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400여 년 전인 1592년, 일본의 대군이 조선에 쳐들어와 수도 한양(지금의 서울)을 차지했어요. 조선은 중국의 명나라에 도움을 청했어요.
1593년 초, 이여송이라는 장수가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왔어요. 명군은 조선 군사와 함께 북쪽의 큰 도시 평양을 되찾았고, 일본군은 서둘러 남쪽의 한양으로 물러났어요. 승리에 신이 난 이여송은 한양까지 빨리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여송은 무거운 대포와 걸어서 가는 군사들을 뒤에 남겨 두고, 말 탄 군사들만 데리고 앞서 달려갔어요. 한양 북쪽에는 중국 사신이 묵어 가던 ‘벽제관’이라는 집이 있었고, 그 조금 남쪽에서 길은 낮은 고개를 넘었어요. 그 고개 뒤에 일본군이 잔뜩 숨어 있었어요.
일본군은 여러 방향에서 나와 명나라 기병을 에워쌌어요. 땅은 진흙탕이라 말이 제대로 달리지 못했고, 일본군은 길고 날카로운 칼과 총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여송의 부하 장수 한 명이 그를 지키다 목숨을 잃었고, 이여송은 겨우 빠져나왔어요.
이 패배 뒤 이여송은 북쪽으로 물러났고 다시 한양을 치지 않았어요. 군사들은 먹을 것이 모자랐고 말도 많이 죽었거든요. 몇 달 뒤 일본군은 양쪽이 평화 협상을 하기로 하면서 한양을 떠났어요. 벽제관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는 기록에 적힌 추정치가 서로 달라서 지금도 의견이 갈려요.
한눈에 보기
- 날짜
- 1593년(선조 26) 음력 1월 27일(조선 역법) = 양력 1593년 2월 27일(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표 기준). 주된 싸움은 한낮 무렵에 벌어졌다
- 장소
- 여석령(礪石嶺, 일명 숫돌고개).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개성에서 한양으로 가는 큰길 위의 벽제관(벽제역)에서 남쪽으로 약 3km. 지도의 점은 벽제관 터를 가리킨다
- 전쟁
- 임진왜란(1592–1598)의 첫 번째 침략 시기, 1593년 초 조명 연합군의 반격 국면
- 지휘관
- 명: 제독 이여송, 선발대를 이끈 사대수, 지원군을 이끌고 온 양원. 조선의 방어사 고언백이 첫 접전에 함께했다 / 일본: 선봉을 이끈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그 맨 앞에 선 다치바나 무네시게. 한양의 일본군 총대장은 우키타 히데이에
- 병력
- 명: 이여송 직속 기병 약 1천 명과 기병 위주의 선발대 약 3천 명, 뒤늦게 도착한 후속 부대. 포병과 남병 보병은 뒤에 남았다 / 일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한양에서 4만여 명이 출격했으나 모두 싸운 것은 아니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전사는 선봉을 약 2만 명으로 본다
- 피해
- 논란이 있다. 이여송은 명군 전사 264명·부상 49명을 보고했고, 조선 관리들이 전한 수치는 양쪽 각각 약 300명 또는 500~600명이며, 명 남병의 한 장교는 명군 사상자를 1,500명으로 전했고, 17세기 중엽 이후의 일본 군기물은 명군 전사자를 6,000명 또는 1만 명으로 적는다. 일본군의 피해는 믿을 만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 결과
- 일본군의 승리. 이여송은 파주를 거쳐 개성으로, 뒤에 평양으로 물러났다. 명군은 다시 한양을 공격하지 않았고, 일본군은 강화 교섭에 따라 1593년 5월 18일 한양을 떠났다
- 주요 사료
- 『선조실록』의 보고들(1593년 음력 2월), 『선조수정실록』, 유성룡의 『징비록』, 명의 보고와 송응창의 문서, 수십 년 뒤에 쓰인 일본의 군기물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쉬움
벽제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벽제관 전투는 1592년에 시작된 일본의 조선 침략, 곧 임진왜란 때의 전투이다. 1593년 음력 1월 27일에 벌어졌다. 한국천문연구원(KASI)의 음양력 변환표로 바꾸면 1593년 2월 27일이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일본 측 날짜를 1월 26일로 적고 이를 같은 양력 날짜로 환산하는데, 이 글이 참고한 자료는 하루 차이가 나는 까닭을 설명하지 않는다.
