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120년 전,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두 큰 제국이 모두 한국과 중국 동북쪽의 넓은 땅인 만주를 차지하고 싶어 했어요. 러시아는 그곳에 철도와 해군 항구를 만들었고, 일본은 러시아가 너무 가까이 다가온다고 느꼈어요.
1904년 2월, 일본 배들이 뤼순이라는 항구에 있던 러시아 군함을 밤에 기습했어요. 전쟁이 시작된 거예요. 그런데 싸움은 대부분 러시아나 일본이 아니라 한국과 만주, 그리고 그 근처 바다에서 벌어졌어요.
전투는 아주 크고 끔찍했어요. 병사들은 참호를 파고 기관총을 쏘며 언덕과 요새를 두고 몇 달씩 싸웠어요. 1905년에는 러시아 함대가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싸우러 왔지만, 일본 해군이 쓰시마섬 근처에서 벌어진 큰 해전에서 거의 모두 무찔렀어요.
일본이 이겼어요. 세계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근대에 들어 아시아 나라가 큰 전쟁에서 유럽의 강대국을 이긴 것은 처음이었거든요. 유럽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던 중국과 인도 등의 사람들은 큰 자극을 받았어요.
하지만 한국에게는 슬픈 결말이었어요. 전쟁 중과 전쟁 뒤에 일본은 한국이 다른 나라와 외교를 할 권리를 빼앗았고, 5년 뒤인 1910년에는 한국을 완전히 차지했어요.
한눈에 보기
- 기간
- 1904년 2월 8–9일(일본의 뤼순 기습, 2월 10일 선전 포고) – 1905년 9월 5일(포츠머스 조약)
- 장소
- 한반도, 남만주(랴오둥반도·랴오양·펑톈), 황해, 동해, 대한해협(쓰시마 해협), 사할린
- 교전 세력
- 일본 제국 대 러시아 제국. 대한제국과 청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그 영토가 싸움터가 됨
- 주요 인물
- 일본: 메이지 천황, 가쓰라 다로, 오야마 이와오, 노기 마레스케, 도고 헤이하치로, 고무라 주타로. 러시아: 니콜라이 2세, 쿠로팟킨, 로제스트벤스키, 비테
- 주요 전투
- 뤼순·제물포(인천) 해전, 압록강 전투, 랴오양 전투, 사허 전투, 뤼순 포위전, 펑톈 전투, 쓰시마 해전(동해 해전)
- 결과
- 일본 승리.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의 ‘탁월한’ 이익을 인정하고 랴오둥 조차권과 남만주 철도를 넘기며 사할린 남부를 할양. 배상금은 없음
- 전사·사망
- 추정치 차이 큼: 러시아군 약 4만 3천–7만 1천 명, 일본군 약 8만–9만 9천 명(병사 포함). 중국·한국 민간인 피해는 체계적으로 집계되지 않음
쉬움
러일 전쟁이란 무엇인가
러일 전쟁은 1904년 2월부터 1905년 9월까지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두 나라는 청의 동북 지방인 만주, 그리고 1897년 대한제국이 된 한국을 누가 지배하느냐를 두고 다투었다.
전쟁은 거의 전부 두 교전국의 본토 밖, 곧 한반도와 만주, 그 주변 바다에서 벌어졌다. 대한제국과 청은 모두 중립을 선언했지만, 그 땅이 싸움터가 되었고 그 백성이 큰 대가를 치렀다.
일본은 육지에서 희생이 큰 승리를 잇달아 거두었고, 1905년 5월 쓰시마 해전에서 압승했다. 두 나라 모두 지쳐 있었고,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중재로 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강화 조약이 맺어졌다. 이 결과로 일본은 강대국이 되었고 한국 지배의 걸림돌을 없앴다.
참호, 기관총, 속사포, 철조망, 기뢰, 근대식 전함이 동원되었고 여러 나라의 외교와 금융이 얽혔다는 점에서, 일부 역사학자는 이 전쟁을 제1차 세계 대전의 예고편이라는 뜻에서 ‘제0차 세계 대전(World War Zero)’이라고 부른다.
