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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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2,500년 전 페르시아 제국은 그때까지 세상에 있었던 어떤 나라보다 큰 제국이었어요. 이집트와 오늘날의 튀르키예에서 인도까지 뻗어 있었지요. 임금은 ‘대왕’이라고 불렸고, 길과 총독과 큰 군대를 가지고 말도 종교도 서로 다른 수많은 민족을 다스렸어요.
제국의 서쪽 끝, 오늘날 튀르키예의 바닷가에는 밀레토스 같은 도시에 그리스 사람들이 살았어요. 이들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어요. 기원전 499년 이 도시들 가운데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고, 바다 건너 아테네가 배를 보내 도왔어요. 반란군은 페르시아의 도시 사르디스 일부를 불태웠어요. 페르시아는 반란을 진압했고, 다리우스 왕은 아테네도 혼내 주기로 마음먹었어요.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군이 아테네 근처 마라톤에 상륙했어요. 모두의 예상과 달리 아테네 사람들과 플라타이아에서 온 친구들이 이겼어요. 10년 뒤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훨씬 큰 육군과 해군을 이끌고 다시 왔어요. 테르모필라이라는 좁은 길목에서 스파르타 병사 300명이 이끄는 그리스의 작은 부대가 며칠 동안 페르시아군을 막다가 포위되었어요. 그 뒤 페르시아군은 주민들이 근처 섬으로 피난한 아테네를 불태웠어요.
하지만 바다에서는 달랐어요. 살라미스섬 근처의 좁은 물길에서 그리스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를 이겼어요. 이듬해 그리스군은 플라타이아에서 큰 육상 전투에서도 이겼어요. 그 뒤 페르시아는 다시는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아는 내용은 거의 모두 그리스 작가들, 특히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에게서 나왔어요.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 전쟁의 역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역사가들은 페르시아 쪽에서 보면 이 전쟁이 어땠을지도 열심히 상상해 보려고 해요.
한눈에 보기
- 기간
- 가장 넓게 잡으면 기원전 499–449년. 그리스 본토 침공은 기원전 490년과 480–479년
- 무대
- 아나톨리아 서부(이오니아), 에게해, 그리스 본토, 트라키아, 키프로스, 이집트
- 세력
-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과 그 신민(많은 그리스인 포함) 대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이끈 그리스 도시국가 동맹
- 페르시아 왕
- 다리우스 1세(재위 기원전 522–486), 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486–465),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465–424)
- 주요 전투
- 라데(494), 마라톤(490), 테르모필라이·아르테미시온(480), 살라미스(480), 플라타이아·미칼레(479), 에우리메돈(466년 무렵)
- 결과
-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 정복에 실패하고 에게해 지배권을 잃었다. 아테네는 해상 제국을 세웠다. 페르시아는 제국을 유지했고 뒤에 외교와 돈으로 영향력을 되찾았다
- 핵심 사료
- 헤로도토스 『역사』, 아이스킬로스 비극 『페르시아인들』(기원전 472년), 투키디데스·플루타르코스·디오도로스. 페르시아 쪽 서사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쉬움
페르시아 전쟁이란?
페르시아 전쟁(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5세기 전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공동체들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분쟁을 가리키는 현대의 이름입니다. 그리스인들은 흔히 이를 ‘타 메디카’, 곧 ‘메디아 사건들’이라 불렀는데, 페르시아인을 통틀어 메디아인이라고 부르곤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페르시아 지배에 맞선 이오니아 그리스인의 반란(기원전 499–493년), 마라톤에서 끝난 페르시아의 첫 그리스 본토 원정(기원전 490년), 크세르크세스의 대침공(기원전 480–479년), 그리고 에게해·키프로스·이집트에서 약 30년 동안 이어진 그리스의 반격이 포함됩니다. 전쟁이 언제 끝났는지는 역사가마다 다릅니다.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는 기원전 479/478년에 멈추지만, 가장 넓은 정의는 기원전 449년 무렵의 강화 조약 가능성까지 봅니다.