벽제관은 개성에서 한양으로 가는 큰길 위, 한양 북서쪽의 벽제역에 딸린 객사로, 중국 사신이 한양에 들어가기 전날 반드시 묵어 가던 곳이었다. 싸움은 주로 벽제관에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낮은 고개 여석령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여석령 전투라고도 부른다.
몇 주 전,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았다. 이여송은 이어 한양을 되찾으려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27일 아침, 그는 일본군과 맞붙은 선발대에 합류하려고 직속 기병 1천여 명만 이끌고 본대보다 앞서 달려갔다. 한양의 일본군 장수들은 나가 싸우기로 이미 마음을 정했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끈 선봉은 좁고 진흙탕인 땅에서 명 기병을 여러 방향에서 공격했다. 이여송은 간신히 빠져나왔고 명군은 물러났다.
싸움 자체는 짧았고 피해 규모에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결과는 컸다. 이여송은 개성으로, 다시 평양으로 물러났고, 명군은 다시는 한양을 힘으로 되찾으려 하지 않았으며, 전쟁은 강화 교섭 쪽으로 흘러갔다. 아래에서는 사료마다 무엇을 말하는지, 왜 이렇게 다른지를 살펴본다.
쉬움
평양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
1593년 1월(음력 1592년 12월), 이여송이 이끄는 4만여 명의 명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명군은 조선 관군·승군과 함께 2월 8일 평양성을 총공격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빠져나갔다. 구로다 나가마사도 황해도에서 물러났고, 2월 19일 연합군은 큰 싸움 없이 개성을 되찾았다. 북쪽의 일본군 장수들은 한양으로 모여들었다. 약 2만 명의 가토 기요마사 군만 아직 멀리 함경도에 있었다.
한양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유성룡의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음력 1월 24일(양력 2월 24일) 평양 패전에 분노하고 도성 백성이 몰래 명군과 내통한다고 의심한 일본군은 성안에 남아 있던 조선 남자들을 대거 죽이고 관청과 민가를 거의 다 불태웠다. 일본군은 한양 가까운 산과 들도 불태웠는데, 이 때문에 뒤에 명 기병은 말먹이를 구하기 어려웠다.
일본군 장수들은 성안에서 기다릴지, 나가서 명군을 맞아 싸울지 정해야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개성을 지키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끝까지 개성을 지키려 했으나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가 거듭 철수를 권하자 물러났고, 한양 성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채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함께 성 밖에서 명군과 맞서기로 했다. 백과사전은 한양에 모인 일본군을 5만 명가량으로, 고바야카와를 선봉으로 삼아 반격에 나선 병력을 4만여 명으로 적는다. 일본 측 서술을 정리한 일본어 위키백과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오타니 요시쓰구가 성을 지키자고 주장했고, 결국 병력을 나누어 일부를 한양에 남겼다고 덧붙인다.
명군 쪽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개성에서 작전 회의를 마친 명군이 일본군 주력을 격멸하고 한양을 되찾으려고 음력 1월 25일(양력 2월 25일) 한양을 향해 출발했다고 적는다. 『선조실록』에 실린 종합 기록은 이여송이 26일 임진강 하류의 여울을 건너 파주에 진을 쳤다고 전한다. 군량을 맡은 유성룡은 군량과 말먹이를 서둘러 날랐고, 임진강의 얼음이 녹고 있어 칡으로 꼰 밧줄을 이어 다리를 만들어 군사를 건넸다. 명군이 서둘러 진격하기를 바란 조선 관리들은 일본군 수를 적게 말했다. 영어 위키백과는 유성룡이 한양의 일본군을 1만 명 정도로 보았다고 적고, 몇 주 뒤 조선의 한 역관은 명 장수들에게 조선 관리들이 일본군이 적다고 말하라고 시켰다고 털어놓았다.
쉬움
여석령의 싸움: 1593년 2월 27일
27일 이른 아침, 사대수가 이끄는 명군 선발대가 조선의 방어사 고언백과 함께 한양 쪽으로 정찰을 나갔다. 이들은 벽제관 길 근처에서 일본군 한 부대를 만나 쳐부수고 수급을 베었다. 벤 수급의 수는 기록마다 다르다.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은 100여 급, 유홍의 보고는 400여 급, 『선조실록』 종합 기록은 600여 급, 이덕형의 보고는 1천여 급으로 적는다. 기세가 오른 선발대는 더 나아갔지만 뒤이어 더 큰 일본군이 몰려왔고, 사대수는 벽제 쪽으로 물러났다.
