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400여 년 전 일본은 조선에 두 번 쳐들어왔어요. 1592년에 한 번, 1597년에 또 한 번이에요. 첫 번째 전쟁 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바다에서 여러 차례 크게 이겨서, 일본군이 바다를 마음대로 쓰기 어렵게 했어요.
1597년 초, 일본군이 다시 쳐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에 이순신은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로 붙잡혀 한양으로 끌려갔어요. 그 대신 원균이라는 장수가 수군을 맡게 되었어요.
임금과 장군들은 수군에게 부산 근처로 나가 일본군을 치라고 거듭 명령했어요. 수군 병사들은 오랫동안 노를 저었고, 일본 배들은 싸우지 않고 자꾸 피했어요. 병사들은 점점 지치고 목마르고 겁을 먹었어요.
1597년 여름 어느 밤, 조선 배들은 거제도 옆 칠천량이라는 좁은 바다에 머물고 있었어요. 어둠 속에서 일본 배들이 몰래 다가와 몇 척에 불을 질렀고, 아침이 되자 아주 많은 일본 배가 조선 수군을 에워쌌어요. 조선 배는 거의 모두 불타거나 빼앗겼고, 많은 병사와 장수가 목숨을 잃었어요. 원균도 뭍으로 달아난 뒤 죽은 것으로 전해져요.
배설이라는 장수가 전선 열두 척쯤을 이끌고 빠져나왔고, 다른 곳에서 살아남은 배도 몇 척 있었을 수 있어요. 이순신이 다시 수군을 맡았고, 두 달이 채 안 되어 배설이 살려 낸 배들에 한 척을 더해 유명한 명량 해전을 치렀어요. 칠천량 해전은 아무리 강한 수군이라도 지치고, 나쁜 곳에 머물고, 억지로 싸움에 내몰리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줘요.
한눈에 보기
- 날짜
- 1597년(선조 30) 음력 7월 15일 밤부터 16일까지(조선력. 일본 측 기록도 같은 날짜) = 양력 1597년 8월 27~28일(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표 기준). 영어 위키백과는 Hawley를 따라 8월 28일로 적는다
- 장소
- 칠천량.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지금의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이다. 마지막 싸움은 고성 쪽 추원포에서 벌어졌고, 많은 군사가 그곳에서 뭍으로 올랐다
- 전쟁
- 임진왜란 가운데 일본의 두 번째 침략인 정유재란(1597–1598)
- 지휘관
- 조선: 원균(삼도수군통제사), 이억기(전라우수사), 최호(충청수사), 배설(경상우수사) / 일본: 바다에서는 도도 다카토라·와키자카 야스하루·가토 요시아키, 거제도의 육군은 일본 측 기록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로 전해진다
- 병력
- 조선: 음력 5월에 판옥선 약 180척으로 집계(만드는 중인 배 포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60여 척’, Hawley는 ‘최대 200척’ / 일본: 실제로 싸운 배의 수는 확실하지 않다. Hawley는 500~1,000척으로 추정한다. 음력 7월 8일 일본에서 부산에 온 배가 600여 척이라는 보고는 따로 있지만, 이는 참전한 배를 센 것이 아니다
- 피해
- 조선: 함대 거의 전부. 일본 위키백과가 인용한 일본 가문 기록은 160여 척을 빼앗았다고 하고, 영어 위키백과는 Hawley를 인용해 188척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억기·최호가 죽었고 원균은 뭍에 오른 뒤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 일본: 확실한 근거가 있는 합계는 없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출처 없이 전선 8척 침몰이라고 적고, 영어 위키백과는 피해가 아주 적었다고 적는다
- 결과
- 일본의 결정적 승리. 배설이 이끈 배 열두 척쯤이 빠져나왔다. 이순신은 음력 7월 22일(양력 9월 3일) 다시 통제사가 되었다. 일본군은 남해안을 장악하고 전라도와 남원 쪽으로 나아갔다
- 주요 사료
- 『선조실록』(김식·권율의 보고, 조정 논의), 『선조수정실록』(1657), 유성룡의 『징비록』, 일본 위키백과가 인용한 일본 가문 기록, 현대 백과사전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쉬움
칠천량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칠천량 해전은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이 당한 가장 큰 패배이다. 명과 일본의 강화 교섭이 깨진 뒤 1597년에 시작된 일본의 두 번째 침략, 곧 정유재란의 첫머리에 벌어졌다. 이 소식을 처음 조정에 보고한 관리는 음력 7월 15일 밤 2경(대략 밤 9~11시)에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튿날 아침에 조선 함대가 무너졌다고 말했다. 한국천문연구원(KASI)의 음양력 변환표로 바꾸면 이날은 1597년 8월 27일과 28일이다.
당시 조선 함대를 지휘한 사람은 원균이었다. 원균은 한산도 대첩의 주인공 이순신의 뒤를 이었는데, 이순신은 그해 초 바다를 건너오는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를 바다에서 막으라는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붙잡혀 갔다. 조정과 도원수 권율의 강한 압박을 받은 원균은 일본군이 증원군을 내려놓고 있던 부산 쪽으로 함대를 이끌고 나갔다. 부산과 가덕도 부근에서 며칠 동안 지치고 병력을 잃은 함대는 물러나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좁은 바다 칠천량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조선 함대는 밤에 일본 배들의 기습을 받았고, 새벽에는 훨씬 큰 일본 함대에 에워싸였다. 뭍에는 일본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 배는 대부분 불타거나 빼앗겼다. 이억기와 최호가 죽었고, 뭍으로 달아난 원균도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배 열두 척쯤을 이끌고 빠져나왔다.
