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2,200여 년 전,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두 강한 나라가 마주 보고 있었어요. 하나는 이탈리아반도 대부분을 다스리던 도시 로마였고, 다른 하나는 북아프리카, 지금의 튀니지에 있던 부유한 무역 도시 카르타고였어요. 로마 사람들은 카르타고 사람들을 ‘포에니’(페니키아인)라고 불렀어요. 카르타고를 세운 사람들이 페니키아에서 왔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전쟁들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불러요.
로마와 카르타고는 이미 한 번 긴 전쟁을 치렀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섬을 빼앗겼어요. 그 뒤 바르카 가문이라는 카르타고의 한 집안이 에스파냐에 새 영토를 일구었어요. 이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한니발이에요. 기원전 218년, 에스파냐의 사군툼이라는 도시를 둘러싼 다툼 끝에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어요.
한니발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을 했어요.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가는 대신, 말과 전투 코끼리까지 거느린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에서 프랑스 남부를 지나 눈 덮인 알프스산맥을 넘었어요. 가는 길에 많은 병사와 동물이 죽었어요. 이탈리아에 도착한 한니발은 로마군을 거듭 물리쳤어요. 기원전 216년 칸나이에서는 거대한 로마군을 에워싸 무찔렀어요. 로마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날 가운데 하나였어요.
그래도 로마는 항복하지 않았어요. 새 군대를 모으고, 이탈리아에서는 큰 전투를 피하면서 다른 곳에서 카르타고와 싸웠어요. 스키피오라는 젊은 로마 장군이 에스파냐의 카르타고 땅을 정복한 뒤 아프리카로 건너갔어요. 한니발은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고, 기원전 202년 자마에서 스키피오에게 졌어요.
카르타고는 평화 조약을 맺고 엄청난 은을 물어 주고 군함을 거의 모두 넘겨야 했어요. 로마는 서지중해의 으뜸가는 나라가 되었고, 한니발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어요.
한눈에 보기
- 기간
- 기원전 218–201년(기원전 219년 사군툼 포위가 발단)
- 무대
- 이탈리아, 에스파냐(이베리아), 시칠리아, 사르데냐, 북아프리카. 그리스에서는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이 연계되어 벌어졌다
- 세력
- 로마 공화정과 이탈리아 동맹시 대 카르타고와 그 동맹(많은 이베리아인·갈리아인, 한때 카푸아·시라쿠사·마케도니아). 누미디아 왕들은 양편에 나뉘어 싸웠다
- 주요 인물
- 한니발, 하스드루발, 마고 바르카(카르타고)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뒤의 아프리카누스)(로마) / 마시니사(누미디아)
- 주요 전투
- 트레비아(218), 트라시메누스호(217), 칸나이(216), 시라쿠사(213–212), 노바 카르타고(209), 메타우루스(207), 일리파(206), 자마(202)
- 결과
- 로마의 승리. 기원전 201년 카르타고는 에스파냐와 함대(10척 제외)를 포기하고 50년에 걸쳐 은 1만 탈란톤을 내기로 했다
- 핵심 사료
- 폴리비오스 『역사』(제3권과 단편), 리비우스 『로마사』(제21–30권). 후대의 아피아노스, 카시우스 디오, 시인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쉬움
제2차 포에니 전쟁이란?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 공화정과 카르타고가 벌인 세 차례 전쟁 가운데 두 번째입니다. ‘포에니’는 ‘페니키아의’라는 뜻의 라틴어 푸니쿠스(Punicus)에서 왔는데, 카르타고가 페니키아 도시 티로스에서 온 이주민들이 세운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인들은 이를 한니발 전쟁이라 불렀고, 후대 로마인에게는 나라가 겪고 살아남은 가장 큰 시련이었습니다.
전쟁은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벌어졌습니다. 한니발은 약 15년 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렀고, 그동안 에스파냐·시칠리아·사르데냐에서도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이 싸웠으며, 그리스에서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와의 전쟁이 따로 이어졌습니다. 전쟁은 로마군이 아프리카에 상륙하고 카르타고가 로마의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끝났습니다.
