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명량 해전

명량해전 鳴梁海戰 · 명량대첩 鳴梁大捷 · 일본어 鳴梁海戦(메이료 가이센)

1597년

처음 게시 2026년 10월 12일 · 마지막 수정 2026년 10월 12일 · 편집 테라 스크립타

AI 작성 · AI 사실 검수

Claude가 쓰고 Codex(gpt-6.1-sol)가 공개 출처와 대조해 사실·연대·인용과 영어·한국어판을 독립 검수했습니다. 사람 전문가의 검토는 거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AI 검수: 2026-10-12. 찾아서 고친 문제 21건.

한 문장으로

1597년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6일), 칠천량 패전 뒤 남은 수군을 수습해 마련한 전선 13척으로 이순신이 진도 앞의 좁고 물살 빠른 명량해협(울돌목)에서 훨씬 큰 일본 함대를 물리쳤어요. 일본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전사하고 일본 함대는 물러났지만, 전쟁은 그 뒤로도 1년 넘게 이어졌어요.

명량 해전
이미지: 太田天洋(1884~1946) · CC BY 1.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400여 년 전,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왔어요. 1597년에 일본군은 두 번째로 다시 쳐들어왔어요. 그해 여름, 조선 수군은 칠천량이라는 곳에서 기습을 받아 거의 다 무너졌어요.

임금은 몇 달 전 붙잡혀 벌을 받았던 이순신에게 다시 수군을 맡겼어요. 이순신이 돌아왔을 때 남은 전선은 열두 척 정도뿐이었어요. 수군을 없애고 육지에서 싸우자는 말도 나왔지만, 이순신은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전해요.

일본의 큰 함대가 바닷가를 따라 서쪽으로 다가왔어요. 이순신은 진도와 육지 사이의 아주 좁은 물길 가까이에서 기다렸어요. 그곳은 바닷물이 아주 빠르고 시끄럽게 흘러서 ‘울돌목(우는 바다 길목)’이라고 불려요.

전투 날, 일본 배 130척이 넘게 물길로 들어왔고 조선 배는 13척이었어요. 처음에는 이순신이 탄 배가 거의 혼자 싸웠고 다른 배들은 뒤로 물러나 있었어요. 그러다 다른 배들도 앞으로 나왔고, 일본 장수 한 명이 죽고 일본 배 30척쯤이 부서졌어요. 일본 함대는 물러갔어요.

이 전투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에요. 이순신은 배가 너무 적어서 그곳에 머물지 못하고 북쪽으로 올라가 사람과 배를 다시 모았어요. 그래도 사라질 뻔한 조선 수군을 지켜 냈기 때문에, 명량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바다 전투 가운데 하나로 기억돼요. 이순신이 물길에 쇠사슬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전투를 적은 이순신의 일기에는 해협에 쇠사슬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없어요.

한눈에 보기

날짜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조선·일본 역법 모두) = 양력 1597년 10월 26일. 싸움은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장소
진도와 육지(화원반도) 사이의 명량해협(울돌목)과 그 북서쪽 끝 전라우수영 앞바다. 지금의 해남군·진도군
전쟁
임진왜란(1592–1598) 가운데 두 번째 침략인 정유재란(1597–1598)
지휘관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김억추, 안위·김응함·송여종 등 / 일본: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루시마 미치후사(전사), 감찰역 모리 다카마사
병력
조선: 전선 13척과 전투에는 들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탐망선 32척(이순신의 보고) / 일본: 『난중일기』에 따르면 공격해 온 배 133척(조정에 올린 보고에서는 ‘130여 척’). 근처의 전체 함대 추정치는 330척 안팎까지 다양하다
피해
일본: 『난중일기』에 따르면 31척 격파(보고에서는 20여 척, 뒤에 11척. 현대 저작 대부분은 약 30척), 구루시마 미치후사 전사, 도도 다카토라 부상 / 조선: 배 손실 없음. 대장선에서 2명 전사·3명 부상, 안위의 배에서 격군 7~8명이 바다에 뛰어듦(『난중일기』)
결과
조선의 승리. 일본 함대가 물러났다. 이순신은 그날 밤 북쪽으로 물러났고, 일본 수군은 뒤에 전라도 서해안을 노략한 뒤 겨울을 나러 남해안으로 물러났다. 전쟁은 히데요시가 죽은 뒤 1598년 12월 일본군이 부산을 떠나면서야 끝났다
주요 사료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에 인용된 그의 보고, 유성룡의 『징비록』, 조카 이분이 쓴 「행록」, 일본 도도 가문·모리 가문의 기록, 1688년 명량대첩비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쉬움

명량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명량 해전은 일본의 두 번째 침략, 곧 정유재란 때 벌어진 임진왜란의 바다 전투이다. 1597년 음력 9월 16일에 벌어졌으며, 양력으로는 1597년 10월 26일이다. 일본 측 기록도 같은 음력 날짜를 적는다. 싸움터는 진도와 한반도 서남쪽 끝 사이의 좁은 물길인 명량해협이었다. 물살 소리가 요란해 ‘우는 바다 길목’이라는 뜻의 울돌목이라고도 부른다.

두 달 전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거의 전멸했다. 남은 수군을 다시 맡은 이순신이 전투 날까지 모은 전선은 13척뿐이었다. 전라도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던 일본 함대가 그를 치려고 해협으로 들어왔다. 『난중일기』는 공격해 온 일본 배를 133척으로 적는다.