이여송은 한양으로 가는 길을 직접 살피려고 남쪽으로 오던 중이었다. 접전 소식을 듣자 그는 본대를 남겨 둔 채 가정 기병을 이끌고 서둘러 달려갔다. 혜음령을 넘다가 말이 넘어져 떨어졌는데, 조선 측 보고는 그가 얼굴을 다쳤다고 적는다. 그는 도착한 기병들을 이끌고 여석령 부근에서 싸움에 나섰다.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대군을 고개 뒤에 숨기고 고개 위에는 수백 명만 보였다. 명군이 나아가자 1만여 명의 일본군이 갑자기 산 위에 나타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이 세 부대로 나뉘어 명군을 에워싸 공격했다고 설명한다. 명 기병에게는 신기전 말고는 화기가 없었다. 포병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길은 좁고 진흙이 깊었다. 유성룡은 이여송이 거느린 북방 기병은 짧고 무딘 칼만 가졌던 반면 일본 보병은 서너 자나 되는 날카로운 칼을 휘둘렀다고 적었고, 조선 측 기록에는 사방에서 쏟아진 일본군의 총포 사격도 나온다. 명군은 육박전 끝에 밀려났다.
이여송 자신도 붙잡힐 뻔했다. 『선조수정실록』은 그의 휘하 이유승(조선 기록에는 이름이 여러 가지로 적힌다)과 용사 80여 명이 죽었다고 적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여송이 이유승의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고 쓴다. 그날 저녁 파주로 돌아온 이여송은 이유승의 사위를 불러 등을 어루만지며 “좋은 남아였는데 나를 위해 죽었다”며 통곡했다. 명군이 물러날 무렵 양원의 지원군이 도착했고, 『선조실록』에 따르면 혜음령까지 뒤쫓아 온 일본군은 명의 대군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넘지 못한 채 한양으로 돌아갔다.
중급
몇 명이 죽었나: 네 갈래의 기록
피해 규모는 사료마다 크게 다르며, 세는 대상도 항상 같지는 않다. 전사자만 세기도 하고,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치기도 하고, 양쪽 손실을 함께 적기도 한다. 기록은 크게 네 갈래로 나뉜다.
이여송 자신의 보고는 명군 피해를 전사 264명, 부상 49명, 말 276필로 적었다. 영어 위키백과는 이 수치를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에서 1972년에 펴낸 리광타오(李光濤)의 연구에서 인용한다. 명 지휘부가 조선에 한 말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전투 이튿날 이여송은 유성룡 등에게 “우리 군사는 어제 왜적을 이겼을 뿐 별달리 패배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도체찰사를 맡고 있던 우의정 유홍은 이여송이 “휘하의 두 파총만 잃었다”고 보고했고, 유성룡도 처음에는 명군 사상자를 수십 명이라고 전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들은 조선 관리들은 더 큰 수를 전했다. 접반사 윤근수는 명의 찬획 서일관에게서 들은 말로, 명군 300여 명이 손실되었고 죽인 왜적도 300명으로 살상이 엇비슷하다고 보고했다. 혜음령에서 싸움을 지켜본 이덕형은 선조에게 양쪽 사상자가 서로 엇비슷하여 “거의 5~6백 명”에 이른다고 아뢰었다. 『선조실록』의 종합 기록은 명군 전사자가 수백 명이었다고 적는다. 훨씬 큰 수는 정탐인으로 파견된, 천호(千戶) 벼슬의 명 남병 장교 오유산(吳惟珊)에게서 나왔다. 그는 벤 왜적은 겨우 120여 명인데 명군 사상자는 1,500여 명이고 죽은 장관도 14명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전한 조선 관리들은 남병이 이여송과 틈이 있으니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가장 큰 수는 일본 측 서술에 나온다.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처럼 17세기 중엽 이후에 쓰인 군기물은 명군 6,000명 또는 1만 명이 죽고 일본군은 수백 명만 잃었다고 적고,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펴낸 전사도 명군 전사자를 6,000여 명으로 추정했다. 일본군의 피해는 확실히 알 수 없다. 1593년 3월의 병력 점검 기록에는 다치바나 무네시게 부대가 크게 줄어 있지만, 일본어 위키백과는 전투를 치르지 않은 부대도 크게 줄었으므로 줄어든 수를 모두 전사자로 볼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당대 보고 여러 건은 명군 피해를 수백 명 규모로 적지만, 다른 보고는 사상자가 1,500여 명이라고 한다. 이 수치들은 세는 대상이 다르며,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전체 전사자 수를 확정할 수 없다.