이 전쟁은 한니발의 알프스 횡단, 역사상 가장 완벽한 전장 승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칸나이 전투, 그리고 그 뒤에도 협상을 거부한 로마의 태도로 기억됩니다. 결과적으로 로마는 서지중해의 패권국이 되어 제국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습니다.
쉬움
배경: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바르카 가문의 에스파냐까지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1년)에서 로마와 카르타고는 주로 시칠리아를 두고 싸웠습니다. 해군을 만든 로마가 이겼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내주고 큰 배상금을 물었습니다. 곧이어 카르타고는 급료를 받지 못한 용병과 예속된 리비아인들의 참혹한 반란(용병 전쟁, 기원전 241–237년)을 겪었습니다. 카르타고가 약해진 틈에 로마는 사르데냐를 빼앗고 돈을 더 요구했는데, 친로마적인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조차 이를 부당하다고 보았습니다.
시칠리아에서 싸웠던 카르타고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는 기원전 237년 에스파냐로 건너가 은광과 병력이 풍부한 새 카르타고 영토를 일구었습니다. 그가 죽은 뒤 사위 하스드루발(‘미남’ 하스드루발이라고도 한다)이 사업을 이어 노바 카르타고(오늘날 카르타헤나)를 세웠습니다. 기원전 226/225년 무렵 하스드루발과 로마는 카르타고인이 무장한 채 에브로강을 건너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
기원전 221년 하스드루발이 암살되자 군대는 하밀카르의 맏아들로 20대 중반이던 한니발을 사령관으로 뽑았습니다. 한니발이 훗날 안티오코스 3세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 앞에서 결코 로마의 친구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중급
원인: 사군툼과 책임 문제
사군툼은 에브로강 남쪽의 이베리아 도시로, 로마와 모종의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219년 카르타고와 동맹한 이웃들과 분쟁을 겪은 뒤 한니발이 이 도시를 포위했고, 도시는 약 8개월 만에 함락되었습니다. 로마는 카르타고에 사절을 보내 한니발을 넘기라고 요구했습니다. 유명한 이야기에 따르면 로마 사절 퀸투스 파비우스는 토가 자락을 모아 쥐고 여기에 평화와 전쟁이 모두 들어 있다고 말했고, 카르타고인들이 원하는 것을 주라고 하자 전쟁을 떨어뜨렸습니다. 로마는 기원전 218년 봄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고대 저자들은 책임을 두고 다투었습니다. 로마 전승은 한니발과 바르카 가문의 복수심을 탓했습니다. 폴리비오스는 구실(사군툼), 시작(한니발의 공격), 깊은 원인(하밀카르의 분노, 사르데냐를 둘러싼 카르타고의 원한, 에스파냐에서 거둔 바르카 가문의 성공)을 구분했습니다. 그는 또 사군툼이 에브로강 남쪽에 있었으므로 조약상 지위가 불분명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현대 역사가들은 다른 관점도 더합니다. 강력해진 카르타고령 에스파냐에 대한 로마의 두려움, 카르타고 정부와 바르카 가문 장군들의 관계, 그리고 과연 어느 쪽이든 큰 전쟁을 원했는지 등입니다. 합의된 결론은 없으며, 친로마 전승을 얼마나 믿느냐에 따라 판단이 크게 달라집니다.
