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የዓድዋ ጦርነት(아도와 전투) · Guerra d’Abissinia(1895–1896)

1894–1896년 ·

한 문장으로

1895–1896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보호국으로 만들려 하자 메넬리크 2세 황제와 타이투 황후의 에티오피아군이 1896년 3월 1일 아도와에서 이탈리아군을 결정적으로 무찔러, 유럽의 ‘아프리카 분할’ 속에서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지켜 낸 전쟁이다.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130년 전, 유럽 나라들은 아프리카를 거의 다 차지하려고 경쟁하고 있었어요. 지도 위에 선을 그어 대륙을 나눠 가졌지요. 이탈리아도 식민지를 갖고 싶었고, 동아프리카 고원에 있는 오래된 기독교 왕국 에티오피아를 노렸어요.

1889년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의 황제 메넬리크 2세는 조약을 맺었어요. 그런데 속임수가 있었어요. 이탈리아어 조약문에는 에티오피아가 다른 나라와 이야기할 때 반드시 이탈리아를 거쳐야 한다고 적혀 있었어요. 그러면 에티오피아는 거의 이탈리아 것이 되는 셈이지요. 메넬리크가 읽은 암하라어 조약문에는 원하면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만 적혀 있었어요. 이 사실을 알게 된 메넬리크는 몹시 화를 내며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이탈리아는 군대를 보냈어요. 메넬리크는 제국 곳곳의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10만 명쯤 되는 큰 군대가 북쪽으로 행진했어요. 그의 아내 타이투 황후는 지혜롭고 겁 없는 지도자로, 자기 군대를 직접 이끌었어요.

1896년 3월 1일, 아도와라는 마을 근처에서 이탈리아군은 밤에 몰래 공격하려다 산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어요. 에티오피아군은 그들을 둘러싸고 하루 만에 이겼어요. 양쪽에서 수천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어요.

이 승리 덕분에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가 자유로운 나라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어요. 에티오피아는 전 세계 흑인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었고, 에티오피아 국기의 초록·노랑·빨강은 뒷날 새로 독립한 여러 아프리카 나라의 국기에도 쓰였어요.

한눈에 보기

기간
주요 전투 1894년 12월 – 1896년 3월, 아도와 전투 1896년 3월 1일, 강화 조약 1896년 10월 26일
장소
에티오피아 북부 고원(티그라이)과 이탈리아 식민지 에리트레아 접경
참전 세력
에티오피아 제국(메넬리크 2세, 타이투 황후, 지방 통치자들) 대 이탈리아 왕국과 그 에리트레아인 등 아프리카인 식민지 병사(아스카리)
주요 인물
메넬리크 2세, 타이투 베툴, 라스 마콘넨, 라스 알룰라, 라스 멩게샤 요하네스, 라스 미카엘, 네구스 테클레 하이마노트 / 프란체스코 크리스피, 오레스테 바라티에리
아도와의 병력
이탈리아 측 약 14,500–17,700명, 에티오피아 측 약 7만–10만 명 이상
아도와의 손실(추정)
이탈리아 측 전사 약 6,000–7,000명, 포로 약 3,000–4,000명 / 에티오피아 측 전사 약 4,000–7,000명, 부상자는 훨씬 많음
결과
아디스아바바 조약: 이탈리아가 우찰레 조약을 폐기하고 에티오피아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가 계속 차지
기억
에티오피아의 국경일 ‘아도와 승전 기념일’, 반식민·범아프리카 역사의 이정표

쉬움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란?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은 주로 1894년 말부터 1896년까지 이탈리아 왕국과 에티오피아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보호국, 곧 외교를 이탈리아가 쥐고 결국에는 훨씬 더 많은 것을 통제하는 나라로 만들려 했다. 에티오피아는 이를 거부하고 맞서 싸웠다.

