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400여 년 전인 1592년, 일본의 대군이 조선에 쳐들어왔어요. 일본군은 너무 빨리 올라와서 3주쯤 만에 수도 한양(지금의 서울)을 차지했어요. 임금은 멀리 북쪽으로 피란을 가야 했지요. 한동안은 나라 전체를 잃을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도시 하나를 빼앗는 것과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것은 전혀 달라요. 군인들은 날마다 밥을 먹어야 하는데, 그 식량의 많은 부분을 길과 강으로 실어 날라야 했거든요. 남서쪽에는 쌀이 많이 나는 전라도가 있었는데, 일본군은 아직 그곳을 차지하지 못했어요. 전라도로 들어가는 큰길 가운데 하나가 남강 옆의 성곽 도시 진주를 지나갔어요.
늦가을, 일본 대군이 진주성을 에워쌌어요. 성안에는 김시민이라는 고을 관리가 이끄는 군사 몇천 명과 성안 사람들뿐이었어요. 김시민은 여자와 노인들에게 남자 옷을 입혀 군사가 많아 보이게 했어요. 적이 긴 대나무 사다리를 타고 오르면 성안 사람들은 대포와 화살을 쏘고,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부었어요.
성 밖에서도 ‘의병’이라 불리는 자원병들이 도왔어요. 밤이 되면 근처 산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며 큰 구원군이 온다고 외쳤지요. 그러면 성안 사람들은 힘이 났고 적은 불안해졌어요. 식량을 구하러 흩어진 일본군을 공격한 의병들도 있었어요.
엿새쯤 지나자 일본군은 포기하고 물러갔어요. 안타깝게도 김시민은 이마에 총알을 맞았고, 그 상처로 세상을 떠났어요. 이듬해 여름 훨씬 더 큰 일본군이 다시 와서 진주성을 함락했지만, 사람들은 지금도 첫 번째 싸움을 임진왜란의 가장 큰 승리 세 가지 가운데 하나로 기억해요.
한눈에 보기
- 무엇
- 임진왜란 1차 침략 때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공격한 싸움으로,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다
- 언제
- 1592년 음력 10월 5일–10일(양력 1592년 11월 8일–13일). 일본어·한국어 위키백과는 포위 시작을 음력 10월 4일로 적는다
- 장소
- 남강 가의 진주성(촉석성).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으로,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
- 수비 측
- 진주목사 김시민과 판관 성수경, 곤양군수 이광악, 최덕량 등. 성 밖에서는 김성일이 지휘·조율한 관군과 의병(곽재우가 보낸 부대,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임계영 등)
- 공격 측
- 현대 서술에 이름이 나오는 일본 장수로 호소카와(당시 나가오카) 다다오키, 하세가와 히데카즈, 기무라 시게코레, 가토 미쓰야스 등
- 병력
- 수비군: ‘3천여 명’(선조수정실록)–약 3,800명(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격군: ‘1만여 명을 셋으로 나눔’(김성일 장계), ‘수만 명’(선조수정실록), 2만–3만 명(현대 백과사전)
- 결과
- 일본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남. 김시민은 이마에 탄환을 맞아 그 상처로 숨짐. 진주성은 1593년 2차 전투 때까지 조선이 지킴
- 기억
- 한산도 대첩(1592)·행주대첩(1593)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힌다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쉬움
진주대첩은 어떤 싸움이었나
진주대첩은 임진왜란 첫해인 1592년 말, 경상도 남서부의 성곽 도시 진주를 두고 벌어진 싸움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군을 보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전쟁이다. 이때 일본군은 이미 한양과 평양을 차지했지만 지방에 대한 장악력은 약했다. 1592년 음력 10월, 부산·김해·창원 일대의 주둔군을 모은 일본군이 경상도 서쪽 절반, 곧 경상우도의 중심 고을인 진주로 진격했다.
성안에서는 막 진주목사로 승진한 김시민이 군사 몇천 명과 성민을 이끌었다. 음력 10월 5일부터 10일까지(양력 1592년 11월 8일–13일) 엿새가량, 일본군은 산 위에서 조총을 쏘아 대고, 대나무 방패막이와 사다리, 3층 높이의 공성 누대를 만들었으며, 마지막에는 대규모 야간 총공격을 퍼부었다. 수비군은 화포와 화살, 화약을 싼 풀 묶음, 돌과 끓는 물로 맞섰다. 마지막 날 일본군은 시신을 불태우고 포위를 풀어 물러갔다.
