다. 두 견해는 같은 사실에 기대고 있다. 연합군은 바다의 싸움에서 이겼지만 일본군은 빠져나갔다.
이미 떠나는 적과 왜 싸웠나? 이순신과 조선 조정의 많은 사람에게, 7년 전쟁 끝에 침략군을 그냥 보내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11월 24일 사관의 논평과 유정에 대한 비난에서 그 분노를 볼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선조실록』에 따르면 진린은 처음에 싸우기를 꺼렸고, 조선 관리들의 눈에 유정은 교섭을 택했다. 이 해전은 이순신이 봉쇄를 풀지 않았고 일본군이 힘으로 봉쇄를 뚫으려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이순신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나? 이 가설은 대중 역사에서 오래 이어져 왔다. 1597년의 투옥과 고문, 그리고 전쟁 뒤에 그를 기다릴 조정의 정치를 근거로 든다. 실제로 노량 해전 무렵 그를 천거했던 유성룡은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있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이 자살설을 주장한 최석남의 1992년 전기를 소개하고, 영어 위키백과는 김훈의 2001년 소설 『칼의 노래』가 이순신이 일부러 몸을 드러낸 것으로 그린다고 설명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순신의 전사가 후대에 많은 의문을 낳았지만 어디까지나 추리일 뿐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적는다. 초기 기록은 그가 추격전에서 싸우다 총에 맞았다고 전한다.
노량 해전은 전쟁의 끝이었나? 노량은 마지막 큰 전투였고, 한국의 서술은 흔히 노량 해전을 끝으로 전쟁이 막을 내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미 철수하고 있었고, 마지막 배는 약 일주일 뒤에 부산을 떠났다. 강화 조약은 없었고, 정상적인 관계는 1607~1609년에야 회복되었다. 노량 해전은 이미 결정된 철수의 마지막 격렬한 장면이었고, 그 대가로 연합군은 가장 이름난 지휘관을 잃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핵심 개념
- 공격받으며 하는 철수
-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본은 이미 조선을 떠나기로 했다. 마지막 전투는 땅을 차지하려는 싸움이 아니라, 갇힌 군대를 빼내려는 쪽과 그것을 막으려는 쪽의 싸움이었다.
- 봉쇄
- 연합 함대는 순천 앞바다를 막아 고니시의 군대가 배를 타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 봉쇄를 뚫으려고 일본 구원 함대가 노량으로 왔다.
- 좁은 바다
- 노량 해협에서는 함대들이 서로 가까이 붙을 수밖에 없어 화포와 화공, 배에 올라타는 근접전이 모두 벌어졌고, 양쪽 모두 혼란 속에 큰 피해를 입었다.
- 불안한 동맹
- 조선과 명의 지휘관들은 늘 같은 것을 원하지 않았다. 진린과 유정은 교섭할 뜻이 있었고, 이순신은 싸우기를 고집했다.
- 승리와 탈출
- 연합군은 바다의 싸움에서 이겼지만 고니시의 군대는 빠져나갔다. 노량 해전을 승리로 볼지는 어떤 목표를 기준으로 삼느냐에 달려 있다.
- 유언과 기록
- 이순신의 유명한 유언은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에서 나오며, 원래의 『선조실록』은 그 장면을 다르게 전한다. 둘을 비교하면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볼 수 있다.
- 마지막 전투, 그러나 강화는 아님
- 노량 해전으로 싸움은 끝났지만, 평화는 1607년의 사절과 1609년의 교역 약조 같은 뒷날의 교섭으로 찾아왔다.
기록
- 1597년 — 8월: 조선 함대가 칠천량에서 궤멸하고,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 1597년 — 10월 26일: 이순신이 명량에서 훨씬 큰 일본 함대를 물리친다.
- 1598년 — 1~2월: 연합군의 첫 번째 울산성 공격이 실패한다.
- 1598년 — 음력 2월(양력 3월): 이순신이 통제영을 고금도로 옮긴다.
- 1598년 — 진린이 이끄는 명 함대가 고금도에서 이순신과 합류한다.
