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Πελοποννησιακὸς πόλεμος

기원전 431–404년 ·

한 문장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은 바다의 제국을 거느린 아테네와 스파르타 및 그 동맹국들이 27년 동안 벌인 길고 참혹한 전쟁으로, 아테네의 패배와 그리스 세계 전체의 소진으로 끝났습니다.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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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2,400년 전 그리스는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어요. 저마다 정부와 군대와 법을 가진 작은 도시국가 수백 개로 이루어져 있었지요. 그중 가장 강한 두 나라가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는데, 둘은 성격이 아주 달랐어요. 아테네는 배와 무역과 연극을 좋아하고, 평범한 시민들이 민회에 모여 큰일을 투표로 정하는 북적이는 항구 도시였어요. 스파르타는 어릴 때부터 훈련받은 강인한 군인들의 도시였고, 자유가 없는 많은 사람을 부리며 살았어요.

그리스 사람들이 힘을 합쳐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친 뒤, 아테네는 섬과 바닷가 도시들의 큰 모임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아테네는 그 도시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해마다 돈을 내게 했어요. 스파르타와 친구 나라들은 아테네가 너무 강해질까 봐 겁이 났어요. 기원전 431년, 두 편은 결국 전쟁을 시작했어요.

전쟁은 27년이나 이어졌어요. 아기가 어른이 될 만큼 긴 시간이지요. 스파르타 군대는 아테네의 시골로 쳐들어가 밭과 집을 불태웠어요. 아테네 사람들은 긴 성벽 안에 숨고 대신 해군으로 싸웠어요. 그러다 사람들로 꽉 찬 아테네에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지도자 페리클레스도 그 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잠깐 평화가 찾아왔지만, 아테네는 큰 실수를 저질렀어요. 멀리 떨어진 시칠리아섬을 공격하려고 거대한 함대를 보낸 거예요. 군대는 거의 모두 목숨을 잃거나 붙잡혔어요. 나중에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옛 적이던 페르시아에게서 돈을 받아 해군을 만들고 아테네 함대를 무찔렀어요.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항복했어요.

우리가 이 전쟁을 이렇게 자세히 아는 것은 투키디데스라는 아테네 장군이 역사책을 썼기 때문이에요. 그는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려고 무척 애썼어요.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전쟁이 왜 일어나고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 알고 싶을 때 그의 책을 읽어요.

한눈에 보기

기간
기원전 431–404년(27년. 기원전 421년부터 414년 무렵까지는 형식상 평화 기간)
무대
그리스 본토, 에게해의 섬과 해안, 소아시아(오늘날 튀르키예 서부),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
주요 세력
아테네와 그 제국(델로스 동맹) 대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코린토스·테베·메가라 등). 뒤에 시라쿠사와 페르시아가 스파르타를 도왔다
주요 인물
페리클레스, 클레온,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아테네) / 아르키다모스 2세, 브라시다스, 리산드로스(스파르타) / 길리포스(시라쿠사에 파견된 스파르타 장군)
국면
아르키다모스 전쟁(431–421), 니키아스 평화(421), 시칠리아 원정(415–413), 데켈레이아 전쟁 또는 이오니아 전쟁(413–404)
결과
기원전 404년 아테네 항복. 성벽이 헐리고 함대가 12척으로 줄었으며 제국이 해체되었다
핵심 사료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기원전 411년에서 중단), 크세노폰 『헬레니카』가 뒤를 잇는다

쉬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란?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아테네와 스파르타, 그리고 각각의 동맹국들이 벌인 전쟁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 대부분이 자리한 그리스 남부의 큰 반도 펠로폰네소스에서 온 이름이어서, 아테네 쪽의 시각이 담겨 있습니다. 아테네인에게 이 전쟁은 ‘펠로폰네소스인들과의 전쟁’이었습니다.