중급
이탈리아의 한니발: 알프스, 트레비아, 트라시메누스, 칸나이(기원전 218–216년)
로마는 에스파냐와 아프리카를 동시에 공격할 계획이었지만 한니발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기원전 218년 그는 노바 카르타고를 떠나 피레네산맥을 넘고, 론강을 건넌 뒤 늦가을에 아마도 15일 남짓 걸려 알프스를 넘었습니다. 폴리비오스는 그가 보병 2만, 기병 6,000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이 숫자는 한니발이 남부 이탈리아에 세운 비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에스파냐를 떠난 뒤 병력을 매우 많이 잃은 셈입니다. 코끼리 37마리 대부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습니다. 알프스를 넘은 경로는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로마에 막 정복된 북이탈리아의 갈리아 부족들이 그에게 합류했습니다. 그는 티키누스강에서 로마 기병을, 기원전 218년 12월 트레비아강에서 로마군을 물리쳤습니다. 기원전 217년 6월에는 에트루리아의 트라시메누스호 기슭에서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를 매복 공격해, 플라미니우스를 포함해 로마군 약 1만 5,000명을 죽였습니다. 로마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세웠습니다. 정면 대결 없이 한니발을 뒤쫓기만 하는 그의 전략은 ‘지연자(쿵크타토르)’라는 별명을 낳았는데, 처음에는 조롱이었다가 나중에는 칭찬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216년 로마는 방침을 바꿔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에게 유례없이 큰 군대를 맡겼습니다. 아풀리아의 칸나이에서 한니발은 약한 갈리아·에스파냐 보병을 앞으로 휘어진 중앙에 두었고, 이들이 천천히 밀리는 동안 양 날개의 아프리카 보병이 안쪽으로 돌아서고 기병이 뒤를 막았습니다. 로마군은 포위되었습니다. 폴리비오스는 로마군 전사자를 약 7만 명, 리비우스는 전사 4만 8,200명과 수천 명의 포로로 적습니다. 현대의 추정은 저마다 다르지만, 칸나이는 고대사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하루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파울루스와 많은 원로원 의원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중급
긴 전쟁: 로마의 회복력과 넓어진 전선(기원전 216–207년)
칸나이 이후 큰 도시 카푸아를 비롯한 남부 이탈리아의 많은 공동체가 한니발 편으로 돌아섰고, 기원전 215년에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가 그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친로마적이던 왕 히에론 2세가 죽은 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도 기원전 214년 로마에 등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중부의 로마 동맹 체제의 중심은 굳게 버텼고, 한니발은 아프리카에서 대규모 증원군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칸나이 이후 로마를 곧바로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병 대장 마하르발은 “한니발, 당신은 승리하는 법은 알지만 승리를 이용하는 법은 모르는군요”라고 말했습니다.
로마는 비상한 조치로 대응했습니다. 자유를 약속받은 노예 지원병까지 포함해 새 군단을 모았고, 칸나이에서 붙잡힌 병사들의 몸값을 치르지 않았으며, 리비우스에 따르면 포룸 보아리움에 갈리아인 둘과 그리스인 둘을 산 채로 묻는 드문 인신 공양까지 했습니다. 세금이 오르고 부유한 시민들은 국가에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로마는 한니발의 동맹들을 공격했습니다. 마르켈루스는 긴 포위 끝에 기원전 212년 시라쿠사를 함락했는데, 이때 도시의 방어 장치를 설계한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살해되었습니다. 한니발이 구원하려고 로마로 진군했는데도 카푸아는 기원전 211년 로마에 다시 넘어갔고 지도자들은 처형되었습니다. 기원전 209년 파비우스가 타렌툼을 되찾았을 때, 리비우스는 주민 약 3만 명이 노예로 팔렸다고 전합니다.
에스파냐에서는 푸블리우스와 그나이우스 스키피오 형제가 기원전 211년 패하여 전사했습니다. 그 아들이자 조카인 젊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기원전 210년 지휘권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원전 209년 대담한 공격으로 노바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바이쿨라(208)와 일리파(206)에서 카르타고군을 이겨 카르타고를 에스파냐에서 몰아냈습니다. 기원전 207년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이 구원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었지만 한니발과 합류하기 전 메타우루스강에서 패하여 전사했습니다. 리비우스는 그의 머리가 한니발의 진영에 던져졌다고 전합니다.
중급
아프리카와 자마(기원전 204–201년)
스키피오는 망설이는 원로원을 설득해 아프리카 침공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원전 204년 우티카 근처에 상륙했고, 기원전 203년 카르타고군과 누미디아 왕 시팍스의 겨울 진영을 야습으로 불태운 뒤 대평원 전투에서 이겼습니다. 에스파냐에서 카르타고 편으로 싸웠던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는 스키피오의 동맹이 되어 시팍스의 왕국을 차지했습니다. 카르타고는 한니발과 동생 마고를 이탈리아에서 불러들였습니다.
기원전 202년 이 전쟁의 가장 유명한 두 지휘관이 자마에서 맞섰습니다. 로마군 중대(마니풀루스)들이 길을 터 주어 한니발의 코끼리들은 그 사이로 빠져나가며 힘을 잃었고, 로마와 누미디아 기병이 돌아와 한니발 전열의 뒤를 치면서 승부가 났습니다. 카르타고는 강화를 청했습니다.