쉬움
배경: 만주와 한국을 둘러싼 경쟁
1894–95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러시아·프랑스·독일은 삼국 간섭으로 일본에게 랴오둥반도를 돌려주게 했다. 그 뒤 러시아가 바로 그 지역으로 진출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지름길로 만주를 가로지르는 동청 철도 부설권을 얻었고, 1898년에는 일본이 포기해야 했던 랴오둥반도 끝의 뤼순과 다롄을 조차했다.
1900년 의화단 운동 때 러시아는 대군을 만주에 보냈고, 그 뒤에도 철수를 미루었다. 한국에서는 1896년 명성황후 시해 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 파천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졌다. 1903년 러시아가 압록강 하구 한국 쪽의 용암포를 점거하고 조차를 시도한 용암포 사건은 일본을 더욱 긴장시켰다.
일본은 외교로 안전을 꾀했다. 1902년 영일 동맹을 맺어, 일본이 한 나라와 싸우면 영국은 중립을 지키고 다른 나라가 끼어들면 참전하기로 했다. 일본은 만주는 러시아, 한국은 일본이 차지하자는 ‘만한 교환’을 제안했으나 1903년 협상은 결렬되었다. 러시아 지도부 일부는 일본을 얕보았고, 니콜라이 2세 주변에서 ‘짧고 승리하는 전쟁’으로 국내 혁명 기운을 누르려 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대한제국은 전쟁을 피하려 했다. 1904년 1월 대한제국은 러일 간 분쟁에서 국외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선언은 무시되었다.
중급
전쟁의 경과
개전(1904년 2–5월). 1904년 2월 8–9일 밤 일본 어뢰정이 뤼순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기습해 여러 척에 피해를 입혔고, 2월 10일 정식으로 선전 포고가 이루어졌다. 거의 같은 때 일본군이 인천(제물포)에 상륙했고, 2월 9일 일본 함대가 인천항의 러시아 순양함 바랴크와 포함 코레예츠를 공격해 두 배는 승무원들이 스스로 가라앉혔다. 일본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한반도를 거쳐 북상했으며, 압록강 전투(4월 30일–5월 1일)에서 러시아군을 이기고 만주로 들어갔다.
만주와 뤼순(1904년 5월–1905년 1월). 일본군은 랴오둥반도에 상륙해 난산에서 이긴 뒤 뤼순을 포위했다. 노기 마레스케가 이끄는 제3군은 요새의 고지와 보루에 정면 돌격을 거듭하다 기관총과 포격에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12월 203고지를 점령한 뒤 일본군 공성포가 항구 안의 러시아 함대를 포격할 수 있게 되었고, 1905년 1월 2일 뤼순은 항복했다. 한편 오야마 이와오 원수가 이끄는 일본 주력군은 쿠로팟킨 장군의 러시아군과 랴오양(1904년 8–9월), 사허(1904년 10월)에서 싸웠다. 일본군은 이겼지만 러시아군을 섬멸하지는 못했고, 러시아군은 질서 있게 물러났다.
펑톈 전투(1905년 2–3월). 펑톈(선양) 전투에는 약 150km에 이르는 전선에 50만 명이 넘는 병력이 투입되어, 당시까지 역사상 가장 큰 전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몇 주에 걸친 싸움 끝에 러시아군은 북쪽으로 후퇴했다. 일본은 이겼지만 병력과 자금이 바닥나고 있었다.
쓰시마 해전(1905년 5월). 러시아는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발트 함대를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을 건너는 먼 항해에 보냈다. 항해 초기인 1904년 10월, 러시아 함대는 북해에서 영국 어선을 적함으로 오인해 포격했고(도거뱅크 사건) 영국과 전쟁 직전까지 갔다. 1905년 5월 27–28일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연합 함대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쓰시마 해협에서 러시아 함대를 맞아 대부분을 격침하거나 나포했다. 러시아 수병 수천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지만, 일본의 손실은 어뢰정 세 척뿐이었다. 한국에서는 이 해전을 ‘대한해협 해전’, 일본에서는 ‘일본해 해전’이라고도 부른다.
