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이슬람의 페르시아 정복

아랍어: al-fatḥ al-islāmī li-Fāris / 페르시아어: fath-e Irān be dast-e ʿArab-hā

633–654년 ·

한 문장으로

630년대부터 651년까지 초기 이슬람 칼리파국의 군대가 이란의 사산 왕조를 무너뜨려 400년 넘게 이어진 사산 왕조의 지배를 끝냈고, 이란은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주로 무슬림의 땅이 되면서도 자기 언어와 문화의 많은 부분을 지켜 냈다.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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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1,400년 전, 서아시아에는 커다란 제국이 둘 있었어요. 하나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한 비잔티움 제국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를 다스린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였어요. 두 제국은 오랫동안 서로 싸워서 둘 다 지치고, 가난해지고, 병으로 약해져 있었지요.

같은 무렵 아라비아에서는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가 많은 아랍 부족을 하나로 묶었어요. 이들을 이끈 메디나 공동체의 지도자를 ‘칼리파’라고 불러요. 아랍 군대는 북쪽으로, 두 제국이 다스리던 땅으로 나아갔어요.

그때 페르시아의 왕 야즈데게르드 3세는 왕관을 쓸 때 겨우 어린아이였어요. 그의 군대는 유프라테스강 가까운 카디시야, 그리고 나중에 자그로스산맥의 니하완드에서 아랍 군대에 크게 졌어요. 거대한 아치형 궁전이 있던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도 점령되었지요. 야즈데게르드는 이 도시 저 도시로 도망 다니다가 651년 메르브 근처에서 목숨을 잃었어요.

정복 뒤 페르시아 사람들이 한꺼번에 무슬림이 된 것은 아니에요. 200~300년 동안 많은 사람이 옛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지키며 특별한 세금을 냈어요. 조금씩 대부분의 사람이 무슬림이 되었지요. 그래도 페르시아어는 계속 썼고, 뒷날 피르다우시라는 시인은 페르시아의 왕과 영웅 이야기를 담은 커다란 책 『샤나메』를 페르시아어로 썼어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서로 다르게 기억해요. 이슬람이 전해진 큰 축복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오래된 이란 왕국이 슬프게 무너진 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역사가들은 두 시각을 모두 이해하고 옛이야기를 꼼꼼히 확인하려고 노력해요.

한눈에 보기

시기
633년 첫 원정, 636~651년 주요 원정. 일부 지역의 저항은 수십 년 더 이어졌다
무대
이라크(메소포타미아), 이란고원, 후제스탄, 파르스, 호라산과 그 주변
교전 세력
정통 칼리파국(661년부터는 우마이야 왕조) 대 사산 왕조와 그 지방 영주들
주요 인물
칼리파 아부 바크르·우마르·우스만, 지휘관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무사나 이븐 하리사·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사산 왕 야즈데게르드 3세와 장군 로스탐 파로흐자드
주요 전투
다리 전투(634), 카디시야 전투(보통 636년), 크테시폰 함락과 잘룰라 전투(637), 니하완드 전투(642)
왕조의 끝
651년 야즈데게르드 3세가 메르브 근처에서 살해됨
사상자
알 수 없다. 초기 아랍어 사료의 숫자는 크고 정형화되어 있어 역사가들이 조심스럽게 다룬다
장기적 결과
약 3세기에 걸친 점진적 이슬람 개종, 페르시아어의 존속과 부흥

쉬움

이슬람의 페르시아 정복이란 무엇인가

이슬람의 페르시아 정복은 메디나의 칼리파들이 이끈 초기 이슬람 국가의 군대가 사산 왕조를 무너뜨린 일련의 군사 원정이다. 사산 왕조는 3세기부터 이란과 이라크를 다스렸고, 로마(비잔티움) 제국과 함께 고대 후기의 2대 강국이었다.

정복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아랍 군대는 630년대에 먼저 이라크 남부 일부를 습격·점령하고, 카디시야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고,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을 차지했다. 이어 642년 니하완드 전투 뒤 이란고원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마지막 사산 왕 야즈데게르드 3세는 651년에 살해되었다.