전쟁은 1896년 3월 1일 아도와 전투로 끝났다. 식민 시대 아프리카에서 유럽 군대가 겪은 가장 결정적인 패배 가운데 하나였다. 아도와 이후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완전한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처지가 사뭇 달랐던 라이베리아를 빼면,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분할’ 내내 독립을 지킨 유일한 아프리카 나라였고, 그것도 전쟁에서 이겨 지켜 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이 전쟁을 흔히 그냥 ‘아도와’라고 부른다. 이탈리아에서는 오랫동안 국가적 굴욕으로 기억되었고,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뒷날 이 기억을 1935년 훨씬 더 잔혹한 두 번째 침공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다.

[1][3][2]

쉬움

전쟁 이전의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통치자들은 고대 악숨 왕국, 그리고 『케브라 나가스트』에 따르면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에게까지 혈통이 닿는다고 여겼다. 고유 문자(그으즈)와 달력을 지닌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1,500년 넘게 고원 생활의 중심이었다.

19세기 중엽, 지방 영주들이 실권을 쥐던 오랜 시기가 지나고 테워드로스 2세(재위 1855–1868)와 요하네스 4세(재위 1872–1889)가 나라를 다시 하나로 묶으려 애썼다. 요하네스는 1875년과 1876년 침입한 이집트군을 물리쳤고, 그의 장군 라스 알룰라는 1887년 도갈리에서 이탈리아군 부대를 섬멸했다. 요하네스는 1889년 3월 메테마에서 수단의 마흐디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이어서 나라 한가운데 있는 셰와의 왕 메넬리크가 황제가 되었다. 메넬리크는 이미 근대식 소총을 사들이고 남쪽·동쪽·서쪽으로 지배를 넓히며 강한 국가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 남방 정복으로 많은 오로모·시다마·구라게·월라이타 등 여러 민족과 도시 하라르가 그의 지배 아래 들어왔는데, 폭력적인 원정을 거친 경우가 많았다. 이 팽창은 메넬리크에게 땅과 교역과 병사를 안겨 주었지만, 정복당한 민족들은 이를 전혀 다르게 기억하며, 그 차이는 오늘날 에티오피아의 논쟁에서도 여전히 중요하다.

메넬리크는 북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총명하고 정치 수완이 뛰어난 아내 타이투 베툴과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두 사람은 1886년 새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세웠다.

[2][6][9]

쉬움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는 왜 전쟁을 했나

이탈리아는 1861년에야 통일 왕국이 되어 식민지 경쟁에 늦게 뛰어들었다. 홍해의 항구 아사브를 손에 넣고 1885년에는 마사와를 점령했으며, 그곳에서 고원으로 밀고 올라갔다. 1890년 1월 1일 이탈리아는 점령지를 묶어 에리트레아 식민지로 선포했다.

1889년 5월 2일 메넬리크와 이탈리아 사절 피에트로 안토넬리는 우찰레 조약을 맺었다. 메넬리크는 우호 관계, 무기, 차관을 대가로 북부 영토 일부를 이탈리아에 넘겼다. 문제는 제17조였다. 암하라어 조약문은 황제가 다른 나라와의 교섭에 이탈리아 정부를 ‘이용할 수 있다’고 했지만, 이탈리아어 조약문은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탈리아는 자국어 조약문을 근거로 다른 유럽 정부들에 에티오피아가 이제 자국의 보호국이라고 통보했다.

유럽의 사정도 중요했다. 1884–1885년 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은 새로 차지하는 아프리카 영토를 서로 통보하는 등 영토 획득의 규칙에 합의했다. 이탈리아는 다른 열강에 에티오피아 보호령을 선포함으로써 나라를 정복하지 않고도 유럽의 눈에 합법적인 권리를 확보하려 한 것이다. 홍해에서 프랑스를 견제할 우호적인 이탈리아를 원한 영국은 1890년대 초의 협정들에서 이탈리아의 주장을 대체로 받아들였다. 아디스아바바에서 보면, 이는 전투 한 번 없이 종이 위에서 에티오피아를 나누려는 계획이었다.