중급
개성으로, 다시 평양으로
이튿날인 2월 28일 아침, 이여송은 임진강을 건너 동파로 물러나려 했다. 유성룡·유홍·도원수 김명원·이덕형 등은 그의 진영으로 찾아가,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백성들이 왜적에게 버려지게 된다며 물러나지 말라고 간청했다. 이여송은 원래 정탐하러 온 것이고, 파주는 말먹이가 부족하고 비가 와 진흙탕이며 뒤에 강이 있으니 며칠 군사를 쉬게 한 뒤 다시 진격하겠다고 답했다. 그는 병부에 올릴 보고서 초안을 보여 주었는데, 거기에는 한양의 왜적이 20만 명에 가깝다고 적혀 있었다. 유성룡이 많아야 1만여 명이라고 반박하자, 이여송은 조선의 문서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고 대답했다. 명군은 그날 동파로 물러났고, 며칠 사이에 개성으로 돌아갔으며, 사대수에게 수백 명을 주어 임진강 나루를 지키게 했다.
이제 명군의 가장 큰 문제는 보급이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 며칠 동안 큰비가 내렸고, 일본군이 산을 불태워 풀이 없었으며, 말 돌림병까지 돌아 며칠 사이에 거의 1만 필이 쓰러졌다고 적었다. 『선조실록』의 종합 기록은 죽은 말이 1만 2천여 필이라고 한다. 개성에서는 군량이 떨어졌다. 명 장수들이 돌아가자고 청하자, 이여송은 유성룡 등 조선 관리들을 뜰아래 꿇어앉히고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꾸짖었다. 그러고는 자기 장수들에게 돌아서서, 영하의 반란을 진압할 때는 여러 날 굶고도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나무랐다. 얼마 뒤 강화에서 군량선이 도착했다. 이덕형은 선조에게 명군이 물러난 것은 군량과 말먹이가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아뢰었고, 선조도 이것이 제독만의 허물은 아니라고 인정했다.
조선 측은 거듭 다시 진격하기를 청했다. 이여송은 날이 개고 길이 마르면 나아가겠다고만 답했다. 유성룡은 이여송이 역관에게 몰래 정월은 자신의 본명과 상충하여 불길하므로 말에서 떨어졌고, 다음 달이 되어야 진군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도 보고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징비록』에 따르면, 이 무렵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함경도에서 양덕·맹산을 넘어 평양을 기습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여송은 평양이 근본이니 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남장 왕필적을 개성에 남긴 채 조선 장수들에게 강 북쪽으로 물러나라고 한 뒤 평양으로 돌아갔다. 유성룡은 종사관을 보내 물러나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아뢰게 했지만, 이여송은 말없이 떠났다.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북관대첩」 항목은 가토가 함경도에서 안전하게 철수하려고 이 소문을 퍼뜨렸다고 설명하며, 가토는 음력 2월 말 무렵 한양에 이르렀다. 『징비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여송이 이미 북쪽으로 돌아갈 뜻이 있었는데 이 소문을 핑계로 삼았다고 적는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한양 주변의 일본군 진을 함께 치자는 조선 측의 계책을 받은 왕필적은 이를 기책으로 여겼지만 이여송이 따르지 않았다.
중급
누구의 책임이었나
패전은 명군 안에서 다툼을 불러왔다. 이여송의 군대는 성격이 아주 다른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여송의 가정을 포함한 요동의 북방 기병과, 화기에 능하고 평양성 공격에 앞장섰던 절강 출신의 남병 보병이었다. 유성룡은 이여송이 성을 칠 때는 남병만 쓰고 공을 따질 때는 북군을 앞세운다고 조정에 알렸고, 이덕형은 선조에게 평양의 공은 남장 오유충이 으뜸이며 벽제의 패전은 사대수가 경솔히 진격했기 때문이라고 아뢰었다. 조정에는 이여송이 탄핵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어왔고, 영어 위키백과는 그의 부하 장수 왕필적이 군사들을 굶기고 뒤에서만 싸움을 지휘하며 평양에서 약속한 상을 주지 않았다고 그를 비판했다고 적는다.