군사적 정복은 빨랐지만 사회와 종교의 변화는 느렸다. 이란은 칼리파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주민 다수가 무슬림이 된 것은 아마 9~10세기의 일이었다. 페르시아어는 살아남았고, 아랍 문자로 쓰는 새로운 형태로 이슬람 문명의 위대한 언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2][8]

쉬움

사산 왕조는 왜 그렇게 약해져 있었나

602년부터 628년까지 사산 왕조와 비잔티움 제국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길고 소모적인 전쟁 가운데 하나를 치렀다. 처음에는 페르시아 왕 호스로 2세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정복했지만, 비잔티움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페르시아 영토 깊숙이 반격했다. 628년 호스로는 자기 귀족들에게 폐위되어 살해되었다.

몇 해 동안 혼란이 이어졌다. 약 4년 사이에 보란과 아자르미도흐트라는 두 여왕을 포함해 여섯 명이 넘는 통치자가 즉위했다 물러났다. 역병이 제국을 덮쳤다. 대귀족 가문들이 권력을 다투었고, 일부 지역은 궁정의 통제가 느슨했다. 632년 어린 야즈데게르드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사산 왕조는 스스로 사막 쪽 국경도 약하게 만들었다. 여러 세대 동안 히라의 아랍계 라흠 왕조가 페르시아를 위해 이라크 변경을 지켰지만, 602년 무렵 호스로 2세는 마지막 라흠 왕 누으만 3세를 폐위하고 뒤에 죽였다. 얼마 뒤인 609년 무렵으로 여겨지는 때, 아랍 부족들이 두 카르에서 사산 군대를 물리쳤고, 이 충돌은 뒷날 아랍 전승에서 페르시아의 힘도 꺾일 수 있다는 징표로 기억되었다.

바로 그때 아라비아반도는 예언자 무함마드 아래, 그리고 632년 그가 죽은 뒤에는 첫 칼리파 아부 바크르 아래 통합되어 있었다. 아부 바크르는 릿다 전쟁으로 부족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렇게 지친 두 제국의 경계에 강력한 새 세력이 생겨났다.

[1][9][4]

쉬움

누가 싸웠나

정복군은 대부분 아랍 부족민으로, 칼리파 아부 바크르(632~634), 우마르(634~644), 우스만(644~656) 아래 메디나 정부가 조직했다. 병사들은 새 신앙, 급료와 전리품에 대한 약속, 부족에 대한 충성에서 동기를 얻었다. 사산 왕조의 영향 아래 살던 바누 샤이반 같은 이라크의 아랍 부족 일부는 일찍부터 합류했다.

사산 쪽에는 중무장 기병과 전투 코끼리를 갖춘 왕실 군대, 대귀족 가문들의 병력, 지방 영주와 수비대가 있었다. 충성이 늘 굳건했던 것은 아니다. 일부 페르시아 지휘관과 지방 엘리트는 항복 조건을 협상했고, 아사위라 기병대 같은 일부 페르시아 부대는 아랍 쪽으로 넘어가 그들 사이에 정착했다.

이라크와 이란의 주민 가운데 많은 이는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페르시아인이 아니라 아람어를 쓰는 그리스도교인, 유대인, 그 밖의 공동체였다. 그들 가운데 일부에게는 지배자가 바뀌는 것보다 세금과 보호에 관해 어떤 조건을 얻어 내느냐가 더 중요했다.

[1][8]

중급

이라크 정복(633~638)

633년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는 현지 지도자 무사나 이븐 하리사와 함께 유프라테스강 하류 지역에서 원정을 벌여 히라를 차지했다. 이후 할리드는 비잔티움과 싸우러 시리아로 보내졌다. 634년 사산 군대가 다리 전투에서 아랍군을 무찔렀지만, 아랍군은 곧 전열을 가다듬었다.