오랫동안 이순신의 대장선은 거의 홀로 싸웠고, 다른 장수들은 뒤에 머물러 있었다. 이들이 마침내 앞으로 나서자 전세가 바뀌었다. 이순신은 일본 배 31척을 깨뜨렸다고 기록했고, 일본 함대는 물러갔다. 일본 측 기록도 큰 피해를 전한다.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전사하고 도도 다카토라가 다쳤다.

명량은 조선 수군을 살려 냈지만 전쟁을 끝내지는 못했다. 이순신은 배가 너무 적어 해협을 지키지 못하고 그날 밤 북쪽으로 물러났다. 일본 육군은 이미 남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한 뒤였고, 싸움은 일본군이 1598년 12월 부산을 떠날 때까지 1년 넘게 이어졌다. 아래에서는 사료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전투 이야기가 어떻게 불어났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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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칠천량에서 ‘열두 척’까지

명과 일본의 강화 교섭이 깨지자 일본은 1597년 다시 쳐들어왔다. 그해 초, 요시라라는 일본인 첩자가 가토 기요마사가 어느 날 바다를 건너온다는 정보를 흘렸다. 이 정보는 일본 측의 계략이었다고 전한다. 이순신은 조정의 뜻대로 출전하지 않았고, 붙잡혀 문초를 받은 뒤 도원수 권율 밑에서 벼슬 없이 종군하게 되었다. 수군은 원균이 넘겨받았다. 음력 7월 15~16일(양력 8월 27~28일), 원균의 함대는 거제도 앞 칠천량에서 기습을 받아 무너졌고, 원균도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패전에서 빠져나온 선전관 김식은 임금에게 함대가 불탔으며 경상우수사 배설 등 몇몇 장수가 겨우 빠져나왔다고 보고했다. 그는 원균과 함께 뭍에 올랐다가 일본군이 원균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았지만, 원균의 생사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배설은 전선 열두 척가량을 이끌고 빠져나왔다. 음력 8월 조정이 패전한 장수들의 처벌을 논의할 때, 배설은 아직 배를 이끌고 바다에 있었기 때문에 처벌을 뒤로 미루었다.

패전 소식을 들은 바로 그날인 음력 7월 22일(양력 9월 3일),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이순신은 음력 8월 초 진주 근처에서 임명 명령을 받았다. 그는 전라도를 거쳐 서쪽으로 가면서 흩어진 군사와 무기, 군량을 모았고, 장흥 바닷가에서 배설이 보존한 배들을 넘겨받았다. 처음 넘겨받은 배의 수는 기록마다 다르며, 뒤에 배를 더 모아 전투 무렵에는 전선 13척을 갖추었다.

조정 일부에서는 이렇게 적은 배로는 쓸모가 없다고 보았고, 이순신에게 육군에 합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조카 이분이 쓴 「행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지난 5~6년 동안 적이 전라도와 충청도로 곧장 쳐들어오지 못한 것은 수군이 길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답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열두 척이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오히려 해 볼 만합니다. …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 글이 참고한 자료에는 장계 원문이 들어 있지 않으며, 이 유명한 말은 이분의 「행록」을 통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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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벽파진: 해협 어귀에서 기다리다

땅에서는 일본군이 전라도를 휩쓸고 있었다. 일본군은 9월 하순 남원성을 함락하고, 싸우지 않고 전주를 차지했다. 바다에서는 일본 함대가 이들을 돕기 위해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갔다. 넓은 바다에서 맞설 배가 없었던 이순신은 남해에서 서해로 들어가는 길목인 명량해협 쪽으로 물러났다.

음력 8월 29일 이순신은 진도 북동쪽 끝, 해협 남동쪽 바로 앞의 벽파진으로 배를 옮겼다. 그 며칠 전 그의 일기에 따르면, 어란포 정박지로 다가온 일본 배 8척을 쫓아냈다. 음력 9월 2일(양력 10월 12일) 배설이 달아났다. 조정은 뒤에 그를 군율로 처벌하라고 요구했고, 그는 결국 붙잡혀 처형되었다. 음력 9월 7일(양력 10월 17일) 밤에는 일본 함대가 벽파진의 조선 수군을 기습했다가 격퇴되었다.

음력 9월 14일, 정탐꾼들은 일본 배 200여 척이 다가오고 있으며 그 가운데 수십 척이 이미 어란포에 들어왔다고 알렸다. 이순신은 적은 수군으로 명량을 등 뒤에 두고 싸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음력 9월 15일(양력 10월 25일), 그는 해협을 지나 그 북서쪽 끝 육지에 있는 전라우수영으로 진을 옮겼다.

그날 저녁, 일기에 따르면 그는 장수들을 불러 모아 병법을 인용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 그리고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자는 군율로 다스리겠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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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음력 9월 16일: 해협의 전투

16일 이른 아침, 정탐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본 배가 명량을 지나 조선 수군의 진 쪽으로 오고 있다고 알렸다. 이순신은 배를 이끌고 나가 맞섰다. 그는 조정에 올린 보고에서 적선 130여 척이 이진포 앞바다에서 왔다고 적었고, 일기에는 133척으로 적었다. 도도 가문의 각서는 큰 배로는 이 급류를 내려가기 어려워 큰 아타케부네 대신 중형선인 세키부네를 모아 공격에 나섰다고 전한다.

일본 배들이 조선 배들을 에워쌌고, 처음에는 이순신의 대장선이 거의 홀로 화포와 활로 맞서 싸웠다. 다른 배들은 뒤로 물러나 있었다. 일기에 따르면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순신은 깃발을 올려 장수들을 불렀다. 거제현령 안위가 가까이 오자 이순신은 일기에 적힌 대로 이렇게 외쳤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살 것 같으냐?” 안위는 적진으로 돌진했고, 그의 배에 일본군이 몰려들었다. 이순신은 대장선을 몰고 가 이들을 물리치는 것을 도왔다.