메넬리크는 유럽 정부들이 이탈리아를 거쳐 답장을 보내기 시작하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항의했고, 어떤 타협에도 가장 강하게 반대한 인물로 기억되는 사람이 타이투 황후다. 메넬리크는 조약을 규탄하고 차관을 갚았으며, 1893–1894년에 조약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그사이 그는 주로 홍해 연안의 프랑스령 항구를 통해 근대식 소총을 대량으로 들여왔다. 야심만만한 프란체스코 크리스피 총리가 이끄는 이탈리아는 무력으로 권리를 관철하기로 했다.

[4][1][6]

쉬움

아도와 이전의 전쟁

전투는 접경 지역인 티그라이에서 시작되었다. 선황 요하네스의 아들인 티그라이 통치자 라스 멩게샤 요하네스는 처음에는 이탈리아와 접촉하기도 했지만 결국 메넬리크 편에 섰다. 1895년 1월 에리트레아 총독 오레스테 바라티에리 장군이 이끄는 이탈리아군은 코아티트와 세나페에서 멩게샤를 물리치고 아디그라트와 메켈레를 비롯한 티그라이 대부분을 점령했다.

1895년 9월 메넬리크는 제국 전체에 동원령을 내렸다. 셰와·고잠·월로·티그라이·하라르, 그리고 새로 정복한 남부에서 군대가 북쪽으로 행군했고, 많은 병사가 자기 식량과 무기를 스스로 챙겨 왔다. 1895년 12월 7일 라스 마콘넨, 라스 알룰라 등이 이끈 에티오피아 선봉대는 암바 알라기에서 피에트로 토셀리 소령의 이탈리아군 약 2,000명을 궤멸시켰다.

에티오피아군은 유럽식 상비군이 아니었다. 황제와 지방 통치자들이 저마다 병사·하인·보급 행렬을 거느리고 모인 군대였다. 많은 병사 곁에는 밥을 짓고 물을 나르고 부상자를 돌보는 여성들이 함께했다. 이 방식으로는 엄청난 병력을 아주 빨리 전장에 세울 수 있었지만 오래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군대가 대체로 현지에서 먹을 것을 구했기 때문에 식량이 곧 바닥났던 것이다. 메넬리크도 바라티에리도 시간이 이탈리아뿐 아니라 에티오피아에도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티오피아군은 이어 메켈레의 이탈리아 요새를 포위했다. 전승에 따르면 타이투 황후가 요새를 샘물에서 끊어 놓으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몇 주 뒤인 1896년 1월, 협상 끝에 수비대는 무기를 지닌 채 요새를 떠나도록 허락받았고, 이 협상은 에티오피아군이 전진할 길도 열어 주었다. 2월이 되자 두 군대는 아도와 마을 근처 산악 지대에서 마주 섰다.

[1][6]

중급

아도와 전투, 1896년 3월 1일

양쪽 모두 보급에 시달렸다. 에티오피아군은 규모가 워낙 커서, 얼마 전 기근을 겪은 지역에서 식량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바라티에리는 후퇴도 검토했지만 승리를 요구하는 성난 전보를 잇달아 보내는 크리스피 정부의 압박을 크게 받았다. 여단장들이 공격을 지지하자 그는 밤에 전진해 산속의 유리한 진지를 차지하기로 했다. 에티오피아군이 그곳을 공격해 오거나 스스로 흩어지기를 기대한 것이다.

2월 29일 밤부터 3월 1일에 걸쳐 마테오 알베르토네, 주세페 아리몬디, 비토리오 다보르미다, 주세페 엘레나 장군이 이끄는 이탈리아군 4개 여단이 험하고 지도도 부실한 지형을 따라 전진했다. 주로 에리트레아인 아스카리로 이루어진 알베르토네 여단은 너무 멀리 나아갔다가 새벽에 홀로 공격을 받았다. 다른 여단들은 서로 제대로 지원하지 못했고, 다보르미다 여단은 다른 골짜기로 들어가 고립되었다.

