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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2,200여 년 전, 진나라가 처음으로 중국을 하나로 통일했어요. 진의 임금인 시황제는 아주 엄했어요. 사람들은 무서운 법을 지켜야 했고, 커다란 공사에 끌려가 일해야 했지요. 시황제가 죽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제국은 몇 년 만에 무너졌어요.
반란을 이끈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이 가장 강해졌어요. 항우는 이름난 장군 집안 출신으로, 키가 크고 힘이 세며 겁이 없어서 싸움에서 거의 진 적이 없었어요. 유방은 농부의 아들로, 작은 마을의 관리였어요. 싸움은 잘 못했지만 똑똑한 신하들의 말을 잘 듣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줄 알았어요.
처음에는 항우가 더 강해서, 유방에게 산속 먼 곳에 있는 ‘한’이라는 나라를 주었어요. 하지만 유방은 다시 나왔고, 두 편은 4년 동안 싸웠어요. 항우는 전투마다 이겼지만, 유방은 계속 식량과 군사를 얻었고 편드는 사람도 점점 늘어났어요.
마침내 기원전 202년, 항우는 해하라는 곳에서 포위되었어요. 밤에 적진에서 고향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오자, 항우는 고향 사람들이 모두 적의 편이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몇몇 기병과 함께 포위를 뚫었지만 강가에서 길이 막혔고, 붙잡히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어요.
유방은 황제가 되어 한나라를 세웠고, 한나라는 400년 가까이 이어졌어요. 얼마나 중요했던지 지금도 중국 사람들은 스스로를 ‘한족’이라 부르고, 중국 글자를 ‘한자’라고 해요. 장기판에 적힌 ‘초(楚)’와 ‘한(漢)’도 바로 이 전쟁에서 왔어요.
한눈에 보기
- 기간
- 기원전 206–202년(기원전 209–206년의 반진 봉기에 이어서)
- 장소
- 중국 북부와 중부, 특히 관중(웨이수이 분지)에서 화이허·양쯔강 하류에 이르는 지역
- 주요 세력
- 항우의 서초(西楚) 대 유방의 한(漢). 양쪽 모두 편을 바꾸는 여러 제후왕과 연합
- 주요 인물
- 항우, 유방 / 범증 / 한신, 소하, 장량, 진평 / 팽월, 영포(경포)
- 결정적 전투
- 팽성 전투(기원전 205), 형양·성고 대치, 정형 전투(기원전 204), 유수 전투(기원전 203), 해하 전투(기원전 202)
- 결과
- 항우 사망, 유방이 황제(한 고조)로 즉위해 한 왕조 성립
- 주요 사료
-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날짜로 따라가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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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
진승·오광의 봉기를 계기로 동방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항량과 조카 항우는 오에서 초를 일으켰고 유방은 패에서 거병했으며, 초 회왕이 옹립되었다. 항량이 정도에서 전사한 뒤 항우는 거록에서 진의 주력을 깨뜨리고 장한의 항복을 받았고, 그사이 유방은 무관을 넘어 진의 도읍으로 향했다.
資治通鑑 卷7 秦紀二 (Zizhi tongjian, 209 BC), Wikisource資治通鑑 卷8 秦紀三 (Zizhi tongjian, 208–207 BC), Wikisource史記 卷16 秦楚之際月表 (Shiji, monthly table of the Qin–Chu transition), WikisourceChu–Han Contention (English Wikipedia)sxtwl_cpp (寿星天文历 by 許劍偉), SSQ.cpp: new-moon fit '古历·秦汉' and 10th-month year start / 後九月 rule for -220…-104, used to convert lunar months
최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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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초한전쟁이란
초한전쟁은 기원전 206년부터 202년까지 중국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전쟁이다. 진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함께했던 두 반란 지도자, 곧 스스로 서초패왕(西楚霸王)이라 칭한 항우와 한왕(漢王) 유방이 맞섰다. 전쟁의 이름은 두 사람의 나라인 초와 한에서 왔다.
이 전쟁은 더 큰 드라마의 두 번째 막이다. 첫째 막은 기원전 209년부터 중국 곳곳에서 진에 맞서 일어난 봉기였고, 둘째 막은 승자들 사이에서 누가 제국을 물려받을지를 두고 벌어진 다툼이었다. 유방이 이겼고, 기원전 202년 한 왕조의 첫 황제, 곧 한 고조(高祖)가 되었다.