이 패배로 남해안이 일본군에게 열렸고, 일본군은 서쪽 전라도로 나아가 한 달 뒤 남원을 함락했다. 또 이 패배로 이순신이 돌아왔다. 조정은 해전 일주일 뒤 그를 다시 통제사로 삼았고, 살아남은 몇 척의 배는 1597년 10월 명량에서 그가 이끈 함대의 바탕이 되었다. 아래에서는 이 참패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피해와 원균의 죽음에 대해 사료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그 책임을 두고 어떤 논쟁이 이어져 왔는지 살펴본다.
쉬움
적진에서 온 소식: 요시라와 가토의 바다 건너기
1593년 이후 오랜 휴전 동안, 강화 교섭에 가장 깊이 관여한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는 요시라라는 사람을 통해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조선 기록은 요시라를 고니시의 부하로 적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를 이중간첩이라고 부른다. 고니시와 가토 기요마사는 서로 경쟁하는 사이로 알려져 있었고, 요시라가 전한 말은 고니시가 교섭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교섭이 깨진 책임은 가토에게 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들렸다.
1597년 음력 1월 김응서는 요시라가 11일에 찾아와 고니시의 뜻을 전했다고 보고했다. 가토가 군사 7,000명을 이끌고 4일에 이미 대마도에 도착했고, 바람만 맞으면 곧 바다를 건널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요시라는 조선 수군이 거제도와 기장 앞바다로 나아가 가토가 건너오는 날을 엿보거나, 적어도 큰 세력을 보여 가토가 머뭇거리게 하라고 권했다. 조정은 이 정보를 무겁게 받아들였지만, 비변사는 “왜인의 말은 간사하여 믿기 어렵다”고 경계하며 판단을 도원수에게 맡기자고 했다.
이순신은 가토를 막으러 함대를 내보내지 않았고, 가토는 남동쪽 해안에 상륙했다. 1657년에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바닷길이 험하고 일본군이 반드시 복병을 두고 기다릴 것이라고 보았다. 배를 많이 내면 적이 알아챌 것이고, 적게 내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선조수정실록』은 가토가 다대포 앞바다를 거쳐 서생포로 갔다고 덧붙이고, 유성룡의 『징비록』은 그 뒤 요시라가 다시 와서 조선이 기회를 놓쳤다며 안타까워하는 척했다고 적는다.
이 일 전체가 일본의 계략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선조수정실록』과 『징비록』은 조선 수군을 끌어내고 이순신을 무너뜨리려는 고니시의 이간책으로 서술하고, 현대 한국의 많은 글도 이를 따른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고니시의 연락은 가토와의 경쟁에서 나온 실제 움직임이었을 수도 있다. 시점도 중요하다. 경고가 왔을 때 가토는 이미 대마도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고, 비변사도 이미 늦었을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여기서 쓴 기록으로는 바다에서 실제로 막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기록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이 소식이 조정에서 어떻게 쓰였는가이다.
쉬움
이순신의 투옥과 원균의 통제사 임명
선조는 크게 노했다. 음력 1월 27일 대신들을 만난 자리에서 선조는 이순신이 임진년 이후 한 번도 일을 일으키지 않았고 이번에는 “하늘이 준 기회”를 놓쳤다며, 가토의 머리를 베어 온다 해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순신을 감싸거나 전쟁 중에 장수를 바꾸면 안 된다고 한 대신도 있었고, 교체를 주장한 대신도 있었다. 이튿날 선조는 막 경상우수사로 삼은 원균에게 글을 내려, 이순신이 “적이 편안히 바다를 건너게 했으니” 끝내는 잡아다 국문해야 한다고 했다.
음력 2월 사헌부가 이순신을 잡아다 벌하라고 청했고, 선조는 원균이 교대한 뒤에, 그리고 싸움 중이 아닐 때 잡아 오라고 명했다. 이순신은 1593년부터 본영이던 한산도에서 원균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음력 3월 4일(양력 4월 19일) 옥에 갇혔다. 13일 선조는 이순신의 죄를 늘어놓았다. 조정을 속인 죄, 적을 놓아주고 치지 않은 죄, 남의 공을 빼앗고 남을 죄에 빠뜨린 죄, 거리낌 없이 방자한 죄이니 법대로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고문을 받으며 신문을 당했다. 원로 대신 정탁은 이순신은 이름난 장수라 죽여서는 안 되며 군사의 이해는 멀리서 헤아리기 어렵다고 변론했다. 음력 4월 1일(양력 5월 16일) 이순신은 옥에서 풀려나 도원수 권율 밑에서 벼슬 없이 싸우는 백의종군을 하라는 명을 받았다. 남쪽으로 가는 길에 그는 어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원균은 1592년 이순신과 함께 싸웠지만, 그 승리의 공을 두고 두 사람의 다툼은 깊어졌다. 원균은 이순신이 적을 보고도 나아가지 않는다고 자주 말해 왔는데, 이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이순신이 하지 않은 일을 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조정 기록을 보면 원균도 곧 그 일이 이순신이 말했던 만큼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쉬움
칠천량의 밤 기습
음력 7월 중순, 부산 쪽 출동에 실패해 지친 조선 함대는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바다로 물러나 있었다. 『징비록』에 따르면 배설은 칠천도 앞바다가 얕고 좁으니 진을 옮겨야 한다고 원균에게 말했지만 원균은 듣지 않았다. 이 해안에 성을 쌓고 있던 일본군은 뭍에서 조선 배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고, 『징비록』은 일본 진영들이 함대의 움직임을 서로 알렸다고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일본 수군 장수 도도 다카토라·와키자카 야스하루·가토 요시아키 등은 14일 거제도 북쪽으로 옮겨 와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기습하기로 계획했다.