에티오피아 지휘관들은 재빨리 대응했다. 메넬리크는 알맞은 순간에 예비대를 투입했고, 라스 마콘넨, 오로모 기병을 거느린 월로의 라스 미카엘, 라스 멩게샤, 라스 알룰라, 고잠의 네구스 테클레 하이마노트, 그리고 황후의 부대가 흩어진 이탈리아군 종대를 차례로 공격했다. 근대식 속사포를 포함한 에티오피아 포병도 한몫했다. 한낮이 되자 이탈리아군은 무너지고 있었다. 아리몬디와 다보르미다는 전사했고 알베르토네는 포로가 되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포와 수천 정의 소총을 버리고 에리트레아 쪽으로 달아났다.

이탈리아 측 손실은 흔히 전사 약 6,000–7,000명(수천 명의 에리트레아인 아스카리 포함), 포로 약 3,000–4,000명으로 추산된다. 에티오피아 측 손실도 커서 전사 4,000–7,000명에 부상자는 훨씬 많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 집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수치는 불확실하다. 전투는 일요일에 벌어졌고, 에티오피아의 기억 속에서 이 전투는 에티오피아 교회가 무척 사랑하는 성 게오르기우스(기오르기스)와 자주 연결된다.

[3][8][2]

중급

포로, 아스카리, 그리고 민간인

이탈리아군 포로들은 남쪽으로 끌려가 몇 달 동안 억류되었다. 대부분은 비교적 괜찮은 대우를 받았고, 강화 조약 뒤 풀려났다. 이탈리아는 공식적으로 포로 부양비라는 명목의 배상금을 냈다. 특히 전투 직후의 혼란 속에서 죽임을 당한 포로도 있었다.

에리트레아인 아스카리의 운명은 훨씬 가혹했다. 이들은 주로 에리트레아와 티그리냐어권 고원 출신으로 이탈리아 식민지군에 복무한 아프리카인 병사였다. 많은 에티오피아인은 이들을 배신자로 여겼다. 붙잡힌 아스카리 수백 명(흔히 약 800명이라 하지만 추정치는 다양하다)이 벌로 오른손과 왼발을 잘렸다. 이 일은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 역사의 아픈 대목이며, 식민지 군대가 아프리카인끼리 서로 맞서게 만든 방식을 보여 준다.

티그라이와 북부의 보통 사람들도 고통을 겪었다. 이 지역은 1888–1892년의 대기근과 우역(牛疫)으로 이미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탈리아군과 에티오피아군 양쪽의 거대한 군대가 지나가며 식량과 가축을 소모했다. 동원은 새로 정복된 남부 지역의 농민에게도 무거운 부담을 지웠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거의 반영되지 않는 국가를 위해 곡식과 병사를 바쳐야 했다.

[3][1][9]

중급

결과와 영향

아도와 소식이 전해지자 이탈리아에서는 폭동과 시위가 일어났고, 크리스피 정부는 며칠 만에 무너졌다. 1896년 10월 26일 이탈리아는 아디스아바바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우찰레 조약을 폐기하고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절대적으로, 아무 유보 없이’ 인정했다. 잠정 국경은 마레브·벨레사·무나강을 따라 그어졌고, 이로써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를 계속 차지했다.

메넬리크가 왜 더 밀고 나가 에리트레아에서 이탈리아를 몰아내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군대는 식량이 모자랐고 우기가 다가오고 있었으며, 저지대 원정은 어렵고 희생이 컸을 것이다. 일부 에리트레아와 티그라이 비판자들은 뒷날 메넬리크가 자기 지위를 굳히려고 에리트레아를 포기했다고 주장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 결정으로 에리트레아는 1941년까지 이탈리아 식민지로 남았고, 이는 20세기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배경이 되었다.

아도와 이후 유럽 열강은 에티오피아를 주권 국가로 진지하게 대했다. 프랑스·영국 등은 아디스아바바에 사절단을 보내 메넬리크와 국경·통상 조약을 맺었고, 에티오피아는 계속 팽창해 대략 오늘날의 국경에 이르렀다. 메넬리크는 승리의 위신을 바탕으로 전신, 학교, 지부티 철도 등으로 국가를 근대화했다.