기원전 201년의 조약은 카르타고에 아프리카 영토는 남겨 두었지만 해외 영토를 모두 빼앗았습니다. 카르타고는 전투 코끼리와 10척을 뺀 모든 군함을 넘기고, 50년에 걸쳐 은 1만 탈란톤을 내며, 로마의 허락 없이는 전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마시니사는 카르타고와 국경을 맞댄, 더 넓어진 누미디아의 왕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누스’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중급
영향: 로마의 부상과 카르타고의 운명
승리로 로마는 서지중해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에스파냐는 기원전 197년 두 개의 로마 속주가 되었고, 이후 두 세기에 걸친, 흔히 잔혹했던 정복이 시작되었습니다. 필리포스 5세와의 전쟁은 로마를 그리스 문제로 끌어들였고, 50년 안에 로마는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왕국을 꺾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에 글을 쓴 폴리비오스는 로마인이 기원전 220년부터 167년까지 53년도 안 되는 사이에 어떻게 거의 온 세상을 정복했는지 설명하려 했습니다.
카르타고는 경제적으로 회복했습니다. 한니발은 최고 행정관(수페테스)이 되어 재정을 개혁했지만, 로마의 의심 때문에 기원전 195년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안티오코스 3세를 도와 로마에 맞섰고, 넘겨지지 않으려고 아마도 기원전 183–181년 무렵 독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마시니사가 카르타고 땅을 잠식한 것이 제3차 포에니 전쟁으로 이어졌고, 기원전 146년 로마는 카르타고를 파괴했습니다.
이탈리아의 피해는 컸습니다. 전투·약탈·보복이 10년 넘게 남부 이탈리아 여러 지역을 황폐하게 했습니다. 리비우스가 전하는 로마 인구조사 수치는 전쟁 중 크게 떨어지는데, 그 수치가 정확히 무엇을 셌는지는 논쟁거리입니다. 타렌툼과 카푸아 같은 함락 도시에서 수만 명이 죽거나 노예가 되었고, 많은 농촌 공동체가 뿌리째 흔들렸습니다. 아널드 토인비의 『한니발의 유산』(1965)은 전쟁이 이탈리아 농민층에 오래가는 사회적 손상을 입혀 공화정 말기 위기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지만, 후대 학자들은 그 변화의 어느 정도가 전쟁 자체 때문인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탈리아 밖에서도 이 전쟁은 로마인도 카르타고인도 아닌 사람들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이베리아 공동체들은 양편 모두로부터 병사·은·인질을 요구받았습니다. 스키피오가 노바 카르타고를 점령했을 때 그곳에 잡혀 있던 인질을 풀어 준 것은 이베리아인의 지지를 얻은 한 이유였습니다. 누미디아 왕국들은 시팍스와 마시니사 사이에서 찢겼고, 시칠리아와 사르데냐의 공동체들은 포위와 보복에 시달렸습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이에게 로마의 승리는 해방이 아니라 오래 이어질 새 지배자의 등장이었습니다.
중급
기억: 로마, 튀니지, 그리고 군사 전통
로마인에게 이 전쟁은 민족적 인내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리비우스의 책은 재앙 속에서도 살아남은 로마의 덕과 단결을 그리며, “한니발이 성문 앞에 있다(Hannibal ad portas)”는 말은 아이를 겁주거나 위험을 알리는 라틴어 표현으로 남았습니다. 서사시인 실리우스 이탈리쿠스는 현존하는 가장 긴 라틴어 시인 『푸니카』로 이 전쟁을 노래했습니다.