하나의 연속된 원정이 아니라 전쟁과 휴전과 반란이 이어진 연쇄였습니다. 전선은 흑해로 가는 해협에서 시칠리아까지 뻗었고, 거의 모든 그리스 공동체가 어떤 식으로든 휘말렸습니다. 육지와 바다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도시들이 포위되고 굶주렸으며 때로는 파괴되었습니다. 많은 도시 안에서는 민주파와 과두파가 각각 아테네와 스파르타 편을 들며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이 중요한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파르테논 신전이 세워지고 비극과 철학이 꽃핀 아테네 전성기에 막을 내렸습니다. 두 강대국의 경쟁이 어떻게 한 지역 전체를 끌어들이는지 보여 줍니다. 그리고 최초의 비판적 역사서 가운데 하나인 투키디데스의 기록을 낳았는데, 이 책은 지금도 역사가·정치학자·군인들이 읽습니다.

[3][2][4][1]

쉬움

배경: 전혀 다른 두 강국

기원전 480–479년 페르시아의 침공을 물리친 뒤, 아테네는 기원전 478년 에게해 도시들을 묶어 해군 동맹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델로스 동맹이라 부르는 이 동맹에서 회원국은 배를 내거나 해마다 포로스(공납금)라는 돈을 냈습니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아테네는 동맹을 제국으로 바꾸어 갔습니다. 금고를 델로스에서 아테네로 옮기고(전통적으로 기원전 454년), 탈퇴하려는 도시를 응징하고, 동맹국 땅에 아테네 이주민을 심고, 공납금 일부를 자기 도시의 건축 사업에 썼습니다.

스파르타는 느슨한 육상 동맹인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이끌었습니다. 스파르타 시민은 전업 군인이었고, 그 생활은 라코니아와 메세니아에서 시민보다 훨씬 많은 수로 노동하던 예속민 헤일로타이(헬롯)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스파르타는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긴 전쟁을 꺼렸습니다.

기원전 446/445년 두 진영은 서로의 세력권을 인정하는 30년 평화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는 큰 함대와 공납 수입을 가진 민주정이었고, 스파르타는 그리스 최강의 보병을 가진 과두정 군사 사회였습니다. 양쪽은 서로의 야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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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원인: 분쟁, 결의, 그리고 ‘가장 참된 원인’

투키디데스는 표면의 불만과 깊은 원인을 구분합니다. 불만은 스파르타의 유력한 동맹국 코린토스가 얽힌 분쟁에서 나왔습니다. 기원전 433년 아테네는 모도시(母都市) 코린토스와 전쟁 중이던 케르키라(코르푸)와 방어 동맹을 맺었고, 아테네 함선이 시보타 해전에 참여했습니다. 기원전 432년에는 제국에 속하면서도 코린토스와 연고가 깊던 북부 에게해의 포테이다이아가 반란을 일으키자 아테네가 이를 포위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아테네는 메가라 사람들을 제국의 항구와 아테네 시장에서 쫓아내는 메가라 결의를 통과시켰습니다.

기원전 432년 스파르타에서 열린 회의에서 코린토스 등은 아테네가 평화를 깼다고 고발했고, 스파르타 민회는 조약이 깨졌다고 결의했습니다. 페리클레스가 이끄는 아테네는 메가라 결의를 철회하고 포테이다이아에서 물러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대신 중재를 제안했습니다.

투키디데스의 유명한 판단은 “가장 참되지만 가장 적게 말해진 원인”이 아테네 세력의 성장과 그것이 스파르타에 불러일으킨 두려움이었으며, 이것이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1.23). 이 문장이 이후의 모든 논쟁을 규정했습니다. 이를 받아들이는 역사가도 있지만, 케르키라 동맹이나 메가라 결의 철회 거부 같은 구체적 결정이 전쟁을 그 시점에 일으켰을 뿐 전쟁이 필연은 아니었다고 보는 역사가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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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첫 국면: 아르키다모스 전쟁(기원전 431–421년)

전쟁은 기원전 431년 테베가 아테네의 동맹 플라타이아를 기습하고,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 2세가 아티카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국면의 이름은 그에게서 왔습니다. 페리클레스의 전략은 육상 결전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농촌 주민은 아테네 성벽과, 아테네와 외항 페이라이에우스를 잇는 장벽(長壁) 안으로 들어오고, 함대는 펠로폰네소스를 습격하면서 곡물과 공납금이 계속 들어오게 했습니다. 스파르타는 거의 해마다 쳐들어와 곡식과 농가를 파괴했습니다.