조선의 두 기록은 ‘마다시’라는 일본 장수를 서로 다르게 전한다. 이순신의 보고에 따르면 붉은 깃발과 푸른 장막을 두른 큰 일본 배 한 척이 공격을 지휘했는데, 조선에 항복한 일본인이 이 배를 가리켜 “안골포의 적장 마다시”의 배라고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일기를 따라, 이순신의 배에 타고 있던 항왜 준사가 물에 떠 있던 무늬 놓은 옷을 입은 자를 마다시로 알아보았고, 그를 갈고리로 끌어올려 목을 베어 높이 내걸자 일본군의 사기가 꺾였다고 적는다. 이순신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 수군은 먼저 화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뜨렸고, 송여종과 정응두가 싸움에 가세하자 11척을 더 깨뜨렸다. 일기는 모두 31척으로 적는다. 일본 함대는 물러갔다. 이순신은 일기에 “이것은 실로 천행이다(此實天幸)”라고 적었다.

이순신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배는 한 척도 잃지 않았고, 대장선에서 2명이 전사하고 3명이 다쳤다. 일기는 안위의 배에서 격군 7~8명이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쳤다고도 적지만, 이들이 살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순신은 싸운 자리에 머물고 싶었지만, 물살이 험하고 바람이 거슬렀으며 배도 적었기 때문에 그날 밤 북쪽의 당사도로 옮겨 갔다. 일본 측 기록 하나는 싸움이 진시(오전 7~9시 무렵)부터 유시(오후 5~7시 무렵)까지 이어졌다고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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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울돌목: 해협과 조류

명량해협은 한국 바닷가에서 가장 좁고 물살이 빠른 물길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가장 좁은 곳의 폭은 293m, 수심은 약 19m이며, 사리 때 유속은 11.5노트(시속 20km 이상)에 이른다. 울돌목이라는 이름은 바닷목이 우는 것 같은 물소리에서 나왔다. 밀물은 북서쪽으로, 썰물은 남동쪽으로 흐르며, 하루에 네 번쯤 물살이 멈췄다가 방향을 바꾼다.

이른 시기의 기록들도 이미 전투를 물살과 연결하지만, 그 방식은 서로 다르다. 전쟁 뒤에 쓰인 유성룡의 『징비록』은 이순신이 대포를 실은 배 12척으로 “조수를 타고” 물살을 따라 공격했다고 적는다. 1688년에 세운 명량대첩비는 조수가 한창 세찼으며 일본군이 그 조수를 타고 조선 배들을 덮쳐 왔다고 적는다. 『선조실록』에 인용된 이순신의 보고는 화포와 힘을 다한 싸움을 내세울 뿐 조류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일기를 요약한 자료들은 주로 싸운 자리에 머물 수 없었던 까닭을 설명하면서 험한 물살을 이야기한다.

그날의 조류를 자세히 그려 낸 것은 현대의 재현이다. 2010년 국립해양조사원은 울돌목에서 6개월 동안 관측한 유속 자료로 음력 9월 16일의 조류를 다시 계산했다. 보도는 어느 양력 날짜를 썼는지 밝히지 않는다. 보도에 따르면 그날은 사리였다. 북서쪽으로 흐르는 밀물이 오전 6시 30분쯤 시작되어 10시 10분쯤 초속 4.0m로 가장 빨랐고, 12시 21분에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썰물은 오후 2시 40분쯤 초속 2.7m로 가장 빨랐다. 변도성·이민웅·이호정이 2011년에 발표한 논문은 이런 역산 결과를 바탕으로 해전의 전개를 다시 해석했는데, 당시 흔히 쓰이던 환산인 10월 25일을 전투 날로 잡았다. 따라서 그 수치를 이 글이 따르는 10월 26일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이 견해에 따르면 남동쪽에서 온 일본 함대는 밀물을 타고 해협에 들어왔고, 정오 무렵 바뀐 물살은 일본 함대에 불리하게 흘렀다.

이런 재현은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참고서마다 세부 내용이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일본 함대가 들어올 때 조류가 거의 정조 무렵이었고, 조류가 남동류로 바뀌자 일본 함대가 이순신의 배를 에워싸려 했다고 적는다. 역산은 해안 모습이 바뀐 물길에서 얻은 현대 관측값에 기대며, 날짜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조석은 하루에 50분쯤씩 늦어지므로, 조선 기록 사이의 하루 차이(아래 ‘사료와 그 한계’ 참고)도 결과에 영향을 준다. 조류는 작은 함대가 해협 북쪽 끝을 지키기에 왜 유리했는지 설명해 주지만, 시간대별 전투 경과는 여전히 재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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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일본 측에서 본 명량

1597년 전역에서 일본군은 먼저 남쪽 지방, 특히 첫 침략 때 피해가 덜했던 전라도를 공격했다. 칠천량 이후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루시마 미치후사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은 육군을 돕기 위해 전라도 바닷가를 따라 서쪽으로 나아갔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육지에서도 싸웠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구루시마는 남원성 공격에 600명을 이끌고 참가했다.