한 왕조는 중국 문명의 틀을 만든 시대 가운데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 건국 이야기는 역사서와 시, 경극, 소설, 영화, 심지어 장기 같은 놀이로까지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왔다.
쉬움
배경: 진나라의 몰락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다른 전국(戰國)의 나라들을 모두 정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세웠다. 진의 왕은 ‘황제’라는 새 칭호를 쓰기 시작했고, 이 사람이 진시황, 곧 시황제다. 진은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군현제로 중앙집권적 통치를 했다. 그러나 법이 엄했고, 수많은 사람이 군대와 성벽·도로·궁궐·황제릉 같은 거대한 공사에 동원되었다.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에 죽었다. 권신 조고와 이사의 도움으로 작은아들이 2세 황제가 되었고, 정치적 살해가 잇따랐다. 기원전 209년 징발된 농민들의 우두머리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켰다. 『사기』에 따르면 이들은 변경으로 가는 길에 비를 만나 기한을 넘기게 되었는데, 늦으면 사형을 당할 처지라 차라리 봉기를 택했다고 한다. 진승이 남긴 말로 알려진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으랴(王侯將相寧有種乎)”는 지금도 유명하다.
진승과 오광의 봉기는 곧 진압되었지만 불씨를 남겼다. 동쪽 곳곳에서 반란 세력이 진에게 멸망당한 옛 나라들을 되살렸다. 남쪽에서는 항량과 그의 조카 항우가 군대를 일으키고, 옛 초나라 왕실의 후손을 초 회왕(懷王)으로 세웠다. 초의 깃발 아래 모인 여러 지방 지도자 가운데 패현 출신의 유방도 있었다.
쉬움
두 맞수: 항우와 유방
항우(기원전 232년경–202)는 대대로 초나라 장수를 낸 집안 출신이다. 할아버지 항연은 진과 싸우다 죽었다. 『사기』는 그가 키가 유난히 크고 힘이 세서 청동 솥을 들어 올릴 정도였다고 전하며, 그는 뛰어난 야전 지휘관이었다. 동시에 자존심이 강하고 쉽게 성을 냈으며, 사료에 따르면 매우 잔인한 일도 서슴지 않았다.
유방(기원전 256 또는 247–195)은 농가 출신으로, 패현에서 작은 역참을 맡은 정장(亭長)이라는 하급 관리였다. 역사가들은 그를 거칠고 술과 여자를 좋아하며 때로는 비겁하지만, 너그럽고 사람을 잘 알아보며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인물로 그린다. 그의 곁에는 행정가 소하, 책사 장량, 모사 진평, 무장 번쾌, 그리고 뒤에 합류한 명장 한신이 있었다.
초 회왕은 진의 본거지인 관중(關中), 곧 ‘관문 안의 땅’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을 그곳의 왕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유방은 서쪽으로, 항우는 진의 주력군을 상대하러 북쪽으로 갔다. 이 약속이 뒤의 모든 다툼을 좌우하게 된다.
중급
기원전 207–206년: 진의 멸망과 홍문의 연회
기원전 207년 항우는 초군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포위된 거록(鉅鹿)을 구하러 갔다. 『사기』에 따르면 그는 배를 가라앉히고 솥을 깨뜨리며 사흘치 식량만 남겨, 이기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게 했다. 이것이 ‘파부침주(破釜沈舟)’다. 초군은 진군을 격파했고, 진의 장수 장한은 뒤에 항복했다. 그러나 항우는 신안(新安)에서 항복한 진나라 병사들을 죽였다. 『사기』는 그 수를 20만 명 이상으로 적는데, 이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 학살이 어떻게 기억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사이 유방이 먼저 관중에 들어갔다. 기원전 207년 말 진의 마지막 군주 자영(子嬰)이 그에게 항복했다. 유방은 창고와 궁궐을 봉하고, 『사기』에 따르면 진의 법을 없애고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도둑질한 자는 죄에 따라 벌한다’는 간단한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내세워 민심을 얻었다.
훨씬 큰 군대를 이끌고 도착한 항우는 크게 노했다. 유명한 ‘홍문의 연회(鴻門宴)’에서 책사 범증은 유방을 죽이라고 권했고, 항장은 칼춤을 추다 유방을 찌르려 했다. 유방은 몸을 낮춰 사죄했고, 장량과 번쾌의 도움으로 몰래 빠져나갔다. 항우는 이어 함양에 들어가 자영을 죽이고 진의 궁궐을 불태웠다.