기원전 430년 사람들로 가득 찬 도시에 역병이 돌았습니다. 자신도 병에 걸렸다가 살아난 투키디데스는 증상과 함께 사회적·종교적 규범이 무너지는 모습을 생생하게 적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29년 이 병으로 죽었습니다. 투키디데스는 중장보병 4,400명 이상과 기병 300명이 죽었다고 하면서, 그 밖의 사망자 수는 알아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3.87). 전체 사망자에 대한 현대의 추정은 편차가 크며 흔히 인구의 4분의 1에서 3분의 1 정도로 봅니다. 병의 정체(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천연두 등이 제시되었다)도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페리클레스 이후에는 클레온 같은 더 공격적인 지도자들이 나섰습니다. 이 시기에는 잔혹한 사건이 이어졌습니다. 기원전 427년 아테네는 반란을 일으킨 미틸레네의 성인 남성을 모두 죽일지를 두고 논쟁했고(두 번째 투표로 명령이 가까스로 취소되었다), 스파르타는 항복한 플라타이아 수비대를 처형했으며, 케르키라에서는 참혹한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투키디데스는 케르키라를 통해 전쟁이 말과 도덕을 어떻게 타락시키는지 보여 줍니다. 기원전 425년 아테네군은 필로스 앞 스팍테리아섬에 스파르타 병사들을 가두고, 포로 가운데 스파르타 정규 시민(스파르티아타이) 약 120명을 사로잡아 그리스 세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스파르타는 브라시다스를 북쪽으로 보내 기원전 424/423년 암피폴리스를 차지했고, 그 지역을 맡았던 아테네 장군 투키디데스는 이를 지키지 못한 책임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기원전 422년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모두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전쟁을 가장 강하게 밀어붙이던 두 사람이 사라지자, 양측은 기원전 421년 50년 동안 지속될 예정이던 니키아스 평화를 맺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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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불안한 평화, 멜로스, 시칠리아 원정(기원전 421–413년)

평화는 끝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재능 있고 야심 찬 젊은 아테네인 알키비아데스는 아르고스와 반(反)스파르타 동맹을 꾸렸지만, 기원전 418년 큰 육상전인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이겼습니다. 기원전 416년 아테네는 중립을 지키려던 멜로스섬을 공격했습니다. 투키디데스는 이를 극적인 토론, 곧 ‘멜로스 대화’로 그리는데, 여기서 아테네 사절은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는 겪어야 할 것을 겪는다”고 말합니다. 포위가 끝난 뒤 아테네는 성인 남성을 죽이고 여성과 아이들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공식적으로는 시라쿠사에 맞선 시칠리아의 동맹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대원정을 결의했지만, 많은 사람은 섬 정복을 꿈꾸었습니다. 투키디데스는 첫 원정군을 삼단노선 134척과 중장보병 5,100명으로 적습니다(6.43). 출항 직전 도시의 헤르메스 주상(柱像)들이 훼손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세 사령관 중 하나인 알키비아데스는 비밀 의식을 조롱했다는 고발을 당했습니다. 재판을 받으러 소환되던 그는 달아나 스파르타로 넘어갔고, 시라쿠사에 원군을 보내고 아티카에 요새를 세우라고 조언했습니다.

시라쿠사 포위는 실패했습니다. 스파르타 장군 길리포스가 방어를 조직했고, 기원전 413년 데모스테네스가 이끄는 아테네 증원군이 도착했지만 돌파하지 못했으며, 월식 때문에 퇴각이 미뤄졌습니다. 함대는 대항(大港) 안에서 패배했고, 육로로 후퇴하던 군대는 괴멸했습니다.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는 처형되었고, 투키디데스는 포로가 약 7,000명이었으며 그중 많은 수가 시라쿠사의 채석장에서 죽었다고 전합니다(7.87). 아테네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었습니다.