조정에 처음 닿은 보고는 함대와 함께 있던 선전관 김식의 것이었다. 그는 15일 밤 2경에 왜선 대여섯 척이 갑자기 습격해 조선 전선 네 척을 불태웠다고 했다. 조선 장수들은 허둥지둥 진을 쳤다. 닭이 울 무렵 셀 수 없이 많은 왜선이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근처 섬들 사이의 바다를 가득 메웠다. 조선 수군은 싸우면서 물러났지만 당해 내지 못하고 고성 땅 추원포로 물러났으며, 그곳에서 전선은 모두 불타고 장수와 군사들은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유성룡도 선조에게 비슷하게 아뢰었다. 왜적이 어둠을 틈타 몰래 들어와 전선 네 척을 불태웠고, 이튿날 아침 사방에서 에워쌌으며, 조선 군사들은 어쩔 수 없이 고성 쪽으로 가서 뭍에 올랐지만 왜적이 먼저 상륙해 진을 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 위키백과가 정리한 일본 측 기록은 일본 수군이 16일 새벽부터 공격하고 육군이 이를 도왔다고 하며, 조선군 수천 명을 죽이고 배 160여 척을 빼앗았다고 주장한다.
김식은 원균, 순천 부사 우치적과 함께 뭍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원균이 늙어서 걷지 못해 칼만 든 채 소나무 아래 앉아 있었고, 자신이 달아나며 돌아보니 왜병 예닐곱이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이르렀는데 그 뒤의 일은 알 수 없다고 보고했다. 김식에 따르면 경상우수사 배설과 옥포·안골포의 만호 등은 겨우 살아났고, 수많은 왜선이 한산도로 향했다.
중급
멀리서 내려온 명령: 조정, 권율, 그리고 머뭇거리는 함대
칠천량으로 이어진 작전은 한양에서 정해졌다. 조정은 수군이 일본과 부산 사이의 바닷길을 끊어 일본의 증원군이 건너오지 못하게 하기를 바랐다. 음력 6월 비변사는 함대를 배설·이억기·최호·원균이 이끄는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한산도를 근거지로 삼은 채 번갈아 바다에 나가 오가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수군이 바다에 나가 위세를 보이지 않고 숨어만 있다고 나무랐다.
원균의 생각은 달랐다. 음력 3월의 장계에서 그는 안골포와 가덕도의 일본군은 수가 적으니 육군이 먼저 이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했다. 정병 “30여만”을 모아 바다와 육지에서 한꺼번에 크게 일어나면 승부를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음력 6월에도 그는 일본군이 안골포·가덕도·죽도를 쥐고 있는 한 함대가 부산까지 가더라도 앞에는 배를 댈 곳이 없고 뒤에는 적이 있어 안전하지 않다고 썼다. 조정은 작전은 도체찰사와 도원수가 정할 일이라고 답했는데, 두 사람은 수군이 바다로 나가기를 바랐다.
압박은 점점 거세졌다. 권율은 음력 6월 보고에서, 원균이 육군이 먼저 쳐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바다로 나갈 뜻이 없어 여러 번 꾸짖었으며, 도체찰사 이원익이 보낸 남이공이 한산도에 들어가 앉아서 재촉한 뒤에야 함대가 떠났다고 했다. 음력 7월 10일 선조는 원균에게, 전처럼 물러나 적을 놓아주면 나라의 법이 있으니 자신도 봐줄 수 없다는 뜻을 전하게 했다.
『선조수정실록』과 『징비록』은 모두 권율이 원균을 불러 매를 쳤다고 전한다. 『선조수정실록』은 원균이 적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렸기 때문이라고 하고, 『징비록』은 아무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적는다. 그 시점도 기록마다 다르다. 『선조수정실록』은 부산 쪽 마지막 출동 전으로, 『징비록』은 함대가 칠천도로 물러난 뒤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배설의 웅천 공격이 실패한 뒤로 적는다. 패전 소식이 온 뒤에 조정에 닿은 권율의 보고에 따르면, 세 도의 수사는 원균에게 반드시 질 것을 뻔히 아는 이상 부산과 절영도에는 갈 수 없으며 장수가 밖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권율은 조정이 이들을 벌해 달라고 청했다.
중급
싸우기 전에 지치다: 안골포, 부산, 가덕도
함대는 음력 6월 18일(양력 7월 31일) 100여 척으로 한산도를 떠났다. 이튿날 안골포와 가덕도의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원익의 종사관 남이공의 보고는 적선을 몰아내고 두 척을 빼앗은 치열한 싸움을 전하지만, 보성 군수 안홍국이 이마에 총탄을 맞아 전사했고 함대는 돌아왔다.
음력 7월 초 함대는 다시 나갔다. 이원익은 우도 수군이 7일 밤을 틈타 건너가 다대포 앞바다에 진을 치고, 8일(양력 8월 20일) 왜선 10여 척을 사로잡았다고 보고했다. 같은 날 일본에서 온 왜선 60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닿았다고도 했다. 절영도(지금의 부산 영도) 쪽 마지막 출동은 뒤의 기록들이 전하는데, 이 출동이 7~8일의 작전과 정확히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징비록』은 바람이 일고 날이 저물었으며, 한산도에서부터 종일 노를 저은 격군들이 굶주리고 목마르고 지쳐 있었다고 적는다.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은 모두 일본 배들이 다가왔다가 싸우지 않고 피하며 조선 수군을 지치게 했고, 밤이 되자 강한 바람에 조선 배들이 흩어졌다고 전한다.