적장 한니발은 일종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의 천재성과 끈기는 찬탄을, 그의 최후는 연민을 샀습니다. 수도 곁에 카르타고 유적이 있는 오늘날 튀니지에서 한니발은 북아프리카 역사의 민족적 인물로 여겨집니다. 기원전 146년 대부분 파괴되어 주로 로마·그리스 사료로만 알려졌던 카르타고 문화는, 토페트 성소의 아동 희생을 둘러싼 논쟁적 증거를 포함해 지금 고고학을 통해 다시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 전쟁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파시즘 시대의 영화 『아프리카의 스키피오』(1937)로, 고대 로마의 아프리카 승리를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과 연결했습니다. 군사 사상가들은 칸나이를 포위 섬멸전의 본보기로 연구했고, 독일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은 『칸나이』라는 연구서를 연재했습니다. 많은 역사가는 한니발이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졌다고 지적하며, 이 전쟁을 전술적 탁월함과 전략적 성공 사이의 간극을 보여 주는 고전적 사례로 봅니다.
심화
사료: 폴리비오스, 리비우스, 사라진 카르타고의 목소리
메갈로폴리스의 폴리비오스(기원전 200년 무렵–118년 이후)는 인질로 로마에 끌려온 그리스 정치가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입양 손자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집안과 가까워졌습니다. 칸나이까지를 다룬 제3권은 온전히 남아 있지만 이후 권들은 단편으로만 전합니다. 그는 문서를 찾아보고 생존자를 인터뷰하고 한니발의 알프스 경로를 직접 걸었으며, 앞선 저자들을 비판했습니다. 스키피오 가문과의 친분이 아프리카누스의 초상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리비우스(기원전 59년–기원후 17년)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글을 썼습니다. 그의 제21–30권은 이 전쟁에 관한 가장 풍부한 연속 서사입니다. 그는 폴리비오스와 앞선 로마 연대기 작가들을 이용했는데, 그중 일부는 숫자를 부풀리고 연설과 일화를 지어냈으며, 리비우스 자신의 목적도 부분적으로 도덕적·애국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두 사람의 기록이 모두 남은 부분에서 리비우스의 세부를 폴리비오스와 대조합니다.
두 사람 모두 지금은 사라진 앞선 저자들에게 기댔습니다. 전쟁 중이나 직후에 그리스어로 역사를 쓴 로마 원로원 의원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 그리고 한니발을 수행한 그리스 역사가들, 특히 칼레악테의 실레노스와 스파르타의 소실로스가 그렇습니다. 소실로스의 글은 작은 파피루스 단편만 남았습니다. 카르타고 쪽 서사는 남아 있지 않으므로, 카르타고 정부의 목표나 한니발 자신의 의도는 적대적이거나 적어도 외부인의 사료에서 추론해야 합니다. 아피아노스, (일부가 조나라스를 통해 전하는) 카시우스 디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 플루타르코스 같은 후대 저자들은 신뢰도가 고르지 않은 세부를 보탭니다.
심화
역사학의 논쟁
전략: 한니발이 칸나이 뒤 로마로 진군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을까요? 현대 역사가 대부분은 그가 공성 장비와 안정된 보급 기지가 없었고, 도시를 함락하기보다 이탈리아의 로마 동맹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이 전략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면 논쟁은 왜 그 전략이 실패했느냐로 옮겨 갑니다. 충성스러운 라틴 식민시, 로마의 인력 예비와 해상 장악, 그리고 로마의 지도를 카르타고의 지도와 바꾸기를 꺼린 이탈리아 공동체들이 거론됩니다.
숫자와 장소: 군대와 사상자에 관한 고대의 숫자는 부풀려졌거나 도식적인 경우가 많고, 현대 추정도 크게 엇갈립니다. 칸나이 전장과 트라시메누스 전투 장소의 정확한 위치, 무엇보다 알프스 횡단 경로는 수백 년 동안 논쟁거리였습니다. 과학적 방법도 논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예컨대 2016년의 한 연구는 트라베르세트 고개에서 대규모 동물 퇴적 흔적을 찾았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를 입증되지 않은 주장으로 봅니다.
해석: 예전 연구는 이 전쟁을 로마와 ‘셈족’ 또는 ‘동방적’ 카르타고 사이의 문명 충돌로 그리곤 했는데, 이런 표현은 이제 19–20세기의 편견이 빚은 것으로 인식됩니다. 덱스터 호요스가 엮은 『A Companion to the Punic Wars』(2011)에 실린 글들처럼 최근 연구는 카르타고를 더 넓은 헬레니즘·지중해 세계 안에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 못지않게 전쟁의 흐름을 좌우한 이베리아인·누미디아인·갈리아인·이탈리아인의 선택에 더 주목합니다.