이 전투에 관한 일본 측 기록은 주로 지휘관 가문의 기록이며, 여기서는 일본어·영어 위키백과의 요약을 통해 살펴본다. 도도 가문의 『도도가 각서(藤堂家覚書)』는 큰 배로는 급류를 내려가기 어려워 세키부네를 모아 공격에 나섰다고 적는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그 수를 수십 척으로 적는다. 이 요약들에 따르면 『도도가 각서』와 도도 다카토라의 기록인 『고잔코 실록(高山公実録)』은,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전사했고, 도도 가문의 중신 가운데 절반 넘게 다치거나 죽었으며, 도도 자신도 다쳤다. 함대에 감찰역으로 따라온 모리 다카마사는 조선 배와 맞붙어 싸우다 바다에 빠졌고, 도도 가문의 가신 두 사람이 그를 건져 냈다. 모리 가문의 문서 하나는 조선 수군의 뒤쪽에 작은 배 수백 척이 모여 있었다고 적는다.

구루시마 미치후사(1561–1597)는 세토 내해의 해상 세력인 무라카미 가문의 한 갈래, 구루시마 가문 출신이다. 158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편으로 돌아섰고, 1585년 이요국(시코쿠) 1만 4천 석의 다이묘가 되었으며, 첫 침략 때 땅과 바다에서 싸웠다. 명량에서는 선봉을 이끌고 해협에 뛰어들었다가 전사했다. 나이는 세는 나이로 37세였다. 둘째 아들 나가치카가 뒤를 이었다.

이순신의 군사가 물에서 끌어올린 장수 ‘마다시’가 바로 구루시마였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이순신의 보고는 그를 “안골포의 적장 마다시”라고 부르며, 한국어 위키백과 등은 그를 구루시마로 본다. 그러나 이 신원 확인은 조선 기록의 이름과 일본 기록의 전사자를 짝지은 추정이며, 이미 조선에 항복한 일본인이 전투 도중 알아본 것에 기대고 있다. 또 ‘마다시’라는 이름은 같은 해 앞선 조선 기록에도 부산에 있던 일본인의 이름으로 나온다.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이 문제를 결론 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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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전투 뒤: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

이순신은 해협에 머물지 않았다. 당사도에서 밤을 보낸 뒤 그는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음력 9월 21일까지 지금의 군산 앞바다 고군산도에 이르렀고, 가는 길에 칠천량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모았다. 음력 10월 남쪽으로 돌아와 보니 우수영은 일본군에게 불타 있었고, 그는 겨울 동안 힘을 다시 길렀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1598년 초 고금도에 자리를 잡을 무렵 이순신의 군사는 8천여 명이었다. 그는 피란선들에 쌀을 받고 해로통행첩을 내주어 열흘 만에 군량 1만여 석을 모았고, 대포를 만들고 배를 지었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떠난 뒤 해협을 지나 겨울이 오기 전까지 전라도 서해안을 노략했다. 음력 9월 23일에는 학자 강항이 바다에서 도도의 수군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군에게서 도망쳐 온 조선 군사 한 사람은 1598년 초 관리들에게, 자기가 따르던 일본 장수의 함대가 우수영 앞바다에서 통제사와 싸워 절반이 죽거나 다쳤으며, 그 뒤 무안에 배를 대고 며칠 동안 불태우고 노략한 다음 순천으로 돌아갔다고 진술했다. 겨울이 오기 전 일본 함대는 남해안으로 물러났다.

땅에서는 일본군이 이미 돌아선 뒤였다. 남원과 전주를 차지한 일본군은 충청도로 올라갔고, 일부는 경기도 남쪽 끝까지 들어왔다. 10월 중순(양력) 명군이 직산에서 구로다 나가마사의 선봉과 맞부딪쳤다. 그 뒤 일본군은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명량 해전 이전인 음력 9월 15일 자 『선조실록』 기사에는, 일본군이 갑자기 물러났다는 보고를 두고 선조와 신하들이 밤늦게까지 그 까닭을 헤아리는 장면이 실려 있다. 따라서 육군의 철수는 해전보다 먼저 시작되었으며, 명량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 겨울 동안 일본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의 성들을 지키고 새로 쌓았다.

명량은 이순신 개인에게도 큰 대가를 남겼다. 음력 10월 그는 막내아들 이면이 아산 집을 습격한 일본군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1598년 진린이 이끄는 명 수군이 고금도에서 이순신과 합류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9월에 죽자 일본군은 철수를 준비했다. 1598년 12월 16일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은 일본 함대를 공격하다 전사했고, 12월 하순 마지막 일본군이 부산을 떠나면서 전쟁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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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1597년

일본에서 두 번째 침략의 해는 나라 안의 박해로 시작되었다. 1597년 2월 5일, 유럽과 멕시코 출신 프란치스코회 선교사와 일본인 신자들을 포함한 가톨릭 신자 26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나가사키 언덕에서 십자가형을 당했다. 조선에 다시 군대를 보낸 바로 그 통치자였다.

유럽에서는 1597년 10월 에스파냐가 잉글랜드를 향해 세 번째 무적함대를 보냈다. 함대는 라코루냐를 떠났다가 10월 하순 상륙하기도 전에 폭풍에 흩어졌고, 지휘관들은 남은 배들에게 흩어지라고 명령했다. 같은 해 런던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음 인쇄되었다.

이 사건들은 조선의 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란히 놓아 보면, 1597년이 지구 반대편에서도 날씨와 바다가 또 하나의 해상 원정을 좌우한 해였고, 히데요시의 일본에서 기독교 선교에 대한 적대가 이어지고 있던 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33][34][35]

중급

쇠사슬, 피란선, 그 밖의 이야기들

명량에 관한 가장 유명한 전설은 이순신이 해협에 쇠사슬을 가로질러 걸어 두었다가 팽팽하게 당겨 일본 배를 걸려 뒤집히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전투를 적은 이순신의 일기에는 해협에 쇠사슬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없고, 『선조실록』에 인용된 그의 보고에도 없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이 이야기가 뒷날 김억추 집안의 기록인 『현무공실기』에서 나왔다고 설명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전해지는’ 이야기로만 소개하고,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은 관련 연구상 사실이 아니라고 밝힌다. 후대의 전설로 보는 것이 옳다.