원균은 남은 배를 모아 가덕도로 갔고, 목마른 군사들이 다투어 물을 길으러 뭍에 내렸다. 『징비록』은 이때 일본군이 섬 안에서 갑자기 뛰쳐나와 조선 수군이 장수와 군사 400여 명을 잃었고, 이어 칠천도로 물러났다고 적는다. 『선조수정실록』도 이 기습을 전하지만 피해 숫자는 적지 않고, 곧바로 고성 추원포로 물러난 이야기로 넘어간다. 뒤에 조정에서는 한 신하가 9일 싸움에서 군졸들이 겁에 질려 화살 한 대도 쏘지 못했다고 말했다. 칠천량에 닻을 내렸을 때 조선 수군은 사람과 배, 그리고 자신감을 잃은 채 일본군이 쥔 해안 가까이에 있었다.
중급
원균, 이억기, 최호, 배설
원균(1540–1597)은 1592년 전쟁이 시작될 때 경상우수사였다. 그의 함대는 침략 초기에 거의 흩어졌지만, 그는 이순신의 도움을 받아 1592년의 승리들에 참여했다. 두 사람은 그 공을 두고 사이가 나빠졌고,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뒤 원균은 육군 장수 자리로 옮겨졌다. 1597년 원균은 이순신 대신 수군으로 돌아왔다. 칠천량에서 원균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사료마다 다르게 전하는데, 이는 심화 부분의 사료 항목에서 자세히 다룬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1592년부터 한산도 대첩 등에서 이순신과 함께 싸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이순신이 붙잡혀 간 뒤 대신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순신을 변호했다고 적는다. 충청수사 최호는 1596년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두 사람 모두 칠천량에서 죽었다. 『선조수정실록』은 이들이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하고, 『징비록』은 이억기가 배 위에서 물에 몸을 던졌다고 적는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이 해전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징비록』은 그가 여러 번 원균에게 간했고, 몰래 자기 배들을 단속해 두었다가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먼저 달아났으며, 그래서 그의 부대만 온전했다고 적는다. 『선조수정실록』은 더 가혹하게, 배설이 먼저 달아나자 온 군사가 무너졌다고 한다. 그는 한산도로 가서 일본군이 쓰지 못하도록 건물과 곡식, 무기를 불태우고 남은 백성을 피란시켰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배 열두 척을 이끌고 물러났다고 적는다.
배설은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가 된 뒤 한동안 그의 지휘를 받았지만, 명량 해전 전에 병을 치료하겠다며 허락을 받고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1599년 선산에서 붙잡혀 한양에서 처형되었다. 그가 살려 낸 배 열두 척쯤은 함대에 남아 이순신이 다시 세운 수군의 바탕이 되었다.
중급
패전 뒤: 이순신의 복귀, 남해안, 그리고 남원
김식의 보고는 음력 7월 22일(양력 9월 3일) 조정에 이르렀다. 『선조실록』은 대신들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적는다. 선조는 이 패배를 하늘의 뜻이라 하면서도, 왜 척후를 두지 않았는지, 왜 한산도로 물러나 지키지 않았는지 물었다. 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늘 먼저 조선 수군을 깨뜨려야 육군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더니 과연 그렇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원균은 처음부터 가려 하지 않았으며 도원수가 원균을 독촉해 이 패배가 생겼다고 했다.
같은 날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선조수정실록』과 『징비록』에 따르면 김명원과 이항복이 이순신만이 수군을 되살릴 수 있다고 아뢰었다. 권율은 이미 이순신을 바닷가로 보내 흩어진 배를 모으게 했고, 이순신은 아주 적은 사람만 데리고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가며 남은 것을 거두었다. 배설이 살려 낸 배들이 그의 함대가 되었다.
조선 수군이 사라지자 일본군은 남해안을 손에 넣었다. 『징비록』은 승리한 일본군이 서쪽으로 나아가 남해와 순천이 차례로 무너지고, 일본 배들이 두치진에 군사를 내려 명나라 장수 양원이 군사 3,000명으로 지키던 남원을 에워쌌다고 적는다. 선조는 패전 보고가 온 날 이미 이 위험을 내다보았다. 남원은 음력 8월 중순(양력 9월 하순)에 함락되었고, 그 뒤 학살이 벌어졌다.
한양에서 선조는 일본 배들이 이제 서해로 들어와 며칠 안에 충청도와 경기도까지 올 것을 걱정했다.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6일) 명량에서 이순신은 배 13척으로 훨씬 큰 일본 함대를 물리치고, 일본 함대의 서쪽 진출을 막았다. 육지에서도 일본군은 한양을 공격하지 않고 곧 남해안의 왜성으로 물러났다. 전쟁은 1598년 12월 마지막 일본군이 부산에서 철수하면서 끝났다.
중급
같은 무렵 세계에서는, 1597년
일본 안에서는 1597년 2월 5일, 조선 침략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일본인 신자와 외국인 선교사를 포함한 가톨릭 신자 스물여섯 명이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 이 일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히데요시의 정책이 더 엄해졌음을 보여 준다.