주요 전투 (40)
- 사군툼 공성전기원전 219년
- 트레비아강 전투기원전 218년
- 티키누스 전투기원전 218년
- 론강 도하 전투기원전 218년
- 한니발의 알프스 산맥 횡단기원전 218년
- 키사 전투기원전 218년
- 릴리바이움 해전기원전 218년
- 트라시메노호 전투기원전 217년
- 에브로강 해전기원전 217년
- 게로니움 전투기원전 217년
- 아게르 팔레르누스 전투기원전 217년
- 칸나에 전투기원전 216년
- 놀라 전투 (기원전 216년)기원전 216년
- 놀라 전투기원전 215년
- 데르토사 전투기원전 215년
- 코르누스 전투기원전 215년
- 시라쿠사 공성전기원전 214–212년
- 놀라 전투 (기원전 214년)기원전 214년
- 베네벤툼 전투기원전 214년
- 실라루스 전투기원전 212년
- 카푸아 전투기원전 212년
- 헤르도니아 전투기원전 212년
- 타렌툼 전투 (기원전 212년)기원전 212년
- 상바이티스 전투기원전 211년
- 카푸아 전투기원전 211년
- 헤르도니아 전투기원전 210년
- 누미스트로 전투기원전 210년
- 노바카르타고 전투기원전 209년
- 카누시움 전투기원전 209년
- 타렌툼 전투 (기원전 209년)기원전 209년
- 바이쿨라 전투기원전 208년
- 메타우루스 전투기원전 207년
- 그루멘툼 전투기원전 207년
- 일리파 전투기원전 206년
- 크로토네 전투기원전 204년
- 그레이트플레인스 전투기원전 203년
- 우티카 전투 (기원전 203년)기원전 203년
- 포강 계곡 습격기원전 203년
- 키르타 전투기원전 203년
- 자마 전투기원전 202년
핵심 개념
- 공세 전략
- 한니발은 육로로 이탈리아에 전쟁을 끌고 들어가, 로마 자체를 함락하기보다 로마의 동맹망을 무너뜨리려 했다.
- 로마의 회복력
- 시민과 동맹시의 막대한 인력 예비, 그리고 패배 뒤에도 협상을 거부한 태도가 로마를 한니발보다 오래 버티게 했다.
- 파비우스 전략
- 정면 대결을 피하며 적을 지치게 하는 전략. ‘지연자’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이름을 땄다.
- 양익 포위
- 적을 양 측면과 뒤에서 에워싸는 칸나이의 전술. 후대 군대들이 연구한 본보기다.
- 다중 전선
- 전쟁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로마가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에스파냐·시칠리아·아프리카에서 결판났다.
- 동맹의 정치
- 이탈리아 도시, 이베리아 민족, 누미디아 왕들의 충성과 이탈이 전쟁의 흐름을 좌우했다.
- 승자의 역사
- 남은 기록은 그리스·로마의 것이어서, 카르타고의 관점은 비판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기록
- 기원전 237년 — 하밀카르 바르카가 에스파냐로 건너가 카르타고 세력을 일구기 시작하다(기원전 237년).
- 약 기원전 226년 — 로마와 하스드루발의 에브로 조약(기원전 226년 또는 225년).
- 기원전 219년 — 한니발이 사군툼을 포위해 함락하다(기원전 219년).
- 기원전 218년 — 로마의 선전포고.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티키누스와 트레비아에서 이기다(기원전 218년).
- 기원전 217년 — 한니발이 트라시메누스호에서 로마군을 섬멸하고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독재관이 되다(기원전 217년).
- 기원전 216년 — 칸나이 전투. 카푸아 등 여러 도시가 한니발 편에 서다(기원전 216년).
- 기원전 212년 — 마르켈루스가 시라쿠사를 함락하고 아르키메데스가 죽다(기원전 212년).
- 기원전 211년 — 로마가 카푸아를 되찾고, 에스파냐에서 스키피오 형제가 전사하다(기원전 211년).
- 기원전 209년 — 스키피오가 노바 카르타고를 점령하다(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7년 —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메타우루스강에서 패하여 전사하다(기원전 207년).