강화(1905년 6–9월). 재정이 한계에 이른 일본은 루스벨트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국내 혁명으로 흔들리던 러시아도 협상에 응했다. 협상을 준비하는 사이 일본은 1905년 7월 사할린을 점령해 협상력을 높였다. 9월 5일 고무라 주타로와 세르게이 비테가 포츠머스 조약에 서명했다.
중급
전쟁 속의 대한제국: 중립에서 보호국으로
한국에게 이 전쟁은 주권 상실의 결정적인 단계였다. 상륙 두 주 뒤인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에 한일 의정서를 강요했다. 일본이 군사상 필요한 곳을 마음대로 점유할 수 있고, 대한제국은 시정 개선에 관한 일본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은 휴지 조각이 되었다.
1904년 8월 제1차 한일 협약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인 재정 고문(메가타 다네타로)과 일본이 추천한 외국인 외교 고문(미국인 스티븐스)을 두어야 했다. 일본은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도 요구했으나, 보안회 등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철회했다. 일본군은 군용지를 수용하고, 경의선처럼 군수 수송을 위한 철도를 놓는 데 한국인 노동자를 강제로 동원해 마을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군사 통치 아래에서 철도나 전선을 방해한 한국인은 처형되기도 했다.
전쟁 중인 1905년 2월, 일본은 한국에서 독도라 부르는 섬(일본명 다케시마)을 시마네현에 편입했다. 대한민국은 이를 한국 침략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불법 행위로 보며, 일본은 독도가 본래 자국 영토이고 편입은 합법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분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은 열강의 승인도 받아 냈다. 1905년 7월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일본과 미국의 지도자는 일본의 한국 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서로 용인하는 의견을 나누었고, 1905년 8월의 제2차 영일 동맹은 일본의 한국 지배권을 인정했으며,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의 ‘정치·군사·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인정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군이 궁궐을 에워싼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의 서명 없이 을사조약(제2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중급
인명 피해
사상자 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흔한 추정으로는 러시아군 사망자가 약 4만 3천–7만 1천 명, 일본군 사망자가 약 8만–9만 9천 명이며, 병사자를 포함한 수치다. 부상자는 이보다 수십만 명 더 많았다. 승리한 일본이 오히려 더 많은 병사를 잃었는데, 뤼순과 만주에서의 희생이 컸던 탓이다. 다만 일본군 의료 체계는 이전 전쟁보다 병사자를 크게 줄여 외국 관전 무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민간인, 특히 만주 사람들의 고통이 컸다. 중국인 마을은 점령·약탈·파괴되었고, 농민들은 노역에 끌려가거나 농작물과 집을 잃었으며, 어느 한쪽의 첩자로 의심받아 처형되는 사람도 있었다. 형식상 중립이던 청 정부는 이들을 거의 보호하지 못했다. 중국 민간인 사망자에 대한 믿을 만한 통계는 없다.
한국에서는 노동력 징발, 토지·식량·가축 수용, 군사 통치가 진격로와 철도 연변 마을에 무거운 짐이 되었다. 러시아 포로와 일본 병사도 고통을 겪었다. 뤼순 수비대는 괴혈병과 포격에 시달렸고, 러시아 포로 수만 명이 일본의 수용소에 억류되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국제 협약에 따른 대우를 받았다.
중급
전쟁의 영향
러시아. 패전은 국내 불만을 키웠다. 1905년 1월 22일(러시아 구력 1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평화롭게 청원하러 간 군중에게 군대가 발포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1905년 혁명이 시작되었다. 파업과 농민 봉기, 전함 포톰킨호의 반란 같은 군대 반란이 이어졌고, 니콜라이 2세는 시민적 자유와 선출 의회(두마)를 약속하는 10월 선언을 내놓아야 했다. 러시아는 관심을 다시 유럽과 발칸으로 돌렸고, 이는 1914년으로 이어지는 긴장의 한 요인이 되었다.
일본. 일본은 강대국으로 인정받았다. 관동주 조차지와 남만주 철도를 얻어 이후 만주 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러나 전비는 대부분 외채로 조달했는데, 포츠머스 조약에서 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조건이 알려지자 도쿄 히비야 공원 등지에서 군중이 폭동을 일으켜 파출소와 친정부 신문사를 습격했다(히비야 방화 사건). 승리는 육해군의 위신을 높였고, 전쟁터의 희생으로 국가의 위대함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키웠다.