유라시아 반대편에서도 바다의 세력들이 함대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1597년 10월 에스파냐는 약 140척의 세 번째 무적함대를 잉글랜드로 보냈지만, 영국 해협에서 폭풍을 만나 흩어졌다. 같은 해 네덜란드의 첫 동인도 원정대가 돌아와 네덜란드 향신료 무역과 뒷날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이 일들은 칠천량과 아무 관련이 없다. 나란히 놓아 보면, 같은 해 세계 여러 곳에서 함대의 운명과 바닷길의 지배가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중급
칠천량을 기억하기
한국에서 칠천량은 오랫동안 이순신의 승리 뒤에 드리운 그림자로 기억되어 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해전을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라고 설명한다. 대중 역사서와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2005) 같은 작품에서 이 패배는 이순신의 복귀, 남은 전선 열두 척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 그리고 열세 척으로 거둔 명량의 승리로 이어지는 장면이 된다.
칠천도에는 지금 칠천량해전공원이 있고, 거제해양관광개발공사가 운영한다. 공원 전시관은 당시 두 나라 수군의 전력과 전투의 전개 과정을 보여 준다. 거제에서는 이곳에서 숨진 조선 수군 장병을 기리는 추념회가 열리며, 지역 방송사는 2026년 9월의 추념회를 보도했다.
장수들은 저마다 다르게 기억된다. 의민이라는 시호를 받은 이억기는 안홍국과 함께, 1601년에 세워진 여수 충민사에 이순신의 좌우로 모셔졌다. 경기도 평택에 있는 원균의 묘는 1980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후손들이 제사를 지낸다. 여기서 쓴 기록에는 원균의 시신을 거두었다는 말이 없으며, 한국어 위키백과는 이 묘에 유품만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고 적는다.
심화
배와 군사, 그리고 피해: 사료가 말하는 것
조선 함대의 규모는 확실하지 않다. 음력 5월 비변사는 권율의 보고를 정리하며, 한산도에 와 있는 판옥선이 134척, 오는 중인 배가 대여섯 척, 따로 만들어 20일 안에 마칠 배가 48척으로 모두 180여 척이며 이 밖에 작은 배도 많다고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원균이 삼도 수군 “16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떠났다고 하고, 영어 위키백과가 인용한 Hawley는 최대 200척이라고 한다. 음력 6월 병조는 명나라 장수에게 원균이 거느린 수군이 4,500명이라고 알렸는데, 이 숫자는 배에 탄 사람 가운데 일부만 센 것일 수도 있다. 배의 수는 사료끼리 비교적 가깝지만 병력 수는 차이가 크며, 여기서 쓴 자료로는 확실한 합계를 낼 수 없다.
일본 쪽은 이원익이 음력 7월 8일 일본에서 부산에 온 배가 600여 척이라고 보고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배설 항목도 부산의 왜선 600여 척을 말한다. 영어 위키백과가 인용한 Hawley는 500~1,000척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어느 숫자도 칠천량 공격에 실제로 몇 척이 나섰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김식에 따르면 첫 기습은 겨우 대여섯 척이 했다.
조선의 피해는 컸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김식은 전선이 모두 불타고 장수와 군사가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다고 했다. 일본 위키백과가 인용한 일본 가문 기록은 배 160여 척을 빼앗고 조선군 수천 명을 죽였다고 주장하며, 영어 위키백과는 Hawley를 인용해 188척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21일에 작성된 권율의 보고는 군관 최영길이 들은 말을 전하는데, 큰 배 18척이 사량에 와 있고 전라도 배 20여 척이 흩어져 있으며, 달아난 배들이 모두 뭍에 배를 대었기 때문에 격군 가운데 죽은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흔히 말하는 ‘열두 척쯤’은 배설이 이끌고 나온 부대를 가리키며, 다른 곳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배가 더 있었을 수 있다.
일본군의 피해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 합계가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출처 없이 전선 8척이 침몰했다고 적고, 영어 위키백과는 피해가 아주 적었다고 적는다. 조선군의 전체 사망자 수도 알 수 없다. 『징비록』은 해전 전에 가덕도에서 장수와 군사 400여 명을 잃었다고 전하지만, 그 가운데 몇 명이 죽었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음력 8월 이원익은 어느 장수가 죽고 살았는지에 대한 말이 앞뒤로 계속 달라진다고 보고하며, 살았든 죽었든 거의 모두가 싸우지 않고 달아난 사람들이라고 판단했다.
심화
사료와 그 한계
가장 이른 기록은 『선조실록』 음력 7월 22일 조에 실린 선전관 김식의 보고이다. 짧고 사건에 가깝지만, 한 생존자의 시각에서 전한 보고이다. 이 보고는 배가 ‘모두’ 불타고 군사가 모두 죽었다고 하는데, 뒤의 보고들은 이를 고쳐 나갔다. 같은 날 대신들과의 논의 기록에는 유성룡의 전투 요약과 선조의 반응이 남아 있다. 그 뒤 몇 주 동안 권율, 이원익, 고을 수령들이 올린 보고가 세부를 더하면서 서로 어긋나기도 한다.
원균의 죽음은 사료가 얼마나 갈리는지 잘 보여 준다. 김식은 왜병들이 원균에게 이르는 것은 보았지만 그가 죽는 것은 보지 못했다. 21일자 권율의 보고는 원균이 죽음을 면하고 진주로 향했다는 소문을 전했고, 일주일 뒤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말을 바탕으로 한 다른 보고는 원균이 견내량 근처에서 뭍에 올랐다가 쫓겨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음력 8월 5일 조정은 원균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처벌을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징비록』은 원균이 적에게 죽었다는 말도 있고 달아나 살았다는 말도 있어 끝내 사실을 알 수 없었다고 적는다. 1657년에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은 원균이 뭍에 내렸다가 적에게 죽었다는 것을 확정된 결말로 서술한다. 원균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1604년 사후에 공신으로 높여졌다.