기원전 206년 항우는 제국을 18개 왕국으로 나누어 장수와 동맹자들에게 주고, 자신은 서초패왕이 되어 팽성(지금의 쉬저우)을 도읍으로 삼았다. 약속과 달리 유방을 관중의 왕으로 삼지 않고, 서남쪽 외진 파·촉·한중 땅을 주어 한왕으로 봉했으며, 관중은 항복한 진의 장수 셋에게 나눠 주었다. 초 회왕은 ‘의제(義帝)’라는 허울뿐인 칭호를 받고 쫓겨났다가 항우의 명으로 살해되었다.
중급
전쟁의 전개, 기원전 206–203년
유방은 한중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소하의 추천으로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았고, 기원전 206년 한군은 진창(陳倉)을 거치는 뜻밖의 길로 관중에 쳐들어가 항우가 세운 세 왕을 무찔렀다. 항우가 의제를 죽인 일은 유방에게 명분을 주었다. 유방은 상을 치르며 제후들에게 시해자를 벌하자고 호소했다.
기원전 205년 항우가 동북쪽의 제나라에서 싸우는 사이, 유방은 『사기』에 따르면 56만 명에 이르는 연합군을 이끌고 팽성을 차지했다. 항우는 정예 3만 명을 이끌고 급히 돌아와 이들을 대파했다. 『사기』는 한군 병사가 너무 많이 죽어 수수(睢水)가 흐르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적는다. 유방은 간신히 달아났고, 아버지와 아내 여치(呂雉)는 사로잡혔다.
이후 전쟁은 황하 근처에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길목과 큰 곡식 창고를 지키던 형양(滎陽)과 성고(成皐)를 둘러싼 긴 대치로 이어졌다. 항우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이겼지만, 소하가 관중에서 끊임없이 군사와 식량을 보냈고, 진평의 이간책으로 항우와 범증 사이에 불신이 생겨 범증은 화가 나 떠났다가 기원전 204년에 죽었다. 초의 배후를 치는 팽월의 유격전과 구강왕 영포의 귀순도 초를 더욱 약하게 만들었다. 한번은 항우가 유방의 아버지를 삶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사기』 속 유방은 우리가 형제의 의를 맺었으니 내 아버지가 곧 네 아버지라며, 삶거든 국 한 그릇 나눠 달라고 대꾸한다.
북쪽에서는 한신이 독자적인 원정을 눈부시게 펼쳤다. 위와 대를 정복하고, 기원전 204년 정형(井陘)에서는 일부러 강을 등지고 진을 쳐 병사들이 물러설 수 없게 한 끝에 조나라 군대를 무찔렀다. ‘배수진(背水陣)’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이어 제나라를 차지하고, 기원전 203년 유수(濰水)에서 초의 구원군을 섬멸했다. 한신은 제왕(齊王)의 자리를 요구해 받아 냈다. 이제 초는 여러 방향에서 포위되었다.
중급
홍구의 화약과 해하의 최후(기원전 203–202)
기원전 203년 양쪽 모두 지친 가운데, 항우와 유방은 홍구(鴻溝)를 경계로 동쪽은 초, 서쪽은 한으로 천하를 나누기로 약속했다. 항우는 유방의 아버지와 아내를 돌려보냈다. 그러나 항우의 군대가 물러가자 장량과 진평은 유방에게 약속을 깨고 뒤쫓으라고 권했다. 처음에는 한 번 밀렸지만, 유방이 한신과 팽월에게 넉넉한 땅을 약속하자 두 사람의 군대가 합류했다.
기원전 202년 말 한의 연합군은 지금의 안후이성에 있는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에워쌌다. 『사기』에 따르면 밤이 되자 사방의 적진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왔고, 항우는 한이 이미 초 땅을 모두 차지했느냐며 탄식했다. 그는 사랑하는 우미인(虞美人)과 술을 마시며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노라(力拔山兮氣蓋世)”로 시작하는 짧은 노래를 불렀다. ‘사면초가(四面楚歌)’는 지금도 사방이 막혀 도움받을 데 없는 처지를 뜻한다.
항우는 기병 800여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달아났으나 한의 기병이 뒤쫓았다. 오강(烏江)에 이르자 그곳 정장이 배로 강동(江東)의 고향 땅에 건네줄 테니 다시 군대를 일으키라고 권했다. 항우는 자신을 따라나섰다가 모두 죽은 강동의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그 부형들을 볼 낯이 없다며 거절했다. 마지막 싸움 끝에 그는 스스로 목을 찔렀다. 얼마 뒤 유방이 황제로 즉위했고, 한 왕조가 시작되었다.