1935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아도와의 복수’를 명분의 하나로 내세우며 다시 에티오피아를 침공했고, 독가스와 공군력을 동원했다. 이탈리아는 1936년부터 1941년까지 에티오피아를 점령했으며, 에티오피아 애국 저항군과 영연방군이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복위시키면서 점령은 끝났다. 첫 전쟁은 이렇게 두 번째 전쟁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5][1][9]

중급

아도와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에티오피아에서 아도와 승전 기념일은 에티오피아력 예카티트 23일, 곧 서력으로 대개 3월 2일에 기리는 국경일이다. 사람들은 아디스아바바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모여 애국가를 부르고, 전통 옷을 입고 방패를 들거나 말을 타고 행진한다. 아도와는 에티오피아 여러 지역과 민족 출신의 병사들이 함께 거둔 승리로 기억되며, 많은 에티오피아인은 이를 민족적 자긍심의 토대로 여긴다.

에티오피아 밖에서도 아도와는 아프리카와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전역의 흑인에게 상징이 되었다. 카리브해·미국·남아프리카에서 ‘에티오피아주의’와 뒤이은 범아프리카주의는 유럽 군대를 물리친 아프리카 국가에서 영감을 얻었다. 에티오피아 국기의 초록·금색·빨강은 독립 후 가나를 비롯한 여러 아프리카 국가의 국기에 영향을 주었고, 에티오피아는 라스타파리 운동에서도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안에서 이 기억은 단순하지 않다. 일부 오로모인과 남부 비판자들은 메넬리크를 기리는 것이 그의 남방 정복의 폭력을 외면하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오로모 기병과 남부 출신 병사들도 아도와에서 싸웠다는 점을 강조한다. 티그라이 일부에서는 라스 알룰라나 라스 멩게샤 같은 티그라이 지도자들의 공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최근에는 기념행사가 정치적 긴장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에리트레아에서는 손발이 잘린 아스카리와 강화 조약으로 인한 에리트레아의 상실이 또 다른 기억을 이룬다.

이탈리아에서 ‘아두아(Adua)’는 참패의 대명사였다. 민족주의자와 뒷날의 파시스트들은 복수를 외쳤고, 이탈리아의 대중적 기억은 오랫동안 식민주의를 온건하거나 심지어 인정 많은 것으로, 곧 ‘착한 이탈리아인(italiani brava gente)’이라는 이미지로 다루었다. 1970년대 이후 이탈리아 역사가들은 이런 시각에 도전하며 1935–1941년의 전쟁을 포함한 식민지 폭력을 다시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다.

[7][3][8]

심화

1차 사료

에티오피아 측 사료로는 메넬리크의 궁정 연대기 작가 게브레 실라시에가 쓴 치세 연대기, 메넬리크와 타이투의 서신과 포고문(1895년의 유명한 동원 포고 포함), 그리고 구전 시·전쟁 노래·후대 회고록의 풍부한 전통이 있다. 이 자료들은 황실의 관점을 담고 있어 그 의도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하지만, 에티오피아인 스스로 전쟁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이탈리아 측 사료는 풍부하다. 의회 토론, 이탈리아 정부가 펴낸 외교 문서집 ‘녹서(Libri verdi)’, 군 보고서, 바라티에리의 군법회의 기록, 장교와 전 포로들의 회고록 등이 있다. 바라티에리는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법정은 그의 지휘를 비판했고, 그의 변론과 비판자들의 주장은 수십 년 동안 이탈리아의 서술을 좌우했다.

외국인 관찰자들도 기록을 남겼다. 전쟁 무렵 에티오피아에는 러시아 장교들과 러시아 적십자 의료단이 있었고, 메넬리크를 섬기거나 아디스아바바에 머문 프랑스인·스위스인 등 유럽인들도 글을 남겼다. 우찰레 조약의 두 조약문 자체가 분쟁의 핵심 문서로 남아 있다. 학자들은 암하라어본과 이탈리아어본을 비교하며, 그 차이가 안토넬리의 의도적 기만이었는지 실수였는지를 따져 왔다.

