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탄금대 전투(충주 전투, 1592)

탄금대 전투 彈琴臺戰鬪 · 충주 전투 · 일본어 忠州の戦い(주슈노 다타카이)

1592년

처음 게시 2026년 10월 11일 · 마지막 수정 2026년 10월 11일 · 편집 테라 스크립타

AI 작성 · AI 사실 검수

Claude가 쓰고 Codex(gpt-6.1-sol)가 공개 출처와 대조해 사실·연대·인용과 영어·한국어판을 독립 검수했습니다. 사람 전문가의 검토는 거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AI 검수: 2026-10-11. 찾아서 고친 문제 22건.

한 문장으로

1592년 음력 4월 28일(양력 6월 7일), 험한 고개 조령을 지키지 않고 충주 근처 넓은 들에서 싸우기로 한 조선의 신립이 기병을 중심으로 한 8천 명가량의 군사를 강을 등지고 탄금대 앞에 벌여 세웠다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번대에 포위되어 전멸한 싸움으로, 이틀 뒤 선조는 도성을 떠났고 일본군은 부산에 처음 상륙한 지 20일쯤 만에 한양에 들어왔어요.

탄금대 전투(충주 전투, 1592)
이미지: 일본, 조선왕조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1592년 봄, 일본의 큰 군대가 바다를 건너 조선의 남동쪽 부산에 내렸어요. 그리고 임금이 사는 수도 한양(지금의 서울)을 향해 북쪽으로 올라왔지요. 고을이 하나씩 차례로 무너졌어요.

임금은 이름난 장군 신립을 보내 적을 막게 했어요. 신립은 북쪽 국경에서 말을 탄 침입자들을 물리쳐 영웅이 된 사람이었고,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을 무척 믿었어요. 그는 군사를 모아 서둘러 충주로 내려갔어요.

일본군과 충주 사이에는 높은 산이 있었고, 그 산을 넘는 좁은 고갯길을 조령(새재)이라고 불렀어요. 한 부하는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저 좁은 산길을 막읍시다!” 하고 말했어요. 하지만 신립은 산에서는 말이 싸울 수 없으니 넓은 들판에서 싸우는 편이 낫다고 대답했어요. 그리고 강을 등진 탄금대라는 언덕 앞에 군사를 벌여 세웠어요.

그런데 그 들판에는 물이 질척한 논이 많아서 말이 제대로 달리지 못했어요. 일본군은 조총이라는 총을 쏘며 여러 방향에서 한꺼번에 몰려왔어요. 조선군은 둘러싸여 지고 말았고, 많은 군사가 강물에 빠져 죽었어요. 신립도 세상을 떠났는데, 옛 조선 책에는 그가 강물에 몸을 던졌다고 적혀 있어요.

이틀 뒤 임금은 도성을 떠났고, 곧 일본군이 한양에 들어왔어요. 부산에 내린 지 3주쯤 만이었지요. 신립이 산길을 막았어야 했는지는 지금도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어요. 오늘날 탄금대는 조용한 공원이에요. 이름은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는 뜻인데, 아주 먼 옛날 우륵이라는 이름난 음악가가 그곳에서 가야금을 탔다는 이야기가 전하기 때문이에요.

한눈에 보기

무엇
임진왜란 1차 침략 때 충주 근처 들판에서 벌어진 전투로, 조선군의 전멸로 끝났다
언제
1592년 음력 4월 28일(양력 1592년 6월 7일). 한국어 위키백과는 일본 측 날짜로는 27일이라고 적는다
장소
충청도 충주 고을에서 서북쪽으로 4km쯤 떨어진, 달천이 남한강에 합쳐지는 곳의 언덕 탄금대 앞. 오늘날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조선 측
도순변사 신립,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 그리고 상주에서 막 패하고 합류한 순변사 이일
일본 측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번대. 쓰시마의 소 요시토시와, 현대 서술에 따르면 마쓰라 시게노부·아리마 하루노부·오무라 요시아키·고토 스미하루(일본어 위키백과 표기)
병력
조선: ‘겨우 8천 명’(『선조수정실록』). 『징비록』의 충청도 군사를 더한 최대 1만 6천 명은 한국어 위키백과의 추정으로, 중복 계산일 수 있다. 일본: 제1번대 약 1만 8,700명(새뮤얼 홀리, 영어 위키백과 인용)
결과
일본군 승리. 신립·김여물·이종장 전사. 선조가 6월 9일 한성을 떠났고, 일본군이 6월 11–12일 도성에 들어왔다
기억
도성으로 가는 길을 열어 준 패전이자, 조령을 지켰어야 했느냐는 오랜 논쟁의 출발점. 탄금대는 오늘날 국가지정 명승이다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쉬움

탄금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충주 전투, 흔히 싸움이 벌어진 언덕 이름을 따 탄금대 전투라고 부르는 이 싸움은 1592년 음력 4월 28일, 양력으로는 6월 7일에 벌어졌다. 불과 보름 전인 같은 달 13일(양력 5월 23일)에 일본군 선봉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조선 조정이 침략군을 도성 한성(지금의 서울)에 닿기 전에 막으려 한 가장 중요한 시도였다.