중급
결과: 한 왕조와 그 타협
가장 뚜렷한 결과는 새 왕조의 탄생이다. 한은 왕망의 신(新, 서기 9–23)으로 잠시 끊긴 것을 빼면 서기 220년까지 이어졌고, 중국의 다수 민족인 한족(漢族)과 한자(漢字)라는 이름을 남겼다. 한은 진의 중앙집권적 행정 체제는 물론 법률도 상당 부분 이어받았는데, 이는 발굴된 법률 문서로 확인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진보다 너그러운 통치자로 내세웠다.
전쟁은 한의 정치 구조도 결정했다. 유방은 강력한 동맹자들의 도움으로 이겼고, 그들을 왕으로 봉했다. 그래서 한 초기에는 서쪽의 직할 군현과 동쪽의 반독립적 제후국이 섞인 군국제(郡國制)가 시행되었다. 몇 년 안에 유방은 유씨가 아닌 왕들을 거의 모두 없앴다. 한신은 기원전 201년 강등되었다가 196년 처형되었고, 팽월과 영포도 제거되었다. 한신에게 붙은 ‘토사구팽(兎死狗烹)’, 곧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는다는 말은 후대 사람들이 이 일을 어떻게 보았는지 보여 준다.
여러 해에 걸친 반란과 내전이 백성에게 준 피해는 컸지만 믿을 만한 숫자는 없다. 사마천은 한 초기에 큰 도시들의 인구가 흩어져, 셀 수 있는 호구가 예전의 일부에 불과했다고 적었다. 한 초기의 황제들은 세금과 요역을 줄이고 큰 전쟁을 피하며 황로(黃老) 사상의 영향을 받은 휴양 정책을 폈다. 기원전 200년 백등산에서 흉노에게 포위당한 뒤, 유방은 북방 유목 제국과 혼인·예물로 평화를 사는 화친(和親) 정책을 택했다.
중급
기억: 시와 고사성어, 경극과 장기
중국 역사에서 이만큼 많은 고사성어를 남긴 사건은 드물다. 결사의 각오를 뜻하는 ‘파부침주’, 겉은 잔치지만 속은 함정인 자리를 이르는 ‘홍문연’, 물러설 곳 없이 싸운다는 ‘배수진’, 그리고 ‘사면초가’가 그렇다. 이 말들은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한자 문화권 전체에서 쓰인다.
시인들은 오강에서 항우가 내린 선택을 두고 논쟁했다. 당나라 시인 두목은 항우가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흙먼지를 일으키며 쳐들어올 수도 있었다고 노래했고, 여기서 ‘권토중래(捲土重來)’가 나왔다. 송나라의 왕안석은 강동의 젊은이들이 다시는 그를 위해 싸우지 않았을 것이라 반박했다. 송 왕실이 여진을 피해 남쪽으로 쫓겨간 시대를 산 여성 시인 이청조는 항우를 두고 “살아서는 사람 중의 호걸, 죽어서도 귀신 중의 영웅”이라 기리며 강동으로 건너가지 않은 그를 그렸는데, 이는 자기 시대의 군주를 넌지시 꾸짖은 것으로 읽힌다.
항우와 우미인의 이야기는 경극 「패왕별희(霸王別姬)」가 되어 메이란팡의 공연으로 유명해졌고, 천카이거 감독의 1993년 영화 제목이 되었다. 명대의 통속 소설은 전쟁 전체를 다시 이야기했고, 한국에서는 『초한지』라는 이름의 소설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 장기(샹치)판 가운데 강에는 ‘초하한계(楚河漢界)’라고 쓰여 있고, 한국 장기에서도 두 장수의 궁에 ‘楚’와 ‘漢’이 새겨져 있다.
근현대의 기억은 정치적 형태를 띠기도 했다. 20세기 중국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진승·오광의 봉기를 중국 역사상 첫 대규모 농민 봉기로 높이 평가했고, 유방의 미천한 출신을 항우의 귀족적 배경과 대비하기도 했다. 나라 안의 전쟁이었기에 기억은 국가 사이가 아니라, 항우의 영웅성과 유방의 정치적 수완 가운데 무엇에 더 끌리느냐에 따라 갈린다.