승리에는 대가가 따랐다. 마지막 공격 때 김시민이 이마에 탄환을 맞았고, 얼마 뒤 그 상처로 숨졌다. 이 싸움은 전쟁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쓸모가 있다. 일본군이 몇 달 만에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지, 그리고 그 진격을 땅과 길과 수확에 대한 지배로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한꺼번에 보여 주기 때문이다.
쉬움
왜 진주였나: 전라도로 가는 관문
진주는 여러 고을 가운데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자 성곽을 갖춘 행정·군사 중심지였고, 서쪽 전라도로 이어지는 육로 위에 있었다. 성은 남강 가에 서 있었다. 북쪽에는 연못 여러 곳을 이어 해자를 둘렀고, 전쟁 직전인 1591년에는 경상도관찰사 김수가 성을 동쪽으로 넓혀 외성을 쌓았다.
전라도가 중요했던 것은 쌀이 많이 나는 데다, 1차 침략 동안 도의 북동쪽 끝인 웅치·이치에서 치열한 싸움이 있었지만 전주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과 주요 곡창 지대가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전라좌수군과 이억기의 전라우수군 등 바다에서 계속 싸우던 조선 수군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진주를 군량 보급지인 전라도를 지키는 길목으로 설명하며, 그래서 조선과 일본이 진주성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다고 쓴다.
진주는 근거지로서도 중요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일본군은 경상우도의 주력이 진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싸움이 끝나고 한 달쯤 뒤 비변사는 “영남의 큰 고을 가운데 오직 진주만이 온전하다”는 여론을 전하며, 진주가 다시 허술해질 수 있으니 김시민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다.
쉬움
1592년 11월의 엿새
포위에 앞서 일본군은 창원 부근에서 경상우병사 유숭인의 군대를 무찔렀다. 일본군이 진주로 다가오자 유숭인은 성 아래까지 달려와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다. 김시민은 성안에 장수가 둘이면 명령 계통이 흐트러질까 염려해 성문을 열지 않고, 밖에서 성을 도와 달라고 청했다. 유숭인은 돌아가다 적을 만나 사천현감 정득열, 권관 주대청과 함께 전사했다. 『선조수정실록』은 곽재우가 이 소식을 듣고 “이 계책이 성을 온전하게 하기에 충분하니 진주 사람들의 복”이라고 감탄했다고 전한다.
음력 10월 5일(양력 11월 8일) 일본군이 진주 동쪽 마현(馬峴)에 나타났고, 이튿날부터 공격이 시작되었다. 경상우도의 최고 책임자였던 김성일은 적이 세 갈래로 나뉘어 왔다고 보고했다. 김시민은 노약자와 부녀자에게까지 남자 옷을 입혀 군사가 많아 보이게 하고, 화살을 함부로 쏘아 허비하지 말라고 일렀다. 7일에는 적이 대나무 방패를 줄지어 세우고 사이사이에 목판을 끼운 채 크게 소리치고 총을 쏘며 다가왔고, 날이 저문 뒤에도 다시 공격해 왔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한 칸 너비의 대나무 사다리 수천 개와, 성안을 내려다볼 3층 산대(山臺)를 만들었고, 대나무와 소나무 가지를 엮어 흙을 채운 방패막이를 쌓았다. 김시민은 이에 대비해 두었다. 수비군은 현자총통(玄字銃筒)을 쏘아 산대 위의 적을 떨어뜨리고, 화약을 종이에 싸 풀로 묶은 것으로 방패막이를 태웠으며, 사다리를 부수고, 기어오르는 적에게 끓는 물을 붓고 큰 돌을 던졌다.
고비는 10일(양력 11월 13일) 밤이었다. 일본군은 동문과 북쪽을 공격했고, 김성일의 장계에 따르면 서문 쪽도 공격했다. 성 밑을 파고 장작을 쌓아 불을 질러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몸소 싸움을 독려하던 김시민이 이마에 탄환을 맞았다. 곤양군수 이광악이 지휘를 이어받아 비단옷을 입고 말을 탄 적장을 활로 쏘아 죽였고, 또 다른 위태로운 곳에서는 최덕량이 흩어지던 군사를 다시 모아 막아 냈다. 그날 오후가 되자 일본군은 시신과 성 밖 민가 1천여 채를 불태우고 포위를 풀어 물러갔다.