한쪽은 부산에서부터 침략의 선봉에 섰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번대였고, 다른 쪽은 조선에서 가장 이름난 장수 가운데 한 사람인 신립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은 신립의 군사를 겨우 8천 명으로 적으며, 그 중심은 기병이었다. 신립은 산길 조령을 지키는 대신, 달천이 남한강에 합쳐지는 탄금대 앞 들판에 물을 등지고 진을 쳤다. 일본군은 여러 갈래로 다가와 조총(화승총)을 쏘며 양옆에서 조여 들어왔고, 질척한 논이 기병의 발을 묶었으며, 조선군은 무너졌다. 많은 군사가 물에 빠져 죽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신립과 종사관 김여물은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 적 수십 명을 죽인 뒤 함께 물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패전 소식은 29일 저녁 조정에 닿았고, 30일(양력 6월 9일) 새벽 선조는 한성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으며, 음력 5월 2일(양력 6월 11일) 고니시 부대가 도성에 들어왔다. 상륙한 지 20일쯤 만이었다. 그 뒤로 신립의 선택을 두고 논란이 이어져 왔다. 『징비록』을 쓴 재상 유성룡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뒤에 그런 요새를 지키지 않은 것을 탄식했다고 적었다. 한편 현대의 일부 연구자는 신립이 가진 병력과 시간을 생각하면 들판을 고른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반론한다.

[7][3][10][11][12][13][21][34][36]

쉬움

부산에서 상주까지: 보름 동안 이어진 패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약 1만 8,700명의 제1번대는 음력 4월 13일(양력 1592년 5월 23일) 부산에 상륙했다. 이튿날 아침 부산진성이, 그다음 날 동래성이 함락되었고, 지휘관 정발과 송상현이 전사했다. 며칠 사이에 가토 기요마사의 제2번대와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번대도 상륙했다. 유성룡의 『징비록』은 세 갈래 진격로를 적는다. 밀양·대구를 거쳐 상주에 이르는 가운데 길, 경주 등을 거쳐 문경에서 가운데 길과 합친 뒤 조령을 넘어 충주로 들어간 동쪽 길, 그리고 김해에서 성주·지례를 거쳐 영동으로 충청도에 들어가 청주로 향한 서쪽 길이다.

한성의 조정은 서둘러 대응했다.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가운데 길로 내려보내고, 다른 장수들을 동쪽과 서쪽 길로 보냈으며, 변기에게는 조령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거느릴 군대가 없었다. 『징비록』에 따르면 이일이 도성에서 정병 300명을 데려가려 했으나 병적에는 서리·유생·시정의 백성이 가득했고, 많은 이가 나와 빼 달라고 호소했다. 결국 이일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머지는 다른 장수가 이끌고 뒤따르게 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이일이 날랜 기병과 군관 60여 명을 데리고 떠났다고 적는다.

지방의 방어 체제는 사정을 더 나쁘게 만들었다. 당시의 방어 계획인 제승방략(制勝方略)에 따라 경상감사는 각 고을 군사에게 정해진 곳에 모여 도성에서 내려올 장수를 기다리게 했다. 문경 등지의 군사들은 대구 근처 들판에서 노숙했는데, 『징비록』에 따르면 큰비가 내리고 군량이 떨어지고 적이 다가오자 장수가 도착하기도 전에 밤사이 흩어져 버렸다.

이일이 상주에 도착했을 때 목사는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그는 농민 수백 명을 긁어모았다. 『징비록』은 데려온 장졸을 합쳐도 8–9백 명에 불과했다고 하고, 『선조수정실록』은 6천여 명으로 적는다. 척후도 없었다. 『징비록』에 따르면 어느 날 저녁 이웃 개령 사람이 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리자 이일은 민심을 어지럽힌다며 그를 가두었다가 이튿날 아침 처형했고, 곧이어 상황을 살피러 간 군관이 다리 밑에 숨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선조수정실록』은 처형을 알려 온 날 저녁의 일로, 매복 장소를 숲으로 적는다). 이어 일본군이 총을 쏘며 좌우에서 에워쌌다. 『징비록』은 조선군의 화살이 수십 걸음 만에 땅에 떨어졌다고 적는다. 이일은 말과 옷을 버리고 달아나 문경에 이르렀고, 다시 신립에게 합류했다. 이 전투는 흔히 음력 4월 25일(양력 6월 4일)로 적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상주전투」 항목은 전투를 이일이 상주에 도착한 날과 같은 23일로 적고, 전투 일람표는 24일로 적는다.

[1][2][4][12][18][25][22][36][21]

쉬움

신립: 북방 국경에서 이름을 떨친 기병 장수

신립은 1546년 평산 신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그는 글보다 무예를 좋아해 22세에 무과에 급제했고, 도성의 무관직과 진주판관 등을 거친 뒤 조선이 여진 부족들과 맞닿아 있던 두만강 가 북방 국경에서 근무했다.

그가 이름을 떨친 것은 1583년이었다. 그해, 일찍이 조선 조정에서 관직과 녹봉을 받던 여진의 우두머리 니탕개(이탕개라고도 쓴다)가 경원 일대의 반란에 호응했고, 국경의 진보가 잇따라 함락되었다. 온성부사였던 신립은 다른 장수들과 힘을 합쳐 훈융진을 에워싼 적을 깨뜨리고 50여 명의 머리를 벤 뒤, 두만강 건너까지 추격해 그 근거지를 소탕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같은 해 5월 종성에 쳐들어온 니탕개의 1만여 군대도 물리쳤고, 평소 철기(鐵騎) 500여 명을 훈련시켰다고 덧붙인다. 『징비록』에는 그가 겨우 10여 기로 돌격해 종성을 에워싼 여진을 물러가게 했다고 나온다. 조정은 1584년 그를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삼았다.