피란선 이야기는 근거가 더 탄탄하다. 『징비록』은 배를 타고 바다로 피란했던 사람들이 이순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들었고, 이순신이 이들을 함대 뒤에 두어 “형세를 돕게” 했다고 적는다. 1688년 명량대첩비는 피란선 100여 척을 바다에 벌려 세워 멀리서 전선처럼 보이게 했다고 적고, 일본 모리 가문의 문서도 조선 수군 뒤쪽에 작은 배 수백 척이 있었다고 말한다. 숫자와 목적은 기록마다 다르지만, 함대 뒤에 민간 배들이 있었다는 내용은 여러 이른 기록에 나온다.

대중적인 이야기에는 사료가 뒷받침하지 않는 내용도 섞인다. 명량에는 거북선이 참전하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열두 척’과 전투의 ‘열세 척’은 둘 다 맞다. 앞의 것은 조정이 수군을 없애려 할 때 이순신이 말한 숫자이고, 뒤의 것은 실제로 싸운 숫자이다.

숫자에서도 전설이 자랐다. 이순신 자신이 적은 일본 배는 133척 또는 ‘130여 척’이지만, 후대 저작에는 330척이나 그 이상, 어떤 기록에는 훨씬 큰 숫자가 나온다(‘배와 피해 헤아리기’ 참고). 전투에서 멀어진 기록일수록 일본 함대가 커지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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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명량을 기억하는 방식

전쟁이 끝난 뒤 이순신은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88년 전라우수사 박신주는 해협 가의 우수영에 명량대첩비를 세웠다. 비문은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글씨는 이정영이 썼으며, 전서체 제목은 김만중이 썼다. 비문은 명량의 승리를 이순신의 전공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기리고, 세찬 조수와 피란선을 이용한 위장을 묘사하며, 좁은 명량 어귀를 노래한 사(詞)로 끝난다. 일제강점기에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졌으며, 광복 뒤인 1947년 해남 바닷가에 다시 세워졌다가 2011년 원래 세웠던 자리로 옮겨졌다. 1969년 보물(제503호)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이 전투는 해협 양쪽에서 기억된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와 해남군·진도군이 함께 여는 명량대첩축제는 해마다 해전을 재현하며, 해남과 진도가 번갈아 주 행사장을 맡는다. 2026년 축제는 9월 11~13일에 열렸다.

대중문화에서 이 전투는 김한민 감독의 영화 「명량」(2014년 7월 30일 개봉)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최민식이 이순신을, 류승룡이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연기했다. 관객 1,760만 명을 모아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많은 관객이 본 영화가 되었다. 영화는 구루시마의 개인적 복수심 같은 창작을 역사와 섞었다. 김한민 감독은 뒤에 「한산: 용의 출현」(2022)과 「노량: 죽음의 바다」(2023)를 만들었다.

명량은 한국만의 기억이 아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조선총독부와 옛 일본 해군이 펴낸 책들도 이미 이 전투를 조선의 승리로 서술했으며, 현대 일본 역사가들도 대부분 같은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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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배와 피해 헤아리기: 사료는 무엇을 말하나

조선 쪽은 비교적 셈하기 쉽다. 이순신의 보고는 전선 13척과 탐망선 32척을 적는다. 탐망선은 작은 배로, 전투에는 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징비록』은 유명한 장계와 같은 12척으로 적는다. 전투에 참가한 병사 수는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알 수 없다. 『징비록』은 이순신이 고금도로 옮길 무렵 군사가 8천여 명이었다고만 적는다.

일본 함대는 훨씬 어렵다. 『난중일기』는 공격해 온 배를 133척, 조정에 올린 보고는 ‘130여 척’으로 적는다. 『징비록』은 마다시가 200여 척을 이끌었다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은 일본 함대를 200~300여 척으로 추정하고, 그 가운데 세키부네 133척 정도만 해협에 들어왔다고 본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전사와 진형표를 인용해 선봉 수십 척, 본대 133척, 후방 200여 척, 병력 약 7,200명으로 적는다. 더 큰 숫자는 후대 저작에 나온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난중일기』 간행본의 330척을 판독 오류로 설명하고, 『이충무공전서』의 333척, 『난중잡록』의 ‘수백 척’, 『연려실기술』의 5~6백 척을 소개한다. 새뮤얼 홀리는 133~330척으로 적는다. 가장 잘 입증된 숫자는 실제로 해협에 들어온 133척 안팎이며, 근처에 있던 전체 함대의 규모는 확실하지 않다.

일본 측 피해도 불확실하다. 『선조실록』에 인용된 이순신의 보고는 먼저 화포로 20여 척, 뒤에 11척을 더 깨뜨렸고 머리 8급을 베었다고 적을 뿐 합계는 밝히지 않는다. 일기는 31척으로 적고, 현대 저작 대부분은 약 30척으로 적는다. 여기서 쓴 말은 들이받거나 포를 쏘아 ‘깨뜨렸다’는 뜻이므로, 이 배들이 모두 가라앉았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역사넷은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90여 척이 파손되었다고 덧붙인다. 뒤에 도망쳐 온 조선인 포로는 자기 장수의 군사 절반이 죽거나 다쳤다고 진술했고, 도도 가문의 기록은 가문의 장수들 사이에서 큰 피해가 났다고 적는다. 믿을 만한 일본군 전사자 총수는 없다.