그리스인의 상상 속에서 이 전쟁은 폭정에 맞선 자유의 이야기, 소수가 다수를 이긴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에서 보면 인더스강까지 뻗은 제국의 서쪽 끝에서 벌어진 변경 전쟁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려면 두 시각이 모두 필요합니다.
쉬움
배경: 페르시아 제국과 이오니아의 그리스인
기원전 6세기 중엽 키루스 대왕이 아케메네스 제국을 세웠습니다. 그는 기원전 547/546년 무렵 아나톨리아 서부의 리디아를 정복했는데,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가 다스리던 해안의 그리스 도시들도 이때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습니다. 다리우스 1세 때 제국은 사트라피라는 속주로 나뉘고, 왕의 길로 이어지며, 공납으로 묶였습니다. 베히스툰에 새긴 다리우스의 비문은 제국의 여러 민족 가운데 ‘야우나’, 곧 이오니아인을 꼽습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신민을 주로 왕에게 충성하는 현지 참주를 통해 다스렸습니다. 많은 그리스 도시에게 이 방식은 견딜 만했지만, 특히 시민의 폭넓은 정치 참여라는 생각이 그리스 세계에 퍼지면서 반감도 쌓였습니다.
그리스 본토는 서로 자주 싸우는 독립 도시국가들의 조각보였습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기원전 507년 무렵 페르시아의 도움을 구하러 간 아테네 사절이 사르디스의 사트라프에게 복종의 전통적 표시인 ‘흙과 물’을 바쳤지만, 사절이 돌아오자 아테네는 이를 부인했습니다. 일부 역사가는 이 때문에 페르시아가 뒤에 아테네를 외국의 적이 아니라 배신한 신민으로 여겼다고 봅니다.
중급
이오니아 반란(기원전 499–493년)
기원전 499년, 페르시아와 함께 낙소스섬을 치려다 실패한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가 이오니아 도시들의 반란을 이끌었습니다. 이오니아 곳곳에서 참주들이 쫓겨났습니다. 스파르타는 도움을 거절했지만 아테네는 배 20척, 에레트리아는 5척을 보냈습니다. 기원전 498년 반란군과 동맹군은 내륙으로 진군해 사트라프의 본거지 사르디스를 불태웠고, 여신 키베베의 신전도 불탔습니다. 헤로도토스는 다리우스가 저녁마다 시종에게 “주인님, 아테네인을 기억하소서”라고 세 번 말하게 했다고 전하는데, 사실이라기보다 문학적 장치일 수 있습니다.
반란은 카리아·헬레스폰토스·키프로스로 번졌지만 페르시아는 차근차근 통제를 되찾았습니다. 기원전 494년 이오니아 함대는 사모스와 레스보스 부대가 이탈한 탓도 있어 라데섬 앞바다에서 패했습니다. 밀레토스는 함락되었습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남자 대부분이 죽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가 되었으며, 살아남은 이들은 티그리스강 하구 근처의 암페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아테네에서는 극작가 프리니코스가 『밀레토스의 함락』을 상연하자 관객이 눈물을 쏟았고, 그는 자신들의 불행을 떠올리게 했다는 이유로 1,000드라크마의 벌금을 물었습니다.
반란 뒤 페르시아 장군 마르도니오스는 이오니아의 여러 참주정을 민주정으로 바꾸었는데, 페르시아의 정책이 실용적이었음을 보여 주는 뜻밖의 조치였습니다. 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오스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에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다시 확인했지만, 함대는 아토스산 앞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부서졌습니다.
중급
첫 침공과 마라톤(기원전 490년)
기원전 490년 다티스와 아르타프레네스가 이끈 페르시아 해상 원정군이 에게해를 건너 낙소스 등 여러 섬을 굴복시키고 에우보이아의 에레트리아를 포위했습니다. 엿새 만에 내부 배신으로 도시가 넘어가자 신전이 불타고 주민이 끌려갔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이들이 수사 근처 아르데리카로 옮겨져 자기 시대까지 그곳에 살았다고 전합니다.