그 뒤 경력에는 굴곡이 있었다. 1587년 파직되었다가 다시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올랐고, 1588년 수졸(戍卒)을 처형한 일로 한직으로 옮겨졌으며,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한성판윤이 되었다. 유성룡은 당시 조정의 무장 가운데 신립과 이일이 가장 이름났다고 쓰면서도, 신립이 본래 잔혹하다는 평판이 있어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웠다고 적었다.

『징비록』에는 의미심장한 대화가 실려 있다. 1592년 음력 4월 1일, 침략 열이틀 전에 신립이 유성룡을 찾아왔다. 유성룡이 일본군의 형세를 묻자 신립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유성룡이 왜군은 전에는 근접 무기에 의존했지만 이제는 조총까지 갖추었다고 경고하자 신립은 “조총이 있다 한들 쏠 때마다 맞힐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유성룡은 그를 적을 얕보다가 패망한 중국 옛 장수 조괄(趙括)에 견주었다. 이 이야기는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 아는 사람이 전쟁 뒤에 쓴 것이므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14][17][12][27]

쉬움

조령이냐, 들판이냐

패전 소식이 한성에 이르자 신립은 이일이 뒤를 받쳐 줄 군대도 없이 홀로 내려갔으니 싸움에 능한 장수를 서둘러 뒤따라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선조는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고 보검을 내리며 “이일 이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베어라.”라고 했다. 1577년 알성 문과에 장원 급제한 문신으로 당시 옥에 갇혀 있던 김여물은 유성룡이 자신이 데려가 쓰려고 청해 풀려났는데, 신립이 그를 자기 종사관으로 달라고 청하자 임금이 허락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신립은 도성의 무사와 활 잘 쏘는 자 수천 명을 거느리고 조정 관원들이 내놓은 전마를 받아 떠났으며, 인근 고을의 군사를 거두어도 겨우 8천 명이었다. 『징비록』은 충주에 이르자 충청도 여러 고을의 군사 8천여 명이 와서 모였다고 적는다.

상주에서 충주로 가는 길은 문경 위쪽의 가파른 고개 조령에서 소백산맥을 넘었다. 『징비록』에 따르면 일본군의 가운데 길과 동쪽 길은 문경에서 합친 뒤 이 고개를 넘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신립은 충주 근처 단월역에 군사를 머물게 하고 몇 사람만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 형세를 살폈다. 그때 상주에서 패한 이일이 이르러 꿇어앉아 죽여 달라고 청했다. 적의 형세를 묻자 이일은 “훈련도 받지 못한 백성으로 대적할 수 없는 적을 감당하려니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답했다. 김여물은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맞부딪치기 어렵습니다. 이곳의 험한 길목을 지켜 막아야 합니다.”라고 했고, 높은 언덕을 차지해 역습하자고도 했다. 신립은 둘 다 받아들이지 않고 “이곳은 기병을 쓸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워야 한다.”라고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충주목사 이종장도 이 작전에 반대했다고 적는다.

『징비록』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신립은 본래 조령을 지키려 했으나 이일의 패전 소식을 듣고 담력을 잃어 충주로 돌아갔고, 이일과 조령을 지키던 변기 등을 충주로 불러들여 “험한 곳을 버리고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투 전날도 일이 꼬였다. 27일(양력 6월 6일) 초저녁, 신립이 믿던 군관이 적이 이미 고개를 넘었다고 몰래 알렸다. 신립은 갑자기 성을 빠져나가 군중을 술렁이게 했다가 밤늦게 몰래 숙소로 돌아왔고, 이튿날 아침 그 군관이 헛소문을 퍼뜨렸다며 처형했으며, 조정에는 적이 아직 상주를 떠나지 않았다고 장계를 올렸다. 척후로 앞에 나가 있던 이종장과 이일은 적에게 길이 막혀 더 이상 보고를 보내지 못했다. 패배를 예감한 김여물은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삼도(三道)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오는 이가 없다. 남아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큰 뜻이 재가 되었으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일본군 쪽을 보면, 『선조수정실록』은 그들이 조령 어귀에 이르러 복병이 있을까 의심해 거듭 정찰했으나 군사 하나 없이 조용하자 비로소 진군했다고 적고, 『징비록』은 문경 남쪽의 옛 고모성에서 그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지나갔다”고 덧붙인다.

[3][7][9][12][14][15][16]

쉬움

전투: 1592년 6월 7일

탄금대는 충주 서북쪽 가장자리, 달천이 남한강에 합쳐지는 곳의 나지막한 언덕이다. 『선조수정실록』은 충주 읍내에서 5리쯤 떨어졌다고 하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충주성 서북쪽 4km 지점으로 적는다. 신립은 이곳에 물을 등지고 진을 쳤는데, 이를 ‘강을 등진 진’, 곧 배수진(背水陣)이라고 한다. 『징비록』은 그 자리를 “탄금대 앞 두 물 사이”로, 좌우에 논이 많고 물과 풀이 뒤섞여 “말을 달리기에 불편한 곳”으로 묘사하며, 『선조수정실록』도 앞에 논이 많았다고 적는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28일(양력 6월 7일) 새벽 일본군은 길을 나누었다. 본대는 곧바로 충주성으로 들어가고, 좌군은 달천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상류에서 강을 건넜는데, “창칼이 햇빛에 번쩍이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신립이 충주성 쪽으로 말을 달리자 군사들은 대열을 이루지 못했고, 성안의 적이 호각을 세 번 불고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이미 사방이 포위된 뒤였다. 충주성 이야기가 없는 『징비록』은 적이 단월역에서 길을 나누어, 한 길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한 길은 강을 따라 내려왔으며 “포성이 땅을 울리고 먼지가 하늘에 닿았다”고 하고, 신립이 몸소 적진에 돌격하려 두 번 시도했으나 뚫지 못했다고 적는다.