- 1598년 —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시미에서 죽고, 일본 지도부가 조선에서 철수하기로 한다.
- 1598년 — 10~11월: 연합군의 사로병진 공세가 울산·사천·순천에서 모두 실패한다.
- 1598년 — 12월 15~16일(음력 11월 18~19일): 노량 해전. 이순신과 등자룡이 전사하고, 고니시가 순천을 빠져나간다.
- 1598년 — 12월 21~24일: 마지막 일본군이 부산을 떠나 돌아간다.
- 1604년 — 이순신이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된다.
- 1607년 — 조선이 공식 사절단인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일본에 보낸다.
- 1832년 — 이순신이 쓰러진 관음포에 왕명으로 제단과 비석이 세워진다.
- 1973년 — 관음포 유적과 남해 충렬사가 사적으로 지정된다.
- 2023년 —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가 개봉한다.
용어 풀이
- 노량(露梁)
- 조선 남해안, 하동 근처에서 남해도와 육지 사이를 지나는 좁은 해협.
- 판옥선
-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 노 젓는 사람을 보호하는 높은 윗갑판이 있고 화포를 실은 큰 배.
- 왜성
- 전쟁 중 일본군이 조선 남해안에 쌓은 일본식 성. 울산·사천·순천의 성이 대표적이다.
- 왜교(倭橋)
- 조선 기록이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 성을 부르던 이름(예교라고도 적었다).
- 사로병진(四路竝進)
- 1598년 가을 연합군이 육지의 세 길로 울산·사천·순천을 동시에 치고, 네 번째 군대로 바다에서 공격한 작전.
- 삼도수군통제사
- 경상·전라·충청 세 도의 수군을 지휘한 직책. 노량 해전 때 이순신의 직책이다.
- 해로통행첩
- 이순신이 고금도에서 발행한 통행증. 배들이 쌀을 내고 받아 가도록 해 군량을 마련했다.
- 조총
- 화승식 초기 소총. 일본군이 대량으로 썼고, 이순신도 조총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 오대로(五大老)
- 히데요시가 어린 아들을 대신해 정치를 맡긴 다섯 명의 큰 영주. 조선에서의 철수를 명령했다.
- 음력(태음태양력)
- 조선과 일본이 쓰던 달력으로, 달의 움직임에 맞춰 달을 나눈다. 날짜를 양력(그레고리력)으로 바꿔야 하며, 조선과 일본의 역법은 하루씩 어긋나기도 했다.
묻고 답하기
이순신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나요?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입니다. 원래의 『선조실록』에는 유언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대중적인 판본 가운데에는 말을 덧붙인 것도 있습니다.
일본군이 이미 떠나려 했는데 왜 싸웠나요?
고니시의 군대가 연합 수군의 봉쇄 때문에 순천에 갇혀 있었고, 다른 일본 장수들이 봉쇄를 뚫으러 왔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침략군을 그냥 보낼 수 없다고 보았고, 동맹군 장수들은 교섭에 더 기울어 있었습니다.
진린은 고니시의 뇌물을 받았나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비롯한 한국 쪽 서술은 고니시가 진린에게 뇌물을 보냈고 진린이 일본 배 한 척을 지나가게 했다고 전합니다. 그래도 진린은 노량에서 싸웠고, 그의 배는 포위되었다가 구출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일부러 죽음을 택했나요?
그를 기다리던 조정의 정치를 근거로 그렇게 보는 후대 저자들도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확실한 근거가 없는 추리라고 하며, 초기 기록은 그가 싸우다 총에 맞았다고 전합니다.
누가 이긴 전투인가요?
바다의 싸움에서는 연합군이 이기고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도 주된 목표, 곧 고니시의 군대를 빼내 귀국시키는 일은 이루었습니다.
노량 해전으로 전쟁이 끝났나요?
마지막 큰 전투였습니다. 마지막 일본군은 약 일주일 뒤 부산을 떠났지만 강화 조약은 없었고, 일본과의 관계는 1607~1609년에야 회복되었습니다.
날짜가 11월 19일인가요, 12월 16일인가요?