중급
성 밖의 힘: 관군과 의병의 협력
진주성은 성안의 군사만으로 지켜진 것이 아니었다. 경상우도에서 군사와 민심을 모으던 김성일은 네 방향에서 진주로 군대를 들여보냈다. 동쪽으로는 삼가 의병장 윤탁, 의령 가장(假將) 곽재우, 초계 가장 정언충을, 북쪽으로는 합천 가장 김준민을, 서쪽으로는 전라도 의병 최경회를, 남쪽으로는 고성 가장 조응도와 복병장 정유경을 보냈다. 『선조수정실록』은 김성일이 호남에 구원을 청해 의병장 최경회·임계영이 달려왔다고도 적는다.
결과는 제각각이었고, 기록도 이를 감추지 않는다. 윤탁과 정언충은 3백여 명을 이끌고 가다 마현에서 적과 부딪쳐 무너졌다. 장계는 곽재우가 직접 진주에 왔다고 쓰지 않는다. 그가 선봉장 심대승을 보냈고, 심대승의 군사가 진주 북산에 올라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고 총을 쏘며 “전라도 원병 1만여 명과 홍의장군이 내일 아침 와서 적을 칠 것”이라고 성안을 향해 외치자 성안 사람들도 크게 외쳐 호응했다고 한다. 김준민은 결사대 80여 명으로 단계현 관아를 불태우던 적을 기습해 쫓아냈고, 조응도의 군사는 남강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진을 쳐 멀리서 기세를 보이며 흩어진 적을 소탕했다.
『선조수정실록』은 구원군의 역할을 신중하게 정리한다. 구원군은 험한 곳에 진을 치고 밤이면 가까운 산에 올라 성안과 함께 불을 들고 북을 치며 서로 호응했지만 “감히 함부로 공격하지는 못하였다.” 대신 적이 흩어져 이웃 고을을 노략질하면 길목에서 막고 습격했다. 다시 말해 구원군의 가치는 극적인 구출보다는 수비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포위군의 등 뒤를 위협하며, 식량을 구하러 나선 적을 위험에 빠뜨린 데 있었다.
곽재우는 이미 몇 달째 이런 싸움을 해 오고 있었다. 그는 1592년 음력 4월 22일(양력 6월 1일) 의령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의병 가운데 하나를 일으켰다. 5월 하순(양력 7월 초)에는 남강을 건너려던 일본군을 정암진에서 기습해 전라도로 가는 길을 막는 데 이바지했고, 강을 오가며 군수 물자를 나르는 일본 배를 습격했다. 의병과 관의 협력이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전쟁 초기에 경상도관찰사 김수는 곽재우의 무리를 반란군으로 몰기도 했다. 그러나 진주에서는 성안의 관군과 성 밖의 의병이 하나의 계획 아래 함께 싸웠다.
중급
김시민: 판관에서 진주성의 수장으로
김시민은 1554년에 태어나 1578년 무과에 급제했다. 1583년 여진족 니탕개가 북쪽 변경에서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막하 장수로 출정했다. 훈련원 판관으로 있을 때는 무기와 훈련에 관한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내려놓았다. 1591년에는 진주판관이 되었다.
1592년 전쟁이 터지자 김시민은 진주목사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고, 이경이 병으로 죽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령으로 목사의 직무를 대신 맡았다. 그는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란한 성민을 돌아오게 했으며, 성을 고치고 군사 편제를 갖추었다. 여름 동안 곤양군수 이광악, 의병장 이달·곽재우 등과 힘을 합쳐 고성·창원 등을 되찾았고, 거창 사랑암에서도 일본군을 무찔렀다. 그 공으로 음력 8월 진주목사로 승진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그는 취임 뒤 적의 제조 방식을 본떠 염초 500여 근과 총통 70여 자루를 만들고, 정병을 뽑아 사용법을 익히게 했다.
조정은 그를 경상우병사로 임명했지만, 『선조수정실록』의 표현대로 그는 “얼마 뒤에 죽었다.” 임명 시기와 그 명령이 닿은 때는 자료마다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음력 9월 진해 승전 뒤의 임명을 언급하면서, 그를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발탁한다는 명이 상여가 함양에 이르렀을 때 닿았다고도 쓴다. 숨진 때는 자료마다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싸움 며칠 뒤라고 쓰지만, 그보다 늦은 날짜를 드는 자료도 있다. 1604년 그는 선무공신 2등에 추록되었고, 뒤에 시호 ‘충무(忠武)’를 받았다. 이순신과 같은 시호여서 두 사람을 헷갈리는 일이 종종 있다.