[4][10][8]

심화

역사가들의 논쟁

오랫동안 많은 유럽 저자는 아도와를 주로 이탈리아의 실수, 곧 부실한 지도, 부족한 협조, 로마의 정치적 압력의 결과로 설명했다. 해럴드 마커스, 리처드 팽크허스트, 바루 제우데 같은 에티오피아사 연구자들은 대신 에티오피아 국가의 역량, 메넬리크의 외교와 무기 구입, 광대한 제국 전역의 자원 동원, 에티오피아 지휘관들의 기량을 강조했다. 레이먼드 조나스의 『아도와 전투(The Battle of Adwa)』(2011)는 이 전투를 제국·인종·근대 무기 확산이라는 세계사적 맥락 속에 놓았다.

두 번째 논쟁은 에티오피아 국가 자체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일부 학자는 메넬리크의 남방 팽창을 일종의 내부 식민주의, 또는 아프리카 분할에 아프리카 세력이 참여한 사례로 보고, 다른 학자들은 이전 에티오피아 국가들과 이어진 영역의 재통합으로 본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아도와의 해석도 달라진다. 에티오피아 전체의 승리인가, 아니면 팽창하던 제국이 경쟁 제국에 맞서 자기 정복지를 지켜 낸 승리인가.

이탈리아의 역사 서술은 안젤로 델 보카의 작업 이후 크게 달라졌다. 동아프리카의 이탈리아인에 관한 그의 여러 권짜리 역사서는 이탈리아 식민주의의 폭력을 드러내고 ‘온화한 이탈리아 제국’이라는 관념에 도전했다. 최근 연구는 에리트레아인 아스카리를 이탈리아의 도구로만이 아니라 역사의 행위자로 보고, 타이투 같은 여성의 역할, 그리고 후대 정부와 정치 운동이 아도와를 어떻게 이용해 왔는지도 살핀다.

[10][9][8]

주요 전투 (2)

  1. 아두와 전투1896년
  2. 메켈레 전투1896년

핵심 개념

두 가지 뜻을 가진 조약
우찰레 조약 제17조는 암하라어본과 이탈리아어본의 내용이 달랐다. 이탈리아는 자국어본을 근거로 보호국을 주장했고 에티오피아는 이를 거부했다.
운이 아닌 국가의 힘
에티오피아가 이긴 것은 이탈리아의 실수 때문만이 아니라, 근대식 소총으로 무장한 대군을 모으고 먹이고 무장시킬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할 속의 아프리카 독립
거의 모든 아프리카가 유럽 지배 아래 들어갈 때 아도와는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지켜 냈다.
양쪽 편에 선 아프리카인
이탈리아군 병사 다수는 에리트레아인 아스카리였고, 포로가 된 그들의 운명은 식민주의가 아프리카인을 어떻게 갈라놓았는지 보여 준다.
아프리카 안의 제국
메넬리크 자신의 남방 정복 때문에 아도와는 반식민 승리이면서 동시에 에티오피아 내부 논쟁의 주제이기도 하다.
범아프리카의 상징
아도와는 전 세계 흑인에게 영감을 주었고 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상징을 빚었다.
복수와 기억
아도와 이후 이탈리아의 굴욕감은 민족주의·파시즘의 복수론을 키웠고, 1935년 침공으로 이어졌다.

기록

  1. 1869년 — 이탈리아 해운 회사가 홍해의 아사브를 사들인다. 1882년 이탈리아 정부가 넘겨받는다.
  2. 1885년 — 이탈리아가 마사와를 점령한다.
  3. 1887년 — 라스 알룰라가 도갈리에서 이탈리아군 부대를 무찌른다.
  4. 1889년 — 요하네스 4세가 메테마에서 전사(3월), 우찰레 조약 체결(5월 2일), 메넬리크 황제 즉위(11월).
  5. 1890년 — 이탈리아가 에리트레아 식민지를 선포한다.
  6. 1893년 — 메넬리크가 우찰레 조약을 규탄하고, 1894년 거부가 확정된다.
  7. 1895년 — 코아티트·세나페에서 이탈리아군 승리(1월), 메넬리크의 동원 포고(9월), 암바 알라기에서 에티오피아군 승리(12월 7일).
  8. 1896년 — 메켈레의 이탈리아 요새가 포위 끝에 항복한다(1월).
  9. 1896년 — 아도와 전투(3월 1일), 크리스피 정부 붕괴, 아디스아바바 조약(10월 26일).
  10. 1935년 —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다시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시작된다.
  11. 1941년 —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에서 이탈리아의 지배가 끝난다.