이여송은 반대로 경략으로서 원정 전체와 보급을 책임진 문관 송응창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덕형은 선조에게, 이여송이 역관들에게 송응창이 강을 건너와 돕지도 않고, 조정에서 보낸 전마 1천 필을 붙잡아 두고, 공을 아뢰는 주본까지 막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고 전했다. 영어 위키백과의 벽제관 전투 항목도 이여송이 송응창에게 책임을 돌렸다고 적는다.
조선의 평가도 엇갈렸다. 선조는 이여송이 평양을 되찾자마자 군사를 남겨 두지 않고 개성으로 달려간 점과 공평하지 못한 논공을 비판하면서도, 군량 부족은 조선의 책임이라고 인정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도원수 김명원 등이 이여송이 적을 가볍게 보고 무모하게 진격한다고 보아 명군 뒤에 떨어져 움직였기 때문에 조선군은 손실을 면했다고 적는다. 조선군 주력은 이 싸움에 크게 가담하지 않았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조선 일부에서는 이여송을 남장 낙상지로 바꾸자는 말도 나왔다.
중급
벽제관 이후: 행주, 굶주림, 그리고 교섭
명군이 물러나자 한양의 일본군은 도성 주변의 조선군을 노렸다. 1593년 3월 14일 일본군은 행주산성을 공격했지만, 전라도 관찰사 권율은 거듭된 공격을 막아 냈다. 『선조수정실록』은 이여송이 이 승전과 그 뒤 권율이 파주 산성을 지킨 소식을 듣고 갑작스레 회군한 것을 자못 후회하면서, 장세작을 이덕형과 함께 개성으로 보내 군량을 비축해 두게 했다고 적는다.
그 뒤 두 달 가까이 양쪽은 개성과 한양 사이에서 대치했고, 양쪽 모두 굶주림에 시달렸다. 일본군 진영에는 식량 부족과 전염병이 겹쳤고, 명군 일부가 용산의 일본군 곡물 창고를 불태웠다는 기록도 있다. 명에서 보낸 군량은 의주까지만 전달되어 그 너머는 조선이 조달·수송해야 했고, 그 부담은 백성에게 돌아갔다.
이제 양쪽은 교섭에 눈을 돌렸다. 『선조수정실록』은 이여송이 개성에 머무는 동안 자주 경략 송응창에게 사람을 보냈는데, 대개 전일의 화의를 이어 가려는 것이었다고 적고, 일본어 위키백과는 이 패배를 이여송이 무력으로 일본군을 몰아내려던 방침을 접은 계기로 본다. 명의 심유경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교섭을 이어 갔고, 일본군이 한양에서 물러나고 붙잡아 둔 두 왕자를 돌려보내며 명의 사절을 받는다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일본군은 1593년 5월 18일(음력 4월 18일) 한양을 떠나 남해안의 성으로 물러났다. 전쟁을 끝까지 치르기를 바란 조선은 이 교섭에서 대부분 밀려나 있었다.
심화
사료와 그 한계
가장 풍부한 초기 증거는 전투 뒤 몇 주 사이에 선조의 조정에 올라와 『선조실록』에 실린 보고들이다. 파주에서 이여송과 함께 있었던 유성룡과 유홍의 치계, 선조 앞에서 직접 아뢴 이덕형의 목격담, 진방철·오유산 같은 명 장교의 말을 옮긴 접대 도감의 보고, 그리고 음력 2월 5일 자에 실린 사건 전체의 종합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기록들은 사건과 가깝지만, 대부분 명군이 다시 진격하기를 바란 사람들이 썼고, 그들이 인용한 명 장교들에게도 저마다의 다툼이 있었다.
전쟁 뒤에 쓰인 유성룡의 『징비록』은 매복, 짧은 칼, 말 돌림병에 관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전하고, 수십 년 뒤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은 매복과 명 기병의 어려움을 이와 매우 비슷하게 서술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연려실기술』(훨씬 뒤의 편찬물)과 이형석의 『임진전란사』(1976)를 참고문헌으로 든다. 이들 사이에도 세부가 다르다. 첫 접전에서 벤 수급의 수, 그 접전이 벌어진 곳(영서역 앞, 창릉 근처, 여석현), 이여송을 위해 죽은 장수의 이름 표기가 그렇다.