칼리파 우마르는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가 이끄는 더 큰 군대를 보냈다. 히라 남서쪽 카디시야에서 아랍군은 로스탐 파로흐자드가 이끈 사산 주력군을 격파했고, 로스탐은 전사했다. 이 전투는 보통 636년으로 보지만 사료마다 달라서 635년부터 638년까지 여러 연대가 제시되었다. 아랍 전승에 따르면 거대한 왕실 깃발 ‘데라프셰 카비야니’가 이때 노획되었다.

아랍군은 이어 티그리스강을 건너 637년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막대한 보물을 차지했다. 야즈데게르드는 동쪽으로 달아났다. 637년 늦게 잘룰라에서 다시 승리하면서 자그로스산맥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정복자들은 이라크를 다스리기 위해 바스라와 쿠파라는 새 군영 도시를 세웠다. 아랍 병사와 가족이 정착한 이 도시들은 초기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뒷날 아랍과 페르시아 작가들은 크테시폰 궁전의 폐허를 세속 권력의 덧없음을 일깨우는 교훈으로 자주 노래했다.

[1][3][8]

중급

니하완드와 이란고원 정복(639~651)

아랍군은 다음으로 이란 남서부의 후제스탄을 정복했다. 이곳에서는 페르시아 장군 호르무잔이 여러 해 동안 저항하다 항복했다. 야즈데게르드는 새 군대를 모았지만 642년 자그로스산맥의 니하완드에서 패했다. 아랍 전승은 이 전투를 ‘승리 중의 승리’라 불렀다. 이후 사산 왕조는 더 이상 대규모 왕실 군대를 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몇 해 동안 아랍군은 하마단, 이스파한, 레이, 옛 왕실 중심지 이스타흐르가 있는 파르스, 케르만, 시스탄, 호라산으로 도시마다 차례로 나아갔다. 많은 도시가 공납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항복했고, 일부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다시 정복되었다. 특히 파르스와 이스타흐르는 격렬하게 저항했고, 재정복될 때 큰 희생을 치렀다.

야즈데게르드는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점점 지방 총독들의 지지를 잃었다. 651년 그는 호라산의 메르브 근처에서 살해되었다. 널리 알려진 전승에 따르면 숨어 있던 방앗간의 주인이 그를 죽였는데, 지방 총독의 사주였을 가능성도 전한다. 그의 아들 피루즈는 당나라에 도움을 청해 관직과 피난처를 얻었지만, 사산 왕조의 부흥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1][4][8]

중급

651년 이후: 변경과 저항

야즈데게르드가 죽었다고 이란 전체가 확고하게 장악된 것은 아니었다. 조건부로 항복했던 많은 도시가 제1차 내전(656~661)으로 칼리파국이 흔들리자 반란을 일으켰고, 우마이야 왕조 아래에서 다시 정복되어야 했다. 큰 오아시스 도시 메르브가 있는 호라산은 중앙아시아 쪽으로 더 나아가는 아랍 군대의 기지가 되었고, 670년대부터 많은 아랍 가족이 이곳에 정착했다.

카스피해 남쪽 산지의 타바리스탄과 그 주변은 일부가 사산 왕가의 후손을 자처한 지방 왕조들이 다스렸다. 이들은 때때로 공납을 바쳤지만 8세기 중엽까지, 어떤 골짜기에서는 그보다 더 오래 독립과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지켰다. 동쪽의 시스탄과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지방 군주들도 수십 년 동안 저항했다.

사산 왕위 계승자 피루즈와 뒤이어 그 아들은 여러 해 동안 당나라 조정과 그 서쪽 변경에 머물렀다. 당나라는 661년 무렵 피루즈를 위해 명목상의 ‘파사도독부(波斯都督府)’를 두었지만, 이것이 실제 재정복의 거점이 되지는 못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사산 왕조의 몰락이 페르시아 난민·상인·사제들이 공동체를 이룬 장안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전역에 파장을 남겼음을 보여 준다.