페르시아군은 이어 아테네에서 쫓겨난 옛 참주 히피아스의 안내로 아티카의 마라톤만에 상륙했습니다. 아테네 중장보병 약 9,000–10,000명과 플라타이아인 약 1,000명이 공격해 이들을 물리쳤습니다. 스파르타군은 종교 축제 때문에 전투가 끝난 뒤에야 도착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쪽 전사자 6,400명, 아테네 쪽 192명을 적습니다. 아테네 전사자는 전장의 봉분에 묻히고 명단이 새겨졌으므로 이 숫자는 정확할 가능성이 높지만, 페르시아 쪽 숫자는 검증하기 어렵습니다.
페르시아에게 마라톤은 징벌 원정의 제한적 좌절이었습니다. 아테네에게는 민주정과 중장보병 계층의 건국 신화가 되었습니다(별도 항목 ‘마라톤 전투’ 참조).
중급
크세르크세스의 침공: 테르모필라이, 아르테미시온, 살라미스(기원전 480년)
다리우스는 새 원정을 시작하기 전인 기원전 486년 세상을 떠났고,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먼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 훨씬 큰 규모의 침공을 준비했습니다. 헬레스폰토스에 배다리를 놓고, 위험한 곶을 피하려고 아토스반도에 운하를 파고, 진군로를 따라 보급 창고를 두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전투원이 260만 명 이상, 수행원까지 합치면 500만 명이 넘었다고 주장합니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 숫자를 불가능하다고 보며, 육군은 대체로 10만–30만 명 정도, 함대는 수백 척에서 1,000척 이상으로 추정합니다.
맞서 싸운 그리스 나라는 소수였습니다. 기원전 481년 스파르타가 이끄는 동맹이 결성되었고(뒤에 델포이에 세운 승전 기념물에는 31개 공동체가 새겨져 있다), 테살리아·테베·아르고스 등 많은 나라는 페르시아에 복종하거나 중립을 지켰습니다. 기원전 480년 8월 또는 9월,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이끈 수천 명의 그리스군이 약 사흘 동안 테르모필라이 고갯길을 지켰고, 그리스 함대는 가까운 아르테미시온에서 싸웠습니다. 페르시아군이 고갯길을 돌아가는 산길을 찾아내자 레오니다스는 대부분의 병력을 돌려보내고 스파르타인 300명, 테스피아이인, 테베인과 함께 남았습니다. 스파르타인과 테스피아이인은 싸우다 전멸했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이어 아티카를 점령했습니다. 아테네인들은 ‘나무 성벽’에 관한 신탁을 해석한 테미스토클레스를 따라 가족을 트로이젠·아이기나·살라미스로 피난시켰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아크로폴리스를 불태웠고, 훗날 아테네인들이 그곳에 묻은 파손된 조각상들이 고고학 발굴로 드러났습니다. 기원전 480년 9월 살라미스와 본토 사이의 좁은 해협에서 삼단노선 370–380척 안팎의 그리스 함대가, 좁은 물길에서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한 더 큰 페르시아 함대를 무찔렀습니다. 해안에서 이를 지켜본 크세르크세스는 군대 상당수를 이끌고 아시아로 돌아가고 마르도니오스를 그리스에 남겼습니다.