[1][6]

중급

마지막 국면: 데켈레이아, 페르시아의 금, 아이고스포타모이(기원전 413–404년)

기원전 413년 스파르타는 아티카의 데켈레이아를 상시 점령했습니다. 아테네 주변에서 농사를 짓기가 거의 불가능해졌고, 에우보이아에서 오는 육상 보급로가 끊겼으며,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노예 2만 명 이상이 도망쳤는데 그중 다수가 숙련 노동자였습니다. 에게해 곳곳의 동맹국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무엇보다 스파르타는 소아시아의 페르시아 사트라프(총독)들과 협정을 맺었습니다. 페르시아 돈으로 스파르타 수병의 급료를 대고, 대신 스파르타는 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에 대한 대왕의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압박은 아테네에 정치 위기를 불렀습니다. 기원전 411년 400인 과두정이 권력을 잡았지만, 사모스의 함대는 민주정에 충성했고 기원전 410년 민주정이 회복되었습니다. 함대가 불러들인 알키비아데스는 키지코스 해전(기원전 410년) 같은 승리를 도왔으나, 기원전 406년 노티온에서 패한 뒤 다시 망명했습니다.

아테네는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이에서 큰 해전을 이겼지만, 폭풍 속에서 생존자와 전사자를 거두지 못했다는 이유로 장군 여섯 명이 불법적인 일괄 재판을 거쳐 처형되었습니다. 기원전 405년 페르시아 왕자 소(小)키루스의 넉넉한 지원을 받은 스파르타 제독 리산드로스가 헬레스폰토스의 아이고스포타모이에서 아테네 함대를 거의 통째로 붙잡았습니다. 곡물 수송로가 끊긴 아테네는 포위 속에 굶주리다 기원전 404년 항복했습니다.

[3][4][7]

중급

결과와 영향

크세노폰에 따르면 코린토스와 테베는 아테네를 파괴하고 주민을 노예로 삼자고 했지만 스파르타가 거절했습니다. 그래도 조건은 가혹했습니다. 아테네는 장벽과 페이라이에우스의 성벽을 헐고, 12척을 뺀 모든 배를 넘기고, 망명자들을 받아들이고, 외교에서 스파르타를 따라야 했습니다. 크세노폰은 사람들이 그리스 자유의 시작이라고 믿으며 피리 부는 여인들의 음악에 맞춰 성벽을 허물었다고 적었습니다.

단기적으로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소수 과두정인 30인 정권을 세웠습니다. 후대 사료에 따르면 이들은 시민과 거류 외국인을 약 1,500명 죽이고 훨씬 많은 사람을 망명길에 오르게 했습니다. 트라시불로스가 이끈 민주파 망명자들이 기원전 403년 민주정을 되살렸고, 보복을 막기 위한 사면을 선포했습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처형은 이 시절의 그늘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30인의 지도자 크리티아스나 알키비아데스처럼 그와 가까웠던 이들이 깊은 원한을 샀기 때문입니다.

장기적으로 스파르타의 패권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옛 동맹국들이 코린토스 전쟁(기원전 395–387년)에서 스파르타에 맞섰고, 기원전 387/386년 대왕의 평화로 페르시아가 소아시아 그리스 도시들을 다시 손에 넣었으며,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에서 테베가 스파르타의 힘을 꺾었습니다. 많은 역사가는 이 전쟁이 도시국가들을 크게 약화시켜 수십 년 뒤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가 이들을 지배할 수 있게 했다고 봅니다. 다만 이는 단순한 인과 사슬이라기보다 폭넓은 해석입니다.

인적 피해는 막대했고 비전투원에게 무겁게 떨어졌습니다. 아테네로 몰려든 역병 희생자,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가 된 멜로스와 스키오네 주민, 해마다 농장이 불탄 농촌 가족, 양편을 위해 노를 젓거나 일한 노예들이 그렇습니다. 믿을 만한 전체 사상자 수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7][3][4]

중급

기억: 이 전쟁은 어떻게 이야기되어 왔나

당대 아테네 작가들은 여러 형식으로 전쟁에 반응했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아카르나이 사람들』(기원전 425년)과 『리시스트라테』(기원전 411년)는 전쟁 지도자들을 조롱하며 평화를 상상합니다. 멜로스 사건 직후 상연된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아의 여인들』(기원전 415년)은 포로가 된 여인들의 고통을 보여 줍니다. 후대 아테네 연설가들은 이 전쟁을 30인 정권에 대한 교훈이자 민주정 회복을 기리는 이야기로 기억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이 전쟁은 주로 투키디데스를 통해 읽혔습니다. 토머스 홉스는 1629년 영어 번역을 펴냈고, 투키디데스는 국제정치학 ‘현실주의’ 전통의 기초 저자가 되었습니다. 냉전 시기에는 해양·상업 민주국가인 미국을 아테네에, 대륙 세력인 소련을 스파르타에 빗대는 글이 많았습니다.