명 측 증거로는 이여송 자신의 피해 보고가 있는데, 현대 중국어권 연구가 이를 인용한다(영어 위키백과는 리광타오의 1972년 연구에서 인용한다). 송응창의 문서를 모은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도 이 원정에 관한 명 측의 중요한 일차 사료이다. 일본 측 증거는 대부분 뒤에 쓰였다.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그 부하들이 주역으로 나오고 명군 전사자를 아주 많이 적는 자세한 전투 이야기는 17세기 중엽 이후의 군기물과 가문 기록, 그리고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전사에서 나온다. 일본군 쪽 사정을 아는 데는 소중하지만, 숫자와 영웅담은 확인하기 어렵다.
심화
벽제관 전투는 얼마나 중요했나
한국에서는 이 전투를 대개 연합군의 반격이 기세를 잃은 순간으로 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패배로 명군의 행동에 적극성이 줄어들어 일본군을 섬멸할 기회를 놓쳤다고 평가한다. 당대 사람들의 말도 비슷했다. 전투 몇 주 뒤 유성룡은 벽제에서 불리해진 뒤로 중국 장수의 의기가 날로 위축되어, 날이 개고 길이 마르면 진격하겠다는 핑계만 댄다고 보고했다.
일본 측 서술은 이 싸움을 많은 수의 명군을 무찌른 큰 승리로 그리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그 주인공으로 삼는다. 명군 전사자를 크게 잡은 추정치는 서양의 서술에도 나온다. 새뮤얼 홀리(Samuel Hawley)는 2003년 논문에서 이 싸움을 ‘대격전’으로 그리며 “한 추정에 따르면” 명군 1만 명이 죽었다고 적었다. 영어·일본어 위키백과 같은 오늘날의 개관은 이 수치를 훨씬 작은 명·조선 측 수치와 나란히 놓고 조심스럽게 다룬다.
주로 명 측 자료로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명의 관점에 더 무게를 둔다. 케네스 스워프(Kenneth Swope)의 연구는 명의 육상 개입, 무엇보다 평양성 탈환이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다고 본다. 이여송 자신의 보고처럼 피해가 적었다면, 벽제관 전투는 군대의 일부가 당한 날카롭지만 제한적인 패배였다. 이렇게 보면 명군을 멈춰 세운 것에는 패배와 함께 그 패배가 드러낸 문제들도 포함되었다. 대포와 보급을 앞질러 버린 기병, 쓰러지는 말, 조선이 제때 대지 못한 군량, 북병과 남병 사이와 이여송과 송응창 사이의 다툼, 그리고 병부상서 석성이 교섭을 통한 해결을 밀던 북경의 조정이 그것이다.
사료들이 함께 말하는 것은 이보다 좁다. 1593년 2월 27일 벽제관 부근에서, 한양에서 나와 싸우기로 한 일본군이 험한 땅에서 이여송의 선발대를 붙잡아 그 규모를 확정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히고 물리쳤다. 이여송은 다시 한양을 공격하지 않았고, 1593년 초 연합군의 원정은 한양 공격이 아니라 강화 교섭에 따른 일본군의 철수로 끝났다.
핵심 개념
- 대포를 앞질러 간 기병
- 명군은 평양에서 대포와 남병 보병으로 이겼다. 벽제관에서 이여송은 기병만 이끌고 앞서 나갔고, 대포가 없는 기병은 일본군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 땅과 날씨
- 좁은 골짜기, 양쪽의 언덕, 비 온 뒤의 진흙탕이 명 기병의 속도를 빼앗았고, 칼과 조총을 쓰는 일본 보병에게 유리했다.
- 숨어서 기다린 매복
- 조선 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고개 위에 수백 명만 보이고 나머지는 고개 뒤에 숨겨, 명군이 함정으로 들어오게 했다.
- 전사자 세기
- 피해는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이 보고했다. 자기 공적을 지키려는 장수, 그와 다투던 부하, 조선 관리, 그리고 뒤의 일본 군기물 작가들이다. 명군 전사자 수는 264명에서 1만 명까지 벌어진다.
- 보급이 결정한다
- 전투 뒤 군량과 말먹이의 부족, 수천 필에 이르는 말의 죽음도 명군이 다시 진격하지 못한 이유였다.
- 전쟁에서 교섭으로
- 벽제관 전투 뒤 명 지휘부는 신중해졌고 양쪽은 교섭으로 기울었다. 일본군은 1593년 5월 한양에서 직접 쫓겨난 것이 아니라, 교섭으로 맺은 합의에 따라 철수했다.