새뮤얼 홀리를 따르는 영어권 현대 서술은 일본군 배치를 더 자세히 그린다. 고니시와 소 요시토시가 약 1만 5천 명으로 좌익과 중앙을 맡고, 아리마 하루노부·오무라 요시아키와 고토 열도의 영주(영어 위키백과는 고토 모토쓰구, 일본어 위키백과는 고토 스미하루로 적는다)가 약 3,700명으로 오른쪽에서 크게 호를 그리며 펼쳐졌으며, 조총수들은 조선군 활의 사거리 밖에서 쏘고 창병들이 기병의 돌격을 막았다는 것이다. 일본군의 병력과 배치에 관한 이런 세부는 조선 기록이 아니라 후대의 재구성에서 나온 것이다.

끝은 강 쪽으로의 패주였다. 『선조수정실록』은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뛰어들어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었다”고 하고, 『징비록』은 모든 군사가 강으로 뛰어들어 “시체가 강을 덮고 떠내려갔다”고 적는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신립과 김여물은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 적 수십 명을 죽인 뒤 함께 물에 뛰어들었다. 따라왔던 누이의 아들이 달아나려 하자 신립은 “네가 어찌 살려 하느냐!” 하고 그의 머리채를 잡아 함께 빠져 죽었다. 빠져나온 장사는 두셋에 불과했다. 『징비록』은 더 짧게, 신립이 강으로 돌아가 물에 빠져 죽었고 김여물은 어지러운 군사들 속에서 죽었다고 적는다. 이종장은 아들과 함께 전사했고, 이일은 동쪽 산골짜기로 빠져나갔다. 현대 서술이 인용하는 일본 측 기록은 수급 약 3,000과 포로 수백 명을 주장한다. 대군을 믿고 피란하지 않았던 충주의 백성과 관속은,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다른 고을보다 더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7][8][12][13][14][16][22][23][24][36]

중급

탄금대 이후: 임금은 도성을 떠나고 한성이 무너지다

한성 사람들은 날마다 승전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징비록』에 따르면 임금이 떠나기 전날 저녁, 벙거지를 쓴 세 사람이 말을 달려 동쪽 숭인문으로 들어왔다. 소식을 묻자 그들은 순변사 군관의 종이라며 “어제 순변사가 충주에서 패해 죽고 군사가 모두 흩어졌다.”라고 했다. 순식간에 온 도성이 술렁였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29일(양력 6월 8일) 저녁 선조는 대신들을 불렀고, 대신들은 잠시 평양으로 옮겨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자고 했다. 한 관원이 도성을 지키자고 간청하자 유성룡은 그 말이 충성스럽지만 형세가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 왕자들을 여러 도에 보내 군사를 모으게 해, 임해군은 함경도로, 순화군은 강원도로 떠났다. 그날 밤늦게는 “적이 오늘내일 도성에 들어올 것”이라는 이일의 장계가 도착했다.

30일(양력 6월 9일) 새벽, 선조와 세자는 쏟아지는 비 속에 말을 타고 궁을 나섰다. 『선조실록』은 따르는 종친과 문무관이 100명도 되지 않았고 궁인들이 통곡하며 걸어서 뒤따랐다고 적는다. 일행이 도성을 빠져나갈 때 유성룡은 남대문 안 큰 창고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았다. 일행은 날이 저물 무렵 임진강을 건넜고, 강가 건물의 목재를 불태워 어둠 속에서 갈 길을 밝히는 동시에 적이 뗏목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그 뒤 며칠 사이에 궁궐을 비롯한 도성 곳곳이 불탔는데, 누가 불을 질렀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일본군은 빠르게 뒤따랐다. 『징비록』에 따르면 그들은 충주에서 다시 두 길로 나뉘어, 한 부대는 여주로 가서 강을 건너 양근 쪽으로, 다른 부대는 죽산·용인을 거쳐 한강 남쪽으로 나아갔다. 조정은 김명원에게 한강을 지키게 했지만,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그에게도 군사가 거의 없었다. 고니시 부대는 음력 5월 2일(양력 6월 11일) 무방비의 도성에 들어왔고, 가토 부대가 하루 뒤 뒤따랐다. 『징비록』은 입성을 3일로 적는다. 부산에 상륙한 지 20일쯤 지난 때였다.

전쟁과 외교가 나란히 움직였음을 보여 주는 일도 있었다. 상주 전투 뒤 고니시는 사로잡은 조선 역관 경응순을 풀어 보내며, 조선이 강화할 뜻이 있으면 이덕형을 28일 충주에서 만나게 하라는 서신을 전하게 했다. 이덕형은 길을 떠났으나 충주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응순을 먼저 보냈는데, 경응순은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에게 살해되었고 이덕형은 발길을 돌렸다. 전쟁은 그 뒤로도 6년 넘게 이어졌다.