중급
빠른 진격, 약한 장악
진주의 의미는 1592년 일본군이 부딪힌 더 큰 문제 속에서 보아야 잘 드러난다. 일본군은 한양을 차지한 뒤 여러 도를 부대별로 나누어 맡겼다. 제6군은 전라도를 정복하고, 제7군은 경상도를 안정시키는 식이었다. 큰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과 그 주변 땅을 붙잡아 두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주둔지마다 먹여야 했고, 연락과 보급 행렬은 적대적인 땅을 지나야 했으며, 여름부터는 조선 수군 때문에 서해안을 따라 바닷길로 보급하기가 어려워졌다.
『선조수정실록』의 한 기사는 일본군이 경상도를 붙잡아 둔 방식을 전한다. 좌도에서는 동래에서 현풍까지 10개 고을, 우도에서는 웅천에서 문경까지 12개 고을에 주둔지를 두었다. 해안의 몇몇 진에 각각 수천 명을 둔 것을 빼면 주둔지 한 곳의 병력은 1천 명을 넘지 않았고, 영남에 남은 일본군은 모두 4만–5만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들은 밤낮으로 몰래 부대를 바꾸어 오가며 수가 많아 보이게 했다. 이것은 길과 거점의 연결망이었지, 모든 마을에 대한 지배는 아니었다.
이런 연결망은 의병이 벌이던 바로 그런 싸움, 곧 나루에서의 매복, 식량을 구하러 나선 부대와 보급선에 대한 습격, 작은 고을의 탈환에 약했다. 진주를 치려면 일본군은 부산 등지의 주둔군을 모아야 했고, 공격이 실패하자 다시 흩어져 물러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곽재우가 경상우도를 지켜 낸 덕분에 그 지역 농민들은 평소처럼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진주 하나가 전쟁의 향방을 결정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 전라도는 수군과, 1592년 여름의 정암진 전투·이치 전투 같은 싸움으로도 보호되었고, 1593년 초에는 명의 대군이 들어왔다. 1593년 음력 4월 일본군이 한양에서 물러난 이유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각지의 의병 봉기, 명군의 진주(進駐), 보급 곤란, 전염병의 유행을 함께 든다. 진주는 그 사슬의 한 고리, 곧 1592년 일본군이 육로로 남서부를 뚫으려다 실패한 자리였다.
중급
같은 해 세계에서는(1592)
1592년 중국 서북쪽에서 일어난 한 사건은 조선의 전쟁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그해 3월, 몽골과 맞닿은 명의 변경 군진 영하(寧夏)에서 군관 유동양(劉東暘)과 몽골 출신 장수 보바이(哱拜)가 반란을 일으켰다. 명군은 5월부터 성을 포위하고 둑을 쌓아 성안에 물을 끌어들였으며, 1592년 10월 20일 마침내 성을 함락했다. 마지막 단계에서 지휘를 맡은 이여송은 곧 조선 원정군 사령관이 되었고, 영하의 병력 상당수도 그를 따라 조선으로 왔다. 이것은 우연한 동시성이 아니라 기록으로 확인되는 연결이다. 영하가 버티는 동안 명은 조선에 적은 병력만 보낼 수 있었고, 그 부대는 8월 말 평양 부근에서 패했다.
그러니 1592년 11월 진주성이 포위되었을 때 그곳을 도울 명군은 없었다. 이여송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넌 것은 1592년에서 1593년으로 넘어가는 무렵이다. 진주성은 조선의 관군과 의병, 성민만으로 지켜 낸 싸움이었다.
다른 곳에서 같은 해에 일어난 일들은 조선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당시 세계의 모습을 보여 주려고 적을 뿐이다. 일본군이 진주성 앞에 나타난 다음 날인 1592년 11월 9일, 교황 클레멘스 8세는 교서 「쿰 사크로룸(Cum sacrorum)」과 함께 개정 라틴어 성경인 클레멘스 불가타를 반포했다. 이 판본은 1979년까지 가톨릭교회의 공식 라틴어 성경이었다. 같은 해 젊은 수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파도바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1610년까지 가르쳤다.