[4][1][8]

중급

항복 조약, 폭력, 그리고 일상

많은 도시와 지역은 공격으로 함락되기보다 협약(술흐)을 통해 무슬림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런 조약은 보통 공납과 세금을 내는 대가로 주민의 생명·재산·종교를 보장했다. 무력으로 점령된 곳에서는 살육, 노예화, 몰수가 일어날 수 있었다. 사료는 두 가지 결과를 모두 전하며, 때로는 같은 도시에 대해 판본마다 다르게 전한다.

사상자 수는 확정할 수 없다. 초기 아랍어 기록은 전투에 대해 크고 상징적인 숫자를 자주 내놓고, 후대 페르시아 전승은 파괴와 굴욕을 강조한다. 역사가들은 정복이 죽음과 포로의 노예화와 강제 이주를 가져왔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많은 평범한 농민과 도시민이 새 주인 아래에서 삶을 이어 갔고 흔히 같은 페르시아 지방 지주(데흐칸)가 세금을 거두었다는 점도 인정한다.

조로아스터교도, 그리스도교인, 유대인은 대체로 인두세(지즈야)를 내고 자기 종교를 지키는 보호민(딤미)으로 인정받았다. 시간이 흐르며 사회·경제적 압력과 이슬람에 대한 진심 어린 끌림이 함께 개종을 이끌었다. 일부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는 뒤에 이주했다. 인도 파르시의 조상은 정복 몇 세기 뒤 이란을 떠났다고 전해지지만, 그 시기와 사정은 논쟁 중이다.

[5][1][8]

중급

단기적·장기적 영향

단기적으로 정복은 칼리파국의 자원을 두 배로 늘렸다. 이라크와 이란의 부, 그리고 사산 왕조의 행정 전통은 새 이슬람 국가를 떠받쳤다. 초기 칼리파들은 사산 왕의 초상에 짧은 아랍어 문구를 더한 사산식 주화를 흔히 썼고, 많은 페르시아 관리와 절차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란은 그저 흡수되지 않았다. 카스피해 근처 타바리스탄 같은 산악 지대에서는 지방 왕조들이 한 세기 넘게 독립을 지켰다. 마왈리(보호 관계를 맺은 비아랍 개종자)라 불린 페르시아 개종자들은 아랍인의 특권에 반감을 품었고, 그 가운데 많은 이가 747~750년 호라산에서 시작된 아바스 혁명을 지지했다. 폐허가 된 크테시폰에서 멀지 않은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은 아바스 왕조 아래에서 페르시아의 왕권 관념과 행정은 칼리파국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문화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페르시아어가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9~10세기부터 아랍 문자로 쓰고 아랍어 낱말을 많이 받아들인 근세 페르시아어가 부하라의 사만 왕조 같은 궁정에서 문학 언어가 되었다. 시인 피르다우시는 1010년 무렵 이란의 전설과 사산 왕조의 역사를 다시 이야기하고 아랍의 정복으로 끝맺는 『샤나메』를 완성했다. 이란은 이슬람 학문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고, 뒷날 시아파 이슬람의 본고장이 되었다.

[5][10][1]

중급

정복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초기 아랍어 역사 서술에서 페르시아 정복은 땅을 이슬람에 ‘여는’ 일, 곧 푸투흐의 일부로서 신의 은총의 징표로 이야기되었다. 영웅적인 전사들, 경건한 소박함이 페르시아의 사치를 이긴 이야기, 아랍인의 신앙에 놀란 페르시아 사절의 이야기가 이슬람 전승의 일부가 되었다.