중급
플라타이아, 미칼레, 그리스의 반격(기원전 479–449년)
기원전 479년 마르도니오스는 아테네를 다시 점령하고 아테네인에게 너그러운 조건을 제시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스파르타의 섭정 파우사니아스가 이끈, 그때까지 가장 큰 그리스 연합군이 보이오티아의 플라타이아 근처에서 그와 맞섰습니다. 며칠 동안 기동전을 벌인 끝에 스파르타와 테게아 부대가 페르시아 중앙을 무너뜨렸고 마르도니오스가 전사했습니다. 그리스 전승에 따르면 같은 날 그리스 함대가 아나톨리아 해안의 미칼레에 상륙해 남은 페르시아군을 격파했고, 이는 새로운 이오니아 봉기로 이어졌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이제 페르시아 영토로 전쟁을 끌고 갔습니다. 기원전 478년 파우사니아스의 오만이 동맹국들의 등을 돌리게 하자, 아테네는 전쟁을 이어 가고 아시아의 그리스인을 해방한다는 목적으로 델로스 동맹을 조직했습니다. 동맹은 키몬의 지휘 아래 남부 아나톨리아의 에우리메돈강에서 육지와 바다의 이중 승리를 거두었습니다(기원전 466년 무렵). 이집트 반란을 돕기 위한 아테네 주도의 원정(기원전 460–454년 무렵)은 참패로 끝났지만, 키프로스 원정은 기원전 450년 무렵까지 이어졌습니다.
후대 그리스 작가들은 기원전 449년 무렵 아테네와 페르시아가 칼리아스 평화 조약을 맺어, 페르시아는 함대를 에게해에 들이지 않고 아테네는 대왕의 영토를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고 전합니다. 투키디데스는 이를 언급하지 않으며, 그 존재는 고대부터 의심받았습니다. 기원전 4세기의 역사가 테오폼포스는 새겨진 조약문이 위조라고 주장했습니다. 공식 조약이 있었든 없었든, 이 무렵 대규모 적대 행위는 멈추었습니다.
중급
영향
단기적으로 이 전쟁은 그리스 본토 나라들의 독립을 지켰고 에게해와 이오니아의 많은 도시를 페르시아 지배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승리는 아테네에 엄청난 위신을 안겼습니다. 가난한 시민들이 노를 저은 삼단노선 함대가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역사가는 이를 아테네 민주정에서 가난한 시민의 정치적 비중이 커진 것과 연결합니다.
페르시아와 싸우려고 만든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 제국으로 바뀌었습니다. 공납금은 함대를 유지했고, 기원전 440년대부터는 페르시아가 불태운 신전을 대신할 파르테논 신전 등 아크로폴리스 건축 사업에도 쓰였습니다. 이 제국이 불러온 스파르타와의 경쟁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페르시아에게 패배는 실제적이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제국은 에게해와 아나톨리아 해안 일부를 잃었지만 그 뒤 150년 동안 근동의 지배적 강국으로 남았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페르시아의 돈은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이기는 데 도움이 되었고, 기원전 387/386년 대왕의 평화로 페르시아는 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다시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아케메네스 제국을 끝낸 것은 원정을 부분적으로 크세르크세스 침공에 대한 복수로 내세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였습니다(기원전 330년).
적대가 문화 교류까지 막지는 못했습니다. 천막·직물·금속 공예품 같은 페르시아 전리품이 그리스 성소에 전시되었고, 후대 작가들은 아테네의 페리클레스 오데이온이 크세르크세스의 천막을 본떴다고 전합니다. 마거릿 밀러의 연구 『Athens and Persia in the Fifth Century BC』(1997)는 아테네인들이 공적 수사에서는 페르시아의 ‘나약함’을 비난하면서도 양산이나 특정한 술잔 같은 페르시아의 사치품과 유행을 받아들였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인적 피해는 비전투원에게 무겁게 떨어졌습니다. 노예가 되거나 강제로 이주된 밀레토스와 에레트리아 사람들, 집과 수확을 잃은 아테네인과 다른 그리스인들,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제국 여러 민족의 병사와 노잡이들, 그리고 어느 편에 섰다는 이유로 고통받은 그리스 공동체들이 그렇습니다.