[12][5][6][10][11][21][13][36]

중급

조선군은 왜 그렇게 빨리 무너졌나

패배를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고, 사료들도 여러 원인을 가리킨다. 첫째는 군대 자체였다. 신립의 군사는 며칠 만에 모은 사람들이었다. 도성의 활 쏘는 무사와 자원자, 인근 고을의 군사, 그리고 『징비록』에 따르면 충청도 여러 고을의 군사였다.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를 누렸고, 이일이 겪었듯 병적은 싸울 수 없거나 싸우려 하지 않는 사람으로 채워져 있었다. 조령에서 이일이 한 말, “훈련도 받지 못한 백성으로 대적할 수 없는 적을 감당하려니”는 신립의 군대에도 그대로 들어맞았다.

둘째는 정보였다. 상주에서 이일은 적이 왔다고 알린 사람을 처형했고, 충주에서 신립은 적이 조령을 넘었다고 보고한 군관을 처형했으며 척후는 적에게 막혔다. 두 전투 모두 조선 지휘관이 적의 위치를 알기도 전에 일본군이 들이닥쳤고, 두 번 다 여러 방향에서 한꺼번에 공격해 왔다.

셋째는 무기와 전투 경험이었다. 일본군은 백 년 넘게 이어진 일본의 내전 속에서 단련된 군대였고, 조총을 창·칼과 함께 운용했다. 조선 측 기록에서 일본군의 총격은 효과를 냈지만 조선군의 활쏘기는 실패했다. 『징비록』은 상주에서 조선군의 화살이 수십 걸음 만에 떨어졌다고 하고, 『선조수정실록』은 겁에 질린 군사들이 시위를 한껏 당기지도 못했다고 적는다. 현대의 재구성은 여기에 조총수들이 조선군 활의 사거리 밖에서 쏘았다고 덧붙인다. 기병 돌격에 대한 신립의 믿음은 북방에서 여진을 상대로 거둔 승리에서 나왔지만, 탄금대의 논은 기병에게 필요한 속도를 빼앗았고, 등 뒤의 강은 물러나 대열을 다시 갖출 여지를 없앴다.

전쟁 뒤에 이 일을 돌아본 유성룡은 장수들만 탓하지 않았다. 그는 신립을 보내 이일을 뒷받침하게 한 조정의 계획 자체는 잘못이 아니었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잘못은 경상도의 수군과 육군 지휘관들이 달아나거나 싸우지 않아, 왜적이 “수백 리 사람 없는 땅을 밟으며 밤낮으로 북상”해 열흘도 안 되어 상주에 이르렀고, 두 장수가 힘을 합치기도 전에 이일이 먼저 패한 데 있었다. 1611년 황중윤의 문학 작품 「달천몽유록」은 한발 더 나아가, 나라에 훈련된 군사가 없게 만든 병제를 탓했다.

[3][4][7][12][20][22][28]

중급

같은 때 세계에서는(1592년 6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직접 조선으로 건너오지 않았다. 그는 3월 말 교토를 떠나, 일본력 4월 25일(양력 1592년 6월 5일), 곧 탄금대 전투 이틀 전에 규슈 히젠 해안의 새 본영 나고야성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바다 건너 장수들에게 명령을 보냈다.

멀리 서쪽에서는 명나라가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1592년 3월 몽골과 맞닿은 변경 영하(닝샤)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5월 중순부터 명군이 성을 에워쌌다. 탄금대 전투 일주일도 안 남은 6월 1일, 반란군과 몽골 기병 2천여 명이 포위군을 공격했다가 화포에 밀려났다. 조선에서 전쟁이 터지자 명 조정은 장수들에게 포위를 서둘러 끝내라고 재촉했다. 이 연결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영하의 싸움은 1592년 명군을 묶어 두었고, 10월 성이 함락되자 지휘관 이여송과 많은 병력이 조선으로 보내졌다.

다른 곳의 같은 해 사건은 조선과 관계가 없으며, 시대 분위기를 보여 주려고 덧붙인다. 1592년 3월 3일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칙허장을 내려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더블린 대학교의 유일한 칼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을 세웠다.

[30][31][32][33]

심화

신립은 조령을 지켰어야 했나: 당대와 오늘의 평가

비판의 전통은 서로 가까운 두 문헌에서 시작한다. 『징비록』은 “뒤에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적을 쫓아 조령을 지나다가 ‘이런 험한 곳이 있는데도 지킬 줄 몰랐으니 신 총병은 지모가 없다고 할 만하다’라고 탄식했다”고 적고, 『선조수정실록』도 거의 같은 말로 이 일화를 옮긴다. 유성룡은 여기에 자신의 평을 붙였다. 신립은 “날래고 용감해 한때 이름을 얻었으나 계책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며, “장수가 군사를 알지 못하면 나라를 적에게 내준다”는 옛말을 인용한다. 조령을 지키자는 김여물의 건의, 작전에 반대한 이종장의 간언, 탄금대의 질척한 땅, 정찰의 실패는 모두 이 평가를 뒷받침한다.