페르시아 문학의 기억 속에서 이 사건은 비극이었다. 『샤나메』는 사산 왕조의 몰락을 한 시대의 끝으로 그리며, 장군 로스탐이 다가올 일을 슬퍼하는 유명한 편지를 담고 있다. 9~10세기의 슈우비야 운동은 이슬람 안에서 비아랍, 특히 페르시아 문화의 존엄을 옹호했다. 19세기 말~20세기의 근대 이란 민족주의, 특히 팔라비 왕조 시기에는 이슬람 이전 이란을 이상화하고 정복을 민족적 재앙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1979년 이후 이란에서 주류가 된 이슬람적 시각은 이란인이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풍요롭게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기억은 다른 곳에서도 정치적으로 쓰였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동안 사담 후세인이 이끈 이라크 정부는 이란과의 전쟁을 새로운 ‘카디시야’라 부르며 옛 승리를 아랍 민족주의 선전에 이용했다. 역사가들은 정체성이 종교·부족·지역·계층으로 형성되던 7세기에 ‘아랍인 대 페르시아인’이라는 현대적 민족 관념을 거꾸로 투영하는 것을 경계한다.

[1][5][2]

심화

1차 사료와 그 문제점

서술의 대부분은 사건으로부터 두 세기 이상 지나 쓰인 아랍어 역사서에서 나온다. 특히 알타바리의 대작 『예언자들과 왕들의 역사』(10세기 초)와 알발라두리의 『여러 나라의 정복(Futuh al-Buldan)』(9세기)이 중요하다. 이 책들은 저마다 전승자 계보(이스나드)를 갖춘 앞 시대의 구전·문헌 보고들을 모은 것이다. 알타바리가 전하는 이라크 관련 보고의 상당수는 사이프 이븐 우마르에게서 나왔는데, 생생하지만 과장과 부족적 편향이 있다는 비판을 현대 학자들에게서 받아 왔다.

사건에 더 가까운 시기에 쓰인 비무슬림 사료는 드물지만 귀중하다. 7세기 후반에 쓰인, 세베오스의 것으로 전하는 아르메니아어 『역사』는 정복에 대한 가장 이른 주요 외부 기록이다. 660년 무렵의 짧은 시리아어 연대기인 『후제스탄 연대기』도 전투를 언급한다. 뒤에 쓰인 중세 페르시아어 조로아스터교 문헌에는 이란 왕권의 상실을 슬퍼하는 종말론적 애가가 남아 있다.

물적 증거는 문헌을 검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주화(아랍-사산식 주화 포함), 인장, 파피루스, 그리고 크테시폰·쿠파·이스타흐르 같은 도시의 고고학 증거가 그것이다. 이런 자료는 행정과 도시 생활의 연속성과 함께 단절의 흔적도 보여 준다.

[6][7][1]

심화

역사가들의 논쟁

신생 국가가 어떻게 오래된 제국을 그렇게 빨리 무너뜨렸을까? 비잔티움과의 전쟁·역병·내분에 따른 사산 왕조의 탈진, 아랍 군대의 기동력과 동기, 메디나의 노련한 지도력, 협상에 나선 지방 엘리트의 태도 등이 설명으로 제시된다. 프레드 도너의 『초기 이슬람 정복』(1981)은 부족들을 조직한 새 이슬람 국가의 역할을 강조했고, 휴 케네디의 『위대한 아랍 정복』(2007)은 아랍과 이란의 시각을 균형 있게 담은 서술을 제공한다.

파르바네 푸르샤리아티의 『사산 제국의 쇠퇴와 몰락』(2008)은 이 제국이 사실상 파르티아계 대귀족 가문들이 사산 왕가와 권력을 나눈 연합체였으며, 이들과 궁정의 갈등, 그리고 이들이 아랍인과 따로 맺은 거래가 몰락을 상당 부분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라크 정복의 연대를 더 이르게 잡는 수정안도 내놓았다. 그의 주장은 영향력이 컸지만, 특히 사료 해석을 두고 논쟁도 불러왔다.

종교 변화에 관해서는, 인명 사전에 나타나는 무슬림 이름의 확산을 바탕으로 한 리처드 불리엣의 『중세의 이슬람 개종』(1979)이 이란의 개종이 처음에는 느리다가 9세기에 빨라졌고, 10~11세기 무렵에야 무슬림이 큰 다수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의 방법은 비판을 받았지만, 점진적 개종이라는 큰 그림은 널리 받아들여진다. 학자들은 초기 아랍어 정복 서사가 어디까지 역사 기록이고 어디부터 후대의 문학적·법적 구성물인지도 논쟁하고 있다.