중급
그 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
진주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김시민의 병세가 깊어지자 김성일은 김해부사 서예원에게 그 자리를 맡겼다. 서예원은 김해성을 버리고 김성일을 따라다니던 인물이었다. 수십 년 뒤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은 서예원을 매우 혹독하게 평가하며 이때부터 진주성의 수비가 예전 같지 못했다고 쓰는데, 이 사료의 다른 인물 평가와 마찬가지로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1593년 명과 일본이 강화 교섭을 벌이던 중에 히데요시는 진주성을 함락하라고 명령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보복적인 공격이라고 부른다. 음력 6월 21일부터 29일까지(양력 1593년 7월 19일–27일) 훨씬 큰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했다. 이 작전의 일본군은 흔히 9만~10만 명으로 서술되지만(영어 위키백과는 9만 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천일」 항목은 10만에 가깝다고 쓴다), 수치마다 세는 범위가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주성」 항목은 4만여 명이 공격했다고 하고, 일본어 위키백과는 시마즈 가문 문서를 인용해 성을 에워싼 부대를 약 4만 2,500명으로 집계하면서 성 쌓기와 수송·거점 수비를 맡은 부대를 따로 적는다. 성은 함락되었다. 황진은 함락 전날인 28일 탄환에 맞아 전사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성벽이 뚫리자 김천일과 최경회는 남강에 몸을 던졌다. 이 밖에도 많은 장수가 목숨을 잃었고, 조선 측 기록은 군사와 백성 수만 명이 죽었다고 전하지만 숫자는 자료마다 크게 다르다.
이 승리로도 일본군은 전라도를 열지 못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일본군은 구례와 곡성까지 나아갔다가 남원의 수비가 굳건한 것을 보고 되돌아갔다. 제2차 전투는 그 나름의 인물들과 뒷날의 논개 이야기와 함께 따로 다룰 만한 주제다. 1차 전투와 관련해서는, 1592년 진주를 지켜 낸 것이 영구적인 안전이 아니라 시간을 벌어 준 것이었음을 일깨워 준다.
중급
진주대첩은 어떻게 기억되어 왔나
1619년 진주 사람들의 바람에 따라 성안에 김시민의 전공을 새긴 비가 세워졌다. 글은 성여신이 지었고, 지금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이다. 비문에는 1천 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10만 대군을 물리쳤다고 적혀 있지만, 다른 기록은 3,800여 명으로 2만 명의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 차이는 한 세대 안에 승리의 기억이 얼마나 부풀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1604년 김시민을 선무공신에 책봉하며 내린 교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흘러나갔다. 2006년 국민의 성금으로 다시 사들여 고국으로 돌아왔고, 보물로 지정되어 임진왜란을 주제로 한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교서를 국민 모금으로 일본에서 돌아온 첫 문화유산으로 소개한다.
진주대첩은 일본에도 흔적을 남겼다. 일본인들은 김시민의 직함인 ‘목사(牧使)’를 ‘모쿠소’로 들었고, 에도 시대에는 그에게서 착안한 ‘모쿠소 호간(木曽判官)’이라는 인물이 가부키에 등장했다. 한국에서는 한산도 대첩·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히며, 1970년대에 복원된 진주성은 오늘날 사적으로서 두 차례 전투에서 싸운 이들을 기리는 사당을 품고 있다.
심화
병력 세기: 사료가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목격자의 보고에 가장 가까운 것은 김성일이 조정에 올린 장계로, 『선조실록』 1592년 음력 12월 5일 조에 실려 있다. 날짜별로 상황을 적고 성 안팎의 지휘관 이름을 밝히며, 적이 “1만여 명의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兵萬餘, 分爲三起) 왔다고 쓴다. 1593년 음력 1월 조에 실린 두 번째 장계는 공을 세운 장수들을 포상해 달라고 청한다. 구원을 조직한 당사자가 올린 공식 보고이므로, 빠르고 구체적이지만 공을 확정하려는 목적을 띠고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이야기를 더 풍부하고 문학적으로 전한다. 원래 실록이 편향되었다는 이유로 1640년대에 수정이 시작되어 1657년에 완성된 이 사료는 ‘수만 명’의 일본군이 ‘3천여 명’이 지키는 성을 공격했고, 성이 10여 일 포위된 동안 큰 싸움이 네댓 차례 있었다고 하며, 마지막 야간 공격을 “9월 10일”로 적어 다른 기록과 맞지 않는다. 현대 참고 자료는 수비군 약 3,800명(영어 위키백과는 새뮤얼 홀리를 인용해 비정규군 2,200여 명을 더한다)에 공격군 2만 명(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시민’)이나 약 3만 명(같은 사전 ‘진주시’, 영어·일본어 위키백과)을 제시한다. 1619년의 비는 1천 명 미만 대 10만 명이라고 주장한다. 영어 위키백과의 일본군 전사자 ‘1만 300명 이상’은 조선 측 보고에서 뚜렷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조선 보고는 죽은 적을 셀 수 없었고 일본군이 시신을 메고 가거나 불태웠다고만 전한다.