기록
- 1593년 — 1월(음력 1592년 12월): 이여송이 이끄는 4만여 명의 명군이 압록강을 건넌다.
- 1593년 — 2월 8일: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총공격하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남쪽으로 물러난다.
- 1593년 — 2월 19일: 연합군이 개성을 되찾는다.
- 1593년 — 2월 24일(음력 1월 24일): 일본군이 한양에 남아 있던 남자들을 대거 죽이고 도성의 많은 건물을 불태운다.
- 1593년 — 2월 25일(음력 1월 25일): 명군이 개성을 떠나 한양으로 향한다. 이튿날 이여송은 임진강을 건너 파주에 진을 친다.
- 1593년 — 2월 27일(음력 1월 27일): 여석령에서 벽제관 전투가 벌어지고, 이여송은 파주로 물러난다.
- 1593년 — 2월 28일: 조선 측의 만류에도 이여송이 임진강을 건너 동파로, 곧이어 개성으로 물러난다.
- 1593년 — 3월(음력 2월): 가토 기요마사가 평양을 친다는 거짓 소문이 돌자 이여송이 왕필적을 개성에 남기고 평양으로 돌아간다.
- 1593년 — 3월 14일: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친다.
- 1593년 — 5월 18일: 일본군이 교섭 끝에 한양을 떠나 남해안으로 물러난다.
용어 풀이
- 벽제관
- 고양의 벽제역에 딸린 객사. 한양에서 개성으로 가는 길 위에 있었고, 중국 사신이 한양에 들어가기 전날 묵어 가던 곳이다.
- 여석령
- ‘숫돌고개’라는 뜻의 낮은 고개. 벽제관에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으며, 주된 싸움이 여기서 벌어졌다.
- 혜음령
- 벽제관 북쪽, 파주로 가는 길의 고개. 이여송은 이 고개를 넘어 싸움터로 갔고, 일본군의 추격은 여기서 멈췄다.
- 제독
- 조선에 온 명군 총사령관으로서 이여송이 가진 직함(중국어 발음 티두).
- 가정
- 명나라 장수가 직접 거느리며 곁에서 싸운 사병으로, 주로 기병이었다. 벽제관에서 이여송의 가정이 많이 죽었다.
- 남병
- 절강 등 중국 남부 출신의 명나라 보병. 화기에 능했으며, 요동의 북방 기병과 대비된다.
- 신기전
- 화약의 힘으로 날아가는 화살. 대포가 도착하지 않은 명 기병은 싸움 초반에 이것을 쏘았다.
- 음력(태음태양력)
- 조선이 쓴 역법. 달은 달의 차고 기움을 따르고, 해의 운행과 맞추려고 이따금 윤달을 넣는다. 날짜를 양력(그레고리력)으로 바꾸어야 한다.
묻고 답하기
이여송은 왜 대포를 두고 앞서 달려갔나요?
평양에서 이긴 뒤 그는 일본군이 약해져 물러나고 있다고 생각했고, 조선 관리들도 한양의 일본군이 적다고 말했어요. 정찰대가 일본군 한 부대를 이겼다는 소식을 듣자 본대를 뒤에 남겨 두고 기병만 이끌고 서둘러 나아갔어요. 그가 싸울 때 대포 부대와 보병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요.
몇 명이 죽었나요?
아무도 정확히 몰라요. 이여송은 명군 전사 264명·부상 49명을 보고했고, 조선 관리들이 전한 수치는 양쪽 각각 약 300명 또는 500~600명이에요. 명 남병의 한 장교는 명군 사상자를 1,500명이라고 했고, 뒤의 일본 군기물은 명군 6,000명 또는 1만 명이 죽었다고 적었어요. 이 수치들은 세는 대상이 달라서, 전체 전사자 수는 확정할 수 없어요.
벽제관 전투가 전쟁의 전환점이었나요?
패배는 명군의 한양 진격을 꺾었고, 명군은 다시 힘으로 한양을 되찾으려 하지 않았어요. 군량과 말먹이 부족, 말의 죽음, 강화 교섭도 다시 큰 공격을 벌이지 못한 이유였어요. 이 글이 참고한 자료로는 어느 요인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확정할 수 없어요.
조선군도 벽제관에서 싸웠나요?