중급
기억: 그리스, 유럽, 이란의 시각
그리스인들은 이 전쟁을 열렬히 기념했습니다. 마라톤에서 싸웠던 아이스킬로스는 기원전 472년 『페르시아인들』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 비극으로, 살라미스의 패전 소식이 페르시아 궁정에 전해지는 장면을 그립니다. 시모니데스의 것으로 전하는 비문시들은 테르모필라이의 전사자를 기렸습니다. 페르시아의 패배는 그리스인의 자유 관념에서 핵심 주제가 되었고, 동시에 아시아인을 사치스럽고 비굴한 ‘바르바로이(야만인)’로 보는 고정관념도 키웠습니다. 고전학자 이디스 홀은 『Inventing the Barbarian』(1989)에서 이를 분석했습니다.
근대 유럽에서 이 전쟁은 흔히 ‘서양’이 ‘동양’으로부터 구원받은 순간으로 이야기되었습니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1846년 마라톤이 영국사에서도 헤이스팅스 전투보다 중요하다고 썼습니다. 테르모필라이는 그리스 독립전쟁부터 스탈린그라드 이후의 나치 선전까지 전혀 다른 대의에 동원되었고, 대중문화에서는 만화와 영화 『300』(2007)으로 다시 불려 나왔습니다.
이란에서 아케메네스 시대는 키루스·다리우스·페르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민족적 자부심의 원천이며, 그리스와의 전쟁은 대체로 변경의 작은 일화로 여겨집니다. 영화 『300』은 페르시아인 묘사 때문에 이란 정부의 공식 항의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이란 안팎의 많은 역사가는 ‘서양 대 동양’이라는 틀이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많은 그리스인이 페르시아 편에서 싸웠고, 그리스 나라들은 서로 맞서며 페르시아의 도움을 자주 구했으며, 제국의 다양한 민족에게는 왕을 섬길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화
사료: 헤로도토스와 페르시아의 침묵
기원전 484년 무렵 페르시아 제국 안의 할리카르나소스에서 태어난 그리스인 헤로도토스는, 첫머리에서 밝히듯 그리스인과 바르바로이가 이룬 위대한 업적이 영광을 잃지 않게 하고 그들이 왜 싸웠는지 밝히려고 『역사』를 썼습니다. 그의 책은 구전, 여행 견문, 민족과 병력 목록, 크세르크세스의 어전 회의 같은 극적 장면을 엮습니다. 키케로는 그를 역사의 아버지라 불렀지만, 플루타르코스의 『헤로도토스의 악의에 대하여』를 비롯해 그의 신뢰성과 공정성을 의심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현대 학자들은 대체로 그가 비판자들의 주장보다 신중했다고 보면서도, 문학적 가공과 애국적 편향과 불가능한 숫자를 인정합니다.
다른 그리스 사료로는 기원전 479년 이후 50년에 대한 투키디데스의 짧은 개관, 페르시아 궁정의 그리스인 의사 크테시아스가 썼지만 단편으로만 전하고 신뢰도가 낮다고 평가되는 『페르시카』, 디오도로스 시쿨로스, 플루타르코스의 테미스토클레스·아리스테이데스·키몬 전기가 있습니다. 델포이에 봉헌되었다가 뒤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진 승전 기념물 ‘뱀 기둥’ 같은 비문은 싸운 그리스 나라들의 이름을 전합니다.
페르시아 쪽의 전쟁 서사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케메네스 왕실 비문은 보편 질서라는 이상을 드러낼 뿐 패배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엘람어로 된 행정 기록인 페르세폴리스 성채 점토판과 보물고 점토판은 제국이 노동력·식량 배급·여행을 어떻게 조직했는지, 따라서 군대에 어떻게 보급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 주지만 그리스 원정 자체는 서술하지 않습니다.
심화
역사학의 논쟁
1980년대부터 헬렌 산치시베르덴뷔르흐와 아멜리 쿠르트가 시작한 ‘아케메네스사 워크숍’과 피에르 브리앙의 종합서 『키루스에서 알렉산드로스까지』(프랑스어판 1996, 영어판 2002)는 그리스 중심의 그림에 도전했습니다. 이들은 페르시아 사료와 고고학을 중시하고, 쇠락하는 퇴폐적 전제 제국이라는 낡은 이미지를 거부하며, 페르시아의 실제 목표가 그리스의 영구 정복이었는지 아니면 불안정한 변경의 응징과 통제였는지 묻습니다.