[8][9][10][5]

주요 전투 (12)

  1. 울라이스 전투633년
  2. 안바르 전투633년
  3. 아인 알타므르 전투633년
  4. 까디시야 전투636년
  5. 부르스 전투636년
  6. 잘룰라 전투637년
  7. 크테시폰 공방전637년
  8. 슈슈타르 공성전641–642년
  9. 니하완드 전투642년
  10. 준디샤푸르 공방전642년
  11. 니샤푸르 전투652년
  12. 헤라트 공방전652년

핵심 개념

제국의 탈진
비잔티움과의 긴 전쟁, 역병, 왕위 계승 위기가 아랍 원정 직전 사산 왕조를 약하게 만들었다.
푸투흐(열림)
정복을 가리키는 아랍어로, 땅을 이슬람에 ‘여는’ 일로 표현한다.
조약에 의한 항복
많은 곳이 공납을 대가로 생명·재산·종교를 보장받는 협약을 맺고 무슬림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보호민(딤미)
조로아스터교도·그리스도교인·유대인은 인두세를 내고 신앙을 지키는 딤미가 되었다.
점진적 개종
이란은 정복 순간이 아니라 약 3세기에 걸쳐 주로 무슬림의 땅이 되었다.
페르시아의 연속성
페르시아어, 행정 관행, 왕권 관념이 살아남아 이슬람 문명을 깊이 형성했다.
다투는 기억
정복은 이슬람의 도래이자 고대 이란의 몰락으로 함께 기억되며, 현대 정치 선전에도 이용되었다.

기록

  1. 602년 — 비잔티움과 사산 왕조의 마지막 대전쟁이 시작되다(~628).
  2. 628년 — 호스로 2세가 폐위·살해되고 사산 왕조의 계승 위기가 이어지다.
  3. 632년 —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고 아부 바크르가 칼리파가 되다. 야즈데게르드 3세가 즉위하다.
  4. 633년 —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와 무사나가 이라크 남부를 원정해 히라를 차지하다.
  5. 634년 — 사산 군대가 다리 전투에서 승리하다. 우마르가 칼리파가 되다.
  6. 약 636년 — 카디시야 전투. 로스탐 파로흐자드 전사(연대는 635~638년으로 논쟁 중).
  7. 637년 — 아랍군이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잘룰라에서 승리하다.
  8. 약 638년 — 군영 도시 바스라와 쿠파가 세워지다.
  9. 642년 — ‘승리 중의 승리’라 불린 니하완드 전투.
  10. 약 650년 — 파르스와 이스타흐르가 반란 끝에 마침내 평정되다.
  11. 651년 — 야즈데게르드 3세가 메르브 근처에서 살해되어 사산 왕조가 끝나다.
  12. 약 1010년 — 피르다우시가 아랍의 정복으로 끝맺는 『샤나메』를 완성하다.

용어 풀이

사산 왕조
224년부터 651년까지 이란을 다스린 왕조. 수도는 이라크의 크테시폰이었다.
칼리파
‘계승자’. 예언자 무함마드 이후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
정통 칼리파(라시둔)
‘올바르게 인도된’ 이들. 수니파 전통에서 첫 네 칼리파(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를 이른다.
조로아스터교
예언자 자라투스트라와 연결된 고대 이란의 종교. 사산 왕조의 국교였다.
데흐칸
페르시아의 지주 향신층. 정복 뒤에도 흔히 지방 권력을 유지하며 세금을 거두었다.
지즈야
이슬람 지배 아래 비무슬림 보호민이 내던 인두세.
암사르(군영 도시)
정복군을 수용하려고 세운 바스라·쿠파 같은 새 도시.
마왈리
초기 이슬람 사회에서 아랍 부족에 보호민으로 결합한 비아랍 개종자.
슈우비야
비아랍, 특히 페르시아 무슬림의 동등한 지위를 옹호한 9~10세기의 문학 운동.
크테시폰
오늘날 바그다드 근처 티그리스강 가의 사산 왕조 수도. 궁전의 거대한 벽돌 아치 ‘타크 에 키스라’로 유명하며, 그 일부가 지금도 서 있다.