무기와 포수에 관한 기록도 서로 다르지만, 이들은 서로 다른 것을 센 것이어서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다. 영어 위키백과의 진주성 전투·임진왜란 문서는 김시민이 조총 170여 자루를 새로 확보했다고 하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총통 70여 자루를 만들었다고 하고, 싸움 한 달 뒤 비변사는 그가 지금 포수 80여 명을 거느리고 있다고 ‘들었다’며 아뢰었다. 곽재우가 몸소 수천 명의 의병을 이끌고 왔다는 일부 영어권 서술도, 곽재우가 심대승의 부대를 보냈다고만 적은 김성일의 장계와 맞지 않는다.
이 패배에 관한 일본 측 사료는 조선 측보다 빈약하다. 영어 위키백과는 1626년에 간행된 히데요시 전기 『다이코기(太閤記)』를 인용해, 먼저 성벽에 오르려는 병사들이 몰려 사다리가 부러질 뻔했다는 장면을 소개하지만, 이는 뒷날의 문학적 저작이다. 날짜도 변환이 필요하다. 조선과 일본은 모두 태음태양력을 썼고, 이 글의 양력 날짜(1592년 11월 8일–13일)는 한국천문연구원의 음양력 변환표로 계산한 것이다. 일본 측 서술은 포위 시작을 10월 4일로 센다.
심화
논쟁: 진주대첩은 얼마나 결정적이었고, 누구의 승리였나
얼마나 결정적이었나? 한국 쪽 서술은 흔히 이 승리로 일본군이 호남을 점령하지 못해 전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고 말하고, 영어 위키백과의 임진왜란 문서도 1차 진주성 전투의 승리가 1차 침략 동안 전라도를 대체로 참화에서 구했다고 쓴다. 다른 증거는 신중함을 요구한다. 전라도는 이미 1592년 여름 수군, 정암진의 곽재우, 이치 전투로 보호되고 있었고, 가을 일본군의 목적도 서쪽으로 가는 길을 여는 것과 함께 경상우도 저항 세력의 근거지를 없애는 것이 섞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차 전투는 진주를 차지한다고 해서 저절로 전라도가 열리지는 않았음을 보여 준다. 공정한 결론은 진주가 여러 방벽 가운데 중요한 하나였다는 것이다.
누구의 승리였나? 조정의 포상과 1619년의 비는 김시민을 중심에 둔다. 당시 보고는 김시민이 다친 뒤 지휘를 이어받은 이광악, 닷새 밤낮 동문을 지킨 판관 성수경, 무너진 곳을 막아 낸 최덕량과 이눌의 공도 강조한다. 김성일의 두 번째 장계에는 8일에 김시민이 성을 온전히 지키기 어려울 듯하니 몰래 수문을 열어 노약자를 내보내자고 했고, 이광악이 그러면 군사들의 마음이 크게 흔들린다며 말렸다는 이야기까지 실려 있다. 수비군도 승리를 확신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구원군을 조직한 것은 김성일이었고, 의병과 성민, 남장을 하고 성을 지킨 여성들도 빼놓을 수 없는 참여자였다.
이 싸움은 더 넓은 논쟁 속에도 놓여 있다. 한국의 임진왜란 서사는 오랫동안 의병과 민중의 저항에 중심 자리를 주어 왔고, 진주에서 의병이 한 역할은 그 이야기에 잘 들어맞는다. 케네스 스워프는 전쟁 전체의 지상전에서 명의 개입이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한다. 1592년의 진주대첩은 이여송이 이끄는 명의 본격적인 원정군이 오기 전에 치러졌고(그보다 앞서 온 소규모 명군은 평양에서 패했다) 명군이 참전하지 않았으므로, 잘 준비된 성에서 조선군이 스스로 무엇을 해낼 수 있었는지 보여 주는 증거이지만 명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는 아니다. 김자현(JaHyun Kim Haboush)은 의병과 그들이 남긴 글이 원형적 민족의식을 키웠다고 보았는데, 경상도와 전라도의 의병이 진주에서 협력한 일도 그의 주장과 나란히 놓고 읽어 볼 수 있다. 다만 이 연결은 김자현이 아니라 이 글의 해석이다.
마지막으로 진주대첩은 전쟁 전체의 핵심 질문, 곧 3주 만에 수도를 차지한 군대가 왜 나라를 정복하지 못했는가를 비춰 준다. 어느 한 전투도 이 질문에 혼자 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진주에 관한 사료는 그 작동 방식을 뚜렷하게 보여 준다. 얇게 흩어진 일본군 주둔지, 새 공세 때마다 병력을 끌어모아야 했던 사정, 습격과 견제가 가능한 현지 세력,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은 성, 그리고 끝내 손에 넣지 못한 곡창 지대가 그것이다.