대한제국. 1905년의 보호국화로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하는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보낸 일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했다. 의병 항쟁이 전국으로 번졌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했고, 1910년 일본은 한국을 병합했다.
세계. 아시아 나라가 유럽 제국을 이겼다는 소식은 아시아와 그 너머의 민족주의자들을 열광시켰다. 중국의 쑨원, 인도의 젊은 네루는 훗날 그때의 흥분을 회고했고, 이 전쟁은 이란(1905–06)과 오스만 제국(1908)의 입헌 혁명 물결과 흔히 연결된다. 그러나 일본 자신이 식민 제국이 되어 가고 있었기에, 한국인과 훗날의 중국인에게 ‘아시아의 승리’는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지배를 뜻했다.
심화
나라마다 다른 기억과 서술
일본. 일본에서 이 전쟁은 국민적 서사시가 되었다. 도고 제독과 노기 장군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죽자 뒤따라 자결한 노기는 충성의 상징이 되었다. 1968–72년에 연재되고 뒷날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시바 료타로의 역사 소설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은 메이지 일본의 싸움을 작은 나라의 영웅적이고 방어적인 분투로 그렸다. 일본 안팎의 비판자들은 이런 서사가 한국과 중국을 지워 버리고, 메이지 시대의 전쟁과 뒷날의 침략 전쟁 사이의 연속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러시아. 러시아에서 이 전쟁은 무능한 지도부와 멀고 인기 없는 목표가 부른 굴욕으로 기억되었다. 다만 순양함 바랴크 승무원의 용기 같은 개별 사례는 노래로 기려졌다. 소련 작가들은 이 패전을 차르 체제 비판에 활용했고, 수병으로 참전했던 노비코프-프리보이의 소설 『쓰시마』는 널리 읽혔다. 1945년 소련이 남사할린과 뤼순을 차지하자 스탈린은 이를 1904–05년의 오점을 씻은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한국. 한국의 서술에서 이 전쟁은 한국의 주권을 빼앗아 간 무대다. 중립 선언은 무시되었고, 땅과 노동력이 징발되었으며, 독도가 편입되고, 보호국 체제가 강요되었다. 을사조약은 흔히 ‘을사늑약(勒約, 억지로 맺은 조약)’이라 불리며, 많은 한국 학자는 강압으로 체결되고 황제가 서명하지 않았으므로 법적으로 무효라고 본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조약을 규탄한 장지연부터 안중근에 이르는 저항 인물들이 한국 기억의 중심에 있다. 안중근이 옥중에서 쓰다 만 『동양평화론』은 일본이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는 약속을 저버렸다고 비판했다.
중국. 중국에게 이 전쟁은 정부가 손 놓고 있는 사이 두 외국 세력이 중국 땅에서 벌인 싸움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루쉰은 러시아 첩자로 몰린 중국인이 일본군에게 처형되려 하고 이를 중국인 구경꾼들이 멍하니 바라보는 환등기 사진을 보았고, 이 경험으로 의학을 버리고 문학을 택했다고 훗날 썼다. 이 일화는 중국 민족 각성의 유명한 상징이 되었다. 한편 튀르키예에서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여러 지역에서 이 전쟁은 유럽의 힘이 무적이 아니라는 증거로 오래 기억되었다.
심화
1차 사료와 연구사
공식·군사 사료. 일본 참모본부와 러시아 군사사 위원회는 각각 여러 권의 공식 전사를 펴냈고, 영국·독일·미국 등은 관전 무관을 보내 자세한 보고서를 남겼다. 영국 장교 이언 해밀턴은 일본군과 함께하며 본 것을 책으로 냈다. 쿠로팟킨 장군은 자기 지휘를 변호하는 저술을 남겼는데, 영어로는 『러시아 육군과 일본 전쟁(The Russian Army and the Japanese War)』으로 출간되었다. 이런 사료는 작전에 관해 풍부하지만 조직의 자기 정당화가 배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일본 공식 전사는 실패와 지휘관 사이의 갈등을 감추는 경향이 있었다.