묻고 답하기

정복 뒤에 페르시아 사람들이 모두 바로 무슬림이 되었나요?

아니에요. 오랫동안 대부분의 사람이 옛 종교, 특히 조로아스터교를 지켰어요. 역사가들은 이란에서 무슬림이 다수가 된 것이 200~300년이 지난 뒤였다고 생각해요.

강력한 페르시아 제국은 왜 졌나요?

비잔티움과 아주 긴 전쟁을 막 끝냈고, 역병을 겪었고, 여러 사람이 왕위를 두고 다투었어요. 아랍 군대는 빠르고, 하나로 뭉쳐 있었고, 의욕이 넘쳤어요. 그리고 많은 지방 지도자가 끝까지 싸우기보다 협상을 택했지요.

마지막 페르시아 왕은 어떻게 되었나요?

야즈데게르드 3세는 여러 해 동안 이 도시 저 도시로 도망 다녔어요. 651년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에 있는 메르브 근처에서 살해되었지요. 유명한 이야기에 따르면 방앗간 주인이 보석을 노리고, 또는 총독의 명령으로 그를 죽였다고 해요.

다른 많은 지역이 아랍어로 바뀌었는데 왜 페르시아어는 살아남았나?

이란은 넓었고, 강한 문학·행정 전통이 있었으며, 지방 엘리트가 여전히 힘을 가졌다. 9세기부터 동부 이란의 궁정이 근세 페르시아어 시를 후원했고, 페르시아어는 아시아 넓은 지역에서 권위 있는 언어가 되었다.

전투에 관한 아랍어 기록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

실제 이름과 사건을 많이 전하지만, 오랜 뒤에 기록되었고 영웅담·법적 논리·부족 이야기가 섞여 있다. 특히 숫자와 연설은 의심스럽다. 역사가들은 아르메니아·시리아 사료, 주화, 고고학과 비교한다.

푸르샤리아티의 수정 연대는 받아들여졌나?

논쟁 중이다. 많은 학자가 대귀족 가문의 역할을 강조한 점은 환영하지만, 이라크 정복을 더 이르게 잡는 연대는 논란이 있는 사료 해석에 기대고 있어 통설을 대체하지는 못했다.

오늘날 이란에서는 정복을 어떻게 기억하나?

시각이 갈린다. 이슬람이 전해지고 이란인이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든 일로 기억하는 이도 있고, 특히 민족주의 저술에서는 고대 이란의 비극적 종말로 본다. 많은 사람이 두 감정을 함께 지니고 있다.

사산 왕실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

일부는 포로가 되었고, 전승에 따르면 아랍 가문과 혼인했다. 야즈데게르드의 아들 피루즈는 동쪽으로 달아나 관직을 준 당나라의 보호 아래 살았다. 페르시아 난민들이 중국 도시에 정착했지만, 사산 왕조의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Muslim conquest of Persia. Wikipedia
  2. 이슬람의 페르시아 정복. 위키백과
  3. Battle of al-Qadisiyyah. Wikipedia
  4. Yazdegerd III. Wikipedia
  5. Islamization of Iran. Wikipedia
  6. Al-Tabari. Wikipedia
  7. Sebeos. Wikipedia
  8. Hugh Kennedy, The Great Arab Conquests: How the Spread of Islam Changed the World We Live In. Weidenfeld & Nicolson, 2007
  9. Parvaneh Pourshariati, Decline and Fall of the Sasanian Empire: The Sasanian-Parthian Confederacy and the Arab Conquest of Iran. I.B. Tauris, 2008
  10. Richard W. Bulliet, Conversion to Islam in the Medieval Period: An Essay in Quantitative History. Harvard University Press,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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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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