원균의 행동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대부분 뒤에 쓰인, 한쪽 편에 선 기록에서 나온다. 이순신을 천거했던 유성룡이 전쟁 뒤에 쓴 『징비록』은 원균이 이순신이 정해 둔 규칙을 모두 바꾸고 이순신이 쓰던 장수들을 내쫓았으며, 이순신이 장수들과 작전을 의논하던 운주당에 애첩을 데리고 살며 겹울타리로 안팎을 막고, 술을 즐기고 형벌에 법도가 없었다고 적는다. 『선조수정실록』도 원균이 이순신의 규약을 모조리 바꾸고 형벌에 법도가 없어 군사들의 마음이 떠났다고 적는다. 광해군 때인 1609년부터 편찬된 원래의 『선조실록』에는 여기서 살펴본 기사 가운데 이런 묘사가 없고, 원균 자신의 장계와 그에게 내려간 명령이 남아 있다. 날짜도 엇갈린다. 『징비록』은 패전을 음력 8월 7일 조에 적어 조정 기록과 맞지 않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부산 근해 출동을 음력 7월 14일로 적어 이원익의 보고보다 늦다.
여기서 쓴 자료 가운데 일본 측 사료는 적다. 일본 위키백과는 160여 척 노획과 해안 곳곳에서 조선 배를 불태운 일을 『시마즈 가문서』에서, 그 전 가덕도 싸움을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일본전사 조선역』에서 인용한다. 이런 가문 기록은 자기 공을 부풀리는 경향이 있으며, 여기서 쓴 자료로는 자세히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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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책임인가: 원균과 역사가들
오랫동안 흔한 답은 원균이었다. 『징비록』은 원균을 이순신을 시기해 모함하고 그 자리를 차지한 뒤 술과 가혹함, 잘못된 판단으로 함대를 잃은 사람으로 그리고, 『선조수정실록』도 그가 이순신의 규약을 모조리 바꾸고 형벌에 법도가 없어 군사들의 마음이 떠났다고 비판한다. 이 모습은 뒷날 한국인의 기억을 만들었는데, 특히 정조 때부터, 그리고 20세기에 다시 이순신이 민족의 영웅으로 높여지면서 더 굳어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원균이 대표적인 비겁한 장수로 기록되어 오기도 한다고 적는다.
당시 조정 기록은 더 복잡하다. 패전 보고가 온 날 선조 자신이 함대는 한산도를 굳게 지켰어야 하는데 “반드시 나가라고 독촉해” 이런 패배를 불렀다고 했고, 도원수가 원균을 독촉해 이 패배가 생겼다고 말했다. 한 달 뒤 사헌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수군의 패배는 “실로 조정의 계책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원익이 원균에게 군사를 잃은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하자 비변사는 그 잘못을 원균 한 사람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고 답했다. 1604년 원균은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올랐다.
1980년대 이후 몇몇 저자들과 평택의 원균 후손, 지역 단체들은 원균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들은 1592년의 전공, 일본군이 안골포와 가덕도를 쥐고 있는 한 부산을 안전하게 칠 수 없다던 원균의 경고, 그리고 그를 출전으로 내몬 명령들을 근거로 든다. 이에 대해 그런 움직임은 혈연과 지연의 영향을 받았으며, 원균 자신도 이순신이 나아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는 반론이 있다. 여기서 살펴본 기록을 바탕으로 하면 원균의 판단을 조정의 압박, 함대의 피로, 일본군의 해안 장악과 함께 견주어 볼 수 있다.
여기서 쓴 자료는 여러 원인이 함께 작용했음을 보여 준다. 함대 장수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공격을 요구한 조정과 도원수, 해안을 쥐고 바다와 육지에서 함께 공격할 수 있었던 일본군, 충분한 경계 없이 좁은 해협에 닻을 내린 지치고 사기가 떨어진 함대, 그리고 『징비록』이 전하는, 배설의 경고에도 좁은 정박지를 떠나지 않은 일을 비롯한 마지막 며칠 동안 원균의 판단이다. 이 가운데 무엇에 얼마나 무게를 둘지는 여전히 판단의 문제이며, 여기서 쓸 수 있는 자료로는 일본 쪽 이야기가 훨씬 덜 밝혀져 있다.
핵심 개념
- 정보와 기만
- 요시라를 통해 전해진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 정보가 이순신의 투옥으로 이어졌다. 뒤의 기록은 이를 일본의 의도된 계략이라 하지만, 당시 기록이 보여 주는 것은 그 소식이 전해지고 쓰였다는 사실이지 고니시의 속뜻은 아니다.
- 멀리서 내린 명령
- 조정과 도원수는 부산 근처로 나가 싸우라고 몰아붙였지만, 함대의 장수들은 일본군이 해안을 쥐고 있는 한 성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 싸우기 전의 피로
- 긴 노 젓기, 바람에 흩어진 함대, 그리고 뒤의 기록에 따르면 가덕도에서 잃은 400여 명이 일본군의 공격 전에 수군을 지치게 했다.
- 좁은 해협의 함정
- 일본군이 지키는 해안 가까이의 얕고 좁은 바다에 머문 함대는 밤에 기습을 받고 뭍에서도 길이 막힐 수 있었다.