조선 측 피해는 이순신 자신의 기록에서 나온다. 배 손실은 없었고, 대장선에서 2명이 전사하고 3명이 다쳤다. 일기는 안위의 배에서 격군 7~8명이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쳤다고도 적지만, 이들이 물에 빠져 죽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다른 조선 배들의 피해는 이 글이 참고한 자료에 나오지 않으며, 지휘관 자신의 보고가 자기 쪽 피해를 가장 중립적으로 전하는 증언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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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사료와 그 한계

가장 중요한 증인은 이순신 자신이다. 1597년의 『난중일기』는 둘 이상의 판본으로 전하며, 일본 배의 숫자 같은 세부 내용이 서로 다르다. 또 지휘관이 자기 전투에 대해 쓴 기록이다. 조정에 올린 그의 보고는 『선조실록』을 통해 알려져 있는데, 음력 11월 조선 정부가 명의 장수에게 보낸 자문(咨文) 안에 인용된 형태이다. 이 자문에는 목적이 있었다. 명 수군의 지원을 청하면서 “이로 인해 적선이 서해로 들어오지 못했다”고 강조했는데, 뒤이은 전라도 해안 노략을 보면 이 주장은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다른 조선 기록은 뒤에 쓰였거나 전해 들은 것이다. 유성룡의 『징비록』은 이순신을 천거한 재상이 전쟁 뒤에 쓴 책이다. 유명한 ‘열두 척’ 장계는 이순신을 존경한 조카 이분의 「행록」을 통해 알려졌고, 이 글은 1795년 『이충무공전서』에 실렸다. 1688년의 대첩비, 『현무공실기』 같은 집안 기록, 후대의 편찬물은 피란선 위장, 쇠사슬, 더 큰 일본 함대 같은 세부를 덧붙이며, 이런 세부는 사건에서 멀어질수록 늘어난다.

일본 측 사료는 도도·모리 가문 같은 집안의 기록이어서 자연히 자기 주군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며, 여기서는 주로 일본어·영어 위키백과의 요약을 통해 알려져 있다. 『선조실록』에 실린, 붙잡혔다가 도망쳐 온 조선인들의 진술은 바깥의 시각을 더해 준다. 이 글에 실린 일기 인용문은 음력 9월 15·16일 일기를 이 글에서 직접 옮긴 것이다. 어느 한 기록에 기대지 않고 성격이 다른 사료들을 나란히 놓아 볼 때 전투의 윤곽을 믿을 수 있게 된다.

날짜도 조심해야 한다. 음력 9월 16일이라는 날짜는 확실하지만, 조선 기록들은 그달의 역법을 두고 하루씩 어긋난다. 『선조수정실록』은 9월 초하루를 기축일로 적는데, 이는 1597년 10월 11일에 해당하며, 전투 날을 갑진일로 적은 『난중일기』와도 맞는다. 이 계산으로 전투는 10월 26일이다. 원래의 『선조실록』은 그달의 일진이 하루 어긋나 있어, 이를 바탕으로 한 환산은 10월 25일이 된다. 일본 역법의 날짜인 게이초 2년 9월 16일도 10월 26일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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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명량은 얼마나 중요했나

한국의 전통적 평가는 명량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로 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해전이 정유재란의 대세를 조선에 유리하게 바꾸었다고 평가하고, 우리역사넷은 일본 수군의 서해안 진출을 막고 수륙병진 전략을 실패로 돌렸으며 칠천량 이후 무너졌던 조선 수군이 다시 일어서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영어권에서는 새뮤얼 홀리가 일본 수군이 이후 황해 진출을 단념했다고 보며, 제임스 루이스가 엮은 책에 실린 해군사학자 이민웅의 글도 명량이 일본의 서진을 멈추고 조선에 수군을 재건할 시간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이런 평가에는 단서를 붙일 이유가 있다. 일본 육군은 직산에서 명군과 맞닥뜨리고 명의 증원군이 도착하는 가운데, 해전 이전에 이미 충청도에서 돌아서고 있었다. 『선조실록』은 명량 소식이 닿기도 전에 조정이 일본군의 철수를 논의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해전 뒤 해협을 떠난 것은 이순신이었고, 일본 수군은 해협을 지나 몇 주 동안 전라도 해안을 노략했다. 더 넓게 보면, 케네스 스워프는 명 측 연구에서 전쟁 속 명의 군사적 역할을 재평가하며 그 역할이 과소평가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영어 위키백과는 조선 함대가 해협을 버리고 떠났다는 이유로 명량을 일본의 전략적 성공이라고 부르는 일본 측 주장도 있다고 전하지만,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현대 일본 역사가 대부분은 조선의 결정적 승리로 본다.