용어 풀이

보호국
외교, 흔히 그 이상까지 더 강한 나라에 통제받는 국가.
우찰레 조약
1889년 이탈리아와 메넬리크 2세가 맺은 조약. 논란이 된 제17조가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라스(Ras)
에티오피아의 고위 칭호. 대략 공작이나 지방 최고 통치자 겸 군사령관에 해당한다.
네구스 / 네구사 나가스트
왕 / ‘왕 중의 왕’. 에티오피아 황제의 칭호.
아스카리
유럽 식민지군에 복무한 아프리카인 병사. 아도와에서는 주로 이탈리아군의 에리트레아인 병사.
아프리카 분할
대략 1881–1914년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를 빠르게 나누어 정복한 일.
범아프리카주의
아프리카 대륙과 디아스포라의 아프리카계 사람들의 단결·존엄·해방을 추구하는 운동.
예카티트 23일
에티오피아력으로 아도와 전투가 벌어진 날. 아도와 승전 기념일로 지킨다.

묻고 답하기

에티오피아는 식민지가 된 적이 있나요?

아도와 덕분에 1890년대에는 독립을 지켰어요.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1936년부터 1941년까지 점령했지만, 대부분의 에티오피아인과 많은 역사가는 이를 내내 저항에 부딪힌 짧은 군사 점령으로 보고 완전한 식민 지배로 보지 않아요.

에티오피아군은 창만 들고 싸웠나요?

아니요. 메넬리크는 근대식 소총 수만 정과 대포도 사들였어요. 그래서 승리가 가능했지요. 물론 전통 무기로 싸운 병사도 많았어요.

타이투 황후는 무슨 일을 했나요?

이탈리아의 보호국 주장에 강하게 반대했고, 전략에 조언했으며, 아도와를 비롯한 원정에서 자기 부대를 직접 이끌었어요.

이탈리아는 왜 그렇게 크게 졌나요?

병력이 훨씬 적었고, 지도가 부실한 산속에서 밤에 행군하다 여단들이 흩어졌으며, 에티오피아군의 규모와 조직력을 얕보았어요. 로마의 정치적 압력도 바라티에리를 공격으로 몰았어요.

메넬리크는 왜 에리트레아를 차지하지 않았나?

역사가들은 식량 부족, 다가오는 우기, 저지대 전투의 어려움, 그리고 외교적 계산을 든다. 이 문제는 특히 에리트레아와 티그라이에서 지금도 논쟁거리다.

우찰레 조약의 번역 차이는 의도적이었나?

이탈리아 협상가들이 차이를 알고 있었다고 보는 역사가가 많지만 증거를 두고는 이견이 있으며, 오해나 허술한 문안 작성이 작용했다는 견해도 있다.

아도와는 왜 범아프리카주의에 중요한가?

아프리카 국가가 유럽 군대를 물리치고 자유를 지킬 수 있음을 증명했기에, 세계 곳곳의 반식민·흑인 해방 운동에 영감을 주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First Italo-Ethiopian War. Wikipedia
  2.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위키백과
  3. Battle of Adwa. Wikipedia
  4. Treaty of Wuchale. Wikipedia
  5. Treaty of Addis Ababa. Wikipedia
  6. Taytu Betul. Wikipedia
  7. Adwa Victory Day. Wikipedia
  8. Raymond Jonas, The Battle of Adwa: African Victory in the Age of Empir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11
  9. Bahru Zewde, A History of Modern Ethiopia, 1855–1991 (2nd ed.). James Currey, 2001
  10. Harold G. Marcus, The Life and Times of Menelik II: Ethiopia 1844–1913. Clarendon Press, 1975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 지도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