같은 날입니다. 조선 역법의 음력 11월 19일을 양력으로 바꾸면 1598년 12월 16일입니다. ‘양력 11월 19일’처럼 음력 날짜를 양력처럼 쓰면 틀립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조성도, 노량해전 (露梁海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순신 (李舜臣).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정유재란 (丁酉再亂).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선조수정실록 32권, 선조 31년(1598) 11월 1일 2번째 기사: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서 적의 구원병을 패퇴시키고 전사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1일 2번째 기사: 경상 좌병사 성윤문이 포로들의 말로 관백의 죽음을 치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1일 3번째 기사: 왜교 공격과 19일 해전에 대한 첫 보고.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3일 2번째 기사: 양사가 유성룡의 삭탈 관작을 청하니 이미 파직했다고 답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3일 6번째 기사: 정원이 유 제독이 왜적을 놓아 보낸 일을 아뢰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4일 1번째 기사: 이산해 등이 왜적의 철수를 하례하다(사관의 논평 포함).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4일 2번째 기사: 윤두수 등이 유정이 왜적을 놓아 준 일을 아뢰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4일 4번째 기사: 진 도독의 차관이 해전의 전과와 이순신의 전사를 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4일 5번째 기사: 형 군문이 명 장수들을 부산으로 보내고 이순신의 후임 차출을 요구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6일 3번째 기사: 선조가 형 군문의 관사에 가서 승리를 치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6일 5번째 기사: 동 제독의 접반사 이충원이 동양창 왜적의 철수를 치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7일 5번째 기사: 좌의정 이덕형이 노량 해전을 치계하다(이순신에 대한 사관의 논평 포함).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8일 2번째 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경세가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에 남긴 방문을 치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8일 3번째 기사: 경상 좌병사 성윤문이 부산에 남은 왜적이 50~60명뿐이라고 치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9일 6번째 기사: 비변사가 부산의 왜적도 철수했다고 아뢰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유성룡(柳成龍), 懲毖錄(징비록) 권2 (원문). 위키문헌
- 明史(명사) 권247: 진린·등자룡 열전 (원문). 위키문헌
- 음양력 변환 계산. 한국천문연구원
- Battle of Noryang. 위키백과(영어)
- 노량 해전. 위키백과(한국어)
- 露梁海戦. 위키백과(일본어)
- 順天城の戦い. 위키백과(일본어)
- Imjin War. 위키백과(영어)
- Toyotomi Hideyoshi. 위키백과(영어)
- Yi Sun-sin. 위키백과(영어)
- 이순신. 위키백과(한국어)
- 이문욱. 위키백과(한국어)
- Chen Lin (Ming dynasty). 위키백과(영어)
- 진린. 위키백과(한국어)
- Shimazu Yoshihiro. 위키백과(영어)
- 島津義弘. 위키백과(일본어)
- 선조실록. 위키백과(한국어)
-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 위키백과(한국어)
- 남해 충렬사. 위키백과(한국어)
- Noryang: Deadly Sea. 위키백과(영어)
- Edict of Nantes. 위키백과(영어)
- Peace of Vervins. 위키백과(영어)
- Philip II of Spain. 위키백과(영어)
- Boris Godunov. 위키백과(영어)
- Battle of the Yellow Ford. 위키백과(영어)
함께 보기
- 이순신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일본 수군을 거듭 무찌르고 『난중일기』를 남긴 조선의 수군 지휘관이다.
- 시마즈 요시히로1597–1598년 사천왜성을 지키며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노량에서 연합 수군과 맞선 구원 선단을 이끈 사쓰마의 장수로,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적진을 뚫고 퇴각한 일로 유명하다.
- 진린1598년 조선에 온 명 수군을 이끌고 고금도에서 이순신과 합류해 노량 해전에서 함께 싸운 광둥 출신의 명 장수다.
- 고니시 유키나가사카이 상인 집안 출신의 기리시탄 다이묘로, 1592년 조선 침략 때 제1번대를 이끌었고 명의 심유경과 강화 교섭을 벌였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