핵심 개념
- 전라도로 가는 관문
- 진주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가는 중요한 육로 위에 있었다. 전라도는 쌀이 많이 나고 이순신 함대의 근거지였으며, 1차 침략 동안 북동쪽 끝에서 싸움이 있었지만 전주를 비롯한 대부분 지역이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 성 안과 성 밖
- 수비군이 성을 지키는 동안 성 밖의 관군과 의병은 포위군의 등 뒤를 위협하고, 밤에 성안과 신호를 주고받으며, 식량을 구하러 나선 적을 공격했다.
- 진격과 장악의 차이
- 일본군은 큰길을 따라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지만 주둔지가 작고 흩어져 있어, 진주 공격 같은 새 공세 때마다 여러 곳에서 병력을 끌어모아야 했다.
- 명령의 일원화
- 김시민은 패한 경상우병사를 성안에 들이지 않아 명령이 한 사람에게서 나오게 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성이 온전했던 이유로 보았다.
- 준비
- 고친 성벽, 직접 만든 화약과 총통, 쌓아 둔 돌과 끓는 물, 규율 있는 수비군 덕분에 적은 병력이 거듭된 공격을 막아 냈다.
- 여러 방벽 가운데 하나
- 진주는 수군, 정암진, 이치와 함께 1592년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은 여러 장애물 가운데 하나였다. 중요했지만 혼자서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 부풀려진 숫자
- 공격군 수는 사료에 따라 1만여 명에서 10만 명까지 다르다. 이 전쟁의 모든 숫자는 누가 기록했는지와 함께 추정치로 다뤄야 한다.
기록
- 1591년 — 김시민이 진주판관이 되고, 경상도관찰사 김수가 진주성을 동쪽으로 넓힌다.
- 1592년 —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다. 22일(양력 6월 1일) 곽재우가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 1592년 — 음력 5월 하순(양력 7월 초) 곽재우가 정암진에서 남강을 건너던 일본군을 기습한다.
- 1592년 — 음력 7월 8일(양력 8월 14일)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이치 전투로 전라도가 지켜진다.
- 1592년 — 음력 8월 김시민이 진주목사로 승진한다.
- 1592년 — 음력 10월 5일–10일(양력 11월 8일–13일) 진주대첩. 김시민이 탄환을 맞고 뒤에 숨진다.
- 1593년 — 음력 4월 일본군이 한양에서 물러난다. 음력 6월 21일–29일(양력 7월 19일–27일)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진주성이 함락된다.
- 1604년 — 김시민이 선무공신 2등에 추록된다.
- 1619년 — 진주성 안에 김시민 장군 전공비가 세워진다.
- 2006년 —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흘러나갔던 김시민 선무공신 교서가 국민 성금으로 돌아와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된다.
용어 풀이
- 의병(義兵)
- 지방의 선비, 전직 관리, 승려, 평민이 관군과 별도로 일으켜 침략군과 싸운 자원 부대.
- 목사(牧使)
- 진주 같은 큰 고을(목)의 수령으로, 행정과 군사를 함께 맡았다.
- 판관(判官)
- 수령을 보좌하는 관직. 김시민이 진주목사로 승진하기 전에 맡은 자리.
- 경상우도
- 한양에서 바라보아 경상도의 서쪽 절반. 진주는 그 주요 행정·군사 중심지였다.
- 전라도(호남)
- 한반도 남서부의 도. 쌀이 많이 났고 1592년 이순신 함대의 근거지였다.
- 총통(銃筒)
- 조선의 화약 무기와 화포를 두루 이르는 말. 현자총통은 진주에서 산대를 공격하는 데 쓰인 큰 화포다.
- 초유사(招諭使)
- 군사와 백성을 불러 모으도록 임금이 보낸 관리. 1592년 김성일이 관찰사가 되기 전 경상우도에서 맡은 직책.
- 선무공신(宣武功臣)
- 임진왜란의 무공으로 1604년 책봉된 18명의 공신. 1등부터 3등까지 있다.
- 선조실록
-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선조 시대의 공식 기록. 이를 고친 『선조수정실록』이 1657년에 완성되었다.
- 태음태양력
- 달의 움직임으로 달을 정한 조선·일본의 역법. 날짜를 양력(그레고리력)으로 바꾸어야 한다.
- 임진왜란 3대첩
- 한산도 대첩, 진주대첩(1592), 행주대첩을 함께 이르는 말. 한국에서 임진왜란의 가장 큰 승리로 꼽힌다.