그렇다면 이 전투는 무엇을 결정했을까? 이미 돌아선 육군의 작전을 멈춘 것도 아니고, 일본군을 바다에서 몰아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을 살려 냈다. 13척의 함대가 훨씬 큰 공격을 물리치고 다이묘 한 명을 죽였으며 배는 한 척도 잃지 않았다. 이어지는 몇 달 동안 이순신은 피란민과 군량, 새로 지은 배로 수천 명 규모의 수군을 다시 일으켰다. 홀리는 일본 수군이 황해 진출 구상을 단념했다고 평가하지만, 해전 직후 전라도 해안을 노략한 데서 보듯 그 바다를 곧바로 떠난 것은 아니었다. 1598년에는 명 수군과 합류한 이순신의 수군이 일본군의 성들과 귀국 바닷길을 위협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명량은 전쟁을 이긴 전투라기보다, 조선이 바다의 전쟁에서 거의 밀려날 뻔한 순간에 조선을 그 전쟁에 남겨 둔 전투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전쟁은 1년 뒤 다른 이유, 곧 히데요시의 죽음과 일본의 철수 결정으로 끝났고, 일본군은 1598년 12월 부산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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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살아남은 함대
칠천량 이후의 문제는 조선에 수군이 남느냐 마느냐였다. 명량은 작은 함대를 살려 냈고, 이순신은 이를 바탕으로 조선 수군을 다시 일으켰다.
좁은 물길의 이용
폭이 300m도 안 되는 해협에서는 큰 함대가 모든 배를 한꺼번에 쓸 수 없고, 들어온 배들을 한 무리씩 상대할 수 있었다.
조류와 시간
울돌목의 물살은 한국 바닷가에서 가장 센 편이다. 이른 기록들도 조류가 중요했다고 말하지만, 그날 물살이 바뀐 정확한 시각은 현대의 재현이다.
압박 속의 지휘
오랫동안 이순신의 대장선은 홀로 싸웠고 다른 장수들은 머뭇거렸다. 일기는 그가 군법을 내세워 장수들을 앞으로 불러낸 모습을 보여 준다.
한 전투가 결정하는 것
명량은 수군을 살렸지만 전쟁을 끝내지는 못했고, 이미 철수하기 시작한 일본 육군을 혼자서 돌려세운 것도 아니었다.
전설과 기록
쇠사슬 같은 이야기는 뒤에 생겼다. 이순신의 일기·보고를 뒷날의 비석·집안 기록과 견주어 보면 어떤 세부가 기록으로 뒷받침되는지 알 수 있다.

기록

  1. 1597년 — 연초: 일본이 전쟁을 다시 시작한다. 이순신이 붙잡혔다가 벼슬 없이 종군하게 되고, 원균이 수군을 맡는다.
  2. 1597년 — 8월 27~28일(음력 7월 15~16일):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무너진다. 배설이 이끈 전선 열두 척가량이 빠져나온다.
  3. 1597년 — 9월 3일(음력 7월 22일): 조정이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4. 1597년 — 9월 하순: 일본군이 남원성을 함락하고 전주를 차지한다.
  5. 1597년 — 음력 8월 29일: 이순신이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긴다.
  6. 1597년 — 10월 12일(음력 9월 2일): 배설이 달아난다.
  7. 1597년 — 10월 중순: 명군과 일본군이 직산에서 부딪친다. 일본 육군이 남쪽으로 돌아선다.
  8. 1597년 — 10월 25일(음력 9월 15일): 이순신이 우수영으로 진을 옮기고 장수들에게 “죽고자 하면 산다”고 말한다.
  9. 1597년 — 10월 26일(음력 9월 16일): 명량 해전.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전사한다.
  10. 1597년 — 10월 31일(음력 9월 21일): 이순신이 고군산도에 이른다.
  11. 1598년 — 연초: 이순신이 고금도에 수군 기지를 둔다. 뒤에 진린의 명 수군이 합류한다.
  12. 1598년 — 12월 16일: 노량 해전. 이순신이 전사한다. 12월 하순 마지막 일본군이 부산을 떠난다.
  13. 1688년 — 우수영에 명량대첩비가 세워진다.
  14. 2010년 — 국립해양조사원이 전투 당일의 조류를 재현한다.
  15. 2014년 — 영화 「명량」이 개봉해 한국에서 가장 많은 관객이 본 영화가 된다.

용어 풀이

울돌목
명량해협의 우리말 이름. 물살 소리가 바다가 우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판옥선
이 시기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 노 젓는 군사를 보호하는 높은 갑판을 갖추고 화포를 실은 튼튼한 배였다.
세키부네와 아타케부네
일본 전함. 세키부네는 빠른 중형선, 아타케부네는 크고 무겁게 지은 대형선이다. 일본 기록은 해협에 세키부네만 들여보냈다고 적는다.
삼도수군통제사
경상·전라·충청 세 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자리. 이순신은 1597년 이 자리에 다시 임명되었다.
우수영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의 본영. 명량해협 북서쪽 끝, 지금의 해남에 있었다.
백의종군
벼슬 없이 흰옷을 입고 군대를 따라다니며 싸우는 벌. 이순신은 1597년 다시 임명되기 전 백의종군했다.
행록
한 사람의 생애와 행적을 적은 기록으로, 흔히 가족이 썼다. 조카 이분의 「행록」에 ‘열두 척’ 말이 전한다.
사리와 정조
사리는 한 달 가운데 조차와 조류가 가장 큰 때이고, 정조는 물살이 방향을 바꾸면서 잠시 멈추는 때이다.
역산(후측)
현대의 관측값과 모형으로 수백 년 전 어느 날의 조류 같은 과거 상태를 거꾸로 계산하는 일.
음력(태음태양력)
조선과 일본이 쓴 역법. 달의 차고 기욺에 따라 달을 나누고, 이따금 윤달을 넣어 태양의 해와 맞춘다. 서양 달력(양력)으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묻고 답하기

열두 척인가, 열세 척인가?

둘 다 맞다. 조정이 수군을 없애려 할 때 이순신은 열두 척을 말했고, 뒤에 1척이 더해져 명량에서는 전선 13척이 싸웠다.

일본 배는 몇 척이었나?

『난중일기』는 공격해 온 배를 133척, 조정에 올린 보고는 ‘130여 척’으로 적는다. 해협 밖에서 기다린 배가 더 있었을 수 있다. 후대 기록은 330척 이상으로 적지만 이런 숫자는 덜 믿을 만하다.