숫자·병참·연대를 둘러싼 논쟁도 있습니다. 물과 식량을 고려할 때 크세르크세스의 병력이 얼마나 클 수 있었는지, 테르모필라이와 살라미스의 정확한 날짜, 1959년 트로이젠에서 발견된 ‘테미스토클레스 결의’ 비문이 아테네 소개(疏開) 명령의 진본인지 후대의 재구성인지,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가 불태운 신전을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플라타이아 서약’이 진짜인지가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역사가들은 전쟁의 의미를 논합니다. 정치 체제의 충돌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리스 공동체들이 지역의 이해에 따라 갈라선 사건이었을까요? 하나의 ‘그리스’ 편이라는 개념 자체가 상당 부분 이 전쟁과 후대 기억의 산물입니다. 아이스킬로스와 헤로도토스에 대한 연구는 이 전쟁이 페르시아라는 ‘타자’와 대비해 그리스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지 보여 줍니다.
주요 전투 (5)
핵심 개념
- 제국과 변경
- 페르시아에게 에게해는 거대한 제국의 한 변경이었고, 그리스인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다.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쟁은 전혀 달라 보인다.
- 흙과 물
- 페르시아 왕에 대한 복종의 표시. 많은 그리스 나라가 이를 바쳤으며, 양쪽이 이 행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 해군력
- 살라미스와 이후 원정은 삼단노선 함대의 가치를 보여 주었고, 이는 아테네 세력의 기반이 되었다.
- 그리스 동맹과 메디아 편들기
- 일부 그리스 나라만 저항했다. 페르시아 편에 선 나라는 ‘메디아 편을 들었다(메디스모스)’는 비난을 받았다. 하나로 뭉친 그리스는 없었다.
- 자유 대 예속
- 자유 시민과 대왕의 신민을 대비한 그리스식 서술의 핵심. 뒤의 유럽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 바르바로이 고정관념
- 전쟁은 페르시아인과 아시아인을 사치스럽고 비굴하게 보는 그리스의 이미지를 키웠고, 현대 학자들은 이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 승자의 사료
- 서사 사료가 모두 그리스 것이어서, 역사가들은 비문·고고학·행정 문서로 페르시아 쪽을 재구성해야 한다.
기록
- 약 기원전 547년 — 키루스 대왕이 리디아를 정복하고 이오니아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 지배 아래 들어가다.
- 기원전 499년 — 이오니아 반란 시작(기원전 499년). 이듬해 반란군과 아테네군이 사르디스를 불태우다.
- 기원전 494년 — 이오니아 함대가 라데에서 패하고 밀레토스가 함락되다(기원전 494년).
- 기원전 492년 — 마르도니오스의 트라키아·마케도니아 원정. 함대가 아토스산 앞바다에서 부서지다(기원전 492년).
- 기원전 490년 — 에레트리아가 파괴되고, 아테네와 플라타이아 군이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치다(기원전 490년).
- 기원전 486년 — 다리우스 1세가 죽고 크세르크세스 1세가 즉위하다(기원전 486년).
- 기원전 480년 —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 테르모필라이, 아르테미시온, 아테네 방화,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
- 기원전 479년 — 그리스군이 플라타이아와 미칼레에서 승리하다(기원전 479년).
- 기원전 478년 — 아테네가 전쟁을 이어 가려고 델로스 동맹을 세우다(기원전 478년).
- 기원전 472년 — 아이스킬로스가 아테네에서 『페르시아인들』을 상연하다(기원전 472년).
- 약 기원전 466년 — 키몬이 에우리메돈강에서 승리하다(기원전 466년 무렵).
- 약 기원전 449년 — 존재가 논란인 아테네와 페르시아의 칼리아스 평화(기원전 449년 무렵).