묻고 답하기
진주대첩에서는 몇 명이 싸웠나요?
정확히는 아무도 몰라요. 조선 측 자료는 수비군을 3천여 명 또는 약 3,800명으로 적어요. 공격군은 김성일의 장계에 1만여 명, 『선조수정실록』에 수만 명, 현대 백과사전에 2만–3만 명, 1619년 비석에는 10만 명으로 나와요.
곽재우가 직접 진주성에 왔나요?
당시 김성일의 장계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아요. 곽재우가 선봉장 심대승을 보냈고, 심대승의 군사가 성 북쪽 산에서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며 외쳤다고 해요. 일부 영어권 서술은 곽재우가 직접 왔다고 적어요.
일본군은 왜 그토록 진주를 원했나요?
진주는 경상도 서부의 중심 고을이자 군사 근거지였고, 쌀이 많이 나고 이순신 함대가 머물던 전라도로 가는 육로 위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진주대첩이 전라도를 구했나요?
도움이 되었지만 유일한 이유는 아니에요. 수군과 그보다 앞선 정암진 전투, 이치 전투도 길을 막았고, 1593년 일본군이 진주성을 함락한 뒤에도 전라도를 점령하지는 못했어요.
김시민은 언제 숨졌나요?
음력 10월 10일(양력 1592년 11월 13일) 마지막 공격 때 이마에 탄환을 맞았고, 그 상처로 뒤에 숨졌어요. 숨진 날짜는 자료마다 달라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며칠 뒤라고 하고 더 늦은 날짜를 드는 자료도 있어요.
논개 이야기도 이 싸움에서 나왔나요?
아니에요. 논개 이야기는 진주성이 함락된 1593년 2차 전투에 얽힌 이야기예요. 1592년 1차 전투는 조선의 승리였어요.
1592년 진주성에 명나라 군대도 있었나요?
없었어요. 이여송이 이끈 명의 대군은 영하의 반란을 진압한 뒤 1592년에서 1593년으로 넘어가는 무렵에야 조선에 들어왔어요. 진주대첩은 조선군만으로 치른 싸움이에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10월 1일 1번째 기사: 부산 등지의 적이 군사를 합쳐 진주를 포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10월 1일 2번째 기사: 김성일이 의병장 곽재우·이달 등을 보내어 진주를 구원하도록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10월 1일 3번째 기사: 왜적이 우리 지경에 침입하여 성세를 크게 펼치고 노략질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10월 1일 6번째 기사: 경상 우병사 김시민의 졸기.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31권, 선조 25년(1592) 10월 6일 5번째 기사: 비변사가 김시민의 포상을 건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1592) 11월 11일 3번째 기사: 비변사가 김시민의 기용을 논하다(포수 80여 명 언급).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1592) 11월 12일 2번째 기사: “영남 거읍 중에 유독 진주만이 온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33권, 선조 25년(1592) 12월 5일 4번째 기사: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의 진주성 전투 장계.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33권, 선조 25년(1592) 12월 5일 5번째 기사: 비변사가 김시민·이광악·성수경의 포상을 아뢰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1593) 1월 22일 3번째 기사: 김성일이 진주성을 지킨 장사들의 포상을 청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김시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진주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진주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천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최경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곽재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장희, 임진왜란(임진왜란 중의 대소 전투 표 포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진주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시민 장군 전공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시민 선무공신 교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Siege of Jinju (1592). 영어 위키백과
- 진주대첩. 한국어 위키백과
- 晋州城攻防戦(진주성 공방전). 일본어 위키백과
- Siege of Jinju (1593). 영어 위키백과
- Imjin War. 영어 위키백과
- Battle of Ichi. 영어 위키백과
- 정암진 전투. 한국어 위키백과
- 김시민. 한국어 위키백과
- 金時敏(김시민). 일본어 위키백과
-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포함). 한국어 위키백과
- Taikōki(다이코기). 영어 위키백과
- Ordos campaign (1592)(영하의 반란). 영어 위키백과
- Li Rusong(이여송). 영어 위키백과
- Sixto-Clementine Vulgate(클레멘스 불가타). 영어 위키백과
- Galileo Galilei(갈릴레오 갈릴레이). 영어 위키백과
- 음양력 변환 계산. 한국천문연구원
- Kenneth M. Swope, A Dragon’s Head and a Serpent’s Tail: Ming China and the First Great East Asian War, 1592–1598.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2009
- JaHyun Kim Haboush, The Great East Asian War and the Birth of the Korean Nation.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6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