심화
1차 사료: 사마천과 반고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은 전쟁 뒤 약 한 세기가 지난 기원전 91년 무렵 사마천이 완성한 『사기』에서 나온다. 항우·고조·한신·소하·장량 등을 다룬 여러 편이 서로 겹쳐, 같은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사마천은 사건에 직접 참여한 육가(陸賈)가 지었다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초한춘추(楚漢春秋)』 같은 앞선 기록과 조정 문서, 그리고 여행하며 모은 구전을 활용했다.
반표가 시작하고 아들 반고가 서기 1세기에 대부분을 쓴 『한서』는 같은 시기를 다루는데, 『사기』를 거의 그대로 옮기면서도 배열과 강조점을 바꾸었다. 사마광의 『자치통감』(1084) 같은 후대의 종합 역사서는 사건을 연대순으로 정리했지만, 이 시기에 대해 독자적인 증거를 더하지는 못한다.
고고학은 줄거리보다 맥락을 준다. 수호지(睡虎地)·이야(里耶)에서 나온 진의 법률·행정 죽간과 장가산(張家山)에서 나온 한 초기의 법률 죽간은 진나라가 실제로 어떻게 움직였는지, 한이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을 이어받았는지 보여 준다. 진의 법률에 특정 부역에 늦은 경우 사형이 아니라 벌금을 매긴 조항이 있다는 점을 들어, 진승의 무리가 사형을 앞두었다는 이야기를 의심하는 학자도 있다. 다만 그들이 맡은 역이 달랐을 수도 있다. 이런 발견은 한의 역사가들에게 무너진 진을 잔혹하게 그릴 이유가 있었음을 일깨운다.
심화
연구사: 이야기는 어떻게 빚어졌나
사마천은 항우를 본래 군주를 위한 자리인 ‘본기(本紀)’에 넣었다. 한때 그가 실질적으로 천하를 다스렸음을 인정한 것이다. 한 왕실의 사관으로서 글을 쓴 반고는 그를 진승과 함께 일반 ‘열전(列傳)’으로 옮겼다. 이 차이는 이후로도 이어진 정통성 논쟁을 반영한다.
사마천은 단순히 한 왕조를 선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팽성에서 빨리 달아나려고 자기 자식들을 수레에서 밀어 떨어뜨린 일처럼 유방에게 불리한 일화도 기록했다. 항우에 대한 평가도 복잡하다. 그의 급속한 부상을 높이 사면서도, 힘에만 기댄 점과 마지막에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싸움을 잘못한 탓이 아니다”라고 한 말을 두고 어리석다고 비판한다. 오늘날 많은 독자는 『사기』의 인물 묘사에서 도덕적 효과를 위해 인물을 빚어낸 문학적 솜씨를 본다.
그 솜씨는 신뢰성 문제를 낳는다. 대화와 극적인 몸짓으로 가득한 홍문의 연회 같은 장면이 한 마디 한 마디 기록되었을 리 없으며, 얼마나 극화되었는지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팽성의 56만, 신안의 20만 같은 숫자도 과장되었거나 상징적일 가능성이 크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 전쟁을 구조적으로 다시 해석하기도 한다. 전국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여러 왕국의 질서를 되살리려 한 항우와, 결국 진의 모델 위에 중앙집권 제국을 다시 세운 유방의 대결로 보거나, 초를 비롯한 지역 정체성이 큰 역할을 한 싸움으로 보는 것이다.
주요 전투 (3)
핵심 개념
- 진에서 한으로
- 진이 무너진 뒤 누가 최초의 중국 제국을 물려받을지를 결정한 전쟁이었다.
- 영웅 대 정치가
- 항우의 뛰어난 군사 능력은 신하·동맹·보급을 잘 활용한 유방의 수완에 졌다.
- 보급과 근거지
- 소하가 다스린 관중이라는 안정된 근거지 덕분에 유방은 거듭 패하고도 버틸 수 있었다.
- 군현과 제후국
- 전쟁은 직할 군현과 반독립 제후국이 섞인 체제를 남겼고, 한은 이를 점차 해체해 갔다.
- 정통성
- 회왕의 약속, 의제 시해, 후대 역사가의 선택이 누가 정당한 군주로 보일지를 좌우했다.
- 문학으로서의 역사
- 사마천의 생생한 장면은 전쟁을 잊을 수 없게 했지만, 사실과 극화를 가려내기 어렵게도 한다.
기록
- 기원전 221년 — 진나라가 중국 통일을 완성한다(기원전 221).
- 기원전 210년 — 시황제가 죽는다(기원전 210).