언론과 이미지. 이 전쟁은 당시로서는 가장 집중적으로 보도된 전쟁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 작가 잭 런던 같은 종군 기자들이 한국과 만주에서 기사를 보냈고, 사진·기록 영화·화보 잡지가 대중에게 전해졌다. 『황성신문』, 그리고 영국인 베델(Ernest Bethell)의 보호 아래 발행된 『대한매일신보』 같은 한국 신문은 일본의 검열 속에서도 한국인의 반응을 기록했다.
외교·한국 사료. 도쿄·상트페테르부르크·런던·워싱턴의 외교 문서는 개전 과정과 강화 협상을 보여 준다. 대한제국 정부 기록, 『고종실록』, 1904–05년 협약 관련 문서는 보호국화의 합법성을 둘러싼 오랜 논쟁의 핵심 자료다.
연구사. 예전의 군사사는 전략과 지휘에 집중했다. 최근 연구는 전쟁을 세계사적 시각에서 본다. 존 스타인버그(John W. Steinberg) 등이 엮은 『세계사적 시각에서 본 러일 전쟁: 제0차 세계 대전(The Russo-Japanese War in Global Perspective: World War Zero)』(2005–07)은 외교·사회·문화·식민지 차원을 두루 다루었고, 로템 코브너(Rotem Kowner) 같은 학자는 이 전쟁이 인종 관념과 아시아 여러 민족에 미친 영향을 연구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1904–1910년 조약들의 법적 효력을 두고 계속 논쟁하고 있으며, 중국 역사학자들은 만주에 미친 영향을 강조한다. 1903–04년 각국 정부가 얼마나 전쟁을 원했는지, 일본이 군사적·재정적 한계에 얼마나 가까웠는지, 이 전쟁이 1914년 이전의 군비 경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등이 남은 질문이다.
주요 전투 (18)
핵심 개념
- 제국주의 경쟁
- 러시아와 일본은 자기 땅이 아니라 만주와 한국을 누가 지배하느냐를 두고 싸웠다.
- 무시된 중립
- 대한제국과 청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전쟁은 그 영토에서 벌어졌고 주권은 짓밟혔다.
- 보호국
- 외교권을 다른 나라가 쥔 나라.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이는 1910년 병합으로 가는 단계였다.
- ‘제0차 세계 대전’
- 근대적 무기·전술과 세계적 연결망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을 예고했다는 뜻으로 일부 학자가 쓰는 표현.
- 아시아의 승리, 식민 제국
- 일본의 승리는 반식민 민족주의자들을 고무했지만, 일본은 이를 이용해 한국과 만주에 자기 제국을 세웠다.
- 1905년 혁명
- 패전은 러시아의 불안을 키워 니콜라이 2세가 의회를 허용하게 했고, 1917년 혁명으로 가는 한 단계가 되었다.
- 열강의 승인
- 1905년 영국·미국·러시아가 차례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면서, 한국은 외부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기록
- 1898년 — 러시아가 랴오둥반도의 뤼순과 다롄을 조차함.
- 1900년 — 의화단 운동. 러시아군이 만주 대부분을 점령함.
- 1902년 — 영일 동맹 체결.
- 1903년 — 용암포 사건. 러일 협상 결렬.
- 1904년 — 1월 대한제국 국외 중립 선언. 2월 8–9일 일본군의 뤼순·인천 공격. 2월 23일 한일 의정서.
- 1904년 — 8월 제1차 한일 협약, 랴오양 전투. 10월 도거뱅크 사건.
- 1905년 — 1월 2일 뤼순 함락. 1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피의 일요일. 2월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 2–3월 펑톈 전투.
- 1905년 — 5월 27–28일 쓰시마 해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 일본의 사할린 점령. 8월 제2차 영일 동맹.
- 1905년 —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도쿄 히비야 방화 사건.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이 보호국이 됨.
- 1907년 — 헤이그 특사 사건. 고종 강제 퇴위, 대한제국 군대 해산.
- 1909년 —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함.