- 바다와 육지를 함께
- 일본군은 함대의 공격과 거제도·육지의 군대를 함께 움직였고, 뭍으로 달아난 많은 군사들은 먼저 상륙해 기다리던 일본군과 맞닥뜨렸다.
- 살아남은 함대
- 배설이 살려 낸 배 열두 척쯤이 이순신이 다시 세운 수군과 명량 함대의 바탕이 되었다.
- 책임과 기억
- 패배를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어떤 사료를 믿느냐에 달려 있다. 뒤의 기록은 원균의 잘못을 강조하고, 조정 기록은 그에게 가해진 압박도 보여 준다.
기록
- 1592년 — 이순신·원균·이억기가 한산도 대첩 등 여러 해전에서 이긴다. 이순신과 원균은 공을 두고 다툰다.
- 1593년 —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에 본영을 둔다.
- 1597년 — 음력 1월(양력 2~3월):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가토 기요마사가 곧 바다를 건넌다고 알린다. 이순신은 가토를 막으러 나가지 않고, 가토는 상륙한다.
- 1597년 — 음력 2~3월: 원균이 수군을 넘겨받는다.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양력 4월 19일 옥에 갇힌다.
- 1597년 — 양력 5월 16일(음력 4월 1일): 이순신이 풀려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는다.
- 1597년 — 양력 7월 31일~8월 1일: 함대가 안골포와 가덕도를 공격하고, 안홍국이 전사한다.
- 1597년 — 양력 8월 19~20일: 우도 수군이 부산 가까운 다대포로 나아가 왜선 10여 척을 사로잡고, 일본에서 온 왜선 600여 척이 부산에 닿았다고 보고된다. 뒤의 기록은 절영도 쪽 출동과 가덕도에서의 피해를 전하지만, 이 작전과 정확히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1597년 — 양력 8월 27~28일(음력 7월 15~16일): 칠천량 해전.
- 1597년 — 양력 9월 3일(음력 7월 22일): 패전 소식이 조정에 이르고,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가 된다.
- 1597년 — 양력 9월 하순: 남원이 일본군에게 함락된다.
- 1597년 — 양력 10월 26일: 이순신이 명량에서 일본 함대를 물리친다.
- 1598년 — 12월: 마지막 일본군이 부산에서 철수하고 전쟁이 끝난다.
- 1599년 — 1597년에 함대를 떠난 배설이 선산에서 붙잡혀 처형된다.
- 1604년 — 원균이 이순신·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오르고, 이억기는 2등에 오른다.
- 1980년 — 평택의 원균 묘가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다. 이후 후손과 일부 저자들의 원균 재평가 움직임이 이어진다.
용어 풀이
- 칠천량
-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좁은 바다로, 지금의 경상남도 거제시에 있다.
- 삼도수군통제사
- 경상·전라·충청 세 도의 수군을 지휘하도록 1593년에 만든 자리. 이순신, 원균, 다시 이순신이 맡았다.
- 수사
- 각 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수군절도사. 이억기(전라우수사), 최호(충청수사), 배설(경상우수사) 등이 있다.
- 도원수
- 전쟁 때 조선 군대를 총지휘하는 자리. 1597년에는 권율이 맡았다.
- 도체찰사
- 한 지역의 군사와 행정을 두루 살피도록 보낸 고위 대신. 1597년 남쪽에서는 이원익이 맡았다.
- 비변사
- 군사 문제를 논의하고 조정하는 조정의 기구.
- 판옥선
-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선. 노를 젓는 큰 배로, 높은 윗갑판에 화포를 실었다.
- 백의종군
- ‘흰옷을 입고 군대를 따른다’는 뜻으로, 벌로 벼슬 없이 싸우는 것. 1597년 이순신이 그렇게 했다.
- 선무공신
- 1604년 일본과의 전쟁에서 세운 군공으로 정한 공신. 1등은 이순신·권율·원균 세 사람이다.
- 왜성
- 전쟁 중 일본군이 남해안에 쌓은 일본식 성. 안골포·가덕도의 왜성처럼 바닷길 가까이에 있었다.
- 음력(태음태양력)
- 조선이 쓴 달력. 달의 차고 기움에 따라 달을 정하고 가끔 윤달을 넣는다. 양력(그레고리력)으로 바꾸어야 날짜를 비교할 수 있다.
묻고 답하기
왜 칠천량에서는 이순신이 지휘하지 않았나요?
1597년 초, 조정은 일본 쪽 연락책이 알려 준 가토 기요마사를 바다에서 막지 않았다는 것 등을 죄로 삼았어요. 이순신은 붙잡혀 옥에 갇혔다가 벼슬 없이 싸우라는 조건으로 풀려났고, 원균이 그 자리를 맡았어요.
가토에 대한 정보는 일본의 속임수였나요?
『선조수정실록』과 『징비록』 같은 뒤의 기록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계략이었다고 하고, 오늘날의 많은 글도 그렇게 써요. 하지만 1597년 조정 기록이 보여 주는 것은 그 소식과 그것이 어떻게 쓰였는지일 뿐, 고니시의 진짜 속마음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계략이었다고 전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알맞아요.
조선 함대는 왜 바다로 나갔나요?
조정과 도원수 권율은 수군이 일본 증원군이 부산으로 건너오는 것을 막기를 바랐어요. 원균과 각 도의 수사들은 일본군이 해안을 쥐고 있는 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벌을 주겠다는 압박 속에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원균은 이 해전에서 죽었나요?