최근에는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이 널리 알린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강대국이 기존 강대국에 도전할 때의 전쟁 위험, 특히 중국과 미국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쓰입니다. 중국의 지도자와 학자들은 그런 전쟁이 필연이라는 생각을 자주 부정해 왔고, 많은 고전학자는 이 비유가 투키디데스와 고대의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리스에서는 이 전쟁을 민족의 이야기라기보다 그리스인끼리 벌인 비극적 내전으로 기억합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규율과 자유라는 두 이상의 상징이 되었지만, 고대사가들은 두 이미지 모두 상당 부분 후대 찬미자들이 만든 신화라고 경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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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사료: 투키디데스와 그 밖의 기록

기원전 424년 장군을 지낸 뒤 20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한 아테네인 투키디데스는, 이 전쟁이 이제까지 가장 큰 전쟁이 되리라 예상하고 전쟁이 터지자마자 기록을 시작했습니다(1.1). 그의 방법론 서술(1.22)에 따르면 목격자 보고는 꼼꼼히 확인했고, 연설은 실제 발언의 대의에 되도록 가깝게 하면서 각 연설자가 그 상황에서 했어야 할 말을 자신이 생각한 대로 썼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연설을 속기록이 아니라 해석이 담긴 창작으로 봅니다. 책은 기원전 411년의 사건 도중에 끊기며, 이 미완성 상태 때문에 각 부분이 어떤 순서로 쓰였는지를 두고 오랜 논쟁(이른바 ‘집필 문제’)이 이어졌습니다.

크세노폰의 『헬레니카』는 기원전 411년부터 이야기를 이어 가지만 덜 체계적이고 대체로 스파르타에 호의적입니다. 이집트 옥시링코스에서 파피루스로 발견된 익명 역사가의 단편, 이른바 『옥시링코스 헬레니카』는 기원전 400년대 말과 390년대에 대한 독자적 정보를 줍니다. 디오도로스 시쿨로스(기원전 1세기)와 플루타르코스의 페리클레스·니키아스·알키비아데스·리산드로스 전기(기원후 100년 무렵)는 사라진 역사가들의 자료를 전하지만 비판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비문은 문헌 사료를 검증하는 데 꼭 필요합니다. 아테네 공납 명부는 해마다 공납금의 60분의 1을 아테나 여신에게 바친 기록이고, 기원전 425년의 재사정 결의 같은 문서는 아테네가 전쟁 중 공납금을 크게 올렸음을 보여 줍니다. 희극·비극·법정 연설은 사회사 자료가 되며, 역병과 연결되어 온 케라메이코스 묘역의 집단 매장지 같은 고고학 조사는 물질적 자료를 더합니다.

[1][5][7]

심화

역사학의 논쟁

가장 오래된 논쟁은 전쟁 책임입니다. G. E. M. 드 생크루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기원』(1972)에서 아테네보다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의 책임이 크며 메가라 결의가 무역 봉쇄로 잘못 이해되어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결의 해석은 지금도 논란거리입니다. 도널드 케이건은 1987년에 완결한 네 권짜리 역사서와 이를 한 권으로 정리한 2003년 책에서 인간의 선택을 강조하며 전쟁은 필연이 아니었다고 보았습니다. 아테네 제국주의와 그리스의 자치 이념이 양립할 수 없었다는 구조적 요인을 강조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두 번째 논쟁은 아테네 제국 자체에 관한 것입니다. 투키디데스 속 연설자들이 자주 말하듯 신민들이 미워한 참주정이었을까요, 아니면 동맹 도시의 평범한 시민 상당수는 자기 도시의 과두파보다 아테네의 보호와 민주정을 더 좋아했을까요? 기원전 413년 이후 잦은 반란과 끝까지 충성한 일부 도시는 양쪽 견해 모두의 근거가 됩니다.