이순신은 해협에 쇠사슬을 걸었나?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 명량 전투를 적은 그의 일기와 보고에는 해협에 쇠사슬을 걸었다는 내용이 없고, 이 이야기는 후대 집안 기록에 나온다. 전설로 본다.

조류가 전투를 이기게 했나?

센 물살은 중요했고 이른 기록들도 이를 언급하지만, 물살이 바뀐 정확한 시각은 현대의 재현에서 나온다. 이순신 자신의 보고는 화포와 힘을 다한 싸움을 내세운다.

명량 덕분에 일본군이 한양에 가지 못했나?

명량 하나 때문은 아니다. 일본 육군은 직산에서 명군과 맞닥뜨린 뒤 이미 남쪽으로 돌아섰고, 조정은 해전 이전에 일본군의 철수를 논의하고 있었다. 명량은 조선 수군을 살리고 일본 수군의 서해안 진출을 어렵게 했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누구인가?

세토 내해의 해상 세력 집안 출신 일본 다이묘이다. 일본 선봉을 이끌고 해협에 들어왔다가 전사했다. 이순신의 군사가 물에서 건져 낸 ‘마다시’가 그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0월 25일인가, 26일인가?

음력 9월 16일이라는 날짜는 확실하다. 『선조수정실록』과 『난중일기』의 역법으로 계산하면 1597년 10월 26일이고, 원래의 『선조실록』을 바탕으로 한 일부 환산은 10월 25일이 된다.

영화 「명량」은 사실과 같은가?

전투의 큰 줄기는 따르지만, 구루시마의 개인적 복수심 같은 창작 장면과 동기를 더했다. 기록물이 아니라 극영화이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조성도, 명량대첩(鳴梁大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2. 명량(鳴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순신(李舜臣).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4. 난중일기(亂中日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5. 이순신(李舜臣), 『난중일기(亂中日記)』 정유일기, 음력 9월 14~16일, 1597
  6. 이장희, 임진왜란(壬辰倭亂).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7. 명량해전,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8.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1597) 7월 22일 2번째 기사: 선전관 김식이 한산(칠천량)의 패전을 보고하다.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9.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1597) 7월 22일 5번째 기사: 조즙·이순신·권준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10.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8월 5일 4번째 기사: 도체찰사 이원익이 수군 장수들의 생사를 보고하고, 배설의 처벌을 뒤로 미루다.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11.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9월 15일 4번째 기사: 밤에 별전에서 일본군의 갑작스러운 철수를 논의하다.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12.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0월 11일 5번째 기사: 비변사가 도주한 수사 배설을 군율로 처벌하기를 청하다.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13.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1월 10일 5번째 기사: 명 제독에게 보낸 자문 — 진도 벽파정 앞바다 승전에 관한 이순신의 장계를 인용.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14.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2월 11일 4번째 기사: 일본군에게서 도망쳐 온 진해 정병 전풍상의 진술.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15. 『선조수정실록』 선조 30년(1597) 9월 1일 1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16. 朝鮮王朝實錄 / 宣祖實錄 / 三十年(『선조실록』 선조 30년 원문). 위키문헌(중국어판)
  17. 朝鮮王朝實錄 / 宣祖實錄 / 三十一年(『선조실록』 선조 31년 원문). 위키문헌(중국어판)
  18. 유성룡(柳成龍), 懲毖錄(징비록) 권2(한문 원문). 위키문헌(중국어판)
  19. 이민서 찬,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판독, 해남 명량대첩비(판독문). 위키문헌(한국어판)
  20. 이우태·국립문화유산연구원 역, 해남 명량대첩비/해석. 위키문헌(한국어판)
  21. 이동훈, 명량해전 울돌목 조류 재현된다. 뉴스핌, 2010
  22. 변도성·이민웅·이호정, 명량해전 당일 울돌목 조류·조석 재현을 통한 해전 전개 재해석, 『한국군사과학기술학회지』 14(2): 189–197. 한국군사과학기술학회, 2011
  23. Battle of Myeongnyang. 위키백과(영어판)
  24. 명량 해전. 위키백과(한국어판)
  25. 鳴梁海戦. 위키백과(일본어판)
  26. 来島通総. 위키백과(일본어판)
  27. The Admiral: Roaring Currents. 위키백과(영어판)
  28. 울돌목에 되살아난 430년 전 명량의 함성…호국의 바다를 깨우다. 머니투데이방송(MTN), 2026
  29. 새뮤얼 홀리(Samuel Hawley), The Imjin War: Japan’s Sixteenth-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quer China.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2005
  30. 제임스 루이스(James B. Lewis) 엮음, The East Asian War, 1592–1598: International Relations, Violence and Memory(이민웅, “The role of the Chosŏn navy and major naval battles during the Imjin Waeran”, 120–140쪽 수록). Routledge, 2015
  31. 케네스 스워프(Kenneth M. Swope), A Dragon’s Head and a Serpent’s Tail: Ming China and the First Great East Asian War, 1592–1598.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2009
  32. 음양력 변환 계산. 한국천문연구원
  33. 26 Martyrs of Japan. 위키백과(영어판)
  34. 3rd Spanish Armada. 위키백과(영어판)
  35. Romeo and Juliet. 위키백과(영어판)
  36. 이분(李芬, 이순신의 조카), 「행록(行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권9. 정조 명으로 간행, 1795
  37. 해남 명량대첩비.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
  38. 2026 프로그램 소개. 명량대첩축제, 2026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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