- 1910년 — 일본의 한국 병합.
용어 풀이
- 만주
- 중국 동북 지방을 가리키던 역사적 이름. 땅과 자원이 풍부했으며 육상전 대부분이 여기서 벌어졌다.
- 뤼순(여순, 포트아서)
- 랴오둥반도 끝의 요새화된 군항. 1898년 러시아가 조차했고 1905년 일본이 점령했다.
- 대한제국
- 고종이 선포한 1897–1910년 한국의 국호.
- 보호국
- 내정은 어느 정도 유지하지만 외교권을 다른 나라에 빼앗긴 나라.
- 을사조약(을사늑약)
-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조약. 강제로 맺었다는 뜻에서 ‘늑약’이라고도 한다.
- 발트 함대
- 유럽에서 동아시아까지 항해해 와서 쓰시마 해전에서 궤멸한 러시아 함대.
- 포츠머스 조약
-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중재로 1905년 9월 5일 맺은 강화 조약.
- 두마
- 1905년 혁명 뒤 만들어진 러시아의 선출 의회.
- 의병
- 일본의 지배에 맞서 싸운 한국의 민간 무장 부대. 1905년과 1907년 이후 크게 일어났다.
- 영일 동맹
- 1902년 영국과 일본이 맺고 1905년 갱신한 동맹으로, 러시아에 맞선 일본의 입지를 강화했다.
묻고 답하기
러시아와 일본은 왜 싸웠나요?
둘 다 만주와 한국을 지배하고 싶어 했어요. 러시아가 철도와 해군 기지로 만주에 들어오자, 일본은 러시아가 한국까지 차지할까 봐 두려워했어요. 지역을 나눠 갖자는 협상은 실패했지요.
왜 한국과 중국에서 싸웠나요?
바로 그곳이 두 제국이 차지하려던 곳이었기 때문이에요. 대한제국과 청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군대를 막을 힘이 없었어요.
쓰시마 해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1905년 5월 도고 제독이 이끄는 일본 해군이 지구를 반 바퀴 돌아온 러시아 발트 함대를 거의 다 무찔렀어요. 역사상 가장 일방적인 해전 가운데 하나예요.
일본의 승리가 한국에 도움이 되었나요?
아니요. 전쟁 중과 직후에 일본은 한국에 여러 협약을 강요해 스스로 나라 일을 결정할 권리를 빼앗았고, 1905년 보호국으로 만들었어요. 1910년에는 병합했지요.
일본이 이겼는데 왜 도쿄에서 폭동이 일어났나요?
일본 국민은 큰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많은 배상금과 영토를 기대했어요. 포츠머스 조약에 배상금이 없자 1905년 9월 군중이 폭동을 일으켰어요.
을사조약은 법적으로 유효한가요?
논쟁이 있어요. 많은 한국 학자는 군사적 위협 속에 강요되었고 황제가 서명하지 않았으므로 무효라고 봐요. 일본은 다른 입장을 취해 왔어요.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에서 두 나라는 1910년 이전 조약이 ‘이미 무효’라고 합의했지만, ‘이미’를 서로 다르게 해석해요.
왜 ‘제0차 세계 대전’이라고도 하나요?
참호와 기관총처럼 제1차 세계 대전의 무기와 전술이 많이 쓰였고, 두 교전국 말고도 여러 나라의 외교와 금융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에요.
다른 아시아 나라 사람들에게 이 전쟁은 어떤 의미였나요?
많은 반식민 민족주의자가 아시아 나라가 유럽 제국을 이긴 데서 용기를 얻었어요. 하지만 한국인과 훗날의 중국인에게 일본은 새로운 제국주의 세력이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Russo-Japanese War. Wikipedia
- Siege of Port Arthur. Wikipedia
- Battle of Tsushima. Wikipedia
- Treaty of Portsmouth. Wikipedia
- Japan–Korea Treaty of February 1904. Wikipedia
- Japan–Korea Treaty of 1905. Wikipedia
- 러일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포츠머스 조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러일 전쟁. 위키백과
- John W. Steinberg et al. (eds.), The Russo-Japanese War in Global Perspective: World War Zero. Brill, 2005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