세 번째 논쟁은 역사가로서의 투키디데스입니다. 고대부터 정확성으로 칭송받은 그는 과학적 역사가로도, 사건을 도덕적 이야기로 빚은 비극 작가로도, 정치 이론가로도 읽혀 왔습니다. 학자들은 페르시아 외교와 경제 문제를 상대적으로 적게 다룬 점 같은 그의 침묵, 그리고 암피폴리스 전투에 그 자신이 연루되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현대적 해석이 나오자 고전학자들은 두려움과 힘에 관한 그의 유명한 문장이 한 전쟁에 대한 판단이지 보편 법칙이 아니라고 강조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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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전투 (25)

  1. 포티다이아 전투기원전 432년
  2. 플라타이아이 전투 (기원전 430년)기원전 431년
  3. 나우팍투스 해전기원전 429년
  4. 스파르톨로스 전투기원전 429년
  5. 리온 해전기원전 429년
  6. 플라타이아이 공성전기원전 429–427년
  7. 올파이 전투기원전 426년
  8. 스팍테리아 전투기원전 425년
  9. 필로스 해전기원전 425년
  10. 델리온 전투기원전 424년
  11. 암피폴리스 전투기원전 422년
  12. 만티네이아 전투기원전 418년
  13. 시켈리아 원정기원전 415–413년
  14. 멜로스의 대화기원전 415년
  15. 헤르마이 훼손 사건기원전 415년
  16. 시라쿠사 공방전기원전 415–413년
  17. 키노세마 해전기원전 411년
  18. 키지코스 해전기원전 410년
  19. 칼케돈 공방전기원전 409–408년
  20. 비잔티온 공방전기원전 408년
  21. 안드로스 공성전기원전 408–406년
  22. 아르기누사이 해전기원전 406년
  23. 노티온 해전기원전 406년
  24.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기원전 405년
  25. 아테네 공방전기원전 404년

핵심 개념

해양 세력 대 대륙 세력
아테네는 해군·성벽·공납에, 스파르타는 보병에 기댔다. 스파르타가 페르시아 돈으로 함대를 얻기 전까지 어느 쪽도 상대를 쉽게 꺾지 못했다.
제국과 자치
아테네는 반페르시아 동맹을 제국으로 바꾸었고, 이는 각 도시가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는 그리스의 이상과 충돌했다.
‘가장 참된 원인’
표면의 불만과 달리 아테네의 성장과 스파르타의 두려움이 전쟁을 피할 수 없게 했다는 투키디데스의 주장.
스타시스(내분)
민주파는 아테네를, 과두파는 스파르타를 바라보면서 전쟁이 도시 내부의 내전을 부추겼다.
‘난폭한 교사’로서의 전쟁
전쟁이 일상을 빼앗고 인간의 가장 나쁜 본능을 끌어낸다는 투키디데스의 통찰. 역병, 케르키라, 멜로스 서술에 드러난다.
페르시아의 개입
마지막 국면에서 스파르타에 준 페르시아의 자금이 승부를 가르고, 페르시아가 아시아 그리스 도시들에 대한 영향력을 되찾게 했다.
역사 서술의 방법
증거를 비판적으로 다루고 연설 서술 방식을 성찰한 투키디데스의 작업은 후대 역사가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기록

  1. 약 기원전 446년 —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30년 평화 조약을 맺다(기원전 446/445년).
  2. 기원전 433년 — 아테네가 케르키라와 동맹, 시보타 해전. 이어 포테이다이아 반란과 메가라 결의(기원전 433–432년).
  3. 기원전 431년 — 테베의 플라타이아 기습과 스파르타의 첫 아티카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되다(기원전 431년).
  4. 기원전 430년 — 아테네에 역병이 돌다(기원전 430년). 이듬해 페리클레스가 이 병으로 죽다.
  5. 기원전 425년 — 아테네군이 필로스 앞 스팍테리아에서 스파르타군을 사로잡다(기원전 425년).
  6. 기원전 421년 —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암피폴리스에서 전사한 뒤 니키아스 평화가 맺어지다(기원전 421년).
  7. 기원전 416년 — 아테네가 멜로스를 포위해 파괴하다(기원전 416년).
  8. 기원전 415년 — 시칠리아 원정대 출항,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로 넘어가다(기원전 415년).
  9. 기원전 413년 — 아테네 원정군이 시라쿠사에서 궤멸하고 스파르타가 데켈레이아를 점령하다(기원전 413년).
  10. 기원전 411년 — 아테네에서 400인 과두정 쿠데타(기원전 411년). 투키디데스의 서술이 끊기다.
  11. 기원전 405년 — 리산드로스가 아이고스포타모이에서 아테네 함대를 격파하다(기원전 405년).
  12. 기원전 404년 — 아테네 항복(기원전 404년)과 30인 정권 수립, 기원전 403년 민주정 회복.