- 기원전 209년 — 진승·오광이 봉기하고 반란이 번진다(기원전 209).
- 기원전 207년 — 항우가 거록에서 승리하고, 연말에 자영이 유방에게 항복한다(기원전 207).
- 기원전 206년 — 홍문의 연회. 항우가 함양을 불태우고 18왕국을 세우며, 유방은 한왕이 되었다가 관중으로 돌아온다(기원전 206).
- 기원전 205년 — 유방이 팽성을 차지하지만 항우에게 대패한다(기원전 205).
- 기원전 204년 — 한신이 정형에서 승리하고, 범증이 항우를 떠나 죽는다(기원전 204).
- 기원전 203년 — 한신이 유수에서 승리하고, 홍구의 화약으로 천하를 나눈다(기원전 203).
- 기원전 202년 — 해하 전투. 항우가 오강에서 죽고 유방이 황제로 즉위한다(기원전 202).
- 기원전 200년 — 유방이 백등산에서 흉노에게 포위된다(기원전 200).
- 기원전 196년 — 한신이 처형된다(기원전 196).
- 약 기원전 91년 — 사마천이 이 전쟁의 주요 사료인 『사기』를 완성한다(기원전 91년경).
용어 풀이
- 진(秦)
- 기원전 221년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기원전 207/206년에 무너진 왕조.
- 한(漢)
- 유방이 세운 왕조. 잠시 끊긴 시기를 빼고 기원전 202년부터 서기 220년까지 이어졌다.
- 초(楚)
- 전국 시대 남방의 큰 나라. 반란 세력이 그 이름과 정체성을 되살렸다.
- 관중(關中)
- ‘관문 안의 땅’. 지금의 시안 일대 웨이수이 분지로, 진의 본거지였다.
- 패왕(霸王)
- 항우가 다른 왕들 위에 선 우두머리로서 쓴 칭호.
- 군현제
- 중앙에서 보낸 관리가 지방을 직접 다스리는 제도.
- 본기(本紀)
- 『사기』에서 군주와 왕조를 다룬 부분.
- 화친(和親)
- 한 초기에 혼인과 예물로 흉노와 평화를 유지한 정책.
- 흉노
- 중국 북방의 강력한 유목 부족 연합.
묻고 답하기
왜 ‘초한’전쟁이라고 해요?
싸운 두 편이 항우의 서초와 유방의 한나라였기 때문이에요.
항우가 유방보다 싸움을 더 잘했어요?
네, 대부분의 기록은 항우가 더 뛰어난 장군이었다고 말해요. 유방이 이긴 것은 든든한 식량 기지, 좋은 신하, 한신 같은 장군, 그리고 동맹을 모으는 능력 덕분이었어요.
‘사면초가’는 무슨 뜻이에요?
해하에서 항우가 적진에서 들려오는 고향 초나라 노래를 듣고, 사방이 막히고 버림받았다고 느낀 데서 나온 말이에요. 지금은 어디에도 도움받을 데가 없는 처지를 뜻해요.
항우는 정말 항복한 병사 20만 명을 죽였나?
『사기』는 그렇게 적고 있고 신안의 학살은 어떤 형태로든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고대 중국의 숫자는 과장이 잦아 정확한 규모는 확인할 수 없다.
사마천은 왜 항우를 군주의 자리인 본기에 넣었나?
몇 년 동안 항우가 왕들을 봉하는 실질적인 천하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반고는 이에 반대해 그를 열전으로 옮겼고, 이는 정통성 논쟁을 반영한다.
홍문의 연회는 실제 있었던 일인가?
두 지도자의 만남은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자세한 대화와 칼춤 장면은 이야기꾼들의 전승과 사마천의 문학적 손질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전쟁 뒤 유방의 장수들은 어떻게 되었나?
한신과 팽월을 비롯한 유씨가 아닌 왕들 대부분은 몇 년 안에 강등되거나 처형되었다. 유방이 권력을 중앙으로 모았기 때문이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초한전쟁. 위키백과
- 항우. 위키백과
- 유방. 위키백과
- Han Xin. Wikipedia
- Feast at Hong Gate. Wikipedia
- Battle of Gaixia. Wikipedia
- 사기 (역사서). 위키백과
- Book of Han. Wikipedia
- Denis Twitchett, Michael Loewe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1: The Ch’in and Han Empires, 221 B.C.–A.D. 22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 사마천, Burton Watson 옮김,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Han Dynasty I (개정판 영역본).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3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