일부는 싸웠어요. 고언백의 군사가 첫 접전에 함께했어요. 김명원이 이끈 조선군 주력은 명군 뒤에 떨어져 있었고, 조선 측 보고는 조선군의 피해가 거의 없었다고 적어요.
이여송은 왜 평양으로 돌아갔나요?
그는 함경도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평양을 지켜야 한다고 했어요. 소문은 거짓이었고, 한국 측 자료는 가토가 직접 퍼뜨렸다고 설명해요. 유성룡은 이여송이 물러날 핑계를 반겼다고 보았어요.
날짜가 1월 27일인가요, 2월 27일인가요?
둘 다 같은 날이에요. 기록에 적힌 1월 27일은 음력이고, 양력으로 바꾸면 1593년 2월 27일이에요. 음력 날짜를 그대로 양력 1월 27일로 읽으면 안 돼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이장희, 벽제관전투(碧蹄館戰鬪).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벽제관(碧蹄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장희, 임진왜란(壬辰倭亂).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북관대첩(北關大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2월 5일 1번째 기사: 접대 도감이 남병 오유산이 중국군이 왜군의 복병에 당했다고 하는 말을 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2월 5일 8번째 기사: 이 제독이 파주에 진주했다가 벽제에서 왜적에게 대패한 상황에 대한 기록.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2월 6일 6번째 기사: 도체찰사 유홍이 벽제 전투의 전말을 치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2월 7일 9번째 기사: 유성룡이 벽제에서 패한 이 제독이 개성으로 퇴각하려 한다고 치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2월 8일 5번째 기사: 접대 도감이 유격 진방철이 벽제 전투에 대해 전한 말을 보고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2월 10일 10번째 기사: 유성룡이 이 제독이 동파로 물러나 주둔하고 있다고 치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2월 16일 11번째 기사: 접반사 윤근수가 중국군의 진퇴 상황을 아뢰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2월 17일 11번째 기사: 병조 판서 이항복 등을 인견하여 이여송이 평양으로 물러난 일 등을 논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2월 19일 8번째 기사: 노상에서 이 제독이 탄핵을 받았다는 보고를 듣고 평양 수복 자문을 올리기로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2월 19일 12번째 기사: 운암원에서 이덕형 등을 인견하고 중국군의 무기, 군량, 병력 등을 논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2월 19일 15번째 기사: 유성룡이 한강 이남에 왜적이 출몰하고 있다고 치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1월 1일 3번째 기사: 송 경략과 제독 이여송이 안주·파주에서 싸우다가 패한 뒤 개성에 주둔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1월 1일 4번째 기사: 왜적이 경성 백성을 대량 학살하니 제독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2월 1일 6번째 기사: 제독 이여송이 도로 평양에 머물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2월 1일 10번째 기사: 관군의 공격으로 기세가 꺾인 적을 치고자 하였으나 제독이 따르지 않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2월 1일 8번째 기사: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적병을 행주에서 격파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유성룡(柳成龍), 懲毖錄(징비록) 권2 (한문 원문). 위키문헌(중국어)
- Battle of Byeokjegwan. 영어 위키백과
- Battle of Haengju. 영어 위키백과
- 碧蹄館の戦い. 일본어 위키백과
- Song Yingchang. 영어 위키백과
- 새뮤얼 홀리(Samuel J. Hawley), The Imjin War. Transactions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78권, 2003
- 케네스 스워프(Kenneth M. Swope), A Dragon’s Head and a Serpent’s Tail: Ming China and the First Great East Asian War, 1592–1598.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2009
- 음양력 변환 계산. 한국천문연구원
함께 보기
- 이여송요동 출신의 명나라 장수로, 1593년 명군을 이끌고 일본군에게서 평양성을 되찾았으나 곧 벽제관 부근에서 패했다.
- 가토 기요마사어려서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오와리 출신 무장으로, 1592년 제2번대를 이끌고 함경도까지 들어갔고 뒤에 구마모토성을 쌓았다.
- 심유경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와 휴전을 맺고 강화 교섭을 이끌었으나, 교섭이 실패한 뒤 처형된 명의 교섭 담당자다.
- 권율1592년 이치에서 일본군을 막는 데 앞장서고 1593년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의 대공세를 물리친 조선의 문신이자 장수다.
- 선조조선의 제14대 왕(재위 1567–1608)으로, 그의 시대에 조정이 붕당으로 갈라지고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