반대쪽 논거도 있다. 『선조수정실록』이 전하는 신립 자신의 이유는 자기 군대의 힘이 기병에 있는데 고갯길에서는 말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군사는 대부분 훈련받지 않은 이들이어서, 대구에 모였던 경상도 군사처럼 산속에서 흩어져 버렸을 수도 있다. 시간도 모자랐다. 흔히 25일로 보는 이일의 상주 패전과 27일 일본군의 조령 통과 사이는 이틀 남짓에 불과했다. 다만 변기가 그보다 앞서 조령 수비를 명령받았으므로, 신립이 고개 방어를 준비할 수 있었던 시간이 모두 얼마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홀리를 따르는 영어권 서술은 이일이 나타나면서 조령을 요새화하려던 신립의 계획이 무산되었다고 본다. 역사학자 이상훈은 2013년 논문에서 조령·단월역·충주성·탄금대 네 곳을 비교한 뒤, 일본군의 진입로를 제한하고 바람으로 조총의 효과를 떨어뜨리며 기병을 쓸 수 있는 탄금대가 당시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주장했다. 영어 위키백과의 신립 문서는 강을 등진 것이 신병들의 도주를 막으려는 의도였다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현대 분석가들’의 추측도 소개하지만 구체적인 근거는 밝히지 않는다.

어느 쪽도 증명할 수는 없다. 조령에서 버텼다면 제1번대를 늦출 수는 있었겠지만, 일본군은 충청도를 지나는 서쪽 길을 포함해 여러 길로 진격하고 있었고, 지연이 곧 승리는 아니다. 한편 들판도 신립이 기대한 이점을 주지 못했다. 신립을 비판하는 사료에도 저마다의 시각이 있다. 유성룡은 전쟁 수행에 책임이 있던 핵심 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반성과 경계의 책을 썼고, 『선조수정실록』은 뒤의 정파가 편찬했으며 『징비록』에서 많은 내용을 가져왔다. 균형 잡힌 평가는, 전장 선택이 중요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패배는 준비되지 않은 군대, 정보의 실패, 그리고 전쟁 경험이 훨씬 많은 일본군에서도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논쟁 자체도 일찍 시작되었다. 전투 8년 뒤인 1600년과 19년 뒤인 1611년에 윤계선과 황중윤이 각각 「달천몽유록(達川夢遊錄)」이라는 몽유록 소설을 썼다. 황중윤의 작품에서 신립의 혼령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묻고, 사람들이 지혜가 없었던 탓이라고 한다는 말을 듣자, 탄금대의 배수진은 결전의 의지를 보인 것이며 정예병이 없는 제도가 자신을 패장으로 만들었다고 답한다.

[12][7][9][15][16][22][26][34][29][20]

중급

탄금대를 기억하는 방식

탄금대(彈琴臺)라는 이름은 ‘가야금을 타던 대’라는 뜻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이름은 6세기에 신라로 귀화한 가야의 악성 우륵에 얽힌 전승에서 나왔다. 그의 음악에 감동한 진흥왕이 그를 충주에 살게 했고, 우륵은 제자들에게 가야금과 노래, 춤을 가르치며 틈이 나면 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탔는데, 언덕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1592년의 기록이 아니라 지역 전승에 속하지만, 이곳이 음악가와 장수를 함께 기리는 까닭을 알려 준다.

신립은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김여물은 1788년 장의(壯毅)라는 시호를 받았고, 순조 때에는 충주 달천의 옛 싸움터에서 그와 신립 등 순절한 이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두 집안은 그 뒤에도 이름을 떨쳤다. 김여물의 아들 김류는 뒤에 영의정이 되었고, 신립의 아들 신경진은 1623년 인조를 왕위에 올린 반정에 가담했다.

탄금대는 1976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국가지정 명승으로 승격되었다. 언덕 위에는 신립장군전적비(1978), 우륵 추모비(1977), 신립의 순절을 기리는 비와 비각이 있다. 지역 전승은 신립이 강에 뛰어든 곳으로 열두대라는 벼랑을 가리키지만, 한국어 위키백과는 기록에는 강의 다른 여울 이름이 나온다고 지적한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에 있다.

[19][14][15][27][23]

심화

사료와 그 한계: 날짜, 숫자, 신립의 죽음

가장 자세한 조선 측 서술은 당시 재상 유성룡이 전쟁 뒤에 쓴 『징비록』과, 1640년대에 편찬을 시작해 1657년 완성된 『선조수정실록』이다. 둘은 서로 독립된 증언이 아니다. 전쟁 첫 몇 주에 관한 『선조수정실록』의 여러 대목, 예컨대 남쪽으로 보낸 장수 명단이나 이여송 일화는 『징비록』과 거의 글자 그대로 같고, 여기에 김여물의 건의나 충주성에서의 공격 같은 세부가 더해져 있다. 원래의 『선조실록』은 이 몇 주에 관해 기록이 짧다. 뒤에 나온 『연려실기술』 같은 편찬서나 전란 기록 『난중잡록』은 세부를 더하지만, 그중에는 확인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날짜도 조심해야 한다. 조선과 일본은 모두 태음태양력을 썼지만 두 나라 달력이 하루씩 어긋나기도 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이 전투를 조선 날짜로 28일, 일본 날짜로 27일로 적는다. 이 글의 양력 날짜는 한국천문연구원의 음양력 변환표로 환산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탄금대전투」 항목은 신립이 조령을 살핀 날을 24일, 탄금대에 진을 친 날을 26일로 적고, 「상주전투」 항목은 이일의 상주 도착과 전투를 모두 23일로 적는다. 전투 일람표는 24일, 대부분의 서술은 25일로 본다.