용어 풀이
- 아케메네스 제국
- 키루스 대왕이 세운 페르시아 제국. 조상 아카이메네스의 이름을 딴 것으로, 기원전 550년 무렵부터 330년까지 이어졌다.
- 대왕
- 그리스인이 페르시아 왕을 부른 이름. 왕 자신은 ‘왕 중의 왕’이라 칭했다.
- 사트라프
- 페르시아 제국 속주(사트라피)의 총독.
- 이오니아
- 아나톨리아 서해안 중부와 가까운 섬들. 밀레토스 같은 그리스 도시가 있었다.
- 참주
- 그리스에서 정상적인 헌정 질서 밖에서 권력을 잡은 통치자. 반드시 잔인했다는 뜻은 아니다.
- 메디스모스
- 페르시아(‘메디아’) 편을 드는 것. 복종한 그리스 나라를 비난하는 말로 쓰였다.
- 삼단노선(트리에레스)
- 노잡이 약 170명이 세 층으로 앉아 젓는 빠른 전함.
- 중장보병(호플리테스)
- 팔랑크스라는 밀집 대형으로 싸운 그리스의 중무장 보병.
- 델로스 동맹
- 기원전 478년부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이어 가려고 아테네가 이끈 그리스 나라들의 동맹.
- 뱀 기둥
- 페르시아와 싸운 그리스 나라들의 이름이 새겨진 델포이의 청동 승전 기념물. 남은 부분이 이스탄불에 서 있다.
묻고 답하기
페르시아는 왜 그리스를 공격했나요?
그리스 사료는 페르시아 왕들이 이오니아 반란을 도운 아테네에 복수하려 했다고 말합니다. 현대 역사가들은 페르시아가 서쪽 변경을 안정시키려 했고, 아테네를 약속을 깬 신민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고 덧붙입니다.
테르모필라이에는 정말 스파르타인 300명뿐이었나요?
스파르타 시민은 300명이었지만 처음 그리스군 전체는 수천 명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스파르타인들은 테스피아이인·테베인, 그리고 거의 언급되지 않는 헤일로타이와 함께 남았습니다.
크세르크세스의 군대는 얼마나 컸나요?
헤로도토스는 수백만 명이라고 했지만 불가능한 숫자입니다. 현대 추정은 대개 10만–30만 명 정도이며, 정확한 수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든 그리스인이 페르시아와 싸웠나요?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 나라가 페르시아에 복종하거나 중립을 지켰고, 많은 이오니아 그리스인이 크세르크세스의 함대에서 싸웠습니다.
왜 페르시아 쪽 이야기는 남아 있지 않나요?
페르시아인은 이런 종류의 서사 역사를 쓰지 않았고, 왕실 비문은 패배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역사가들은 고고학과 행정 점토판으로 제국을 이해하지만, 전쟁 이야기 자체는 그리스 쪽 기록입니다.
전쟁은 평화 조약으로 끝났나요?
후대 그리스 작가들은 기원전 449년 무렵의 칼리아스 평화를 말하지만, 투키디데스는 이를 언급하지 않고 고대와 현대의 학자들 모두 그 존재를 의심해 왔습니다.
이 전쟁은 ‘동양’과 ‘서양’의 싸움이었나요?
후대에 생긴 서술 방식입니다. 당시에는 양편에 모두 그리스인이 있었고, 페르시아 제국은 수많은 민족을 포함했으며, ‘서양’이라는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Herodotus, The Histories (trans. A. D. Godley), Book 7. Perseus Digital Library, Tufts University
- 페르시아 전쟁. 위키백과
- Greco-Persian Wars. Wikipedia
- Herodotus. Wikipedia
- The Persians (Aeschylus). Wikipedia
- Achaemenid Empire. Wikipedia
- Delian League. Wikipedia
- Peace of Callias. Wikipedia
- Peter Green, The Greco-Persian War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 Pierre Briant (trans. Peter T. Daniels), From Cyrus to Alexander: A History of the Persian Empire. Eisenbrauns, 2002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