원균은 뭍에 오른 뒤 죽은 것으로 보통 설명되지만, 자세한 사정은 확실하지 않아요. 선전관 김식은 소나무 아래 앉은 원균에게 왜병들이 이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뿐 그가 죽는 모습은 보지 못했고, 몇 주 동안 보고들도 그의 생사를 다르게 전했어요.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뒤의 기록은 그가 죽은 것으로 다뤄요.
배는 몇 척이 살아남았나요?
배설이 이끌고 나온 열두 척쯤이에요. 이 배들이 이순신 함대의 바탕이 되었어요. 다른 배와 작은 배들이 바닷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는 보고도 있어서, 실제로 살아남은 배는 조금 더 많았을 수도 있어요.
날짜는 7월 15일인가요, 8월 27일인가요?
둘 다 같은 밤이에요. 기록은 음력으로 7월 15일이라고 하는데, 양력으로 바꾸면 1597년 8월 27일이에요. 함대가 무너진 것은 이튿날 아침인 8월 28일이에요. ‘양력 7월 15일’이라고 하면 음력의 달과 양력을 섞은 셈이에요.
패전 뒤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일주일도 안 되어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가 되었어요. 일본군은 남해안을 손에 넣고 남원까지 나아갔고, 10월에 이순신은 살아남은 배들로 명량 해전에서 이겼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조성도,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정일, 원균(元均).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정일, 이억기(李億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최호(崔湖).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송정현, 배설(裵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정일, 안홍국(安弘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순신(李舜臣).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칠천도(七川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원균 장군 묘(元均 將軍 墓).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여수 충민사(麗水 忠愍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선조실록(宣祖實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월 19일 2번째 기사: 경상도 병사 김응서의 장계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월 21일 6번째 기사: 청정의 침입에 원수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대처하도록 할 것을 비변사가 건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월 27일 3번째 기사: 수군의 작전 통제권을 가지고 대신들과 논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월 28일 2번째 기사: 원균에게 하유하게 한 비망기(국역 제목 ‘유영순을 경상우도 수군 절도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삼아 수군을 지휘하게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2월 4일 1번째 기사: 통제사 이순신을 잡아 율에 따라 죄를 정할 것을 사헌부가 건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2월 6일 3번째 기사: 이순신을 잡아오도록 김홍미에게 전교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3월 13일 2번째 기사: 이순신에게 벌하는 것을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4월 19일 5번째 기사: 전라 좌수사 원균이 수륙 양군의 동시 출병을 청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5월 12일 3번째 기사: 비변사에서 수군과 육군의 군사 작전 계획을 건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6월 11일 3번째 기사: 원균이 수륙의 병공을 처치해 줄 것을 요청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6월 15일 5번째 기사: 중국 장수에게 수륙의 군병 수와 기계 수를 보고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6월 26일 6번째 기사: 수군의 여러 부대를 바다에 나가게 하여 위세를 삼도록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6월 28일 5번째 기사: 원균이 드디어 가덕도 앞바다로 향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6월 29일 8번째 기사: 경상도 도체찰사 이원익이 가덕도·안골포에서의 전황을 보고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7월 10일 2번째 기사: 비변사의 건의대로 원균에게 후퇴하지 말고 적을 공격할 것을 명령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7월 14일 2번째 기사: 아군이 적선 10여 척을 포획한 것을 도체찰사 이원익이 치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1597) 7월 22일 2번째 기사: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1597) 7월 22일 3번째 기사: 원균이 지휘한 수군의 패배에 대한 대책을 비변사 당상들과 논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1597) 7월 22일 5번째 기사: 조즙·이순신·권준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7월 23일 2번째 기사: 비변사에게 충청도와 경기도의 방비를 당부하는 비망기를 내리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7월 25일 3번째 기사: 삼도 수사의 통제사 원균에 대한 항명 사실을 기록해 두도록 지시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7월 26일 5번째 기사: 도원수 권율이 한산도의 군사 상황을 보고하고 이순신의 파견을 건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7월 28일 3번째 기사: 권율이 진주 목사 나정언의 치보를 보고하고 조정의 처치를 요청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8월 5일 4번째 기사: 원균을 비롯하여 패주한 장수들의 처벌 문제를 논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8월 18일 4번째 기사: 해전에서 도망친 장수들을 참형에 처하도록 사헌부가 건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 37년(1604) 6월 25일 7번째 기사: 대대적으로 공신을 봉하니 명칭은 호성 공신, 선무 공신, 청난 공신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선조 30년(1597) 2월 1일 1번째 기사: 통제사 이순신을 하옥시키라 명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선조 30년(1597) 7월 1일 2번째 기사: 적이 수군을 습격하여 깨뜨리니 원균과 이억기, 최호가 전사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선조 30년(1597) 7월 1일 3번째 기사: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로 삼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유성룡(柳成龍), 징비록(懲毖錄) 권2 (한문 원문). 위키문헌
- Battle of Chilcheollyang. 위키백과(영어)
- 漆川梁海戦. 위키백과(일본어)
- 원균. 위키백과(한국어)
- 이순신. 위키백과(한국어)
- 칠천량해전공원. 거제해양관광개발공사
- 거제 포로수용소유적공원·칠천량해전공원 여행 기사. 서울신문, 2018
- 칠천량해전 희생 조선 수군 추념회. KNN, 2026
- 음양력 변환 계산. 한국천문연구원
- 26 Martyrs of Japan (일본 26성인). 위키백과(영어)
- Third Spanish Armada (1597년 에스파냐 무적함대). 위키백과(영어)
- First Dutch Expedition to the East Indies (네덜란드 제1차 동인도 원정). 위키백과(영어)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