숫자는 더 크게 엇갈린다. 조선군에 대해 『선조수정실록』은 8천 명, 『징비록』은 충주에서 합류한 충청도 군사 8천여 명을 말하며, 한국어 위키백과는 둘을 합쳐 최대 1만 6천 명으로 보지만 이는 추정에 불과하다. 『선조수정실록』의 8천 명에는 이미 인근 고을에서 거둔 군사가 포함되어 있어, 두 숫자가 일부 같은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뒤의 일부 문헌에 나오는 훨씬 큰 숫자를 과장으로 본다. 일본군 제1번대 약 1만 8,700명이라는 숫자는 히데요시 원정군 편성에 관한 현대의 표에서 나온 것이다. 손실은 더욱 불확실하다. 수급 약 3,000과 포로 수백 명이라는 일본 측 주장, 한국어 위키백과가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으로 소개하는 약 8,000명 전사, 영어 위키백과의 일본군 사상 ‘약 150명’은 모두 이 글에서 검토한 자료만으로는 독립적으로 확정할 수 없다.

신립의 죽음조차 여러 갈래로 전한다. 조선 기록은 그가 강에서 죽었다는 데에는 일치한다. 『선조수정실록』은 물에 뛰어들었다고, 『징비록』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하며, 이 글은 이 전통을 따른다. 그러나 한국어 위키백과는 후대 일본 역사서인 라이 산요의 『일본외사』가 그를 베었다고 적었다는 점, 그리고 일본의 한 젊은 무사가 살려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한 조선의 고위 지휘관을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는 프로이스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1984년 예천에서 채록된 민간 설화에도 그가 목을 베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홀리를 따르는 영어 위키백과는 그가 전장을 빠져나간 뒤 근처에서 물에 몸을 던졌다고 쓴다. 가토 기요마사가 고니시의 실패를 바라며 일부러 뒤에 머물렀다는 이야기처럼 영어권 서술에 나오는 몇몇 일화는 조선 기록에 보이지 않는 일본 측·선교사 자료에 기대고 있으므로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12][3][2][7][9][29][23][22][26][13][18][25][36]

핵심 개념

고개냐 들판이냐
신립은 부하들의 건의대로 좁은 조령을 막을지, 기병이 움직일 수 있는 들판에서 싸울지 골라야 했고, 탄금대 앞 들판을 택했다.
기병 대 조총
신립의 자신감은 여진을 상대로 한 기병 승리에서 나왔지만, 일본군은 조총과 창·칼을 함께 썼고 질척한 논이 기병의 발을 묶었다.
배수진
물을 등지고 진을 치면 물러날 길이 없다. 탄금대에서는 이 때문에 패배가 몰살로 이어져 군사들이 강으로 내몰렸다.
정보의 실패
상주와 충주에서 조선 지휘관들은 경고를 무시하고 그것을 전한 사람을 처형했다. 상주의 이일에게는 척후가 없었고, 충주에서는 신립의 척후가 적에게 막혀, 일본군은 지휘관이 위치를 알기도 전에 여러 방향에서 들이닥쳤다.
도성까지 20일
신립 군의 궤멸로 길이 열렸고, 선조는 이틀 뒤 한성을 떠났으며 일본군은 부산 상륙 20일쯤 만에 도성에 들어왔다.
사료 속의 결과론
이여송의 탄식을 비롯한 이 전투에 대한 유명한 평가는 전쟁의 결말을 아는 전쟁 뒤의 문헌에서 나왔고, 그 문헌들은 서로 많은 문장을 공유한다.

기록

  1. 1546년 — 신립이 평산 신씨 집안에서 태어난다.
  2. 1583년 — 온성부사 신립이 두만강 가에서 일어난 니탕개의 여진 반란을 막아 이름을 떨친다.
  3. 1584년 — 신립이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된다.
  4. 1592년 —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3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번대가 부산에 상륙하고, 이후 이틀 사이에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함락된다.
  5. 1592년 — 흔히 쓰는 날짜로 음력 4월 25일(양력 6월 4일), 이일이 상주에서 패하고 달아나 신립에게 합류한다.
  6. 1592년 — 음력 4월 27일(양력 6월 6일) 일본군이 아무 저항 없이 조령을 넘어 충주 근처 단월역에 이른다.
  7. 1592년 — 음력 4월 28일(양력 6월 7일) 탄금대 전투. 신립·김여물·이종장이 전사한다.
  8. 1592년 — 음력 4월 30일(양력 6월 9일) 선조가 새벽에 한성을 떠난다.
  9. 1592년 — 음력 5월 2–3일(양력 6월 11–12일) 고니시 부대, 이어 가토 부대가 한성에 들어온다.
  10. 1600년 — 윤계선이 탄금대 패전을 다룬 몽유록 「달천몽유록」을 짓는다. 1611년 황중윤도 같은 이름의 작품을 짓는다.
  11. 1788년 — 김여물이 장의(壯毅)라는 시호를 받는다.
  12. 2008년 — 충주 탄금대가 국가지정 명승이 된다.