용어 풀이

폴리스(도시국가)
도시와 그 주변 땅으로 이루어져 독자적 정부를 가진 그리스의 독립 공동체.
델로스 동맹
기원전 478년부터 아테네가 이끈 동맹. 뒤에 아테네 제국이 되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
스파르타가 코린토스·메가라·테베 등 주로 펠로폰네소스의 나라들과 맺은 동맹.
삼단노선(트리에레스)
노잡이 약 170명이 세 층으로 앉아 젓는 빠른 전함. 그리스 해군의 주력 무기.
중장보병(호플리테스)
무거운 무장을 하고 팔랑크스라는 밀집 대형으로 싸운 그리스 보병.
헤일로타이(헬롯)
라코니아와 메세니아에서 스파르타 시민을 위해 농사지은 예속민.
포로스(공납금)
델로스 동맹의 회원국이 해마다 아테네에 낸 돈.
과두정
부유하거나 귀족인 소수 시민의 통치. 그리스 정치 논쟁에서 민주정의 반대편.
장벽(長壁)
아테네와 외항 페이라이에우스를 잇는 성벽. 포위 중에도 바다로 보급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사트라프
페르시아 제국 속주의 총독.

묻고 답하기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왜 싸웠나요?

케르키라, 포테이다이아, 메가라 같은 동맹국 문제로 다투었지만, 투키디데스는 더 깊은 이유가 아테네가 너무 강해진다는 스파르타의 두려움이었다고 보았습니다.

누가 이겼나요?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이 페르시아 돈의 도움을 받아 이겼습니다. 아테네는 함대·성벽·제국을 잃었지만 1년 만에 민주정을 되찾았습니다.

아테네 역병은 무엇이었나요?

기원전 430년 사람들로 붐비던 도시를 덮쳐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많은 인구를 앗아 간 전염병입니다. 어떤 병이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시칠리아 원정은 왜 그렇게 큰 재앙이 되었나요?

잘 알지 못하는 먼 곳의 큰 도시를 향해 거대한 병력을 보냈고, 사령관 한 명이 적에게 넘어갔으며, 퇴각을 미루다 기원전 413년 군대와 함대를 거의 모두 잃었기 때문입니다.

투키디데스는 믿을 만한가요?

대체로 신중하고 정보가 풍부한 역사가로 평가받지만, 그는 전쟁에 직접 참여한 아테네인이었고 연설은 자신의 재구성이며 논지를 위해 서술을 빚었습니다. 역사가들은 비문이나 다른 저자와 대조해 읽습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무엇인가요?

떠오르는 강국과 기존 강국이 전쟁으로 치닫기 쉽다는 현대의 용어입니다. 투키디데스 1.23에서 나왔지만, 많은 학자는 한 역사가가 한 전쟁에 대해 내린 판단을 지나치게 일반화한다고 봅니다.

동맹국 사람들은 정말 아테네 제국을 미워했나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습니다. 기회만 되면 반란을 일으킨 도시도 있었지만, 어떤 도시에서는 평민들이 지역 과두파의 지배보다 아테네가 받쳐 주는 민주정을 더 좋아한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Thucydides, The Peloponnesian War (trans. Richard Crawley, 1910). Perseus Digital Library, Tufts University
  2. 펠로폰네소스 전쟁. 위키백과
  3. Peloponnesian War. Wikipedia
  4. Peloponnesian War. World History Encyclopedia
  5. Thucydides. Wikipedia
  6. Sicilian Expedition. Wikipedia
  7. Hellenica (Xenophon). Wikipedia
  8. Thucydides Trap. Wikipedia
  9. G. E. M. de Ste. Croix, The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Duckworth, 1972
  10. Donald Kagan, The Peloponnesian War. Viking, 2003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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