- 기원전 202년 — 스키피오가 자마에서 한니발을 이기다(기원전 202년).
- 기원전 201년 — 강화 조약. 카르타고가 함대와 에스파냐를 내주고 큰 배상금을 물기로 하다(기원전 201년).
용어 풀이
- 포에니
- ‘페니키아의’라는 뜻의 라틴어 푸니쿠스에서 온 말. 카르타고와 그 사람들을 가리킨다.
- 바르카 가문
- 하밀카르 바르카와 그 아들 한니발·하스드루발·마고의 집안. 에스파냐와 이탈리아에서 카르타고군을 이끌었다.
- 집정관(콘술)
- 해마다 두 명씩 선출되어 군대를 지휘한 로마 공화정의 최고 정무관.
- 독재관
- 로마 공화정에서 비상시에 대개 6개월 동안 최고 권한을 받은 정무관.
- 군단(레기오)
- 로마군의 기본 단위. 이 시기에는 중보병 약 4,000–5,000명.
- 중대(마니풀루스)
- 군단의 전술 하위 단위. 바둑판 모양으로 배치해 유연하게 움직였다.
- 누미디아인
- 카르타고 서쪽(오늘날 알제리와 튀니지 서부)의 여러 민족. 경기병으로 유명했다.
- 탈란톤
- 은에 쓰인 큰 무게 단위. 아티카·에우보이아 기준으로 약 26kg.
- 배상금
- 패전국이 승전국에 강제로 치르는 돈.
- 수페테스
- 해마다 선출된 카르타고의 최고 행정관.
묻고 답하기
한니발은 정말 코끼리를 데리고 알프스를 넘었나요?
네. 폴리비오스는 그가 에스파냐를 떠날 때 코끼리 37마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몇 마리는 알프스를 넘어 트레비아 전투에서 싸웠지만 대부분 곧 추위 속에 죽었습니다.
한니발은 왜 칸나이 뒤에 로마를 공격하지 않았나요?
성벽을 두른 큰 도시를 함락할 공성 장비와 보급이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의 계획은 로마의 동맹들이 로마를 떠나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만 성공했습니다.
칸나이에서는 몇 명이 죽었나요?
고대 저자들은 로마군 전사자를 약 4만 8,000명에서 7만 명으로 적습니다. 현대 역사가들은 재앙이었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정확한 숫자에는 의견이 갈립니다.
결국 로마가 이긴 이유는 무엇인가요?
로마는 시민과 이탈리아 동맹시에서 나오는 막대한 병력이 있었고, 바다를 장악했고, 동맹 대부분의 충성을 지켰으며, 한니발이 이탈리아에 묶여 있는 동안 에스파냐와 아프리카에서 이겼습니다.
전쟁 뒤 한니발은 어떻게 되었나요?
한동안 카르타고 정부를 이끌다 망명했고, 안티오코스 3세를 도와 로마에 맞섰으며, 붙잡히지 않으려고 기원전 183–181년 무렵 독을 마셨습니다.
리비우스의 기록은 믿을 만한가요?
리비우스는 가장 풍부한 사료지만 약 두 세기 뒤에 애국적 목적으로 썼고, 신뢰하기 어려운 로마 저자들도 이용했습니다. 두 기록이 모두 남은 부분에서 역사가들은 폴리비오스를 더 신뢰합니다.
카르타고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나요?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카르타고의 역사서는 남아 있지 않아, 그들의 관점은 그리스·로마 저자, 비문, 고고학을 통해 전해집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Polybius, Histories (English translation). Perseus Digital Library, Tufts University
- Livy, The History of Rome, Book 21 (trans. Canon Roberts, 1912). Perseus Digital Library, Tufts University
- 제2차 포에니 전쟁. 위키백과
- Second Punic War. Wikipedia
- Second Punic War. World History Encyclopedia
- Hannibal. Wikipedia
- Battle of Cannae. Wikipedia
- Livy. Wikipedia
- Adrian Goldsworthy, The Punic Wars. Cassell, 2000
- Dexter Hoyos (ed.), A Companion to the Punic Wars. Wiley-Blackwell, 2011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