용어 풀이

조령(鳥嶺, 새재)
문경 위쪽의 고개로, 경상도에서 충주를 거쳐 한성으로 가는 큰길이 이곳을 넘었다.
탄금대(彈琴臺)
충주 가장자리,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의 언덕. ‘가야금을 타던 대’라는 뜻이다.
도순변사·순변사
위급할 때 도성에서 내려보낸 야전 지휘관. 신립은 도순변사, 이일은 순변사였다.
배수진(背水陣)
강을 등지고 친 진. 군사들이 물러날 길이 없게 된다.
제승방략(制勝方略)
1592년 당시 조선의 방어 계획. 각 고을 군사가 정해진 곳에 모여 도성에서 내려올 장수를 기다리게 했다.
조총(鳥銃)
화승총. 조선 측 기록은 일본군의 이 무기를 ‘새를 쏘는 총’이라는 뜻의 조총이라 불렀다.
단월역(丹月驛)
조령에서 오는 길목, 충주 근처의 역참. 신립이 처음 군사를 머문 곳이자 일본군이 진격해 온 곳이다.
『징비록(懲毖錄)』
유성룡이 전쟁 뒤 후세에 경계로 삼으려고 쓴 임진왜란 회고록.
『선조수정실록』
선조 시대 공식 연대기를 고쳐 1657년 완성한 책으로, 전쟁 첫 몇 주를 자세히 전한다.

묻고 답하기

신립은 왜 조령을 지키지 않았나요?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그는 고갯길에서는 기병을 쓸 수 없으니 들판에서 싸우겠다고 했어요. 『징비록』은 이일의 상주 패전 소식을 듣고 담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해요. 그 선택이 합리적이었는지는 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려요.

신립은 정말 강물에 몸을 던졌나요?

조선의 전통적인 이야기는 그래요. 『선조수정실록』은 그가 김여물과 함께 적 수십 명을 쏘아 죽인 뒤 물에 뛰어들었다고 하고, 『징비록』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해요. 뒤의 일부 일본 문헌과 한 민간 설화는 그가 목을 베였다고 해서, 자세한 사정은 확정할 수 없어요.

몇 명이 싸웠나요?

정확한 숫자는 없어요. 조선 측 기록은 신립의 군사를 8천 명쯤으로 적어요. 충청도에서 합류한 군사를 더한 최대 1만 6천 명이라는 추정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아요. 현대의 표는 고니시의 제1번대를 약 1만 8,700명으로 봐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정말 신립을 비판했나요?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이여송이 전쟁 중에 조령을 지나다가 이런 요새를 지키지 않은 것을 탄식했고, 『선조수정실록』도 같은 이야기를 옮겨요. 이 글에서 인용한 사료만으로는 그의 정확한 말을 독립적으로 확인할 수 없어요.

전투 뒤 도성은 얼마 만에 무너졌나요?

아주 빨랐어요. 전투는 6월 7일, 선조가 한성을 떠난 것은 6월 9일 새벽, 고니시 부대가 들어온 것은 6월 11일, 가토 부대는 6월 12일이었어요. 부산 상륙 20일쯤 만이었지요.

왜 이름이 탄금대인가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6세기에 충주에 자리 잡은 가야 출신 음악가 우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탔다는 전승에서 나온 이름이에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4월 14일 1번째 기사: 왜적이 부산진을 함락시켜 정발과 송상현이 전사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4월 14일 3번째 기사: 왜적이 밀양 지역에 쳐들어오다(이일 등을 내려보내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3.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4월 14일 6번째 기사: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고 보검을 내리다(김여물이 따르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4.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4월 14일 8번째 기사: 왜적이 상주에 침입하자 이일의 군대가 패주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5.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4월 14일 9번째 기사: 동지중추부사 이덕형을 왜군에 사신으로 보내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6.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4월 14일 10번째 기사: 도성의 수비를 의논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7.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4월 14일 16번째 기사: 적병이 충주에 침입하여 신립이 전사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8.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4월 14일 18번째 기사: 충주의 사민과 관속이 왜군 침입으로 심하게 죽음을 당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9.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4월 14일 19번째 기사: 왜적이 조령에 이르러 군대를 진출시키다(이여송의 탄식).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0.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4월 14일 23번째 기사: 상이 충주 패보를 듣고 서행할 계획을 의결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1.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4월 30일 1번째 기사: 새벽에 서울을 떠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2. 유성룡, 懲毖錄(징비록) 권1. 위키문헌(중국어)
  13. 탄금대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4. 신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5. 김여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6. 이종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7. 이탕개의 난(158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8. 상주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9. 충주 탄금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20. 달천몽유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21. 이장희, 임진왜란(전투 일람표 포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22. Battle of Chungju (충주 전투). 영어 위키백과
  23. 탄금대 전투. 한국어 위키백과
  24. 忠州の戦い(충주 전투). 일본어 위키백과
  25. Battle of Sangju (1592) (상주 전투). 영어 위키백과
  26. Sin Rip (신립). 영어 위키백과
  27. 신립. 한국어 위키백과
  28. Imjin War (임진왜란). 영어 위키백과
  29.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포함). 한국어 위키백과
  30. 名護屋城(히젠 나고야성). 일본어 위키백과
  31. Ordos campaign (1592) (1592년 오르도스 원정·영하의 난). 영어 위키백과
  32. Li Rusong (이여송). 영어 위키백과
  33. Trinity College Dublin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영어 위키백과
  34. 이상훈, 신립의 작전지역 선정과 탄금대 전투, 『군사』 87호, 275–302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3
  35. Samuel Hawley, The Imjin War: Japan’s Sixteenth-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quer China.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2005
  36. 음양력 변환 계산. 한국천문연구원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 지도로 돌아가기